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삶
전북고창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첫 번째 '화사집'을 발간,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으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해방 후 두 번째 시집 '귀촉도'를 발간, 이시기부터
그의 경향은 초기의 악마주의적인 생리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사상으로 접근하여 심화된 정서와 세련된 시풍으로
민족적 정조와 그 선율을 읊었다. '신라초' 이후부터는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본격적인 진리의 세계인 영원주의의의 이념과 선적인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불리어졌다. 그의 사상적 기조는 영원주의, 영생주의이며, 문화사조상의 배경은
주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이다. '신라초' 이후에 더욱 진경을 보인 작품 50여편을 모아
시집 '동천'을 발간, 신라와 불교의 세계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그를 종합적으로 대표하는
작품 '국화옆에서'는 한국 시사를 장식하는 걸작으로 평가되며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시론의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시창작교실' '시문학개론' '한국의 현대시' 등의 저작이 있다.
1972년 서정주 문학전집 전 5권이 발간되었고 세계기행시집 '서으로가는 달처럼'이 있다. <한국문예사전>
서정주의 문학세계
서정주(徐廷柱, 81)시인이 시력(詩歷) 60년을 맞았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돼
나온 徐씨의 문단생활 60년을 맞아 최근 출간된 [시와 시학] 가을호는 특집으로 "미당문학 60년"을 꾸몄다.
이 특집에서 徐씨는 "나의 문학인생 7장"이란 장문의 글(2백자 원고지 60장)을 통해 시라는
한송이의 국화꽂을 피우기 위해 가슴 조였던 젊음의 뒤안길, 그 사상적 편력을 진솔하게 밝혀놓았다.
徐씨는 10대 중반의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공산주의에 빠져들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때
이 나라의 많은 민중들의 처참한 꼴을 보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경제적 균배(均配)주장이
좋은 해결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가죽구두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의 "지까다비"를 신고 다녔으며
하숙도 학교 근처의 좋은 집에서 빈민촌으로 옮겨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다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사선(死線)까지 돌파했다. 1930년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에는 중앙고보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투옥됐다.
그러다 16살때 읽은 톨스토이의 "물질적 균배로서 인생의 행복을 두루 좌우하다니 그 무슨 엉터리 소리냐"는 외침에
감명받아 자유사상의 넓은 벌판으로 나아갔다." 넓다면 한정없이 넓고 깊다면 또 한정없이 깊은 인생에서
경제적인 균배만으로 그 해결책을 삼는 사회주의의 좁은 이해력"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18살 때는 니체의 사람과 신을 일치시키는 인신(人神)이라는 초인격과 모든 비극의 철저한 극복의지에 빠져들었다.
또 니체의 "그냥 지나쳐 가기"가 "천하고 저속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동화하지 않고 인생의 순수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아주 필요한 일"로 생각됐다고 밝히고 있다. 20대 후반인 일제말기에는 "거북이처럼 끈질기고
유유하게 이 난세의 물결을 헤치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인생관을 갖게 됐다. 그와함께 이조백자를 바라보며
한정없는 체념 속의 달관을 깨우치고 동양사상으로 회귀했다고 밝히고 있다. 徐씨는 또 "친일적이라는
시 몇 편이 있지만 그것은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국민 총동원연맹의 강제명령에 따라 어쩔수 없이
쓴 것들이니 이 점은 또 이만큼 이해해 주셨으면 고맙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 현대시의 최고봉임을 누구나 시인하는 徐씨,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역사성, 탈현실성을 공격받는
徐씨에게도 역사와 현실에 괴로 워하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은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 이육사의 생애
정렬하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꿰뚫는 듯한 육사 이활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수난을 겪는 민족을 위한 광명에의 염원과
그 예언으로 시종일관한다. 그는 북경의 싸늘한 감방에서 40평생의 짤막한 생을 닫을 때까지 그 태반을 일본제국주의의 질곡에
끌려 다녔음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었던 사상적, 행동적 투사였다. "나에게는 진정코 최후를 맞이할 세계가 머리 한 편에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이 타오르는 순간 나는 얼마나 기쁘고 몸이 가벼우리이까?" 1938년 세상을 떠나기 6년 앞서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이렇게 썼던 그는
언제든지 죽음을 곁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학은 현실의 행동배경에서 승화하여 폭넓은 서정시의 감동을 자아낸다.
