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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수지침 대구 복현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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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발해 스크랩 발해 황제의 나라가 되다 대흠무
오분순타 추천 0 조회 294 11.09.03 05: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발해 3대 대흠무 문왕은 황상(皇上)!~

 

 

1949년. 중국 지린성 둔화 육정산(敦化 六頂山)

 

깊은 밤.

한 남자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학교 교장.

학교 운영비가 부족해 대책을 찾은 것이다.

 

이 산엔 왕가의 무덤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삽 끝에 뭔가가 걸렸다.

 

글씨가 새겨진 돌.

묘지명이다.

 

글씨를 읽던 그는 한 글자에서 시선을 멈췄다.

 

'황상'.

무덤 주인의 아버지는 황제였던 것이다.

 

 

스스로 황제라고 부를 만큼 자신감 넘쳤던 통치자.

그는 대조영의 손자 문왕 대흠무다.

 

"황상(皇上)! 황제를 뜻하는 말입니다.

황제는 여러 왕국을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란 뜻입니다.

 

발해가 건국되었던 1,300년전,

황제라는 호칭은 중국만이 사용하던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발해에 황제임을 공언했던 왕이 있습니다.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 3대왕이었던 문왕, 대흠무입니다.

 

대흠무가 황제라는 호칭을 쓴 것은

발해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선언한 것으로 당시로선 무척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문왕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발해의 첫 수도였던 중국 지린성 둔화.

시 외곽 동쪽에 육정산이 있다.

 

 

육정산 고분군.

산 중턱엔 발해 왕들의 고분이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중국 정부의 엄격한 통제로 외국인은 접근할 수 없는 곳.

1949년 이곳에서 발해의 공주, 정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무덤은 11미터에 이르는 통로 끝에 위치해 있었다.

 

돌로 무덤칸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마무리석실봉토분이다.

 

천장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거대한 돌을 모서리를 줄여가며 어슷하게 줄여가다가

마지막에 큰 돌 한 개를 얹어 마무리한

모줄임 천장 구조, 고구려의 무덤 양식이다.

 

 

 

무덤 앞에선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정혜공주묘지석(貞惠公主墓誌石)'

발해인이 직접 남긴 최초의 기록이었다.

 

묘지석에 새겨진 700여 글자 중 491자만이 식별 가능했다.

판독 결과 묘지명엔 뜻밖의 정보가 담겨져 있었다.

 

 

공주의 아버지를 '황상'이라 부르고 있었다.

황상은 신하가 황제를 부르는 말!

이 황제는 과연 누구일까?

 

그의 존호는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나라를 크게 일으킨 왕이란 뜻이다.

 

주목할 것은 '대흥(大興)'이란 두 글자.

중국 사서에 그 뜻을 추적할 단서가 있다.

 

신당서에 의하면

발해 무왕의 아들 대흠무가 즉위하여 정한 연호가 '대흥'이었다.

 

 

 

발해의 연호 대흥,

이는 중국의 연호를 쓴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독자 연호는 황제의 권한이었다.

 

739년 발해 3대 대흠무는 문왕에 즉위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묘지명에선 그가 무공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전한다.

 

문왕은 즉위 직후부터 아버지 무왕에 이어 영토확장에 나섰다.

불열, 월희, 철리 등 말갈의 부족을 복속하며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송나라 백과사전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당시 사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송나라 때 편찬된 '책부원구'입니다.

수당시대 4대 백과사서 중의 하나죠.

중국 역사 상 중국 동북 지역의 말갈족들에 대한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에는 그런 기록들이 매우 많습니다."

                                                             - 리 후웅 빈 교수, 북경중앙민족대학 역사학과

 

책부원고에는 주변 말갈 부족들이 당에 바친 조공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그런데 문왕 즉위 후 불열말갈과 월희말갈 등 조공이 끊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부족이 발해국에 통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발해국에 통합된 이후에는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 리 후웅 빈 교수, 북경중앙민족대학 역사학과

 

이들 부족들의 조공이 완전히 사라진 때는 741년 3월, 개원 29년이다.

