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귀신들림(Demon Possession)
강의 전요섭 교수
귀신들림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C. S. Lewis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귀신에 관해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동등하면서도 대조적인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C. S. Lewis, The Screwtape Letters (London: Fontana Books, 1942), 9.
1.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함으로써 귀신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에 귀신의 활동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시하는 입장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과학은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개 의학과 마찬가지로 심리학계에서도 귀신들림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정신분열증의 한 형태라고 보고 있다.
의학은 과학으로서 현대 과학에서는 귀신의 존재나 귀신들림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다.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Hippocrates(B.C. 460-375)는 인간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현상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1) 광증(狂症) (2) 우울증(憂鬱症) (3) 뇌염(腦炎) 등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광증은 현대적인 질병명으로 바꾼다면 정신분열증쯤 될 것이다. 우울증은 그야말로 우울증 또는 불안증, 공포증, 망상증 등이 해당될 것이다. 뇌염은 아마도 정신지체, 정신박약 등을 여기에 포함시켜서 생각한 것 같다. Hippocrates는 정신질환이 귀신, 마귀, 악신 등에 의한 것임을 단호히 거부했다. 장석영, 「정신의학의 원리와 요법」 (서울: 일맥사, 1978), 17.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M. Scott Peck은 그의 책 The People of the Lie: The Hope for Healing Human Evil「거짓말 하는 사람들: 인간의 악을 치유하기 위한 소망」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정신과 의사 가운데 99%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 목회상담자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Pastoral Counselors-AAPC), 미국 정신과 전문의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APA) 등에서는 “귀신들림”을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서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
만일 귀신이 존재하는데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다면, 논리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약물을 복용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의학을 비롯한 현대과학의 귀신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기독교 신학이 귀신을 인정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신학 내에서도 귀신에 대한 견해는 상반되어 있다. 크게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류와 인정하지 않은 부류로 뚜렷이 나누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신학에서도 크게 상반된 견해가 있는데 귀신을 인정하는 신학사상과 귀신을 부정하는 사상이 있다. 귀신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 가운데서 대표적인 사람은 Ludolf Bultman인데 이 사람은 귀신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
2. 또 다른 하나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 지나치게 불건전하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귀신의 능력을 사실 이상으로 격상시킴으로써 귀신을 불필요하게 두려워하거나 귀신의 일이 아닌 것까지도 귀신의 일로 돌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는 귀신도 아닌 것을 자꾸 끄집어내서 귀신이라고 주장한다면 허깨비를 보고 달려들어 싸우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꾸 그 존재를 의식하고, 두려워하면 그만큼 더욱 크게 인식되는 것이다. 귀신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오히려 귀신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켜 더욱 그 영역과 사역을 넓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나쁜 것은 귀신의 역사인가?
정신질환자는 공포 속에서 살고 있고, 혼란을 경험하게 되므로 현실에 맞지 않는 망상에 빠지고 헛 소리를 하며, 헛 것을 보기도 한다.
예) 자녀를 낳지 못하여 정신질환에 걸려 베개를 끌어안으며 젖을 주는 부인,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구박을 받으며 얼마나 자녀를 갖고 싶으면 정신이상이 되었겠는가?
어떤 질병보다 가장 안정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정신질환자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한 번 정신병자로 취급되면 큰 좌절과 수치심을 겪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른 병에 걸려서 자살하는 사람보다도 정신질환에 걸려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목사들의 태도
교회에서는, 더 정확하게 목사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기보다는 무조건 “귀신들린 것”으로 판정해 버리고 정상인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키기 때문에 이들이 겪는 수치와 공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목사로서 해서는 안될 잔인한 행동이다.
목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983년의 한 설문 조사를 보면 목사들은 80.6%, 대부분 정신질환이 마귀의 역사라고 대답한 바 있다.
목사들이 정신이상을 “귀신들렸다.”고 공식적으로 판정하고, 선언해 버리기 때문에 이 판정을 받은 사람은 수치스럽고, 더욱 불안을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판정이 그들을 더욱 소외되게 한다.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귀신 공포증 또는 귀신 강박 관념”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 정신이 불안해서 목사님을 찾아가게 되면 목사님은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밖에는 없다. 또 목사는 “기도를 쉬면 그 틈에 귀신이 들어온다.”고 공갈조의 권면까지 하게 되니 더욱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에 자신의 기도가 멈추어지면 귀신은 우는 사자처럼 자신을 삼킬 것 같기 때문에 빨래를 하다가도 문득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깜짝 놀라면서 주기도문을 빠른 속도로 외우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를 외치면서 “쉬.. 쉬.. ” 소리를 내면서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것들이 일시적인 위안은 얻게 되지만 곧 불안해지고, 정말 미친 사람처럼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차를 기다릴 때도 기도를 쉬지 않기 위해서 중얼중얼하며 숨이 막힐 정도로 귀신을 쫓아내게 된다. 이렇게 하다가는 결국에 지쳐버리고 만다. 과연 이것이 신앙적인 치유였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한 바가 있다(살전 1:3; 살전 2:13). 이 말 뜻은 잠시 잠깐도 쉬지 말고 입에서 기도가 끊겨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헬라어 성경에는 “ajdialeivptw" proseuvcesqe”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말의 본래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과일이 매년 규칙적으로 열리는 것을 쉬지 않고 열린다고 표현한다.
(2) 세금을 부과받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내는 것을 쉬지 않고 세금을 냈다고 표현하는 말이다.
(3) 군대가 반복해서 공격을 하는 것을 쉬지 않고 공격을 한다고 표현한다.
(4) 기침을 자주 할 때 그것을 쉬지 않고 기침을 한다고 표현한다. 그렇다고 항상 기침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상태가 빈번하게 기침을 하기 때문에 이를 쉬지 않고 기침한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의미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빠지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잠깐도 쉬지 않고 주문을 외우듯 중얼중얼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 자신도 그렇게 기도할 수 없으면서 정신이상한 신자에게 잠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신자는 어떻게 되겠는가? 잠깐 기도를 쉬었을 때 귀신이 그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생각하여 더욱 불안과 공포에 노출되어 증상은 심해 질 것이다.
예) 이신현 목사의 동생 귀신을 보고 놀란 경험 간증
2000년 9월 20(수) 조선일보 41면 기사 "헛 것"이 어른어른하면 안과로 가세요.
귀신이나 괴물 등 헛것을 보는 현상은 시각 기능 이상이 원인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 정신의학연구소 도미니크 피치 박사는 최근 『안구 기능이 약해져 눈으로부터 뇌에 전달되는 시각 신호가 부족할 경우, 뇌가 불충분한 신호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정상과 다른 환상을 겪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영국학술협회에서 발표했다.
그는 『색소성 망막염 환자와 노화로 망막 기능이 퇴화한 사람들을 조사한 결과, 60%가 헛 것을 본 경험이 있었다』며 『이들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 촬영한 결과, 헛것이 보일 때 뇌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관찰됐다』고 말했다.
