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협회---아디------------------
서화협회
일제강점기에 서예가·화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최초의 미술인 단체.
1918년 발족하여 모두 15회의 협회전을 가졌으며 1937년 총독부의 정지령에 의해 조직활동이 중단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던 1911년 윤영기의 경성서화미술원과 안중식·조석진이 주도하는 서화미술회 등 제자들을 양성하는 강습소가 생겼다. 1915년 김규진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생기고 평양이나 대구에도 학원이 생겨나서 미술인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었으나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전시무대나 구심적인 단체가 없는 상태였다.
이무렵 일본인 양화가들이 한국에 건너와 조선미술협회를 만들어 화단을 끌어갈 기세를 보이자, 주체성이 있는 단체의 결속을 절감한 민족미술가들은 고희동을 중심으로 하여 조석진·안중식·오세창·김규진·정대유·현채·강진희·김응원·정학수·강필주·김돈희·이돈영 등 13명을 발기인으로 서화협회를 창립했다. 초대 회장으로는 안중식이 선출되었다. 협회의 명칭에 '미술'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은 것은 일본이 만든 신조어라는 데 대한 거부감과 전통적인 용어를 고수하려는 원로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대체로 협회의 규칙을 보면 "신구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아취아상(雅趣雅想)을 증장하게 함을 목적함"이라는 의의를 내세웠으며 회원으로서는 "정회원·특별회원·명예회원으로 구분하되, 정회원은 서화가로, 특별회원은 서화의 고취가 풍부한 자로, 명예회원은 서화를 애상·권찬하는 자로 추천함"이라고 했다. 회원으로 일본인을 배격한 것은 당연시하면서, 명예부총재에 김윤식, 고문에 이완용·민병석·김가진·박기양 등 한일합병 주역이었던 친일고관배를 내세운 것은 총독부의 방해를 피하고자 하는 의식과 후원금을 고려했던 협회의 현실사정 탓이었다.
창립 다음해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이 항일 독립만세에 휩쓸렸고 안중식·강진희·조석진의 타계와 일부 회원의 탈퇴 등으로 2년간 공백기로 있다가 1921년 4월초에 중앙학교의 강당을 빌려 제1회 창립전을 개막했다. 출품작으로는 안중식·조석진의 유작과 안평대군·정선·김정희의 명품을 선보였고 신예작가로 김은호·이상범·노수현·최우석의 작품과 새로운 유화작가로 고희동·나혜석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러한 출발에 놀란 총독부가 협회의 활동을 견제하려는 술책으로서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규약을 발표했다.
서화협회전은 1922년 3월 2회전을 보성학교 강당에서 치렀고 그해 6월에는 총독부가 주관하는 선전의 창립전이 있었다. 서화협회는 출발 당시의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제작의욕이 높았으며 〈서화협회보〉의 발간과 서화학원의 개설(1923. 11) 등으로 대중확보와 신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기구의 규모나 운영, 심사·수상의 제도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관전으로 출발한 선전의 비대한 발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협회전은 해가 갈수록 허약해지고 회원의 이탈이 늘면서 작가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일부 회원들 중에는 선전에 출품하기를 거부하고 협회전을 지키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민족의 자존심을 살려야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협회를 구성하는 회원들간의 의식 차이와 불화는 전시회의 무성의를 스스로 재촉했다. 1929년 제9회 협회전을 보고 나서 관전평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청년 화가 심영섭은 서화협회가 처음부터 뚜렷한 민족이념의 지향이나 성격이 없었다는 점과 당시의 경향주의 예술이 새롭게 부상하던 시기에 정치적 현실에 무감각한 채 미래지향성이 없이 오히려 선전에 매달리는 작가들의 태도에 각성을 촉구했다. 이런 비판에 자극받은 협회는 임원진을 개선하여 다음해 10주년 기념전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1931년 11회전에서는 선전처럼 신인작품을 공모 시상하는 제도를 채택하여 김기창·한유동·장우성·이여성·이응로·이경배·정용희 등이 나왔다. 대체로 협회전은 동양화 작가들을 주축으로 모두 50여 명을 넘지 못한 회원·비회원 작가들의 출품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전을 마치고 다음해 가을로 예정되었던 협회전은 재정문제까지 겹치면서 총독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서화협회전은 근대미술을 개척한 순수한 민간단체로서 주요작가들의 활동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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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고희동의 졸업작품 <자매>는 신문지상으로밖에는 감상할 수 없지만, 그가 서양의 전형적인 인물화 양식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서양화가의 효시’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서양화의 특징을 논한 다음 “일본에는 수십 전 전부터 이 그림이 크게 유행되어 지금은 명화라는 대가도 적지 않건마는 불행히 문화를 자랑하는 우리 반도에서는 한 사람도 이에 뜻을 두는 이가 없더니” 고희동이 처음으로 “구한국 궁내부 예식관의 명예직을 띠운 몸으로 뜻을 결단하고 동경에 건너가 일본의 미술계에 최고학원 되는 상야미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음을 대서특필했다.
1915년 3월에 동경미술학교 5년의 정규과정을 졸업한 고희동은 귀국 후 자신의 집에서 그림을 가르치면서 회화교육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고희동은 자신에게서 서양화를 배운 김창섭, 이제욱, 장발, 안석주 등이 서울에 고려화회를 조직하고 YMCA 회관에 방을 빌어 매주 토요일에 한 번씩 모여 기초 실기 훈련을 쌓을 때 계속 그들을 돌봐 주기도 했다.
그 때 지도에는 서울에 정착해 있던 일본인 화가 산본매애山本梅涯, 고목배수高木背水, 환야풍丸野豊도 관여했다.
고희동은 『신천지』에 기고한 ‘나와 서화협회시대’에서 술회했다.
“본국에 돌아와서 스케치 막스를 메고 교외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엿장사니 담배장사니 하고, 어떤 친구들은 말하기를 애를 써서 돈을 들이고 객지에서 고생을 해가면서 저것은 아니 배우겠네, 점잖치 못하게 고약도 같고 닭의 똥도 같은 것을 바르는 것을 무엇이라고 배우느냐고까지 시비하듯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거주하던 집에 세 칸 되는 사랑방이 있었다.
거기에 6, 7인을 모아서 목탄화를 그리게 한 일이 있었다.
와서 배우는 이 소년들은 재미를 들여서 그리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그림이냐고 하며 시선 외로 돌려버린다.”
고희동은 당시 기성 중진, 대가들을 회유하여 화단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래서 1918년 6월 19일에 결성된 것이 서화협회였다.
그가 나서서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1864~1953), 김규진, 정대유, 현채, 강진희, 김응원, 정학수, 강필주, 김돈희, 이도영 등 13명이 발기했다.
이들은 당시 서화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정대유는 1921년 조석진에 이어 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서화협회 발기인 13인
1 안중식
안중식(1861-1919)은 어렸을 때 이름이 종식(鍾植)이고 별명이 욱상(昱相)이었으며, 심전(心田)이라는 호 이외에도 심전경부(心田耕夫), 경묵도인(耕墨道人), 말년에는 불불옹(不不翁) 이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조석진(趙錫晉)과 함께개화파인 김윤식(金允植)이 이끄는 영선사(領選使)의 제도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텐진(天津)에 다녀 왔다.
이때 서구의 과학적인 소묘법을 익혔고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1884년 갑신정변때는 개화파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피난한 적도 있고, 그 후 상해로 건너가 그곳의 서화가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내외를 다니며 새로운 문물에 대한 안목을 넓혔고, 정치적인 면에서도 근대적 입장을 지녔다.
그는 장승업에 이어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다. 그래서 고종과 황태자의 초상화 제작에 발탁되기도 하는 등 궁중의 그림을 도맡아 그렸다.
따라서 그의 회화 가운데는 중국의 고사나 화보를 탈피하지 못한 그림이 많았지만, 조석진과 더불어 근대 화단을 연 화가로 주목된다.
대표작으로는 〈도원문진〉과 〈백악춘효도〉 외에 많은 수가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과 그림에 흥미와 재능을 나타냈는데 1906~07년 그에게서 묵화를 배운 고희동은 스승에 관해 “유시부터 그림에 조예가 깊어서 자연히 일가를 성하였다”고 했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 대다수는 1910년대에 그려진 것이며 화면에 적힌 행서체의 제시로서 그가 한시에 정통했고 서예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를 겸전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가였다.
그러나 그와 조석진은 근대에 속한 화가가 못되었고 구태의연한 중국풍 낡은 그림을 그리는 데 그쳤다.
고희동은 훗날 “중국인 화가의 입내 나는 찌끼”라는 말로 두 사람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안중식은 1919년 11월 2일 경기도 시흥에서 타계했다.
2 조석진
조선시대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인 소림(小琳) 조석진(1853-1920)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화원 화가인 할아버지 조정규의 밑에서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
28세 때인 1881년 영선사일행의 제도 연수생으로 안중식(安中植)과 함께 텐진(天津)에 건너가 견문을 넓혔다. 그 후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임금님의 초상인 어진을 그려 화명을 드높이기도 하였다.
또 이 왕가(李王家)의 후원으로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안중식과 더불어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 양성에 힘써 한국 근대의 전통 회화를 주도하는 화가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로써 그는 안중식과 더불어 조선시대 말기의 전통 회화를 근대 화단으로 이행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그는 여러 분야의 그림을 잘 다루었으나 특히 산수화와 어해화에 뛰어났다.
작품으로 <수포고촌> 등이 있다.
소림 조석진(1853~1920)과 심전 안중식(1861~1919)은 근대가 시작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예술적 위상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조선왕조 최후의 화가들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그리고 근대미술을 이끈 첫 세대 작가들이 두 사람의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데서 그들을 언급하게 된다.
훗날 대가로 성공하여 화단에 군림한 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최우석, 박승무 등이 두 사람의 문하생들이었다.
삶과 예술에 있어 조석진과 안중식은 숙명적인 한 쌍이었다
3 고희동
고희동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제주(濟州), 호 춘곡(春谷)이다. 1903년 한성법어(法語)학교를 졸업, 이듬해 궁내부주사로 들어가 예식관(禮式官) 등을 역임하고, 이 무렵부터 취미로 서화를 시작하여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에게 배웠다. 1908년 한국 최초의 미술유학생으로 일본에 가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였다. 1915년 귀국하여 휘문·보성·중동 등의 학교에서 서양화를 가르쳤다.
1918년 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고 그 일환으로 협전(協展)을 18회나 개최하였다. 8·15광복 후 대한미술협회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고, 1948년 한민당(韓民黨) 상임위원,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장,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55년 대한민국예술원장으로 선출되는 한편 민주당 고문, 민권수호연맹위원장 등으로 추대되었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년 이후는 은퇴하였다.
당초 조선 후기의 화풍을 잇고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워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으며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동양화로 전환하여 전통적인 남화(南畵) 산수화법에 서양화의 색채·명암법을 써서 감각적인 새로운 회화를 시도했다. 1949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그가 죽자 예총장(藝總葬)으로 치러졌다. 작품으로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이 있다
4 정대유
정대유(1852~1927)는 서예가이며 괴석과 난죽을 주로 그린 문인화가 정학교의 아들로 아버지와 같이 서화에서 탁월함을 보였다.
대한제국시대에 외부와 농상공부에서 국장을 역임했고 한일합방 후에는 서화가로 활동했다.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13인의 발기인들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후진에게 서법과 문인화를 가르쳤으며, 1922년 선전이 시작되자 김규진, 김돈희와 함께 사군자가 포함된 서부의 심사위원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그의 문인화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낙장으로 발견된 <괴석 怪石>은 1918년 누군가를 위해 조석진, 안중식을 비롯한 7명의 화가가 작은 크기로 한 폭씩 그려 화첩을 만든 것들 중 하나이다.
낙관에 “우연히 독필을 시험하였으나 잘 되지 못해 부끄럽다”고 적혀 있다.
소품이지만 묘취 있는 형상과 츨필 기법 및 담채의 표현이 고격하고 괴석이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현대적 표현의 형상물로 보이면서도 짙은 청록색을 수반한 작은 태점들로 전통 화격을 유지한다.
곳곳에 찍은 세모꼴의 태점들이 작은 수묵점들과 조화를 이루고 돌틈의 난초잎 수묵선들이 괴석에 자연적인 정취를 보태준다.
화제 보천여흔補天餘痕은 “하늘의 이지러진 곳을 채운다”라는 뜻으로 여왜씨女蕃氏가 하늘의 이지러진 데를 기웠다는 중국 고사에서 인용한 글귀이다
5 강필주
강필주(?~1930년 전후)의 화단 등단 배경과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는다.
1907년 관보에 궁내부 영선사 위원으로 적혀 있어 한일합방 전에 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선사는 건물 신축 및 보수를 담당한 보서로 그가 화가의 신분으로 건축물에 그림 그리는 일에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조석진, 안중식 등과 함께 후진을 가르친 것을 보면 이 시기에 이미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은 드물고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1910년대 후반 혹은 19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의 화제는 “백세토록 수를 누리며 복록을 받으소서”이며, 고목과 십장생 중 하나인 사슴을 그린 것이다.
