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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 16차
108 번뇌를 떨어 버리고…
일시; 2011.9.25
구간;죽령..삼형제봉..도솔봉..헬기장/제2도솔봉..묘적봉..솔봉..
뱀재..흙목정상..싸리재..유두봉..배재..시루봉..투구봉..
촛대봉..저수재
참가인원;28명
죽령, 역사의 길
이런 저런 일로 지방에 갔다가 늦게 도착하니 당연히 산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 마누라가
대충 짐을 챙겨 놓고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산에 갔다 오라”고 일갈 한다.
지난번 쑥맥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도솔봉 까지만 가면 나머지 구간은 아주 쉬운 코스로서 가벼운 산행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챙겨서 나선다.
죽전 휴게소에서 소나무와 흐흐님을 태우고 용인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한다.
쌀쌀한 저녁 공기가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막걸리를 한잔하고 환담을 하는 사이, 흐흐님이 연신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통 사정을 한다.
죽전 승차장 의자 밑에 등산화를 두고 와서 집에 연락을 하는 중이라고 하는데
그 얼굴이 똥을 씹은 표정이다.
등산화 없이 산행은 불가 한지라 본인은 안절부절,
그 이야기를 듣고 용인 휴게소에서 승차한 등산조아님이
승용차에서 여분의 등산화를 꺼내 들고 온다.
한산 후 귀가 길에서 버스 안에 등산화를 두고 내리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출발할 때 이런 일이 발생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오늘 산행은 도솔봉에서 사방으로 툭 터진 조망을 즐기는 것이 백미 인지라
이 지점을 너무 빨리 지나가면 어둠속에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니
가능한 늦게 도착하고 4시경에 출발 하자고 통 사정을 해 본다.
용인을 떠나 단양 휴게소에 도착하니 1:45,
아예 버스를 세우고 한숨 자고 나서 죽령에 도착하니 3시,
죽령에서 6km거리인 도솔봉까지 넉넉잡아 3 시간으로 추정하면
4시에 출발하여 7시 전후에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Timing 상으로 최적으로 생각된다.
죽령 누각 앞에서 방초님...
버스에서 내려 바람을 맞으니 제법 쌀쌀하여 wind jacket을 꺼내 입는다.
우리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봄여름가을겨울 산악회가 대간 북진을 준비하고 있다.
호남정맥 구간을 몇 번 동행한 경험이 있어서 지인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다.
이 산악회는 출발 전 반드시 가벼운 몸 풀기 운동을 하고(그 사이 큰 볼일도 보고…)
아침식사는 선두 후미 가릴 것 없이 전원이 함께하며 산행 30여 분 거리를 남겨 놓고는
산행 대장이 기다렸다가 후미와 함께 도착하는 매우 인상적인 산악회이다.
그러는 사이 준비를 마친 회원들이 이곳 저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경상도 방향으로 고개 마루를 살짝 넘어서 죽령 주막, 누각을 둘러본다.
누각은 근래 새로 건축한 탓인지 현판이 걸려있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공모 중 이라고 한다.
우측으로 난 길 입구에 죽령 옛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신라시대에(아사달왕 5년, 158년) 죽죽이라는 사람이 이 길을 열고난 이후
1853년을 넘은 역사의 길이다.
이곳에서 산 아래 희방사 역까지는 옛길이 그대로 보전된 고즈녁하고 정겨운 길이다.
조령1,2,3관문을 통과하는 문경새재 옛길과
대관령 아래 제민원에서부터 반정까지 남아있는 대관령 옛길은
역사의 흔적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등산로 입구 표지판
죽령(竹嶺, 689m)
영남에서 한양으로 왕래하는 3대 관문(계립령(죽령), 추풍령)중 하나로서
신라시대 때부터 고구려와 싸움으로 지킨 경계령이다.
죽령은 조선조 연산군에서 중종때의 명신 농암 이현보, 이퇴계 같은 분들도 한양길에
이 고개를 자주 넘어 다녔다.
이현보가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올 때 풍기군수 주세봉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이 고갯마루에서 마중하여 함께 회포를 풀었다는 사연이 있으며
또 이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충청감사로 있는 그 중형 온계가 고향인 예안에 왕래할 때
마중하고 배웅하며 시주로 즐기던 촉령대가 죽령 허리에 있었다 한다.
단양 방향으로 4km정도 아래 매바우와 텃골마을 건너편, 중앙선 철길 옆에는
“다자구 할머니”의 사연이 있는 죽령 산신당이 있고,
옛날에는 죽령에 김유신과 죽지랑竹旨郞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모죽지랑가로 유명한 향가로 우리 귀에 익숙한 죽지랑은
김유신을 도와 삼국 통일을 완성한 화랑으로서
삼국유사에는 죽지랑의 탄생 설화가 죽령 고갯길에 얽혀서 전해 온다.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이 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모죽지랑가 전문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영주, 단양 방향 각각 30리가 넘어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길로서 5번 국도가 지난다.
1942년에 중앙선 철도 죽령 터널이 개통 되었고
2002년에는 4.6km의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눈 깜짝 할 사이에 고개 아래로 통과한다.
출발에 앞서 선두 매너남에게 제발 오늘 만큼은 천천히, 천천히 가자고 사정을 해 본다.
일출 전에 도솔봉을 지나친다면 아무 의미없는 산행이 된다고 간곡히 이야기 한다.