피치 박사는 『환상의 대상은 중세 기사, 19세기 의상을 입은 사람, 1차대전 참전 군인, 평온한 풍경, 소용돌이 등 가지각색』이라며 『시각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뇌가 잠재 의식 속 이미지 중 아무 것이나 꺼내 엉뚱한 환상을 만드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서울대병원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시각 정보는 시신경을 통해 대뇌의 시각 피질에 직접 전달된다』며 『시각 정보가 부정확하거나 부족하면, 뇌의 정보 해석 과정에서 다른 피질의 작용이 활성화하면서 이곳에 저장됐던 정보가 대신 사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 다른 피질에서 동원되는 정보는 시각 정보가 아님에도, 뇌는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로 「착각」해 눈 앞에 헛것을 만들어 낸다는 설명이다.
악의 세력에 병적인 집착을 가지고 모든 불행과 모든 죄의 배후에 귀신이 있다고 보려는 시각이 대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다.
이를테면 감기에 들리는 것도 귀신의 역사이고, 섹스에 빠져있는 사람 모두가 “음란 귀신, 정욕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은 일부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정욕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기 절제의 부족, 어린 아이 때 성적 행동에 부적절하게 노출된 사실, 성적 학대 또는 일반적인 죄의 결과일 수 있다. 물론 귀신의 역사도 없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모든 것은 음란한 귀신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건전하지 못하다.
3. 제3의 입장은 “귀신의 활동이 있기는 있었지만 이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학자는 Benjamin B. Warfield와 Jay E. Adams이다. Adams는 그의 저서 “Competent to Counsel” “Under the Broad Umbrella” 등에서 귀신들림은 사도 시대 이후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발생할 수도 없다고 명백히 말했다. Warfield도 주후 150년에 기적과 방언, 신유, 귀신의 활동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이른바 휴지주의(休止主義, Cessationism=The ending of miracle)라고 부른다.
● 귀신의 존재
무엇보다도 먼저 귀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일반 심리학과 목회 심리학에서 가장 상반되는 개념이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기독교회밖에 없다.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서는 귀신을 인정하는 자체를 정신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귀신은 영의 실체이기 때문에 귀신에 대한 존재의 입증은 하나님의 존재 입증처럼 용이하지 않은 것이다.
•귀신, 죽은 자의 영혼?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인간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부분을 관장하는 “영혼 또는 정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며 이것에 대한 신비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원한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죽지만 그 영혼은 살아 돌아다니다가 원한 맺게 한 사람에게 붙어서 그를 괴롭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귀신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두려운 생각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쉽게 자리잡고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심약한 사람이 귀신이 있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하고, 두려워해서 헛깨비라도 보게 되면 이러한 현상은 집단 최면에 걸려 여러 사람들이 불안에 떨게 되고 귀신을 보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례) 본 교수가 1985년에 제17보병 사단에서 근무할 때 인천해안에 있는 초소에서 병사들이 귀신을 보았다는 말이 있었다. 그 후 며 칠만에 그런 이야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또 1997년 5월 전방 제21보병 사단 군종참모로 근무할 때 DMZ내에 있는 초소에서 병사들이 귀신을 보았다는 말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병사는 정신 불안과 신경쇠약으로 후송한 일이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곳에서 근무하다가 죽은 병사가 있었는데 그 혼이 나타나서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런 괴담은 전군 어느 부대나 없는데가 없다. 병사들의 공포심이 이런 괴담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고, 공포감이 극에 달하면 귀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은 귀신의 활동의 증가를 가져온다.
이미 이러한 집단은 피암시성에 걸려서 조금만 이상한 것이 나타나도 모든 현상을 귀신으로 해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경계근무를 서면서 멧돼지가 ‘뿌시럭’ 거리면서 지나갈 때 “시커먼 귀신이 소리를 지르면서 내 옆을 지나갔다.”고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떠 돌아다니다가 귀신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견해이다. 성경에서는 죽은 사람의 영혼은 소정의 장소로 옮겨져서 절대로 이곳에 올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밝혀진 말씀이다. 그 내용은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봉독)
성경)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예) 어떤 가정에서 저녁에 제사를 지내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에게도 교육을 시킬 겸해서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절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아들에게 교육을 시켰답니다. “어서 할아버지에게 절해라!” 그런데 이 아이가 교회에 다니는 아이라 교회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배웠거든요? 또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은 할아버지에게는 절을 하지 않겠어요.”라고 말을 해서 불효자라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답니다.
그날 저녁, 밤늦도록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하고, 고민도 했습니다. 배곺은 차라 부모님이 주무실 때 라면을 끊여 먹고, 또 부모님 방 앞에 라면을 끊여서 갖다 놓았습니다. “엄마, 아빠 라면 좀 잡수세요.” 부모들이 한밤중인데 그 말을 들을 수 있나요? 못 알아듣지요. 새벽이 되어서 엄마가 밥을 지으려고 나와 보니까, 웬 라면이 방앞에 놓여 있어서 “이상하다. 이게 웬 라면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아침식사를 하면서 라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엄마가 묻습니다. “얘야 혹시 네가 안방 앞에 엊저녁에 라면 갖다 놓았느냐?” “네” “그걸 왜 갖다 놓았냐?” “배고파서 하나 끊여 먹고 아버지도 배고프실 것 같아서 좀 잡수시라고 끊였습니다. 어제 저녁에 라면 잡수시라는 말씀 못 들으셨습니까?” 그랬더니 아버지가 호통을 치면서 “에이 바보같은 녀석, 중학교까지 다니는 녀석이 저렇게 어리석어? 사람이 자고 있는데 듣기는 뭘 들어? 자는 사람이 라면을 먹냐 이 녀석아! 정 그러면 깨워서 잡수시도록 해야지! 넌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 어이구...”
그러자 그 아들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것 보세요 아버지! 살아 있는 사람도 잠자면 말을 못 알아듣고, 음식도 못 잡수시는데, 죽은 사람이 무슨 절을 받고, 음식을 잡숫는다고 제사상을 차리세요? 제발 그런 생각 좀 하지 마세요. 저는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잘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후로 그 가정이 다 예수믿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떠 돌아다니다가 다른 사람에게 붙어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현상을 본다면 그것은 귀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과 공포의 소산물이다.
•성경에 나타난 귀신의 활동
귀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기독교 목회상담학과 일반상담학의 결정적인 큰 차이다. 기독교상담학이란 귀신의 존재를 믿고 귀신이 인간의 인격에 붙어서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러한 역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 신학이며, 기독교적인 치료적 접근이다.
대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귀신이나 악마의 이미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있고, 흰옷을 입었으며, 소름끼치는 웃음 소리를 내면서 긴 이빨과 긴 손톱을 가지고 있는 한 많은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또 악마의 이미지도 “이마에 뿔이 달린 흉칙한 괴물의 모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귀신이나 악마에 대한 상상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귀신은 자신의 모습이 없으며, 하나의 영으로서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영적인 실체로 나타나 있다. 귀신의 정체와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들이 있다.
(1) 무속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불신자의 사후 영이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2) 복음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천사장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 귀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3) 자유주의신학자들 가운데는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신약성경에만도 “귀신”이라는 말은 55회 언급되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말이 22회, “악령”들이라는 말이 14회 나온다. 이러한 빈도로만 보아도 귀신의 존재는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중에서 가장 많은 경우가 “귀신들림”이다. 따라서 이것을 전면 부정한다는 것도 신학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귀신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사람들을 속이거나(고후 2:11), 미혹시키며(고후 11:3), 병들게도(눅 11:14) 했던 기록들이 있다. 또 귀신은 인간에게 병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질병이 귀신으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귀신도 사람의 몸에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기록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귀신이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영에 접근하려는 목적은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귀신의 역사로 인해서 내적인 상처를 입게 되면 대인관계의 단절을 비롯해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귀신의 정체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귀신은 초자연적인 통찰력을 갖고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했다(막 1:24).