누군가의 화면 세척과정에서 목빛과 담채의 본색을 잃게 했지만 상단 대범한 필치로 묘미 있게 횡단시킨 고목의 줄기 및 가지의 곡선과 둥글게 뭉쳐진 나뭇잎의 구성에서 그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작례로 보인다.
아래 완만하게 경사진 풀언덕에 출현한 사슴은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사슴은 오른편으로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다가 왼편에서 무슨 소리가 났는지 머리를 돌려 경계하는 모습인데, 세밀 묘사가 고목의 자유분방한 붓놀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가 73세에 그린 <팔준도 八駿圖>가 있어 1930년 이후에까지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화미술회 제자 김은호와 평양에서 휘호회揮毫會를 가진 적이 있다
6 강진희
본관 진주, 호 청운(菁雲). 1887년 주미공사 수행원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법무주사를 지냈고, 1905년에는 학부위원을 지냈다. 1911년 ‘서화미술회’에서 조석진·안중식과 함께 글씨와 전통화법을 가르쳤다. 1918년에 창립된 순수미술동인회인 ‘서화협회’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글씨는 전서·예서, 그림은 산수(山水)·묵매(墨梅)에 뛰어났으나 전하는 작품은 별로 없다
7 김응원
난초만 그린 김응원(1855~1921)이 화단에 등단한 배경에 관한 기록은 없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오르기 전에 득의의 묵란을 즐기며 은신할 때부터 어린 종복으로 따라다닌 김응원이 그 뒤에도 계속 개인 수종으로 대원군을 모시며 석파란법石坡蘭法을 스스로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석파는 대원군 이하응의 아호이다.
섭정기의 대원군이 주위의 묵란 앙청을 모두 응할 수 없어 김응원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고도 하는데, 김응원의 묵란은 석파란법을 충실히 추종한 바탕 위에 이루어졌으며 후년에는 김정희의 문인화 정신의 묵란법도 본받아 한층 자재로운 경지에서 도달했다.
1910년대에 서울 화단의 대표적인 묵란화가로 알려졌고 서화협회에서 후진에게 묵란법을 가르쳤다.
<석란 石蘭>은 대작으로 광대한 의상意想과 묵란 기량이 한껏 발휘된 대표적인 역작이다.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기암유곡奇岩幽谷의 경개에 청아한 난초들이 고결한 풍정으로 그려졌고 다른 초화는 일체 배제되었다.
암석의 몽상적 형상은 공간의 깊이와 유현한 분위기를 수반하며 수묵필치, 먹의 농담 변화, 태점의 표현 등이 궁중에 바쳐진 그림답게 필력과 기량을 다한 듯이 보인다.
왼편 상단에 예서체로 적힌 글귀는 “난의 기운은 맑고 돌의 바탕은 고요하다. 맑으면 오래 가고 고요하면 수를 누린다”는 뜻이다.
8 이도영
1884(고종 21). 3. 7 서울~1933 서울.
동양화가.호는 관재(貫齋). 안중식의 문하가 되어 미술 수업을 했다. 1906년에 창립된 대한자강회의 간사로 일했으며, 대한협회의 교육부원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창간한 민족언론 〈대한민보〉에 일제와 반민족적인 인사를 비판하고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시사적인 풍자화를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선구적인 시사만화는 전통 목판화 형식을 근대적으로 계승한 점에도 그 의의가 크다.
(『대한민보』에 연재된 목판의 동양화적인 시사만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림을 계몽과 현실 비판의 한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그는 미술을 문명을 이끄는 힘으로 인식하고 이를 서화로 실천했다. 이도영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조석진과 안중식이 보여준 조석진의 조부 조정규(1791~?)와 장승업(1843~97), 안건영(1841~76)의 유풍과 함께 당시 유행했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중식 이후 가장 저명한 화가로 꼽힌다.)
1908년 3월에 최초의 근대적인 대중교육용 미술 교과서 〈도화임본〉에 그림을 그렸다. 이후 서화미술회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1918년 창립한 대한서화협회에 참가하여 서화협회전을 통해 활동했으며 전통적인 화법으로 산수·인물·화조 등을 그렸다. 특히 〈고색찬연〉(1922)·〈옥당청품〉 등의 기명절지화에는 전통적인 중국식 청동기가 아닌 가야나 신라 토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넣음으로써 민족적 형식을 추구했다. 반면 일제의 조선미술전람회에 1회부터 심사위원으로 4번 참여하여 비난을 산 뒤 그만두었다
(그는 대한협회가 1909년 6월 2일부터 발행한 『대한민보』의 시사만화를 창간호부터 그리기도 했다. 만화는 ‘삽화’란 명칭으로 연재되었고 나중에는 명칭 없이 그 날 그 날의 테마에 따라 제명과 등장인물이 그려졌는데 오늘날 시사만평에 해당했다. 그는 정치·사회·교육 등 전반적인 문제를 만화로 비평했으며, 친일인사 조중응, 고영희, 윤덕영, 이용구, 이병무, 민영휘, 이완용 등과 일진회, 은행, 중추원, 법원 같은 식민지기관을 풍자했고, 외국 자본가, 국내 지주, 관료들의 반민족적 행위, 퇴폐적 현상 등을 비판했다.
그의 만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만화였다.
이도영이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 것은 오세창의 권유에 의해서였으며 오세창은 그의 만화에 풍자적인 글을 직접 써 넣기도 했다. 이도영은 이때부터 오세창과 친밀한 교분을 쌓았고 그와 서화협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9 김규진
1868 평남 중화~1933. 6 서울.
서화가.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백운거사(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왕세자인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고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기술을 익혀 1903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 '천연당'(天然堂)이라는 사진관을 열었다. 그후 1913년 다시 그 사진관 안에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이라는 최초의 근대적 화랑을 개설하여 표구 주문과 함께 서화매매를 알선하기도 했다. 1915년 5월에는 '고금서화관' 신축건물에 다시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서화미술회', '서화협회'에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서화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彌勒佛)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폭포〉·〈말〉등의 작품도 있다.
서산 개심사의 편액
10 정학수
본관 나주(羅州). 호 수산(壽山). 서화가 학교(學敎)의 아우이다. 1918년 안
중식(安中植) ·조석진(趙錫晉) ·정대유(丁大有) ·김규진(金圭鎭) 등과 함께 서화협회 창립멤버로서 활약하였으며, 1921년에 개최된 제1회 서화협회전에는 정회원으로서 출품하였다. 특히 산수 ·사군자(四君子)에 능했는데, 그의 그림은 대체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따른 것이 많으며 필치에 격조가 있고 화풍은 온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유작으로는 1922년 작인 《기국생영도(杞菊生英圖)》와 《장강완경도(長江玩景圖)》 《재주완경도(載酒玩景圖)》 등이 전한다.
11 김돈희
본관 경주. 자 공숙(公叔). 호 성당(惺堂).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行書)를 배웠으며, 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서화협회 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설치하여 후진 지도에 힘썼다. 벼슬은 검사(檢事)를 거쳐 중추원(中樞院) 촉탁을 지냈다.
12 오세창
1864. 7. 5 서울~1953.
독립운동가·서예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아버지는 중국어 역관으로 초기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경석(慶錫)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20세에 역관이 되었으며, 김옥균·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했다. 1886년(고종 23)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겸임했다.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96년(건양 1) 독립협회의 간사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독립공원의 건조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으로 선정되었다. 1897년(광무 1)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 이미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고, 이후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에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언론활동에 주력했다. 대한자강회의 활동과 영향력이 커져 이에 불안을 느낀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윤효정·권동진(權東鎭)·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18년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계획을 듣고 손병희·최린·권동진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여, 운동의 3대기본노선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으로 확정했다. 기독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손병희·최린·권동진과 더불어 천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서화에 전념하면서 은둔생활을 했다. 1918년 서화가들의 친목단체인 대한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그는 서화는 물론 그 감식(鑑識)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서화사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역대 서화가의 사적을 토대로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화가들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하여 편술한 〈근역서화징 槿域書畵徵〉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된 인장자료를 모아 집성한 〈근역인수 槿域印藪〉, 수집한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엮은 〈근역서휘 槿域書彙〉·〈근역화휘 槿域畵彙〉 등은 모두 서화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이다. 글씨는 특히 전서·예서에 능했는데,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고전(古錢)·갑골문 형태의 구성적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
13 현채
1886(고종 23)~1925.
사학자·서예가.
호는 백당(白堂). 1906년 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이 조직한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을 벌였다. 대한제국 말기 학부(學部)에 근무하면서 각급 학교의 교과서 형식으로 〈동국사략 東國史略〉(1906)·〈유년필독 幼年必讀〉(1907) 등 많은 사서를 편찬하고, 〈월남망국사 越南亡國史〉(1906) 등을 번역·간행하여 역사를 통한 애국계몽사상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전통적인 편년체에 의존하고 있는 역사서술방법에 문제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조선사〉와 같은 일본인의 사서를 통해 근대 역사학의 방법론을 도입하기도 했다. 1908~09년 일제 통감부의 조종에 따라 강제 실시된 '교과용도서검정규정' 등에 따라 그의 많은 저서들이 금서처분을 받았다. 1910년 최남선(崔南善)·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의 수집과 간행·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글씨에도 능했으며 특히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잘 썼다.
안진경체---아디-----------------
(병)Yan Zhenqing (웨)Yen Chench'ing.
709 경조(京兆) 만년(萬年: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785.
중국 당대(唐代)의 서예가.
안진경은 당나라 중종 3년(709) 장안에서 태어나 덕종 원년(785) 역적 이희열에 의해 채주(하남성)의 용흥사에서 죽으니 77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다.
안진경의 자는 청신(淸臣), 어렸을 때는 선문자(羨門子)라고 불렸으며, 대종 때 노군개국공으로(魯郡開國公)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죽은 뒤 문충(文忠)이란 시호는 받았고, 그의 조상은 낭야 임기(산동성 임기현)에서 살았으며 대대로 절의(節義)를 중히 여겼고, 학문과 서예에 뛰어난 사람이 많았다.
진경은 어려서 아버지(惟貞)를 잃고 어머니 은씨(殷氏)와 백부(元孫) 등에 의해 양육되었다. 진경은 개원(開元) 22년(734) 26세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의 약 반세기에 이르는 벼슬살이 동안 항상 세속적인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충의(忠義)의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강직함은 당시의 권력자들에 의해 지방관으로 좌천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그의 반세기와 당나라 조정의 반세기는 고난의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안록산(安綠山)의 반란(천보 14, 755)이 일어났고, 당시 평원(平原, 산동성) 태수로 좌천되었던 진경은 의병을 일으켜 평원성을 사수하는 충성을 보였다. 반란 후 절도사 이희열(李希烈)이 모반하자 재상 노기(盧杞)의 책략에 의해 진경은 줄을 줄 알면서 이희열에게 나아가 그를 설득하다 덕종(정원 원년, 785)때 채주의 용흥사에서 비극적인 일생을 마쳤다.
안진경의 글씨는 우세남(虞世南)?구양순(?陽詢)?저수량(?遂良)과 함께 당나라 사대가(四大家)로 손꼽힌다. 중국의 전통서예는 종요?장지에서 서성 왕희지가 이를 계승하였고, 수?당에서 본류가 형성되었다. 장욱과 안진경은 전통서예의 흐름에서 가운데에 위치한다. 진경은 왕희지풍을 배웠고, 전필(篆筆)로 서풍을 일변(一變)시켰다. 즉, 안법의 창시가 된 것이다. 황희지풍의 세련되고 전아(典雅)한 글씨에서 엄숙하고 규모가 웅대하고 역감(力感)이 있는 새로운 풍을 열었던 것이다. 이는 그 뒤 송나라에서 유행한 개성이 풍만한 글씨의 연원이 되었다.
이러한 안진경의 글씨는 처음에 저수량을 배웠으나 장욱(張旭, 생몰년 不詳, 자는 伯高, 吳郡-강소성-사람)에게 필법을 전수 받았다. 두보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는 장욱을 초성(草聖)이라 불렀다. 장욱 뒤의 회소(懷素)는 연면초(連綿草)의 명수로 기이한 행동을 많이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장욱과 회소를 ‘장전소광(張顚素狂)’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식 프레스코
◆ 고구려식 프레스코=2주일간의 조사를 마친 건국대 한경순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구려 벽화를 처음 본 감격에 떨리는 가슴과는 별개로 큰 숙제를 떠안았다. 벽화 보존의 선진국인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던 그는 "고구려 벽화는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창적 기술을 구현했다"고 평했다. 벽화는 보통 프레스코(젖은 회벽에 그린 그림)와 세코(마른 벽면에 그린 그림)로 나눠진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는 프레스코도 세코도 아닌 '고구려식 프레스코'다.
고구려 벽화는 회벽화(곱게 바른 회벽에 색을 입힌 그림. 진파리고분.덕흥리고분 등)와 석벽화(돌 위에 색을 입힌 그림. 강서대묘.안악3호분 등)로 양분된다. 벽체를 분석한 한 교수는 "마른 회벽.돌벽에 석회수를 얇게 바르고 그림을 그린 것 같다. 안료에 아교 같은 접착제를 섞어 그릴 수도 있다. 그런데 아교는 세월이 흐르면 쉽게 변해 접착제로 부적당하다. 또 벽면에 그림이 밀착된 서양 프레스코에 비해 고구려 벽화는 벽면에서 약간 부풀려 있다. 그런데도 15세기나 견뎌왔다. 온통 미스터리다. 이를 현대과학이 풀어낼 수 있을지. 다만 종전에 알고 있던 것과 달리 고구려인은 석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고 밝혔다.
