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6) - 연행의 중절(中節), 고난과 성찰의 공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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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기록으로 만나는 옛길, 使行路程(6)

연행의 중절(中節), 고난과 성찰의 공간에 서다.

신춘호

중국지역 연행노정의 구간을 크게 삼절로 구분하게 되는데 이번 호에서 살펴볼 구간은 중절(中節)구간입니다. 경유지는 심양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이 구간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행역(行役:사행)의 고통이 극심했던 공간, 둘째는 성찰의 공간, 셋째는 명·청 격전지에서 느끼는 애증의 공간입니다.
중절 구간은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의 주요 격전지어서 이 구간을 지나는 조선 사신들에게는 임진왜란은 물론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형성된 명과 청에 대한 애증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심양~산해관 일대는 명·청간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던 곳이었습니다. 명·청 전투에 참전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 대한 사연과 명조의 붕괴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이 구간을 통과하던 사신들은 심리전(心理戰)을 치르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에게 새로운 경관이 주는 의미는 남다른 감동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공간으로 남기도 합니다. 조선의 문사들이 빠지지 않고 찾았던 의무려산(醫巫呂山)은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행을 힘들게 한 것은 행역삼고(行役三苦), 즉 노정의 세 가지 괴로움(새벽의 안개, 낮의 먼지, 저녁 바람)이었습니다. 조·청 외교를 담당했던 사신들이 겪어야 했던 그 지난했던 전장의 기억과 여정의 고단한 흔적들은 따라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가 보겠습니다.

[그림 ] 연행의 초·중·종절(여지도-의주북경사행로서울대 규장각 소장)

노정의 괴로움, 그리고 생경한 문화체험

연행노정의 중절은 심양성을 벗어나 서북방향 산해관으로 이어집니다. 주요 경유지는 탑만촌~영안석교(永安石橋)~요하(遼河,주류하,거류하)~신민~이도정~반랍문~소흑산~광녕성(북진묘,의무려산)~여양~십삼산~대릉하~금주~소릉하~송산~행산~탑산~영녕사(다붕암)~영원성~동관역~중후소~맹강녀묘~위원대~산해관에 이르는 노정입니다. 박지원의『열하일기』를 참고하면, 성경잡지(盛京雜誌 : 심양에서 광녕), 일신수필(馹汛隨筆 : 광녕에서 산해관)에 해당하는데요, 음력 7월 10일~음력 7월 23일까지 약 14일가량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행의 경우는 보통 열하루(11일)가량 소요되었던 거리입니다. 심양과 산해관 사이의 중절구간은 동팔참의 고국의 산천과 같은 경관은 찾아볼 수 없는 허허벌판, 즉 요동·요서벌판의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연행노정에서 가장 지루하고 힘든 구간으로 묘사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역시 연행노정 현장 답사를 하다보면 가장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답사 일정을 잘 세우지 못하면 숙소가 마땅치 않아 밤늦게까지 차량을 움직여야만 대도시의 숙소에 도착하는 경우도 생기는 곳입니다. 그러나 발길 닿는 곳마다 조선의 관료, 선비, 말몰이꾼에 이르기까지 연 1~3차례의 사행과 수백 두의 우마(牛馬), 수 백 명의 행적이 스며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면, 결코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되는 소중한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사행단이 심양성 서소문을 나가 실승사를 거쳐 탑만촌을 지나면 3개의 홍예가 아름다운 석교가 나옵니다. 대석교(大石橋)라고도 불리는 영안석교(永安石橋)입니다. 영안석교는 청태종 황태극의 재위시인 1641년 건설한 석교로 길이37m, 너비14.5m, 아치형교각이 3개가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교량입니다. 그 아래로 포하(浦河)가 흐르는데 지금도 옛 정취가 잘 남아있습니다. 영안석교의 완공식 축하행사에 청 황제를 따라 소현세자가 참여했다는 기록이 『沈陽日記』에 전합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박제가 역시 영안석교를 중건할 때 이곳을 지나갑니다. 박제가는 한양의 나무다리를 빗대어 영안석교의 정교하고 튼튼함에 대해 평하기도 합니다.

