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론달을 받은 지 벌써 4일째. 조용히 검을 휘두르면서 수련하고 있는 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서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그곳을 바라보니 예의 20대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반갑수다. 파하하하핫. 면상 생긴 것은 나보다 훨씬 동안이면서 6년이나 플레이했으면… 도대체 댁은 몇 살 인거요?”
조금은 얼이 빠져버렸다. 덕분에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녀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리낌….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서있자 청년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듯이 양 미간을 찌푸리더니 왼손바닥에 오른 주먹을 가볍게 내려쳤다.
“아아- 미안합니다, 미안해. 나는 천존이라는 놈이올시다.”
천존(天尊)이라… 광오하다면 광오하다고 할 만한 아이디이군. 캐릭터 명 때문에 PK를 걸어서 어느 한쪽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 S. W에서 과연 저 아이디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쪽은… 반이였었지, 확실히?”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그는 즐겁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버려 두기도 뭣해서일까. 엉겁결에 내 손 역시 내밀고 맞잡자 그가 웃는 소리가 더욱 더 커졌다.
“내 손을 맞잡아 줘서 정말 고맙군요!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27살인 나보다 많다고 생각되거든.”
“29….”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천존이라는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나이를 중얼거리곤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천존은 흘러내리려는 듯이 서서히 미끄러지는 내 손을 고정하듯 꽉 잡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나머지 손을 가져와 양 손으로 내 손을 잡고는 아래위로 흔들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은 조금 특이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없지 않지만… 이렇게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성격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했기에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천존은 내 말에 부끄러운 듯이 한쪽 손을 슬그머니 때고는 머리를 긁적인다. 꽤나 빨리 대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나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단 말씀이야….
내 눈초리를 받은 것인지 머리를 한번 헤집어 주고는 날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이-. 형님.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마시고. 뭐… 형이 이곳에서 가장 ‘검’을 잘 쓸 것 같거든. 그 30대 아저씨도 있지만 1년의 차이가 있으니까. 게다가 이런 실제로 휘두르는 곳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게임으로 눈칫밥좀 먹은 사람이우. 그래서 이리저리 물어보곤 이곳까지 찾아왔지. 꽤나 힘들었어. 학교에서 이런 빈 공간이 이렇게 밝은 곳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았우? 그래서 이곳저곳에 사람 잡고 물어봐서 조금 헤매다가 겨우 찾았지.”
꽤나 과장을 섞어서 양 손을 흔들어 가며 설명하는 천존이 조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턱 끝으로 뒤쪽을 가리킨다. 그곳을 바라보니 내 검술을 보아주시는 교수님이 계셨다. 작정하고 데려 온 것인 듯 손에는 목검이 2개 들려있었다. 교수님은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검을 나와 천존에게 정확하게 던져주셨고, 둘은 공중에서 목검을 대충 받아들었다.
“대련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직 애송이라서 말이지. 원래 자신이 하던 ‘델리오드 3’의 ‘스킬’이라는 것에 너무 의존했던 경향이 있네. 그래서 이곳의 현실적인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기서 ‘스킬’을 복구해 보겠다고 박박 우기기에 말이지. 뭐, 별로 헤매거나 하지 않은 것은 알겠지. 녀석의 말은 과장이니 넘어가고… 일단, 스스로 실전을 증명해줘라. 교수보다는 실제 ‘플레이어’에게 당해봐야 충격이 크겠지.”
교수님은 즐겁다는 표정으로 팔짱까지 끼시고는 한쪽 벽에 기대서 이쪽을 바라보셨다. 대련이란 명목으로 일깨워주는 것 외에 무료하신 교육기간 즐기기 위해서 잠시 들린 이유도 있으신 것 같았다. 오히려 후자 쪽의 이유가 더 타당한 것 같은걸…. 챠넬포르타우의 교수님들은 모두 어리신 것 같군.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베어 문다. 목검을 왼손에 쥐고는 서서히 들어올렸다. 끝이 가리키는 곳은 천존의 중단. 녀석은 양 손으로 검을 잡아서 눈높이까지 들어올려서 수평으로 올리고는 무언가 재수 없는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꽤나 겉멋만 든 포즈만 엉성하게 취하고 있었으며 녀석의 검을 잡은 손도 정도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녀석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그러나 그것이 페인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대로 검 끝을 살살 움직인다. 옆으로 천천히 돌자 그쪽에서도 천천히 내 방향과 반대쪽으로 원을 그렸다.
녀석이 순간 몸을 힘껏 숙이더니 반동으로 뛰어왔다. 발이 엉키지나 않을까 걱정될만한 비틀비틀한 모습으로 뛰어와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들어올렸다. 녀석의 양 팔 근육이 급격하게 팽창한다.
