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金春秋
출생사망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년). 신라 제29대 왕으로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신라 왕권의 전제화를 확립했고, 당나라의 율령제를 모방하여 관료 체제를 정비했으며, 구서당을 설치하여 군사 조직을 강화하는 등 본격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백제부흥군을 격파했고, 이어 고구려 정벌군을 조직하던 중 사망했다.
삼국 통일의 주역
태종무열왕은 신라 제29대 왕으로 당나라군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진지왕의 손자로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춘추(春秋)라고 한다. 이찬(伊飡) 용춘(龍春, 龍樹)의 아들로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의 딸, 즉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를 배필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진지왕 이후 왕위 계승 서열에서 벗어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롭게 진골 귀족으로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 군사적 결합이 완성되었다.
태종무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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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부부가 숨졌고, 이 사건으로 김춘추는 외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하지만 고구려의 생각은 달랐다. 고구려는 진흥왕 시절, 신라가 고구려를 공습해 한강 상류 지역을 빼앗은 일을 거론하며 영토 반환을 요구했고, 김춘추는 그럴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고 말았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갇혔다가 겨우 탈출한 후 김유신과의 정치적 결속을 더욱 단단히 다졌다. 이를 바탕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구귀족 세력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인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김춘추가 외교 활동과 내정 개혁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정치적인 배경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데 실패하자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전력했다. 648년(진덕여왕 2), 그는 당나라로 가는 사신을 자처해 적극적으로 친당 정책을 추진했다. 무엇보다 당태종으로부터 백제를 공격할 때 군사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 훗날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2년 후 진덕여왕이 신라가 오랫동안 써온 자주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나라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채택한 것만 보아도 김춘추의 친당 정책이 신라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 알 수 있다.
김춘추가 추진한 내정 개혁도 친당적인 색채를 띠었다. 649년 의복과 머리에 쓰는 관을 중국식으로 따르게 한 중조의관제를 채택했고, 2년 뒤에는 조정의 모든 신하가 설날 아침 왕에게 하례를 올리도록 하는 정조하례제도 시작했다. 이런 정책은 실질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데 뒷받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를 후원 세력으로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하여 사전 작업의 일환으로 이런 정책을 추진한 것으로 해석된다.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구귀족들은 상대등 알천을 왕위 계승자로 천거했다. 하지만 곧 화백회의에서 친당 외교와 내정 개혁을 통해 급성장한 신귀족 세력을 기반으로 한 김춘추가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김춘추는 일시적으로 제휴했던 구귀족의 대표인 알천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52세의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것은 신라 왕조에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왕족이었지만 그가 진골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진평왕 때부터 유지된 ‘성골 출신 왕’의 전통이 깨졌다.
화백회의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 무열왕은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해 왕권의 정통성을 강조했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율령을 반포해 왕권을 강화했다. 이듬해에는 원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해 왕권을 조기에 안정시켰다. 게다가 다른 아들인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 주어 그들이 각자의 권력 기반을 잡도록 해 주었다.
656년 당나라에서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임명하고 3년 뒤에는 역시 당에서 돌아온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앉혀 친당 정책과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이런 친당 정책으로 그는 당나라로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되었다.
660년 왕권 강화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이전의 상대등들과 달랐다. 옛 상대등들은 대체적으로 왕권을 견제하거나 왕위 계승 순위에서 경쟁자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무열왕의 최측근이었다. 이는 귀족 세력이 왕권을 견제하는 본래의 역할을 버리고 오히려 왕권에 밀착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귀족 세력은 점차 약해졌고, 행정 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무열왕 대의 대외 관계는 친당 정책을 기본으로 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해 신라의 북경 33성을 습격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리고 660년부터는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섰다. 소정방의 군사 13만 명이 그해 5월 백제를 공격했고,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 계백(階伯) 장군의 군사 5,000명을 격파한 뒤 당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웅진성으로 피란을 갔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융(扶餘隆, 웅진 도독)이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무열왕은 백제의 옛 관료 가운데 항복한 사람들에게는 신라의 관등을 주는 회유책도 썼다.
당나라 기마병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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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은 곧이어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했지만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위 8년 만의 일로 향년 59세였다. 무열왕 사후 그의 직계 자손들이 8대에 걸쳐 왕위를 이어감에 따라 신라는 120년간 정치적 황금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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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