[그림2] 영안석교

영안교 일대는 비만 내리면 길이 진창이어서 오가는 이들이 매우 곤욕을 치르는 구간이기도 했습니다. 명청 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인지라 효율적인 물자이동과 군사적 목적에 의해서라도 길의 수리는 필요했을 겁니다. 다리가 완공되자 청태종은 ‘영안’(永安:영원히 평안하라)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다리 건립의 사정을 기록한 비를 조성합니다. 영안교 초입에 한자와 만주어로 ‘관온인성황제칙건영안교’(寬溫仁聖皇帝勅建永安碑)라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영안교는 길의 수리를 통해 오가는 이들의 편리를 도모했을지언정 조선 사신들에게는 불편함이 묻어나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이의현은 “오랑캐의 운세가 어찌 영원 하리오, 무지개다리(홍예)에 ‘안’자를 걸지 말지어다”기라고 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병자호란으로 인한 오랑캐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영안교를 건너 노변성, 고가자를 지나면 요하(遼河)입니다. 요하는 ‘거류하, 주류하, 구류하, 구려하’로도 부릅니다.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지리적 공간이자 고구려 강역의 경계로 삼았던 곳입니다. 사행들은 거류하를 건너 거류하 보성에서 숙박했습니다. 필자를 비롯한 연행노정 연구팀이 수차례 거류하성의 토성 흔적과 도강처의 위치를 찾아 현지조사를 한 바 있습니다만, 사행들이 건너던 현장을 찾을 길은 요원하고 물길도 수차례 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지도와 현지주민들의 구술, 지리적 형세를 파악하다 보면, 거류하성으로 향하던 사행동선을 대략이나마 추정은 가능했습니다.

[그림3] 노변성에서 고가자로 향하는 옛길

[그림3] 요하(거류하)

[그림5] 요하 제방에 선 연행노정 답사팀

사행 여정에서 ‘행역삼고’를 얘기한 바 있습니다. 사행들은 이국땅의 풍토에 적응하느라 고생이 말이 아닌 경우가 많았는데, 요하 일대에서 마주치는 모래바람은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행역삼고 중에 ‘낮엔 먼지와 바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하 일대는 북방 몽고 지역에서 불어오는 잦은 황사로 사신들의 발목을 잡기로 유명했습니다. 연행록에는 ‘요하 일대에서 모래 폭풍을 만나 일주일 가까이 움직이지를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당시엔 모래가 입안에 씹힐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자연과 지리적 환경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한족, 만주족들은 그들이 사는 집도 환경에 맞게 개조하였습니다. 사행이 요서지역을 지날 때 매우 독특한 형태의 가옥을 만납니다. 이는 조선의 가옥처럼 대들보가 있다거나 지붕이 팔작이나 맞배지붕의 형태가 아닌, 너른 마당과 같이 일자로 펼쳐진 듯한 지붕의 가옥들을 본 것입니다. 이를 무량옥(無梁屋), 일자옥(一字屋)이라고 합니다. 생경한 문화를 접하는 사신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북쪽의 몽고 사막에서 불어 닥치는 모래먼지며 바람이 지붕에 걸리지 않고 통과하도록 만든 것으로, 이러한 가옥들은 요하를 지나 백기보, 소흑산 일대부터 산해관내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림6] 백기보의 황량한 옛길

