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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으음. 금강경강의가 두 번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번하고 다음 주까지 하면 금강경을 끝내야 돼서, 앞에 부분 지금까지 많이 안 했지만. 금강경의 전반적인 의미들을 전달하느라고 시간이 조금 지체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었던 부분을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나오는 부분들은 주로 앞에 나왔던 부분이 반복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지금까지 공부를 잘하셨다면 나머지 부분의 이해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그래서 남은 두 시간 동안은 조금 속도를 내서 앞에 이미 했던 이야기들은 넘어가면서 이해위주로 해서 공부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218쪽 12분 존중정교분입니다. 바른 법을 존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분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 또한, 수보리야 이 경이나 내지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설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곳은 일체 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 아마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이 경전이나 경전의 사구게. 경전의 가르침의 핵심이 담긴 하나의 게송만이라도 설한다면 이곳은, 이 가르침이 설해진 곳은 마땅히 일체세간의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공양한 곳이고.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와 같이할 것이다.
부처님의 탑묘처럼. 불탑처럼. 이 가르침이 있는 곳에 공양할 것이라는 겁니다. 하물며 사람이 이 경전을 지니고 독송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만약에 여러분이 이 금강경을 독송하고 또 이 가르침을 지니고, 또 이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해설해주고 가르쳐주고 하게 된다면 사람이 지니고 독송한다면 그거야 말로 더욱더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하기를 부처님 불탑과도 같이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경전을 독송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공양받아 마땅한 것이 되고, 내가 바로 공양받아 마땅한 그런 이가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220쪽 밑에 부분에 보면 수지독송이라고 금강경에 나와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산스크리트 원문에 쓰여져 있는지를 읽어보면
< 하물며 이 법을 완전히 갖추어,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여 줌에 있어서이겠는가. > 수지독송이라는 말의 의미가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마땅히 공양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수지독송이 어떻게 하는 것이냐? 내가 금강경을 읽기만 해도 천인과 사람과 아수라가 나를 공양하느냐? 그것이 아니라. 이 법을 완전히 갖추고, 마음에 새기고, 또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고, 상세하게 상대방에게 설명해서 이 법을 전해주는 그것이 수지독송의 진정한 의미라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가르침을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스스로 지니고, 마음에 새겨 독송하고 이해하고 설해주게 된다면 그것은 천상세계, 하늘 신들이 와서 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자를 공양하고 찬탄해 마지않을 것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그러한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 왜 그러겠어요?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지독송이 단순히 금강경을 읽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갖추고, 마음에 새기고, 독송하고, 완전히 이해하고, 상세하게 타인에게 법을 설해주는 그렇게 한다면 당연히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진리를 성취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이나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것과 같다. 즉 이 경전이 있는 곳. 즉 이 불법승 삼보 가운데 법이라는 법보가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 불보와 또 존경받는 부처님의 제자가 있는 승보와 다르지 않다. 이것이 바로 불법승 삼보가 다르지 않다. 동체삼보. 그래서 부처님이 있는 곳이 법이 있는 곳이고, 법이 있는 곳이 승가가 있는 곳이라고 해서,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부처님이 있는 곳이고, 훌륭한 스승님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법을 설한 겁니다. 다음은 제13분 여법수지분입니다. 여법하게 이 경전을 수지하고 받아 지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 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지금까지 이 금강경이라는 가르침을 설했단 말이에요. 설했더니 지금 말씀하신 이 설한 법문을 어떻게 이름 지어서 어떤 경전이라고 이름 지을까요? 하고 묻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죠. <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 사실은 금강경이라는 가르침 자체는 어디에도 상을 지을 수가 없다. 이름을 짓고 모양을 지을 수가 없다 하는 가르침이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인데, 이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의 상은 뭐라고 할 것입니까? 라고 했더니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해라. 이 이야기거든요.