결국 귀신들림이라는 것은 귀신이 인격체이기에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사로잡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점령이기보다는 인격적, 의지적 점령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귀신으로 인한 질병 상태와 인체의 생리 기능에 균형이 깨져서 발생한 질병을 혼동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즉 마음의 상처나 심리적인 충격으로 인한 단순한 정신질환이나 신경증 환자들에게 무조건 귀신들렸다고 지칭할 경우 환자의 심리상태가 더욱 불안해지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하여 병세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치유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필히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어야 하며 주님의 심정으로, 사랑으로 환자들을 돌봐야 한다.
• 귀신들림의 원인
귀신이 인간의 정신과 영 속에 들어오는 통로는 바로 죄이다. 죄를 범하게 되면 귀신을 환영하는 결과가 되어 인간의 정신 속에 들어오게 되어 그의 인격을 사로 잡게 되는 것이다. 귀신들리는 것은 불신자에게만 들리게 되어 있고, 귀신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미치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귀신에게 사로 잡히지는 않으나 약한 정도로부터 어느 정도 심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속박과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David Martin Lloyid-Johns에 의하면 귀신의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1) 귀신의 지배(Depression=Possession: 귀신들림)
(2) 귀신의 압박(Oppression: 사단의 공격)
또 Lloyid-Johns는 신자들도 귀신의 활동에 노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귀신의 공격을 당할 수는 있지만 Jay E. Adams의 주장대로 신자들은 귀신의 지배를 받게 되지는 않는다.
귀신들림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식과 정신적 사고방식을 귀신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자신의 자유의지와 이성을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상태를 말한다. 신자들은 자신의 이성을 완전히 귀신에게 빼았길 수 없는 것이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온전히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을 귀신들렸다고 한다(Demon possession).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인격은 완전히 귀신의 지배에 의해서 지배 당하고 귀신이 지시에 전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이 악을 행했다면 그것은 점령을 당한 것(Demon possession)이 아니라, 귀신의 공격을 당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소유권 이전 등기가 끝나게 된다.
예)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화같은 이야기지만 예화를 하나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이 하루는 나무를 열심히 깍고 붙여서 조그만한 배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배는 그 소년이 만든 소년의 것이었습니다. 매우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 소년은 배를 가지고 강가로 나갔습니다. 과연 물에 잘 뜨는가?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배를 강물에 띄웠습니다. 배는 아주 잘 떴습니다. 그 소년은 보기에 매우 흐뭇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야! 내가 만든 배가 참 잘 뜨는구나!” 그 소년이 기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돌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그 배는 급류에 휩쓸려 강하류로 떠내려 갔습니다. 소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좇아가 보았지만 배는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리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시장엘 갔습니다. 이 소년은 우연히 장난감 가게를 지나가다가 진열대에서 어쩌면 내가 만들었던 배하고 똑같은 배가 놓여 있었습니다. 들어가 보았더니 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잃어버렸던 배였습니다. 그 소년은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가게로 들어가서 주인 아저씨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배는 내가 만든 배예요!”
“에이, 이 녀석아 무슨 소리하고 있냐? 그 배가 갖고 싶으면 5천원만 가져와라!” 소년은 아는 수없이 1주일 동안 열심히 일해서 심부름 값으로 5천원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장난감 가게에 가서 그 배를 샀습니다. 가슴에 꼭 안고 돌아오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내가 돈을 주고 샀으니 이 배는 정말 내 꺼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는데 우리는 죄악으로 인해서, 사단에게 팔려서, 세상 물결에 휩쓸려서, 우리의 정욕대로 떠내려가 버린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에서 구해 오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핏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고난주간은 바로 그 죄값을 치르는 주간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믿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같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있는 놀랍고도 독특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히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그 핏값으로 나를 사셨기 때문에 내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너는 내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소유권 이전 등기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년보다 몇 천 만배 더 강한 권리와 사랑으로 잃어버렸던 나를 찾으시던 날, 나를 품으시면서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43장 본문 말씀과 같이 “이제부터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하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며, 불 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로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너는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도 죄를 통해서 부분적으로 귀신의 지배를 당하고, 그의 억압을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음란이라든지, 욕심, 시기, 질투, 게으름, 공포, 원한 등은 일부 인격이 귀신의 지배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상당 부분이 귀신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떨 때 귀신의 공격을 받는가?
어떨 때에 귀신에 노출되는가? 그 주된 원인은 약화된 영성(The Lowered Spirituality), 즉 불경건성이 그 이유라고 했다. 약화된 영성이란 불경건이 증가하고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과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David Martin Lloyd-Jones, Healing and Medicine, 정득실 역, 「의학과 치유」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3), 168.
•귀신들린 사람과의 대화
귀신론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귀신들린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화 가운데 얻어진 정보는 거짓이다. 귀신의 거짓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 말을 신뢰하는 것은 참으로 귀신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이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귀신론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며,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으로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귀신축출을 위한 구타
신문기사: “안수기도중 환자 숨지게 한 한국인 선교사에 징역형”
美 말리부 법원은 24일 안수기도를 한다며 환자를 구타해 숨지게 한 한국인 선교사와 환자의 남편 등 2명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를 적용, 각각 징역 4년과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선교사 최성수씨(42)는 1996년 7월 4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정경재씨(女. 53)를 대상으로 안수기도를 통해 악령을 쫓아낸다며 정씨를 심하게 구타해 숨지게 한 혐의가 인정됐다.
정씨의 남편 정재화씨(44)는 아들과 딸의 탄원에 의해 최소형인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의 검증결과, 숨진 정경재씨는 갈비뼈가 16개나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는 등 심한 구타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기도원에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때리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책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책을 갈아서 먹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위이다. 지적인 문제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듯이, 영적인 문제는 영적인 활동(기도)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구분
미국 Fuller신학교의 목회상담학 교수 Achibald D. Hart는 “귀신들림과 그것의 가장 통속적인 모조품(An imitator)은 바로 정신분열증이라.”고 했다. Achibald D. Hart, Gary L. Gulbranson, Jim Smith, Mastering Pastoral Counseling, 김진우 역, 「목회 상담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횃불, 1995), 62.
즉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을 구분하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에 일부 사설 기도원같은 곳에서 정신질환자를 감금,귀신을 쫓는다는 명목으로 폭행을 가해 환자가 사망하는 사례가 없지 않다고 했다.
16세기 유럽의 튜레브에서 악령을 쫓는다고 해서 정신병자 7,000명을 산 채로 불 태워 죽인 일이 있었다. 1515년 한 해만해도 스위스 제네바에서 500명의 정신병 환자를 태워 죽인 일이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쩌면 최근에도 정신질환과 귀신들린 상태를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뿌리가 다른 질병이기 때문에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목회자들은 지나치게 모든 정신적인 문제를 귀신들린 것으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목회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1983년의 한 설문 조사를 보면 목사들은 대부분 정신질환이 마귀의 역사(80.6%)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귀신 강조는 책임 회피
잘못된 모든 문제를 귀신으로 돌리는 것은 성경적인 시각일 수 있으나 이면에 책임회피가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자신의 잘못은 접어둔 채, 귀신이라는 존재가 자꾸 자신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도록 했다는 것이다. 죄는 결국 자신이 범한 것임에 틀림없음으로 죄와 책임의 전가보다는 회개가 유일한 해결책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귀신론의 심리학적인 문제는 모든 문제를 귀신에게 투사해 버리려는 심리이다. 즉 환자 가족도 입장이 난처하고, 환자 본인도 어쩌다가 이런 병에 걸리게 되었을 때 모든 책임을 귀신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일종의 방어 기제(defence mechanism)이다.