[그림7] 무량옥(일자옥)의 모습

연경으로 향하는 길은 만만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도정-반랍문-소흑산 구간은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을 이루었던 곳입니다. 여름철이면 장맛비에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이 넘쳐 사행단 행렬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청 황제가 심양을 오갈 때 흑산에 우물을 파고, 이도정에 두 번째 우물을 판 연유로 ‘이도정’이라는 지명을 얻었다고 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지대가 낮아 비가 내리기만하면 강물을 이루고, 겨울지나 땅이 녹으면 역시 진창을 이루던 곳이어서 무릎까지 빠지거나 말의 배까지 찰 정도였다고 하여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사행원이었던 심상규란 이는 ’소흑산에서 요양에 이르는 7일의 일정이 마치 1년처럼 길게 느껴지고, 귀신의 나라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였다‘고 했습니다. 필자는 우기(雨期)에 이도정 일대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미 도로가 정비되고 시간이 지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간간이 유사한 장면을 보게 되면 과거 선조들의 고단한 사행길이 눈에 선하여 숙연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림8] 이도정의 진창길을 지나는 마부

[그림9] 연행로(우측) 변의 침수된 마을

1790년 건륭 80세 생일 축하하기 위해 열하로 향하던 유득공이 요동벌판에서 가장 수렁진 일판문과 이도정 구간을 지날 때는 가을장마가 막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그의 『난양록』(열하기행시주라고도 함)에 따르면, 심양서원을 출발하여 7월 1일에 도착한 주류하(周流河)는 장마로 인해 물이 불어난 상태였고 더욱이 야밤이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느라 고생한 정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길을 도와 길을 떠나고자 했지만, 수역 홍명복이 극구 만류합니다. 물이 넘친 밤길을 운행하다간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역참 문을 나서 바라보니, “하늘과 물이 서로 비치어 그것이 몇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으니 가히 상상이 가는 장면입니다. 당시에 유득공은 물이 새는 쪽배를 타고 신점까지 이동해서 내렸는데, 40리길을 물위에 줄지어 서 있는 느릅나무, 버드나무를 이정표삼아 가을바람 맞으며 이동해야 했습니다. 이를 ‘수로조천’(水路朝天)에 빗대어 시를 한 수 남기기도 했습니다.

초가을 작은 배를 요서에 띄우는데
뜻밖에 서늘한 기운 버들 둑에서 이는 구나.
수로조천水路朝天 길 동쪽 굽이에 있는데
다만 여인들의 슬픈 노랫소리 없구나.
(유득공, 열하기행시주, 신점 부분)

유득공 일행은 7월 3일에 이도정(二道亭)이라는 곳에서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여정을 풀고 신점(新店)을 거쳐 세하(細河)로 향하였습니다. 세하 역시 물이 분 상태였는데 배가 없어 큰 궤짝에 가마와 말을 실었고 서장관(書狀官)과 유득공은 곡(斛)을 빌려 헤엄을 잘 치는 촌민(村民) 4~5인이 잡아끌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강 건너의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일화를 적고 있습니다.

[그림10] 사행의 숙소참이 있었던 흑산 시가지

흑산은 광녕성에 도착하기 전의 작은 도시입니다. 요양과 규모가 비슷한 느낌의 도시입니다. 연암 박지원도 이곳에서 쉬어갔는데요, 대부분의 사행은 이곳에서 힘든 여정을 쉬어갔습니다. 흑산에서는 사행단의 이벤트가 열렸던 곳입니다. 사행단을 위로하는 작은 잔치를 벌였던 것인데요, 돼지를 잡아 사행에 참여한 아랫사람들과 나눠 먹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단체회식’쯤 될까요?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험준한 산과 하천, 끝없는 요동~요서의 황톳길을 짐수레 끌고 오기까지 고단한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더 멀 테지요. 이러한 ‘돼지회식’ 기회들 통하여 말몰이꾼을 비롯한 하예(下隸:부리는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아 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각과 성찰의 공간, 의무려산(醫巫閭山)

흑산~호가진~월봉을 지나 요서벌판의 끝자락에 길게 펼쳐진 의무려산 연봉들을 바라보며 행군하다보면 이내 광녕성으로 진입합니다. 지금의 북진시입니다. 광녕성은 명대 동북방면의 주요 군사기지로 ‘유주중진’으로 불리는데, 명말 이성량 장군이 동북 지역을 장악했던 주둔처로 성안에 이성량의 패루가 웅장하여 연행사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이성량 장군의 아들 이여송은 임진왜란당시 명 지원군사령관으로 조선을 도왔던 인물이니 조선 사행에게는 이곳이 각별했을 것입니다. 이성량의 선조가 조선인이었다는 점도 조선 사신들에게는 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11] 광녕성과 의무려산 전경