도솔봉 6km 표지목을 보면서 산길로 접어든다.(3:35)
옛길에 얽힌 자취를 사진으로 담고 나서 저만치 달아난 일행을 부지런히 뒤 따른다.
벌초를 깨끝하게 한 묘 1기를 지나고(3:40)
소나무, 전나무가 빼곡한 비틸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오솔길이 정겹다.
풍기 방향의 불빛이 하나 둘 보이다가 갑자기 툭 터진 지점에 이르니
밤 하늘 아래 명멸하는 불빛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풍기읍 야경
서서히 오름길로 접어 들다가 살짝 내리막이다.
우측에서 내려와서 합치는 이 길은 죽령에서 출입 금지라고 표시한 다른 들머리에서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를 거쳐 내려오는 길과 합치는 지점이다.
등로는 발가벗은 듯한 능선을 따라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우측 단양 쪽 동리에서 개 짓는 소리도 가끔 들린다.
밧줄이 설치된 능선을 따라 좌우로 나뉘어져 숨가쁘게 올라 헬기장을 지나고 (3:55)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진다.
동쪽 하늘에 떠있는 눈썹 달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기를 반복한다.
어느 정도 치고 올라 온 듯, 다소 넓직 한 능선 중간에서 쑥맥 회장이 소리친다.
“선두, 이쯤에서 쉬었다 가지 그래, 옷이라도 갈아 입고 갑시다…..”
듣던 중 반가운 말씀이다.
그러나 선두는 그대로 진행을 하고 우리끼리 베낭을 벗어 던지고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이정목에는 죽령 1.3 km 라고 쓰여있고 지도를 들여다 보니 바위샘도 표시되어 있다. (4:10)
표시목 옆으로는 이천시 54 동문회 이름으로 된 친구의 추모비가
작은 돌무더기 아래 조그만 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 산을 좋아하던 우리 친구 종철이가 백두대간 품으로 돌아 갔습니다.
종철아 편히 쉬거라
이천시 54 동문회 산마을 사람들
김건기 이종목 이창수 허원두
죽령1.3km도솔봉 4.7km지점, (이 지점 아래 바위샘이 있음)
앉아서 쉬지도 못한 체 짧은 휴식을 하고 다시 출발이다.
된비알이 다시 이어지고 흐르는 땀이 얼굴로 번진다.
툭 터진 공터, 시멘트로 바닥을 말끔히 정리한 넓직한 헬기장에 도착한다. (4:22)
선두에게 쉬었다 가자고 하니 조금 더 가다가 봉우리에서 쉬어 가자고 한다.
삼 형제봉의 제 1봉 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므로 거기 까지는 다소 먼 거리이다.
헬기장을 지나고 다소 평탄한 길을 지나 경사를 타고 오르니
선두가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다(4:30)
119 구급 표시지점 소북 11-14 이외에는 아무런 표식이 될만한 것이 없다.
휴식을 마치고 나서는 다소 평탄한 길로 이어지다가 산죽이 빼곡한 길을 맞는다.(5:00)
오름길로 향하는 산죽길과 좌측으로 내려서는 길로 갈라지는 삼거리이다.
이정목에는 좌측 방향으로는 도솔봉 2.9km로 표시되어 있고
산죽을 따라 우측 오름길로는 힌봉산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방향을 좌측으로 틀어서 능선을 타고 가다가 곧 이어서 급격한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산 비탈을 따라 내려 가다가 급격히 치솟아 119 표지목과 함께
도솔봉 2.7km지점이라고 쓴 지점에 도착한다.
짐작컨데 이 곳이 삼형제봉 중에서 제 1봉(1,288m)에 해당되는 것 같다.
중간중간 위험한 암릉 구간을 지난다
도솔봉 2.2km를 남긴 좌측 봉우리 제2봉 지점에서 지성인님,방초님과 함께 휴식을 한다.(5:15)
이 속도로 간다면 도솔봉에서의 조망은 너무 이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느긎한 휴식을 한다.
몽고 군대의 빠른 이동성, 나이 40이 넘으면 공부 하고 싶은 욕망이 다시 일어 나는데
그때 할 수 있는 공부는 철학, 역사, 종교 분야 뿐이라는 것,….등등
그 사이 방초님이 베낭에서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는 꺼낸다.
딸 아이가 사준 카메라로서 오늘이 의미가 깊은 날 인지라 조심조심 다룬다.
나와 지성인님은 방초님의 신 무기, 첫 출사 영광을 안은 셈이다.
한동안 쉬고 나니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다.
후미팀과 같이 가려고 한동안 기다렸으나 간간이 목소리만 들릴 뿐,
그쪽도 휴식을 하는지 반응이 없다.
방초님의 새 카메라 첫 출사 사진, 도솔봉 2.2km전방에서 지성인님과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등로는 여전히 암릉,
첫 대간 때는 이 구간이 이렇게 바위가 많은 줄도 모르고 능선에서는 살을에는 칼바람을 맞고
급경사 내리막길에는 눈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갔던 기억 뿐이다.
암릉을 내려서서 안부에 도착하니 이어지는 등로가 희미하다
봉우리 우측 사면을 따라 이어 가다가 살짝 내려선다.
소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삼형제봉의 조망 바위에 도착한다(5:40)
도솔봉이 검은 모습으로 우뚝하고 사위는 아직 조망을 즐기기에는 어둠이 짙다.