이런 감정적인 문제들을 귀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일은 몇 가지 위험을 안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위험성은 책임 회피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유발한 사람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그것을 겸손히 고백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의 해결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귀신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본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 속에서 또 다른 인격체(귀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귀신을 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문제가 되는 것은 귀신의 능력을 부당하게 강화시키고 효과적인 치유의 길을 막게 된다는 것이다.
때로 정신증에 걸린 환자에게 뇌의 화학작용의 정상적 분비를 돕는 간단한 약물 정도로 곧 치료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런 오해 때문에 치료의 길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로서의 상담자는 정신증의 기본적인 증상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상담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내용을 전면 부정한다는 것도 비성경적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인정하셨으며 또 축사(귀신을 쫓아내신 일)하신 일도 있는데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려는 견해는 왜 생겼는가?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든 예수님 당시에는 간질병과 귀신들림은 구별한 바가 있었다. 과거에는 정신적인 병은 모두 귀신들림으로 이해했다가 현대 과학이 대두되면서 귀신들림에 대해서 인식이 약화되었는데 이것은 모던이즘(Modernism)과 포스트 모던이즘(Postmodernism)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아울러서 성령의 역사와 기도로 치유할 수 있는 역사까지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영적 치료”로 유명한 Charles R. Solomon은 정신분열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담자의 증세가 어떤 정신질환이든지, 정신질환의 끝은 ‘정신분열증’인데 비록 그것이라고 할지라도 치료법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같은 병명을 붙히는 것은 사실상 불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Adams 역시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으로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다만 그것은 인식과 감각의 질환이라고 여겨야 한다.”고 했다.
● 귀신을 인정하지 않게 된 사상적 기원
1. 모던이즘(Modernism)과 포스트 모던이즘(Post-Modernism)의 영향
1) Modernism
① Isaac Newton(1642-1727)
모던이즘이라는 용어는 1946년 영국의 역사가 Anold Toinbee가 서구의 역사를 암흑기, 중세기, 현대기, 후기 현대기로 구분하면서 이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Modernism의 기본 영향은 영국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Newton으로부터 시작된다. Newton은 미국이 뽑은 지난 1,000년을 만든 Best 100명중 6위로 꼽히고 있다. Newton은 유럽의 신앙을 바꾸어 놓은 자였다고 평가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종교적, 정신적으로 암흑시대였으며 미신의 시대였다. Newton은 과학자였으므로 과학적 사고를 심어서 미신을 쫏아내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이는 또한 학문의 진보에 큰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되어진다. 반면에 이러한 사상은 신학에 대단한 악영향을 주어 신학을 혼합주의로 이끌었다고 평가된다.
② Rene Decarte(1596-1650)
Descart는 미국이 뽑은 지난 1,000년을 만든 Best 100명중 32위로 꼽히고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철학자이며 근세철학의 창건자라고 부른다. 그는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였는데 1628년 32세 때에 고국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사색과 저작생활을 위해 네델란드로 이주했다. Decart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으로 아주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이 당시는 프로테스탄트(기독교)와 로마 카토릭(천주교)의 두 종교세력이 복잡하게 갈등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30년전쟁(1618-1648)을 벌리고 있었고 전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삶과 죽음 사이를 헤메었으며, 정신적으로 갖가지 미신적 사고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합리주의(Rationalism)사상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말로 이성주의라고도 한다. 즉 이성적 사유에 의하여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그의 철학이 출발하며, 회의로 통해서 새로운 학문을 하고자 했다.
Decart의 철학방법은 자기가 옳다고 여겨오던 모든 것, 자기가 진리라고 믿어오던 모든 것을 송두리채 내버리고 아무 전제도 없는 상태 속에서 새로운 지적 작업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방법론이다.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려고 했던 자였다.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진리”를 찾기가 용이하지 않으니까 그것을 찾기 위해서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에 대해서도 의심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성경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일단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이런 철학이 기초된 당시의 학문 세계가 “의심 신학(?): 이 용어는 본 교수가 붙힌 이름임-)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현대주의사상(現代主義, modernism)은 모던이즘에 기초한 신학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을 현대신학(現代神學)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대신학은 일단 진리를 의심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③ Immanuel Kant와 이성주의(Ratimality)
Kant는 미국이 뽑은 지난 1,000년을 만든 Best 100명중 58위로 꼽히고 있다.
Kant(1724-1804)가 활동하던 18세기의 유럽에는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특히 Kant의 경우 인간이 자유의 주체라는 것을 주장했다. 즉 인간에게 이성이 있고, 이성으로 무엇이든지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주장했고, 이러한 시각으로 신을 평가하려는 생각을 가졌었다. 이성의 밝은 빛에 비추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불합리한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사상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사람들은 불합리한 생각에 사로 잡혔었는데 Kant의 생각에 이것은 기독교의 비합리적 사고의 강요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의 비합리적 사고에 강한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는 세권을 꼽을 수 있는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다. 이러한 책에서 그는 자연은 합법치성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보았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합법치성에 위배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영향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 합법치성에 위배되는 것들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Modernism의 핵심은 이성주의(Ratimality)이며 이성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Modernism이다. 이성에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과학이 아니며 거론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명제이다. 이는 상당히 훌륭한 제의같지만 신학을 세속적 수준으로 끌어내린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또는 성경이란 이성으로 100%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학문되기 위해서는 이성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그 이성의 틀 속에 성경과 하나님을 집어 넣으려다 보니까 부작용 발생되는데 여기에서부터 현대 신학이라는 것이 발생된 것이다.
치유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생각해 본다면 기적이란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으며 성경에서 기적을 배제해야 된다는 명제를 낳게 된 것이다. 이는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변형시킨 것으로써 결국에는 성경 속에 기적으로 부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같이 성경을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되도록 해석하자는 것이 바로 비신화화 또는 비신화론 (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 작업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이와 같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지는 것이다. 이 비신화화의 기본 사상이 바로 Modernism의 영향인 것이다.
현대철학은 20세기 철학사조를 말한다. 그런데 현대철학의 사조는 대개 20세기 이전의 철학사상, 즉 1850년대 전후의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현대철학은 정확하게 표현하며 1850년대 이후의 철학을 의미한다.
㉮ 비신화화(非神話化, De-mythologization)의 내용
영어의 접두어 “De”는 “제거”의 의미가 있다.
•D.M.Z.(De Military Zone: 비무장지대)
•De-bark/ 나무껍질을 벗기다.
•De-board/ (승객이)내리다. Board/타다, De-bus/버스에서 내리다.
•De-bone/ 뼈를 발라내다.
•De-color/ 탈색하다.
•De-crease/ (속도를) 감소하다. In-Crease/ 증가하다.
•De-tour/ (길이 없으므로)우회
•De-water/ 탈수하다.
비신화론이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내용 가운데 신화적 내용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 중에서 기적의 내용을 제거하면 무엇이 남는가?