[그림12] 북진시 광녕성 이성량 패루의 위용

연행노정의 중절구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은 광녕성 서쪽에 있는 북진묘(北鎭廟)와 의무려산(醫巫閭山)입니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을 모신 곳입니다. 김창업과 홍대용도 동쪽 협문을 이용하여 북진묘에 들어가 유람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의무려산은 북진묘에서 약 5km가량 더 서북방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곳은 모두 사행들의 유람처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1617년 이정구는 <의무려산기>를 남겼고, 이로부터 100여년후인 1713년 김창업은 관음각에서 묵었고, 1725년 조문명이 다시 찾았습니다.

[그림13] 의무려산(건륭어필)

[그림14] 의무려산 망해정과 홍대용이 들렀던 관음각

[그림15] 홍대용의 『의산문답』

그러나 의무려산과 각별한 이는 아무래도 담헌 홍대용(1731∼1783)일 것입니다. 1776년, 숙부 홍억(서장관)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에 참여한 홍대용은 의무려산을 유람하고 각별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실옹’과 ‘허자’가 의무려산에서 세상사와 학문에 관한 문답을 벌이는 내용을 글로 지었는데, 바로『의산문답』입니다. 이 글은 18세기 조선이 이룩한 동아시아 지성사의 금자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홍대용은 이 글을 통해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해체하는 자각(自覺)에 이르렀고, 이후 그의 철학적 사상이 정립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듯 조선 지식인들에게 연행은 세계인식의 장이자 자아 성찰의 기회를 가져다주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림16] 의무려산 망해정에서 바라본 관음각과 요서평야

의무려산은 600m 높이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입니다만, 기암괴석들이 많아 흡사 금강산이나 월출산을 연상시키는 곳입니다. 백두산, 천산과 더불어 동북지역의 3대 명산으로 알려졌습니다. 지금도 의무려산에는 김창업과 홍대용 등 조선의 문사들이 들렀던 관음각과 복숭아 향기 가득했었을 법한 도화동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옛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의무려산에 올라 요동벌을 바라보면 탁 트인 시야가 답답하고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느낌이 드는데요, 답답한 조선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너른 세상에서 새로운 자각(自覺)과 성찰(省察)의 기회로 삼기에 이만한 공간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연암이 요동벌을 보고 ‘호곡장론’을 설파했듯이 말입니다.

명·청 교체의 현장을 목도하다

중국지역 연행노정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공간이 십삼산(十三山)입니다. 산봉우리가 13개여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고, 돌이 많이 나는 석산(石山)이라고 해서 붙인 석산참이라고도 하는데요, 중국식 발음은 모두 ‘스산’입니다. 사행의 숙소 참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림17] 연행노정 옛길에서 바라본 십삼산 전경

십삼산을 지나면 대릉하(大凌河)가 나오는데, 사행들이 배로 건넜던 장소입니다. 대릉하 건너서부터는 명·청 교체기 격전의 현장들이 연이어 집니다. 대릉하 건너 만나는 명나라 장수 왕성종과 왕평의 비석인 사동비(四同碑) 역시 연행록에 반드시 언급되고 있는 경유지입니다.