◆ 금빛 안료의 정체는=안료전문가 안병찬(경주대) 교수도 숙제를 안고 있다. 고구려인이 어떤 재료로 그림을 그렸는지 아직 명확하게 규명된 게 없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 시절 고급 안료는 금보다 비쌌다고 한다.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고는 화려한 벽화를 쓸 수 없었다.
고구려 벽화의 안료는 무기질 광물성이다. 유기질 안료는 색이 쉽게 바래 사용할 수 없다. 안 교수는 부지런히 벽면에 X선 분석기를 투과했다. 성과가 있었다. 진파리 4호분(평양시 용산리)의 금빛 안료는 금이 아닌 석황(石黃)일 가능성이 컸다. 석황은 한약재로도 쓰였던 광물. 한국에선 안료로 썼다는 보고가 없으나 중국 에선 금 대용품으로 사용했다. 또 진파리4호분 나무 그림의 녹색은 탄산구리, 덕흥리고분(평안남도 강서군)의 말.옷에 나타난 노랑은 산화철, 모든 고분에 두루 쓰인 적갈색은 적철광임을 밝혀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더 많다. 안 교수는 "고구려 벽화가 습도 95%를 넘는 환경에서도 영롱한 색채를 간직해온 건 경이로운 일"이라고 감탄했다.
아카데미즘---폰테-------------------
아카데미즘이란 본래 아카데미에서 나온 말로 일반적으로 학문이나 예술의 관학, 관전계의 작풍, 양식, 수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술사적으로는 고전적 규범에 충실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 미술사에서는 반드시 고전주의적 경향에만 한정시키지 않았다. 19세기 이래의 역사는 새로운 유파, 양식과 아카데미즘의 교체의 역사으로 관찰될 수 있다. 이를테면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은 어느 것이나 그 탄생의 시기에는 동시대의 아카데미즘과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것이었으나 다음의 유파나 양식이 탄생하면 종종 아카데미즘으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그 추종자들에게 단순한 형식적 전통이 되어버릴때 그것을 비판적인 의미로 이미 아카데미즘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미즘이란 그림을 그리는 기술을 가르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구상미술분야를 지칭하는데 쉽게 고전주의나 르네상스시절 그림을 연상하면 됩니다.
이러한 그림은 상당히 과학적이며 분석적인데 인체를 그릴때 해부학을 알아야하고 주로 풍경은 원근법,투시도법등등 ..
이렇게 그림분야에서도 학문적인 깊이가 생기고 법칙들이 생기니 그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야겠죠.
즉 아카데미즘이란 정규교육미술이라면 설명이 될까요..
나혜석---폰테--------------------------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경기도 수원에서 구한말 군수 집안,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14세에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오빠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 동경 유학, 귀국 후 3ㆍ1운동에 참여
1914년 일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學之光)」에 ‘이상적 부인(婦人)’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이 회보 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원고지 140매의 작품이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1917년 11월)보다 4개월 늦었으나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본격적인 여성소설 1호이다. 그녀의 작품 총 6편 가운데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상(文學史上) 그림 못지 않은 위치를 인정 받고 있다. 21세 때 나혜석은 「학지광」의 편집발행인 최승구(崔承九)와 사랑하여 약혼했다. 그러나 그가 결핵으로 일찍 사망하자 나혜석은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빠져 방황한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1919년 동경에서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고 귀국한 김마리아, 황에스터와 연락이 되어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히 모였다. 이화학당 교사 신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등과 함께 3ㆍ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변호사 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 사랑과 결혼, 미술 작품 제작에 열중
동경 유학 시절 이광수와도 염문이 있었으나 결국 김우영과 1920년 결혼하였다. 이때 그는 첫 애인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 비석 세우기를 요청, 약혼자의 승낙을 받아내고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만큼 자신만만했다. 또한 결혼 때 그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은 오늘의 여성도 감히 내세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즉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쾌히 승낙한 10세 연상의 변호사와의 생활은 말 그대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문예지 「폐허(廢墟)」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화가로서도 치열한 창작열을 불살랐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2년부터 고희동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鮮展)에 ‘농가’와 봄ㆍ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남편이 일본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되어 만주에서 살았다. 그 해 제2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이 4등 입선했다. 서양화 그룹 고려미술회 창립 동인이 되었고, 1924년 제3회 선전에 ‘가을의 정원’ 등을 출품하여 4등 수상했다. 1925년 제4회 선전에서는 ‘낭랑조(娘娘朝)’로 3등 수상하고 이듬해 제5회 선전에는 ㅍ천후궁(天後宮)’이 특선하였다. 아울러 단편소설 ‘원한(怨恨)’을 조선문단 4월호에 발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였다. 1927년 제6회 선전에 ‘봄의 오후’를 출품하고 남편과 세계 일주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딸 하나, 아들 셋을 낳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룬 듯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
남편과 세계일주를 하다가 혼자 파리에 남아 8개월간 그곳의 야수파 미술을 공부하였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하여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어서 1930년 제9회 선전에‘화가촌’‘어린이’등을 출품하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같은 작품으로 일본의 제전(帝展)에서도 입선함으로써 인정받는 서양화가가 되었다. 계속해서 1932년 제11회 선전에 ‘금강산만물상’ ‘소녀’‘창에서’ 등을 출품하고, 세계일주 기행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문인으로 보다는 아무래도 화가로서 빛을 발한다. 첫 개인전 당시 한국에는 고희동 등 10명 이내의 서양화가가 활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며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어법(造形語法)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선전 출품작은 대개 인상파적 화풍에 대담한 터치와 생략기법으로 주제를 첨예화시킨 것들이어서 남자화가들을 제치고 당당히 입상의 영광을 얻었던 것이다. 더욱이 1923년부터 27년까지 만주 안동현 거주와 세계여행 등이 그녀에게 좋은 창작여건을 마련해 주¾珦습º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작품성은 인상파 화풍의 ‘자화상’으로 절정에 달했다.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강렬하게 구사함으로써 화면에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녀의 풍경화에는 섬세한 필선, 밝고 고운 색조, 구도의 신선함이 출렁였다.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엄청난 유산을 통해 30대 초반의 여류화가는 국내 어느 화가도 접하지 못한 감동을 맛보고 이를 재창조해낸 것이다
♠ 투철한 여성해방론자
나혜석의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폭넓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경험에서 자연스레 싹튼 것이었다. 그녀는 1921년에 일찌기 가부장제의 억압에 있는 여성의 처지를 시 ‘인형의 집’으로 묘사, 매일신보에 발표한 바 있다. 또 1924년부터 26년까지 그녀는 김일엽의 여성의복 개량에 대해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 논쟁, 미술가적 안목으로 조선옷의 특색을 살리자는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밖에도 서구 중심이나 절대 개방이 아닌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여 생활개량에 관한 글도 많이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서슴없이 개진하는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때마침 그곳에 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파리 시내 관광 등을 안내하면서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귀국후 그녀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그 때 그녀는 최린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또 정조(貞操)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분방한 생각은 남편에게는 물론 당시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1934년 1500장 분량의 ‘이혼고백서’에서,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라고 사회적 인습과 몰이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사회적 비난과 생활고 속에 방황하며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였다. “사 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 일찍 핀 매화는 꽃샘 추위에 얼어 죽는다던가. 안타깝게도 당시 사회는 결코 이같은 그녀의 급진적 개방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 고독과 질병으로 쓰러져
1933년 나혜석은 고향인 수원에서 미술연구소 여자미술학사를 운영하였다. 한편으로는 「삼천리(三千里)」와 「신동아(新東亞」에 기행문과 수상(隨想)등을 발표하였다. 그 같은 집필활동은 미술활동을 중단하고 문인으로 전향한 듯하였으나 본업은 여전히 미술 창작이었다. 1935년 서울 조선관 전시장에서 개최된 소품전에 100여점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물론 일반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즉 1931년 봄에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그녀는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일로 사람으로 태어난 걸 후회할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때 나이 36세, 3남1녀의 어머니였던 그는 결혼 11년만에 거리로 쫓겨나는 부당함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사회의 이목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며 더 큰 좌절과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녀는 41세에 본의 아닌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충남 수덕사로 김일엽을 방문하였으나 생각이 다른 두 여성이 함께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금강산으로 동해안으로 가 몇 달씩 머물다가 끝내는 안양 양로원을 거쳐 48세에 서울 청운 양로원으로 갔다. 그때 그녀는 지칠대로 지쳐 완전히 폐인과도 같았다. 1946년 어느 날인지도 모르게 행려병자로 서울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단지 1948년 「관보(官報)」에 그 유명한 이름 석자도 없이 53세 사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완전히 잊혀진 한낱 가엾은 여인으로 그녀의 화려한 생애는 막을 내렸다. 1995년 미술의 해를 기념, 고향 수원의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에서 나혜석 예술제가 개최되었다. 이때 경기도는 매년 4월 예술제를 열고 또 기념관과 동상을 건립하고 미술상을 제정하는 등 나혜석을 항구적으로 기리기로 하였다. 또한 95년 6월 인사동 갤러리 ‘도올’에서도 나혜석 미술전이 개최되었다. 이제 그녀는 윤심덕, 김일엽 등과 함께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신여성으로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 양화 여성화가 1호로, 연대기상 1호만의 중요성 이상으로 그 ‘발군(拔群)의 화격(畵格)’은 공인 받고 있다.
나혜석선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다. 1921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었으며, 〈자화상〉,〈스페인풍경〉,〈파리풍경〉등의 작품을 남겼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대감각으로 소설·시 등의 문필활동까지 하여 1918년 뚜렷한 여성의식을 보여주는 소설「경희」를 발표한 근대최초의 여성작가 이며, 3·1운동때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에서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돌본 민족주의자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소위 '나혜석과 최린의 연애사건'으로 인해 이혼을 하였고,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봉건적인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였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으며 조선여성의 진보에 대한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비판하며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정월 나혜석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나혜석기념사업회와 협조하여 생애와 그림전(1.15-2.7, 예술의전당), 기념학술강연회(2.25, 경기도 문예회관), 나혜석전집출간(2.25), 추모백일장(2.26, 수원 나혜석거리), 나혜석 유적탐방(2월중, 나혜석생가 등) 등의 선양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생애 및 업적 나혜석(羅蕙錫 : 1896∼1948),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이며 여권운동의 선구자 이자 진보적 사회사상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선생은 수원의 부유한 개명 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서울에서는 첫 번째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했으며, 1922년부터 1932년까지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를 빼고는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한 재주 있는 화가였다. 나혜석은 단지 화가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여성이 각성하여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게 살기 위해서 여성들이 살림살이를 개량하는 구체적 방법 까지 담은 여러 논설들과 신여성이 주변의 낡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경희」를 쓴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였다. 또한 3·1운동 때는 여학생들을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해 활동을 하다가 다섯달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으며, 중국 안동현(현재의 중국 단동시) 부영사가 된 남편을 따라 안동현에서 살 때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외교관 부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독립운동가들의 편의를 보아주기도 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나혜석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을 글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 해방의 사상가였다. 일본 유학시절 좋은 혼처가 나섰으니 공부를 그만 두라는 아버지에게 맞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으며, 결혼식 때는 예술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남편에게 받아내었고, 화가로 3남매의 어머니로 거기다가 외교관의 아내로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잘 해내었던 능력 있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할을 잘 해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나혜석은 자신의 그림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과 아내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는 남편이 예술 세계를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가중한 가사노동에 지치기 시작했고 마침 남편과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기자 과감하게 1년 8개월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나혜석은 서구 여성들의 좀더 인간생활을 위한 노력을 목격하고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새로운 그림의 세계에 눈떠 갔다. 그런데 그 파리에서 남편이 아닌 함께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귀국 후 결국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야 했다. 이혼을 하고 나온 후 나혜석은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비난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관념을 지키라고 하는 사회 관습을 비판하고 나아가 그런 관념은 상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에 해체되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서가는 주장을 펼쳤다. 현모양처가 여성의 모범상으로 굳어버린 시대에 자기의 예술을 추구하다가 이혼을 당하고 빈몸으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한 여성을 파멸로 몰아 넣은 두 남자와 그들 남성이 멀쩡하게 행사하도록 하는 사회 관습에 도전한 나혜석이 연 전람회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응은 차가웠고, 사회의 냉대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나혜석의 심신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화재로 그림을 태워 먹고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절집들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혜석은 여자도 사람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온몸으로 살아간 화가이며 민족주의자이고 여성해방론자였다. 자신이 내딛는 한 걸음의 진보가 조선 여성의 진보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개인 체험을 바탕으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인간적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봉건적이고 인습적인 관념의 억압성을 드러내어 해체하는 글들을 써서 사회의 비난을 자초하면서도 시대를 앞서 살아갔던 나혜석은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여성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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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련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이다. 배재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피신, 그후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하이드파크고등학교에서 어학과정을 마친 다음 시카고미술대학과 예일대학을 졸업하였다. 윈체스터 펠로우십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던 중 백남순(白南舜)을 만나 결혼(1930), 함께 살롱 도톤 등에 출품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전을 개최하였으며, 제10회 협전(協展)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1년부터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미술,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이중섭 등을 배출하였다. 8·15광복 후 이북에 모든 작품을 남겨두고 남하했기 때문에 그의 작가적 역량을 가늠하기는 힘들지만 서구회화를 직접 체험하고 소화해낸 지적(知的) 배경을 가지고 있어 근대 한국회화의 층을 두텁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에르블레 풍경》과 개인소장의 《금강산》(1940) 등을 통해서 그의 뛰어난 색채감각과 우수한 조형능력을 찾아볼 수 있으나 그의 작품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군정기간 동안 군정장관의 고문을 역임하였고 서울세관장으로 재직하던 중 납북되어 그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황소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씨의 중학교 스승이기도 합니다.