문왕은 즉위 4년 이후 발해 북쪽 연해주의 말갈 세 부족을 흡수한 것이다.

 

러시아 연해주 중심부에 위치한 우스리스크.

우스리스크 남쪽에 오래된 성터가 있다.

 

목재로 틀을 세운 후

진흙과 부식토를 섞어 10센치 두께로 다져

그렇게 40단을 쌓아올린 판축토성이다.

 

 

이 성은 8세기 전후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런 성벽을 쌓으려면 백 미터를 쌓는데 천 명을 동원해서 한 달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 니키틴 교수, 블라디보스토크 기술대 고고학과

 

성터에서는 이곳이 발해의 땅이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솔빈의 돌.

 

 

 

돌궐문자가 새겨진 유물이다.

판독 결과 석판에 새겨진 글자는 '수이우빙'이었다.

 

"수이우빙은 지명입니다.

발해 동부에 있던 솔빈이라는 행정구역의 이름이죠."

                                                     - 니키틴 교수, 블라디보스토크 기술대 고고학과

 

솔빈은

신당서에도 등장하는

발해 지방행정의 이름이다.

 

석판은 이곳이 발해의 솔빈부였음을 증명한다.

문왕은 이곳 연해주 우스리스크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것이다.

 

우스리스크 동쪽 300킬로에 위치한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이곳에서도 발해의 성터가 발견되었다.

 

니콜라예프카 성에 들어가려면 원형으로 성을 감싼, 또 하나의 성문을 지나야 한다.

옹성(饔城)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한 구조로 고구려의 대표적 축성법이다.

 

"이런 원형 축성 기법이 처음 생겨난 때는 고구려 때이고

이 후 백제시대를 거치며 발전하게 됩니다.

 

러시아 전역에 이런 형태가 나타난 것은

11세기 경 고구려 축성 기법이 전해지면서 부터이고,

그 후 한반도 양식의 도성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초기부터 이런 형태의 성을 만들었습니다."

                                                            - 니키틴 교수, 블라디보스토크 기술대 고고학과

 

학자들은 이 성이 고구려에서 발해시기 사이에 조성되었으며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것은 문왕시대라고 추측하고 있다.

 

성터에선 발해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물고기 모양 '청동 부절(符節)'이다.

 

 

 

부절은 일종의 신분증으로

안쪽에는 주인의 이름과 신분이 씌여 있다.

 

부절의 주인은 섭리계,

그는 좌효위장군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부절은 두 조각으로 나눠

한 조각은 중앙정부가

다른 한 조각은 본인이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신분을 보증했다.

 

"아마도 섭리계는 귀족이었을 것입니다.

아 지역의 수장(首長)으로 여기 살면서 통치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대표였을 것이고 발해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니키틴 교수, 블라디보스토크 기술대 고고학과

 

문왕은 러시아의 동쪽 끝까지 관리를 파견했던 것이다.

솔빈부와 더불어 발해 15부 중 하나인 정리부(定理)였다.

 

발해 통치 체제인

5경 15부 62주가 문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그가 확보한 땅은 사방 5천 리.

고구려 전성기 때보다 넓은 영토였다.

 

문왕 대흠무.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정복자였다.

 

 

 2. 상경 천도, 3성 6부 행정체제, 그리고 지방세력과의 결합!~

                    문왕은  '사방 5천 리'를 다스렸다!~

 

 

 "당의 입장에서는 계속 영토를 넓혀 가는 대흠무의 행보가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신당서에 당의 불편한 심기가 엿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예가 죽자 그 나라가 사사로이 무왕이라고 했다'

(武藝死 其國私諡武王 - 무예사 기국사시무왕)

 

여기에서 주목한 글자는 '私諡(사시)', 사사로이 시호를 정했다는 표현입니다.