[그림18] 대릉하 대교

대릉하와 관외사성인 금주~송산~행산~탑산으로 이어지는 노정은 명·청 교체기 가장 격렬했던 전쟁터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서 볼모생활 중이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 금주, 송산전투에 청 황제를 따라 종군했던 곳입니다. 연암은 이곳을 지날 때 당시 전쟁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어육지장(魚肉之場)’으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림19] 송산성 전투 기록화(송산참 성벽에 그려진 그림)

연행노정은 관외사성(금주 · 송산 · 행산 · 탑산)을 지나 영원성으로 이어집니다. 영원성 못미처 사행들이 잠시 들러 차를 마시고 쉬어가던 곳이 ‘영녕사’라는 작은 암자였습니다. 연행록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최근 현장조사에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퇴락한 영녕사를 확인하였습니다. ‘다붕암(茶棚庵)’으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녕사는 길가에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 관리를 하는 모양인지 암자 안에는 작은 불상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관운상이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중국지역 어느 곳에는 이렇게 우리 문헌 속의 지명, 선조들의 발길이 머문 공간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곤 합니다. 연행노정 현장에 남아있는 유적들을 조속히 영상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림20] 연행로(좌측)변의 다묘암(옛 영녕사 다붕암)

영녕사에서 쉰 사행은 곧장 영원성 동문을 이용하여 성으로 들어갑니다. 영원성은 지금의 흥성으로 산해관 밖의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였습니다. 지금은 중국내 보존이 가장 잘 된 4대 고성의 하나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이곳은 명청 교체기 청의 기세를 꺾어 명에 마지막 승리를 안겼던 명장 원숭환과 후금 누르하치의 일대격전이 치러졌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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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1] 연원성 조씨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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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22] 영원성 고루의 원숭환 기(旗)

1626년 대명전쟁에서 전승가도를 달리던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의 결사항전 의지와 홍이포(紅夷砲)의 위력 앞에 부상을 입고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누르하치는 이때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몇 개월 후 사망하게 됩니다. 사신들이 영원성에 이르면 당시 원숭환과 누르하치의 일대격전에 대한 논평도 많이 했지만, 당시 명장들이 후금으로 투항한 행위에 대해 비토하는 기록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기록이 영원성에서 본 조대수, 조대락 패루에 관한 인상입니다. 당시 화원이 그린 연행도(燕行圖)에는 조씨 패루의 위용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영원성 동문으로 들어간 사행은 성안 사거리의 고루를 지나 남문 방향의 관도(官道)에 우뚝 서 있는 조대수·조대락 패루를 보게 됩니다. 명장 조승훈·조대수·조대락 일가의 공훈을 기려 세운 2개의 패루입니다. 패루의 기묘하고 대단한 위용에 놀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행은 조씨 패루를 통하여 명의 멸망과 쇠퇴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훈을 자랑한다지만, 나라를 배신한 장수였으니 오히려 욕보이는 것입니다. 1653년에 이곳을 거쳐 간 동지사 심지원도 그의 연행일기에 “황제의 일을 전달하는 관도에 감히 일개 장수가 자신의 패루를 세울 정도니 명의 기강이 해이해진 이유를 알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청 교체 이후 이곳을 지나던 대부분의 사신들이 비슷한 견해를 연행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림23] 연행도-영원성 조씨패루(숭실대기독교박물관)

온천과 조씨 집안의 패루를 구경하다
1723년 9월 16일, 영원 땅을 지나는데 땅에서 뜨거운 물이 품어져 나오는 온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중략)

다시 5리를 가니 이번에는 조씨 일가의 패루가 나왔다. 명나라 말의 장수인 조대수와 조대락 두 사촌형제의

패루(牌樓)였는데 2개의 기둥을 세우고 문을 돌로 만들어 놓았다. 모두 큰 길의 위로 치솟아 있어서 공중에

지어진 누각 같은데 층마다 돌을 깎아 만들고 면마다 글자를 새겨 놓았다. 1번째 문은 조대수의 패루였는데,

가장 위층에는 옥음 2글자가 새겨져 있고 제2층에는 「충정담지(忠貞膽智)」 4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제3층에는 「사세원융(四世元戎)」 4글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층에는 증조부부터의 관직명이 나열되어 새겨져 있다.

