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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에서 깨어난 나라 라오스 (2008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인도차이나반도 시차 : -2시간차
수도 : 비엔티안 언어 : 라오스어 화폐 : 키프(LAK)
인구 : 6,834,345명 (2010), 전체 순위 102위
면적 : 236,800㎢, 전체 순위 84위 기후 : 열대몬순성기후
종교 : 불교 67%, 정령신앙 33%
종족 : 라오룸족 68%, 라오퉁족 22%, 흐몽족
정체 : 중앙집권인민공화제 의회형태 : 일당제&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총리
정식 이름은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며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의 내륙국이다. 북서쪽에는 미얀마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에는 베트남, 남쪽은 캄보디아, 서쪽은 타이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1893년, 비엔티안왕국, 루앙프라방왕국, 참파싹왕국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연합되었다. 1945년, 일본군의 점령 후 잠시 독립했다가, 1949년 다시 프랑스의 통치를 받다가 1954년에 입헌군주국인 라오스왕국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 후 내전이 일어나서 1975년에 공산주의 단체인 파테트 라오에 의해 공산국가가 설립되어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은둔의 나라를 향해서
이른 아침시간 반가운 얼굴들이 공항에 모여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회원은 새벽 4시에 출발했다고 한다. 4시간 반의 비행 끝에 하노이 노이바이(Noi Bai) 국제공항에 내렸다. 환승수속을 밟은 후 약간의 휴식시간을 갖은 다음에 다시 라오스 비엔티안으로 가는 소형 프로펠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여의 비행이었지만 국제선의 연결이라 빵으로 된 간단한 기내식이 나왔다. 라오스의 국경에 접어드니 험준한 산악 지역이 아래로 펼쳐졌다. 비엔티안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국제공항이라고 하지만 한산했다. 공항출국장으로 이동하면서 우리가 타고 왔던 비행기를 내려다보니 비행기가 너무나도 아담하고 귀여웠다. 모두들 아담한 비행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 조용한 라오스공항, 타고온 50인승 여객기
입국비자를 공항에서 내야하기 때문에 출국시간이 좀 길어졌다. 공항청사를 나오니 그곳의 안내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대면이지만 반가웠다. 인사를 하고 이름을 물으니 상가(Sang-ga)라고 했다. 비엔티안은 동양과 서양이 혼합되어 있는 조용한 도시였다. 란상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라오스 전통가무가 공연되는 가운데 저녁식사를 했다. 이색적인 분위기가 새로웠으며, 식사가 끝날 무렵 무대에서 아리랑이 연주되면서 우리 일행은 외국에서 조국의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 극장식 레스토랑 ▲ 라오스의 불교문화
메콩강변의 야경 속에서
여행은 추억이 엮어지는 순간이다. 메콩강변의 불빛이 찬란한 가운데 강변의 곳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밤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었다. 우리도 강변에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모두들 일상에 지쳤던 모습들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속세를 벗어난 듯 순박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끌어갔다. 세상의 이런 일 저런 일 화제는 끝없이 이어졌다.
여행은 인간을 성숙시키고 삶의 보람을 배가 시켜줌이 실감되었다. 속세를 벗어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생각을 숨김없이 주고받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동서가 혼합된 불교의 도시 비엔티안(Vientiane)
비엔티안의 아침은 고요할 정도로 조용했다. 사람들이 아침공기를 마시며 메콩강변을 산책하고 있었다. 호텔 체크아웃을 끝내고 시내탐방의 시작으로 왓시사케사원으로 갔다. 이 사원은 샴족의 침입으로부터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존 된 사원이며, 사원 안에는 6840개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보존되어 있다.
