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바람
by. 아름다운i
열린 문을 굳게 닫아 버리듯 나는 내 가슴의 문을 닫았다.
사랑이 그 안에서 굶주려 더 이상 나를 성가시게 굴지 못하도록
이윽고 저 지붕 너머에서 5월의 따사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거리에서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 난간으로 한 곡조 들려왔다.
방안은 햇살로 밝고 밝은데 사랑은 내 안에서 소리 지른다.
“나는 아직 튼튼해, 놔 주지 않으면
가슴을 쳐부수고 말 테야.”
- 티즈데일
5월 바람 (9)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래서 도련님은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주 크답니다.
물론 새빨간 피를 향한 공포 또한 아주 무섭구요.”
“그 어린나이에 부모님들의 사체를 직접 봤다 이 말입니까 그럼?”
“회장님의 생각이셨습니다. 비행기 사고로 처참히 찢어지고 부서진 흔적
을 보여주셨답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잊으셨지만 혈흔의 흔적과
함께 부모님의 죽음을 직접 받아들이게 만드셨죠. 아직도 가끔 악몽에 시
달리는 것도 죽은 부모님의 형체가 가끔씩 머릿속을 맴돌아서 자신을 괴
롭힌다고 하시더라구요.”
강회장은 역시나 아주 독한 사람이었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어린 초등학생 손자 녀석의 손을 끌고와 니 부모는 이렇게 처참히 죽었다.
이젠 부모의 죽음을 인정하거라. 크고 강해지거라. 그리고 사업을 물려
받아 최고의 경영인이 되거라.
배려? 손자에 대한 배려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부모님의 사체를 보여주
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악독하기로 소문난 나를 이곳에 보내지도 않았
을 것이다. 자신의 하나뿐인 손자를.. 약하디 약한 손자를 강하게 훈련
시켜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 있었던 것이다.
천성이 착하고 순한 자신의 손자가 완벽한 경영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나 같은 독종의 사람이 필요했고 강회장은 완벽히 성공했다. 도련님을 이
리저리 잡아가며 들쑤셔놓았으니 아마 상이라도 내려 주지 않을까.
매정한 사람..
안쓰러운 맘에 잠든 도련님의 손을 꼭 잡았다.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던 도련님은 곧 잠이 들었고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은 다시 앓고 있었다. 미열이었지만 도련님의 고통은 계속되는 듯 했고
또다시 악몽속의 부모님이 나타나 괴롭히는 듯 엄마를 부르며 정신을 잃
기를 몇 번.. 밤새도록 유모와 함께 도련님의 곁을 지켰다.
다그치기만 하며 도련님을 몰아가던 내 모습이 무척 죄스러웠다. 도련님
은 상처가 많으신 분이다. 부모님사랑 한번 제대로 못 받아봤고 중학교
교육과정을 끝으로 가정교사들이 붙어앉아 도련님의 공부를 책임지고 계
셨다.
유모의 말을 듣자하니 학교라는 곳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도련님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평범한 수업을 듣고 평범하게 공부를
하며 평범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학교를 때려치우고 가정교사를 들인다는 말에 며칠동안 울면서 거부를
했을 정도로 이 지긋지긋한 작은 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결
국은 엄한 할아버지의 설득으로 학교를 떠나왔지만 몇 번이나 울면서 학
교로 대려다 달라고 했다곤 한다.
누구나 평범히 가질 수 있는 삶이- 도련님에겐 더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
던 것이다.
“많이 가까워지신 것 같아요.”
“글쎄요.. 아직도 제가 많이 미울 겁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도련님에
대해 많이 알게된건 사실입니다. 허나 제 방식이 크게 변하진 않을겁니
다. 저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강경책으로 밀고 나갈 작정이니.. 너무 많
이 미워하진 마세요.”
“중령님은 어떤 분이시죠? 원래 그렇게 차가우신 분이신가요? 아님 앓고
있는 도련님의 손을 꼭 쥐어주실 정도로 한없이 따뜻하신 분이신가요?”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라는 사람.. 과연 어떤 사람일까..
돈이라는 부수적인 삶의 가치가 전부인냥 하늘거리는 지폐 따위에 목숨
거는 사람?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선뜻 경호원이 되겠다고 한 사람? 사
람 패는 게 재밌어서 키워온 주먹이 어느새 여러 곳에서 많은 인정을 받
을 정도로 제법 단단해져서 당당히 주먹만 믿고 경호원이 되겠다고 설친
사람.