몸을 살짝 뒤로 물러서자 녀석이 즐거워하는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 내려온 직후 바로 공격을 하려는 건가. 그렇게 놔 둘 수는 없지. 조용히 왼손의 검을 쥔 힘을 빼서 검을 앞으로 기울인다. 그리고 녀석의 검과 막 닿을 즈음 중지와 검지를 축으로 검을 완벽하게 회전시켰다. 검은 이미 손을 빠져나가서 내 손등에 막 붙은 채 공중에 떠 있었다.
덕분에 천존의 검은 허무하게 땅을 튕겼고, 나는 왼손을 살짝 옆으로 퉁긴 후에 바로 손으로 목검을 움켜쥐었다. 천존은 땅을 칠 때 충격 때문인지 검을 살짝 놓치고 있었다. 장갑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것인가.
바로 역수로 잡고 있던 검의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아서 발도자세를 들어간 후에 보통 검이라면 힐트가 있을 검의 끄트머리로 천존의 턱과 목 연결부위를 노리고 들어갔다. 녀석의 목 바로 옆에서 나는 돌격하던 것을 멈췄다. 꽤나 격한 나의 동작이 일으킨 바람이 녀석의 적당히 길다고 할 만한 앞머리를 흩뜨려 놓았다.
“이걸로 끝이다.”
녀석은 아직 땅을 내려친 충격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한 채 어설픈 포즈로 멈춰서 멍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곤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곧 녀석은 무언가 무서운 것을 보았다는 듯이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서서히 나를 향해 돌렸다.
“에… 헤… 헤… 이게 뭐야… 하나도 안보이잖아….”
나는 한쪽 얼굴을 비틀어서 미소 짓곤 목검을 땅에 떨어뜨린 채 아직도 멍하게 있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그 장소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아직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웃고만 있었다. 내가 교수님의 옆을 지나갈 때 즈음 교수님은 지나가는 어투로 말을 꺼냈다.
“우연히 들어간 큰 기술이군. 실전에서는 단 한번. 포위되거나 할 경우는 전혀 쓸모없는 기술이지. 그런데다가 겉멋까지 들었어. 처음 왼손으로 검을 잡아서 약간 속임수까지 줘 버리지만 원하는 궤도로 검이 들어오지 않으면 힘들기까지 하겠는걸?”
나는 교수님의 충고에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그 기술을 보고 따라할 지도 모르는 멍청한 짓을 안 하도록 감시나 제대로 하십시오. 분명히 배울 거라고 외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것은 그런 ‘스킬’이라기보다는 녀석이 공격해 오기 전 했던 속임수 같은 것이니까요.”
그것에 대한 답변은 없었고 나는 챠넬포르타우의 뒤편으로 발을 옮겼다. 그곳에는 정령들의 터가 있었다.
정령들의 터에는 나 외에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와 있었다. 정령과 함께 수업을 듣는다고 할까. 몸이 약하거나 움직이는 데 자신 없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마법계열의 수업이라서 그럴까. 단순한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그 두 사람은 꽤나 마른 몸에 허약한 듯한 체형이었다.
한명은 정령에게 줄 이름을 고민하는 듯 무언가를 말했다가 손을 휙휙 저어보이곤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제스처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정령은 불타오르는 새와 같은 형상이었다.
또 다른 한명은 계약 중인지 자리에 편안하게 대자로 누워서 공중에 떠 있는 뱀의 형상을 한 물의정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샤넬 소환. 땅의 정령 소환. 불의 정령 소환. 물의 정령이여….”
내 말에 호응하듯이 정령들이 차례대로 소환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는지 녀석들은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꽤나 즐거운 파티라도 진행하는 것만 같아서 그런 분위기를 깨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풀잎으로 이루어진 땅은 조용히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정령들은 그 풀잎을 살짝 밟고는 공중에서 가볍게 회전하는 등의 행동을 하며 즐거이 돌아다녔다.
“여기로 오는군.”
인자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교수님이 서 계셨다.
“오늘 수업은 끝나셨습니까?”
내 말에 교수님은 자리에 앉아서 즐겁다는 듯이 중얼거리셨다.
“1월 1일 신정 특집행사로 1분 일찍 마치고 오는 길일세.”
아아… 오늘이 1월 1일이였군. 내심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큭큭거리며 웃는다.
교수님도 그런 나를 바라보시다가 이내 따라 웃으셨다. 교수님은 어딘가에 앉는 것이 싫으셨는지 멍하니 서 계셨다. 곧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교수님의 흰 가운이 펄럭였다. 그 중간 샤넬이 연주하는 피리소리가 울려온다. 바람이 불어오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조용하게 그 소리를 감상한다.
