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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읍성
백제시대 때 동음현(冬音縣)의 치소(治所)로 처음 축조되었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탐진
현의 치소(治所: 감영 등 관청의 소재지)로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 세종 때 치소가 잠시 도강현 송계
리로 옮겼다가 다시 현재의 자리로 돌아온 이후 1478년(조선 성종 9)에 성곽을 다시 쌓아 강진현 읍
성의 방비를 튼튼히하였다.
당시의 성은 총둘레 3,400m, 너비 2.5m, 높이 3∼4m였다. 성에는 1,332개의 성가퀴[女諜]가 있
었고 사방에 성문을 갖추었다. 그중 정문격인 남문은 중층 누각 건물이고 동문·서문·북문은 단층문
이었다.
1531년(중종 25)에 수리하였고, 동학혁명 때 불에 타버린 이후 폐성이 되어 현재 서문 부근에 700
m 정도만 남아 있다.
강진읍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지역사 및 성곽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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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어 닫기검단산성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산성으로 여수반도와 순천시를 잇는 부분의 길목인 검단산(138.4m)의 정상
부에 위치하며 눈앞이 광양만이 바라보이는 요새지이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430m, 외벽높이 1∼3m(추정 높이 약 4∼6m), 내벽높이 2m이상, 성벽
두께 5m정도이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이 산성의 축성시기는 체성의 축성기법이나 출토된 외편들과 토기편들로 보아 6세기 말에서 7세
기 전반 경으로 추정된다.
검단산성은 이 지역에서 최초로 조사된 백제시대의 산성이며 정유재란 때 조명 연합 육상군의 지
휘부가 주둔했던 임란 전적지로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동쪽으로 약 2.7km 떨어진 왜성의 소서행
장과 대치 치열한 공방전을 치른 임란전적지이다.
고읍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 대청마을 태산에 있었던 옛 읍성의 터이다.
고흥군은 1285년(고려 충렬왕 11) 고흥현(高興縣)이라 칭해졌고, 1395년(조선 태조 4) 고흥현이
폐지되면서 조양현(兆陽縣, 현 보성군 조성면 일대)에 속하게 되었다. 고흥고읍성은 고흥현이 조양
현으로 편입되기 전까지 사용했던 읍성(邑城)으로,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 대청마을 남서쪽 해발고도
약 60m의 태산에 성터가 남아 있다.
태산 남서쪽 7~8부 능선에 황토와 잔자갈을 섞어 테뫼식 산성을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310m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 높이는 3m, 폭은 3.8m 정도이다. 산 정상 남쪽에 길이 15m, 폭 1.7m 정도의
배수로로 추정되는 유구가 남아 있고, 남동쪽 성벽 위쪽에 가로 18m, 세로 13m 규모의 평지가 있는
데 이곳에 건물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터에서 백제 때의 개배(蓋杯; 덮개를 갖춘 토기잔) 조각과 고려시대의 청자 조각 그리고 기와 조
각 등이 수습되었다.
곤군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고성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성곽으로 성지 주변의 지형을 보면, 남쪽
은 첨찰산, 죽찰산 등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으로는 진도 용장성이 있다. 동
쪽과 서쪽에는 좁다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특히 동쪽에는 해남 쪽으로 돌출한 원포리를 중심으로 내만된 해안이 형성되어 있는데, 현재 원포
리와 내산리 사이에는 방조제가 축조되어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곳은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토
평(討平)할 당시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좌군(左軍)의 상륙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북벽의 일부는 고성초등학교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높이 3m, 폭 1m, 길이 65
m이다. 동·서·남벽은 직사각형의 대형 석재로 축석한 1m 내외의 기단부만 남아 있다.
성벽은 협축법(狹築法)에 따라 쌓았는데, 기단부는 1m 내외의 대형 석재를 이용하였고, 상부로 올
라갈수록 30~40㎝의 작은 석재를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이 성의 규모는 500×400m 정도로 추정된
다.
고군성지의 동·서·남벽 주변은 농경지로 경작되고 있어 심하게 훼손되었고, 성돌은 논둑을 쌓는데
이용되거나 농경지 주변에 흩어져 있다.
고락산성 (여수시)
고락산성은 행정구역산 여수시 문수동 산 35번지, 미평동 산 115번지, 둔덕동 산 176번지 일대에
해발 100~255m 사이의 낮은 산에 분포하고 있으며, 산성의 규모도 264~730m 정도로 소규모인
점이 특징이다
고락산성은 본성과 보루로 이루워 졌는데, 여수와 여천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락산(해발 335m)
의 정상과 동쪽 사면 중복의 작은 봉우리(해발 200.9m)를 형성하는 곳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본성
은 능선과 그 사면을 따라 축조되었고, 보루는 고락산의 정상에 위치한다.
고락산성 출토 토기류는 백제 토기가 주종을 이루면서 가야 토기가 일부 포함된 조합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사용시기는 일부 출토품을 제외하면 주로 6세기 중반 이후부터 7세기 초까지로 편년된
다. 그 가운데 대부분의 출토품은 6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어 고락산성은 이 시기에 가
장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사부리성 (정읍)
<자료 미확보>
관방성 (진도면)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진도 망금산(望金山, 111.5m) 정상부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500m
아래쪽에 있는 작은 봉우리(67m)를 둘러싸고 축조한 서고동저형(西高東低型)의 테뫼식 해협 관방
성이다. 성의 둘레는 460m이며, 흙과 막돌을 섞어 쌓고 외벽을 깎아 접근이 어렵도록 되어 있다.
성안에서 백제 와당(瓦當; 기와의 마구리. 막새라고도 한다)과 신라 토기 등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전쟁을 치른 관방성(關防城; 국경을 지
키기 위하여 축조한 성곽)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 수많은 성(城) 가운데에서도 물목
(물이 흘러 들어오거나 나가는 어귀)을 지키는 관방성이라는 점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하여 보존 가치
도 크다.
망금산 관방성은 명량해협 즉 울두목(울돌목)을 지키는 요새로, 충무공 이순신이 대승을 거둔 명량
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광덕리고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광덕리 남산 공원에 있는 고성으로 흙이나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방어 시설
이다. 광덕리 고성 터는 화순군 화순읍 광덕리 남산 공원의 낮은 자연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부분 토
축 내지는 석축을 한 것이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마을 일대에 기와 편, 토기 편
이 출토되고 있으나 문헌 기록이 없어 축조 시기나 성의 형태를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토축과 석축의 흔적은 주로 자연 구릉을 이용한 지형에서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석축이 무너
지고 방치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2014년 현재 화순군청에서 관리하고 있고, 문화
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내부의 거의 전체가 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몇 개의 민묘도 자리 잡고 있다. 성곽 밑으로 남쪽에는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 일대를 성안이라고 부른다. 성안 중심부에서는 많은 기와 편, 토기 편, 청
자 편이 산견된다. 채집된 토기 파편 중에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섞여 있어 이를 통해
성의 축조 시기를 추리하고있다.