소리도 질러보고 눈을 크게 떠 보지만 어림도 없다.
내려서는 길에는 철제 계단이 가파르게 설치 되어있다.
첫 대간때는 이곳에 설치된 밧줄에 의지해서 눈 위를 미끄러져 내려 갔지만
철제 계단은 경사가 높기는 하지만 여간 수월한 게 아니다.
조심조심 내려 선다.
산사에 들어가는 일주문을 통과하듯,
도솔봉(천)이라는 불국의 세계로 들어서는 듯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 지고 경건함을 느낀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변은 아직 운무 속에 미동도 없고
당당한 자취를 드러내 놓고 서있는 도솔봉이 경외롭게 느껴진다.
안부에 도착하니 도솔봉 0.7km라는 표지목 뒤로 선두를 포함한 전원이 기다렸다가 출발한다.(5:50)
새벽부터 죽어라 내 달리던 그룹이 무슨 일인지 이곳에서 휴식 아닌 대기 상태를 연출한 것이다.
참 별일도 다 있다……..
시간이 남아서 일까, 불국으로 진입하면서 함께 예를 갖추자는 것일까….?
가파른 능선을 따라 오른다.
무슨 연유인지 갑자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짐을 느낀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릴때부터 불교와 사찰, 보살님은 우리 주변에 일상의 하나로 들어와 자리하지 않았던가 ?
정상을 조금 앞두고 조그만 암봉이 일행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6:10)
동북으로 트인 조망과 지나온 삼형제봉을 바라 보면서 방초님이 연신 셔터를 누른다.
한동안 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던 일행이 떠나고
등산조아님이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진 여성 회원의 물병을 찾느라고 연신 고함을 친다.
그 모습이 안타까운지 여성 회원은 포기하고 올라 오시라고 애타게 소리친다.
지나온 삼 형제봉
죽령, 제2 연화봉 방향
도솔봉 도솔산, 도솔천으로….
계단을 올라서니 도솔봉 정상은 우리 일행을 맞기에도 비좁지만,
예전의 돌탑과 도솔봉 표지석도 그대로 있고 주변에는 목책을 둘러 놓았다.(6:25)
그토록 열망하던 도솔봉에서의 조망,
다소 이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선명하고 멋진 조망을 사방으로 안겨준다,
백두대간 전 구간 중에서도 사방으로 툭 터진 조망을 안겨주는 봉우리는 몇 되지 않는다.
지나온 죽령, 연화봉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 시킨다.
죽령에서 거의 수직으로 치 솟는 제2연화봉 능선이 뚜렷하고,
그 오른쪽으로 천문대,연화봉,비로봉,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산 능선이
춤추는 너울 마냥 잔잔하게 이어진다.
암록의 소백산 중턱을 가로 지르는 죽령 고갯길이 구불구불하게 이어 지다가 희방사로 숨어 버린다.
장대한 소백산의 능선을 따라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넓은 들판 풍기豊基,
가히 십승지의 길지라는 생각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2 연화봉,천문대,비로봉,국망봉 능선
단양 쪽으로는 경사가 다소 완만한 탓인지 고갯길은 짧게 이어지다가 숲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단양 시멘트 공장의 큰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구름 기둥을 이루고 있고
그 뒤로 제천 영월로 겹겹이 이어지는 산 군이 하늘에 닿는다.
뾰족한 봉우리, 두루뭉실한 산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암록의 산군이
원근에 따라 저마다의 색깔로 겹겹이 울을 치고 있다.
좌측으로 살짝 눈을 돌리면 금수산 산봉이 뚜렷하고
주변으로 펼쳐진 운해는 충주호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장엄한 산 군 뒤로 아스라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치악산 능선이 가물 거린다.
조금 더 좌측으로 눈을 돌리면 오늘 가야 할 능선, 유두봉, 시루봉이 가깝고
고개를 한껏 꺽어 내려다 보이는 산골은 예전에 큰 절이 있었던 사동리이다..
금수산,치악산 방향
동쪽 방향은 낮은 구릉 사이로 펼쳐진 넓은 들 위로 구름이 짙게 깔려있다.
구름바다 위로 홀로 우뚝한 산,
안동과 예천의 주산인 학가산은 구름 바다를 소리없이 미끄러져 가는 모습니다.
보는 위치에 따라서 확연히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학가산은 이곳에서 보는 것이 백미이다.
안동 예천 학가산 방향
도솔봉兜率峰 (1,315m),
비로봉,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소백의 능선은 이곳 도솔봉에서 정점을 이룬다.
불국佛國에 깊게 자리한 이 봉우리의 이름은 불교적으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도솔봉은 기록에 의하면 도솔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도솔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도솔천에서 나온 것 으로서
우주는 3界(욕계,색계, 무색계)로 되어 있으며 욕망으로 점철된 세계, 즉 인간 세상과 가장 가까운 세계인 욕계는
6개의 하늘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중 네번째 하늘이 도솔천이다.
도솔천은 내원과 외원으로 구분되고 내원에는 항차 부처가 되려는 보살의 대기장소이다.
석가모니도 도솔천에 있다가 인간 세계로 내려와서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하였으며
도솔천에 대기중인 미륵불은 향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미처 구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 한다는 미래의 부처이다.
불자는 죽으면 도솔천에 태어나고 싶어한다.
