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설>
본관은 평산(平山)·고령(高靈)·아주(鵝州)·영해(寧海)·은풍(殷豊)·천안(天安)·이천(利川)·신천(信川)·곡성(谷城)·삭녕(朔寧)·창주(昌州) 등 10여 본이 전한다. 그 중 평산신씨가 70%, 고령신씨가 약 17%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총 302명의 문과 급제자, 11명의 상신, 5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6202가구에 인구 38만 1873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3위, 1985년도 조사에서는 인구 62만 950명으로 증가하여 전국 인구 구성비는 1.5%로 274성 중에서 제12위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69만 8171명, 가구수 21만 7591가구, 286성 중 제13위로 전체인구의 1.5%를 차지한다.
(1) 평산 신씨(平山 申氏)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숭겸(崇謙)이다. 그는 전라도 곡성(谷城) 출생으로, 본래 궁예(弓裔)의 막료였는데 배현경(裵玄景)·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 등의 장군과 함께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싸움에서 태조의 위급을 구출하고 대신 전사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태조가 이들 네 공신에게 각각 사성(賜姓)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산신씨의 세계는 시조의 14대손에서 25파로 갈리는데, 그 중 사간공파(思簡公派:浩)·문희공파(文僖公派:槩)·제정공파(齊靖公派:孝昌)·정언공파(正言公派:曉)·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夏)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사간공파와 문희공파가 전체 평산신씨의 각 30%씩 도합 60%를 차지하고, 제정공파가 25% 정도를 차지한다. 조선에 상신 8명, 대제학 2명, 판서 20여 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대부분 문희공파·정언공파·사간공파에서 나왔으며, 특히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입(砬)을 중심으로 하는 무신집안이고, 정언공파는 영의정 흠(欽)을 중심으로 하는 문신집안이다.
주요 인물을 파벌로 살펴보면, 먼저 문희공파에서는 개(槩)가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좌의정에 올랐으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의 중손 상(鏛)은 중종 때 호당(湖堂)을 거쳐 이조·예조 판서를 지냈는데, 문희공파의 주요 인물은 모두 상의 후손에서 나왔다.
상의 손자 잡(磼)은공신으로 평천부원군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가 바로 임진왜란 때의 명장 입이다. 입의 아들 경진(景禛)·경유(景裕)·경인(景禋) 3형제는 모두 무과 출신으로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특히 경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으로서 조선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문희공파에서만 장신(將臣)이 10여 명이 나왔으며, 입의 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완(琓)은 장희빈(張禧嬪) 처벌 때 서인(西人)의 소론(少論)에 속하여 온건론을 주장하였다. 또 여류문인이며 서화가이고, 현모양처의 귀감으로 추앙받는 사임당(師任堂), 조선 후기 서화가인 위(緯)·명연(命衍) 부자가 있다.
특히 위는 한시(漢詩)의 대가이며 대사간·도승지를 지냈다. 정언공파에서는 흠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조 때 대제학·영의정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의 4대 문장으로 꼽힌다.
그의 아우 감(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왕조실록 복간에 공이 컸고, 아들 익성(翊聖)은 인조 때 병자척화 5신(丙子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청(淸)나라에 잡혀갔으며, 그의 아우 익전(翊全)과 함께 문한(文翰)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 밖에 숙종 때 명인 정(晸),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된 응조(應朝), 그리고 판서를 지낸 응현(應顯)이 있다.
사간공파에서는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낸 사간공 호(浩)의 6대손 점(點)·암(黯) 형제가 있는데, 점은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구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이 커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되었고 예조·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직손(直孫) 율(慄)이 대북파(大北派)에 가담, 소북파(小北派)를 숙청하는 옥사에 관여하여 인조반정 이후로는 쇠퇴하였다.
암의 후대에서는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아들 민일(敏一)은 대사성, 현손 사철(思喆)은 중추부영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만(晩)·회(晦) 형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이 밖에도 숙종 때 공조판서·참찬을 지낸 임(銋), 이조참의 심(), 현종 때 대제학·이조판서 재식(在植), 형조판서 사운(思運), 예조판서 석우(錫愚)·석희(錫禧) 등이 있다.