그것도 아님.. 고아로 자라온 내 삶이 너무나 싫어 온통 흑빛으로 나를
가려버린 체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며 비겁하게 도망이나 다니는사람..
순수한 도련님과는 정확히 대조를 이루는. 겉과 속이 온통 시커먼 욕심으
로 가득 찬 사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체 슬그머니 도망치듯 도련님의 방을 빠져나
가는 지원이었다. 그런 지원의 뒷모습을 유난히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
는 유모였고 곧 안타까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중령님은....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많을 사람입니다.”
* * * * * *
“또 예습 복습 안하셨군요. 이건 어제도 틀렸던 문제입니다.”
“정말 자꾸 헷갈리는데 어떻게 해요. 모르겠다구요.”
“간단한 경제학 용어 좀 외우라고 했잖습니까?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스스로 숟가락을 쥐고 밥을 먹게 되었을 때쯤
지원은 다시금 성훈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원이 미워죽을 텐데도 불구하
고, 지원의 상반신을 온통 감싸고 있는 하얀 붕대의 모습과 불편해 보이
는 팔과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를 보고서 아무런 대항 한번 못하고 지
원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는 성훈이었다.
어찌됐건 자신을 구하느라 이렇게까지 다쳐버린 지원이었고 스탠드를 들
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만든 사람 역시 자신이었기 때문에 더 이
상 지원 앞에선 툴툴대는 것조차 미안했다.
그래서 찍 소리 못하고 지원이 내민 책을 밤낮을 설쳐가며 읽고 익혔는데
뭐가 불만인지 성훈이 하는 공부에 온갖 테클은 다 걸고넘어지는 지원이
었다. 시종일간 자신의 할아버지인 강회장과 비교를 해가며 강회장의 삶
의 방식이 이게 아니라는 둥 경훈을 뺏기고 싶냐는 둥 말도 안 되는 협박
까자 가세해 열일곱 왕자님의 어깨를 잔뜩 눌러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몸이 다 완쾌되지 않은 상황이라 성훈은 침대에서 책을 보고 있었고
지원은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하나씩 묻고 대답
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근데요.. 지원은 몇 살 이예요?”
오전 내내 이어진 수업이 지루했는지 기지개를 켜며 똘망 똘망한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는 성훈이었다. 지원은 대답하기를 꺼려하며 창밖으로 계속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런 지원이 얄미웠는지 아픈 몸으로 침대에서 훌쩍
내려와 슬리퍼를 끌고 지원에게로 다가서는 도련님이었다.
꽤 좋은 날씨의 따뜻한 햇살이 그대로 창가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픈
상처를 붕대로 감싼 체 창밖을 바라보는 지원이었고 살금살금 다가온 도
련님은 지원의 곁에 지원과 똑같은 부동자세로 우뚝 서버렸다.
그리곤 지원의 팔을 자꾸만 당기면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강요했다.
붉은 입술을 쉴새없이 옹알거리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
릴 정도였다. 조용하다 못해 상막하기까지 한 곳에서 생활해 오던 지원으
로서 저택안의 수다쟁이 도련님은 인상을 찡그리기엔 더없이 좋은 존재였
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지원이 밉다는 듯 지원의 아픈 상처를 두 손으로 꾹
눌러놓고 저 멀리 침대가까이로 다시 도망가는 도련님이었다. 정말 웃음
밖에 안나오는 지원이다. 저렇듯 순수하고 귀여운 행동 하나하나는 깨끗
한 삶을 살아온 도련님의 천성인 듯 했다.
“스물다섯 입니다.”
“스물다섯? 우와~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네.”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며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도련님을 보고있
자니 웃음부터 나왔다. 도련님의 부모님들이 살아계셨다면 저렇듯 귀여운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 사랑 속에서 컸겠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상처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도련님이었다.
“근데..지원이 여기서 지내면 지원의 가족들은 어디 있어?”
반말. 존댓말이 골고루 섞여 도련님 특유의 귀여움이 더 느껴지는 듯 했
다. 엄연히 따지면 고객인데 고객에게서 존댓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조
금 당황스러웠지만 화가나 소리치는 도련님의 모습에서 나에 대한 예의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친근히 대해주고 괜한 호기심으로 다가오려는 도련님이 오히려 고마울 정
도다. 저렇듯 큰 눈을 똘망거리며 이것저것 묻고 있는데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큰 눈 가득 눈물을 뿜어내고 말테지..