도솔천에서 내려다 보는 인간 세계는 아마도 이곳에서 보는 모습과 흡사하지 않을까 ?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 연봉과 天上이 도솔천이라면
희고 맑은 운무 아래 덮혀있는 인간 세상은 욕계라면 비약일까 ?
경이로운 자연의 위엄에서 부처님의 말없는 가르침이 와 닿는다.
죽어라고 앞만 보고 달리는 메너남,동반자,소나무,2%님
정상을 살짝 내려선 헬기장에는
단양군에서 까만 오석으로 세운 정상석이 별도로 세워져 있어서 다소 헷갈리게 한다.(6:50—7:20)
떠오르는 햇살을 맞으면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한다.
보온 밥통에 담아온 밥이 따뜻하고 방초님이 건내는 막걸리는 걸쭉하다.
그런데 방초님은 5분만에 식사를 마친다.
깜짝 놀라서 얼굴을 쳐다보니 손 바닥 만한 숫가락을 보여 준다.
예전에 어느 산악회를 따라 갔는데 식사 시간이 느리다고
큰 숫갈을 가지고 다니라고 핀잔을 받아서 준비 하였다고 한다.
식사를 마친 방초님이 커다란 박스를 끄집어내고 오른쪽 발을 맛사지 한다.
박스안에는 약과 침,압박 붕대 등 비상 도구가 가지런히 들어있다.
아침의 이 준비는 오늘 내내 힘들게 산행 할 줄을 미리 예견하였던가, 정성들여 맛사지를 한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전원이 모여서 아침 식사를 마쳤다.
함께 찍는 사진도 오랜만이고 봉우리를 타고 오르는 햇살도 싱그럽다.
어둠을 뚫고 땀 흘려 올라온 산정에서 이렇게 모여서 식사를 하니 얼마나 즐거운가 ?
제발 다음 부터는 꼭꼭꼭 이렇게 하였으면 좋겠다.
헬기장에서 전원이 함께한 아침식사
철제 계단(85계단)을 내려서서 조금 더 지나니
경사도가 더 높은 계단이 바위를 안고 돌면서 나선형으로 이어진다.
계단 좌측 바위에서, 그리고 계단에서 바라보는 우측 계곡과 가야 할 능선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아마도 2-3주 후에 이곳에 오면 단풍과 파란 하늘이 산행을 어지간히 느리게 할 것 같다.
계단을 내려 서면서 하나 둘씩 헤아려 본다.
마지막 걸음을 내 딛으니 108, 아…이것도 부처님의 뜻인가 ?
갑자기 108 번뇌라는 말과 함께
도솔봉, 묘적봉이라는 이름과 연계되어 부처님의 깊은 뜻이 숨겨 있을 것 같은 신비감에 젖어 든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범상치 않다.
도솔봉을 오르내리면서 모든 번뇌를 버리라는 무언의 설법이 아닐까….?
북한산 승가사를 오를때도 108 계단이었는데……
번뇌가 어디 108개 뿐일까마는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솔봉에서 내려오는 108 계단
108 계단에서 본 가야할 능선
부족한 머리를 이리 저리 굴리는 사이 등로는 갈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등로는 전반적으로 내리막이나, 간간이 나타나는 오르막이 힘겹게 한다.
부분적으로 로프가 설치된 짧은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갈 참나무 숲속에 묘적봉(妙積峰1,156m)이라고 쓴 조그마한 표지석이 반긴다.(8:15)
묘적봉은 그 높이가 소백의 준령에 비해 다소 낮지만
당당히 소백산의 남쪽 울을 지키고 있는 높은 산이다.
봉우리 아래 묘적령과 함께 우측 계곡에 자리한 사동리 절골에 있던 사찰 묘적사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묘적사(妙寂寺)
우측 계곡 사동리 절골은 예전에 묘적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여지도서와 호서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묘적봉 아래 해발 950고지 묘적령 가는 길에는 묘적사지가 남아있다.
이곳은 단양사람들이 가마를 타고 경상도로 오고 가던 길목이었고 1960년대만 해도 이곳에 부도가 있었다.
부도는 산판 길에 어디론가 실려가고 빈터만 남아 있으나
스님의 무사안일과 살생에 대한 참극을 그냥 방치했던 묘적사의 폐사 전설이 전한다.
절에는 언젠가부터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여 스님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최후로 2,3명의 스님이 남아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스님들이 인근 마을에 공양을 하러 갔다 오니 빈대가 갑자기 성하여
법당 요사채에 우글거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지자 바랑과 장삼을 벗어 마루에 놓고
나뭇단에 불을 붙여 방에 던져서 불을 지르고 스님들도 도망갔다고 한다.
지금의 사동리에는 옛 절터와 유원지가 잘 가꾸어져서 그곳을 기점으로 도솔봉 원점 산행을 많이 하는 곳이다
묘적령 아래 영주시에서 예천군으로 들어서는 전망 바위에서 흐흐님이 벌렁 드러눕는다.
등산화 사건(?) 때문에 버스에서 잠도 설치고, 신발이 작아 발이 아픈지 양말을 벗고 드러눕는다.
앞으로 남은 구간은 육산에 가까우니 맨발로 가도 되거라고 한 마디 하니 시큰둥하다.
묘적봉에서 바라본 풍기읍, 영주시 방향
무섬마을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남쪽으로 지근거리에 있는 문수면 수도리에는
안동의 하회마을과 예천의 의성포와 흡사한 무섬마을이 있다.
