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묘지명(墓誌銘)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찬(撰)한 것으로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糾正公) 휘(諱) 현(鉉) 공(公)의 증손(曾孫)이신 전서공(典書公) 휘(諱) 침(忱) 공(公)의 배위(配位)되시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밀산박씨(密山朴氏)의 친정할머니이신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의 묘지명이다.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의 맏아들인 휘(諱) 밀양(密陽)이 장경공(章敬公) 유돈(柳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사위 중에 박침(朴忱)이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또한 장경공(章敬公) 유돈(柳敦)의 가계(家系)를 기록한 문화류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에도 유돈(柳敦)의 사위가 박린(朴僯)이며 그 사위가 박침(朴忱)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문화유씨에서는 발표하였으나 필자는 아직 文化柳氏嘉靖譜를 살펴보지 못하였다. 오래된 기록들이므로 집안마다 글자가 다르거나 이름이 다른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집안끼리 전달하거나 또는 기록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오기(誤記)가 발생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기록들에 나타나는 박린(朴璘), 박린(朴僯), 박밀양(朴密陽)은 당사자나 자녀의 혼인 관계로 맺어진 타 문중의 기록과 대조하여 살펴 보면 동일인(同一人)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해양군부인김씨묘지명(海陽郡夫人金氏墓誌銘)을 소개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목판본은 서기1900년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간행(刊行)한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집『포은선생집속록(圃隱先生集續錄) 권1』<한국정신문화원 소장본; K4^6615>” 을 저본으로 삼았다.이 문집은 여러 종류의 판본이 전해지며 규장각에도 몇 종류의 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래에 목판본의 복사본과 한문 원문 및 한글 국역본을 붙여 놓았다. -學- |
<목판본 - 한국정신문화원 소장본>
<원문 및 국역문>
海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書 ○ 出夫人後孫朴必義家藏蓋>
<必義得夫人墓欲辨眞僞啓隨得此誌> 大匡密城君朴公夫人金氏光州人也昔司空金吉
佐太祖爲功臣其後若干世孫大將軍鏡亮於夫人 爲曾祖生贈門下侍中須侍中生僉議政丞致仕文 正公台鉉文正生四男二女夫人最季選部議郞光 軾異母兄也文敏公光轍文簡公光載政堂文學安 牧夫人及第光輅皆同母兄也外祖郞將王丁朝亦 孝隱太子之後夫人天性溫淑而加以賢父兄之敎 年若干歸朴氏修行婦道不以世族之貴而有絲毫 驕傲色大匡公亦好禮君子雖平居敬相對如賓夫 人平生事父母孝事兄弟順均子孫慈婢僕夜誦佛 經書執紡績年高不怠至於衣服飮食亦必豊儉中 度大夫人王氏以三子登科恩封郡大夫人歲受廪 祿夫人亦以四子登科恩例如王氏而廪祿有加焉 一日相告曰吾一家二婦人無益於國而受厚恩非 願也皆辤不受其用心類此五子長密陽奉順大夫 判典校寺事次大陽奉翊大夫典法判書寶文閣提 學上護軍次紹陽試成均後游京師奉使雲南不退 次三陽拜正言言事出倅鷄林卒于官次啓陽中正 大夫秘書監以非罪廢物論寃之孫男女十餘人密 陽娶章敬公柳敦之女二男曰郞長敬茂判司宰敬 仁四女別將具禧中郎將朴忱淸州判官張縯其婿 也季未嫁大陽娶益山君洪云遂之女無子外室一 男昌左右衛錄事叅軍啓陽娶全州牧使洪萬龍之 女生二男二女皆幼曾孫男女內外合十餘人嗚呼 夫人之德行如彼而子孫之衆且貴顯如此有是德 者有是福也宐矣夫人至正辛丑與大匡公避兵密 城因居焉年七十三卒于 洪武甲寅八月己亥其 月辛丑葬于守山縣九明山其季子與余同年進士 今方廬墓血泣終喪以書拜家狀來請銘故爲銘
銘曰 蟬聯世家婉婉令德 克愼其儀以禮自飭 歸配君子蘭玉滿庭 母以子貴爵祿之榮 年七十三終焉允臧 哀哉棘人泣血墓傍 前奉順大夫成均大司成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 鄭夢周撰
海陽郡夫人金氏墓誌銘1) 幷序(해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이 묘지명(墓誌銘)은 군부인(郡夫人)의 후손인 박필의 집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필의(必義)가 군부인(郡夫人)의 묘(墓)에 대해 진위여부를 변증하기 위하여 묘를 열어 얻은 묘지명이다>