㉠ 물 위를 걸은 예수 ~ 모래 위를 걸은 예수
비신화화론에서 주장하는 내용 가운데 마태복음 14장 22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물 위로 걸으신 것이 아니라, 해변가를 걸으신 것인데 멀리서 보면 물 위로 걷는 것과 비슷하여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한 어린이의 도시락을 통한 오병이어 ~ 자신의 도시락
마태복음 14장 13절에 기록된 5병 2어의 기적은 도저히 이성으로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에 이성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내용이 잘못 기술되었다는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5000명이 더 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점심 때가 되어서 단지 한 어린아이만 자신이 먹어야할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서로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을 거두어 보니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했을 때는 이성으로는 이해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 홍해를 가르고 건넌 이스라엘 백성 ~ 홍해는 갈대밭
구약 출애굽기에 기록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지팡이로 가르고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도저히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을 이성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재구성했는데 그것은 홍해, 즉 빨간 바다(Red Sea, 紅海)가 아니고, 당시에 갈대가 많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Reed Sea(갈대 밭)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빨간 바다를 갈대밭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지 영어의 표기를 바꾼 것뿐이었다. 이 내용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인데 영어로 옮겨진 단어만 바꿈으로써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이 옳다고 인정할 때 모세가 갈대밭을 가르고 지나간 후에 그 갈대밭에 애굽군다가 빠져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예수의 죽음 ~ 기절설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기사는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가? 이것은 죽은 것이 아니고, 다만 십자가에서 기절한 것인데 바위에 눕여 놓으니까, 땅에서 흙 냄새를 맡고 다시 깨어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성을 만족시켰다.
또 일각에서는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그가 예수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하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런 주장들은 예수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극히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실에 대해서 전혀 도외시하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이다.
㉤ 초자연적 내용과 귀신의 역사 제거
이러한 사상은 현대주의, 이성주의에 기초된 것이다.
따라서 병을 보는 시각도 간단하다. 이것은 단순히 바이러스와 세균에 의한 감염으로만 볼 때 신유의 영성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프면 무조건 약, 수술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낸다. Modernism에 기반을 둔 신학자는 유명한 Benjamin B Warfield라는 사람인데 그의 주장은 주후 150년에 기적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휴지주의(休止主義, Cessationision= The ending of miracle)라고 부른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150년을 기준으로해서 이 때 기적이 끝났다고 정의하는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직접 기적을 행했던 사람들이었는데 150년경에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죽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요한이 죽음으로써 기적은 끝이 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유명한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상담학자 Jay E. Adams에게서도 동일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 “Competent to Counsel” “Under the Broad Umbrella” 등에서 귀신들림은 사도 시대 이후로 발생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발생할 수도 없다고 명백히 말했다. 여기서 사도 시대하는 것은 150년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150년을 기준으로해서 이 때 기적이 끝났다고 정의하는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직접 기적을 행했던 사람들이었는데 150년경에 마지막 사도인 요한이 죽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요한이 죽음으로써 기적은 끝이 났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Benjamin Warfield는 그의 책 “Counterfeit Miracles「가짜 기적」이라는 책에서 기적은 사도들이 죽음과 동시에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나침반사에서 「기독교 기적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 12페이지에 “기적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분명히 사도들의 교회에 한정시켰으며 당연히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 사람을 일컬어 소위 세계 3대 칼빈주의자(Abrsham Kyuper, Herman Bavinc, Benjamin Warfield)라고 부른다. Calvin도 역시 휴지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칼빈주의자 또는 장로교 목사들에게 기적은 끝났는가? 라고 물어보면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당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흔드는 것으로써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이성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목사는 절대로 신유의 영성을 가질 수도 없지만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은 초자연적 하나님이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의사로서 목사가 된 장로교회의 유명한 설교학자 David Martin Lloyid Johns는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비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했다. 그는 성령의 역사나 영적 은사가 사도시대로 끝났다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귀신의 활동, 즉 악령의 역사에 따른 현상도 사도 시대로 끝났다고 하는 성경적 증거는 전혀 없다고 했다. Lloyd-Jones, Healing and Medicine, 52.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은 초자연적 하나님이고,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내용들과 치유의 영성을 적용시켜 본다면 귀신들림을 무조건 정신질환으로 보려는 견해와 정신질환을 무조건 귀신들림으로 보려는 견해의 상충이 발생된다.
지금까지 인간의 종교성은 본질적으로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경험적인 현상을 설명하거나 해석하려는 노력은 전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믿어왔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가 신학 속에 들어와서 현대신학을 낳았는데 그것은 모든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입증시켜야만 학문으로써 정립될 수 있다는 명제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진술하면 종교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성서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방언을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보다 종교적 카타르시스(chatarsis)에서 헛소리라고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이려는 사고, 그리고 입증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성적으로 이해시켜 보자는 주장은 신학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이 내용들과 치유의 영성을 적용시켜 본다면 귀신들림을 무조건 정신 질환으로 보려는 견해와 정신 질환을 무조건 귀신들림으로 보려는 견해의 상충이 발생된다. 이런 현대신학은 모든 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입증시켜야만 학문으로써 정립될 수 있다는 명제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간단하게 진술하면 종교적 행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성서 신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방언을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보다 종교적 카타르시스에서 헛소리라고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이려는 사고, 그리고 입증되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성적으로 이해시켜 보자는 주장은 신학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이런 이성주의의 대표자는 바로 Immanuel Kant이다. 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유물론적인 사고를 정립시켰다. 이러한 영향들은 Karl Barth Karl Bathr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프리츠 Barth는 신약학을 전공학 대학교수였다. 그는 Immanuel Kant와 쓜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 영향을 받아 1906년 베를린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Karl Barth도 역시 Kant의 영향을 받아 현대신학을 수립하게 된 것이다.
, Ludolf Bultman Bultman은 Karl Barth와 더불의 19세기 신학을 이끈 선구자적인 학자들이었다. 그는 성서에 있는 비과학적, 비이성적,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자는 비신화론을 주장한 자이다.
, Bonhoefer 등을 통해서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철학자 Bertrand Russell은 “종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알 수 없는 ‘하늘에 계신 큰 조상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비합리적인 소망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Russell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종교는 쇠잔하여지고 더 이상 중요성을 갖지 않게 될 것이라고 확신에 찬 예언을 하였다.
종합해 볼 때에 이성주의는 현대 신학을 낳게 했고, 현대 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하기에 이르러서 치유의 영성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불합리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2. 포스트 모던이즘(Post Modernism)
“포스트 모던이즘”이라는 용어는 1934년 스페인의 비평가 「페테리코 데 오니스」가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시 선집”이라는 것을 편집하면서 이 책의 서문에서 “포스트 모더르니시모”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더들리 피」라는 사람이 1942년 그가 편집한 “현대 라틴 아메리카 시 선집”에서 “포스트 모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1946년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서구의 역사를 암흑기, 중세기, 현대기, 후기 현대기로 구분하면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어빙 하우’라는 사람가 “대중사회와 포스트 모던 건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Modernism의 반작용으로 Post-Modernism이 탄생되었는데 이것은 현대 기독교의 자유주의운동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것은 뉴 에이지운동(신세대 운동: New Age Movement)과 종교다원주의의 기틀을 놓았으며 이 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결정적인 악 영향을 미치고 있다.