다음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와 프라오케사원으로 갔다. 이곳은 왕의 개인 사원이었으며 지금도 스님들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원 바로 옆에 대통령궁이 있는데 삼엄한 경비도 없고 경내가 외부에서도 볼 수 있게 되어있었다. ‘와 프라오케’ 사원을 나와 버스로 이동해서 비엔티안에서 가장 아름운 '타트루앙'사원으로 갔다. 이곳은 부처의 가슴뼈를 담고 있다고 전해오는 탑이 있어서 더욱 유명했다. 이곳의 탑들은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강열함과 단순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라오스식 예술의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했다. 라오스의 사원들은 정교함과 은은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 비엔티앙 거리에서
다음의 행선지는 '프라투싸이 모뉴먼트'라는 독립기념탑이다. 이 기념탑은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한 탑으로 ‘비엔치안’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승리의 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탑의 안을 살펴보면서 꼭대기에 올라가니 ‘비엔치안’시내가 모두 내려다 보였다. ‘비엔치안’ 시내 거리는 붐비지 않았고,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와 택시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는 세발자동차 ‘톡톡’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 독립기념탑 앞에서 ▲ 독립기념탑 위에서
절경을 찾아 방비엥(Vang Vieng)으로,
라오스의 절경 방비엥까지는 3시간정도 예상되어서 열대과일을 사서 버스에 실고 방비엥으로 향했다. 방비엥으로 향하는 길은 산길의 연속이었다. 산길을 한참동안 달리다가 중간지점 쯤에서 차를 멈췄다. 특별히 쉴만한 곳이 없어서 길옆의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간 과일을 시식했다. 원산지의 열대과일이라 맛이 좋았다.
오후의 햇살이 산간에 내리기 시작할 무렵 특이한 산봉우리들이 가까워졌다. ‘방비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거리를 달려온 버스도 이제 쉬어야 할 때쯤에 한적한 시골 마을에 다다랐다. 동네 옆 길쭉한 광장은 지난날 군용비행기가 내려앉은 간이비행장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곳이 군사 요충지인 것 같았다.
남송강변에 있는 엘리펀트크로싱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모두들 그림 같이 펼쳐진 경치에 매료되어 밖으로 나왔다. 호텔 앞 강변 쪽에 마련된 식당에서 자연의 숨결을 곁들이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라오스 음식이 우리의 취향에 맞아서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었다. 라오비어(Lao Beer)라는 이곳의 맥주는 순하면서도 그 맛이 일품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아쉬워서 저녁식사 후 우리는 모두 동네로 나갔다. 동네의 밤 풍경은 낮과는 사뭇 달랐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이 온통 네온의 도시로 변했다. 가게마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식당, 카페, 기념품가게, 맛사지 가게 등등... 우리도 그 분위기에 빠져보았다.
▲ 방비엥 절경 ▲ 남송강의 카약킹
남송강(Nam Song River)에서 카약 래프팅
가슴 속 깊이 스며드는 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면서 눈을 떴다. 아침 햇빛을 받은 방비엥의 절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스케쥴을 조정해서 남송강을 따라 카약 래프팅을 하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버스로 남송강 상류로 향했다.
상류의 카약 출발지점에 도착한 우리는 2인 일조가 되어 카약에 올랐다. 급류와 완류가 교차되어 흘러내리고 있는 남송강을 따라 각자의 기량을 펼치면서 절경에 심취했다. 완류에서는 자연을 노래하며 카약을 젖다가도 바위 암초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급류지역을 지날 때면 잔뜩 긴장을 하기도 했다.
▲ 소계림 방비엥 남송강변에서
고도(古都) 루앙푸라방(Luang Prabang)으로
카약타기가 끝난 후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고도 ‘루앙푸라방’을 향해서 떠났다. 이제부터는 험준한 산악 길을 약 5시간 정도 가야하는 좀 긴 여정이었다. 열대과일을 넉넉히 사서 차에다 실었다. 가는 도중에 두 번은 쉬어야만 할 거리로 생각되었다.
정겨운 마을 방비엥, 아쉬운 마음을 안고 정감이 넘치는 동네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동네를 빠져나와 북쪽을 향해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은 험준한 산악 길이지만 포장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산간의 절경을 음미하면서 한 동안 달리다가 식당이 있는 ‘카시’라는 산간 마을에 들려 점심식사를 했다. 산악으로 접어들수록 눈앞에 드리워지는 절경은 먼 길의 피곤함을 덜어주었다. 고산지역을 접어들면서 날씨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가량비가 시작하면서 짙은 안개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는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할 때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가는 운전기사가 고마웠다.