1930년대 후반 모더니즘의 유행에서 벗어나 한국의 고유성 회복과 고전적 전통에의 복귀로 향한 그의 노력은 후대를 위한 문학사적 가교를 이룩했다.
교동의 어린 시절
육사는 1904년 음력 4월 4일 이 마을에서 아은 이가호를 아버지로 범산공 허형의 딸 김해 허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말 의병장 허위는 육사의 어머니의 숙부가 된다. 그는 부계의 한학과 모계의 기개를 받음으로써
후일 그의 문학과 항일의 행동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이육사는 어려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린 육사에 대한 어머님의 가르침이었다.
이육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생활태도를 입증하듯이
원천마을에 살고 있는 당숙 이훈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성격이 대쪽 같아서 어른이 야단쳐도 자신은 잘못했다 항복하지 않았다.
그가 한 행동은 나름대로 옳게 판단한 뒤에 실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치헌 이중직은 일찍이 개화하여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땅을 떼어 나누어 준 사람이다. 육사는 이처럼 변해가는 집안의 정황을 보았고 이것을 실천했던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그가 결혼한 것은 17세 때였다. 배우자는 순흥 안씨 일양이었다 1922년 육사이 일가족이 대구로 나왔다.
그는 그로부터 항일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의열단 3형제
육사의 다섯 형제는 모두 인물됨이 출중한 사람들로 그 이름은 원기, 원록, 원유, 원조, 원창이었고
육사는 본명 원록, 원삼, 개명인 활을 썼다. 뒤에 원기는 한학으로 원유는 서예로 원조는 문학평론으로
원창은 언론인으로 그 재주를 보였다. 육사는 1925년 21세 때 홀연히 일본으로 떠났다. 동경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양문물을 접하면서 플루타르크 시이저 나플레웅 등의 영웅전을 읽었다. 그리고 6개월만에 돌아왔다.
그해 9월 독립운동 집단인 의열단에 가입한 육사는 밀명을 받고 중국을 다녀온다. 그러나 1927년 육사는
장진홍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폭탄 반입자로 연좌되어 체포 3년형 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원기,
원유와 함께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수인번호 64번이 아호가 되었다는 얘기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29년의 일이다. 그해 아들 동윤을 보았으나 일가의 안녕과 행복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의 의지는 꺼질 줄 모르는 불꽃처럼 타 올라 다시 북경행, 그리하여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든 것은 1930년의 일이다.
1933년 가을에 그는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 그 시기부터 육사 또는 활을 사용하며 세상에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육사의 최후
육사는 형제 가운데서도 인품이 무겁고 점잖은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한시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친구에게 경제적인 무리를 시키더라도 장안에서 가장 잘하는 양복점을 찾아가서 옷을 맞추어 입었다.
시대적 환경이 좋았다면 유명한 멋쟁이임에 틀림없었다. 그의 인상은 독립 운동하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이 가을하늘 달덩이 같았고
넥타이 한번 구기는 일이 없었고 단정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시 읊기를 잘하고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갑갑하면 양말을 벗는 버릇이 있었으나 술 주정은 하지 않았고 원조처럼 수다스럽지도 않은 공손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단적으로 외유내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34년 이래 서울에 살면서 작품을 발표했다.
유작으로 발표된 '광야'는 그가 1940년을 전후하여 썼던 작품들 중의 걸작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 곳은 범(汎)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梅花) 향기(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일본경찰의 철퇴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관할 줄 몰랐다. 겨레에 비칠 서광에 대한 희원으로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그 초인을 불러오고 싶었던 것일까 1943년 초 아직 적설이 하얗던 어느 날 육사는 또 북경행에 나섰다.
그리고 4월에 돌아와서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신분증명서를 몸에 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북경을 오고 갔음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동대문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명륜동 집에 들이닥친 것이 6월이었다. 그리고 체포된 지 6일만에 북경에서 그를 압송할 사나이들이 왔다.
부인 안씨가 죽을 끓여다 들여민 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육사 이활은 1944년 1월 16일 북경 옥사에서 4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으니
그의 유해가 돌아온 것은 그 15일 뒤이다.
그는 지금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던 그 원천 뒷산 낙동강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