당의 허락없이 선왕의 시호를 정한 대흠무의 태도가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은 섣불리 발해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발해는 이미 무왕 때 무력 투쟁을 통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입증했고 또 날로 강성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渤海鎭)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곳곳엔 아직도 '발해'라는 지명의 학교와 상점이 있다.

 

상경성(上京城).

이곳이 바로 발해 수도상경용천부가 있던 곳이다.

 

상경성은

목단강 유역의 평탄한 분지 가운데 세워져 있다.

 

성의 둘레만 16킬로미터,

발해의 성 중 가장 큰 규모다.

 

756년 아버지 무왕이 중경으로 천도한 지 수십 년만에

문왕은 이곳 상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상경성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당의 수도 장안성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동서로 긴 장방형의 성은 백성들이 사는 외성과 궁전이 있는 내성으로 구분되는데

성 가운데 곧게 뻗은 주작대로를 따라 82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궁중에는 성문 오봉루를 비롯해 다섯 개의 궁전과

팔보유리정이라는 우물과, 어화원이라는 정원까지 있었다.

 

 

문왕은 드넓은 평원에 새로이 도성을 조성하고

거대한 궁전과 3성 6부의 중앙행정기구를 갖추었다.  

 

"발해가 강역을 확장을 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상태에서

왕위를 물러받은 문왕이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했을 때

우선 국가의 초석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겠죠.

 

초석을 다지는 데는 물리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있을텐데

물리적인 요소가 행정체계와 제도의 마련,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겠습니다."

                                                                                        - 김진광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문왕은 상경 천도 후 사방 5천 리의 영토를 어떻게 다스렸을까?

 

중국 지린성 헤룽시에 용두산(龍頭山)에 그 단서가 있다.

1980년 이곳에서 또 하나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벽돌로 지은 지하무덤이 나온다.

 

널방의 벽면엔 채색벽화가 나온다.

최초로 확인된 발해인의 모습이었다.

 

무덤의 내력을 밝힌 묘지석은 널방의 입구에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이 있었다.

 

'황상'

정혜공주의 무덤에 이어 또 다시 황상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정효공주(貞孝公主).

정혜공주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나온 발해의 공주였다.

 

비문은 공주가 용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우아한 품성을 지녔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정효공주가 정혜공주의 동생으로 문왕의 넷째딸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딸에 이어 넷째딸의 묘지에서도 발견한 황상,

문왕은 재위 기간 내내 황제의 직위를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정혜공주가 첫 수도 동모산 인근 왕릉에 묻힌 반면

넷째 정효공주는 중경에 따로 묻힌 것이다.

 

 

 

정효공주는 왜 왕실의 묘에 안장되지 않고 지방에 따로 묻혔을까?

 

발해 연구가 김종복 박사는 비석에 있는 한 단어에 주목한다.

그것은 '배장(陪葬)', 정효공주는 중경에 남편 곁에 함께 묻힌 것이다.

 

"정효공주의 남편은 어쩌면 무왕 말엽이나 문왕 초기에 중경에 천도했을 때에

지역의 유력자와 혼인 관계가 이루어졌다 라고도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 김종복 박사, 성균관대 박물관

 

넓은 영토의 발해를 다스리기 위해 문왕은

아버지 무왕이 세운 중경을 떠나 상경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중경을 비롯, 지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했다.

왕이 선택한 전략은 혼인을 통한 지역과의 유대였다.

 

문왕은 정효를 중경 지역의 유력자와 혼인시켰다.

지방 세력과 결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는 전략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부부의 금슬은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웠다."

 

부부 사이가 좋으면 나라도 든든할 터였다.

 

"지방 통치의 수단으로써

왕실과 지방의 혼인을 통해 가지고

그 지역을 복속한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도 있죠."

                                                                      - 김종복 교수

 

딸은 지방 통치를 위해 파견한 아버지의 특사였다.

혼인으로 맺어진 지방과 중앙과의 관계는 단단했다.

