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교수의’ 나 홀로 1인 시위의 파급력 분석 [Ⅰ]
작은 목소리들이 합쳐져 사법부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1월 15일 김 교수의 ‘석궁시위’를 계기로 나는 새로운 인생경험들에 자신을 되 돌아 보고한다. 많은 경험 중에서도 그 중 1인 시위에 대하여 나름의 경험담을 두서없이 나열 하고 져 한다. 사실 일상생활 속에서 서초동 주변은 나의 주거지역 이나 다름 없는 지역이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서울 켐퍼스 생활을 72년도부터 시작할 무렵에 구 반포 단지 (지금 재 개발 중)가 들어서고. 강남고속터미널이 이전할 무렵이니 어언 30년의 세월이 유수 같기만 하다. 당시에는 법원 단지가 없었으나. 강남 개발 붐과 더불어 속칭 서초 꽃 마을에 법원단지. 성모병원. 서초경찰서. 국립도서관, 조달청 등이 옮기면서 행정구역도 강남구 에서 서초구로 분리하는 개발지역이다. 나 또한 그 79년도 무렵에 졸업을 하고. 누구나 걸어야 할 결혼이란 경로를 거치며 8학군 이란 귀신 때문에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주저 않아 현재까지 머문 곳 이기도 하다. 그래서 큰 녀석이 잠원초, 방배중, 세화고, 고려대 코스로 온 가족의 고향 같기도 하는 고을이다. 그러한 삶 속에서 법원단지는 그저 지나친 관공서 정도로의 생각 외는 개인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어서 인지 무덤덤한 건물로만 여 길수 밖에~ 다만 대치동 사업장 (외국어학원) 에서 출.퇴근시 노상 지나는 길에 지금의 나 홀로 시위자 들을 목격 하곤 하는데. 그 또한 스쳐가는 정도이지 일부러 눈 여겨 보지 않은 지금까지의 나의 게으른 무관심 밖이었다. 왜! ‘저러 할 까’ 라는 마음의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시위 문구라도 한번쯤 훌 터 보았을 법도 한데~ 전혀 무감각 이었으니. 나 자신에게 회초리를 가 할만도 한다. 요즘 본 운동에 나서면서 늘~ 나의 삶에 대한 자성과 과거를 되 돌아보게 하는 부끄러움 이었음을 실토 한다.
‘惡을 보고 네가 귀찮다고 관심 없이 지나 치는 것이 더 큰 罪” 라고 성인들의 가르침에 반 하는 나의 과거에 많은 후회와 함께 그 동안 김명호 교수가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사법부와 의 투쟁사인 3여 년 간의 1인 시위를 택한 이유가 무엇 이었을까? 하는 나의 마음에서 이제서야 그 해답을 찾을 듯 하여 김 교수의 1인 시위의 상징성과 사법부에 미치는 파급 효과에 대하여 나름의 정리 하고자 한다.
멀리 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우선 1인 시위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을 이용해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되고 있는 새로운 시위문화인 듯하다. '나 홀로 시위'인 1인 시위는 "외교기관의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고 [집회는 2인 이상을 말한다]" 요즘의 ‘1인 시위’는 이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닌 듯 하다 국회나 대법원 등 공공기관은 물론, 대기업 앞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민주당 손봉숙 의원은 지난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원들 ‘시간엄수’라고 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을 정도 다. 1인 시위는 ‘참여연대’ 가 삼성재벌에 대한 과세 촉구로 국세청 앞에서 시작된 것이 효시로 되어 있다. 1인 시위가 시민 또는 해당기관에 얼마만큼 파급력이 있을 것인가' 란 질문엔 "나무를 한 그루씩 평생 심었더니 숲이 되더라" 라는 추상적인 답변에서부터, 아마 김명호 교수는 " 나의 피켓의 작은 목소리들이 합쳐져 사법부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이라고 확신을 하면서 시작 하였을 듯 하다. 그런데 김 교수는 여타 1인 시위자들과 특이한 점을 몇 가지 발견 할 수 있다.
그 첫째가 시위 시간과, 시위 자리가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였다. 대법원 정문 에서 오른편 건널목 앞.신호대기 앞이다. 아마 짐작컨대 우선 시위의 파급 효과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지정 한 듯 하다. 출근 시간에 사법부 나리들과 정면으로 마주보는 곳이며. 지나는 차량들 신호 대기 때 지루함을 달래기도 하는 지점이며.점심때는 대법원 직원들의 오가는 꼭지점 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김 교수는 여타 시위자들처럼 모자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아마 뻣뻣한 사법부 나리들에게 강인한 의지와 당당하고 자신 만만함을 각인 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얻을 것도, 잃을 것도 더 없는 마당에 “국민의 마지막 저항권” 을 이미 준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김 교수의 피켓 문구는 수시로 바뀐다. 즉) 그때그때 사법부에 즉시 강렬하고 절묘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인간들의 신년 첫날, 한 주 월요일의 시작. 그날의 아침 출근길에 그 문구를 마주하며 출근한 나리들 기분을 잡치게 하고, 약을 올렸다고나 할 까. 이러한 시위 방법들이 김 교수가 지금까지와 또 다른 시위문화의 개척 일 듯 하다. 그 과정에서 화가 치밀었던 사법 나리들이 몇 번의 면담 요청이 들어 왔으며 경비대 직원들은 사진으로 또는 문구를 메모해 가며 상부에 수시로 전달 하는 과정에서 김 교수의 합법적인 시위 방법에 방해 방법으로 “명예훼손”으로 불구속 기소 하기에 이른다. 김 교수 홈페이지에서 피켓 구호 중 가장 눈에 뛰는
"돌대가리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판사 찾습니다"
“쓰레기 판사는 쓰레기 통으로, 김치도 수입한다, 판사도 수입하라” 라는 문구에서 보듯이 자존심을 넘어서 '자존감' 까지 아침 출근길에서 부터 항의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매일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06. 3. 24] 도둑이 제발 저리나(?) 구호는 그저께 부터 걸고 있었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어 얼굴이 에지간히 두꺼운 인간이라 생각했었는데... 경비가 와서 앞뒤 구호 적어가더니만, 두차례에 걸쳐 사진을 찍어갔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행보와 그에 따른 법원 개혁 발언에 직원들은 많이 달라졌다.