낙동강 상류 지천인 내성천을 끼도도는 물동이 마을로서 전체 40여 체 가옥 중에서 30여채가 조선시대 후기 사대부 가옥이다.
그 중에서 청록파 시인 동탁 조지훈의 처가인 김 위진 가옥은
집 수리를 위해 땅을 파니 엽전이 1톤 트럭 한 대 분량이 나왔던 집이다.
1972년 시멘트 잠수교가 설치 되기 이전 까지는 나무로 된 외나무 다리가 명물이었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직이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둥근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이 슬픔이 쌓여 오느니
……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별리別離(조 지훈)
사랑하는 부인을 무섬마을에 두고 중학을 독학으로 마치고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로 공부하러 떠나는 조지훈이
남편을 떠나 보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쓴 시…..
짧은 내리막길을 지나고 좌측 전망 바위로 오른다(8:35).
가야 할 능선이 우뚝하고 좌측 상리면 고항치로 이어지는 능선도 눈 앞으로 다가선다.
정면으로 우뚝 솟은 솔봉과 유두봉, 그리고 그 뒤로 숨어있는 시루봉을 지적하니
정말로 여자의 그것 같이 생겼냐고 맥주병님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반문을 한다.
사동리에서 산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임도가 대간 능선까지 이어지는 듯 구불구불하다.
묘적봉 지나서 전망바위에서 단체 사진
전망 바위에서 내려서서 몇 분 사이에 묘적령에 도착한다.(8:50)
이곳 까지가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구역이다.
오른쪽은 사동리, 왼쪽은 에천군 상리면 고항치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가면 상리면 고항치에서 풍기읍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아주 편리한 곳이다. 고항치를 기점으로 대간을 맺고 끊는 팀들도 많다고 한다.
지난번 대간 때는 쌓인 눈 때문에 등로가 구분이 안된 탓에
이곳에서 좌측 능선을 따라가던 선두가 길을 잘못 들어서 40여 분을 허비한 곳이다.
오늘은 선답자의 꼬리표가 너무도 많아서 대간길이 분명하게 이어진다.
갈참나무로 이어지는 등로가 답답하지만 등로는 완만하고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편안하다.
조금 지나서 등로 옆에 “산딸기, 취나물’이 많은 곳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음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지났으나 이후 이어지는 취나물이 곳곳이 자라고 있음을 보고 감격을 한다.
내년 봄에 이곳으로 오자고 쑥맥, 지성인님과 의기투합한다.
취나물이 많음을 알리는 안내판
조금 후에 1022m라고 쓴 표지판이 나무에 걸려있고
그 아래로 긴 의자 2개가 설치된 쉼터를 통과한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이곳은 1027m라고 표시되어 있다. (9:05)
국립지리원이 제작한 지도, 시중에 판매되는 등산 지도에도 1027m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누군가 써 놓은 1022m라는 숫자는 개인의 의욕이 지나친 결과로 판단된다.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이번에는 1011m표시와 함께 똑 같은 형태의 간이 쉼터가 반긴다(9:20)
떨썩 주저 앉아 잠시 휴식을 한다.
휴식 후 이어지는 봉우리, 이정목 기둥에는 모시골 정상이라고 써 놓았고
좌측 계곡 방향으로는 “모시골 1.7km”라고 쓰여있다. (9:30)
모시골
마을터가 모시 광우리 같다고 하여 모시골이라고 한다.
풍기군수 겸암 유운룡이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했다는 겸암굴이 마을 북쪽에 있으며
웃모시골 아랫모시골로 나뉜다
서서히 높아가는 오름길에서 잘 걸어가던 방초님이 등로에서 벗어나 숨을 고른다.
나도 토요일의 일정 탓인지 도무지 힘이 들어서 걸음이 천근 같다.
갈짓자 형태로 한발 두발 내 딛는다.
햇볓이 따갑게 내뢰쬐는 솔봉 정상에 도착한다.(9:45)
등로는 여전히 취 나물이 지천이고 웃 자란 풀과 잡목으로 조망은 전혀 없다.
갈참나무가 빼곡한 숲길을 이어 가던 중 툭 터진 곳이 드러난다.
억새풀이 웃 자라서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 헬기장이 나타난다. (10:10)
따가운 햇살 아래서 그래도 무엇이 좋은지 사진기 앞에 줄줄이 늘어선다.
수면 부족에, 토요일 행사 탓에 만사가 귀찮고 힘겨워서 묵묵히 지나간다.
조금 후에 선두를 포함한 일행 전원이 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에 들어간다.
막걸리로 원기를 보충하고 오미자 술을 한잔 걸친다.
이곳 저곳에서 끄집어내는 포도를 맛있게 먹고 자두와 오렌지도 곁 들인다.
좌측 아래동리,고항리가 고향인 선배의 얼굴이 문득 떠 오른다.
이곳, 예천에서 중학을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에서 선배로,
그리고 같은 부서의 직속 상사로 오랜 기간을 함께 한 기둥 같은 분이다.
지난해 갑자기 찾아온 병마, 알츠하이머가 온 것이다.
마주한 자리에서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되 뇌이는 바람에 눈물이 앞을 가려 한 없이 괴로워 하였다.
두주를 불사하고 사리가 명쾌하여 형과 같이 기대고 정을 나누어 주었던 분인데….
