하늘에 띄우는 편지
김윤선
비오는 날이면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옛날 쓰던 만년필에 잉크를 찍어서
눈동자를 마주 하며 대화 하듯 편지를 쓰고 싶다 /
겨울 땅속의 생명처럼/설렘으로 노란 싹을 틔우는 새싹 같은/ 마음의 문을 열고 싶다
심장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주머니를 열어/ 떨리는 가슴으로 다가가서 /해맑은 눈동자로 마주 하고 싶다.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씻고 /향기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좀 어눌하고 철없는 행동을 할 때도 /덩달아 박자를 맞춰주며 /큰 가슴으로 품어 주시며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다. /나이도 상관 없지만 산을 좋아하며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해변의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한 카페에서 /은은한 멜로디를 감상하며
산 봉우리에서 마음껏 소리도 질러보고 /마주 보며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도 참 좋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병환으로 아야아야 신음소리 를 낼때 마다 마음이 늘 우울 하였다. 밖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천근 감옥으로 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3학년때 12년의 병고를 치르고 돌아가셨다.
그 후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할 때 고향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쓰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군에 간 오빠들에게 또는 동생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편지를 썼다.
이십 대 초에 시골에 계시던 어머니와 동생들이 대신동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때 부터 나는 소녀 가장이 되었고 다섯명의 가족을 봉양해야 했다. 나는 힘겨운 수레를 어깨에 매고 힘든 생활을 했다. 그당시 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잡지사에 있었는데, 펜팔란에 내 이름을 실어 편지가 비처럼 쏟아져 왔다. 특히 월남 군인들에게 제일 많은 편지가 왔고 또 다른 군인들 대학생 일반 남자들 편지가 줄을 섰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월남 청룡부대 군인에게 한 장의 답장을 쓴 적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라는 편지 내용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통스러운 전쟁을 하며 달이 뜨면 고국이 생각난다는 말에 가슴이 찡 했다. 야자수 그늘 아래서 편지를 읽고 싶다는 그 말에 짠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작은 위로의 답장을 딱 한번 보냈는데 우리 집엔 매일 일기처럼 편지가 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우체부가 줄을 서니 어머니는 무슨 난리가 난것 처럼 딸 둘을 혼줄을 내렸다. 동생이 장난삼아 이름을 실었던 주소 때문이었지 내 탓은 아니라고 어머니께 사실을 말씀드리고 마무리를 했다.
어린 시절 난생 처음 객지 생활을 하면서 고향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학교에 가지못한 슬픔을 달랬다. 결혼을 하고도 동생과 오빠에게 안부 편지를 쓰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사십 대 부터 독서를 좋아하면서 편지를 쓰며 주경야독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훌륭하신 분들의 저서를 읽고 독후감과 함께 나의 생각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초등학교 학생부터 팔 십이 넘은 할아버지까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가끔 씩 월간지에 투고한 글이 실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편지가 왔다. 그중 해외에서도 존경하는 선생님들의 편지와 책이 부쳐 오니 마음을 담아서 답장을 보냈다.
종종 해외 소식과 우리나라의 소식 내 주위 장사하는 이야기 등 편지를 보내면 바로 답장이 왔다. 편지를 쓸 때 받을 때 십 오세 문학 소녀 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특히 미국에 계신 윤취선 할아버지(장노님)는 나의 편지를 받으면 30년 젊음을 만끽 한다며 행복해 하셨다.
아직도 설익은 풋과일 같은 나의 편지를 읽고 분에 넘치는 칭송으로 미국의 소식을 소상히 답장을 보내 주시기도 했다.
특히 조병화 박사님의 답장을 받으면 인삼 녹용을 먹은 듯이 가슴이 벅차기도 했다. 박사님의 그림엽서에 손수 답장을 쓰서 시집과 함께 보내 주시기도 했다. 늘 답장에서 열심히 살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부추겨 주셨다.
“꿈”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꿈을 이룬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십 년 동안 박사님께서 살아 계실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부산 롯데 화랑 시화전 때 초대를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애독자라고 소개를 시켜 주시고 함께 사진도 찍으며 반겨 주시던 사진과 편지를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장사를 하면서 아이들 도시락 여섯 개를 싸면서 밤에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순간순간 편지 쓰는 생각뿐이고 답장을 받으면 보약을 먹은 듯이 힘이 넘쳐났다. 항상 머릿속엔 몇 년 후에 집을 사고 몇 년 후에 아이들을 모두 잘 키워놓고 또 몇 년 후에 양가 부모님 노령으로 본인들의 갈 길을 가시면 학업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꿈” 과 희망이 가득 차 있었다.
인생을 단계별로 정하여 제1차 제2차 인생은 자식들과 집안 부모 형제들을 위해 다 쓰고 나머지 제3의 인생은 나를 위해 쓰겠노라고 편지를 쓰면서 계획을 세웠다.
종일 장사를 하고 밤이면 파김치가 되어도 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새벽 3시 기도와 함께 편지와 일기를 쓰며 공부를 하곤 했다. 내가 바라는 모든 미래의 설계가 앞길을 열어 주는 디딤돌로 마음속에 편지를 쓰고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편지 속엔 사랑이 넘치고 희망과 꿈이 가득 담겨있었다. 시장에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 월말에 돌아오는 수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와서 또 책임을 완수 해 주리라는 믿음이 가득 차 있었다. 때때로 곁에서 부실한 장사를 탓하며 심장을 찔러 대지만 마음의 부처님이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견디고 오늘에 왔다. 내 마음을 알아주시던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힘든 수례를 끌고 올 수 있었다. 그 힘과 용기가 오늘에 나를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대화의 상대가 있다면 생에 가장 큰 의지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날 병아리 같은 이천분교 어린이 열 두 명에게 3년간 계절 따라 동아책과 옷을 보내며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온 몸의 피로가 도망가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개나리 꽃송이 같은 아이들이 아주머니 언제와요, 보고싶어요, 꽃이 피었요 얼음에 미끄러졌으요, 송아지가 새끼를 낳았으요, 아버지가 다리를 다쳐 슬프요, 종알종알 대던 입들이 이제 중년이 되었을 것이고 각자가 나라의 역군으로 살고 있겠지, 꿈과 희망을 주시던 훌륭한 스승님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 오지 못할 곳으로 다 떠나셨다. 지난 날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 감사의 마음을 쏟아놓고 싶은데, 문학소녀처럼 응석도 부리며 신명나는 편지를 쓰고 싶은데, 이미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지난날 추억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용솟음 칠 때 멍하게 앉아서 그날을 되새김 질 한다.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을 가슴에 새기며 무한한 대화를 하고 있다.
가버린 세월 아름다운 사연을 구름 상자에 소중히 담아 맑은 가을 하늘에 훠위훠위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