허나, 사법개혁 핵심인 판사들이 문제. 첨에는 겁먹은 듯 하더니만, 시간 좀 지나니 억울한 생각과 함께 제 버릇 개 주기 싫은 건지...판사들 사이에 반항 분위기가 형성되는 모양이다, 되처먹지 않은 것들 따라서~, 그럼에도~ 돌대가리도 아니고, 쓰레기도 아닌 판사가 가뭄에 콩 나듯이 귀한데 다가,
하늘 같은 대법관인 양승태가 위헌 위법적 판결 펑펑 때리고 있는 마당에, 제대로 할 판사가 몇이나 있을까?[06. 3. 30] 바람 센 날 ☜ 일기 형식으로 당시의 절묘하고 기발한 기록들을 남겨둔다. [
- 다음계속- [서명/모금/사업활동]으로 이동 부탁 드립니다.
첫댓글 1인 시위하든 김명호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그 때는 시위 글귀가 저 자신도 파격적이라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저도 소송 막바지 에서 도대체 보통 법상식으로 보면 계약서가 위조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보통 법상식으로는 계약서가 실정법을 위반하고 작성 된 계약서가 효력이 없음에도 아직 항소심에서 1년 6개월 가까이 심리 중이어야 하니 김명호 교수님 시위 글귀가 낯설지 않군요. 저도 김명호 시위 글귀처럼 훌륭한 판결문을 찾습니다. 대의
모라코노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적지 않은 연세에(죄송합니다~) 살아오시면서 우연히 조우한 하나의 사건(석궁사건)...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건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행동하고 계신 모습(그것은 외람되지만 자신과의 맞섬이기도 하겠지요), 삶에 대한 그칠줄 모르는 그 열정을 존경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탑골 시위 당시엔 교수님 지지하시는 분들께 교수님이 석방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손가락 절단이라도 할수있다고 공분했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교수님의 고통을 자꾸만 잊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올려주신 사진속의 교수님 모습이 너무도 처연해서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조금 나태해진 저를 되돌아보게 해준 가슴 뭉클한 사진 한장ㅡ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엾은 우리 교수님 가슴으로 꼭꼭 안아주렵니다. 정말 교수님이 석방될 수있는 계기가 될 수만 있다면 손가락을 잘라서 판사에게 보내고픈 심정입니다.
당당하면 얼굴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저 또한 못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옷이라도 벗고 시위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 보다 더한짓도 하고싶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사건나기 4일전) 피켓을 들고 대법원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찾았을때 과격한 김교수님의 피켓내용을 보고 놀라서 " 헉!!! 이렇게 써도 돼요?" 라고 놀랐죠 . 1인시위 초짜인 저는 교수님이 그 곳에 계셔서 마음의 위로가 되었고 용기가 났습니다. ...또 울컥해집니다. 이만...
부끄러운 사법부의 개혁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사법부의 개혁은 판사 개인의 이성과 양심회복에서 시작--
김교수님 옆의 살짝 보이는 사진은 딸 승희와 엄마 강연화님의 사진이군요. 피켓내용과 같이 이웃으로 부터 집단폭행을 당하는 현장을 본 승희는 "엄마 죽으면 안돼"라고 잠꼬대를 하는 등 현장에서 상대방이 경찰로 연행되어 갔으나 증인, 녹취록 등 증거가 많으나 싸움으로 결론나서 벌금을 물었으며, 그 뒤에 그 이웃이 더욱 의기양양하여 계속적으로 위협하며 괴롭혀서 무서워 살지 못하고 좋은 집을 급히 팔고 급히 이사가는 바람에 승희 학교가 멀어서 고생을 하다가 지금은 또 자취방을 얻어서 살고 있지요. 5005. 승희 여름방학을 기하여 강화에서 대검까지 시위를 다녔으며 대법원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장면이군요
지역토착세력들의 위력?과 검경의 불공정 수사와 재판은 소시민의 삶을 발톱의 때정도로--------헌법소헌에서 수개의 판례를 나열하면서 기각, 기각이유가 "항고기간도과"라고, 잠시 생활고로 투쟁을 쉬고 있지만 딸 앞에서 집단으로 당한 모멸과 치욕을 자녀교육상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끝까지 밝혀나갈 것이라고--------
시위을 할수있는 용기있는 분도 계시지만 억굴함이 있어도 용기 없는지가 수백배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