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인데 그 이름을 뭐라고 할 것이냐 했을 때 금강경이라고 이름을 해 줬단 말이죠. 이거는 그야말로 부처님의 자비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부처님은 본질만 얘기한다면 야~ 거기 무슨 이름을 지을 것이 있느냐? 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무슨 또 다른 이름을 또 다른 상을 지어서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우리 중생들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방편으로 아 이것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라고 설해주신 겁니다. < 그 까닭은 무엇인가. > 이렇게 경전의 이름을 새롭게 금강경이라는 상을 하나 내세우면서까지 금강경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 즉 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을 지었지만, 그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는, 반야경이라고 하는 이 경전의 이름, 그것 자체가 그것의 실체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즉 이 가르침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내가 이름은 지어주겠지만, 거기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가르침 자체에 어떤 진리를 실체화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을 또 다른 상으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다. 라는 가르침은 A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다만, A라고 방편으로 이름 붙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과 같은 대목입니다. 그래서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 금강경이라고 경전에 이름을 지어줬어요. 이름을 지어줬는데. (1)
2.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은 말씀해 주셨지만, 거기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고 하니,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더냐? 금강경이라고 지금 설했고, 금강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을 가르쳐줬지만, 사실은 설해도 설한 바가 없는 것이다. 금강경이라고 진리를 설했지만 여기서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한 것은 부처님이 평생 설법을 하셨지만 나는 한마디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 내가 설한 그 법에도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것이 절대적인 신앙이라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거기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만 방편으로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이 근기에 맞춰서 거기에 맞는 말씀을 해 주신 것일 뿐이지. 그 말씀 자체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 말씀은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 때문에 손가락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저 달을 바라봤다면 손가락은 필요 없는 것처럼. 뗏목을 타고 건너갔다면 뗏목은 필요 없는 것처럼 이 금강반야바라밀도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설법도 그것 자체의 어떤 전적인 지혜라든가 이런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뗏목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금강경이라는 경전자체의 자칫 우리가 신앙할 때보면 금강경이라는 경전 자체의 어떤 신비로운 힘이 담긴 것처럼 생각하고 금강경이라는 경전 자체만을 가지고도 내가 이 금강경을 어디 잘못해서 아이가 땅바닥에 확 던져버렸어요. 그러면 부처님한테 천벌을 받나보다 하고 깜짝 놀라면서 겁을 내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죠. 경전 자체에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을 태우려면 태울 수도 있죠. 부처님도 땔감으로 태워서 따뜻하게 쓰는 판인데, 여기에도 집착할 필요는 없는 거죠. 이 경전 자체가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 미진은 티끌입니다. 티끌. 이 세상을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 현대용어로 한다면 원자 전자 미립자,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뭐라고 이름을 부를 수 있겠으나, 여기 불교경전에서는 미진이라고 티끌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 이 우주 법계 전체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이 모든 우주 법계는 티끌로 이루어져 있지 않겠습니까? 미진이 모여서 사람도 이루어지고, 지구도 만들어지고, 바다도, 나무도, 산도 만들어 지는 거 아니겠어요?
이 우주의 구성요소인 가장 작은 단위인 미진을 많다고 하겠느냐? <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수많은 미진을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 이름이 미진일 뿐이지 그 미진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 일 뿐이다. > 다시 말해서 세계라는 것은 삼천대천세계라는 것은 이 우주를 구성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큰 단위를 의미한다면 미진은 가장 작은 단위를 의미합니다.
즉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공하다고 설하신 법문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고 했고,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인 미진에서부터 가장 큰 단위인 삼천대천세계에 이르기까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것이 공하다. 공하여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얘기에요. 미진은 미진이 아니라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거기 미진이라는 실체가 있지 않다는 얘기죠. 공하다는 것을 이런 논법으로 쓰고 있는 거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단위도 공하고 가장 큰 단위도 공하다. 이 우주 자체가 공할 진데 그 공한 가운데 어떤 법을 하나 정해서 그것이 공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 즉 가장 작은 단위인 미진에서부터 가장 큰 단위인 세계까지가 다 공하다 그랬어요. 우주 전체가 공하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 우주의 모든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진리와 이치를 깨달으신 부처님이라는 존재, 부처님이라는 존재는 실체가 아니냐? 이렇게 우리가 착각하기 쉽단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깨닫고 나면 상호가 32상으로 구족 되는 거 아닙니까? 32상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32가지 어떤 상호, 부처님에게 어떤 특색이 되는 상호를 의미하죠. 32상 80종호라고 해서 앞에 설명을 대략 했는데. 그렇게 부처님의 상호, 상호가 원만하시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특징을 얘기한단 말이에요. 그럼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런 상이 생긴다는 거죠. 그러나 그것 또한 실체가 아니다.
즉 미진도 공하며 이 우주 전체도 공하고, 그 모든 이치를 깨달은 부처조차 공한 것이다. 32상이라는 그것 자체도 그야말로 방편으로 설한 것이지 그 자체가 실체로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 그 하나의 모래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이 가르침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주는 복이 더 크다.