대광대부(大匡大夫) 밀성군(密城君) 박공(朴公, 朴允文2) 말함)의 부인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광주(光州, 지금은 光山이라 함)이다. 옛적에 사공(司空) 김길(金吉3))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신(功臣)이 되었다. 그 후 몇 대가 지나지 않은 후손(後孫)이 대장군(大將軍) 경량(鏡亮)인데 부인(夫人)의 증조(曾祖)이다. 대장군(大將軍)이 증문하시중(贈門下侍中) 수(須4))를 낳았고, 시중(侍中)은 첨의정승(僉議政丞) 벼슬을 지낸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6))을 낳았다. 문정공(文正公)이 4남 2녀를 두었는데 부인(夫人)이 가장 막내이다. 선부의랑(選部議郞) 광식(光軾)은 다른 어머니가 낳은 형제이고, 문민공(文敏公) 광철(光轍)과 문간공(文簡公) 광재(光載7))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목(安牧)의 배위(配位)와 급제한 동생 광락(光輅)은 모두 같은 부모의 형제이다. 외조(外祖)는 낭장(郞將) 왕정조(王丁朝)로 역시 효은태자(孝隱太子8))의 후손이다. 부인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맑았는데 더욱이 현명한 부모의 가르침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박씨 집안에 시집와 주부(主婦)의 행실을 닦으며 명문세족(名門世族)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실오라기만큼의 교만함이나 오만한 빛도 없었다. 대광대부(大匡大夫) 역시 예도를 읽힌 군자로서 비록 평상시에도 서로 공경하여 귀한 손님을 대하듯 하였다. 부인께서는 평생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나 자손들에게 까지 도리에 맞게 조화로웠고 노복에게도 자애로웠다. 부인께서는 밤에는 불경을 읽고 낮에는 길쌈을 하였는데 나이가 들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이 풍성하였으나 반드시 검소함의 법도에 맞도록 하였다. 부인(夫人)의 어머니 왕씨(王氏)가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은혜로이 군대부인(郡大夫人)으로 봉해져서 해마다 녹봉을 받았고 부인(夫人) 역시 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어머니 왕씨(王氏)처럼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나 녹봉은 더 많았다. 어느 날 서로 말하길 ‘한 집에서 두 부인(婦人)이 나라에 무익한데도 두터운 은혜를 입으니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고 모두 사양하여 받지 않았으니 마음 씀씀이가 이와 같았다.
아들이 다섯인데 장자(長子)는 밀양(密陽9))이요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 判典校寺事)이고, 차자(次子)는 대양(大陽10))이요 봉익대부 전법판서 보문각제학 상호군(奉翊大夫 典法判書 寶文閣提學 上護軍)이고, 다음은 소양(紹陽11))인데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후 사신(使臣)으로 연경(燕京, 원나라의 수도)에 머물다 운남(雲南)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은 삼양(三陽12))인데 정언(正言)의 벼슬이 내려져 언사(言事)로 계림(鷄林, 지금의 경주)에 수령으로 나갔다가 관아(官衙)에서 죽었다. 다음이 계양(啓陽13))인데 중정대부(中正大夫) 비서감(秘書監)으로, 죄가 아닌 것으로 폐인이 되니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논의가 있었는데 원통한 일이다. 손자가 남녀 10여 명이다.
밀양(密陽)은 장경공(章敬公) 유돈(柳敦, 다른기록은 墩)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으니 낭장(郞將) 경무(敬茂)와 판사재(判司宰)에 오른 경인(敬仁)이고, 네 딸은 별장(別將) 구희(具禧)와 중낭장(中郞將) 박침(朴忱), 청주판관(淸州判官) 장연(張縯)이 그 남편(婿)들이고 막내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대양(大陽)은 익산군(益山君) 홍운수(洪云遂)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식이 없고, 외실(外室, 側室을 말함)에게서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좌우위녹사참군(左右衛錄事叅軍)이다. 계양(啓陽)은 전주목사(全州牧使) 홍만용(洪萬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曾孫)은 남녀 내외를 합하여 10여 명이다.
