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총총 여름 밤 … 낭만열차가 달린다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기차는 단순한 '탈 것'이 아니었다. 열차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객차 안은 일상을 떠난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곳에선 삶은 달걀과 사이다 한 병이 최고의 진수성찬.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었다. 레일 위 열차 속에서 우리의 여행은 이미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니까.
KTX의 운행 이후 기차는 가장 빠른 육상교통으로서의 '탈 것'이 되어버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불과 2시간50분. 그것만으로도 부족한 모양인지 2시간 내 진입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산을 뚫고 레일을 놓는다. 사실 일상탈출을 위해서라면 굳이 2시간이든 2시간50분이든 별 상관이 없을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속도를 얻었고, 낭만을 잃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옛 기차여행의 '로망'이 되살아나고 있다. '탈 것'으로서의 기차들이 '테마'라는 새 옷을 입고 예전 '낭만의 시대' 부활을 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해 코레일 부산지사에서 첫 선을 보인 '별밤열차'. 지난해 여름 한 철 동안 열차 전량이 매진되는 '대박'을 맞았다.
다시 여름이다. 어김없이 '별밤열차'도 다시 시동을 건다. 지난해엔 아쉽게도 명성만 익히 들었다. 올해는 기필코 직접 타보리란 생각에 첫 차를 기다려 일찌감치 몸을 실었다.
오후 7시12분 열차가 부산역을 출발한다. 어느새 여름밤 어스름이 차창 안으로 스며들더니 이내 열차 천장에 매달아둔 별들이 밝게 빛나기 시작한다.
"오늘은 왠지…." 1980년대 음악다방에서나 들릴 법한 음악방송이 열차 내 스피커를 타고 흐른다. DJ의 약간은 느끼한 목소리 또한 딱 1980년대 느낌이다. 즉석 문자로 짧은 사연과 신청곡도 받는다. 로드 스튜어트(Rod Stewart)의 '세일링(Sailing)'이 들려 나온다. 신청곡들은 올드팝이 주를 이룬다. 아무래도 승객 연령대가 40대 이상이 대부분인 듯.
음악을 들으며 미리 나눠 준 와인병을 땄다. 그리고 한 잔을 따라 넘긴다. 그렇다. 낭만도 진화한다. 그 옛날 삶은 달걀과 사이다가 이젠 케이크와 와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다고 '별밤 열차'가 옛 향수를 기억하는 어른들만을 위한 열차는 아니다.
곧이어 열린 마술쇼. 쇼가 벌어지는 4호 객차에서는 어린이들의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마술사의 손끝으로 비둘기 한 마리가 '뿅'하고 나타나더니 객차 내를 날아다닌다. TV로 보는 것과는 그 감흥이 당연 다르다. 뿐만 아니라 넓은 공연장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생생하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공중부양'. 좁은 객실 한 켠을 무대로 삼은 까닭에 잠자는 미녀 대신 테이블을 공중으로 띄운다. 이 대목은 조금 아쉽긴 하다. 그러나 놀란 아이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기엔 충분하다.
4번 객차에서 열리는 마술쇼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전 객차로 실시간 방송된다. 아무래도 나이 많으신 분들은 어린이들에게 생생한 현장(?)을 양보하시고 제자리에서 모니터에 열중한다.
그러는 동안 열차는 해운대역을 지나 남창역으로 향해 달린다. 차창 밖으로 아름다운 밤바다가 스쳐간다. 남창역은 울산시 울주군 온양읍에 있는 기차역. 그 역사(驛舍)가 지난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시골역이다.
남창역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시곗바늘은 어느덧 오후 8시30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1시간20분 남짓이 눈 깜짝할 듯 지나가버린 셈. 남창역은 이 열차의 종점이다. 물론 열차는 다시 길을 되짚어 부산으로 돌아온다.