편안하고 깊은 음색이 울려 퍼진다. 옆에서 이름을 짓던 정령사가 이곳을 살짝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살짝 어색한 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어색하게 그에 답한다.
“소리가 들리는군.”
교수님은 즐겁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야기하셨다. 무슨 소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피리소리 일 리는 없겠지.
“오늘을 기념하는 축제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 즈웰은 어떤가?”
미소로 답한다. 즈웰은 무책임한 영주의 허락이나 처신없이 축제를 열고 물품을 푸는 등의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도시이다. 굳이 지금 와서 신경 쓰며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보다도 이편이 더 잘 해나가고 있을 것이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잘 하고 있나보군… 오늘은 특별한 날일세.”
고개를 끄덕인다. 교수님을 올려다보니 언제나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 미소가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 무슨 특별한 이벤트가 있습니까?”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교수님은 껄껄하고 웃으셨다. 교수님은 역시 질문을 듣고 그곳에 대한 질문을 해 주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 1년을 보내며 한 살을 먹는 커다란 이벤트가 준비 중이네! 아니, 진행 중이네! 그것만큼 커다란 이벤트가 어디 있는가!”
무언가 속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다. 교수님의 웃음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커다랗군요. 제가 허무하게 1년을 보냈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는 것은 말이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교수님은 웃으시던 것을 멈추시곤 얼굴을 살짝 찡그리곤 말하신다.
“그렇지. 어른인 척 하는 심각한 꼬맹이가 자신의 정신연령에게 한발 더 다가선 날이지. 몸이 나이를 먹어가는 거야.”
웃음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한방 먹었다는 기분이 꽤나 강하게 들었기에 결국 멈출 수 없던 웃음이 입을 벗어나 소리로 흩어졌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허무한 일년이 흘러버린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이야기는 그렇게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 같군요. 아하하 하하….”
내가 즐거운 듯이 웃자 정령들 역시 덩달아서 웃는 듯한 모습을 취해보였다. 샤넬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조그마한 휘파람 소리… 살랑바람. 이것이 ‘웃음’일까? 그런 정령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교수님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셨다.
“에잉! 네놈의 정신연령에 따라가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필요할 거야! 눈앞의 늙은이보다 더 늙은 척 하는 애늙은이 같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은 정말 특별하지 않은 날이군. 그런 대단한 날이 그 대단함을 만들어내는 주역에게 무시 받는다니.”
서서히 가라앉는 웃음을 정리하면서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교수님의 얼굴에서는 역시나일까, 장난스러운 표정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기카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모순적인 게임'회원수 50, 카운터 450돌파를 자축하며-.
[넋두리]
예. 이제부터 제대로 된 넋두리가 시작되겠습니다. 이번편은 예전 리메이크 전 Second World를 접해보신 분들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12월 27일이라는 설정을 도입 해 넣고 새로이 쓰게 되면서 1월 1일에 새로운 이벤트 하나 넣어보자 해서 넣은 편이지요.
정상적이라면 이번편으로 끝나야 할 챠넬포르타우 챕터는 다음편으로 끝이 미루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뭐,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흥미도를 위해서 이번에는 어설프게나마 '전투씬'을 넣어 봤습니다. 이로서 주인공 반이 싸움을 하는 형식이 잠시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저런 전투씬은 정말 패싸움 같은거 일어날 때는 넣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하하하하핫.
그리고 이제부터 경계속의 삶의 '지속적인' 분위기 침체를 해결하기 위한 캐릭터 한명도 소개합니다. 바로 '천존'이죠.
원래 등장하지 않았던 오리지널 캐릭터로 앞으로 주인공과 같이 여행을 하면서 개그스러운 면모를 보여줄 녀석입니다.
물론, 경계속의 삶 전체적인 분위기를 깨는 캐릭터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캐릭터의 개성이나 유머적인 면모를 분위기 속에 잘 살려넣기 위해서 노력해 보겠습니다만... 잘 될지는 장담 할 수 없군요. 제가 존경하는 작가분들인 '델피니아 전기'작가 카야타 스나코 님이나 '은하영웅전설'작가분(성함을 잊어먹었습니다.;)과 같은 자연스러움이 나왔으면 좋곘군요(웃음)
글을 쓸 때에는 연습장 5개를 펼쳐 놓고 씁니다. 지도 설정이나 기타 미리 적어놓은 초본. 그리고 여러 설정집과 초고를 펼쳐놓죠.
첫댓글 처음부터 지금까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다행이군요.
잘 봤네. 자네 소설이 계속 순항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