훗,, 어느새 도련님의 사소한 버릇까지 다 익혀가고 있는 내 모습에 내가
놀랄 정도였다.
“가족은 없습니다. 고아로 자랐습니다.”
“............”
‘고아’라는 말에 크게 놀란 듯 아무 말 못하고 다시 이불속으로 폭 들
어가 버린 작은 몸이었다. 괜한 미안함이라도 들었는지 이불로 얼굴을 가
린체 몰래 몰래 나를 바라보며 온갖 심각한 표정을 지어대는 도련님의 모
습에 또다시 웃음이 났다.
슬픔과 기쁨이 순식간에 얼굴에 모두 드러나는 도련님의 모습은 시원한
청량음료라도 마시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순수.. 나와는 많이 동떨어
진 모습과 슬프다는 감정을 그대로 다 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직도
마냥 어리기만한 도련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는 순수그대로 보자. 괜히 바꿔보겠다고 착한 도련님의 본성까지 건
들지는 말자. 도련님은 순수한 그대로.........가 예쁜 것이다.
“지원. 나 잘거야.”
“점심식사 전에 깨워드리겠습니다. 커튼은 닫아 드릴까요?”
“아니 됐어. 저기...”
“...............”
“아무대도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응?”
쿡.. 마치 저 표정은..
가족의 이야기를 꺼낸 죄책감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내가 가족의 그리움때
문에 뒤돌아서서 울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저는
어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도련님의 시각으
로 모든 걸 해석을 하는 상황에서 괜한 변명 같았다.
가족이 보고 싶을 땐 언제나 저렇게 이불 속에서 숨 죽여 우는 것인지 얼
굴까지 다 덮어버린 이불은 들썩이고 있었고 조용한 방 가득히 도련님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래도 도련님은 할아버지라도 계시지 않냐고 위로를 하려다 그냥 그만두
었다. 처음부터 고아로 자란 나와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크다가 갑자기
그 큰 그늘이 없어졌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5월 바람 (10)
“아앙~ 간지러워.”
“가만히 좀 있어보세요. 머리가 너무 많이 자라서 골칫거리라구요.”
“간지럽다니까. 헤헤~”
아침부터 경쾌한 웃음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샤워를 막 마치고 옷을 갈아
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곧 환하게 웃고 있는 도련님과 유모의 모습
이 보였다.
도련님 역시 금방 샤워를 마치신 듯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커다란 거실소
파에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었다. 유모는 드라이기를 들고 열심히 도
련님의 머리를 말려주는 것 같았다. 어느새 많이 길어버린 도련님의 머리
는 어깨선에 닿을 정도로 길어져 있었고 숱이 많은 도련님의 머리카락이
부담스럽다면서 웃고 있는 유모였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의 긴 머리카락은 여러모로 불편할 듯 했다. 아침마다
저렇게 일일이 말려줘야 하는 수고스러움까지 더해서 아주 어리광이 더
늘고 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도련님의 여성스러움을 한껏 더해주는
악 요소로 작용을 할 뿐이었다.
서둘러 도련님과 유모에게로 다가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원~”
“네. 중령님 좋은 아침이요.”
스탠드 사건 이후로 한층 부드러워진 도련님의 태도였다. 언제든 웃으며
나를 대하고 있는 도련님의 모습에 나 역시도 함께 웃고 있었다. 저렇게
웃고 있으면 화를 낼 수가 없다, 차라리 처음처럼 박박 대들며 자신의 권
리를 주장하는 편이 훨씬 더 편했다.
머리가 거의 정리가 되었는지 이젠 빗을 들고 부드럽게 도련님의 머리카
락을 빗어 내리는 유모였다. 한올한올 빗어내리는 유모의 손길에 온갖 정
성이 깃들어있는 듯 했다.
“머리가 참 많이 길었습니다.”
“도련님이 긴 머리를 좋아하세요. 우리 도련님 예쁘죠?”
“유모두 참.. 내가 여잔가..”
“여자가 아닌 이상 그 정도의 긴 머리는 불편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자르는 편이 훨씬 더 나을 듯 한데.. ”
탁. 그대로 들고 있던 빗을 떨어트리는 유모였다. 놀란 사람은 비단 유모
뿐만이 아닌 듯 도련님 역시 예의 그 따뜻하던 눈길은 어디로 감춰버렸는
지, 갑자기 울그락 불그락 굳어지기 시작하는 도련님의 얼굴이었다. 화가
나신건가..?