백남순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백남순(白南順)이다. 1923년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하여 1925∼1927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28년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파리에 유학하여 프랑스미술가전람회에 입선하고, 살롱 데 튈르리에 초대받아 출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0년 파리에서 만난 예일대학교 출신의 화가 임용련(任用璉)과 결혼한 뒤 서울로 돌아와 동아일보 사옥에서 부부 작품전을 가졌다. 1931년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에 부임함에 따라 그곳에서 생활하였으며 서화협회전에 출품하고 목일회(牧日會) 창립회원으로 부부가 함께 참가하였다.
8·15광복 뒤 월남하였으나 6·25전쟁 때 임용련이 납북되자 혼자 성심공민학교(聖心公民學校)를 창설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활동하였다.
나혜석과 함께 국내 여류화단의 문을 연 신여성으로서 자유분방한 필치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대표작인 《낙원》(1937)은 오산에서 생활할 때 그린 작품으로 8폭 병풍에 동양 전통의 산수화와 서양식 풍경화를 접목시킨 대작이다.
오지호
한국 양화의 큰 획을 그어놓았고 한국어문교육의 일대 전기를 마련해 놓은 오지호는 1905년에 화순군 동복에서 출생, 일본 유학시절부터 신미술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이후 그는 무등산 동쪽자락 지산동 길목에 초가를 짓고 조선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림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문화정신을 시민들에게 불어 넣는데 애쓴이로 이름이 높다. 지난 '92년 10주기를 맞아 펴낸 「지산동의 초가와 화실」에서 그의 딸들은 "장관이 오든 반장이 오든 한 자리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든지 나누셨던 선친은 바로 지위고하 부귀빈천의 구분없이 한결같은 이웃 사랑으로 일관하셨다"고 회고한다.
크기는 세로 79㎝, 가로 64㎝이다. 1939년 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에 나오는 집은 바로 작가가 1935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살던 집이다.
오지호는 빛에 의한 밝은 색채를 인상파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며, 특히 한국적인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는데, 이 작품은 그의 이러한 작가적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남쪽을 향하고 있는 햇빛이 잘 드는 집을 그린 것이다. 문을 열고 나오는 단발머리 소녀는 둘째딸 금희라고 하며, 담벼락에 엎드려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강아지는 애견 삽사리이다.
그림자에 회색이나 검은색을 쓰지 않았던 인상주의 회화의 영향으로 나무 그림자를 파란색으로 처리하였고, 노랑·빨강·파랑·초록 등의 색채를 주조로 한 빛들은 고유색이 아닌 햇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적인 색채들을 표현한다. 밝은 햇살이 드리운 한낮의 한가로움이 잘 드러나 있는 이 풍경에서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이처럼 한국적인 빛과 색채의 표현을 통하여 새로운 인상주의 화풍을 탄생시켰으며, 이로써 한국의 자연 풍경과 정서에 맞는 인상주의가 정립되었다.
남향집-오지호
사과밭-오지호 1937
캔버스에 유채. 73×91cm. 화면 전체를 뒤덮은 사과밭에 금방이라도 눈처럼 쏟아질 듯 하얀 사과꽃이 만개해 있다. 힘찬 가지에서 숨가쁘게 피어나 사과밭을 온통 희게 물들인 흰 꽃과 꽃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햇빛이 꽃잎에 투영되어 희게 물든 땅에서도 부드러운 봄의 기운이 느껴진다.
봄빛에 대한 작가의 탐구가 잘 나타난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작은 터치로 나누어 점을 찍듯 그리고, 이러한 점들이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룬 수법은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지호가 즐겨 나타낸 빛의 느낌이 사과밭의 이파리 하나 하나, 꽃잎 하나 하나에 전달되어 손을 흔드는 듯 화려한 이미지를 더해 준다. 밝고 투명한 색채와 가득한 빛살, 경쾌한 붓놀림의 인상주의 화법으로 한국의 자연미와 풍정미 표현에 주력한 오지호의 대표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베니스풍경-오지호
1936년 우리나라최초의 화집 간행
저서-현대 회화의근본 문제,미와 회화의 과학.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알파벳 문명의 종언
국전 심사위원,예술원 회원
1973년국민 훈장 모란장,1977년 예술원상 수상
그의 작품은 동양화의 남화적인 정신을 토대로 대담한 색채를 구사하여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이 지역 미술계의 자존심이자 한국이 자랑하는 화가 오지호,한국서양화단의 개척자이자 국내 인상주의 회화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야수파 화풍을 이 땅에 뿌리내린 분이다. 그는 1905년 전남 화순군 동복에서 한말에 보성군수를 지낸 재영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지주 집안의 여건으로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로 가서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4년 졸업하고 일본의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그 직후 서울에서 김주경 등과 양화단체 녹향회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수법의 유화를 발표하고 1935년 무렵부터는 김주경과 함께 프랑스인상파 작풍의 신선하고 밝은 색채 구사로 한국의 자연미와 풍정미 표현에 열중하였다. 그와 아울러 색채미와 빛의 표현을 본질로 한 순수회화론을 주창하기도 하였고, 1938년 자비로 출판한<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은 한국양화사의 인상과 존재를 선명히 한 것이었다.
8.15광복 직후 1948년부터는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창설에 참여하여 196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고 호남지역 양화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년기 이후의 작품활동에서는 인상주의 미학을 소화한 독자풍의 생동적인 필치로 풍부한 색채현상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말년에는 유럽여행의 감흥을 분출시킨 자유분방한 필치의 작품도 많이 남겼다. 1960년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1973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 1977년에는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작품활동 이외에 자신의 예술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1968년에 논문집'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하였다.
1982년 교통사고 휴유증으로 사망한 뒤 미망인이 유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대표작으로 는 '사과밭', '추광', '항구' 등이 있다. 평론가들은 오지호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아름다움을 추구한 회화'라고 말하고 있다. 평소에 '회화는 빛의 예술이고 태양에서 생겨난 예술이므로 그림은 생명력을 지닌 순수미술이어야 한다'고 말한 오지호의 그림세계는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동경미술학교 졸업부터 1950년까지 전기의 그림은 사실적 시각에 입각해 조국의 자연을 밝고 맑은 색조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속칭 인상주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빛과 색채로서 자연을 표현하고 거기에 예술적 생명을 창출해 내는 그림세계를 보여주었다, '남형집', '처의상' '포구' 등 전기의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투명하고 눈부시게 밝은 색채와 필선으로 이뤄졌다. 특히 '사과밭'은 사과꽃과 잎의 색채혼탁을 피하기 위해 점묘법을 사용,5월의 태양빛 아래 만개한 사과밭의 아름다움을 수려하게 보여주고 있다.
50년 무렵부터 59년까지의 중기 그림들은 전기와는 달리 변형이 심했다. 화면이 단순화되고 변형되어 능숙한 필치가 엿보였다. '추경' '창가의 꽃' '카토리아'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60년 이후 말기의 그림세계는 중기에 보였던 변형와 왜곡이 한층 심화되어 화면이 더 단순화 되었다. 색채도 청색 계통이 자주 등장하면서 화면이 강렬한 인상을 풍기기 시작했다.
이른바 야수파적 그림세계가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추광' '항구' 피카델리 풍경' '과수원' 등이 이 시기 대표작으로 작가자신의 색책이론에 따라 새롭게 창출한 작품들로 오지호만의 극히 단순화된 주관적 형태미를 보여주었다. 특히 국어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국어교육에 대한 중대한 오해' '알파베트 문명의 종언' 등의 글을 발표해 국문전용 어문정책을 비난하면서 국한문 혼용을 주창하고 나섰다.
인상주의 토착화의 기수로 나서 민족미술교육의 선각자로 화려한 생을 살다간 오지호, 1922년 조선서화협회전이 한창이던 어느날 한국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의 유학작품을 보고 '이것이 유화로구나! 새로운 그림이란게 이것이었구나! 이 강렬한 색채, 이 힘찬 필치! 하면서 감탄한 후 색의 세계에 뛰어들어 일가를 이룬 자랑스런 광주 사람이다.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대구화단의 선구자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이인성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다. 2년뒤인 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했다. 주위의 후원으로 31년 도쿄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을 하고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다. 졸업장은 물론 없다.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등을 기록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했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만한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32년 가을)'가을 어느날'(34년)을 비롯,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다.
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49년에는 제 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한다.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다.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린 인물.그와 동시대의 작가인 김환기,박수근,이중섭 등이 50~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해 70~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 대비된다.
이인성의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35년). 98년 월간미술이 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유화 베스트10'에 김관호의 '해질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됐던 작품이다. '가을 어느 날'(34년)'복숭아'(39년)''해당화'(44년) 등의 명작들도 소개된다. 그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까닭을 이 그림들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근대화단에서 가장 띄어난 수채화가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카이유'(32년)와 '아리랑고개'(34년)'여름 실내에서'(34년)등의 정물.풍경화뿐 아니라 아내와 딸 등 주변 모델의 특징을 예리하게 포착한 인물화도 소개된다.
이중섭(李仲燮,1916.4.10 - 1956.9.6). 호 : 대향(大鄕)
한국의 서양화가
1. 서 문
대향은 1916년에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742번지에서 부친 이희주의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흔히들 이야기하기를 천재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난다고들 한다. 그 점 중섭의 만년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으니 명실공히 천재다운 죽음이었다. 중섭은 영악하지 못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고 오직 남을 믿는 마음속에만 살아온 그의 일생은 손실의 연속이었다.
꿈에 살면서 현실을 모르는 그의 성격은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순수했다. 순진무구, 그것이 중섭의 인간성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의 중섭은 그이 천재의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으로 남이 도달하지 못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갔다. 중섭은 예술은 다른 천재들의 그것과 같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그의 감각은 감히 남이 도달하지 못한 깊은 곳에까지 파고들어 미(美)의 영토를 개척했다.
누가 보든지 일견 중섭의 그림이라고 알 수 있는 구상적인 형태라든가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색감의 세계이며 기상천외한 구상이나 구도의 묘(妙)같은 것은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천생의 소질만이 이룩할 수 있는 고유의 영토이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이 거리낌없이 나오는 것 그것이 중섭의 예술의 본질이다.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섭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중섭의 예술은 다른 천재들과 같이 민족적이다. 중섭의 민족은 한국적이요, 한국하고도 북방적 요소에 가득찬 한국이었다. 중섭의 예술이 한국적이라는 것은 그이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유동하는 선조(線條)감각에서 엿볼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고구려의 벽화의 선조감(線條感)에 직결하는 그이 표현의 특성은 가장 민족적인 감각이었다.
여기서 중섭이 도달한 민족적 특성은 세계의 누구나가 공명할 수 있는 국제적 감각으로 번져간다. 이미 괴테도 말했듯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 되기 때문이다. 중섭 예술의 특질을 이야기할 때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그의 조형가로서의 조형능력 이외에 그가 재료의 영토를 확대시켰다는 사실이다. 중섭은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발상이 일어나면 주변에 있는 아무 물질이나 택용했다.
그의 작품중 캔버스에다 유화로 그린 것보다는 종이에다 과슈 또는 시험지 심지어합판등에다 닥치는 대로 그런 것이 더 많다. 물론 그것은 빈곤 때문에 일어난 결과이지만 양담배의 은지에다 그린 그의 작품은 미술재료의 확대라고 해서 미국 뉴욕의 모던아트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2. 중섭의 예술세계
생(生)의 자독(自瀆)과 자학(自虐)속에 그의 생을 단축시킨 고독과 빈곤의 예술가 이중섭의 예술을 통괄할 적에 거기에는 야수파적 요소와 비극적 요소, 그리고 향토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중섭 예술의 야수파적 요소라는 것은 중섭의 시대적 적응 속에서 근대에서 현대로 급격히 이행하는 1930년대의 이 나라 미술가가 공동적으로 지닌 예술세계이기도 하다.