심산의 구비마다 고산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가 1,500m 고지의 삼거리 고산마을 포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장이 제법 풍성하게 형성되어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교통의 요지 역할을 하는 곳 같았다. 시장 구경을 하면서 잠시 쉬었다가 여정을 계속했다. 곳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산족 마을 앞에는 그들대로의 삶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고, 마을 앞 공동 수도 앞에는 동네 여인들이 윗몸을 들어내고 목욕을 하고 있었다.
차가 하산 길로 접어들면서 날씨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해가 서산 쪽으로 자리를 옮길 무렵 목적지 루앙푸라방에 도착했다. 고도(古都)의 모습은 순박하면서도 엄숙해 보여다. 날씨가 고르지 못한 탓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날 루앙프라방으로 오는 항공기는 모두 회항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곳에 와서 들었다. 예약해둔 왕사와트호텔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호텔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아늑했고 주인과 종업원들은 친절했다. 여장을 풀고 시내의 고풍어린 식당으로 이동해서 저녁식사를 했다.
▲산간마을에서 잠시 휴식 ▲ 메콩강을 따라 상류로
메콩강을 거슬러 파코우(Pakou)동굴로
새벽 일찍 일어나서 거리의 모습을 살피면서 새벽시장으로 갔다. 삶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가지고 왔다. 오늘은 메콩강 주변의 전원풍경과 강가의 석회암산에 형성된 천연동굴 파코우 동굴을 탐사하려 가는 날이다. 모두들 산뜻한 기분으로 메콩강 선착장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기다란 모터보트에 몸을 싣고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라오스의 시골풍경을 음미했다. 강바람이 제법 차가왔다. 강의 양안에 펼쳐지는 시골의 풍경은 조용했고, 간간이 강에서 수영하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며 재롱을 부렸다. 강에 인접한 비탈진 곳에 채소밭이 많았다. 아마도 건기에 물을 공급하기가 쉬워서인 것 같았다.
모터보트는 간간이 나타나는 돌무덤 암초들을 비껴가면서 한참동안을 달렸다. 첫 번째 기착지에 잠시 배를 멈추었다. 토속주와 수제 직물의 생산지인 반상하이마을에 들렸다. 민속토속주를 맛보고 동네 안으로 들어가니 수제 직물가게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일행 모두들 특색 있는 직조물에 관심이 있는지 이것저것 쇼핑을 했다. 마당에 좌판을 차려놓고 기념품을 파는 아이들한테로 자꾸 눈길이 갔다.
▲ 반상하이(Ban Xanghai) 직조 장 ▲ 반상하이 어린이 좌판대
마을 방문을 끝내고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에 접해있는 석회암 산 하단에 파코우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에 들리기 전에 먼저 건너편 강변에 배를 대고 높은 기둥으로 받혀 있는 식당으로 올라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라오비어(Lao Beer)를 곁들인 점심식사는 일품이었다. 점심 후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서 동굴 아래에 배를 정박시켰다.
동굴은 두 개가 있었다. 강변에 접해 있는 동굴 안에는 큰 불상의 주변에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작은 불상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강변의 동굴을 나와서 숨을 몰아쉬며 다시 계단을 한 동안 올라가니 산 중턱에 커다란 동굴이 나왔다. 내부가 컴컴해서 입구에서 손전등을 빌려주고 있었다.
▲ 메콩강변의 식당 ▲ Pakou 동굴 부처들
돌아올 때에는 메콩강 물길을 따라서 하류로 내려오니 조금은 빨리 왔다. 그리고 내일의 일정에 좀 여유를 갖기 위해서 내일 일정에 잡혀있는 시내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포시 언덕(Phousi Hill)에 올랐다. 정상에는 사리탑이 있고 중턱에는 최근에 축조한 입상 부처와 와불상이 있었다. 300개 이상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니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우정을 다지면서
저녁에는 호텔의 식당에서 친교 모임을 가졌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를 도와주고 또 이해해주는 마음들이 이국의 별빛 아래서 영롱하게 엮어지는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인연이 추억의 강물이 되어 흘렀다.