막상 말은 던졌지만 이토록 냉랭한 반응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
저 귀찮을 듯한 머리카락 좀 쳐내라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환경과 내 생활을 바꿀 수 있을 순 있어. 하지만.”
“...............”
“내 몸까지 지원 맘대로 좌지우지 하려 하지 마.”
화가 나신건지 아니면 도련님의 식대로 풀이하자면 ‘삐지신건지’ 소파
에서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버리신 도련님이었다. 대단한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아 뚱한 얼굴로 유모를 바라보니 유모 역시 많이 언짢은 표정이
었다.
도대체 이번엔 또 뭐가 잘못된 것일까? 사내자식이 긴 머리 출렁이며 다
니는 꼴이 무척 꼴불견으로 보이는 내 시각으로선, 암만 예쁜 도련님이지
만 여자가 아닌 이상 어깨까지 닿는 긴 머리를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아침마다 감겨주고 말려주고,, 어린애도 아닌데 게다가 여자도 아닌데 도
통 저렇듯 신경 써야 하는 이유조차 모르겠다.
“이번에도 중령님이 잘못 하셨어요.”
“매번 저는 잘못만 하죠. 이번엔 또 뭐가 문제입니까? 그깟 머리카락 좀
정리하자는데 저토록 삐져서 투덜거리는 도련님을 이해할 수 없군요.”
“뭐든 중령님 식대로 세상을 보지 마세요. 더더군다나 철없는 도련님을
중령님의 눈으로만 보게 된다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거슬릴걸요.”
“긴 머리가 거슬린다는 건 유모도 알고 있는 듯 하군요.”
“예쁘잖아요. 쿡...”
“공주입니까? 나참.. 도련님은 남자입니다.”
괜히 무안해져서 서둘러 거실을 벗어났다. 어찌됐건 저토록 예쁘장한 얼
굴에서 무슨 카리스마가 나오겠는가. 독한 표정하나 제대로 못 지어서 매
일 들켜버리는데 하물며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을 다 가려버리는 긴 머리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시원하게 자르는 게 도련님에게도 좋고 아침마다 머리를 말려주는 수고스
러움을 들 수 있으니 유모에게도 좋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
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고. 일석이조 아닌가 이 말이다.
도통.. 이 저택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 * * * * *
“우와~ 유모 짱이야!”
“쿡.. 도련님이 좋아하실 줄 알았죠. 어서 앉으세요.”
조용하던 저택이 갑자기 부산스러워 졌다.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갑자기 왁자지껄 해진 소리에 놀라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곧 입이 떡 하니
벌어질 정도로 더 놀라고 말았다.
분명한 거실이었는데, 오전까지만 해도 도련님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던
그 소파는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거실은 온통 풍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날인가...?
거실 정중앙에 놓여있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삼단케익- 가만히 보아하
니 그냥 평범한 케익이 아닌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진 케익인 듯 했다.
순식간에 녹아버릴 아이스크림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쌓아서 저따위 이벤
트를 만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도련님의 생일은 2월 달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분명한 9월이었다.
유모의 생일인가..?
“요즘 도련님이 축 쳐져 있으니까 저택이 다 죽잖아요. 평소처럼 도련님
의 환한 웃음소리가 감도는 저택이 되었으면 해요.”
“맘에 드세요 도련님? 가장 신경 쓴 아이스크림 케익인데 녹을까봐 얼마
나 조마조마 했다구요. 예쁘죠??”
“풍선 부느라 입이 다 부르텄답니다. 유모님이 꼭 정성으로 불어야 한다
고해서 이 많은 풍선을 입으로 다 불었답니다.”
“너무 예뻐!! 고마워 다들!!”
흠.. 저들의 대화를 정리해보자면-
나 때문에 축 쳐져 사는 도련님이 안타까워 이런 이벤트를 마련했고 아침
부터 온 저택사람들이 짝짝꿍이 되어 풍선불고 케익 만들고 거실을 온통
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예쁜 성으로 만들었다 이 말인가..?
특별한 날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도련님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해..?
돈이 썩어 뭉개지는 모양이군.
고아로 자란 내 자신이 단 한번도 비참한 적이 없었지만 이토록 성대한
이벤트나 기념일 따위를 챙기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조금 내 삶이 비참해진다. 물론 아주 잠시지만.. 케익 하나 사다놓
지 못한 내 생일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 상태이니 뭐.. 더 이상 억
울할 것도 없긴 없다.