1905년을 전후하여 유럽에서 일어난 이 예술가의 유파가 감성의 해방,색채의 해방을 부르짖으면서 세계로 파급되어 일본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화가들이 이 미술운동의 영세를 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중섭은 그러한 사람의 한 사람으로「단순화된 포름」고 선명한「원색적 색조」그리고「대담한 필족」으로 새로운 화면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수법적으로「3차원 공간 구현의 대담한 무시」,「생생한 젊음」, 이런 것들이 내적인 생의 리듬을 타고 그의 환희 속에 전개되어갔다. 다이내믹한 필촉, 혼돈을 반영하고 혼돈을 낳고, 더구나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세계상으로 형성하여 가는 중섭의 포비즘,색채의 환희 속에서 색채로써 표현된 인간의 내면을 노래 부르는 중섭-그것들은 1954년 비협전 출품작 ,<소>와 <닭> 또 그의 작품전에 출품했던 <닭>,<소>,<싸우는 소>,<황소>,<흰소>,<새들> 또는 1955년 11월초 잡지「新美術」에 소개된 <鬪鷄>등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이 보석과 같이 빛나는 작품들은 오늘날 어디로 스며들었는지 대중 앞에는 하나로 볼 수 없는데 무지와 우매 때문에 소멸되지 않기로 바랄 뿐 아무 대책을 못하는 것이 안타갑다. 중섭의 포비즘은 그것 자체가 전형적인 것인데 그렇다고 그것이 순전히 수입해 온 서양적인 것이냐하면 거기에는 이의가 있다. 그것은 이조의 쇄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한국의 근대정신이 그 근대화를 위하여는 의당 지녀야 할 정신적 외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수파적 요소가 이 무렵의 우리 미술사에 가장 강하게 폭 넓게 침투한 것은 그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 중섭은 예술 생리로서는 야수파적이었으나 체질적으로는 에꼴 드 파리에 가까운 예술가였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중섭의 생존 당시부터 그의 외모,생활이나 예술을 볼 때 늘 모딜리아니를 연상했다. 우선 미남이라는 것, 체격이 좋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고독과 빈곤 속에 자기의 예술을 위하여 생을 자독하고 자학하고 마침내 자기를 스스로 연소시켰다는 것.
선과 악이 공존하여 늘 그 상극에 고민하였다는 것 그러면서도 작품은 주옥과 같이 고귀하고 순일하고 청순하였다는 것, 모딜리아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곧 중섭의 그것이요, 중섭의 그것은 모딜리아니의 그것이었다. 다만 틀리는 것은 무대와 규모와 양식이 다를 뿐이다.
중섭예술의 향토성이라는 것은 주제의 전개가 <소>,<닭>같이 향토적 주제의식에 사로잡혀 그의 작품이 포비즘이면서도 오늘의 한국인에게 서양에서 빌어왔다는 의식의 유리(遊離)없이 순수하게 공감시킨다는 것이 외에 그의 풍경화는 한결같이 남화적인 정취를 갖고 있다는 데서 말할 수 있다.
1952년 3월 부산「綠園」다방에 전시된 작품<봄>(원산시절의 제작)이 그의 대표적인 것이지만 통영시절의 풍경화 몇점 그리고 1955년의 작품전에서 볼 수 있었던 풍경화들이 모두 남화적인 정취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의 <소>나 <닭> 등이 감성의 해방과 대담한 필촉과 다순한 포름으로 능히 고구려의 벽화 예술에 직결한 데 비해 몹시 달황할 정도로 남화적이다.
물론 이 풍경화들도 본질을 파악하려고 전체적으로 발라다 본 자세나 매스로서 형성한 형태감 같은 데서 그의 예술생리를 엿볼 수 있으나 그래도 어딘지 목가적이고 관조적이고 음악적인 것이 크게 눈에 뛴다. 이 향토의식의 발로는 늘 고향을 떠나 이국여성과 결혼하고 이방인처럼 살아온 유랑민 중섭의 마직만 한가닥 고향 의식인지도 모른다.
좌우간 그는 풍경화에서의 주제전개에서 향토적 풍토미를 평생 잊지 않았다. 중섭 예술의 비극성은 그의 만년이 비극으로 끝났기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위대한 예술가들은 비극적인 세계에서 그의 진가를 발휘하고 그것을 통해 인류와 대화하였기에 불행하였던 자연인 중섭보다는 비극으로 끝난 예술가 중섭의 호소가 우리들 가슴에 그 무엇을 남겨 주었다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중섭은 해방 전까지는 행복하였다. 따라서 그의 비극은 격동하는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부산에 내려가 피난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무력자를 자인한 그 기 빠진 심정적 우울의 에고이즘과 외면적 불구 속의 파탄을 중섭은 너무 자책하는 나머지 그리고 이것을 깊이 파고들어가 생각하는 것은 도피하여 자방자기한 나머지 자기에게 패배를 초래했고 그 패배는 허무를 낳고 그 허무는 생의 자독과 자학을 초래하고 그것은 마조히즘을 이끌어 자아분열을 일으키고 그것은 마침내 생의 무관심을 초래하여 실심,실어,실망 속에 마지막으로 생에 항거하여 일체의 음식을 거부함으로써 자기와의 세계에서 복수를 하였다.
3. 마사꼬(山本方子=李南德여사의 일본이름)와 만남. 결혼. 이별
마사꼬는 1945년 4월경 일본 문화학원 재학시부터 중섭과 교제를 해온 후배이며 일본 삼정물산 중역을 역임하고 당시 전일본 창고주식회사 사장의 딸인 야마모도 미사꼬(山本方子)가 임시 부관 연락선을 타고 원산으로 찾아왔었다.
같은해 5월 야마모도 미사꼬(山本方子 =李南德)와 결혼하여 원산시광석동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47년 큰아들 태현(泰賢)이 태어났고, 1949년에 둘째 아들 태성(泰成)이 태어났다. 1950년 6.25 동란이 터지자 12월 6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군국.유엔군이 후퇴할 때 처자와 조카 영진을 데리고 화가 한상돈의 가족과 함께 배편으로 부산으로 남하하였다.
1952년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과 참담한 생활고로 영양실조가된 아이들을 위해 부인은 두 아들과 함께 부산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제3차 일본인 송환선으로 동경 친정으로 건너갔다. 그후 1953년 시인 구상의 도움으로 지산만으로부터 선원증을 얻어 동경으로 건너가 몽매에도 그리던 처자를 만났으나 2주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4. 일생 마감
중섭은 1956년 영양실조와 간장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하였다. 청량리 뇌병원 무료환자실에 입원시켰으나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구상이 간장염 치료를 위해 서대문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이때 뉴욕 소재 현대미술박물관에 은지화 3점이 영구 보존키로 결정되었다. 같은해 9월 6일 간장염으로 아무도 없이 홀로 운명하였다. 나이는 만40세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3일간이나 시체실에 방치되었다가 뒤늦게 친지들이 모여들었고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봉원사에 맡겼다가 후에 망우리에 장사지냈다. 같은해 늦가을 조각가 차근호 제작의 묘비가 세워졌다. 1978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에 훈장이 추서되었다.
허백련
1891년 11월 2일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의제 허백련은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때는 명치대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관의 꿈을 꾸어 보기도 했으나 그림을 잊을 수 없어 곧 중퇴한 뒤 일본 남화의 대가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 사사, 남화의 기법을 익혔고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로 1등 없는 2등의 최고상을 차지한 후 그의 작품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의제는 일본에서 기법을 익혔으면서도 일본 색채에서 탈피하면서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하여 굳게 토착화 시켰다. 처음에는 화조, 송하 등에도 손을 댔으나 만년에 들면서 산수화만을 즐겨 그렸으며,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 엷은 담채(淡彩)가 아니면 묵으로 그린 그의 수묵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짙은 채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는 서민적이고도 토착적인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제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명예 철학박사 학위(전남대학교)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 회원이기도 하였던 진도가 낳은 의제 허백련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아버지는 경언(京彦), 어머니는 박동애(朴東愛)로 다 같은 1870년(병오)생이다. 의제는 양천허씨로 진도에 처음 자리잡은 허씨의 12대 손이며 현재 진도에 있는 대, 중, 계 3파 가운데 계파에 속한다. 대파는 입도조인 허대(許隊)의 큰 손자 즙의 후손이며, 중파는 둘째인 순(珣)의 후손으로 소치와 미산, 남농이 여기에 속하고, 의제는 계파인 셋째 방(芳)의 후손으로 의제 때까지 해서 7대 종가이다. 백련이란 이름은 태어난지 며칠되지 않아 지어졌다. 하루는 어머니 박씨가 꿈을 꾸는데 백발 신선이 나타나 의제를 「백년돌」이라고 불렀다 한다. 꿈을 깬 어머니는 백련돌이란 말은 곧 장수한다는 말로 생각하고 아명을 「백년」으로 지었다. 여기에 아버지 경언이 한문으로 백(百)자와 련(鍊)자로 붙여주어 결국 아명이 본명으로 되고 말았다.
8살 때 의제가 찾아간 서당은 진도읍 동외리 원동에 있었는데 20여명이 다녔다. 선생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였다. 1889년에 병과에 급제한 뒤 예조참의와 내부참의 등을 지낸 사람이나 1896년 무고를 받고 진도군 의신면 접섬에 귀양 와 있었다. 이것을 안 소치가 진도군수에게 청을 넣어 소치 집이 있는 사천리로 옮겨 왔으며 그 뒤 진도면 동외리 원동에 글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 무정을 만난 것이 의제의 인생에 큰 자극을 주었다. 무정은 의제에게 학문과 글씨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다. 의제가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간 것도 무정의 영향이 컸으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뿌리치고 그림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무정의 격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의제가 서당 동무들과 풍월을 즐기던 쌍계사 동남쪽엔 소치가 마련한 운림산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의제가 쌍계사에 놀러 다니면서 운리산방에 드나들 때 소치는 이미 타계(他界)하였고 그의 아들 미산이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의제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에서 미산의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잠재적인 소질이 싹텄다고나 할까?
의제가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11살 되던 1901년부터였다. 의제가 미산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어지간한 붓글끼는 익힌 뒤였다. 맨처음 흰 모란을 그리는데 유의해야 할 붓 쓰는 법과 먹 쓰는 법등 몇가지를 가르쳐 준 뒤 그대로 그려보라 했다. 대개 꽃을 그릴 때는 붓 쓰는 법을, 잎사귀를 그릴 때에는 먹 쓰는 법을 유의하면서 그리도록 가르쳤다. 더욱이 의제 선생의 그림공부를 측면에서 적극 지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서당 선생인 무정 정만조였다.
15살이 되자 「의제」라는 호까지 내려 주었다. 의제가 15살되던 1905년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고향 진도에 와있던 안국선이란 사람이 무정과 손을 잡고 당시 진도면 동외리 가마골에 있던 서당 자리에 광신학교를 설립교장이 되었다. 이때 의제 허백련도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던 중 1908년(18살 때) 가을에 의제의 어린시절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무정 정만조가 귀양이 풀려 진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의제는 무정의 뒤를 따라 상경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간 의제는 무정 정만조 선생댁에 기거하며 김용식, 지석영 등이 세운 기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한일합방으로 국치를 당하여 그만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에 들어 갔으니 그 고생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신문배달 등 일생에 가장 허기졌던 나날이었다고 하니 그런 중에서도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1913년 5월 도오쿄에 온지 두달 뒤 평소에 생각했던 명치대학에 등록하였으나 그해 11월에 그만 집어 치우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 당시 일본 남종화의 제1인자였던 소실취운(1874년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본 미술전의 심사위원이고 도쿄 미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으며 「우에노」공원 옆의 조용한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제의 말을 들은 그는 우선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의제는 입학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산수 한 장을 열심히 그렸다. 『솜씨가 대단하군. 열심히 하면 대성할 소질이 있다』하면서 자기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제 허백련 선생은 안정된 일본 생활속에서 그림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알차진 것이다. 우연욕서(偶然慾書)-추사 김정희의 말과 같이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림이고 글씨고 하고 싶을 때 그리고 써야 한다』추사가 했다는 이 말은 의제가 오래전에 구전으로 들은 것인데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올라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1918년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김영수를 만났다. 김영수는 강진 한 부호의 출신으로 변호사였고 일본에서 의제를 많이 도와준 친구였다. 그때 김영수는 불치의 병인 폐병에 걸려 허덕이는 처지라 의제는 일본에 가려던 계획을 잠간 멈추고 김영수를 광주부립병원(전남의대병원)에 입원시키고 병원 옆 여관방에 들었던 것이 후에 의제가 광주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의제는 광주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면서 주로 목포와 강진을 자주 왕래했다. 미산과 김영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특히 목포에 가서는 미산의 소개로 많은 일본인들과도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의제는 화순에 있는 박현경의 별장에서 잠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인촌 김성수를 만난 것이다. 당시 인촌은 자기가 세운 경성방직 주식회사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주주인 박현경에게 출자를 요청하기 위해 화순까지 찾아왔다가 의제와 만난 것이다. 동갑인 두 사람은 도쿄에서 헤어진 이후 오랜만에 엉뚱한 곳에서 해후를 했다.