오호라! 부인의 덕행이 이와 같으니 자손이 많아 귀(貴)하여 지고 또한 현달(顯達)하였으니 이 처럼 “덕이 있는 사람은 복을 누린다” 는 것이 마땅히 옳은 일이다.
부인께서는 1361년<지정(至正, 원나라 연호) 신축(辛丑, 공민왕 10년)> 병화(兵禍, 1361년 홍건적의 개경 침입을 말함)에 대광대부(大匡大夫) 공(公)과 함께 밀성(密城)으로 피난(避難)하였다가 그 곳에 살게 되었다. 73세수(歲壽)로 1374년(홍무(洪武, 명나라 연호) 갑인(甲寅, 공민왕 23년) 8월 기해일(己亥日)에 돌아가셨다. 예월(禮月, 간지(干支)에 의하면 예월(禮月)로 나타남) 신축일(辛丑日)에 수산현(守山縣) 구명산(九明山)에 장사(葬事)지냈다.
막내아들(啓陽을 말함)이 진사시(進士試)에 나와 같이 동방급제하였는데 지금은 피눈물로 시묘살이를 하여 상기(喪期)를 마치고 사의(辭意)의 글과 가장(家狀)을 들고 찾아와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하는 고로 위로하려 묘지명을 짓노라. 명(銘)에 이르기를, 대대로 내려오는 세가에 태어나니 아름다운 덕 뛰어나고 예법 맞는 몸가짐에 삼가하여 스스로를 가다듬었네. 군자에게 시집가니 훌륭한 자식 집안에 가득하고 아들로 귀하여진 어머니는 봉작과 늠록으로 영화롭다. 일흔셋 천수 누려 진실로 좋은데를 갔겠는데 슬퍼하는 저 상주 묘 곁에서 피눈물 흘리네. 전 봉순대부 성균대사성 지제교 충 춘추관 수찬관 정 몽 주가 지었다
<脚註欄> 1) 묘지명(墓誌銘)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집인 『포은선생집속록(圃隱先生集續錄) 권1에 실려 있으며, 정몽주가 1374년(공민왕 23년 甲寅)에 작성하였다. 자료제공 : 1900년 崧陽書院 刊行本<한국정신문화원 소장본; K4^6615> 書 誌 : 圃隱先生集續錄(포은선생집속록) v1 편저자 : 정몽주(조선)찬(鄭夢周(朝鮮)撰) 간행년(서기력) : 1900-1900 (간행년 왕력 : 光武4(1900)) 간행처 : 崧陽書院 제판사항 : 木版補入木活字版
2) 박필의<朴必義, 1669년 己酉~ ?> 통덕랑(通德郞) 현규(玄圭)의 아들로 1708년(숙종 34년)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으로 급제함. (국조방목 참조)
3) 박윤문<朴允文, 1298년(戊戌)~1372년(壬子)>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손으로 본관은 밀성(密城). 자(字)는 질부(質夫) 휘(諱)가 윤문(允文)이다. 증조(曾祖)의 휘諱)가 척(陟)인데 고려 충선왕(忠宣王, 고려 제26대 왕)의 내부시승(內部侍丞) 이후 여러 관작(官爵)을 받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며 시호(諡號)가 충헌(忠憲)으로 추증(追贈)되고 오늘날 밀성박씨(密城朴氏) 12중조(中祖)의 한 분인 충헌공파(忠憲公派) 파조(派祖)이다. 할아버지는 성진(成進)이니 조현대부(祖顯大夫) 흥위위(興威衛) 정룡장군(精勇將軍)이고, 아버지는 원(原, 또는 元)으로 판전교사사(判典敎寺事) 규의선력공신(揆儀宣力功臣)으로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작(封爵)되었고 황증문하찬성사(皇贈門下贊成事)이다. 어머니 손씨(孫氏)는 급제(及第) 홍 권(弘 權)의 딸이다. 공(公)은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과거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에 이르고 밀성군(密城君) 봉작(封爵)되었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4) 김길<金吉, ?~?>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에 이르렀다.서기 934년(淸泰元年) 8월에 고려의 사신(朝貢使)으로 후당(後唐)에 갔었음이 중국 사서(史書)인 책부원구(冊府元龜) 972권 외신부 17(外臣部 十七.)에 기록되어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의 외신부(外臣部) 조공조(朝貢條)에 "淸泰元年 8月(高麗太祖 17年)(934) 靑州言 高麗入貢使 金吉 船至岸" 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태조가 삼국을 통합(統合) 할 때 기위지책(奇偉之策)으로 크게 공(功)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으며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랐다.