아무튼 도련님의 저토록 화려한 한순간의 ‘놀거리’는 어떠한 의미도 부
여하진 못한다. 도련님의 어리광만 늘게 할 뿐이었다. 도대체 유모라는
사람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일까? 마치 진짜 왕자님이라도 모시고 산
다는 착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건 아닐까. 오늘은 어떤 이벤트를 해
서 왕자님의 입맛에 쏙 맞아떨어져 볼까..? 훗..
“지원~!”
“중령님 내려오셨어요? 바쁘신 것 같아서 그냥 저희들끼리 준비를 했어요.”
“잘하셨네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잔뜩 걸려서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까
지 머리위에 쓰고 좋아라 웃고 있는 도련님이었다.
나의 강경책은 이쯤에서 접어야 할 듯 하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이 작은
행복에 들떠하고 만족하고 감격스러워 한다. 도련님의 미래? 관심이나 있
는 것일까. 끊기지 않고 제 때 제 때 때맞춰 들어오는 많은 돈이 고마울
테지. 부족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이 생활이 즐거울 테지..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열등감을 느끼는 건가 지금..? 고작 이 작은 도련님의 모습에서..?
훗.. 은지원 많이 유치해진 것 같다.
“오전에 머리 자르라고 해서 기분 상한 건 내가 넉넉하게 용서해줄게.”
“..............”
기분이 다시금 좋아지신 도련님이었다. 역시나 도련님의 다혈질적인 성격
은 이럴 때 빛을 바란다. 자신이 뭣 때문에 기분이 상했었는지 알기나 할
까? 순식간에 금방 풀어져 버리고 다시금 순식간에 기분이 상해버린다.
열일곱 도련님께 그 이상을 기대했다는 것이 조금은 무모했다는 것도 알
게 되었다. 누가 뭐래도 도련님은 아직 많이 어리다.
“저는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같이 케익이라도 드시지..”
“아니요. 됐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다시금 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도
련님이었지만 도련님의 작은 파티를 함께 할 만큼 나는 여유가 있지 않았
다. 내일 당장 도련님과 함께할 수업을 미리 준비해야 하고 몇 달이 체
남지 않은 석사학 시험도 준비해야 했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 이곳에서 안주할 순 없다.
조금 더 나은 생활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수는 없다.
단지. 이 따위 허위허식이 가득한 작은 파티 따위를 나를 위해 내가 직접
준비할 만큼의 여유로운 생활.. 훗..
괜한 열등감에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나란 인간이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5월 바람 (11)
“도련님은 잠드셨습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늦은 밤이었다. 갑자기 내 방문을 두드린 유모였고 마지막 수업자료를 정
리하고 있던 나는 유모의 대화요청을 승낙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향해
서도 저렇듯 포근한 미소를 보여주신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떠한 느낌인지 알 수 없는 나로서 유모의 저렇듯 편
안한 미소가 어머니라는 존재의 공통적인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언제나 자기의 편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도련님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중령님.... 기분 많이 상하셨나 봐요.”
“무슨 말씀입니까? 난데없이.”
“오늘 파티는 도련님이 아닌 중령님을 위한 자리였답니다.”
키보드를 두드려가던 내 손길은 그대로 멈춰버렸다. 유모가 꺼내려는 말
이 무슨 말인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선 이해를 하지 못한 듯 했다. 어린애
처럼 좋아하며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던 도련님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
직도 선한데 나를 위한 자리였다...?
유모는 농담도 잘하는 사람인가 보다.
“이젠 한 식구가 되었으니 잘 지내보자는 의미와..”
“의미와?”
“중령님을 환영한다는 따뜻한 저희의 마음이었답니다.”
“조금만 더 따뜻했다간 거실바닥이 온통 아이스크림으로 흘러내리겠네요.”
마무리 된 자료를 출력버튼을 클릭 했고 곡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
료가 인쇄되어 나왔다. 유모의 따뜻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더 이상 유모
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지금 잠들어서 정확히 다섯시가 되면 일어나 조깅을 해야 하고 많이
상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조깅이 끝나면 헬스를 해야 한다. 모든 걸 정확
히 두시간 안에 해결을 하고 일곱시 아침식사가 끝나면 열시부터 도련님
과의 수업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 잠들어야 겨우 다섯시간 정도를 잠들 수 있었다.
“피곤합니다.”
“막막한 곳에 혼자 뚝 떨어졌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사람
들 모두 중령님을 좋아한답니다.”