광양읍성 (광양시)
<광양읍의 산>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일대에 있었던 옛 읍성의 터이다. 처음 설치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왜적
의 침입을 막기 위해 1413년(태종 13년) 이후에 쌓아진 성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목책성(木柵成)이었으나 1430년(세종 12년)을 전후하여 석축성(石築城)으로 개축되었
다. 크기는 둘레 1,812척, 높이 7척6촌, 여장고 3척, 여장 374척, 해자 둘레 1995척으로, 적대 7개
와 옹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곽시설을 갖추었다. 성벽과 성문은 유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
20년대 후반을 전후하여 헐린 것으로 판단된다.
금갑진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수군진(陣)으로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
상교통로에 위치하였으며, 왜구를 막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
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은 성의 서쪽과 북쪽 부분이다.
1485년(성종 16)에서 1499(연산군 5)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도 금갑진성에 대하여 “석축으로 둘레 1,153자, 높이 8자, 샘 1이
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문화유적총람』에 금갑진은 성 주위 315m, 높이 3.3m로 기록되
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의 규모는 1,050자, 높이 11자 정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보물고적조
사자료』에는 “석루(石壘)가 약 5칸이 되는 곳에 깊이 4자 내지 10자, 폭 약 3칸의 해자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보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자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갑진지도』에는 동·서 2개의 성문이 표시되어 있고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
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만호 1명
과 군관 13명, 이(吏) 11명, 지인 3명, 사령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금성산성 (담양군)
담양군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금성산(603m)에 위치한 금성산성은 호남의 3
대 산성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외성은 6,486m, 내성은 859m에 이르며 돌로 쌓았다. 성안에는 곡식 1만 6천 섬이 들어갈 수 있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으며 객사, 보국사 등 10여 동의 관아와 군사 시설이 있었으나 동학농민운동 때
불타 없어졌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성문터가 있는데 통로 이외에는 사방이 30여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통행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금성산의 주봉인 철마봉을 비롯하여 일대의 산지는 경사가 매우 가파르
다. 또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성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으며 가운데는 분지여서 요새로는 완
벽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하였고 임진왜란 후 1610년(광해군 2)에 파괴된 성곽을 개수하고 내성을 구
축하였으며 1622년에 내성 안에 대장청(大將廳)을 건립하고 1653년(효종 4)에 성첩(城堞)을 중수
하여 견고한 병영기지로 규모를 갖추었다.
금오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한계리 한천면과 춤양면의경계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544.7m의 용암산
에 자리잡고 있다.
금오산성의 유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능성현의 주성인 비봉산성과 그 외곽 성인 예성산성과 함께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몽고성지’라고도 부른다.
그뒤 병자호란 때에 다시 쌓았다고 하는데, 향토 방어를 위한 군사훈련 장소와 군량미 보관창고로
사용하였다는 말도 함께 전해져온다.
금오산성의 성터는 화순군 내 산성 중에서는 가장 높은 10m 내외의 석축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산 정상에 60m 정도 길이로 선을 두른 듯이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높이 4∼5m, 너비
1.5∼2m이다. 성의 전체 둘레는 1.5㎞ 정도이다.
성벽의 축성방법은 자연적인 산세를 이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대부분 양면을 돌로 쌓아올린
협축식(夾築式)이다.
나주읍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남내동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조선 세조 3년(1457년)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
란(1592년) 이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둘레는 3,126척(약 940
m), 높이는 9척(약 2.7m)이며 대포을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
다고 한다. 성문은 4개로 동·서·남·북에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북문터에 기초석만 남아있
다.
1993년 남문터에 복원한 남고문이 있는데, 2층으로 된 누(樓)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옛 나주읍성의 일부분을 보여
준다.
나주자미산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일원에 있는 산성으로 해발 94.5m이고 산정은 평평하다.
성벽은 본래 안쪽으로 호를 파고 내탁식(內托式)의 성벽을 만들었다고 여겨지며, 둘레가 약 740m
이다.
성문은 3개소의 단절부가 있으나, 지표에 문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성안에는 건물터와 ‘용왕샘
(龍王泉)’이라 부르는 샘이 있다.
성내에서는 백제토기편과 고려 및 조선시대의 유물도 수습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까지도 산성
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접전을 벌였던 곳으로, 견훤은 자미산성에 성을 쌓
고, 왕건은 약 4km 떨어진 영암 신북면의 갈마산에 주둔하고 싸워 견훤이 패하였다고 하며, 삼별초
(三別抄)의 군사가 주둔하였다고도 한다.
이 산성의 주변에는 대안리고분군·덕산리고분군·신촌리고분군 등의 대규모 고분군이 있어서 이들
고분군을 만든 집단들이 이 산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영산강 유역의 백제시대 대표적인 테
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지금은 성벽이 토석 혼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낙안읍성 (순천시)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 서, 남내리 고려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년(태조 6) 절제
사(節制使)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 9월부터 토축의 읍
성을 석축으로 쌓으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 안에는 우물 2개 ·연못 2
개가 있었으며, 해자(垓字)는 파지 않았고,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은 그 후에 설치하였다.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이며, 체성(體城)의 축조나 적대를 구비한
점에서 조선 전기의 양식이다. 동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옹성
은 남 ·서문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성곽은 커다란 자연석으로 쌓고,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돌
로 쐐기박음을 했지만 아직도 견고하다. 남문터는 마을 안 골목길에 있는데, 네모진 바위를 3단으로
쌓아올린 성문벽이 길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 안에는 1536년(중종 31)에 지은 객사(客舍)가 온전히 남아 있고, 대성전(大成殿) 등 9채나 되는
향교가 보존되어 있다. 장군 임경업(林慶業)이 15세 때 하룻밤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여지승
람(輿地勝覽)》에 낙안성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믿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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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봉산성 (순천시)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 뒷산을 중심으로 축성된 산성으로, 매곡산성(梅谷山城)이라고도 한다. 성
벽은 붕괴되었지만 이곳저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도성 북문 밖의 외곽방어를 맡았던 것
으로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라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 성터가 있다.’
라고만 되어 있을 뿐 성의 규모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조사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높이 2~4간, 둘레 약 400간의 방형누지
(方形壘址)로 난봉산의 남향으로 돌출한 지맥의 산정에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방어를 위해 쌓았다고 하나 축성구조로 볼 때 삼국시대의 성(城)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한다.
남도 석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고려 원종 때 배중손(裵仲孫)이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
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쌓은 성이라고 전한다.
진도군에는 백제시대에 이미 3개 고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진도군에 속한 것이 지금의 가흥(嘉興)
인 도산현(徒山縣)과 지금의 임진( 臨准)인 매구리현(買九里縣)과 또 매구리현의 중심인 구도포(九
桃浦)로였을 것이다. 이러한 고을들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3세기 초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왜구가 연해지방을 노략질하므로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부(官府)와 백성들이 세종 초까지 내륙지방으로 피하여 살다가 귀향하였다. 남도포(南桃浦)에 만
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은 1438년(세종 20) 정월의 일로,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성은 그
뒤에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남도포성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위치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남도포와 금갑보가 분탕질당한 경우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
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1683년(숙종 9) 6월에는 육군의 진관체제(鎭管體制)와 같은
수군진관(水軍鎭管)을 현재 전라남도의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두었는데,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딸린 수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하며, 또한
1765년(영조 41)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터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남도신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고려 원종(元宗) 때 배중손(裵仲孫)이 진도에 와서 1270∼1273
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
(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시대에
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
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둠으로써,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
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尺),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
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경에는 석축(石築)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
고 하며, 현재는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남양리산성 (고흥군)
고흥군 남양면 남양리와 중산리 일대에 백제시대에 조조례현(助助禮縣)이 있었던 지역으로, 남양
리 산성도 조조례현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된다.