의제는 법률 공부를 집어 치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그간의 사정을 뚝 이야기 했다. 『그래! 어디 그림 구경 좀 하지』 의제는 그간 그려뒀던 그림 몇장을 꺼내 인촌에게 보였다. 그림을 감상하던 인촌은 감탄하며 그 가운데 한 폭을 원하므로 옛 우정을 생각하며 기꺼이 주었다. 그 후 인촌은 그 그림을 가져가 서울에 있는 서화미술회 회원들에게 보였다. 서화미술회라고 하면 당시 유명한 서화가들이 모인 단체로 1911년 3월경성서화미술회로 문을 열었는데 서화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후진도 양성하는 모임이다. 의제의 그림을 본 회원들은 좋은 그림이라고 감탄을 했다. 그들은 도대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인촌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삼절 허소치의 집안 손자라고 소개를 하여 서울 화가들의 머리속에 의제를 심어 주었다.
1912년 저물어 가는 늦가을이었다. 의제는 금강산을 구경할 생각으로 개나리 봇짐을 챙겨들고 서울과 원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 두달을 머물렀다. 금강산에 들어선 의제는 지금까지 그 많은 금상산의 그림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답고 청아한 풍경을 어찌 붓끝으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내, 외 금강을 두루 보고 장안사, 유천사, 신계사 등에서 묵으며 풍광에 취하여 스케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의제의 금강산 소묘는 수십장에 달했으나 6·25동란 중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금강산 나들이는 그의 산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의제는 금강산에 다녀온 다음해인 1922년 2월에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나이 30살을 넘어 32살이었다. 동대문 밖 여관에 여장을 푼 의제는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가 뜻밖에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그가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서있는 의제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인촌을 만나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오후에 동아일보사로 오라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사는 의제가 다니전 화동 기호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의제가 찾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고하가 인촌에게 전화 연락을 해주고 찾아 가도록 했다. 동아일보사 취재역이던 인촌은 계동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 날부터 인촌 집 2층 방을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촌은 항상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 도와준 은인이다. 그의 우정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하며 인촌의 우정에 감사했다.
의제는 인촌 집에 있으면서 정말 차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밖에 나갔다 돌아온 인촌이 조선미술전람회 개최를 알려 주면서 작품을 내라는 것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치를 표방한 총독부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1922년부터 열기 시작했다. 의제는 인촌의 말을 듣고 「하경산수」와 「추경산수」를 화선지 한 장 반 정도의 크기로 그려 출품하였다.「하경산수」는 완전한 묵화고, 「추경산수」는 담채였다. 출품한 2점 가운데 「추경산수」가 2등상을 차지하고 「하경산수」는 입선을 했다. 이때 이당 김이호는 「미인승무도」라는 작품으로 4등을 했다. 그 뒤 일본 명화와 중국 정통화법에 대한 견문을 넓혀 한국의 대가가 되라는 후원회의 격려를 받으며 의제가 다시 일본에 간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의제는 도쿄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여러 친구들과 사귀었다. 무호 이한복, 수운 김용수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김철 수 등이 그때 사귄 사람들이다. 어언 의제 20살 때 처음 서울 유학을 떠난뒤 20여년을 방랑으로 보내면서 34살의 노총각에 22살의 성연옥과 결혼하였고 이제 불혹의 나이 40살이 되었으나 의제의 떠돌이 생활은 여전했다. 1939년 광주에 있는 서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친목단체인 연진회를 만들었고, 1946년에는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차 밭을 구입하여 농업기술학교 건립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4년 10월 21일 단군 무등산 신선인 천재단에서 개천궁 건립기공식을 가졌다.그러나 인걸은 세설에 쓰러지는가! 1977년 2월 15일 오후 2시 15분 남종화의 큰 한 별은 떨어졌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그림을 그려야지』 평소에 이렇게 말하던 그는 지금도 저승에서 붓을 쥐고 있을 것이다.
김은호
철학이랄 것은 없고 구한말에 어진(황제의 초상화)을 그렸을 정도로 유능한 궁정화가였는데 일제 때는 일본화를 그렸고 해방 후에는 세밀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 시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시대에 활동했던사람들은 독립운동가나 지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국가의식이나 민족의식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와 관계없이 생존을 위해서는 당국이 시키는 대로 일본 스타일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1892. 6. 24 경기 인천~1979. 2. 7 서울.
근현대 한국화 분야 채색화가.
호는 이당(以堂).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7세 때 집안이 몰락하여 한때 인쇄소 직공과 측량기사 조수로 지내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12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여 조석진·안중식 등의 지도 아래 전통적인 관념 산수, 중국 미인도, 화보를 모사하거나 사생을 통해 그림공부를 했다. 그해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려 기량을 인정받았다.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명성을 얻어 윤덕영·윤택영·이희원 등 당시의 세도가와 최제우·김인국(시천교 교주) 등의 초상화를 그렸고, 1913년 덕수궁 어전 휘호회(御殿揮毫會)에 참여하기도 했다. 채색인물화와 화조화에 뛰어났다. 초기작인 〈민영휘 초상〉(1912)·〈고종 초상〉(1912)·〈순종 초상〉(1912)에서는 섬세한 필치로 얼굴의 곡면과 입체감을 살려 사진과 같은 사실성을 보여주었다. 이는 전통화법으로부터 벗어난 일면을 보여준 것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재현하려는 근대적 조형관으로의 변모를 나타냈다. 1915년 프랑스 공관에서 열린 미술전람회,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했고, 1918년 최초의 근대미술가단체인 서화협회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옥에 갇혔으며, 1920년에는 이상범·노수현·오일영·이용우와 함께 창덕궁 대조전 벽화제작에 참여했다. 서화협회 전람회뿐만 아니라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1회 4등상, 2회 입선, 3회 3등상, 4회 입선을 했다.
1925년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도쿄미술학교 수업도 청강했다. 일본에 머문 3년 동안에도 계속 선전에 출품하여 상을 받았다. 성덕태자 봉찬미술전(1926), 제국미술전(1926, 1927)에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일본 귀족의 주문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당대의 생활상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수접미인도〉(1921)·〈아이야 저리 가자〉(1923) 등에서 볼 수 있는 가늘고 부드러운 필선과 감각적인 색채는 일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선전에서의 상위 입상과 협전·선전의 동시출품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 한때 선전출품을 중단했다. 1937년 선전 심사 참여자격을 얻고 추천작가가 되면서 다시 출품하여 해방될 때까지 명성을 유지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전시파쇼체제가 강화되자 1937년 친일미술가단체인 단광회와 1942년 조선남화연맹전, 반도 총후미술전 등에 참여했다. 전통회화분야에 제자들이 많은 것도 일제시대 그의 명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백윤문· 이유태 등이 1936년 후소회를 결성, 해방 후에도 김은호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했다.
해방이 되자 친일화가로 따돌림을 받았으나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1948년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열리면서 추천작가 자격으로 출품했다. 그 뒤 심사위원과 추천작가를 지내면서 국전출품작의 화풍과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전체 화단에도 영향력을 키워갔다. 해방 후에는 역사인물의 초상화 제작에도 한 몫을 했다. 〈신사임당〉·〈이이〉·〈이순신〉·〈논개〉등의 공인 영정과 인도 간디 수상의 초상을 제작했다
안중식
본관 순흥(順興). 호 심전(心田). 벼슬은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양천(陽川)·통진(通津) 군수를 지냈다. 일찍이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관비생(官費生)으로 중국에 유학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산수·인물·화조(花鳥)를 잘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詩)에도 능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 《낙지론도(樂志論圖)》 《산수도(山水圖)》 《성재임간도(聲在林間圖)》 《군작도(群雀圖)》 등이 있다.
변관식 [卞寬植, 1899.3.19~1976.2.17] 동양화가.
호 소정(小亭)
활동분야 미술
출생지 황해 옹진(甕津)
주요작품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이어(鯉魚)》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소정(小亭)이다.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서 도화(陶畵)수업을 받은 후 외조부 인 소림 조석진(趙錫晋)이 관여하던 서화미술원에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청강생)를 수료하였다.
8·15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심사부조리를 개탄, 국전을 포기 외면하고 이후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靑田)과 달리 적묵법(積墨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옥류청풍(玉流淸風)》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가 있다.
변관식 - 외금강삼선암추색 http://kobaw.com.ne.kr/b-oggssacs.htm
김환기(1913-1974, 전남 신안군)
김환기는 1913년 2월 전남 신안군의 기좌도에서 출생했다. 부친 김상현 씨는 거의 천 석 가까운 수확을 하는 지주였다. 가야금 연주가 수준급이었으며 엽총 사냥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고향 국민학교를 졸업한 김환기는 곧장 서울의 중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유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지닌 남서해의 한 섬에서 서울로 유학 가는 길이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상상에도 불구하고 김환기가 그 유학에 어떤 어려움을 느꼈다는 기록들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가 일제 치하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경제적 여유가 김환기의 성격에 유형 무형의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 또한 어렵지 않다.
산, 달, 매화, 사슴, 여인, 새, 항아리…. 확실히 그가 즐겨 그린 소재들은 한국적이며, 본질적으로는 동양적이다. 그 중에서도 그가 특히 애착을 가진 것은 이조백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거의 광적이어서 일제 말인 1944년부터 육이오가 나기 직전까지 거의 매일 한 점씩의 도자기를 구입해 들였다 한다. 이를테면 이조백자를 그에게 있어 '꽃이 존재하기 전의 꽃의 모습' 같은 것이었다.
"조형의 미를, 민족을 나는 도자기에서 배웠다. 지금도 교과서는 바로 우리 도자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그리는 것이 여인이든 산이든 새든 간에 그것들은 모두 도자기에서 오는 것들이요, 빛깔 또한 그러하다."
이조백자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환기의 데뷔작은 '이과회'에서 응모하여 입선한 <종달새 노래할 때>(1953)로 알려져 있다. 1938년에 김환기는 동경 자유미술가협회전에 <론도>라는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전이되는 과도기의 작품으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한 원조로 기억되며, 유럽화가들의 기계적이며 기하학적인 추상 기법에 비하여 훨씬 동양정신에 근접해 있다는 후대 평론가들의 후한 평판을 얻게 된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김환기의 작품은 어느 도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아니, 세계의 어는 전장 속에서도 추상 미술이 꽃을 피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은 실존이었으며 그 극한이었다. 이 기간 중 김환기가 이뤄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혼과 재혼이었다. 42년 그는 첫부인과 이혼을 하며, 44년 수필가 김향안 씨(한때 이상의 부인)와 재혼을 하게 된다.
김환기에게 해방 공간은 행운의 시점으로 다가온다. 옛주둔군의 수도에 유학한 이력들이 이제 빛나는 훈장으로 빛을 발하겓 되는 것이다. 그는 국립 서울대학의 미술학부의 강의를 맡게도 되고, 국전 심사 위원과 서울시 문화 위원 일을 보게도 된다. 이즈음 그는 유영국, 장욱진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조직, 그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김환기의 고향에 있는 안좌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인 김병무 옹은 2회 졸업생인 김환기에 대한 몇 개의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팔망미인이었지. 그림, 글씨, 음악 다 좋아했어. 한번은 방학 때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연극공연을 했던 적도 있지. 장풍(長風)이란 제목이었는데 내용은 오래 돼 까먹었어. 환기가 중심이었지."
같은 학교 3회 졸업생인 김진구 옹은 김환기의 사촌 조카인데 당시 김환기와 함께 서울과 동경 유학을 했다. 명치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인텔리인 그의 김환기에 대한 기억은구체적이었으며 상당히 전문적이었다.
"중학 다닐 적에 한방을 둘이 같이 썼지. 바이올린을 늘상 켰는데 키가 육척이라 운동, 특히 농구를 잘 했어. 그림은 일본 유학가서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도고세이지와 후지다스쿠지의 영향을 받았지. 이 사람들 그림은 내가 보아도 뭔가 조금 통하는 게 있었는데 당시 김환기의 그림은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 아이들 장난 같은 그림이었는데 이중섭이와는 좀 달랐어. 중섭의 그림은 처음 본 사람도 친근감이 있거든.
불란서 갔다 온 뒤에 전시회에 갔더니 그림이 참 좋아졌드만. 그때 하나 주라 했더니 안 주었어. 그 사람 그림 가진 사람 우리 주위에 한 사람도 없어. 주질 않았지. 돈 주고 사라고 해. 친척도 소용없었지. 그림은 그 당시도 비싸게 팔아 묵었어. 아주 독하게 비쌌지. 해방됙 전에 금강산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지. 미도파에서 전시회를 하고 내 방에 그 그림들을 쌓아 놓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 그림들이 다 없어지게 되었지. 지금도 숙모(김향안)가 찾으려 애를 쓴다는데 행방을 알 수 없어. 술을 잘 마셨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셔 버려. 남의 술은 절대 안 얻어 먹으려 했어. 자기가 다 내려 했지. 여자들에게는 참 인기가 좋았어. 소위 예술계 계통 여학생들은 모두 다 그를 좋아했어. 그림, 글, 인물, 음악, 다 뛰어나니 어디 좋아하지 않고 견디겠어? 예술회장 했던 조경희도 김환기를 썩 좋아했지."
평론가들은 김환기의 작품에 고향 바다가 나타나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고향의 부재, 정신의 부재라고 비판한 친구들도 있었다. 지주 계층으로 일찍이 일본 유학의 혜택을 입은 김환기에게 어차피 고향이란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보다 더 자유루온 예술의 세계를 꿈꾸었고, 파리와 뉴욕에서의 생활은 그 꿈의 현재적 실존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곽재구 기행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에서 발췌 인용했습니다.