기적이 일어나서 완치하여 예전 같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김 OO 선배, 제가 왔다 갑니다. 건강하게 일어 서세요…”
목청을 한껏 올려서 불러 보지만 허전하기 그지없다.
휴식 후에 내려서는 안부는 뱀재, 이름은 징그럽지만 뱀이 나타날 계절은 이미 지났다.
이곳은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이 뱀재인지 분명치 않다.
휴식 전에 만난 헬기장을 뱀재 헬기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리가 휴식한 지점을 지나서 살짝 내려 앉은 안부를 뱀재라고 하기도 한다.
내 판단에는 안부가 뱀재 이고 헬기장은 뱀재 부근의 헬기장을 편의상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본다.
숲길 옆에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천남성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선다.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사약을 만드는 재료중 하나 이다.
천남성
작은 오르내림을 이어 가다가 송전탑을 만난다.(10:48)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억새풀이 어깨를 덮는 공터, 흙목(1,033m) 정상에 오른다. (11:00)
이어서
흙목
토항(土項)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명 풍수가 박 성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吐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吐香이 土項ㆍ흙목으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홁목이라는 이름은 좌측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 가재봉 아래에 있는 산 골짜기의 촌락이름이다.
나중에 논 두렁님에게 확인을 하니,
가재봉 봉우리를 정점으로 흙목, 도촌리 방향 산 비탈에서 송이, 능이를 채취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흙목 정상 아래까지 임도가 개척되어서 오르 내리기가 매우 쉬워졌다고 한다.
정상을 살짝 벗어나니 능선 전체가 억새풀로 장관을 이룬다.
어깨까지 자란 억새풀이 가을 바람을 타고 일렁인다
그 중간에 서있는 갈참나무는 겨울 대간 때 눈 위에서 일행이 함께 사진을 찍던 곳이라 새삼스럽다.
좌측 산 허리를 돌아 지름길로 살짝 내려선다.
여기서부터는 능선을 따라 좌우로 온통 둥굴레 천지다.
산이 깊고 접근이 쉽지 않은 탓인지 취나물, 둥굴레,고비밭이 너무도 많다.
내려서는 등로는 다소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산 허리를 좌우로 감아 돌아 암릉길을 지나고 다시 흙산 능선에 도착하여
앞서가던 일행과 짧은 휴식을 한다.(11:15)
물만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진행을 한다.
숲으로 들어난 정면의 유두봉 정상,
생긴 모습이 영락없이 여인의 유두를 연상 시킨다면서 쑥맥 회장, 방초님과 함께 킬킬거린다.
귀한 모습을 놓칠새라 셔터를 눌렀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소중한 사진이 카메라에 남아 있지 않다.
내가 무엇을 잘못 하여서 그렇게 된걸까…? 안타깝기 그지 없다.
산행을 마치면서 방초님도 그 봉우리를 사진에 담아오지 못하여 아쉬워 하였는데
내가 획실히 찍었으니 퍼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방초님을 무슨 낮으로 볼까 걱정이 크다.
고난의 구간
안부에 내려서서 잡목으로 무성한 헬기장을 지나고 싸리재에 도착한다.(11:25)
이름과 다르게 싸리나무는 없고 온통 갈참나무 숲이 빼곡하다.
좌측으로는 원 용두리 2.6km, 이곳은 논두렁님의 고향 인근 동리이다.
우측으로 떨어지는 계곡은 남조리 유황온천 2.7km를 가르킨다.
앞을 가로 막고 서있는 유두봉에 질렸는지 종이배님이 체면불구하고 큰 대자로 드러눕는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수십 번 외우라고 가르쳐준 논어의 한 구절이 올라서
피곤한 와중에도 쓴 웃음이 난다.
飯疎食飮水(반소사음수 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 라도) 팔 베고 누웠으니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 이라) 그 가운데 즐거움이 있도다(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리….)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 는)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부유하고 고귀한 것은
於我如浮雲(어아여부운 이라) 내게는 뜬 구름과 같도다.
논어에서
어차피 가야 할 것이라면 빨리 끝내자.
이를 악 물고 한걸음 두 걸음씩 오른다.
또다시 숫자를 헤아린다.
1,2,3,,,,10 (하나), 1,2,3,…10(둘) ….
이렇게 하기를 오십까지 하다가 포기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한발 두발 걸음을 내 딛는다.
정상에 도착하니 나뭇가지에 누군가 유두봉이라고 써서 걸어 놓았다.(11:40)
도솔봉 방향과 지나온 능선이 암록색으로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 봉우리를 잘 감싸고 지나 가야 할 터인데,
이렇게 기진 맥진하여 짓 밝고 가는 것이 옳은가…?
야릇한 웃음을 날려 보지만 모두들 힘들여 올라온 탓인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러는 사이, 흐흐님이 구름과자를 물고 맛있게 뿜어낸다
유두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삼형제봉,도솔봉, 묘적봉,그리고 단양 방면 힌봉산 능선
유두봉
지나온 흙목 정상에서 바라보면 정상 부분이 여성의 유두 같은 모습이다.
대 부분의 지도나 안내서에는 표시가 없고 정상에도 표지석이나 표시판도 없다.
이곳에서는 동북 방향으로의 조망이 일품이다.
도솔봉과 3형제봉,그리고 단양 방향으로 이어지는 힌봉산(1,240m)과
대간 능선 묘적봉, 솔봉 능선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조망을 주는 곳이다.