위치·축성법·출토유물 등의 양상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처음 축성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발고도 162m의 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 동서쪽으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총둘레 534m, 너비 4m 내외이며, 돌로 축조되었다. 산성의 평면형태는 부정형(不定形)으
로, 남북이 동서에 비해 길며, 성벽의 동벽과 북벽 일부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성 안쪽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하게 경사가 진 지형으로, 약 12곳의 계단식 평지가 확인된
다. 성의 중앙부에 돌로 쌓은 원형 우물 2곳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데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성문 터는 현 출입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동쪽 회절부(回折部)에서 서쪽으로 약 40m에 있는데 현재
동쪽 외측 모서리부분 약 90cm정도만 남아 있을 뿐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당동리 산성 (곡성군)
정보 미확인
대성산성 (신안군)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도 대성산(189m) 정상부에 높이10척, 주위 130칸의 성이다.
현존하는 성의 높이는 4m, 폭은 2.5m인데, 화강암제를 다듬은 돌로 아주 정교하게 쌓아 올렸으며
남벽과 동벽은 대체로 원형이 남아 있으나, 서벽과 북벽은 허물어지고 숲속에 가리어져 있다. 축성
시기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백제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봉화대를
쌓고 왜병선이 인천방면으로 항해하는 것을 감시하여 당시 한성으로 연락하였다고 하며, 진도 완도
와 연결하는 봉화의 주봉이었다고 한다.
독치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봉림리 산성의 전체 길이는 508m로 전남 동부 지역의 백제 석성 가운데
광양의 마로산성, 고흥 남양리 산성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산성이다.
독치성의 남쪽 성벽은 일부가 소실되었지만, 대부분의 성벽은 남아 있다. 독치성은 경사지를 활용
해 성 외벽은 수직으로 높게 쌓고 내벽은 낮게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성되었는데, 백제 산성 중
에서도 흔히 보이는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것
을 말하는데, 연대가 오래되고 규모가 작은 소규모 산성에 많다.
성벽을 방어하는 성곽 돌출 구조물인 치(雉)도 확인되었는데, 성벽과 능선이 교차하는 가장 높은
지점에 형성되어 있다. 백제 산성 중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곳이다. 발굴된 유물로는 삼국 시대의 토
기 조각, 분청사기 조각, 평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독치성은 백제 후기에 쌓았던 산성으로, 이
지역이 통일신라에 흡수되면서 국경 수비로서의 산성의 기능이 다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고산성 (전주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동서남문지와 수구문, 건물지,
우물터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전주 동남방 승암산(僧巖山)에 있다 하여 ‘승암산성’이라고도 하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인
데, 후백제견훤의 왕성(王城)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주가 후백제의 왕도였음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이 산성을 두고 왕궁터라 한 것은 1688년(숙종
14)에 성황사(城隍祠)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쓰여진 「성황사중창기(城隍祠重刱記)」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 성황사는 지금도 성안에 남아 있다.
1980년의 개괄조사 결과 건물터에서 ‘全州城(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와당이 발견됨으로써
그 연대와 성격이 후백제의 왕궁터라는 전설과 부합됨이 밝혀졌다. 이밖에도 ‘中方(중방)’·‘官(관)’자
등이 새겨진 암키와 조각도 나왔다.
산성은 서북으로 면한 수구의 남북으로 뻗은 규암(硅岩) 절벽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동쪽이 높은
삼태기형의 골짜기를 감은 것인데, 남북으로 날개모양의 익성(翼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곽의 너비는 동서 314m, 남북 256m이며, 익성은 북쪽이 112m, 남쪽이 123m이다. 수구는 높이
230m 지점에 있으며 최고봉인 동남우각은 306.6m이다. 석축은 능선 바깥 사면 중턱을 깎아 회랑도
를 설치하고, 그 바깥 밑부분에 쌓았는데 높이는 4m 정도이다.
성안은 사면을 3단으로 깎아서 건물대지를 만들었다. 윗단은 길이 117m, 너비 20m, 중간대지는
길이 133m, 너비 26m로서 그 안에 건물지 초석과 기와조각들이 퇴적되어 있다. 성문은 수구에 서
문지, 북익성 동변 부근에 동문지, 남익성의 양쪽 부근에 두 개의 남문지가 있다.
마로산성 (광양시)
광양시 광양읍 북쪽의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마안봉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산성에 올라서면 광양만
을 비롯한 남해안의 바닷길과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제가 공주(웅진)에 도읍을 두었던 6세기 무렵에 마로현을 다스리기 위한 중심성곽(치소)으로 처
음 쌓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도 고을 이름을 희양현으로 바꾸어 9~10세기까지 사용하였다.
성벽의 길이는 550m, 너비 5.5m이며 면적은 약 18,945m2이다. 부속시설물로는 백제~통일신라
시대의 건물지 17동, 문지 3개소, 돌로 쌓은 물을 모아두는 시설인 석축집수정 5개소, 우물 2개소,
점토로 만든 물을 모아두는 시설인 점토집수정 6개소, 치 2개소, 수구 3개소, 구덩이 30여기 등의
많은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만호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산성으로 둘레 560m이며 현재 동·서·남문지
와 건물지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전라좌수영 산하의 오관(五官 : 順天·樂安·寶城·光陽·興陽)·오포(五浦 : 蛇渡·呂島·鹿島·鉢
浦·防踏) 중 수군만호가 다스리던 수군진성(水軍鎭城)으로서 1490년(성종 21)에 축성되어 1894년
(고종 31)에 폐지되었다.
1580년(선조 13)에 이순신(李舜臣)이 충청병사해미군관(忠淸兵使海美軍官)에서 발포만호로 부임
하여 18개월 동안 재임하기도 하였다.
이 성은 도제산(都祭山)의 남쪽 기슭을 일부 헐어내고 남으로 바다에 면하도록 만들어졌는데, 성벽
은 옹형(甕形)에 가까운 사다리꼴로 높이는 4m이다.
성벽은 서벽이 동벽보다 깊고 상태가 양호하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장으로 되어 있다. 현재 성
안에는 동헌·객사·무기고 등의 건물지와 동·서·남문과 망루지 등이 있다. 평지읍성과 산성의 절충양
식인 평산성이 중요한 특징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맹진리산성 (해남군)
< 맹진리의 들>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맹진리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포구와 조창이 있었다하며 왜구의 침략
을 막기위해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목장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금산면 거금도의 어전리와 석정리 일대에 있으며, 약 4.5㎞에 걸쳐
적대봉(積台峰:592m)과 용두봉(龍頭峰:418.6m) 사이의 계곡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목장성은 목
장의 말이 울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을 말하며, 목마성(牧馬城)이라고도 한다.
