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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알고 있듯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편 2022년 내년은 능곡성당 설립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설립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가지 이벤트를 준비하겠지만, 그 중에 '능곡성당 40년사'를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 중에 있다.
능곡성당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우수뼈)가 안치되어 있는데, 성인의 탄생 200주년과 능곡성당 40년사를 정리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에 대한 관심과 공경심이 더해지고 능곡성당에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게 된 경위가 매우 궁금해졌다.
능곡성당 설립 당시인 1982년부터 주보를 읽고 성당에 보존된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성인의 유해를 언제, 어떻게 우리가 모시게 되었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을 한결같이 기록하고 보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오늘날 처럼 컴퓨터가 있고 성당 사무실도 직원 채용 등 여러가지로 여건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모든 역사를 다 기록할 수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성당에 성인의 유해를 모시게 된 시기와 경위를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성인의 생애와 순교 죽음 그리고 순교 후 시신을 어떻게 수습하여 어디에 안장하고 오늘날까지 유해가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40년사 편찬 위원장인 박길남 도미니꼬, 자료수집팀 김순기 요아킴, 집필팀 김대운 대건안드레아, 그리고 김영철 베드로 주임신부님, 이렇게 4명은
혜화동에 자리한 가톨릭신학대학 도서관을 방문하여 자료를 열람하기로 하였다.
주임신부님께서 다니셨던 학교를 신부님도 오랫만에 방문하는지라 감개무량하시는 것 같았고 우리 역시 한국 천주교 사제 산실인 이 학교를 방문하게 됨을 축복으로 여기며 학교에 당도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더더욱 외부인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임신부님의 설득으로 우리는 모두 출입을 허락받고 도서관에서도 신부님이 능숙한 자료 열람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원하는 자료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찾았던 자료는 이기명 신부님이 조사하여 쓴 책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현황'이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열람한 많은 책과 자료들을 통하여 한국 천주교 전체의 역사를 좀 더 이해하고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신부님이 순교하시고 시신이 수습되고 성인품에 오르고 유해가 보존되고, 우리 성당에서도 신부님의 유해인 우수뼈를 어떻게 모시게 되었는지
상세한 과정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런 확인의 결과를 40년사에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능곡성당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유해를 모시게 된 경위
김대건 신부님 시성
김대건 신부님는 1845년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고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1925년 복자품에 오르시고 1983년 9월 27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 김효주 아네스, 김효임 골룸바 등 모두 103위의 시성을 승인 . 선포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하여 1984년 5월 6일 방한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김대건 신부님을 포함한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였는데 이는 바티칸 베드로 대성전 밖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순교복자 유해 순회 기도회
103위 시성에 앞서 한국 천주교회는 1983년 2월 16일부터 그해 8월 10일까지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고 103위의 시성을 염원하는 순회 기도회를 명동성당을 시작으로 서울대교구 120개 본당이 순차적으로 실시하였다.
능곡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를 모시기 위하여 1983년 6월 3일부터 1983년 7월 26일까지 9일기도를 실시하고 유해를 모시는 1983년 8월 1일부터 다음 날인 8월 2일까지 구역별로 2시간씩 기도를 이어갔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1983년 8월 1일 오후 4시에 의정부2동 성당에서 출발하여 오후 5시 능곡역에 도착하였고 8월 2일 오후 4시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유해가 떠났다.
이때에 있었던 김대건 신부 유해 모심은 순회 기도회를 위한 2일 동안의 유해 모심이었다.
김대건 신부님 유해 분배와 능곡성당의 유해 안치
김대건 신부님의 복사를 서며 신부를 꿈꾸던 17세 소년 이민식(빈첸시오)은 김대건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부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감시하는 포졸의 동태를 살피다가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된 시신을 수습하여 지게에 지고 미리내까지 60km를 걸어 닷새 만에 당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한 지 40일 만인 1846년 10월 26일 미리내에 시신을 안장하였다 .
이후 1901년 미리내에서 시신을 이장하여 용산신학교에 안치하였고 1925년 7월 5일 103위 순교자 시복식을 앞두고 순교자 공경이 절정에 달하면서 성인의 유해 일부가 처음으로 분배되었다. 1953년 신부님의 두개골이 혜화동 소신학교에 모셔졌고, 다시 1960년 용산신학교에 남아있던 유해를 혜화동 성신학교 성당으로 모두 옮겨 이곳에 합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유해 분배가 이루어지는데 굵은 뼈들은 대신학교에 안치되었지만 하악골(아래턱 뼈)은 미리내 성지로, 치아는 절두산 성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1969년 10월부터 1982년 10월까지 54기가 분배되었고, 이후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맞는 1984년 103위 시성식을 전후하여 대량의 분배가 이루어졌다. 이기명 신부가 쓴 ‘성 김대건 신부 유해 분배 현황’에 따르면 서울대교구 공문 83-12(1983.3.2)에 의해 1983년 3월 2일 141개소에 분배가 결정되었는데, 공문에는 능곡성당이 90번째로 명단에 올라있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우수뼈)를 능곡성당에 영구히 안치하게 된 것은 1983년 2월부터 1983년 8월까지 유해를 봉안하고 하는 순교자 시성 순회 기도회 행사가 모두 끝난 뒤, 그해 1983년 9월에 유해를 다시 모셔왔고 그동안 제의방에 모셔져 있던 유해는 20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아 제대의 예수님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아래 공간에 유해함을 제작 설치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신자들이 성인의 유해를 항상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3년 당시 서울대교구(의정부교구 포함)96개 본당이 유해를 분배 받았고 지금의 의정부교구 소속 본당은 9개 본당이, 그리고 고양시 소재 본당으로는 능곡성당이 유일하게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본당이 되었다.
순교 성인의 유해를 가까이 모시는 목적은 우리들이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이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의 뜻 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능곡성당이 본당 신자는 물론 고양시 소재 본당 신자를 비롯하여 능곡성당을 방문하는 많은 교우들이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는 거룩한 하느님의 집이 되기를 희망한다.
첫댓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