▲ 포시언덕 불상들 ▲ 딱빨 공양의식
루앙프라방 시내탐방
오늘은 라오스 탐방 마지막 날이다. 아쉬움을 안으면서 마지막 날 투어에 들어갔다. 새벽에는 특별한 스케쥴이 있었다. 새벽 6시에 시작되는 ‘딱빨’공양 의식을 보러가기 위해서 5시 30분에 모두들 로비에 모였다. 마침 그곳으로 떠나는 버스가 있기에 함께 가기로 교섭을 했다. 버스로 한 동안 가니 ‘딱빨’이 행해지는 곳에 다다랐다. 조금 있으니 관광객들이 차를 타고 밀려들었다. 우리는 먼저 자리를 잡고 ‘딱빨’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6시가 지나고 날이 밝아오니 오렌지색 승복을 입은 스님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우리 일행도 공양음식을 준비해서 “딱빨‘에 참여했다.
모두들 특별한 체험에 만족했다. 아침식사 후 체크아웃을 하고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옛날에는 왕궁이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이 된 곳이다. 내부는 화려했고, 주로 옛날 왕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와트암사원과 와트신사원에 들러서 라오스의 사찰 문화를 음미해 보았다.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 중 하나인 와트시엥롱사원으로 갔다. 가장 세련된 라오스식 종교건축물로서 ‘황금도시의 사원’으로 불러지고 있다. 사찰의 벽이 옥돌을 박은 듯 아름답게 무늬가 놓아져 있었다. 이곳은 왕의 부속 사원으로 왕의 장례식에 사용되던 수레가 보관되어 있었다.
다음 코스로 와트마이사원으로 갔다.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사원의 모습이 특이했다. 전통적인 루앙푸라방식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구정(舊正)에는 소원을 비는 행사가 거행된다고 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말에 관심이 많은 청년스님을 만났는데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다.
마지막 코스로 왓비순사원으로 갔다. 이곳은 부처의 사리탑이 있는 사원이라고 했다. 커다란 원형탑이 검게 그을린 채 메콩강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라오스를 떠나면서
라오스의 사찰 탐방을 마치고 라오스에서 마지막 식사인 점심을 먹으려 식당으로 갔다.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공항이 멀지 않아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다. 애띤 소녀가 미소를 지으면서 떠남을 아쉬워했다. 5일간을 함께 해준 안내자 Mr. Sang-ga 와 운전기사 Mr. Sit이 고마웠다.
▲ 와트마이 사원 ▲ 라오스 소녀
멕시코(Mexico) 아즈텍 문명 (2013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아메리카 남서단 시차 : -14시간차
수도 : 멕시코시티 언어 : 에스파냐어
인구 : 111,211,789명 (2010), 전체 순위 11위
면적 : 1,964,375㎢, 전체 순위 15위
기후 : 건조성기후, 열대성기후, 온대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89%, 개신교 6%
종족 : 메스티소 60%, 아메리카 원주민 30%, 백인
정체 : 연방공화제 의회형태 ; 양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화폐단위 : 멕시코페소(Mexican Peso/Mex$)
공식 이름은 멕시코합중국이며 Méjico라고도 쓴다. 북쪽은 미국, 남동쪽은 벨리즈·과테말라, 동쪽으로는 멕시코 만, 카리브 해와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태평양과 접한다.
멕시코의 경제는 농업과 제조업, 석유 및 천연가스 등에 기반을 둔 혼합경제이다. 멕시코는 은, 비스무트, 천청석의 세계 최대 주산지이며,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 가스가 매장되어 있다.
1526년 스페인 총독의 관할령에 편입되었다. 1821년 반란군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협상을 벌였고, 1823년에는 새 의회가 공화국을 선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병합할 것을 결의하여 멕시코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에 의해, 현재 미국 서부와 남서부가 된 광대한 영토를 양도했다.
멕시코 칸쿤으로
멕시코 탐방은 세계적 휴양지 칸쿤에서 시작했다. 칸쿤은 세계적인 휴양도시답게 해변의 경치와 도시의 풍광이 뛰어났다. 칸쿤의 뜻은 뱀의 둥지라고 했다. 해변에 접해있는 파크로이알호텔에 여장을 풀고 24시간 무한 서비스가 가능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호텔의 분위기가 편안해서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밀려드는 파도를 헤치고 카리브해로 뛰어 들었다.