절이도는 거금도의 조선시대 이름으로, 조선시대에 소록도, 절제도, 시산도, 나로도와 함께, 국가의
말을 키우는 도양(道陽)목장에 속한 속장(屬場)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 따르면 1430년
(세조 12) 말을 기르기 위해서 섬 가까이에 있는 회령포·돌산포 등 여러 포구의 선군(船軍)을 동원하
여 축성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축성 당시 목장성에는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여 약 800여 필의 말을
기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였으며, 실제로 1470년에는 364필의 말을 방목하였다.
너비는 아랫부분이 3.2m, 윗부분이 1.4m이며, 높이는 0.5∼1.7m이다.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되어
원형의 전체길이는 정확하지 않으나 섬 북쪽의 미확인 부분을 제하고도 4,652m에 이른다. 남북방향
으로 길게 돌로 축조한 성이며, 안에는 세납(稅納)목장과 조그마한 우물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목장
성으로는 드문 경우여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백치산성 (고흥군)
전남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에 있는 백제의 산성으로, 독치성과 남양리 산성과 함께 전남 동부 지역
의 백제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산성의 총 둘레는 444m이며, 산의 8부능선을 따라 수평되게 둘러쌓은 형태의 테뫼식 산성이다. 잔
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바닥다짐을 한 흔적이 남아 있고, 출토된 유물로는 격자문, 선문, 무문, 복합문
등의 평기와 조각이 있다. 그러나 축성 연대나 사라진 시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사실이 없다.
벽오산성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죽청리와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반룡리에 걸쳐 있는 방장산(方丈山, 74
2.8m)의 남쪽 봉우리인 벽오산(碧梧山, 640m) 정상부에 쌓았던 테뫼식 산성의 터이다. 벽오산은 벽
오봉 또는 방문산, 속초봉이라고도 불린다.
벽오산 정상부와 그 동쪽의 9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이 축조되었는데 지형에 따라 축성법이 다르
다. 벽오산 정상부에 쌓은 서벽은 외면만을 돌로 쌓는 내탁법으로, 능선부를 가로지르는 동벽은 안
과 밖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법으로 축조함으로써 구간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체 길이는 730m, 폭은 3m이다. 기저부에는 길이 1m 내외의 장대석을 사용하고, 그 위로는 50×
20cm, 50×30cm 크기의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현재 서벽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진 상태인데 서벽의 높이는 약 2m에 이른다.
성문터·건물터·우물터는 확인되지 않으며, 유물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장성읍지>에 ‘만동민보성
(萬洞民堡城)’이라는 성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벽오산성과 만동민보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 같은
것으로 보아 동일한 성인 것으로 여겨진다.
불암산성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으로 불암산(佛岩山)의 서남 지맥에 해당한
다.
불암산성의 축성기법과 수습된 기아와 토기편, 무기의 일종인 석환으로 보아 백제시대 후기에 축
조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 전체의 둘레는 500m이고, 최대 높이는 334m, 너비는 530~600cm이다. 동서쪽이 장축인 사
다리꼴 형태로 성벽의 안팎을 돌로 쌓아 올리는 협축식으로 축성되었다. 협축부분의 성벽하부는 석
비례층이나 암반 위까지 파서 기초를 튼튼하게 한 후에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곧바로 벽을 쌓아
올렸다. 또한 성벽의 하중이 아래쪽으로 몰려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경사면 지역을 수
평 쌓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성벽의 대부분 무너져 있지만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성하
였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비봉산성 (화순군)
화순군 능주면과 도곡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195.5m 높이의 비봉산 일대에 자리잡고 있
있으며 자연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의 전체길이는 925m 정도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 등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주변의 자연석을 잘 가공하여 정연하게 편축
또는 협축으로 쌓았다. 성벽은 해발 170∼220m 일대에 분포하는데 서벽과 북벽이 잘 남아 있다.
동벽은 안산 정상부로 가는 능선을 가로지르며 경사면과 돌출된 구릉의 평탄부를 이용하였다. 성
벽은 가파른 능선의 허리를 가로질러 축조하였으며 완만한 산기슭의 평탄한 곳에는 부분적으로 5∼
6단의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서벽은 나지막한 봉우리에서 비봉산 정상부로 연결되는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뒤 가공한 자연석을
양쪽에서 축조한 협축이다.
남벽은 안산 정상부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로 연결되는 능선인데 경사면을 깎아낸 뒤 양쪽에 돌을
쌓은 협축으로 능선상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북벽은 안산으로 올라가는 능선상에 있는
계곡과 절벽을 이용하여 가파른 능선사면에 3∼4단의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북벽의 안쪽에는 폐사
지가 있다.
문지와 건물지 두 곳이 있고, 우물은 폐사지 근처에 있는데 해발 180m 지점이다. 건물지 주변에서
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암갈색 토기편,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비봉산성은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축조 시기와 배경을 알 수 없는데 능주에서 가까운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전형
적인 배후산성이다.
삼계성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 우봉마을 우봉산(169.9m) 8부 능선에 있는 흙으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삼계현(森溪縣)의 현성(縣城)으로 전해진다. 삼계현은 백제 때 소비혜현(所非兮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삼계현이 되었다가 고려시대에 영광군에 이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영광읍 동쪽 4리(약 1.6km) 소구릉상에 있
는 토축 성(城)으로, 둘레는 약 200칸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성안에서 수습된 토기편·기와편 등
의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되고,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되다 940년(고려 태조 23) 영광군에
내속되면서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약 360m로, 현재 높이 2~3m에 이르는 서벽과 북벽을 제외한 성벽은 헬기장·
민묘 조성으로 파괴되고 부분적으로 윤곽만 남은 상태이다.
상라산성 (신안군)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진리 흑산면 진리 2구인 읍동마을의 바다와 만나는 상라산 북쪽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상라산성 일원에 산성을 비롯한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无心寺址) 등 4개 유적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대~고려시대에 국제 해양도시의 기능을 했을 흑산도 읍동마을을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은 전체길이 280m로 남사면만을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의 길이는 220
m이다.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은 약 100m 높이의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성벽 중간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나 바위 사이에만 성벽을 쌓는 등 험준한 자연지세를 최대
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은 대체로 남사면의 6부 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
뫼식 산성으로 성벽은 편축법(片築法)으로 쌓았다. 성돌은 기저부에만 장대석을 사용하고 아래 윗단
은 거의 같은 크기의 성돌을 수직으로 쌓아 올렸으며 쐐기돌로 고정하여 수평을 유지하였다. 면석
(面石)은 대충 다듬은 면을 바깥으로 하여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하였으며, 안쪽에는 잡석으로 뒷
채웠하였다.
석주관성 (구례군)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일원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진
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곽영이 호남지역의 왜적을 막기 위해 그 진 위에 석주관성을 축조하였다.
석축산성인 석주관성(石柱關城)은 섬진강을 사이에 둔 요새지에 해당되며 경상남도 하동으로 통
하는 길목을 차단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이었고, 고려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성벽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이 남원에 진을 베풀고 11월에 이곳에 성
을 쌓았다. 이곳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요새지로, 팔량치(八良峙)와 함께 축성되었다.
