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7 : 2차 침략과 처인성 전투 승리
04.09.18
몽골군의 제 2차 침략이 벌어질 당시, 대칸 오고타이는 금나라 정복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살리타이는 아마 고려의 북방이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요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출병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가 금나라 정복에 참전하고 있었다면 지리적인 위치상 고려에 대한 원정을 다시 개시하기는 어려웠을테니 말이다.
2차 침략에서 몽골군은 대구까지 내려왔다. 1차 침략의 남진 한계선이 충주와 청주였음을 감안하면, 저번에 비해 좀더 깊숙이 쳐들어 온 것이다. 그들이 대구까지 내려온 사실은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이 이때 불태워 버렸던 것에서 확인된다.
팔공산에는 공산성이 있는데, 몽골군은 아마 이 공산성을 공격하면서 인근의 부인사를 약탈, 방화하면서 대장경판을 불태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소실된 대장경판은 고려 현종 때 요나라 침략군과 싸우면서 조판한 것이었다. 이 대장경판을 대신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팔만대장경이다.
대구까지 내려간 몽골군은 본대가 아니라 선발대였다. 그것은 살리타이가 그해 12월 처인성(경기 용인군 남서면)전투에서 전사하자, 몽골군이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몽골군은 내려오면서 이미 천도하여 텅 빈 개경을 거쳤고 이때, 살리타이는 배를 만들어 직접 강화도를 칠 계획도 세웠다. 이것은 변여라는 사람을 사로잡아 심문하면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와 뱃길을 물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살리타이는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이후의 침략에서도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강화도는 너무나 가까워 수전을 치를 것도 없는 섬이고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나중에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청나라 군대는 너무나 쉽게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점령합니다. 몽골이 유목 민족이라서 수전에 취약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훗날 일본에 두 차례나 함대를 보내고 저 멀리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에까지 2만의 군대를 보냈던 몽골 제국입니다)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직접 정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개경에서 계속 남진하여 한양산성(서울)을 함락시킨 후, 광주(경기도)에서 살리타이는 최초로 큰 저항에 직면한다. 당시 광주부사이던 이세화는 주민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몽골군을 격퇴하고 성을 끝까지 지킨다. 1232년 (고종 19년) 11월경의 일이다. 이 광주산성은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추측된다.
이 공로를 인정하여 1235년 (고종 22년) 5월에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하여 요역과 잡세를 면제해준다는 고종의 조서가 발표되었다.
광주산성 함락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경상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해 남진하다 처인성에서 저항을 받는다. 처인성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아곡리에 있는 작은 토성으로, 그때는 처인부곡이라는 천민 지역이었다. 처인부곡은 당시 수주(수원)의 속현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처인 부곡민들은 모두 처인성으로 피난 와 있었다. 이곳에서 몽골군과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때는 1232년 12월 16일이었다.
살리타이를 사살한 사람은 승려 김윤후라고 전해진다. 이 처인성 전황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없어 여러 사서들에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내놓고 있는 데 하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 살리타이가 고려군의 집중 사격을 맞고 죽었다는 쪽과 다른 하나는 어디서 날아온 화살인지 모르는 유시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다.
어쨋든 이후 몽골군은 사령관이 죽자 전의를 잃고 바로 퇴각했다. 처인성 승첩은 몽골군의 2차 침략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몽골군이 물러가자 김윤후는 그 공을 인정받아 무반의 최고 계급인 상장군을 제수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윤후는 그것을 사양했다. 그는 처인성에서 싸울 때 자신은 활도 화살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살리타이를 죽인 것도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섭랑장(정 6품)으로 고쳐 벼슬을 주었다.
김윤후는 그 후 상장군(정 3품)에 오르고 동북면 병마사를 거쳐 좌복야(정 2품)까지 올랐다. 그런데 1253년 (고종 40년) 몽골의 5차 침략 때 김윤후는 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충주산성에서 노비들까지 끌어 모아 몽골군을 물리친 것이다. 처인성 전투에서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의 헌신적인 전투의 결과였음을 입증한 셈이다.
처인성 승첩은 40년 대몽항쟁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