잠시 남창역에 내린다. 남창역장의 역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승객들은 역장의 설명보단 여름 밤 시골역사의 정취에 취하기에 여념이 없다. "역장님, 죄송합니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선 이벤트 시간이 마련된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글들이 소개된다. 30년 만에 첫 열차여행을 하신다는 한 아주머니의 사연, 만난 지 300일이 된 기념으로 열차에 올랐다는 젊은 커플의 사연 등…. 마치 아침 라디오 방송에 나올 법한 사연들마다 온기가 느껴진다. 옆 좌석에선 소녀티를 벗지 못한, 아니 일상을 벗어나 다시 소녀 시절 감성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들이 사연 마다 제 일인양 함께 기뻐하며 박수를 친다. 열차는 어느새 사랑방으로 변한다.
사랑방에 노래가 빠질 수 있나? 전문 가수의 멋들어진 통기타 라이브가 열차의 분위기를 더욱 달군다.
열차가 부산역에 다시 도착한 시간은 오후 10시25분께. 3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열차는 고작 울산 언저리 남창역을 찍고 돌아왔지만, 열차를 내리는 승객들의 표정은 아주 먼 곳을 다녀온 듯한 아득함이 묻어난다. 파마머리의 아주머니는 20년 전으로 돌아갔을 테고, 엄마 손을 잡은 어린 아이는 메텔의 손을 잡고 '은하철도 999'를 탄 철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은하철도 999'보다 '별밤열차'가 좋은 점은? '은하철도 999'는 한번 떠나면 종점인 안드로메다 대성운을 돌고 오기까지 수십 년이 걸리지만 '별밤열차'는 8월말까지 매주 주말 저녁 부산역을 출발한다는 점. 게다가 부산역까지 오시기 힘든 분을 위해 중간 중간 부전역과 동래역, 해운대역에서도 타고내릴 수 있다. 또 하나 더. '은하철도 999'의 승차권을 사려면 평생 뼈 빠지게 벌어 모아야 하지만 '별밤열차'는 3만6천원이면 승차권을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코레일 부산지사(051-466-8120).
글·사진=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그 외 테마 열차
△동해바다열차
부산에 '별밤열차'가 있다면 동해에는 '바다열차'가 있다. 강릉~동해~삼척 구간을 편도 1시간20분 코스로 운행하는 이 열차는 특히 전 좌석이 해안을 조망할 수 있도록 창을 향해 배치해 바다 경치를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강릉역을 출발한 열차는 정동진역, 동해역, 추암역, 삼척해변역을 거쳐 종착역인 삼척역까지 운행한다. 세계에서 가장 바다와 가까운 역인 정동진역을 비롯해 탁 트인 바다가 일품인 망상역과 무릉계곡, 맹방 해수욕장 등 숨겨진 비경을 차창으로 품에 안을 수 있다.
△섬진강 증기기관차
옛날 증기기관차가 아직도 달린다. '섬진강 증기기관차'는 '섬진강 기차마을'로 변한 옛 곡성역에서 가정역까지 1일 3회(주말 5회) 운행한다. 이 열차는 사실 '껍데기만 증기기관차'인데 비용 문제로 진짜 증기 기관이 아니라 디젤기관에 증기를 내뿜도록 개조했으며 기적소리도 녹음된 것이다.
하지만 옛 전라선을 따라 25분가량 느릿느릿 움직이는 열차에 오르면 금세 낡은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아련한 향수에 젖게 된다. 열차 내 안내원도 1960년대 승무원 제복을 입고 있는데 검표 가위로 차내 검표를 하는 광경이 이채롭다.
△해피스테이션 기차펜션
'기차는 달려야 한다?' 고정관념을 깨자. 강원도 정선군 구절리 철도 레일에는 달리지 않는 아담한 빨간 기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달리지 않으니 굳이 승객이라 말해서도 안되겠다. 달리지 않는 기차라…,
바로 기차펜션이다. 기차 객실에 무슨 침실? 무시하기엔 생각보단 호화롭다. 게다가 더 매력적인 것은 기차 외관과 이어진 테라스. 강원도 정선 노추산의 웅장한 모습에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이 객실을 감싼다. 객실을 벗어나면(그러나 열차 내) 스파게티 전문점, 열차 카페도 마련되어 있어 '방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괜한 불안은 하지 않아도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