성벽은 지리산의 남쪽 줄기인 왕시루봉의 남방 칠봉산(七峰山)의 남향 능선을 이용하여 섬진강변
까지 내외협축(內外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쌓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은 것)의 석축성벽과 토루
(土壘)를 만든 길이 710m가 남아 있다. 돌로 쌓은 성벽은 너비 1.6∼0.8m, 높이 1∼1.6m의 규모로
7.9m 간격의 윗면 수평을 이루도록 축성되었다. 성벽은 단면이 사다리꼴을 이루며 두 곳에 망대터
가 있다.
호남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문으로서, 성벽은 엉근 막돌허튼층쌓기로 쌓았는데, 이러한 성
벽은 우리 나라에서 매우 보기 드문 축조방법이다. 또한 능선 정상을 따라 암반을 이용한 축성기법
역시 축성법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선원동산성 (여수시)
전라남도 여수시 선원동 토미산(135.4m) 정상에서부터 해발고도 110m까지 내려오는 지점에 쌓
은 테뫼식 산성이다. 산성에서 내려다볼 때 남쪽과 북쪽은 평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변 지
역을 관망하기에 좋고, 남쪽 멀리로는 해안선까지 관찰된다. 산성이 있는 곳은 서고동저(西高東低)
의 지형이다.
성벽은 총 둘레 474m, 최대 폭 11m 정도이다. 토축과 석축이 혼용되었으나 대부분 토축으로 되어
있으며, 계곡 부근에 석축 구간이 일부 있다. 성의 평면은 북쪽이 좁고 남쪽이 넓은 모양이다. 성 안
쪽의 동편에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성문터 1개소, 건물터 4개소가 확인된다.
성터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와 토기들이 다량 발굴되었는데 기와 6점에 북(北), 전(前), 중(中)이라
는 방향과 위치를 의미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 백자 접시편 1점도 수습되었다. 출토유물로 보아 백제 때 축조한 성으로 추정되지만, 문헌
기록이 없어 정확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성암산성 (순천시)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죽내리의 야산(195m) 정상부를 둘러싸고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전체 길이 약 350m로 타원형에 가까운데 산성이 들어선 곳은 북쪽이 높고 남동쪽이 약간 낮은 지
형이며, 성의 중심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대를 이룬다. 석축은 많이 붕괴된 상태이지만 북서쪽과 남
서쪽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 높이는 약 1.5~1.8m로, 대부분 판석에 가까운 자연석으로 쌓았고, 장방형·부정형의 할석도
이용되었다. 성벽의 동쪽에 성문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성문터로 추정되는 성벽의 높이는 1.5m
가량이며, 15×30cm 정도의 판석형 할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일제강점기의 조사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높이 3~7척(약 0.9~2.1m), 폭 3간, 둘레
200간에 이르는 원형 석루지(石壘址)이다. 구조와 형상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성으로 여겨진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수인산성 (장흥군)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대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수인산성(修因山城)’이라고도 한다.
유치면 대리에서 강진 병영면에 걸쳐 산마루를 이어쌓은 포곡식(包谷式) 석성으로, 주위 둘레는 약
6㎞, 높이 4∼5m, 너비 4m이며, 세 개의 성문이 있다.
성의 축조는 천험의 산세를 이용한 협축식(夾築式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
는 것)으로 양면이 거의 수직에 가까운 석성인데, 성내에는 봉수대와 수인사지(修因寺址)·군고지(軍
庫址)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수인산성이 언제 어느 정도의 규모로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세종실록지
리지에 장성 입암산성(笠巖山城), 담양 금성산성(金城山城), 나주 금성산성(錦城山城)과 함께 수인
산성이 기록되고 있어 이 성의 축조연대는 고려 시대로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인산성은 둘레가 3, 756척(尺)이고 본래는 도강현(道康縣) 때의 성인데
본조에서 다시 쌓았다.” 하였는데 현 강진군을 고려 시대에 ‘도강(道康)’이라 불렀던 점을 감안한다
면, 이 성은 고려 시대에 쌓았음이 분명한 것 같다.
여도진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고흥 여도진성은 임진왜란 때 전라좌수영 관내 5관 5포에 속하는
수군진으로서 당시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여기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하였으며, 진성(鎭城)을 세워 견고하게 방어하였
으나 지금은 석성의 일부만 남아 있다.
전방에 원주도, 북쪽에 내백일도·우모도·계도, 남쪽에 팔영산, 그리고 동쪽으로 항도에 둘러싸인
해상요충으로서 여자만 해역을 방어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언제 이곳에 수군진이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수군제도가 기록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
작한 것은 조선 초기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로 당시의 전라도 수군편제를 보면 지금의 함평관내에
속하는 무안현에 전라수군처치사영을 두고, 그 밑에 좌우의 도만호영(都萬戶營)을 두었다. 좌도 도
만호영은 고흥 여도에 있었고, 우도 도만호영은 무안 원포(지금의해제면)에 있었다.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1,320자, 높이가 15자였다고 성종실록에 기
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성터의 유구 일부만 남아 있다.
남벽의 경우 길이 약 200m, 높이 60∼150㎝, 서벽의 경우 길이 약 95m, 높이 180㎝ 정도라고 한
다. 사실상 서벽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그 윤곽만 남아 있다.
오성 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서성리의 백용리와 화순읍 일심리 오성산성은 화순읍과 화순군 동면의 경계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290.4m의 오성산 일대에 있다. 오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테뫼식 산성으로 산성의 전체길이는 675m 정도이다.
성벽은 능선이나 절벽을 이용하였는데 해발 250∼275m 일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부분 주변의
돌을 가공하여 축조하였다. 성벽의 기단석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였
다.
능선의 사면을 이용한 동벽은 경사면을 깎아낸 뒤 자연석을 가공하여 한쪽만을 축조한 편축법으로
이루어졌다.
남벽은 건물지 앞의 능선사면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일부는 경사면을 깎아낸 뒤 양쪽에 돌을
쌓아 만들었다.
서벽은 가파른 능선을 깎아낸 뒤 가공한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다. 가파른 능선과 절벽을 이용한 북
벽은 능선을 다듬은 뒤 부분적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였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있다.
남벽이 동벽과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20m 정도 떨어진 남벽에 문지로 추정되는 지점이 있다.
해발 250m 지점의 남벽 안쪽 능선사면에 건물지가 있다. 건물지는 반원형이며 앞에는 긴 석축이
조성되어 있다. 성벽일대와 건물지 주변에서 채집된 유물로는 회백색 경질 암기와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 백자, 구연부편 등이 있다.
오성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산성의 구체적 축조 시기와 배경에 관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화순읍에 가까운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배후산성이다.
오치음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와 포두면 봉림리 일대에 있는 돌을 쌓아 만든 산성으로, 신호리 동
백마을은 고려시대 도화현(縣)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오치음성 역시 도화현과 관련된
성으로 보인다.
천등산(555m)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의 산마루(389.5m)로부터 동쪽의 산중턱까지
쌓은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며 쌓은 산성)으로, 성의 총 둘레는
2,642m이다.
둘레 1200~1300칸(2,172~2,353m)의 석축이며, 성벽은 골짜기 유역을 둘러싸고 있는데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주민들은 성 안에 목장(牧場)이 있었다고 전해내려온다.