저녁에는 카리브해의 바닷바람을 쐬면서 해변을 걸으며 여독을 풀었다. 이곳 칸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치첸이사’라는 불가사의의 아즈텍 문화유산이 있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 Park Royal Hotel ▲ 카리브 바다에서
멕시코의 휴양지 칸쿤에서 일박을 하고 우리는 불가사의 유적이 있는 마야의 최대 유적지인 ‘치첸 이사’ 탐사를 떠났다. ‘치첸 이사’의 뜻은 우물가에 사는 종족이란 뜻이라고 했다. 차량으로 2시간 30분을 이동해서 ‘치첸 이사’에 도착했다.
‘치첸 이사’는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아즈텍 피라미드이다. 마야의 역법으로 건축한 이 피라미드는 절기에 맞추어 태양의 그림자로 신비한 형상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비의 신 쟈크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쳤던 ‘세노떼’ 신전, 전사의 신전, 천문관측소 등을 답사했다. 세노떼신전의 맨 위의 중앙에 인간을 제물로 바쳤던 제단이 조그맣게 보였다. 천문학, 태양력, 수학에 의해 엄밀하게 계산되어 축조된 이 ‘치첸 이사’ 건축물에는 일 년 중 어김없이 3월 21일에 태양의 그림자가 뱀의 형상을 그려내는 신비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 날은 농경에 중요한 날로서 곡식의 씨앗을 뿌리는 날이라고 했다. 이날이 되면 세계 도처에서 고고학자들이 몰려온다고 했다.
치첸 이사 답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멕시코시티로 향했다. 국내선 비행기로 2시간 11분을 날아서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 불가사의 치첸이사 피라믿 ▲ 태양신에 제물을 바치던 제단
멕시코시티(Mexico City)
멕시코시티에서 맞는 아침은 청량했다. 고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에 기후가 일 년에 건기와 우기가 반반이라고 했다. 일상의 기온은 우리나라의 초가을과 비슷해서 살기에 좋은 조건이라고 했다. 시티투어의 첫 코스로 ‘쏘칼로’광장으로 갔다. 광장을 중심으로 둘레에는 찬란했던 ‘아즈텍’문명의 흔적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베사아르떼스’ 오페라하우스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서 과거에 대통령궁이었던 곳으로 갔다.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전시된 그림으로 아즈텍문명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발달된 의술, 농산물 생산문화, 염색문화, 금은세공문화, 음식문화, 술 문화 등이 생생하게 그림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찬란했던 아즈텍문화는 스페인의 정복에 의해서 마감되었다. 금은보화는 모두 녹여서 스페인으로 가져가고, 원래의 주민들은 노예생활로 전락했다. 그래서 아즈텍문명의 유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1810년에 독립이 되고, 1857년에 ‘인디오’인 ‘메니또 후아레스’가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멕시코의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고 한다. ‘메니또 후아레스’ 대통령은 지금까지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멕시코 인디오대통령이라고 한다. 독립은 1810년에 되었지만 1857년에 헌법이 제정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 ‘베사아르떼스’ 오페라하우스 ▲ 과달루뻬 성당
다음 코스는 바티칸이 인정한 세계3대 기적의 성당인 ‘과달루뻬’성당으로 갔다. 이곳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發現)한 성당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많은 관광객들이 성모마리아가 발현했던 모습을 보기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시내를 탐방한 후 이어서 아즈텍문명의 생생한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떼오티와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떼오티와칸‘ 문명중에서 최대의 건축물이고 세계에서 세 번째 크기인 해의 피라믿과 종교의례를 행했던 달의 피라믿이 있다. 아즈텍문명에서는 인간의 심장을 태양신에 제물로 바치기 때문에 전쟁포로들은 대부분 신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떼오티와칸’으로 행하는 길옆의 산비탈에는 멕시코 빈민촌이 계속 이어졌다. 집들의 벽이 모두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떼오티와칸’에 도착하니 우뚝 솟은 피라미드의 위용이 주변을 제압했다. 거대한 해의 피라미드는 가로가 265m 높이가 71m 계단이 252계단으로 되어있고, 외형은 4개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는 세계 3번째이지만 부피는 제 1이라고 했다.