이 경전에 공을 설한 이 경전의 이름이 금강경인데, 금강경을 설했지만, 사실은 설한 바도 없고, 이 우주의 이치를 미진에서부터 크게는 이 삼천대천세계까지의 모든 법의 이치를 경전으로, 금강경이라는 경으로 설한 것인데, 그 대상이 되는 이 세계 또한 미진 또한 다 공한 것이고 또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부처조차 다 공한 것인데, 거기 뭐하나 붙일 자리가 있겠느냐? 일체 다 공한 것이다. 그리고 공하다고 설한 금강경의 이 가르침. 그러기 때문에 이 공하다라고 설하고 있는, 이 공함을 깨닫게 하는 길잡이가 되는 뗏목이 되고 손가락이 되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이야 말로, 아주 우리가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줘야 할 그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나오는 경전이다. 이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음은 제14분 이상적멸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상적멸, 상을 멀리 여의어 떠나면 적멸이다. 이게 금강경 가르침이 뭐겠습니까? 상을 여의면 그게 바로 적멸, 완전한 고요함이고, 완전한 깨달음이다. 이 소리에요. 대승불교의 모토가 파사현정(破邪顯正)입니다. 삿된 것을 파하면 그대로 현정. 바른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삿된 것만 파하면 본래 부처였기 때문에 본래 부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그래서 그 삿된 것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상입니다. 아상을 필두로 하는 수없이 많은 상들. 그래서 상만 타파하면 이상, 상만 여의면 바로 그자리가 적멸이다. 아상만 타파하면 공부는 끝난다. 깨달음은 그 자리에 현존하는 겁니다. 이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2)
3.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 이 수보리가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상을 타파하라는 상을 여의면 그야말로 적멸이라는 이 가르침을 듣고, 아주 희유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깨달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들어본 것으로서는 도저히 들어보지 못한, 그야말로 희유한 가르침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 하셨습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가르침을 얻어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지면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다. 즉 이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을 일으키면 아상을 놓아버리겠죠. 아상을 타파하겠죠. 아상을 여의면 바로 실상이 드러난단 말입니다. 파사현정 하듯이. 아상을 놓아버리는 그 자리가 바로 실상의 자리다.
그러나 실상이라고 하니까 아~ 아상을 타파하면 바로 실상이구나.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실상이라는 것이 뭔가 있구나. 실상이라는 뭔가 핵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의 엑기스가 있어서 실상을 우리가 찾아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해서 실상이라는데 또 집착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도 없애주기 위해서 이 실상이라는 것 또한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상이라고 이름 한 것일 뿐이다. 라고 함으로써 아상을 타파하면 바로 그 자리가 실상이지만 그 실상이라는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얘기하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삶 자체가 그대로 실상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진실 된 모습이다. 이 소리에요. 실상. 참된 모습이다. 하나 거짓이 없는 참된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 그 참된 모습이 아닌 것 같은 이유는 아상 때문에 그렇다. 내가 만들어낸 허망한 망상, 분별, 허상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인생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행해오신 모든 일과가 오늘 하루의 일과가 여러분을 귀의에 이르게 하기위한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위한 하나하나의 실상으로서의 어떤 가르침이기 때문에, 삶 자체가 진실된 실상이란 말이에요.
여기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아무런 거짓이 없고. 이것 자체로서 완벽한 모습이다. 나에게 있어서 완벽한 시나리오가 내 인생에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완벽한 시나리오가. 그러니까 이렇게 완벽한 시나리오가 내 인생을 장식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은 이 실상을 깨달아 안다면 무한한 감사와 무한한 감사함. 그런 것밖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 표정들이 그렇게 밝지를 못해요. 내 하루의 삶 자체가 실상이구나, 이러면서 감동을 해야 하는데, 표정들이 이상하단 말이죠. 아닌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지?