성의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방형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성의 북서쪽 정상에서는 고흥
독치성과 고흥 백치성’이 관찰된다. 서쪽 성벽이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고, 서쪽·남쪽·동쪽 성벽에서
문지(門址, 성문이 있던 터)가 확인되었으며 우물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성 안에서 수습된 유물은 토기류, 기와류, 분청사기 조각 등이다. 성의 위치, 축조방법, 출토유물 등
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산성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용장산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의 용장성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군사기구였던 삼별초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우고 몽골에 항복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상대로 항쟁의 거점으로 쌓은 도성
이다. 왕궁을 감싸고 있는 토성과 외곽의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은 강화도로 도성을 옮기고 몽골을 상대로 항쟁을 펼치던 1243년(고종 30)에 해전에 약한 몽
골군에 대비하기 위해 섬 지역에 처음 산성이 세워지면서 방어용으로 활용되다가 삼별초가 왕을 세
우고 진도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나성으로 사용되었다. 내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
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내성의 길이는 425m, 높이 1.5~2m이며 부속 시설물로는 건물지 50개소 등의 유구와 기와, 청자,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외성 길이는 13km, 높이 1m 전후, 너비 약 320cm이며, 내부 면적은 8,514,000m2(258만평)이
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 6개소, 적대 1개소, 치 3개소, 장대, 제사유적 등 많은 유구와 기와, 청자,
금속류 등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진성 (해남군)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있으며 총길이는 940m로, 동벽은 길이 350m, 아랫쪽 너비 390
㎝, 윗쪽 너비 130㎝, 높이 200∼270㎝이고 서벽은 길이 280m, 아래쪽 너비 6m, 위쪽 너비 4m, 높
이 430㎝로 거의 무너져 있다. 이진성은 정유재란 후인 1598년(선조 21)에 축성하여 1627년(인조
5) 만호진으로 승격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석축의 둘레 2.5km의 성지로 1648년(인조 26)에 이진수군만호를 두어 성을 축조하였고, 주
위에 바다 호수를 만들어 왜군이 침공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이진은 제주도 출입통제소이었으며 제
주도 군마와 사마를 수송하는 곳이기도 하다.
성의 축조 방법은 남·북의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성한 남북장축의 타원형 진성으로 성벽은 내탁법
에 의해 쌓았다. 성 안에는 이진마을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터는 마을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너비 3m
의 서문터에는 둘레 34m, 높이 5m, 너비 2.2m의 웅성이 원형 그대로 있다.
그 밖에 지금은 파괴되었으나 남문터에는 지름 10㎝, 18㎝의 홈이 패인 초석이 있다.
성벽 주위에서 백자편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척산성 (장성군)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유탕리 불대산 서쪽 기슭에 축성하였던 산성의 터이다.
성안에서 수습된 기와편, 토기편 등의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성되고, 조선 초기에 폐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헌에 ‘불대산 서쪽 기슭의 테뫼식 산성으로 돌로 쌓았으며 둘레 520척(약 156m), 높이 3척(약 1
m)이며, 성안에 우물 4개와 계곡 6개가 있는데 지금은 퇴락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돌로 쌓은 성이지만 현재 약 750m의 토루(土壘)가 잔존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축조 당시부터 토축
이었는지 아니면 석축이 무너지고 토축만 남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전체 길이 1,400m, 석축 길이 650m에 이르며, 동, 서, 북쪽에 성문터 3곳이 있다.
입암산성 (장성군)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총길이 약 15㎞, 높이 3m로 노령산
맥에 연하여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해발 687m고지로 기암단애가 많고 산세가 험
준하여 옛날부터 전략요새지로 알려진 곳이다.
산성의 형태는 상봉을 둘러싸듯 하였으며, 지금도 남문과 북문이 옛모습대로 남아 있다. 이 성은
고려 시대 몽고군이 이 곳 전라도에까지 쳐들어오자 1256년(고종 43) 3월에 송군비(宋君斐)가 이
성을 지키면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409년(태종 9)에 수축하고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1593년(선조 26)에, 역시 현감인 이유형(李惟
馨)이 1653년(효종 4)에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한편, 정유재란 때에 이 곳 성의
별장인 윤진(尹軫)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하였다.
성의 축성법은 협축(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음)으로 성벽 내외가 수
직에 가까우며, 넓은 계곡과 산세를 이용한 포곡식(包谷式)이다.
자미산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신촌리 영산강 유역에 펼쳐진 나주평야의 중심지에 있는 성으로,
전라남도의 백제 산성 가운데 대표적인 테뫼식 산성이다.
잣미라고도 불리는 자미산(해발고도 94.5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데, 낮게 발달한 구릉에 조
성되어 있지만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없어 중요한 요새가 될 수 있다.
북쪽으로 10km쯤 되는 곳에 나주회진성(羅州會津城:전남기념물 87)이 있고, 남쪽으로 월출산, 서
쪽으로 영산강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쪽은 넓은 평야를 건너 건지산 한치재와 덕룡산의 덕룡재를
연결한 크고 작은 구릉이 영암 국사봉으로 이어져 있어 대평원의 천연 요새를 이며 또한 이 지역은
영산강 유역과 남서해안 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삼별초의 주둔지로 알려져 있으며, 태봉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성은 말안장 모양의 산등성이에 흙으로 쌓고 돌로 보강하는 형식으로 축조되었는데, 둘레가 740m
정도이다. 성 안에는 300여 평 정도의 평평한 건물터와 용왕샘[龍王泉]이라는 샘터, 성문터 등이 있
다. 산성 주위에서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 외에 고려시대·조선시대 기와 조각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
어 조선시대까지 성곽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병영성 (강진군)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영성(營城)으로 설성(雪城),
혹은 세류성(細柳城)이라고도 한다.
1417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光山縣)에 있던 병영을 지금의 터인 당시 도강현(道康縣)
으로 옮기어, 당시의 병사 마천목(馬天牧)이 쌓았다고 하며,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
라 하였다.
1599년에 병영을 일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고,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폐허화되자 이듬해에 영을 폐지하였다.
특히 이 성에서는 1656년부터 1663년까지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다.
성벽은 둘레 1,060m이고, 높이가 약 3.5m로 남아 있으며,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
이다.
동서남북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문터, 그
리고 4개의 모서리와 동벽 및 서벽에 2개씩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서쪽에 두 곳의 배수구 시설이 있다.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다. 배후에는 해
발 561m의 수인산(修仁山)에 산성이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왜구가 달량진(達梁津)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元績)
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81
년까지에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다. 1894년 12월 4일에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10
일에는 병영성이 함락되었다.
전라우수영성 (해남군)
전라남도 무안 당곶포에 고려 말기 우왕 3년(1377)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 뒤, 조
선 세종 22년(1440)에 현 위치인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황원곶으로 이를 옮겼다. 세조 11년 (146
5)에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승격되었고, 성종 10년(1479) 전라남도 순천 내례포에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 이곳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이라 부르게 되었다.