점의 조카 충일(忠一)은 선조 때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지도 부기(附記)를 작성했는데, 한·만(韓滿)관계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근세인물로는 고종 때 참정대신(參政大臣)을 지낸 기선(箕善), 고종 때 판소리 여섯마당을 체계화한 재효(在孝), 국회의장을 지낸 익희(翼熙) 등이 있다. 평산신씨의 주류는 대체로 서인·소론(일부 노론·북인)으로서 서인이 주동한 인조반정을 고비로 조선 후기에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49만 6874명, 가구수 15만 4612가구로, 신씨의 71.2%를 차지한다.
(2) 고령 신씨(高靈申氏)
시조는 고려시대에 군기감검교(軍器監檢校)를 지낸 성용(成用)이다. 그의 6대손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檣)·정언공파(正言公派:枰)·감찰공파(監察公派:梯)의 3파로 갈리는데, 이 중 암헌공파가 주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3명 등 많은 문신을 배출하였다.
세종 때 공조참판을 지낸 유학자 장(檣)은 5형제를 두었는데, 특히 숙주(叔舟)가 뛰어났그, 그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숙주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것을 비롯하여 세조 때 좌익공신(佐翼功臣), 예종 때 익대공신(翊戴功臣),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등 잇달아 공신에 책록되었고, 대제학·병조판서·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대학자로서 저서를 많이 남겼다. 그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이름을 떨쳤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숙주의 아들대에서 봉례공파(奉禮公派:澍)·함길백파(咸吉伯派:)·황해백파(黃海伯派:澯)·고천군파(高川君派:瀞)·뇌헌공파(懶軒公派:浚)·강원백파(江原伯派:溥)·영성군파(靈城君派:泂)·호군공파(護軍公派:珌)로 분파되었다. 8형제 중 넷째 정은 성종 때 좌리공신, 다섯째 준은 중종반정의 공신, 맏이 주의 아들 종호(從濩)는 과거가 있은 이후 처음으로 진사시·문과·중시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항(沆)은 성종의 부마, 아우 잠(潛)은 시(詩)·서(書)·화(畵)의 3절(絶)로 불리었다. 항의 손자 의(儀)는 중종의 부마, 종증손인 경식(景植)은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둘째 면의 아들 용개(用漑)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영광(靈光)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재기용되어 대제학·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현손 응구(應榘)는 인조반정 후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지냈고, 응구의 손자 익상(翼相)은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공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일곱째 형의 아들 광한(光漢)은 을사사화 때 소윤(少尹)에 속하여 대윤(大尹)일파 제거에 공을 세워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양관대제학에 좌찬성을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광한의 종증손인 관찰사 용(涌)과 대사헌 식(湜) 형제는 문한으로 유명하다. 숙주의 아우 말주(末舟)는 형과는 달리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으며, 그의 손자 공제(公濟)는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공제의 4대손인 경준(景濬)은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이며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하여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이밖에 숙주의 10대손으로 의금부도사·승지를 지내고 시·서·화의 3절로 불린 광수(光洙)가 있다. 근세인물로는 풍속화가로 유명한 윤복(潤福)과 사학자 채호(采浩),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홍식(洪植) 등이 있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11만 6966명, 가구수 3만 6250가구로, 신씨의 16.8%를 차지한다.
(3) 아주신씨(鵝州 申氏)
시조는 고려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영미(英美)이다. 대표적 인물은 우(祐)인데, 그는 충혜왕 때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지극한 효자로서 경상북도 의성(義城)에 정문과 효자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크게 벼슬을 한 사람은 없으나 학자와 효행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다. 우의 6대손 원록(元祿)은 성리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효행이 뛰어나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손자 3형제 중 적도(適道)는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찰방(察訪)을 지냈는데, 역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달도(達道)는 삼사(三司)를 역임하고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열도(悅道)는 직언(直言)으로 유명하고 병자호란 때 역시 척화를 주장했으며, 장령을 거쳐 능주(綾州)목사를 지냈다. 또 우의 9대손 지제(之悌)는 임진왜란 때 예안(禮安)현감으로 용인(龍仁)싸움에 참전하여 선무(宣武)·호종(扈從)의 두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의 아들 홍망(弘望)은 대간·수령·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수 2만 2783명, 가구수 8,807가구로, 신씨의 4.0%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