발 아래는 사동리와 유황 온천이 있는 남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뻬어난 곳이다.
이렇게 깊은 산골도, 사인암을 거쳐 단양 대강리까지는 자동차로 30여분도 걸리지 않는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말리고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배재에 이른다(12:00)
정면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잣 나무 숲으로 빼곡하다.
그러나 그 경사도가 거의 수직에 가까우리 만큼 위협적이다.
아..오늘도 당했구나…..
흙목 정상, 유두봉을 거치면서 세번째 오르막 능선을 맞는다.
어제 저녁 버스에서 쑥맥 회장의 말에 완전히 속았구나….
“ 오늘 대간은 소백산과 도솔봉, 그리고 단양 지역의 산들로 이어져서 조망이 끝내 줍니다.
거리도 짧아서 3시 정도에 출발하면 늦어도 12시에는 저수재에 도착 할 것이니.
천천히 사진도 많이 찍고 넉넉하게 가십시다…….”
설명대로라면 지금쯤 저수재에 도착 하여야 겠지만,
지금 시간이 벌써 12시, 남은 구간은 어림 잡아서 4km정도,
그러나 잣나무 봉우리를 넘어서서 안부를 지나고 투구봉 오르막길이 또 기다리지 않는가 ?
이 난관을 어찌 넘을꼬…..
낚시꾼의 허풍도 믿을게 못 되지만
산꾼들은 자기 체력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낭패를 본 경우가 너무도 많지 않았던가 ?
잣나무 숲 오르막을 힘겹게 한발 두발 내 딛는다.
그 와중에도 숲으로 들어간 지성인님이 하나 둘씩 잣을 걷어 올린다.
둘이서 비닐 봉지를 한 가득 채우고 베낭에 쑤셔 넣는다.
뒤 따라오던 방초님이 일갈한다.
“다리 아프고 힘 들어 죽겠시유, 그만두고 가세요…”
아니나 다를까, 정상에 도착하니 하나 둘 집어넣은 잣 때문에 베낭의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12:35)
정상은 아무런 이름이 없고 누군가 1,084m라고 나무에 걸어 놓았다.
어떤 기록에는 유두2봉이라고도 써 놓았으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
휴식을 마치고 잣으로 가득한 베낭을 걸치니 어깨가 축 쳐진다.
한동안
내림길에도 좌측으로는 잣 나무가 빼곡하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지나고 안부에 도착하여 올려다 보니 4번째 봉우리 시루봉이 앞을 가로 막는다.
이름 그대로 정상은 떡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 봉우리를 오르는 등로는 다소 수월하다.
소위 테라스식 오르막이라 어느 정도 오르고 나서 짧은 평탄 하다가
다시 오르막으로 이어 지기를 다섯 차례를 한다.
시루봉(1,116m) 정상은 커다란 간판(?)만 서있고 조망이 없는 탓인지 모두들 그냥 스친다. (1:10)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다.
평탄한 등로를 이어 가다가 좌측으로 비껴난 전망대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다.
내려다 보이는 곳은 상리면 원 용두리,
산골에 비좁게 자리한 이곳은 예천군에서도 가장 깊은 산촌에 속한다.
예천 읍내 까지는 차로 1시간 정도나 걸리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이곳에서 약 12-3km떨어진 고향에서 산나물을 채취하러 이곳까지 다녔다고 한다.
건너편 능선 정상에는 학교 운동장 같은 평탄한 지역이 있다.
골짜기에 댐을 건설하고 산 정상에 물을 끌어올려 그 낙차로 전기를 만드는 상부댐이 있는 곳이다.
투구봉에서 예천군 상리면 방향으로 방초님과 흐흐님.
능선을 따라 진행 하다가 헬기장을 만나고 나서 고비밭.싸리밭이라고 쓴 표지판을 만난다.
이어서 투구처럼 불쑥 솟아있는 바위, 투구봉에 도착한다.(1:35)
좌측 아래로 펼쳐진 상리면 골짜기와
지나온 흙목,유두봉,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이 높이를 자랑 하듯이 이어진다.
투구봉에서 , 다솔방님 뒤로 지나온 대간 능선 시루봉,유두봉.....
지근거리에 있는 촛대봉에 도착한다.(1:45)
조그만 오석에 새겨진 표지석은 양지 바른 능선에 있고 그 옆으로 촛대 같은 바위가 솟아있다.
바위 뒤로 가야 할 다음 구간의 연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측 산정에 우뚝 솟은 문복대, 그리고 동로면 가운데 불쑥 솟은 천주산이
붕어 주둥이를 닮아 거꾸로 선 모습이다
촛대봉에서 바라본 다음구간, 천주산(붕어산)과 황장산 능선
내려서는 길은 일사천리,
송이를 찾아볼 요량으로 그토록 찾던 소나무가 이제야 한 두그루씩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니 잣나무가 빼곡하다.
이곳은 저수재 아래 동리 사람들이 나무나 나물을 할 때 자주 올라 올 정도로 왕래가 많은 곳이다.
저수령 고개 마루는 매우 넓다.
저수령 표지석은 집체만한 경치돌을 좌대에 올려 놓았고
전면에는 “저수령 경상북도”라고 붓 글씨체로 새겨 놓았다
예천은 국궁의 고장이다.