처음의 영역은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의 크기이며, 석축의 둘레는 3,843척, 높이 11척, 연
못 3개소가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가며 쌓은 전라우수영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혼합형으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 형
태를 띄고 있다. 성벽을 쌓은 아래쪽의 돌은 150㎝ 이상이 되는 큰 것들이나 올라가면서 30∼50㎝
정도로 작아진다.
주성산성 (해남군)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노송리
죽산성 (해남군)
전라남도 해남군의 해남읍 구교리와 마산면 장촌리 사이의 금강산에 있는 산성이다. 금강산에 있
기 때문에 금강산성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해남)에 "금강산에 옛 성과 금강사(金剛寺)가 있다."는 간략한 내용이 있다.
산성의 둘레는 약 9㎞쯤 되는 매우 오래된 성인데, 수비대장을 담당하였던 승병 영주(靈珠) 스님이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흥산성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의 중흥산성은 산 전체가 천연적인 요새로 능선을 따라 흙을 쌓아
만든 토성(土城)이다. 성은 흙을 단순히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여 흙을 다져
서 쌓은 판축법의 토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4㎞ 정도이고, 성내 면적은 48만 8823㎡로 광양시의 산성 가운데 가장 크다.
6개의 산봉우리를 아우른 포곡형(包谷形) 산성인데, 외성 안쪽에 약 240m에 이르는 내성을 흙으
로 쌓은 2중성이다.
중흥사(中興寺) 입구 세심정에 남문, 옥룡면 추산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북문터가 남아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과 승병(僧兵)의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으며,의병과 승병의
연합군과 왜군간에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수습유물은 고려시대에 속하는 기와류가 대부분인데, 광양시의 대표적인 포곡형 토성으로서 고려
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진도읍성 (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에 있으며 원래 성곽의 형태는 구형(矩形)으로 서쪽의 성벽이 동쪽
보다 낮고 짧게 지어졌다.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도군편에 보면 성안에는 9개의 샘과 1개의 못이 있고, 남문
의 누각은 망해루(望海樓)이며, 객관(客館) 남쪽에 주변루(籌邊樓)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진도군 장흥진관편에는 석축이 2,400척, 높이 11척, 옹성 14개, 치첩
(雉堞) 58개이고, 성안의 연못 주위는 4,500척, 깊이 5척이며, 샘은 5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2∼3.5m로 군강공원 쪽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길이 약 1m, 폭 50㎝ 정도 되는 화
강암의 바깥면만 다듬어 수직벽으로 결구축석(結構築石)하였다. 성내리 69번지에 옹성지 3개소가
남아 있다. 220m 정도 길이의 북쪽 성벽은 진도중·고등학교와 군청, 진도초등학교 북쪽 부지의 외
곽을 두르고 있다. 현재도 2개소에 옹성지가 남아 있고, 50m 정도 길이의 군청 뒤쪽의 성벽은 석축
이 남아 있는데 높이가 1.8∼2m이다. 진도중·고등학교 뒤편의 성벽은 하단부만 남아 있는데, 높이
가 1∼1.2m이다. 서쪽의 성벽은 약 50m가 남아 있는데, 그 중 30m는 기단부만 있다. 남쪽 성벽은
거의 없어졌다. 진도읍성의 성곽을 지적도에서 복원해 보면 둘레가 총 1,755m로, 동쪽 440m, 서쪽
350m, 남쪽 485m, 북쪽 485m가 된다.
그리고 현재 군청이 있는 자리가 관영지(官營址)이며, 경찰서 자리는 객사라고 한다. 동·서·남문이
있었던 자리는 지적도에는 나와 있으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409년(태종 9)에 해남 원진(院津)으로 고을을 옮기면서 해진군(海珍郡)이 되었다가 28년 뒤인 1
437년에 환도(還島)가 허락되어 고군면 고성에 들어와 현재의 위치인 철마산 아래에 읍성을 신축한
것이다.
진월 신아리 보루 (광양시)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신아리 해발 170m 고지에 자리잡고 있고, 지도상에는 봉임산성(鳳任山
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성의 총 길이는 100m이고, 면적은 1,422㎡, 너비는 520㎝로 동서축으로 긴 타원형을 하고 있
다. 축조 시기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시기에 쌓았다는 설이 있으나, 산성의 형식
과 축조 기법으로 보아 백제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산 정상부의 일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고 성벽의 안팎을 모두 돌로 축성한 내외
협축식 산성이다. 다른 산성에 비해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내벽의 경우 남쪽 일부분이 허물어졌지만
9단의 석축이 확인된다.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1점 수습되었지만 명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철마산성(진도군)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의 진산으로 ‘북산(北山)’ 또는 ‘망적산(望敵山)’으로도 불리는 철마산(鐵馬
山, 304m)의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한 테뫼식 산성의 터이다.
1756년(영조 32) 김몽규(金夢奎)가 편찬한 진도군 읍지인 <옥주지 沃州誌> ‘산천조’에 ‘진도의 북
쪽 20리(2리의 오기로 보임) 지점의 산에 옛날 뇌산현(군) 때 산성을 쌓아 관방처(關防處; 국경을 지
키는 곳)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뇌산현(군)은 진도군 군내면의 통일신라시대 이름인 것으로 볼 때 철마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군
사적 목적으로 축성한 산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위치상 진도읍성을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지
로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마산 정상부는 대체로 분지형의 평탄한 대지를 이루고, 비탈 쪽은 암벽으로 된 급경사를 이루는
지형이어서 성곽 또한 대부분 암벽 사이에 보축하거나 암벽 상단에 2~3단만 축조되었다. 성 중앙에
건물지 1개소, 동북쪽 성벽에 치(雉;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기 위하여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
밀어 쌓은 돌출부) 1개소가 있다. 대부분의 성벽이 현재 무너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철옹산성 (화순군)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안성리, 북면 다곡리, 이서면 장학리·보산리에 있는 철옹산성은 해발 57
2.9m인 옹성산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길이는 5,400m
정도이다. 성벽은 해발 275∼550m 일대에 분포하고 축조방식은 협축법과 편축법을 사용하였고, 대
부분 석재와 암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철옹산성은 동복면과 북면을 경계짓는 지리적 요충지인 독재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유사시에 즉시
입성하여 방어나 역습 등의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형에 있는 전형적인 산성이다.
내부에 계곡을 포함하여 수량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의 노출도 방지해 줄 수
있는 구조로 유사시 상당수의 군사와 주민들이 농성할 수 있었던 곳이다.
동쪽 성벽은 능선과 암벽을 이용하였는데, 동북쪽 건물지 앞부분과 동문이 있는 곳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나머지 부분은 2개의 암봉을 이용하여 암벽 자체가 자연 성벽이 되도록 하였다.
남쪽 성벽은 능선과 절벽을 이용하여 가공한 자연석으로 9∼10단으로 쌓았는데 거의 수직으로 축
조하였다. 남문지 동쪽에는 거대한 암봉이 있어 천혜의 성벽이 되며, 남문지 서쪽으로는 능선 경사
면을 깎아내고 편축하거나 협축하였는데 능선의 굴곡을 따라 성벽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다.
서쪽 성벽은 옹성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자연지형을 이용하였는데, 이곳은 절벽으
로 형성되어 있어 특별한 성벽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다. 북벽으로 이어지는 서북쪽 모서리에는 석축
성벽 일부가 잘 남아 있다.