“사탕발림 같은 소리는 그만두십시오. 더 이상 도련님을 힘들게 하는 일
은 없을 겁니다.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방법으로 도련님
을 공주님처럼 떠받들며 대해드리죠.”
“중령님.”
“나가주시겠습니까?”
하던 얘기를 마저 끝내지도 못한 체 유모는 떠밀리듯 내 방을 나갔다.
환영한다느니 함께 한다느니 혼자가 아니라느니 하는 말 따위는 내게 필
요치않다. 좋건 싫건 5년이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야 하고 저택사람들
모두가 환영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림자처럼 도련님의 곁에 붙어 있을 나
이니 저따위 사탕발림의 말은 필요치 않다.
그들이 동경하는 저 작은 도련님. 아니 공주님을 최대한 공주님처럼 대우
를 해서 제대로 된 경영인이니 하는 말 따위는 튀어나오지도 못하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좋은 것만 가득 심어주고, 제 때 물을 주고 햇볕도 조금
쐬어주고 비바람만 막아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 앞으로 도련님을 대하면 그만인 것이다.
지랄 맞은 내 성격이 도련님의 어리광을 다 받아줄 수 있을지 염려스럽지
만 어차피 만인이 원하는 일이라는데 그들의 짝짝꿍에 신나게 춤만 춰주
면 그만인 것이다.
이 저택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후회를 했다. 아주 조금-
나라는 사람.. 이렇듯 한심한 존재였을까...
씁쓸한 맘에 어서 빨리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 불을 끄려고 하는데..
“아아악!!!!!!”
! 분명한 도련님의 방에서 들린 비명이었다.
도련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후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비밀문을 부
서질 듯 열어 재끼며 도련님의 방으로 들어섰다.
* * * * * *
“도련님!”
“지원!! 악!”
“누구냐!!”
순식간에 튕겨 나온 몸은 커다란 책장의 뒤로 한번 감춰진 후, 다시금 튕
겨 나와 도련님의 침실 곁으로 총알같이 다가갔다. 오랫동안 운동은 쉬었
지만 역시나 본능은 충실했다.
단 몇 걸음 만에 도련님의 곁으로 다가갔고 도련님은 경악을 하며 비명을
지르고 계셨다. 침대에 앉아 뭔가를 보고 소리치는 도련님을 순식간에 끌
어당겨 품에 안았다. 침대를 방패삼아 도련님을 끌어내려 내 뒤로 숨겼고
곧 가슴께에서 총을 꺼냈다.
탄환을 장전하고 빠른 눈으로 도련님의 방을 살폈다.
[휘리리릭~]
“거기서!”
“아악- 지원!”
“도련님!”
정말 개 같은 상황이었다. 눈앞에 두고도 놈을 놓쳐버렸다.
튀어나가려던 몸을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아버린 도련님이었고 장전한 총
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 해 버렸다. 뒤에서 충격이 가해지리라곤 생각
지도 못한 상황에서 앞만 내다본 나는, 갑자기 나를 껴안는 도련님에게
묶여 놈이 창문을 뛰어 내려가는 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손 치우십시오!”
“가..가지마.”
“장난하십니까? 이손 놔요 당장!”
꼭 쥐어진 도련님의 손을 풀고 떨어진 총을 쥐고 순식간에 놈이 뛰어내려
간 창가 쪽으로 몸을 날려 날렵히 움직이는데 내가 사라져버린 그 자리에
날카로운 서늘함을 남기며 뭔가가 날라들었다.
“아악-”
“고개 숙여요!”
“지원!!”
“젠장!”
창가로 뛰어들던 몸은 결국 한바퀴를 더 굴러 도련님을 밀쳐내고 도련님
이 숨어있던 자리로 들어왔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던 그것은 결국
내 어깨에 와서 박혔다.
“윽.”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랑곳없이 도련님을 살폈다. 도련님을 밀쳐낸
곳이 다행히도 소파가 놓여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도련님은 무사했다. 놀
란 두 눈이 젖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다시금 뛰어 창가 쪽으
로 다가갔다.