① 연합적 사고와 에큐메니칼 운동 (Ecumenical Movement)
먼저 Post-Modernism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연합적 사고를 갖도록 한 것이다.
Post-Modernism은 Modernism의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Modernism이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반면에 Post-Modernism은 연합적이고 종합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상이다. 즉 일치, 연합, 통합, 혼합, 결합, 팀, 지구촌화(Together, Team work, Grobalization) 등의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신학과 연합되어서 연합 사고를 만들어 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이 연합적 사고의 대표적인 운동은 바로 에큐메니칼(Oicumene)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순수한 의미로서 에큐메니칼(교파 연합)을 넘어서서 종교 연합적인 사고를 갖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에큐메니칼의 영성은 “일치를 위한 영성”이다. 에큐메니칼의 일치의 영성은 ㉮ 교회의 일치 ㉯ 세계의 일치 ㉰ 피조물의 일치
② 혼합주의(Syncretism)
접두어 “Syn”의 뜻은 “함께” 라는 말이다.
•Synchronized Swimming/동시에 발생하다.(수중 발레)
•Synergism/신입협동설(神人協動說)
•Synmetal/합성 금속
•Synthesize/음의 합성 ~er/음 합성 기계
이 일치의 운동은 이것 저것을 일치시키다 보니까, 혼합주의 사고를 만들어 냈다. 혼합주의라는 것은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를 세상적인 사상과 결합시켜서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어떤 학문의 통합(Integration)이라는 것을 주장하다보면 서로의 본질에 피해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혼합주의는 신학에 상당한 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Post-Modernism은 부분적인 것에서 종합적인 것으로 연결(Connection)하고자 하는 사고가 신학과 주변 학문들간에 제휴를 촉구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회학도 좋고, 윤리학도 좋고, 교육학도, 심리학도, 정치학도 모두 모여서 함께 신학과 조화를 이루어 보자는 사상으로 발전된 것이다. 결국 이같은 사상은 신학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기반사상을 낳게 하였고 심리학 및 교육학 등 주변 학문들이 신학의 자리에 올라와 새로운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배경의 Modernism과 Post-Modernism, 양자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인해서 심리학을 포함한 교육학 등 주변 학문들이 신학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학문들을 배격하고 본래적으로 순수해져야 한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심리학 등의 실천신학 과목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③ 종교 다원주의
Post-Modernism은 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사상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개념은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가 절대적이고 유일하며 결정적인 종교가 아니며, 보편적인 종교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고 모두 다 좋다는 것이다.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므로 서로 통합해서 하나가 되고,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이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정하지만 다른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가 종교학과 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기만하다.
예) 1996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23면에 이화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던 서광선 교수의 정년퇴임을 맞아 기사가 실렸는데 그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하면 “한국교회는 신앙과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하면서 “우리 교회는 다른 종교에도 나름대로 진리와 구원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치 않고 있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약화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이다. 과거 기독교 자유주의 사상은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는 주장은 있었으나 이것은 기독교를 뿌리채 흔드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기도하지 않게 될 것이고, 기독교의 진리를 외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기도가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갈 것이다.
* 종교 다원주의를 이끄는 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est Troeltsch, 1865-1923)
트릴취는 독일 본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베를린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던 기독교 사상가이다. 그는 “모든 역사적 종교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역사적 종교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그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종교적 영성에 있어서 우월하다고 하나,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
토인비는 역사학자로서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공통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즉 본질은 같으나 표현방식이 다르고, 이론이 약간씩 다르다고 했으며 결국 추구하는 것은 하나라고 했다. 그래서 “종교보편주의(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이런 생각들이 결국 1961년에 인도 뉴델리에서 열렸던 제3차 WCC 총회에서 인도의 신학자 “더바난단”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공식적으로 1970년 인도의 신학자 “사마르타,” “파니카,” “토마스” 등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고 주장되었다.
․변선환, 홍정수
우리나라에서 선구자격인 사람은 감리교신학대학 조직신학 교수로 일하다 죽은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였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의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한 학자이다. 기독교, 유교, 불교, 천도교, 통일교 등 모든 종교에도 나름대로 구원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영성을 약화시켰다. 변선환 교수는 이런 쓸데없는 것을 주장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변선환이 이것을 주장하여 이 문제로 감리교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감리교 총회에서 변선환과 홍정수를 교수직과 목사직에서 파직할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의 목회, 상담, 교육의 대상자들인 현대인들이 바로 이러한 사상을 학교에서 주입받고 매스커뮤니케이션, 즉 텔레비존과 라디오, 신문, 잡지를 통해서 매일 이러한 사실을 주입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물들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목사들도 예외 없이 이러한 사상에 젖어 있어서 이러한 시각으로 성경을 보고 신학을 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신학적 변질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1992년 6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아복음주의 신학회”와 “세계복음주의 협의회” 등 이 두 모임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이슈로 신학대회를 가졌는데 공통적으로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게 정당하고 동등하게 진리라는 다원주의의 주장에 대해서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한다.
㉠ 다원주의는 신관이 추상적이어서 영적 능력이 결여되고 성경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 다원론자들은 특수한 신관을 제시하였는데 이 특수 신관은 힌두교 사상이다. 다원론은 예수에 대한 신약과 신앙고백의 진리들을 단순한 신화로 해석하여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
㉢ 다원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를 우상으로 말한다.
㉣ 일부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 하나님의 중심성을 부정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 모호하고 추상적인 궁극적 실재의 모든 종교의 핵심과 규범으로 놓고 인간 자신을 모든 의와 가치의 결정적인 중심으로 만든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자아중심이고 근본적으로 힌두교나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과 같은 다원론적 종교와 비슷하다.
㉤ 다원주의는 기존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 무례하며 공격적이어서 교리적 배타주의가 될 수 있다.
㉥ 다원주의는 목회적으로 혹은 전도적으로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데 또한 모든 인종과 민족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The Declaration of Manila: The Unique Christi in a Pluralist World (Unpublishes Paper, 1992), 1.
④ 해체주의
연합 사상과는 모순되는 내용이면서도 Post-Modernism에서 나타나는 사상은 해체주의이다. 해체라는 것은 파괴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전통적인 규범과 전통적 가치에 반항하고,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으로부터 탈피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비신화화인데 이것은 기독교에 치명적인 강타를 가했었다. 이것이 신학 속으로 들어와서 성경과 교리적 전통, 절대적 진리를 깨뜨리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화화 현상이다.
㉯ 비신화화의 영향
성경해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유발되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적을 제외시키려고 하면서 이성으로 성경을 칼질했다.
예)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누구인가? 우리나라 3대 대통령도 생각이 안나는데, 남의 나라 대통령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겠는가? 그런데 3대 대통령은 Tomas Jefferson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미국 사람들이 지난 1,000년동안 가장 위대한 사람 Best 100명을 뽑는 중에 10위를 차지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Tomas Jefferson Bible”이라는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성경에는 영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등이 대조되어 있다. 또 거기에는 기적에 대해서는 다 빼버리고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내용만을 기록해 놓았다.
Jefferson 대통령도 Bill Clinton대통령만큼 스캔들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대한 병적인 애정과 집착이 있었다. 그래서 성장한 후에도 정상적이지 못한 여성관계로 발전했는데 제퍼슨은 미망인이나, 유부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친구 부인을 유혹했고, 그가 결혼한 마더 스켈턴(Mother Skelton)이라는 여성도 미망인이었으며, 이름도 Mother이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런 사람이 무슨 성경을 만들 수가 있겠는가?