▲ 달의 신전 제단 ▲ 해의 피라미드
멕시코시티는 거대한 현대식 도시였다. 멕시코시티의 첫 인상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멕시코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었다. 멕시코는 올림픽을 두 번이나 개최했고, 월드컵을 벌써 예전에 치룬 나라였다. 이번 문화탐방에서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멕시코에 대해서 많은 것을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아즈텍문명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멕시코는 발전가능성이 큰 나라다. 풍부한 자원, 특히 많은 석유매장량은 이 나라를 부국의 반열에 오려 놓았다. 이 나라 국민들은 심한 빈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걱정이 없다고 했다. 넓은 국토에 풍요한 자원 때문에 빈부의 차이는 있어도 빈곤층의 불평불만이 없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빈부의 차이가 심해서 상위 10%, 하위 90%로 구성되어 있다. 상위 10% 중에서 세계적인 갑부가 많아서 세계 갑부 10명 중 3명이 멕시코에 있다고 한다.
엄청난 저력의 바탕 위에서도 크게 나타내지 않으려는 그들의 겸손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경쟁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그들의 인생관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었다.
과테말라 마야문명 (2002년)
* 여행 팁
국기 ;
위치 : 중앙아메리카 시차 : -15시간차
수도 : 과테말라시티 화폐 : 케찰(GTQ) 언어 : 에스파냐어
인구 : 13,276,517명 (2010), 6전체 순위 9위
면적 : 108,889㎢, 전체 순위 107위 기후 : 사바나기후, 열대성기후
종교 ; 로마가톨릭, 토착종교, 개신교
종족 : 메스티소 및 유럽인 59%, 키케족 9%, 카키켈족
정체 : 공화제 의회형태 : 단원제
국가원수 : 대통령 정부수반 : 대통령
공식 이름은 과테말라 공화국이다.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과 서쪽은 멕시코와, 동쪽은 벨리즈, 카리브 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남쪽은 240km 길이의 해안선이 태평양과 접해 있다. 과테말라는 마야(Maya)문명의 중심지이다. 산간호수와 수많은 화산이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경관의 나라이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1985년 민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오랜 권위주의적 지배와 군사정권의 통치를 겪었다. 강력한 게릴라 저항과 독재와 쿠데타가 반복되어 왔고, 좌·우 게릴라의 대결이 격렬하여 정치적 불안을 겪은 후 1996년에 평화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으며, 커피 재배로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기후로 태평양안의 저지대는 강수량이 풍부하고,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사바나기후다.
마야문명의 본산으로
여름의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야문명의 중심지 과테말라로 향했다. 과테말라는 여행지로서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어서 모두들 기대를 안고 머나먼 여정을 시작했다.
오후 1시 반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의 도쿄와 미국의 달라스를 경유하여 과테말라의 수도인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한 시간은, 하루가 지났어도 날자변경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같은 날 오후 7시 40분이었다. 태평양 상공에서 날자 변경선을 넘어 밤이 없이 장장 20여시간의 비행이었다. 어둠이 찾아드는 중앙아메리카의 중심도시 과테말라시티, 전통과 현대가 혼재해 있는 과테말라시티는 멀리서 찾아온 이방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고고학의 유적지 데모크라시아
날이 밝아오자 모두들 시차에 의한 피로도 거뜬히 이겨내면서 마야문명의 본산인 과테말라 문화탐방을 시작했다. 첫날은 고고학의 유적지인 ‘라 데모크라시아’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활동 중인 화산들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신비스러운 장관을 보기도 했다. 하얀 연기를 내뿜는 산봉우리에서 갑자기 시커먼 연기 덩어리가 솟아오를 때에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시골의 시장거리에 들려서 원주민들의 소박한 인심을 체험해 보았다. 순진한 미소 속의 따뜻함은 인간 본연의 마음을 느끼게 했다.
목적지인 데모크라시아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이 조용한 시골 마을은 커다란 돌에 인간의 얼굴을 새긴 돌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는 고고학의 유적지였다. 인류의 기원과 관련된 인간 얼굴의 돌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인류의 역사를 머금고 있는 듯 했다.