5) 김수<金須, ?~1270(고려 원종11)>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오늘날은 광산으로 칭한다)이다. 사공(司空) 길(吉)의 후손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를 거쳐 1271년 영암부사(靈巖副使)를 지냈다.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하는 광산김씨 시조 흥광(興光)의 14손이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낸 김경량(金鏡亮)의 아들이며 광산김씨 15세손 태현<台鉉, 시호(諡號) 문정(文正)>의 아버지다. 1270년 진도에서 패한 삼별초가 탐라(耽羅, 오늘날의 제주)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 탄(權 坦)의 명으로 2백명의 군관을 이끌고 탐라를 지키다 중과부족으로 패하여 부하들과 전사했다는 사적이 문헌에 있고 그의 묘(墓)는 제주도에 있다고 전한다. 김수(金須)의 묘(墓)로 추정되는 묘는 제주도 애월읍 산새미오름의 방형석곽묘(方型石槨墓)로 2005년 9월 28일 제주도 지정문화재 제60-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김수(金須)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남면 고장산(高張山)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수(金須)를 시조(始祖)로 하는 초계김씨(草溪金氏)를 살펴보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게 된 연유는 자세히 상고할 수 없으나 일부 문헌에는 그가 초계김씨(草溪金氏)의 시조(始祖)로 나타난다. 아마도 그의 후손들이 광산김씨(光山金氏)에서 분파(分派)한 후 본관을 초계로 하고, 그를 시조로 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慶南 陜川郡 草溪面)이다.
6) 김태현<金台鉉, 1261년(원종 2)∼1330년(충숙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자(字는) 불기(不器)이다.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운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 길(吉)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원종 때 어사를 지낸 수(須)이고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주정(周鼎)의 조카이다. 10세 때에 아버지 수(須)가 삼별초난의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하였다. 고아가 되었으나, 학문에 힘써 1275년(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 이인성(李仁成)을 시관으로 한 국자감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이어 전시(殿試)에도 합격하여 좌우위참군 직문한서(左右衛參軍直文翰署)를 제수받고, 좌창별감 판응방사(左倉別監判鷹坊事)가 되었다. 얼마 뒤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어 전주(銓注)를 맡았고, 우승지를 거쳐 밀직부사로 승진하면서 성절사(聖節使)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3년에는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동지공거인 비서윤(祕書尹) 김 우(金 祐)와 함께 박 리(朴 理) 등 33인을 진사로 선발하였다. 충렬왕 말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받았고,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과 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나,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난국을 수습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양광수길도계점사(楊廣水吉道計點使) 행수주목사(行水州牧使)가 되어 모범적으로 도내의 민호를 점검하였다. 그 뒤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로서 파직되어 한거하다가, 1321년(충숙왕 8)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복직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원나라에 의하여 충선왕은 토번(吐蕃)으로 귀양가고 충숙왕은 원나라에 억류되었으나, 그의 노력으로 국사가 잘 유지되었다. 그러나 충숙왕이 원나라의 억류에서 풀려나 관제를 개편할 때 파직되었다가, 이어 참의정승(參議政丞)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330년에 충혜왕의 청원으로 원나라가 국왕의 인(印)을 빼앗고 그로 하여금 임시로 국정을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과 반대당의 무리들이 그를 불러 성인(省印: 당시 고려국왕이 겸직하는 征東行中書省左丞相의 印)을 거두어가고 그와 윤 석(尹 碩)·원 충(元 忠) 등을 하옥시켰다. 그는 곧 옥에서 풀려났으나 이 일로 인해 가족을 이끌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고려내의 이러한 변화를 전해 들은 충혜왕이 사람을 보내어 다시 성인을 회수하게 하고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게 하였으나, 곧 죽고 말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언동이 예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온화하였고, 어머니를 모심에는 효를 극진히 하였다 한다.