㉰ 과학과 신학,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비신화화가 극복되지 않으면 영성의 개념을 이해할 수없다. 따라서 영성과 비신화화는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 휴지주의(Cessationism)
이런 영향으로 신학 내에서 귀신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를 꺼려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 19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세례교육을 할 때 반드시 선언해야 하는 두 가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1) 당신은 귀신을 쫓아내겠습니까? (2) 당신은 앞으로 귀신을 거부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예라고 답변해야 세례를 베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주의에 밀려 슬며시 교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성경이 인정한 내용을 우리가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성경을 믿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할찌라도 실제 목회의 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실천신학, 또는 목회상담학적인 입장에서 대처해야 한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목회 현장에서 많은 차이, 또는 괴리현상을 가져오기 때문에 신학교 커리큐럼과 교육 내용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들이 적지 않다. 최근(1997년 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에서는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친 자들에 대해서 다시 총회차원에서 1년간 목회신학을 재교육시켜 이 과정을 이수했을 때 목사로 안수하겠다고 결의하고 시행하기에 이를렀다. 이것은 신학교육의 이론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며, 신학교육의 비실제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실제로 교회내에서는 방언이 나타나고, 치유가 나타나고 있는데 “방언은 없다.” “기적은 없다.”고 하니까 교인들을 미친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자이다.
● 신경증과 정신증(정신분열증) 그리고 귀신들림의 차이와 구별
신경증과 정신증(정신분열증)의 증상들 사이에 엄격하고 명확한 구별이 없다. 불안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정신의학적 증상, 즉 신경증이나 정신증에는 불안이 공통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에 구별되지 않는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상담학자 Achibald D. Hart는 “귀신들림과 그것의 가장 통속적인 모조품(An Imitator)은 바로 정신분열증이라.”고 했다. Hart, Gulbranson, Smith, Mastering Pastoral Counseling, 62.
즉 귀신들림과 정신분열증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윌리스(Willis)라는 사람은 나름대로 신경증과 정신증의 구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신경증
1) 신경증은 현실성이 있다.
신경증자는 현실성이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서 이성과 판단이 명확하다.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서 신경증자를 가려내기도 용이하지 않다.
2) 신경증은 만성적인 경향이 있다.
신경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때로는 1년이상 앓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신경증을 앓다가도 문제가 해결되면 하루 아침에 증상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사건을 통해서 미움과 분노가 생기고 2-3년 동안 불안 신경증에 시달린 사람이 용서라는 것을 배우고 실제로 용서를 했을 경우에 오랫동안 겪었던 불안 신경증은 다음날 없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3) 신경증은 성격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윌리스가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 외의 다음과 같은 특징이 비교된다.
4) 신경증은 환상, 환청, 환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증상은 전형적인 정신분열증의 증상이다. 신경증에서는 이런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경증과 정신증은 그 뿌리가 달라서 신경증을 오래 앓았다고 해서 정신분열증으로 전이되지 않는다는 신경정신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5) 신경증은 주변 사람들이 볼 때에는 비교적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는데 본인 스스로는 “나는 정신병이 아닐까?, 정신병원에 한 번 가볼까?” 라고 자신의 기분을 의심한다. 이것은 자신의 신경계통, 기분 등에 이상이 온 것을 자신이 스스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성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경증은 “기분 장애”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2. 정신증(정신분열증)
앞에서도 정신증의 증상에 대해서 연구해 보았지만 요약적으로 다른 질병, 신경증이나 귀신들림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 증상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신증은 현실성과 객관성이 없다.(환각, 환상, 환청, 사고 장애)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는 등 매우 현실성이 낮은 발언을 하게 된다. “지금 UFO 신께서 내게 계시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전혀 거리낌이 없이 하게 된다. 정신분열증이 발생하기 전에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의 경우, 환청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등의 종교적인 증상과 결합된 정신적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몹시 당황하고 혼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심리학자 Milard Sall은 1976년에 정신증과 귀신들린 것을 구별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정신증자는 객관적 현실을 상실하고 있으나 귀신들린자는 객관적 현실을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귀신이라는 자체가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신증은 자아의식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상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가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는 “나는 정상인데 내가 왜 정신병원에 가느냐?” 자신을 극히 정상으로 본다.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거에 남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자신은 정부와 놀아난 아내가 신문에 보도된 바가 있었다. 남편은 “나는 정상인데, 왜 정신병원에 집어넣느냐”고 하소연을 했지만 바로 그 말 때문에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던 것이다.
3) 뚜렷한 사회적 고립 및 거부를 나타낸다.
구석에 쳐 박혀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경증에서 우울증상과도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한 가지 증상만을 가지고 신경증이다, 정신증이다는 것을 구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4) 현저하게 무능하다.
5) 뚜렷하게 유별난 행동을 한다.
갑자기 쓰레기를 모은다거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행동을 하거나, 베개 끌어안고 자신의 아기라고 하는 등 유별난 행동을 한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전우택 교수는 『그 동안 정신과 의사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상인과 다른 이상한 언행을 하는 사람의 90%이상은 정신질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6) 논리성이 극히 떨어진다.
정신증 증상 가운데는 중요한 특징은 논리성이 극히 떨어지기 때문에 어떤 말에 대해서 횡설수설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아마도 신자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다고 하면 대부분 귀신들렸다고 할 것이다.
3. 귀신들림
귀신들림과 정신증은 단정적으로 구별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 분별에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귀신들림과 정신증에 대해서 일반 심리학자들은 그 누구도 명확한 구별을 해 놓은 일이 없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전우택 교수는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은 영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라고 할지라도 이를 구분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했다. 의학 전문의가 귀신들린 상태를 구별할 수 있다면 그는 전공을 신학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에 대해서 통계적으로 또는 귀신들림의 징후들이 몇 가지 있는데 학문적 평가나 검증을 받은 아니나 보편적인 견해이므로 참조할 만하다.
1) 귀신들린 자는 힘이 세다.
뛰어 다닌다든지, 평소에 들 수 없었던 무거운 것을 든다든지 강력한 힘이 발생된다. 그러나 정신증 환자들은 초자연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5장의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의 예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정신과 환자에게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일이다.
2) 귀신들린 자는 초자연적인 지식이 있다.
즉, 투시하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귀신이라는 영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잘못된 영의 활동이지만 이와 같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은 논리에 어긋나는 망상이 발동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발견되지 않는다.
3) 귀신들린 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없으며, 기독교 상징에 대해서 뚜렷한 혐오감을 갖는다. 이를테면 십자가, 성경책, 찬송 등은 이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든다. 마르틴 로이드 죤즈에 의하면 그가 귀신들린 자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이라고 외치자 이 말은 들은 귀신들린 자는 매우 사납게 반응했다고 진술했다. Lloyd-Jones, Healing and Medicine, 175.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서는 이런 증상은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4) 귀신들린 자는 주로 벗고 돌아다닌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옷을 벗고 돌아다니는 현상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이지 않다. 이것도 역시 마가복음 5장에 언급된 거라사 귀신의 현상과 동일한 증세이다.
5) 귀신들린 자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유지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라고 부른다. 한 사람 안에 두 가지의 “나(인격)”가 있다는 것이다.