용의주도하게도 녀석은 이미 사라졌고 녀석이 방을 오르는 도구로 사용했
을 법한 긴 로프가 저택의 꼭대기층과 연결되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뿔사- 이것 역시 나의 실수였다. 도련님을 노릴 놈들이 난간을 타고 올
라올 생각만 했지 꼭대기층에서 내려 보낸 로프를 타고 난간이 전혀 없는
건물벽을 매끄럽게 타고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철의 요새라고 자부하던 곳이 이렇게 허술하게 방치되어 있었다니! 자꾸
만 하나씩 잃어버리고 잊혀지는 것 같아 내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이딴
허술한 경호나 하려고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들어왔는지.. 내 자신
이 한심스러워 지금이라도 당장 이 창가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윽. 커헉..컥...”
시큰거리던 통증이 급속도로 몸을 압박해왔고 결국은 입에서 비릿한 맛과
함께 울컹거리는 것들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그제야 어깨에 박힌 그것에
게로 눈길을 옮기는데..
“빌어먹을! 헉..”
작은 단도였다. 그깟 단도하나에 이토록 고통스러울 수 있구나 하고 느껴
지는 찰라 다시금 입안으로 밀려온 뜨거운 것은 꽤 많은 양이 토해져 나
갔고 바닥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젠장. 독이었다. 이렇게 많은 피가 한꺼번에 입으로 올려올 정도라면 꽤
나 많은양의 독을 쓴 모양이었다. 젠장..
“지..지원!!”
“커헉..오지 마!”
“지...지원...흐흑..”
“컥..헉..허헉.. 내..내려가서..사...사람....헉..”
“지원!!!!!!”
희미한 시야로 놀라서 뛰어오는 도련님의 얼굴이 보였고.. 곧..
그 작은 얼굴마저 시야에서 가려지고 있었다.
5월 바람 (12)
젠장.. 빌어먹을..
이토록 강한 고통이라니. 차라리 어깨 한쪽을 뜯어내고 싶었다.
총알이 박혀도 끄떡없던 몸이었는데 한낮 독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이야.
그러고 보니 독에 당한적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겁에 질려 잔뜩 떨고 있는
도련님을 향해 날라 가던 단도를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어깨를 대
신 내어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도련님은 다치지 않으셨다. 그러면 된거다.
윽..... 그런데... 너무나 강해지는 고통에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
다. 이대로 며칠동안 죽은 듯 잠만 잤으면 한다. 무의식중에서도 이토록
생생한 고통인데 깨어난다면 의식이 생성되는 상황에서 다시 이런 고통을
느껴야 한다면.. 나약한 몸떵어리는 버터내기 힘들어 질것이다.
윽...............
“뭐해요! 당장 도련님 데리고 내려가세요. 어서 주치의에게 연락을 해주
세요. 이건 분명한 도..독입니다. 어서..어서..”
“유모님 진정하세요. 우선은 저..다..단도를 어떻게..”
“지원!! 지원!!!”
“도련님 내려가세요 어서!”
“싫어!! 이번엔 내가 볼 거야. 내가..흑..내가..”
죽어도 싫다고 발버둥을 치며 쓰러진 지원의 곁으로 달려가는 도련님이었
다. 하얀색 잠옷은 이미 붉은 피로 온통 물들어있었고 피를 한웅큼을 토
해내고 그대로 처박히듯 쓰러진 지원을 보고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저 단도를 빼야 하는데 지원은 마치 도련님의
접근을 막듯이 어깨에 박힌 단도를 다른 한 손으로 꼭 쥐고 그대로 쓰러
져 정신을 잃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새벽 순식간에 달아오른 저택이었다. 어느 누구하나 쉽
게 접근을 하지 못하고 주치의가 올 때까지 지원이 상태를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성훈은 화를 내며 저택사람들을 몰아세웠다.
쓰러진 지원의 몸은 어느새 이대로 굳어가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 저 칼을
빼내지 않으면 마치 지원의 몸에 그대로 박혀버릴 것만 같았는데 어느 누
구 하나 쉽게 나서지 못했다.
독이라는 위험과 함께 칼이라는 시큰한 통증 때문에 그저 주치의만을 기
다릴 뿐이었다. 평화로운 저택의 아늑한 생활에 만족하며 살던 평범한 사
람들에게서 이런 상황이 적응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냉철하다면 냉철한 유모까지 잔뜩 경직이 되어서 ‘오~주여.’따
위만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흐흑. 뭐야!! 다들 그대로 얼어붙기라도 한거야!! 어서 지원 살려내!”
“도련님 진정하세요.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럼 그렇게 신이나 부르면서 있을거야? 지원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독이라며! 독에 당했다며! 그럼 어서 이 칼을..흐흑..빼줘야 할거아냐!”