북쪽 성벽은 예성산 정상부의 평탄한 면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사면을 가파르게 깎아내고 1
0∼15단의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높이가 3m 정도이고 폭이 좁은 편이다. 옹성산에서 동쪽으
로 내려오면서 편축으로 이어지다가 잘록한 허리가 형성되어 있고, 거기서부터 다시 동쪽으로 올라
가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협축으로 축조하였다. 북벽 중간의 허리부분에서는 사방이 잘 내려
다보이는데 망루로 보이는 시설물이 남아 있다.
동북쪽 암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 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계곡을 차단하는 성벽이 있다. 이
차단벽은 동북쪽 암봉 사이의 계곡을 막은 1차적 방어시설로 높이 2m 정도인데 6∼7단으로 축조하
였다.
성 안에는 문지(門址) 시설이 남아 있다. 동문지는 동북쪽 암봉과 동남쪽 암봉을 연결하는 성벽의
중간으로서 해발 350m 지점이고, 남문지는 남벽과 동남쪽 암봉 사이에 있는데 해발 340m 지점이
다. 그 밖에 건물지 세 곳이 있는데 동북쪽 건물지의 중앙에 우물이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회청색
경질 기와편과 회청색 경질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태강현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 당곡마을 앞의 중뫼산 7~8부 능선상에 있는 백제 때 축성된 것으
로 추정되는 테뫼식 산성(山城) 터이다. 흙과 잡석을 섞어 쌓은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성벽
외벽의 하단부에 높이 25㎝정도의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이는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축성기법이다.
현재 성벽은 거의 파괴되었지만 동벽의 윤곽은 확실하게 남아 있다. 동벽은 길이 200m, 서벽은 길
이 120m, 높이 1.1∼2m이다. 북벽과 남벽은 파괴가 심하여 거의 윤곽을 확인할 수 없으며, 수습된
유물도 없다. 각종 지지류(地志類)에 적힌 기록과 <호남지 湖南誌>의 태강산성(泰江山城)에 대한 기
록 등을 통해 이곳이 태강현성지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흥군 동강면 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비사현(比史縣)에 속해 있던 지역이고, 신라 경덕왕 16
년(757) 백주현(柏舟縣)으로 이름을 바꾸어 낙안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태강
현(泰江縣)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현종 9년(1018) 보성군에 내속되었으며 조선 세종 23년(1443)
2월 흥양현(興陽縣)에 편입되었다.
합미산성 (구례군)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신학리 하신마을 뒷산인 성재산(200m)에 있는 테뫼식 산성(머리띠를 두
르 듯 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산성)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신유산성(辛有山城) 또는 합미산성(合米山城)이라 부른다. 산 정상과
중복에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 약 300간이며 기와편이 산재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할미성이라고 부른다.
성 안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편 등의 유물과 남쪽으로 약 2.5㎞ 떨어진 이평리 평산마을의 석실
분 등으로 볼 때 삼국시대에 초축된 후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산성으로 보인다. 산성 둘레는 약 380
m이며, 평면은 남북 장축의 타원형, 단면은 전체적으로 사다리꼴을 이룬다.
현재 남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었는데 남벽의 경우 바깥쪽 성벽은 55~65×25㎝ 크기
의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수평을 유지하면서 쌓았고, 그 안쪽은 잡석으로 채운 뒤 흙을 덮었다. 4
5×30m 크기의 건물지(建物址)와 12×12m의 건물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회진산성 (나주시)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 사직골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해발 159.2m의 거마산(擧馬
山)을 ‘금생이재’라 하는데, 이곳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과 동쪽으로 123.6m의 봉우리를 거쳐 서남향
한 능선을 둘러 포곡식(包谷式 :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의 토루를 두르고 있다. 성벽의 둘레
는 남북으로 긴 타원형 평면에 2.4km나 되며, 남쪽은 평지를 가로질러 축조되었다.
성안에 사직제가 있고, 성 밖의 남쪽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성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붕괴되었으나 윤곽이 뚜렷하며, 영산강 유역에서는 이 성이 최대의 고대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과 1994년에 남벽과 남문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남벽은 판축(版築)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의 기저부 안쪽에는 2단의 석렬(石列)이 마련되었는데,
1단은 성벽의 방향과 석재의 방향이 직교하고, 2단은 성벽 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성벽은 영정주(永
定柱)를 3.3∼3.8m의 간격으로 세우고 구획된 구간을 마련하여 축조하였다.
그리고 영정주의 옆에도 별도의 버팀기둥 구멍이 있으며, 8∼20cm의 두께로 판축된 성벽은 높이
4.6m, 너비 6m나 된다.
남문터는 남벽의 서단에 있는데, 개구부(開口部)의 너비 8.5m, 초석의 너비 5.6m, 길이 5.6m의 구
조이며, 2.8m 너비의 초석이 있다. 중간 초석에는 지름 22cm, 깊이 16cm의 문짝 지탱기둥을 받는
축수공(軸受孔)과 길이 42cm, 너비 15cm, 깊이 8cm의 장방형 문설주 기둥 홈이 있다.
문구(門口)와 개구(開口) 사이는 석축을 하였으나, 측벽은 정연하지 못하고, 성안 남문 동측에서는
석축한 외연의 안에 토축한 동서길이 11m, 너비 4.2m의 문돈(門墩)이 있었다. 성안에 고인돌이 있
고, 외부에는 석실분이 있어서, 이미 청동기시대부터의 유적지에 백제 후기에 토성을 축조하여 사용
한 것으로 추측되는 유물들이 수습되고 있다.
흥양현읍성 (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이 성은 조선시대 흥양현의 읍성으로 1395년(태조 4)에 왜구의 침
입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원래는 여장(女墻), 옹성(甕城), 곡성(曲城)을 갖춘 것이었으나 많이 퇴
락되었고 현존하는 성벽은 조선 후기에 수축(修築)된 것이다.
배후의 추월산과 구릉을 연결하여 축성된 평산성(平山城)으로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읍성 형식이
다. 성벽의 축성 방법을 보면, 먼저 지표면을 고른 후 그 위에 1단의 판석형 석재를 놓고 15~20㎝
뒤로 물러나 2단부터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을 섞어 쌓았고 하
단은 1m가 넘는 대형 석재로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소형 석재를 이용하였다. 현재는 하중 때문인지
외벽쪽으로 배가 부른 형태이다.
현재 성벽과 치성 3개소, 홍교 2개소가 남아 있고 세개의 문지(門址)도 확인되었다. 성벽은 옥상마
을에 있는 읍성의 북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데, 크기는 높이 5.7m, 너비 4m이다. 치성은 서북우
에서 북문지 사이의 중간부분에 한 개, 동북우에 한 개, 동벽 중간에 한 개가 남아 있는데 대략 직경
7m, 높이 3.15m 정도 규모로 사각형이다.
홍교는 교량식 홍교로서 서벽과 남벽에 각각 한 개씩 남아 있다. 이 홍교는 흥양읍성의 서벽으로부
터 흘러 들어온 개천물이 남벽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설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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