국제 시합에서 첫 우승을 하여 양국 세계 1위로 자리 매김을 김 진호 선수가 예천여고 출신이고
그 이름을 딴 김진호 양궁장이 있는 곳이다.
그
저수재를 넘는 국도 전신주에는 새로 개정된 도로명에 따라 "도효자길” 이라고 지번이 쓰여있다.
도 시복 효자
저수령에서 예천 방향으로 고개 마루 중간에 야목이라는 산촌이 있다.
명심보감에 까지 실린 만고 효자로 후세의 귀감이 되는 철종때의 도시복 효자가
저수령 아래 첫 동네 용두동 313번지에 살면서 뒷산의 땔 나무를 해다가 예천장에 팔아서
부모를 봉양했고,강릉까지 가서 6월 염천에 홍시를 구해왔다고 한다.
도효자는 전설적 인물이 아니고 실재 인물이며 지금도 마을 곳곳에 도효자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也자 모양이라고 하여 야목이라고 한다.
휴게소나 주유소는 폐업을 한지 오래이고
휴게소 넘어 가을 산 자락에 그림같이 펼쳐진 소맥산 관광농장이 아름답다
넓은 공터에는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족들이 off road 를 즐기는 긴 행렬이 이어진다.
저수령 아래 단양 방향, 농장..좌측 도로는 벌재로 향하는 새로 난 도로.
조촐한 알루미늄 밥상에 냄비를 올려놓고
김치찌게로 맛있는 점심을 한다.
복잡하게 준비 할 것 없이 이처럼 간단하게(?) 먹는 점심이 오히려 좋아 보인다.
막걸리 한잔에 점심을 마치니 눈이 저절로 감긴다.
가을이 성큼 코 앞으로 다가왔다.
코스모스가 길가에서 하늘 거릴때는 그래도 참을 만 하지만,
만산에 단풍이 붉게 물들고
능선에서 억새가 바람에 나부낄 때면 출렁이는 마음을 어떻게 주체할까…..?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시월은 31일 밖에 안되고 그나마 휴일은 열흘 정도인데
일렁이는 마음을 다 잡기에는 날짜가 턱없이 모자란다…
메모
고향 구간을 지나 오면서 말이 많아졌습니다.
흙목 정상에서 가재봉으로 가야 송이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산행을 마치고 논두렁님에게 확인 하면서 알았습니다.
더구나 논두렁님은 시골에 전화를 해 보니
이번 주(9월 마지막 주)에 비가 오고 나면 다음주 중에는 제법 올라 올 거라고 합니다.
그때, 쑥맥 회장이 휴식을 하면서 시범을 보여준 대로 채취하면 되겠지요.
예천은 몇가지 흥미로운 기념물과 보물이 있습니다.
석송령石松靈
저수재에서 예천읍 방향으로 능선 2개를 넘으면 감천면 천향리 석평 마을 입구에
600년이 넘은 소나무 석송령이 마을 입구에 누워 있습니다.
가옥 3채와 현금 500만원 이외에 토지 5,000제곱 미터를 소유하고 있어서
재산세를 납부하는 洞神木 입니다.
황목근黃木根
용궁면 금원 마을에 있는 수령 500년이 넘는 팽나무는
일제시대 주민들이 쌀을 모아 마련한 공동 재산을 이 나무 앞으로 등기 이전 하면서
지금은 이 나무가 소유한 재산이 12,900제곱 미터에 이르고 매년 토지세를 납부 합니다.
용문사
저수령에서 남쪽으로 분기하는 산 중턱에 우리나라에서 아주 귀한 보물을 지닌,
1140년 전에 창건한 용문사가 있으며
회전식 불경 보관대라 불리는 윤장대輪藏臺,
법당내에 안치된 대추나무로 깍은 삼존불,
삼존불 후면을 장식한 대추나무로 만든 탱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읍니다.
회룡포回龍浦
안동의 하회, 영주 무섬리의 무섬마을 물 도리와 함께 예천군 용궁면에 있는 회룡포는
강줄기가 거의 360도 크게 휘돌아 강 마을은 마치 학의 목덜미에 앉은 형상으로서.
강을 건너는 다리도 구멍 뚫린 철판을 깔아놓아 뿅뿅 다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국궁의 고장
물소의 뿔을 가공하여 국궁을 만드는 인간 문화재가 예천에서 활을 만들고 있다.
그런 영향인지 예천여고에서 시작한 양궁의 역사가 김 진호 선수를 배출하여
세계 양궁 1등 국가로 발 돋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읍내 곳곳에 양궁 활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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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풍들면 더 아름다운 죽령~~~저수령 대간길입니다...몸은 못갔지만 마음은 글로써 다녀옵니다
종이배님은 단잠을 주무시나요?///
솔향 안녕하세요
종이배님 뱀나오면 어쩌려구,,,그리고 흐흐님 산행모습보다 멋지십니다~다시한번 산행기로 대간길 즐감하고 갑니다^^*
산행기 잘 간직혀야지,,이젠 기억이 가물 가물해서리~~즐감합니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옛날 일이 되어부렀네요.
이렇게 보니 엄청 머나먼 길이었는데, 또다시 잘 보고 갑니다.
아 고것이 천남성이었군요. 혹시 산삼이 아닐까 했는데 .....
차근히 꼼꼼히 기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특히 참고 할 사항등을 챙겨 주시니 많은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