문왕은 정교한 행정체계와 치밀한 지배전략으로 사방 5천 리를 통치했다.

 

 

3. 당, 일본, 신라 사이 문왕의 탁월한 국제전략 

                     중.립.외.교!~

 

 

"문왕은 드넓은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지방 중심지를 다섯 개로 만들고(5경)

현지 세력들과 혈맹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새로운 지배체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발해를 안정시켜 나가려는 문왕의 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왕의 통치 전략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그 빛을 발했습니다."

 

756년 발해에 당의 장수가 찾아온다.

 

그는 뜻밖의 요청을 했다.

당에 군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세계 최강의 당이

발해에 병력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 이유를

일본의 역사서인 속일본기(續日本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녹산(祿山). 

그 이유는 안녹산의 난이었다.

 

당 현종은 애첩 양귀비에 빠져 있었다.

양귀비(楊貴妃)는 수양 아들이었던 안록산은 그 배경으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다.

 

 

 

753년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했다.

 

15만에 달하는 안록산의 군대는

낙양에서 당군을 대파하고 장안까지 이르렀다.

 

 

 

반란군의 기세에 놀란 당 현종은 급기야 수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피신하게 된다.

당은 결국 새로운 강국 발해에 손을 내밀었다.

 

'안녹산을 공격하겠으니 문왕께서는 기병 4만 명을 일으켜 적을 평정하는데 지원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발해는 그가 다른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여 사신을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 속일본기

 

문왕의 판단은 적중했다.

군대를 요청한 것은 당 황제가 아니라 안록산의 반란군이었다.

 

일 년 뒤 당은 또 다시 사신을 보냈다.

반란이 수습되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천자께서 돌아왔고 이미 적(안녹산)을 패주시켰습니다."

 

문왕은 황제의 요청을 묵살했다.

 

사신을 잡아두고

당 반란군과 사이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몸값을 올리는 전략을 취한 것이었다.

 

"문왕은 그 일을 믿기 어려워 사신을 또 붙잡아 두었다."  - 속일본기

 

"당나라 중앙 군대와 반란군 사이에서

아주 실리적으로 어느 쪽 요구도 안 들어주면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침으로 인해서

양쪽 다 아쉬우니까 국제 외교 관계에서도 우위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윤재운 박사, 동북아역사재단

 

그로부터 일 년 뒤,

이번에는 일본이 찾아왔다.

 

일본은 당이 흔들리는 기회를 틈타

한반도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발해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담하게도 신라 정벌을 꿈꾸고 있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무왕의 당 정벌 때 당을 도왔던 신라.

발해에게도 신라는 눈에 가시였다.

 

758년 9월. 

문왕은 일본에 보국대장군 양승경(楊乘慶)을 파견한다.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

일본의 천황은 발해사 장군 양승경을 크게 환대했다.

 

직접 신라 침공을 설명하며 발해의 원조를 호소했다.

그는 양승경에게 엄청난 선물까지 하사했다.  

외교 전례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여악(기생)과 면 1만둔을 하사하다."  - 속일본기 

 

"이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입니다.

선물을 이렇게 많이 제공했던 예가 없습니다.

그것도 일본 천황이, 순인(淳仁) 천황이 직접 하사한 것으로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 우에다 마사키 명예교수, 교토대 사학과

 

이후 일본은 발해를 믿고 정벌을 추진했다.

그러나 문왕은 당시 국제 정세를 냉철히 파악하고 있었다.

 

안녹산의 난은 이제 수습 국면이었다.

 

762년 10월.

문왕은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왕신복(王新福).

벼슬은 정당좌윤 문관이었다.

 

계속 해서 무관을 보내던 전례를 깼다.

신라 정벌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것은 명확한 거부의 뜻이었습니다.

왜 문관이 왔는가?

그것은 대흠무가 일본의 신라정벌 계획에 협력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 우에다 마사키 명예교수, 교토대 사학과

 

8세기 중반 발해 주변의 모든 국가들은 발해의 힘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왕은 쉽게 칼을 들지 않았다.