6) 귀신들린 자는 인간적인 온정이 충격적으로 부족하고 메마르며, 기괴하며, 포악한 행동을 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다소 이상한 행동이 보이지만 포악한 행동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때로 정신분열증 환자는 자폐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다.
7) 귀신들린 자는 몹씨 악취가 난다.
그러나 정신증 환자들은 악취가 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다. 정신질환자들은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에 씻지 않고 양치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귀신들린 사람의 냄새라는 것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다.
8) 귀신들린 자의 증세들을 진정시키는데 약물요법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귀신들린 경우에는 기도와 금식(막 9:29) 및 예수 이름의 권세로 물리쳐야 한다(행 16:18). 그러나 구별이 잘 안될 때에는 치료에 있어서도 믿음의 행위와 의학적인 치료를 병행함이 옳다고 본다. 귀신들림이나 정신질환을 겪는 대다수의 환자가 의지적인 면에서의 허약함을 드러내거나 숨겨 둔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치료에 있어서도 환자 자신의 자유 의지를 부추겨주는 사랑과 격려의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즉 스스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또 누릴 줄 아는 단계까지 이끌어 주는 관심과 돌봄이 있어야만 전인적인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보겠다.
4. 축사(사귀 축출, Exorcism)
우리나라 대학의 신학과, 신학대학 또는 신학대학원에서 축사(귀신 축출)에 대한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하는 학교는 단 한 학교도 있지 않다. 이것은 실천신학에서 다루어야 할 분야인 것은 분명하지만 누구도 이것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다루지 않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이 귀신에 대해서 다루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귀신을 연구한다는 것이 성령을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성령을 연구해도 부족한데 귀신을 연구하면서 시간을 뺏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 연구의 결과들이 다소간에 이미 귀신론을 연구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된 집단의 이론들과 유사한 것이 있을 때 오해를 받게 되는 부담이 있다.
3) 귀신을 연구했다고 해서 실제적으로 축사의 현상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해서 무능력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과 부담을 안게 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축사라는 것은 사귀를 축출한다는 말인데, 영어로 Exorcism이라고 한다. 여기서 접두어 “Ex”는 헬라어 접두사 “εξ”에서 온 말이다. 이 뜻은 “밖으로 몰아낸다”는 의미이다.
•Exit/밖으로 나가는 출구
•Exclude/(밖으로) 추방하다. 몰아내다. Include/포함시키다.
•Exclaim/(밖으로) 소리를 지르다.
•Exhibition/(밖으로) 공개하는 것, 전시
•Exodus/(밖으로) 나가다. 출애굽기
•Expand/(밖으로) 확대하다. 넓히다.
즉 내적 치유를 위한 기도를 통해서 귀신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귀신이 나가는 현상, 축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귀신들린 상태는 비록 그것이 매우 심한 정도로 귀신의 횡포를 당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면 빨리 치료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도 분명한 것은 귀신을 환영할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귀신이 들어 온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죄(罪)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회개와 사죄의 확신을 통해서 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귀신들리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 이런 것들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약물 치료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약물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약물로서 귀신의 역사를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적인 일을 육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극히 상식에서 어긋난 일이다.
내적 치유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귀신은 쥐와 같다고 한다. 더러운 것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오고, 깨끗하면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죄는 바로 이와 같은 쓰레기와 같이 더러운 것이며, 냄새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더러운 것과 더불어 귀신이 기생하게 된다. 쥐가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데 쓰레기는 가만히 두고, 쥐만 내 쫓으려고 하니까 안나가겠다고 하다가 “찍 찍” 소리를 내고 나가는 것이다. 쓰레기를 치우면 조용히 나가 버린다. 그와 마찬가지고 마음의 죄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은 소리지르면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간 귀신은 때가 되면 또 들어와서 그 쓰레기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놀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 쓰레기를 치우면 귀신은 조용히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나가 버리는 것이다.
•회개와 고백이 귀신 축출이다.
미국 보건성의 통계에 의하면 사람이 정서적 불안을 느낄 때 42%가 목사나 신부를 찾아가고, 18%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고 밝혔다. 그 때 목사와 신부를 만난 사람의 만족도는 65%였으며, 의사를 만난 사람의 만족도는 45%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발전이 환자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영적 차원을 관찰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인식한 것이며, 종교의 중요성을 설파한 폴 투르니어의 주장과 비슷하다.
•절약의 법칙
이런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절약의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정신적인 질환 증세가 나타났을 때 무조건 귀신들렸다고 하지 말고, 어떤 문제를 진단할 때 가장 분명하고도 자연스러운 설명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어떤 교인이 “머리가 아프다”고 상담을 해 왔을 때 무조건 “뇌종양”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가장 분명하고 자연스럽고 쉬운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최근에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쉬면 곧 회복될 것을 알려주지만 휴식을 통해서도 그 문제가 치유되지 않을 때는 독감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계속되는 통증이 있을 때는 뇌종양이 있는지를 검진하기 위해서 신경과 전문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뇌종양이 아니라면 머리가 아플 때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교인들이 가지고 오는 정신 문제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전우택 교수는 “정신적인 질환을 앓는 사람이건, 귀신들린 사람이건 그들을 돕는 방법은 그 사람을 보호하고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목회자는 교인들 가운데 귀신에 들렸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깊은 관심과 기도를 해 주어야 할 것이며, 질병 가운데 있는 환자에게 진심으로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죄의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며, 진정한 믿음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고, 정신적인 질병으로부터도 벗어 날 수 있는 것을 심어 주어야 한다. 모든 질병을 가진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므로 목회자는 항상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자에게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이제 미국에서 심리학 또는 정신의학은 매우 견고한 학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학문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인 Robert Felix, William Menninger, Francis Braceland, 그리고 Jack Ewalt는 그들의 글을 통해서 미국 연방정부가 정신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입법 의안의 기초를 제공했다.
이 입법 의안은 1946년 법으로 제정되어 이에 따라 미국의 국립정신보건원(NIMH: 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가 발족되었다. 이 국립정신보건원은 정신의학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하며 정신의학 훈련을 위한 장학금을 제공하고 정신장애의 예방과 진단과 치료를 위한 기금을 각 주에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법의 제정으로 의학계에서는 처음으로 정신의학이 연방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정신의학에 관한 훈련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이것은 계속되고 있다.
이 미국국립정신보건원은 이렇게 기반을 구축한 후에 또 인구 10만명에 하나씩 전 미국에 2,000개의 지방정신보건소(CMHC: Community Mental Health Center)를 세우는 안을 내고 미국 의회는 1963년에 이를 위해서 1억 5,000만 달러를 승인했다. 2년 후에는 또 직원들을 위한 인건비 등으로 7억3,500만 달러를 추가 승인했다. 이렇게 해서 정신보건소들은 합법적으로 환자들에게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약을 먹일 수 있는 기관이 되었다. 1980년대말까지의 통계를 보면 지방정신보건소를 찾아 온 환자의 55%가 강력한 향정신성의약품(신경안정제 또는 환각제 등)을 처방받았다. 이로서 정신과 의사들과 심리학자들은 이 정신보건소들을 통해 일반 병원에서 보다 10배가 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향정신성 의약품을 투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60년에서 1970년말까지 국립정신보건원의 재정지원을 받은 지방정신보건소들이 생기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이 기관을 통해서 정신의학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연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