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문을 모아 《동국문감(東國文鑑)》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7) 김광재<金光載, 1294∼1363>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자여(子與), 호(號)는 송당(松堂)이다.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1313년(충선왕 5)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고 충혜왕(忠惠王) 1330년에 원나라에 갈 때 모시어 호종(扈從)한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조적의 난이 평정된 뒤 원나라에 잡혀가는 왕과 함께 갔다 와 군부총랑(軍部摠郎)·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으나 간신들의 모략으로 파직당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 지신사(知申事),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제조전선(提調銓選) 등을 역임, 지사사(知司事)가 되었다. 1348년(충정왕 2)에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 때에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을 총괄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전리판서(典理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겸직했다. 1351년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12년간 은거하며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여묘(廬墓)에서 상(喪)을 마치니 왕명에 의해 효행으로 정려(旌閭)을 받았고 그가 사는 곳이 영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칭송받고 알려지게 되었다. 김광재(金光載)의 후계는 제주(濟州)를 세거의 터로 삼았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8) 효은태자<孝隱太子, 생몰년 미상.> 고려의 왕족. 본관은 개성(開城). 태조의 아들로 어머니는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 유금필(庾黔弼)의 딸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이다. 효은태자는 정사(正史)에 그 이름이 빠졌는데 혹은 동양군(東陽君)이라고도 불렸다. 성품이 사나워 군소(群小)들과 사귀어 몰래 다른 생각을 품으므로 광종이 죽음을 내렸다. 아들 임(琳)과 정(禎)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고 도망하여 민가(民家)에서 목숨을 이어오다 강조(康兆)가 정권을 잡았을 때 작위를 주고 노비와 토지를 지급하여 종실의 적(籍)에 올리게 하였다. (참고문헌 : 高麗史)
9) 박밀양<朴密陽, ?~?> 고려때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으로 호(號)는 낙촌(駱村)이고 휘(諱) 밀양(密陽)이다. 할아버지는 원(原, 또는 元)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이며 아버지는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이고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여식(女息)으로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이다.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법판서(典法判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등을 역임하고 봉순대부(奉順大夫)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珠)와 목은(牧隱) 이색(李穡)등과 도의(道義)로서 교류하였으며, 공의 증조는 성진(成進)이니 정용장군(精勇將軍)이였는데 명나라 황제는 문하평리승(門下評理丞)을 증직하였고 충렬왕의 명에 따라 군사를 거느려 일본을 정벌하러 갔으나 싸움에서 돌아오지 아니 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 배위(配位)는 문화류씨(文化柳氏)이니 첨의정승(僉議政承) 찬성시녕군(贊成始寧君) 장경공(章敬公) 돈(墩)의 딸이다.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후손들은 오늘날 밀성박씨(密城朴氏) 충헌공후(忠憲公后) 판서공파(判書公派 )로 불리우며 여주군 대신면 천남리에 숭의재(崇義齎)를 건립하여 봉사(奉祀)하며 뒤편에 공(公)의 단(壇)을 세워 시제봉행(時祭奉行)한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10) 박대양<朴大陽, ?~? > 고려조의 문신이다.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으로 휘(諱)가 대양(大陽)이다. 할아버지는 원(原)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이며 아버지는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이고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여식(女息)으로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이다.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조(高麗朝)에서 익조공신중대광(翊祚功臣 重大匡) 진현관대제학(進賢官大提學)을 지냈고 밀천군(密川君)으로 봉해졌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중대광익산군(重大匡益山君) 운수(云遂)의 따님이다. 후대에 경북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 화산재(華山齋)를 지어 단비(壇碑)를 세우고 봉사(奉祀)하고 있으며 화산에는 6세손 영락사마판사재(永樂司馬 判司宰監事) 응(膺) 배위(配位) 진주하씨(晋州河氏) 묘(墓)와 7세손 용기시위사좌령(龍旗侍衛司左領) 겸형(謙亨)의 배위(配位) 문화유씨(文化柳氏)의 묘가 있다. 