문왕의 외교만으로도 발해는 계속 이기고 있었다.

 

 

4. 솔빈부의 말 수출!~

                           무역은 외교전략이었다!~ 

 

 

"당 현종은 즉위 초기엔 태평성대를 이루어 나갔지만

며느리 양귀비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 이후에는 국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종은 안녹산의 난을 수습하지 못했고

그 기회를 틈타 일본은 당의 우방인 신라를 넘보았습니다.

 

문왕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정확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중국 산둥반도의 펑라이시.

당나라 당시 이곳의 이름은 등주였다. 

 

등주의 한 마을에 발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중국 펑라이시 창위이촌.

 

"이곳은 산둥성 펑라이시

종루(鐘樓), 남로(南로), 동쪽의 창위(長裕)라는 마을입니다.

 

당나라 시대에는 이곳에 발해인과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무역을 하기 위해 왔다가 묵었던 국빈관이 있었습니다."

                                                                       - 고우 센 둥 교수, 로동대학 역사학과

 

등주는 동아시아 제일의 무역항이었다.

 

일본의 구법승 원인(圓仁, 794~864)

 

그가 당나라를 여행하며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발해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발해관은

사신들이 머무르는 숙소이자 무역관이었다. 

 

문왕시대 발해는

당에 50여 차례 사신을 보냈는데

이들은 모두 상인들을 동반했다. 

 

이들은 모두 무역을 했던 것이다.

 

문왕은 당과의 외교활동을 무역의 기회 용했다. 

당나라 상인들은 발해 특산품에 열광했다.

 

발해는 당에 농산물과 수산물을 다양하게 수출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솔빈의 말이었다.

 

 

 

문왕은 어떻게 말을 교역했을까?

 

러시아 연해주 체느냐치노.

솔빈부의 땅이다.

 

1997년 이곳 체느냐치노에서 발해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무덤에선 지하에 구덩이를 파고 바닥에 시신을 넣는 토광묘과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목관을 안치하는, 일명 돌광무덤이 함께 발견되었다.

 

 

 

한국과 함께 십 년째 공동발굴을 하고 있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체느냐치노 유적에선 토기, 창, 장신구 등 발해의 유물이 다량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곳이 솔빈부의 말 생산지임을 증명하는 유물도 나왔다.

청동으로 만든 기마인물상.

 

인물상에는 무인의 갑옷은 물론 말의 갈기와 고삐까지 표현되어 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말을 생산해왔다는 증거다.

 

 

 

"8세기 말이나 9세기 초에 발해로 흡수된 말갈족들

솔빈 지역에서 오랫 동안 말을 생산해 왔음을 증명해주는 청동상입니다.

 

고대 문헌을 보면

발해의 가장 가치가 높은 수출품으로 솔빈 지역의 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니키틴 교수

 

체느냐치노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말 생산지이다.

넓은 초원과 땅에 영양분이 많아 말이 튼튼한 것으로 유명하다.

 

발해의 이 말이

당나라 등주로 수출된 것이다.

 

 

 

당나라 상인들의 거래가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말은 배를 통해 운반되었다.

 

"(말의 거래가)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  - 구당서

 

무역선은 발해의 대외 무역항인 박작구를 출발해 압록강 하구로 나아갔다. 

발해만을 가로질러 산둥반도로 나아가는 길이 당시의 무역로였다.

 

 

배가 도착한 곳은 펑라이시.

당시 등주였다.

 

당의 제일 무역항이었던 등주.

등주는 바다에서 들어오는 당의 관문이었다. 

 

"발해 최고의 수출품인 솔빈의 말은 바로 이곳 등주까지 배로 운반되어 팔려나갔습니다. 

당시 말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오늘날의 전차처럼 전쟁터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전략 물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잖습니까?

아무리 이익이 많이 난다고 해도 당에 말을 판다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문왕 대흠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당시 문왕과 말을 교역했던 사람은

이정기(李正己)였다.