그의 점묘(點描)시리즈 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탔다.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그린 것으로 국내에서 호평을 받았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간 金煥基는 1974년 뇌출혈로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 ‘무제’(1972년 작)는 국내 경매에서 3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근현대미술작품의 국내 경매 사상 최고 액수였다. 한편 외국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작품들이 3억∼4억원대에 팔리며 국내 작가 중 최고가를 형성해왔다. 박수근의 ‘절구질’은 1997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38만7500달러(약 4억30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유영국 [劉永國, 1916~2002.11.11]
산 [山] http://100.naver.com/100.php?id=759088
한국의 서양화가 유영국(劉永國:1916∼2002)이 1981년에 그린 작품.
작가 유영국
종류 캔버스에 유채
크기 73×91㎝
제작연도 1981년
유영국은 1930년대 도쿄[東京] 유학 시절부터 추상 작업을 시작한 이래 한국 모더니즘의 제1세대 작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은 산·길·나무 등의 자연적 소재를 추상화면의 구성요소로 바꿈으로써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강렬한 색채가 어우러진 시적 아름다움과 경쾌한 음악적 울림을 자아낸다.
유영국은 특히 산을 주로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1960년대 말부터 그는 ‘산’이라는 모티프를 사용하였는데, 자연을 구체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선·면·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인 형태로 탐구하였다.
이 작품에서 산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은 마름모꼴의 선으로 잘게 나누어져 초록·연두·보라·빨강·흰색의 색면으로 색칠되었다. 질서 있게 나누어진 마름모꼴의 형태와 색에서 변화와 통일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는 사실적이고 구상적인 경향의 작가들이 국전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무렵 ‘모던아트 협회’를 결성하고 반(反) 아카데미즘을 천명하면서 현대미술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아울러 평생 시류(時流)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산(山) 추상’을 고집했다. 그것도 간단한 선과 면, 다섯 가지가 채 안되는 색깔만으로 말이다.
윤명로 이사장은 “나무와 숲과 계곡과 그 속에 자리한 바람과 해와 달로 흔들리고 빛나는 풍경들은 그가 엮어내는 한결같은 조형의 주제들이었다”며 “즐겨 쓰던 빛깔들은 한정돼 있었지만, 교묘하게 짜여진 색채와 형태의 대비는 자연의 떨림을 가시적 대상으로 뒤바꿔 놓았다”고 평한다.
유 화백은 담백하고 과묵한 자신의 그림처럼 ‘그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절대 논리를 몸으로 실천한 예술가였다. 교수로서 서울대(2년3개월)와 홍익대(3년)에 잠깐 몸담기도 했지만, 후배나 제자를 키우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25년 넘도록 심장 박동기를 가슴에 달고 살았고 7, 8번씩 쓰러지기도 했지만 결코 붓을 놓지는 않았다.
근원 김용준 - 김환기---동동-------------------------------------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210-8. 그 곳 자하문 터널 위쪽 부암동사무소 근처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1992년 개관한 그 곳에 가면 1971년 뉴욕에 머무르던 김환기가 그린 ‘Untitled 14-03-71, 1971, Oil on cotton, 250 × 193㎝’라는 그림이 있다. 점점이 그 연한 분홍의 둥근 세계. 그 그림을 마주하고 서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원이나 선이라는 단순한 조형에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작은 점들을 찍어나간 뉴욕 시절 김환기의 변모는 한국현대미술사의 작지 않은 사건에 해당한다. 미술평론가 이일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글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1970년. 김환기가 1974년 7월 25일, 61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별세하기 불과 4년을 앞둔 이 해는 비단 화가로서의 그의 생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 전체를 위해서도 기억될 만한 해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것이 100호 크기의 그 작품의 제목이었다. 김광섭의 시 한 구절을 따서 붙여진 작품 제목도 제목이려니와, 7년간의 체미(滯美) 생활의 일종의 중간 결산이랄 수 있는 모처럼만의 이 대작은 우리 화단에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선은 김환기의 화가로서의 변모가 가히 놀라울 만한 것이었을뿐더러, 문제의 작품은 그때까지의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바꾸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환기미술관에서 만나는, 그 밤하늘의 별들처럼 영롱한 아름다움이란 바로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고 더 너른 세계, 우리가 보편이라고 부르는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한 예술가의 마지막 몇 해에서 비롯한다. “편지의 구절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앞바다 돗섬에 보리가 누르렀다 한다. 생각나는 것이 많다”고 김환기가 일기에 썼듯이 그 아름다운 점들 안에는 삶의 모든 것들이 숨어 있다. 서울 부암동 골짜기에 그처럼 너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환기미술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3층 전시실로 들어서면 북악산 바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직사각형의 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떤 캔버스보다 자연 그 자체가 아름답다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환기미술관을 설계한 오규승은 이를 “건축의 축과 계곡의 방향을 일치시킴으로써 골짜기 내에서의 공간의 흐름을 부각시키는 한편 건물들 사이에 동서 방향의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그 축을 따라 북한산성과 인왕산 등 원경을 차경으로 도입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런 설계목적 때문에 환기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내려다보자면, 상당히 좁다고 생각했던 공간이 정작 내부에서는 탁 트이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자연과 조화롭게 어울린 곳이지만, 왜 하필이면 그 곳에 자리잡게 됐는지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다. 인사동처럼 시내에 위치했다면 사람들이 김환기의 작품을 좀더 쉽게 관람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환기미술관이 부암동에 자리잡기까지는 필연성이 있다. 그리고 그 필연성 이면에는 1940년대 예술인들의 우정이 겹쳐진다.
늙은 감나무의 집
환기미술관이 왜 부암동에 자리잡게 됐는지 관장인 오광수는 〈김환기와 환기미술관〉이란 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미술관이 자리잡을 위치로 먼저 상정된 곳이 성북동이었다. 김향안 여사는 작가가 오랫동안 생활을 영위했고 그의 예술을 가꾸었던 이 지역을 미술관 위치로서는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살았던 40년대와 50년대의 성북동 정취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도시화로 변모되었고 막상 미술관이 들어설만한 조건의 부지도 이곳에선 찾을 수 없었다. 현재의 위치(종로구 부암동)로 결정된 것은 같은 북악산 자락이라는 점과 옛 성북동과 가장 닮은 곳이란 이유에서였다.
과연 그 설명을 듣고 다시 북악산 쪽을 바라보면 성북동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네가 형성된 모습도 그러하려니와 산 너머로 사대문 안 하늘이 얼핏 내비치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성북동의 집은 과연 어떤 곳이기에 미술관을 짓는다면 제일 먼저 고려해야할 곳으로 여겨졌을까?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니 그 집을 방문하려면 책갈피를 뒤지며 시간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1944년 5월 서울의 일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고희동의 주례, 정지용, 길진섭을 청첩인으로 해서 김환기와 결혼한 수필가 김향안은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944년 결혼, 성북동 32-3, 근원(近園)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역자 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이백 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자연스럽게 이태준이 자신의 수연산방을 묘사한 글을 떠올리게 된다. 성북동 32-3번지. 지금은 부촌이 자리잡은 성북동 산동네이니 이태준의 집과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김향안의 글에 등장하는 ‘근원 선생’이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강좌장을 역임한 동양화가 김용준을 뜻한다. 그러니까 젊은 김환기와 김향안이 보금자리를 만든 곳은 원래 김용준이 살던 곳이었다.
김용준은 수필집 《근원수필》을 쓴 분으로도 유명하다. 월북하는 통에 한동안 남한의 서점에서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으나 1987년 이후 천만다행으로 복간된 책으로 문인화의 여백에다 써내려간 발문처럼 담백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들은 명편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 보면 김용준이 성북동 산자락으로 들어가게 된 사연을 담은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란 글을 읽을 수 있다.
지금 내가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라 한 것은 3,4년 전에 이 군이 지어 준 이름이다. 마당 앞에 한 7, 80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2. 3주가 서 있는데 늦은 봄이 되면 뾰족뾰족 잎이 돋고 여름이면 퍼렇다 못해 거의 시꺼멓게 온 집안에 그늘을 지워 주고 하는 것이 이 집에 사는 주인 나로 하여금 얼마나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감나무가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인이 감나무를 위해 사는 것쯤 된지라 이 군이 일러 노시사(老柿舍)라 명명해 준 것을 별로 삭여 볼 여지도 없이 그대로 행세를 하고 만 것이다.
이 글이 씌어진 때는 ‘기묘 11월 4일’, 즉 1940년 11월 4일의 일이다. 이 글에서 김용준은 성북동으로 이사간 것이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라고 하니 1935년 무렵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태준이 먼저 성북동 골짜기로 들어가 자리잡은 뒤의 일이다. 전후사정을 생각하면 ‘노시사’라 이름을 지어준 ‘이 군’이란 곧 이태준을 뜻하는 것이리라.
동양화에 일가견이 있었고 미술평론을 곧잘 썼으며 자기 집에 완당의 글씨를 턱하니 갖다 붙인 이태준이 한국미술사가인 김용준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최열은 《한국현대미술운동사》에서 김복진, 안석주, 임화 등 유력한 민족미술 이론가들이 주도권을 행사했던 1920년대 후반까지의 민족미술이론의 흐름은 1930년대 접어들면서 순수미술을 강력하게 제창하는 김용준, 이태준, 김주경, 심영섭 등으로 이어진다고 쓴 바 있다. 김용준과 이태준은 서로 남 다른 관계일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1996년 10월 환기미술관에서 열린 〈근원과 수화〉전에는 김용준이 그린 《문장》의 표지화와 내면 컷도 여러 편 전시됐던 모양이다. 잘 알다시피 《문장》은 최재서의 《인문평론》과 함께 1940년대 초반 우리나라 문학계를 양분했던 잡지로 1940년 7월호부터 이태준이 전담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태준의 집에서 노시산방까지 가려면 언덕배기를 한참 올라야 했겠지만, 그들의 막역한 사이로 짐작컨대 그 정도 수고를 마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파초를 키우느라 소 선지와 생선 씻은 물까지 뿌려주던 이태준의 눈에 김용준의 노시산방이 좀 한심스럽기도 했을 것 같다. 김용준은 〈노시산방기〉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한두 해를 지나는 동안 어느 여가엔지 뜰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차츰 줄어들고 필시에는 본바탕의 악성 태만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 좋아하던 감나무도 심상해지고 화초에 풀이 자욱해도 못 본 체하고 어떤 놈은 물을 얻어먹지 못하여 마르다 못해 배배 꼬이다가 급기야는 곯아 죽는 놈들이 비일비재였건만 그래도 나는 태연해졌다.
김향안의 회고를 근거로 하면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물려준 것은 1944년 무렵인 모양이다. 이태준도 철원으로 내려가고 없었기 때문인지 김용준 역시 집을 팔고 의정부로 옮겨갔다.
노시산방에서 수향산방으로
김용준이 김환기에게 노시산방을 물려주는 이야기는 김용준의 〈육장후기(鬻莊後記)〉란 글에 나온다. 돈을 받고 집을 팔아먹은 그 뒷얘기라는 제목의 글인데, 송씨라는 사람의 한시를 인용하며 노시산방을 넘겨준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을 보면 돈이 급해 김환기에게 좀 싼 값에 넘겨준 듯도 하다. 의정부에서 지내다가 해방된 뒤에 서울로 올라와 김환기를 만났더니 그는 ‘노시산방을 4만 원에 팔라는 작자가 생겼다’면서 김용준에게 ‘대단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 김환기는 김용준에게 가끔 돈도 쓰라고 집어 주고 수집하던 좋은 골동품도 갖다 주고는 했다는 것이다. 팔아버린 집에 대한 욕심이 한껏 일었으나 김용준은 다음과 같이 글을 끝맺는다.
노시산방이 지금쯤은 백만 원의 값이 갈는지도 모른다. 천만 원, 억만 원의 값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노시산방은 한 덩어리 환영에 불과하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라져 가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김용준의 이 예언은 두 가지 점에서 옳았다. 김환기는 정말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가 됐으며 노시산방이 있던 곳의 집값은 억만 원이 넘어가게 됐으니 말이다.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지금 그 곳에 자리잡은 호화빌라를 본다면 김용준이 또 어떤 생각을 할는지 궁금하다.
이런 글이 남아 있어 나 같은 사람은 쓸데없는 상상을 하지만, 김용준과 김환기 역시 각별한 사이였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한 이경성의 《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서 미술애호회란 모임이 만들어지고 매주 한 번씩 돌아가면서 연구 발표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회원으로 나온 김용준은 언제나 김환기에 대해, 키가 크고 사람이 시원스럽고 그림도 좋지만 문장도 잘 쓰는 멋쟁이란 칭찬을 끊이지 않았다.
또 서양화가 백영수는 《성냥갑 속의 메시지》에서 이렇게도 회고한다. 무슨 이유인지 김용준을 ‘김용진’(金容鎭)이라고 썼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읽어보자.