▲ 과테말라시티 거리 ▲ 데모크라시아 유적지
인디오의 마을 '치치카스테낭고'
둘째 날에는 아침 일찍 과테말라의 대표적인 전통도시 '치치카스테낭고'로 향했다. 험준한 산악을 관통하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를 타고 2000m 이상의 고지를 오르내리면서 아름다운 주변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달려갔다. 이 도시의 이름인 '치치카스테낭고'는 이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바늘나무(needdle plant)의 원주민(인디오) 언어라고 했다. 이 전통도시에서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가 있었다. 길가의 건물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시장에 진열되어있는 물건들, 이 모두에서 원주민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형형색색의 원색의 물품들로 가득한 다양한 전통시장과, 원주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산토토마스교회 등에서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전통문화를 보존해 온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전통시장에서의 이색적인 토산품들을 구경하며 쇼핑하는 재미도 과테말라 방문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행상인들을 뿌리치고 차에 올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산호수인 '아티트란'호반에 자리 잡고 있는 '파나하첼'로 향했다.
▲ 파나하첼,로 가는 길에
아티트란호반의 파나하첼
오후의 햇살을 받으면서 3000m 이상의 고산지대를 한동안 오르내리니, 눈앞에 거대한 화산 분화구 호수가 주변에 몇 개의 작은 분화구 호수를 거느리고 있는 아름다운 칼데라(Caldera)호수가 나타났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자부할만한 장관이 펼쳐졌다. 호수의 한 쪽 옆에 그림같이 내려다보이는 호반의 도시 파나하첼은 마치 이상향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파나하첼'로 내려가서 호수옆에 위치한 방갈로식의 아늑한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의 포근한 분위기는 지금도 과테마라 마야문명 탐방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있다.
포근한 숙소에서 밤을 지내고 나뭇잎들이 햇볕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의 여정은 아침의 맑은 공기 속에서 아름다운 '아티트란' 호수의 파도를 가르는 항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발 1800m의 장엄한 호수의 푸른 물결을 가르면서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산티아고'라는 원주민 마을로 향했다. 원주민들의 생활에 접해보기 위해서였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를 항해했다. 아름다운 칼데라호수, 아티트란호의 항해는 과테마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관의 체험이었다.
▲ 호수 건너편 원주민 마을로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간 원주민의 마을 '산티아고', 그러나 그들의 생활환경을 보는 순간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현대식 건축양식을 닮아가고 있는 건축물들, 길가에는 관광용 상품가게들이 전통마을의 흔적들은 지워가고 있었다. 순박한 그들의 생활권에 현대문명이 무법자처럼 파고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왠지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면서 그래도 기대를 가지고 마을의 뒤쪽으로 밀려나버린 원주민들의 주거지역으로 갔다.
▲ 베를 짜는 소녀들 ▲ 어느 초등학교 교실
원주민들의 주거지역을 돌아보면서 가슴에 파고드는 허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향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마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그들의 전통방법의 베 짜는 모습도 보면서 티 없이 맑은 소녀들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이곳의 교육현장을 살펴보면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주소까지 받아 온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사진은 주소가 정확치 못해 사진을 보내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빚을 진 마음으로 남아있다. 산티아고 마을을 떠나오면서도 현대문명에 밀려서 전통문화를 잃어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안티구와 과테말라(Antigua Guatemala)
파나하첼로 돌아온 후 우리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다음의 탐방지인 ‘안티구와 과테말라’로 향했다. 이 도시는 무한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인류문화유산의 유적지이다. 시가지는 스페인 식민시대의 건축물이 옛날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길바닥을 돌로 깔아서 길 가운데를 낮게 비탈지게 하여 물매를 만들어 놓은 옛날의 도로가 보존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었다. 시가지의 전체는 옛날에 구획된 시가지의 모습을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로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세심한 생활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고색이 창연한 이곳 안티구와의 거리를 걸으니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날아온 느낌이 들었다. 규모 있게 짜인 시가지의 곳곳에는 공원을 겸한 광장들이 있었고, 도시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성당들은 지나간 날들의 역사를 말해주며 고고하게 서있었다.