후손들은 오늘날 밀성박씨(密城朴氏) 충헌공후(忠憲公后)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로 불리운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11) 박소양<朴紹陽, 少陽 ?~? > 고려 말의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로 본관(本貫)은 밀성(密城) 자(字)는 중강(仲剛)이고 휘(諱)는 소양(紹陽) 또는 소양(少陽)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는 원(原)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이며 아버지는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이고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여식(女息)으로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이다. 밀성군(密城君)의 3남으로 태어나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한 후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가 되어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 속에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들어가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직책을 얻어 경사(京師, 서울이라는 뜻)를 왕래 하였다.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벼슬하지 말라 하고는 고려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서 돌아가시자, 남긴 옷과 관으로 장사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진천송씨(鎭川宋氏)로 아버지는 참의(參議) 우(愚)이고 조부는 서령(署令) 임(琳)이며 증조는 첨의(僉議) 유신(由信)이다. 경남 밀양시 단양면 사연리에 추모재(追慕齋)를 건립하여 봉향(奉享)라고 있으며 향사일(享祀日)은 음력(陰曆) 10월 15일이다. 후손들을 밀성박씨(密城朴氏) 충헌공후(忠憲公后) 진사공파(進士公派)라 한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12) 박삼양<朴三陽, ?~?>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으로 휘(諱)는 삼양(三陽)이다. 할아버지는 원(原)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이며 아버지는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이고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여식(女息)으로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이다. 밀성군(密城君) 윤문(允文)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조(高麗朝)에 정언사(正言事) 벼슬을 지냈다. 공(公)의 사적(事跡)은 뚜렸이 남아있지 않으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찬(撰)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 묘지명(墓誌銘)에 ‘三陽拜正言言事出倅鷄林卒于官’이라 ‘삼양은 정언으로 배명(拜命)받아 언사(言事)로 경주(鷄林, 지금의 경주) 수령으로 나갔을 때 관에서 죽었다’ 하였으니 관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세에 세워진 단비문(壇碑文)을 살펴보면 유허지(遺虛址)나 사적(事跡)과 기록 등이 남아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후손들이 경남 밀양시 하남읍 귀명동에 단(壇)을 세워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향사일(享祀日)은 매년 음력(陰曆) 10월 3일이다. 밀성박씨(密城朴氏) 충헌공후(忠憲公后) 정언공파(正言公派) 파조(派祖)이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13) 박계양<朴啓陽, 1342~1422> 고려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자(字)는 계신(季信)이고 휘(諱)는 계양(啓陽)이니 충헌공(忠憲公) 척(陟)의 증손(曾孫)으로 고려(高麗) 삼중대광보문각대제학(三重大匡寶文閣大提學) 윤문(允文)의 아들로 육형제중 5남이다. 어머니는 광주인(光州人)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여식(女息)으로 해양군부인김씨(海陽郡夫人金氏)이다. 1342년<지정임오(至正壬午)> 정월(1월) 6일에 송도(松都, 개성) 건천리 본가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는데 기개와 도량이 청수(淸秀) 하였다. 1360년(공민왕10)에 진사시(進士試)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동방급제(同榜及第)하였고 교유(交遊)하였다. 이해 10월에 책문으로서 병과 7인에 급제하였다. 1366년 12월 통직랑(通直郞)으로 고공정랑(考功正郞) 예문응교(藝文應敎) 지제교(知製敎)를 거처 1372년(공민왕 20)에 비서감(泌書監)에 올라 중정대부(中正大夫)품계를 받았다. 그 후 중국과 일본의 사신(使臣)으로 많은 공을 세우고 1422년(세종4년 壬寅) 밀양(密陽) 쌍계 서사에서 별세하다. 묘소는 밀양부 서쪽 수산 귀명동에 있다. 향사일(享祀日)은 매년 음력(陰曆) 10월 3일이다. 밀성박씨(密城朴氏) 충헌공후(忠憲公后) 참찬공파(叅贊公派) 파조(派祖)이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홈페이지 http://chungheongong.com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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