근원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기 성북동 집을 팔아야만 했고 그 집을 꼭 수화가 사기를 원했다. 결국 근원의 집을 김환기가 인수받게 되었다(…). 그럴 때면 이미 집주인이 아닌 근원 김용진 씨가 술상을 앞에 놓고 주인처럼 앉아 있곤 하였다. 그 모습이 정말 주인같이 자연스러웠다. 또 옆에는 언제나 종이와 붓과 잘 갈아 놓은 먹이 준비되어 있었고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그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글들보다도 더 확실하게 김용준과 김환기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김용준이 그린 두 점의 그림, ‘수화소노인가부좌상(樹話少老人跏趺坐像)’과 ‘수향산방전경(樹鄕山房全景)’이다. 익살맞은 제목의 ‘수화소노인가부좌상’은 가부좌를 틀고 앉은 김환기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해 김향안은 전시도록 《근원과 수화》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수화 소노인 가부좌상’은 어느날, 정해년(1947)년 4월 8일 근원 선생이 놀러오셨는데, 두 분이 마당에서 환담하시더니 수화가 선생을 사랑방으로 모시고 올라와서 먹과 벼루와 종이를 준비해드리면서 뭐 하나 장난해 주시라고 했다. 선생은 언제나 기분이 좋을실 때 싱끗 웃으시는 그 싱끗 웃음을 웃으시면서 즐겁게 그리셨다. 우리는 이 그림을 바라보면 참 즐거웠다. 방의 천장이 얕아서 족자를 해서는 대청에 내다 걸고 바라보았다.
‘수향산방전경’은 김환기에게 집을 넘겨준 뒤 바로 그린 그림인 듯하다. 여기에서 집을 넘겨주자마자 노시산방이란 이름이 수향산방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환기의 호인 ‘수화(樹話)’와 김향안의 이름인 ‘향안(鄕岸)’에서 한 자씩을 따와서 지은 이름이다. 이처럼 김환기를 위해 그려준 그림이 남아 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어쩌면 수향산방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도 김용준인지 모른다. 어쨌든 1944년 노시산방은 이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수향산방이 자리잡게 됐다.
항아리와 사슴을 품은 성북동
1940년대 성북동이란 대단히 시골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만해 한용운이 조선총독부가 싫다며 깊숙히 찾아들어간 곳도 성북동이니 그렇기도 했을 것이다. 김용준도 〈노시산방기〉에 쓰기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이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했다는 것이다. 신안군 기좌도에서 올라온 김환기의 모친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오광수가 쓴 《김환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46년 시골에서 모셔온 모친이 “서울에 오면 도시에 살 줄 알았는데, 왜 시골에 사느냐”고 불평을 해서 시내로 옮긴 곳이 역시 변두리에 가까운 원서동 골목 어귀 비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식구들이 알 수 없는 열병으로 신음하자 다시 시외로 나가기로 하여 찾아든 곳이 역시 성북동이었다.
원서동을 두고 변두리라니.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김환기가 성북동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사실은 여러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95년 복간된 김환기의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는 성북동 생활을 그린 〈산방기(山房記)〉가 실려 있다.
집을 구하는 친구에게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 살 곳으로만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을 첫째 흠으로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성북동 생활은 1956년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이어지는데, 또한 이는 항아리, 새, 산, 달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미에 대한 회화적 탐구가 심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김환기에게 있어 성북동이란 옛 풍취가 아직 남아 있어 아름다운 곳이다. 김향안은 “김환기가 좋아한 것은 이조시대의 도자기와 목공예였다. 1944-1950년, 육칠 년 동안엔 매일 하나 이상의 항아리나 목공을 사들고 들어왔다”고, 이경성은 “그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마루 밑 여기저기에 가득 차 있었던 백자 항아리였다. 대청이나 툇마루에는 물론 방 구석구석마다 잘 생긴 백자 항아리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나의 눈에는 마치 백자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고 회고한다. 김환기 역시 〈청백자 항아리〉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꽃나무를 배경하는 수도 있고 하늘을 배경하는 때도 있다. 몸이 둥근 데다 굽이 아가리보다 좁기 때문에 놓여 있는 것 같지가 않고 공중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김용준과 이태준의 골동취미가 세계적인 화가인 후지타 쓰구지에게서 사사받은 모더니스트 김환기에게로 들어가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광경을 우리는 성북동에서 목도할 수 있는 셈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예쁜 그 항아리와 사슴의 세계 이면에는 성북동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러기에 김환기는 “헌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고 한껏 자랑하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이 〈성북동 비둘기〉를 쓴 것은 1968년의 일이다. 이제 성북동은 더 이상 교통이 불편한 무주 구천동 같은 곳이 아니었다. 김광섭은 이 시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가슴에 금이 갔다”고 읊었다. 1968년 김환기는 뉴욕에서 새로운 회화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963년 뉴욕으로 건너간 이래, 김환기에게는 몇 번의 불운이 겹쳐졌다. 《뉴욕타임즈》는 1964년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대해 오해에 가득찬 비평을 선보였고 두 번째 개인전은 사기에 걸려 작품 전체를 잃어버렸다. 김향안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이 무렵 우리는 재료도 생활비도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직장엘 나가기로 하고 작가는 종이로 오브제 작업을 시작했다. 색종이로 꼴라주도 하고 《뉴욕타임즈》 신문지에 유화를 시도했다. 신문지가 발산하는 기름과 유채가 혼합되어 마치 종이를 다듬이질한 것과도 같은 윤택이 나는 것이 재미난다고 했다.
1968년의 몇몇 작품은 그래서 종이로 만든 파피에 마르셰나 신문지 위에 그린 유화 그림으로 남았다. 그러면서 김환기는 십자구도의 작품을 지나 전면점화의 그 광활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 1969년 11월 김광섭이 〈저녁에〉라는 시를 발표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는 어떻게 이 시를 읽었을까? 어쨌든 그는 1970년 2월 11일 한국일보가 새롭게 창설한 최대의 현대미술전인 ‘한국미술대상전’에 이 그림을 출품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해 6월 7일, 당시 워싱턴특파원이었던 정치인 조세형에게서 이 작품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일이 말했던 것처럼 “비단 화가로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화단 전체를 위해서도 기억될 만한” 한 해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이라고 김환기는 썼다.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전면점화는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꼬박 4주일이 걸리는 작품이었다.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김환기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4년이 지나지 않은 1974년 7월 7일 김환기는 뉴욕 유나이티드 병원에 입원했다. 12일 수술하기 전, 김환기는 누군가 선물로 가져온 호두상자곽에 이런 글을 썼다고 한다.
구구삼정(鳩鳩森亭)에 나오면 하늘도 보고 물소리도 듣고 불란서 붉은 술에 대서양 농어에 인생을 쉬어가는데 어쩌다 사랑이 병이 되어 노래도 못 부르고 목쉰 소리 끝일 줄 모르는가― 1974년 7월 11일 유나이티드 병원 망해실(望海室) 수화 청취(晴醉)…
‘구구삼정’이라니! 성북동 멧비둘기들 우짖는 수향산방을 뜻하는 것인가? 이는 나처럼 하릴없는 자가 할 수 있는 억측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들려 그 광활하고 눈이 부신 점의 세계를 바라보노라면 구구삼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성북동 비둘기떼 울음소리처럼 노시산방에 얽힌 아름답고 진귀한 우정이 아직도 우리 귀에는 들려오니 말이다.
회고전(재평가)-1970년대/단색파-1970년대중반/극사실주의-1970년대말---아디-----------------------------------------
4. 이중섭 박수근의 재평가
<작고 작가들의 회고전>
이인성
책[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 이인성]아트북스
1938년 개인전 소개 기사에서 '화단의 중진' '우리 양화계의 거벽' '조선의 지보(보물)'라는 수식어가 달렸고,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나 무용가 최승희에 버금갈 정도로 유명했던 화가는?
정답은 이인성(1912-1950)이고,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여섯살 때였다.
1950년에 사망한 이인성은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미술재료회사의 '사환'으로 일했지만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6회 내리 특선했던 스타 작가였다.
2000년에 작고 50주기 회고전이 열려 그의 작품세계가 재조명되기도 했지만, 지난해 12월 한 미술품 경매에서는 수억원대 낙찰이 기대됐던 파란 배경의 '자화상'에는 아무도 응찰하지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뜨고 있어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자화상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경찰이 잘못 쏜 총에 맞아 절명하기까지 딸과 아내를 잃고 무기력과 우수에 찌들어 살았던 이인성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국내에서는 드문 이인성 연구 전문가인 미술사학자 신수경씨는 '한국 근대미술의 천재 화가 이인성'(아트북스 펴냄)에서 이인성이 이중섭, 박수근 등 동시대 화가보다 덜 주목받는 이유를 분석했다.
첫째 이른 죽음, 둘째 관료적인 공모전 중심의 작품 활동, 세째 그의 사후 추상화가 대세였던 미술계 풍토에서 학구적인 구상화 위주인 그의 작품이 묻혔다는 것.
저자는 이인성의 성장기와 작가로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 화단을 놀라게 했던 천재적인 드로잉 실력과 표현력, 중학교 미술교사와 신문 연재소설 삽화작업, 대학 시간강사를 전전한 경력 등 인간적인 면모와 작가로서의 면모를 사진과 자료, 도판을 실어 고스란히 복원했다.
출판사가 '디지털 세대를 위한 우리 미술가' 시리즈의 첫 권으로 박수근이나 이중섭, 김환기가 아닌 이인성을 택한 것이 이례적이다. 이어서는 미술사의 최순우, 회화의 이중섭과 구본웅, 조각가 문신, 서예의 이항복 등을 내놓을 예정.
구본웅 영화 [금홍아 금홍아]
1932년 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온 한국 최초의 야수파 곱추 화가 구본웅은 첫 귀국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이 귀국전을 통해 많은 지식인, 문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중 천재 시인 이상을 만나게 된다. 추남에다 꼽추인 구본웅은 여자들에게 늘 외면당했고, 반면 미술, 문학 등 모든 방면에서 천재적 재능을 지닌 이상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으며 자유분방한 여자 관계를 지속한다. 이상은 결국 구본웅의 약혼녀까지 건드리고 그의 무절제한 삶에 회의를 느낀 구본웅은 우정과 예술까지 혐오하기 시작하며 인간적 갈등으로 고통받는다.
구본웅이 다시 이상을 만났을때 그는 폐병 삼기의 중병에 걸려 있었다. 구본웅은 그런 이상을 위해 복잡한 경성을 떠나 요양의 길에 동행하게 된다. 이 여행 중에 두 사람의 기행은 극에 달해 정신적으로 탈진하기까지 이르나 이상향이라 생각했던 백천 온천에 정착하여 잠시 안정을 찾는다. 이곳에서 구본웅은 기생 금홍을 만나게 되나 그녀는 이상의 여자가 된다. 구본웅은 그녀를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다
정규1923. 8. 17 경기 연천~1971. 7. 7 서울.
화가·도예가.
어의동 보통학교, 경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데이코쿠[帝國] 미술학교를 다녔다. 초기에는 유화를 그렸으나 1957년 국립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에 참여하여 도자 공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뉴욕 시 로체스터공과대학 등에서 도예수업을 받고 1960년 한국민속도자공예연구소를 세워 도자기 제작에 전념했다. 그는 도자벽화를 부산 해운대 호텔(1963), 서울의 명동 오양 빌딩(1964)과 자유 센터(1964)에 남겨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다. 한편 목판화와 미술비평에도 관심을 보였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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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단색파와 새로운 형상의 예술
1]흰색의 기조로 한 작가
박서보
권영우 http://www.kcaf.or.kr/art500/kwonyoungwoo/
1976년
1980년
이동엽
김홍석
윤명로
허황
2]다른색
최명영
최병소
정창섭
하종현 http://www.kcaf.or.kr/art500/hachonghyun/main.htm
1972년
김진석
윤형근
최대섭
김기린 http://www.kcaf.or.kr/art500/kimguiline/main.htm
1970년(파랑) 1972년(빨강)
정상화 http://www.kcaf.or.kr/art500/chungsanghwa/main.htm
3]일정한 이미지를 지니면서 단색을 기조로 한 작가
서승원 http://www.kcaf.or.kr/art500/suhseungwon/biography.htm
1970 동시성
진옥선 http://www.kcaf.or.kr/art500/jinoksun/biography.htm
1973 답
김창열 http://www.kimtschang-yeul.com/
박장년 사비나미술관이 여름기획전으로 마련한 '여섯개 방의 진실'에 전시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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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반성
1.손의 회복 - 1970년대 말
한국미술대상전,동아미술제,중앙미술대젼등 각종 민전에서 극사실회화 대거입상
[전후세대의 사실주의] 미술회관 1978 -순수하게 이미지를 내세운 정점
[형상 78] 1978 미술회관
[사실과 현실] 1978 미술회관
[시각의 메시지]1981 그로리치화랑
이석주 http://www.kcaf.or.kr/art500/leesukju/biography.htm
2000년
조상현 http://www.blankism.com/main.htm
1978년
고영훈 http://www.kcaf.or.kr/art500/koyounghoon/main.htm
김홍주 http://www.kcaf.or.kr/art500/kimhongjoo/main.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