 

요동지역을 관할하던 펑로절도부의 관원이었던 이정기

안녹산의 난을 틈타 펑로치청번진을 독자적으로 장악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패망한 나라의 유민으로 당의 핍박 속에 살아왔던 이정기는 목표가 있었다. 

그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독립왕국을 이루며 점차 영역을 확대하며 중원정벌을 노리고 있었다. 

 

 

  

문왕은 이런 이정기에게 말을 팔았다.

이 무역으로 문왕은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큰 이익을 챙겼다. 

 

당에 대항하는 이정기에게 전략물자인 말을 파는 것은 당을 압박하는 효과가 있었다.

같은 고구려인인 문왕과 이정기의 밀착은 당에게 큰 위협이었다.

이른바 민족공조가 시작된 것이다.

 

"발해측에서는

당시 최고 히트상품이었던 비단을 싼값에 들여올 수 있는 것이고,

 

치청번진은

당나라 중앙정부나 주변 번진과의 전투에서 끊임없이 소모되는

전략물자인 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도

이정기의 치청번진이나

발해 문왕 때 중앙정부, 둘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 윤재운 박사

 

문왕의 전략은 적중했다.

당 숙종은 계속해서 더 높은 관직을 수여했다.

어떡해든 발해를 달래야 했던 것이다.

 

"대력(766~779년) 중 계속해서 문왕의 벼슬을 올려주어 정일품 사공태위에 이르렀다."

 

문왕에게 무역은 곧 외교였다.

그리고 무역에서의 우위는 외교와 정치의 승리로 이어졌다.

 

 

5. 문왕의 동북아 평화적 네트워크!~ 

               바다 동쪽 강성한 나라 '해동성국'!~

 

 

"문왕은 같은 고구려 출신인 이정기와 사상 유례가 없는 민족공조를 이뤄냅니다.

이 두 사람의 협력은 당으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하는 이정기나

발해를 강국을 만들고자 했던 문왕, 둘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박작구에서 발해만을 거쳐 산둥반도로 이어지는 이 길은 문왕의 무역로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문왕의 아버지 무왕이 등주를 정벌하기 위해 사용한 바로 그 길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군사를 이끌고 갔던 그 길을 아들은 물자를 싣고 가서 발해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셈입니다.

발해는 이렇게 수륙 양면을 통해서 주변 국가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했습니다. "

 

북한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러시아 크라스키노.

1958년 이곳에서 발해의 성이 발견되었다. 

 

크라스키노성은 돌로 성을 쌓고 옹성 방어시설을 구축한 전형적인 고구려식 성이었다.

발굴 결과 성의 중요도를 말해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왕성급 도성에서만 출토되는 인동초 무늬 벽돌이다.

 

 

 

"벽돌의 발굴은 매우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크라스키노가 과거 발해시대에 이 지역의 행정 중심 도시

즉, 주도(州都)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이죠."  

                                                                                - 니키틴 교수

 

성은 둘레가 1.2킬로미터, 내부 면적이 13만 평방미터에 이른다.

 

 

 

발해는 왜 이곳에 이렇게 거대한 성을 건설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다 때문이었다.

동해로 열린 포시에트만에 바로 인접해 있다.

 

발해 5경 중 하나인 동경에 속한 크라스키노는 발해의 대표적 항구였다.

 

발해의 배들은 크라스키노에서 출발, 동해를 횡단해 일본으로 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能登)반도다. 

1,300년 전 후쿠라(福浪)항은 동해를 건넌 발해 배들이 드나들던 일본측 항구였다. 

 

지금도 후쿠라항엔 발해 사신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바다길은 두 나라가 인정한 일종의 공식 교통로였다. 

이 길이 이른바 '일본도'다.

 

 

 

 

 

"9월 하순이 되면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부는 북서풍이 안정됩니다.

아마도 그 바람을 타고 이 곳으로 왔을 겁니다.