“도련님 안돼요! 다가가지 마세요!”
만류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피가 번진 하얀 잠옷을 펄럭이며 쓰
러진 지원에게로 다가가는 성훈이었다. 성훈의 모습에 놀란 유모는 어서
뛰어가 성훈의 허리를 붙들고 말렸지만 성훈은 결국 유모의 손까지 쳐내
고 지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지원의 손에 꼭 쥐어진 단도를 빼내기 위해 지원의 손을 풀려고
하는데,, 지원의 손은 이미 그대로 굳어버렸다. 굉장히 강한 독이었나보
다. 이토록 빨리 몸이 굳어오다니..쓰러진 지원의 입가에는 아직도 붉은
선혈이 뿜어 나오고 있었고 성훈의 얼굴은 굳어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지원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흐흐흑..유..유모.. 도와..줘..”
“도련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어서 떨어져 나와요. 그
칼에 찔리기라도 하면.”
“원래 이 칼은 내가 맞아야 하는 거였어! 지원이 대신 쓰러진거라구!”
“도련님.”
“욕..욕실에 물 좀. 어서! 따뜻한 물...어..어서!”
“도련님!”
“어서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럼 이 칼로 나를 찔러버릴거야!”
위협하듯 지원이 꼭 쥔 칼을 빼내려고 애써 힘을 써보지만 지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2의 제3의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미쳐
지원의 어깨로 파고들지 못한 칼날은 그대로 지원의 손에 묶여있었다.
성훈은 몸서리쳐지도록 겁이 났다. 지원이 이토록 독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자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이토록 악랄한 사람인지..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얼굴은 쉴새없이 굳어갔지만 성훈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
었다.
지금당장 지원을 구하지 않으면..지원은 생명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집사 도와줘..흐흑.. 내 힘으론 꿈적도 안해..어서..이 칼좀..흐흑..”
“우선은 욕실로 옮겨야 해요. 물을 흘러 보낸 뒤...칼을..”
“어서..어서..흐흑.. ”
“도련님은 진정하세요. 도련님이 먼저 쓰러질 것 같아요.”
“난 괜찮아! 제발 어린애 취급 좀 하지마! 갈기갈기 찢어진 엄마도 봤는
데 이딴 피에 놀랄 것 같아?!”
“도련님!!!”
금기시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워낙 어린시절 본 모습이라 제대로 기억을
하고 있지 않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다 알고 계셨다.
다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애써 냉정한 척 다 잊어버린 척 하셨다. 뭐
때문에? 이토록 강한 충격을 다시금 기억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깊은 상념조차 허락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진 방안의 상황을 수습하는게
우선 급했다. 또다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선은 창문
을 다 닫아걸었고 저택안의 불을 환히 밝혔다. 경찰은 이미 출발을 한 상
태였고 온갖 안정장치들이 난동을 부렸으니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벌써
저택을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주치의를 비롯한 많은 의사들이 지원의 상태를 보기위해 새벽에도 불구하
고 작은 저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성
훈은 소리치며 지원의 어깨에 박힌 단도를 빼내려했다.
결국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어 쓰러진 지원을 욕실로 옮겨갔고 따뜻
한 샤워기의 물을 틀어 피로 물든 지원의 옷을 적셔갔다.
상의를 벗기자 칼이 박힌 상처는 더 잔인하게 부각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성훈은 지원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안돼요 도련님!”
미쳐 유모의 항변이 들리기도 전에 성훈은 지원의 어깨에 박힌 칼로 손을
뻗었고 자기 암시를 걸 듯 뭐라고 한참 중얼거린 후에 힘을 줘 칼을 빼내
었다. 칼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어깨에선 수많은 핏방울이 튕겨 나왔고 성
훈의하얀 얼굴은 검붉은 피로 물들어갔다.
짧은 단도를 쥐고서 지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어버린 성훈
이었다. 자신이 맞아야할 칼이었다. 자신이 쓰러져야 옳은 것이었다.
지원이 대신해 쓰려져 있는 모습은 괜한 서글픔의 응어리를 폭발하게 만
들어버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도 대단
한 충격이었는데 자신을 보살피던 사람이 죽은 듯 쓰러져 피를 내뿜고 있
다는 현실이 너무 서글퍼졌다.
그대로 싸늘해져가는 지원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고 지켜보는 사람들 역
시 눈시울을 붉힐 뿐...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욕실바닥을 적셔가는 피만이 상황의 지독함을 나타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