2번째 문은 조대락의 패루인데 위층에는 또 「옥음」 2글자가 새겨져 있고 제 2층에는 「원훈준열(元勳駿烈)」

4글자가 새겨져 있고 아래층에는 조대수의 패루와 같이 증조부부터의 관직명이 새겨져 있었다. 이 패루 역시

조씨 가문에서 당대의 은총을 지나치게 드러내고 집안 대대로의 공로를 펼쳐 기록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조대수 때에 이르러 수치도 모르고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그의 조상들이 이 패루를 보면 부끄럼움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여행자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패루이지만, 배신자의 이름을 천년만년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일 뿐이니 참으로 딱한 생각이 들었다.
< 황정(黃晸) 계묘연행록(癸卯燕行錄) 1723-09-16>

영원성은 성곽의 형태가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습니다. 성안에는 사행이 들렀던 성황묘, 문묘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행단이 영원성 내에서 숙박하는 경우 더러는 조승훈의 옛집을 이용하기도 했다는데, 1608년 최현도 이곳에서 숙박했음을 『조천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패루 서쪽에 있다던 조씨 고거는 현재 방직공장으로 변하여 옛 모습은 전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사행이 묵었던 공간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그림24] 영원성 조씨패루 인근 조승훈 옛집 터(추정)

사행단의 발길은 중전소~중후소와 같은 관외 성보(城堡)를 지나 산해관으로 이어집니다. 사행단은 대부분 산해관 가까이의 맹강녀 사당을 찾아 진시황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서 절개를 지킨 강녀를 칭송하였고,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민초들의 고통을 상기하곤 했습니다. 맹강녀 사당은 사행이 반드시 둘러보았던 연행노정의 명소였습니다.

[그림25] 맹강녀 사당

[그림26] 맹강녀 사당의 망부석과 진의정

연행노정은 산해관(山海關)에 다다르면,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입성하기 위해 통관 문첩을 작성해야했고, 사행의 인마와 물품의 수를 기록한 ‘입관단자(入關單子)’를 넣고, 산해관을 지키는 병부분사아문의 안내에 따라 문무반열을 지어 관내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연행노정의 중절구간은 여기 산해관이 종착지입니다.

[그림27] 산해관 복원도(장성박물관)

중국은 전통적으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을 갖고 있었습니다. 문명(文明)과 비문명(非文明)으로 대체되는 화이(華夷)를 가르는 기준은 만리장성(萬里長城)입니다. 산해관은 바로 만리장성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조선의 사신이 관내(關內)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문명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성리학적 관념이 베어 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대국의 수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체험, 인적교류에 대한 기대감이 ‘관내’로 들어서면서 더욱 증폭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조선 사신들의 발걸음을 유난히도 설레게 했던 ‘관내정사’의 현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스토리테마파크 참고스토리

• 요동 총병 이성량, 알고보니 조선 사람, 그 아들은 소나무 잣나무와 같이 강직하고 청렴하다
  배삼익(裵三益), 조천록(朝天錄), 1584-05-10
• 온천과 조씨 집안의 패루를 구경하다
  황정(黃晸), 계묘연행록(癸卯燕行錄), 1723-09-16
• 왕성종과 왕평의 비석을 보다
  황정(黃晸), 계묘연행록(癸卯燕行錄), 1723-09-16
• 강녀사 망부대의 전설을 읽다
  이상길(李尙吉), 조천일기(朝天日記), 1617-10-24
• 만리장성과 슬프게 외치는 듯한 강녀묘의 소상에 얽힌 전설
  이해응, 계산기정(薊山記程) 1803-12-17
• 산해관 몇 십리 전 바라본 만리장성, 산을 가로지르고 봉우리를 에워싼 구름과도 같다
  박세당(朴世堂), 서계연록(西溪燕錄), 1668-12-11 ~ 1668-12-12

작가소개

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대표로 활동하며 역사공간에 대한 영상기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연행노정 기록사진전’을 진행하였고, TV다큐멘터리 ‘열하일기, 길 위의 향연’(4편)을 제작(촬영·공동연출)하였다. 저서는 <오래된 기억의 옛길, 연행노정>,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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