저녁에는 서양 영화에서나 본 듯한 과테마라 전통식당으로 갔다. 우리는 전통음식을 시식하면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이국의 밤 분위기에 젖어보았다. 숙소는 전통가옥의 커다란 목조 대문이 호텔의 정문이 되어 있는 고전적 스타일의 호텔이었다. 이러한 호텔에서 숙박을 하니 전통도시에 머물고 있음을 실감케 해주었다.
먼동이 터 옴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하루의 시작을 재촉했다. 아침의 해맑은 햇살을 받으면서 서둘러 안티구와 탐방에 나섰다. 외벽만 남아있는 식민시대의 교회 잔해는 식민시대의 인디오들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안티구와의 교외에 위치한 카사코잠 박물관에는 과테마라의 전통음악과 민속을 엿볼 수 있는 값진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어서, 이곳의 전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틈을 내서 이곳의 보석공장과 커피농장을 방문했다. 안티구와에서의 보석공장과 커피농장의 방문은 이 나라의 산업의 정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 내일의 일정인 마야문명의 진수 티칼(Tikal)의 방문을 위해 서둘러 과테마라시티로 향했다.
▲ 마야 유적지 ▲ 마야 피라미드
'티칼(Tikal)'의 마야문명 유산
이른 아침, 아침식사로 도시락을 챙겨들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한 시간여의 비행 후에 과테마라 북부의 밀림지역에 위치한 '프로레스'의 '산타 에레나' 공항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티칼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한적한 시골 도로를 따라 한 시간정도 달리니 마야문명의 진수를 보존하고 있는 티칼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삼천여개 이상의 마야문명 유산들이 밀림 속에서 산재해 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마야문명의 숨결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붙잡아 매었다. 아! 이것이 마야문명이구나! 문명의 신비스러움에 도취되어 신이 들린 듯이 종종 걸음으로 하늘로 치솟은 사원과 제단들을 오르내리는 동안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왔다. 거대함, 정교함, 신비감이 어우러져 있는 마야 문명, 하늘을 향해서, 태양을 향해서 기원했을 마야인들의 함성이 귓전에 와 닿는 듯했다. 이 엄청난 문명! 한 부분을 일별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우리의 일정을 아쉬워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끌며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가 있는 '프로레스'로 돌아왔다. 숙소 정원의 꽃들이 유적지 탐방에 지친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었다.
마야문명 발굴 현장으로
마야문명의 마력에 끌려서, 탐방의 마지막 날에는 마야문명의 생생한 발굴현장인 '야시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대성 '스콜'이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야시하'로 향하는 도중 간간히 차창에 비가 뿌렸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멈췄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들 준비한 우산들을 끄집어냈다. 가랑비 속에서 유적 발굴 현장탐사가 시작되었다.
산봉우리들이 발굴 작업에 의해서 내부에 간직하고 있던 실체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느 산봉우리는 꼭대기만 발굴되어 산위에 피라미드 꼭대기만 나타나 있고, 또 어느 곳은 산의 옆구리만 발굴되어 산의 옆구리에 피라미드 옆면이 나와 있었다. 유적의 전체를 통째로 덮어버려 산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이 흙은 옛날에 거대한 화산이 폭발할 때 형성된 흙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티칼 마야문명 유적 발굴현장 ▲ 직물을 짜는 현장
'야시하'의 문화유산 발굴현장의 탐사는 이번 우리들의 마야문명 탐방에 커다란 의미와 가치를 안겨주었다. 마야문명의 유적 발굴 현장까지 탐사를 하고난 우리는 스스로 자축 했다. 길지 않은 여정으로 이 엄청나고 심오한 마야문명의 이해에 도전한 용기에 서로가 찬사를 나누었다. 프로레스의 밤, 시골의 까페에 들러 과테말라의 마지막 밤을 장식했다. 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을 차지했던 때라 그 까페에서도 '대---한민국 짝짝짝' 의 구호가 통했다.
아쉬움을 안고
그동안에 과테말라를 돌면서 얻은 마야문명에 대한 이해, 이 값진 노력의 대가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귀로에 접어들었다. 문화탐방의 교섭에서 현지진행까지 빈틈없이 도와준 네리스(Nelis)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내가 있는 대학으로 오라고 하니까 미소로 대답했다.
▲ 시골길을 가다가 ▲ 공항, 여행을 설계해준 Ne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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