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한계
윤 기 백
인간관계는 우리의 삶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소홀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인간관계임을 잘 알고 있다. 크든 작든 인간관계로 인하여 생기는 용서할 일과 용서받을 일을 수시로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일도 그저 맥없이 용서하기도 하고, 또 용서하여야 할 일을 용서하지 못하고 번민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러한 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망각의 그늘에 묻어 버린 채 언제 그러한 일이 있었냐는 천연덕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손양원 목사는 아들을 죽인 아들 또래의 살인자를 용서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오히려 그 아이를 양자로 삼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듣는다. 또한, 생때같은 자식이 죽임을 당한 가슴이 미어터지는 처절한 슬픔을 당한 어느 부모는 유괴 살인범에 대한 선처를 탄원하기도 한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했기에 그 쓰리고 격한 감정들이 용해되어 이렇듯 단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지고지순의 경지로 이끌어 가는가?
세상에서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사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의 랜드마크 격인 십자가와 함께 세상에 잘 알려진 말이다. 또 예수는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용서와 사랑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용서하고 어떻게 어디까지 용서할 것인가? 용서했다고 말하면 그것이 용서한 것인가? 어찌할 수 없이 용서했노라고 말하고는 스스로는 잊지 못해 더욱 괴로워하는 것을 용서하였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용서하는 것만이 능사인가? 또 용서는 무조건적인가?
성경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물을 주라 그리하면 숯불을 원수의 머리에 쌓아 놓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그저 원수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고 차원이 다른 복수 즉 사랑을 통한 징계를 말한 것이리라. 혹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분은 이미 이런 상황의 징계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목사님이셨으니 순수한 아가페적 사랑의 발로이거나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실천하신 것일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죄와 죄인을 구분하여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밀양’에서는 죄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에게 정작 죄를 범한 가해자가 먼저 하나님에게 면죄받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역설이 나온다. 영화는 자식을 유괴해 죽인 가해자가 있고 그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은 피해자가 나온다. 피해자는 신앙에 귀의하였으나 자신의 의지와 행동이 점점 괴리되는 상황에서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선택하였다. 정작 교도소에서 대면하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속죄의 모습이 아닌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피해자는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가해자를 용서하겠다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오히려 가해자가 먼저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아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며 피해자를 위로한다. 피해자는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먼저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니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 상황에 당황한 피해자는 절규한다. “어떻게 용서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주1)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온 부정·비리 행위자나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그런데도 사회에서는 이내 고자누룩하게주2) 된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는 것이라도 이것이 용서일까? 징계의 포기는 아닌가? 그들을 그렇게 용서한다면 성경의 말처럼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는 것이 되어 즉 용서가 자체가 올무가 되어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회개의 자리에 나올 수가 있을까? 죄지은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을 어찌 용서할 수가 있을까? 이는 용서가 아니다. 징계의 포기일 뿐이다.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여야만 진정한 회개가 되고 또 그래야만 용서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만일 하루 7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너는 용서하라.” 주3)라고 하였다. 회개한다는 것은 두 번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며 죄인 됨을 고백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올 때까지 열린 마음으로 가슴을 열고 그렇게 기다려야 하리라. 그것이 사랑이리라. 그렇지 않은 한 용서하지도 말고 용서하거나 용서할듯한 언질도 주지 말 일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용서한 것이 되어버린다면 피해자는 용서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의식 또는 복수해야 한다는 자신을 항상 억누르고 있는 속죄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밀양에서의 피해자처럼 상황에 따라 다시 억울한 감정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마음 깊이 용서하면 우선 자신을 옥죄고 있었던 감정에서 놓여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밀양에서도 아마 피해자가 정말 용서했다면 가해자가 먼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더라도 피해자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미 용서했음을 밝혔을 것이다. 그리하였으면 마음에 평화와 쉼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공동체적인 무언의 압력 속에서 수동적으로 용서를 선택한 것이면 영화처럼 더 꼬이는 상황이 될 뿐이다. 그만큼 용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죄를 회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는. 오늘도 나는 부정·비리 행위자,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밝히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당연한 삶의 규범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끝.
주1) 나무위키 백과사전, 영화 밀양. 주2) 고자누룩하다 : 한참 떠들다가 조용하다. 주3) 성경 누가복음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