지금이 12월인데요, 발해의 배는 11월, 12월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 고지마 요시타가 교수, 가나자와 가쿠인 대학 문화재학과

 

 발해 사신들의 바닷길은 육지로 이어졌다.

 

당시 수도였던 나라.

 

일본 천황이 살던 평성궁(平成京)의 발굴 작업이 수십 년째 진행되고 있다.

이곳에서 당시 발해 사신이 일본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나라시문화재연구소.

 

"이것이 1990년경 평성궁 좌경32방이라는 곳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목간입니다."

 

목간은 종이의 대용품이었다.

희미하게 발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발해사(渤海使)'

'교역(交易)' 

 

 발해 사신은 이 곳에서 교역을 했던 것이다.

 

 

 

"8세기 전반, 727년에는 발해가 교역보다는 정치적인 의도로 외교사절을 파견했었는데,

발해를 비롯한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점차 무역, 교역의 의도가 짙어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 이노우에 가즈토 실장, 나라문화재연구소 국제유물연구실 

 

사신들은 당시 무엇을 팔았을까?

 

목간엔 당시 주요 교역품도 씌여 있다.

 

그것은 초피, 즉 검은 단비의 가죽이었다.

검은 단피는 한반도와 중국, 시베리아에서 사는 족제비과에 동물로

당시엔 그 가죽이 황금에 비유될 정도로 가치가 높았다.

 

"제일 대표적인 게 흑초라고 불리는 담비가죽이거든요.

현재도 왕정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 같은 경우

대관식에 참여하는 유니폼을 검은 담비가죽으로 만들 정도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굉장히 인기가 있고 가치가 높은 상품입니다." 

                                                                                                 - 윤재운 박사

 

당시 일본에서 초피옷은 부와 권위를 상징했다. 

 

한 번에 일곱 벌씩 겹쳐 입은 사람들이 나타날 정도로

일본의 귀족들은 경쟁적으로 초피를 애용했다.

 

초피의 인기 가열로 국가의 재정 파탄까지 초래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급기야 법까지 만들어 초피의 소비를 규제했다.

 

 

 

 "이것은 정도가 지나치지 않도록 제한을 둔 것입니다.

입는 것을 제한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입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 우에다 마사키 명예교수

 

발해는

이처럼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를 비롯해

당, 신라, 거란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있었다.

 

 

 

발해로부터 뻗어가는 다섯 개의 무역로는 곧 동아시아의 네트워크였다.

발해는 그 중심에 섰던 것이다.

 

 

 

문왕은 자신감을 나라 밖으로 적극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771년 6월.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무례하다고 여겼습니다.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거죠."

                                                                        -  우에다 교수

 

문왕은

일본을 발해보다 낮추어 부르고 있었다.

 

 

 

구생(舅甥)

문왕은 발해를 장인, 일본을 사위로 규정했다.

발해가 일본의 어버이 나라라는 의미였다.

 

"문왕 내가 중심이고 일본 너희들은 주변에 있는 부속국이다. 제후라는 것이죠."

 

문왕은 이런 자신감을 두 딸의 묘비에도 새겼다.

 

그것은 '황상(皇上)'!

발해가 그 누구의 규제도 받지 않는 세상의 중심이라는 선언이었다.

 

발해는 강력한 자신감과 긴밀한 네트워크로 동아시아의 강자로 우뚝 섰다.

그리하여 세계 최강자로 인정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의 강성한 나라를 이룬다.

 

문왕 대흠무!

동아시아의 모든 길을 발해로 통하게 한 그는 평화적 네트워크로 세상의 중심이 된 진정한 황제였다.

 

"발해는 다섯 개의 길을 통해 외교와 무역에서 우위를 독점했고 이를 정치적 승리로 확보했습니다.

 

발해 3대 대흠무 문왕!

그가 만든 길은 칼과 창으로 만든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과 물자가 흐르는 길!

평화적 네트워크를 통해 발해를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우뚝 세웠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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