낮에도 오전에도 옆집 아줌마랑 싸우고, 누구랑 싸우고 돈 때문에 미치겠고. 답답해 죽겠구먼, 이게 뭐 실상이라고 하느냐? 이런 표정이신데. 그것이 바로 아상, 내가 만든 허망한 생각, 분별 망상뿐인 겁니다. 하다못해 저 인도 아프리카에 다 죽어가서 일주일간 밥한 끼 먹기 힘든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딴 거 다 때려치우고, 돈을 못 버는 거 그만두고, 자식이 대학교 좋은데 못 가는 거 그만두고. 밥한 끼 하루에 한 끼라도 먹을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어요?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스럽습니까? 우리 삶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괴로워하는 이유는 더 높은 사람, 더 많은 돈. 더 좋은 삶. 내가 꿈꾸는 내가 욕망하는 더 좋은 짝이 그 자리를 꿈꾸기 때문에 그런 거죠. 지금 이 자리를 꿈꾸는 게 아니라, 미래를 꿈꾸고, 더 나은, 자기 마음속에서 원하고 욕망하는 그것에 집착해 있으니까 지금 이 자리가 형편없이 보이는 거예요. 지금 이대로의 나의 실상의 모습이 실상으로 진실하게 보이지 않고 헛되게 보이는 겁니다. 남들과 비교하니까. 아상의 특징이 이거거든요. 아상은 뭡니까? 나라는 내가 만든 허망한 상이거든요.
나를 기준으로 하니까 나와 남을 나누어 놓는단 말이죠. 그러니까 남과 나를 비교하는 거예요. 나눠놓고. 그게 아상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해서 나는 형편없다. 이렇게 생각하므로써 허상을 만들어 놓는 거예요. 사실은 나보다 더 못한 사람에 비하면 너무나도 감사한 삶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불교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생각해서 행복한 줄 알아. 이 종교도 아니고. 나보다 잘난 사람보다는 너는 참 못난 놈이다. 이 종교도 아니에요. 우월감과 열등감, 그 모든 걸 놔버리는. 실상의 자리는 아상의 자리에서나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생기는 거지. 실상의 자리에서는 우월감도 붙을 자리도 없고, 열등감도 붙을 자리가 없는 거죠. 나와 네가 없으니까, 나를 누구와 견주고, 비교할만한 그 어떤 대상도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직 지금 이 자리만 존재하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워질 게 있겠습니까? 저녁 공양하셔서 배도 부르시고. 편안하게 앉아계시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여기에만 존재한다면 괴로워질 게 없죠. 그런데 머릿속에서 잠시 내일을 생각하고 토요일 행사가 잘될까? 뭐 남편이 뭐 어떻게 됐을까? 자식이 내일이 시험인가요? 내일 시험 잘 볼까? 남편 진급발표가 언젠데 잘 될까? 이 고민을 하면서 생각이 과거나 미래로 쫓아감과 동시에 아상이 활동을 하면서 한때 괴로워지기도 하고 즐거워지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는 거죠.
지금 이 자리에,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고 있다면, 그 모든 허상이, 내가 만든 허망한 상이 타파되는 자리가 지금 이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실상이 드러난다는 거죠. 그 실된 참된 모습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실상도 이름이 실상일 뿐이지 실상이라는 거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 앞에 했든 이야기들 반복됩니다. 후 오백 세에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희유할 것이다. 이 소리죠?
<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 하기 때문입니다. > 이 후 오백 세에 이 경전을 들어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내는 그런 사람이 후 오백 세에도 있다면 그 사람은 그야말로 완전한 상을 타파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희유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그 어떤 상도 완전히 타파한, 타파한 이가 희유한 이가 된다는 거죠. 그야말로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난 분을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3)
4.
우리 또한 이상적멸, 상을 멀리 떠나게 되면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고,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되는 거는 상을 떠나는 거에 달려있다 하는 얘깁니다.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이 놀라운 가르침을 듣고 얼마나 그야말로 이 경을 들으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얼마나 놀랍겠어요? 그야말로 경외감을 느끼고 놀라서 놀랄 거란 말이죠.
그런데 이걸 보고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깝깝 하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이 놀라운 가르침을 아무리 전해줘도 어떤 사람은 놀랍게 정말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전혀 감흥이 없고, 아직 인연이 안 되는 사람 같으면, 이 가르침에도 그야말로 신심을 내기 어렵단 말이죠. 그런 어떤 사람들 또한 있게 된다는 얘깁니다. <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 부처님께서 제일바라밀이라는 것은 두 가지 ** 있습니다.
육바라밀가운데 제일, 제일에 관한 최상의 바라밀. ** 사용되기도 하고, 또 첫 번째 바라밀. 그러니까 보시지계인욕선정정진반야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 바라밀. 즉 보시바라밀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최상의 바라밀, 즉 최상의 바라밀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어요? 공에 이르는, 공을 깨닫고 아상을 타파하므로써 공을 깨달아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 바라밀 하는 방법. 즉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그 방법. 수행법. 그것을 보고 최상의 바라밀이라고 하는 거죠. 그런 어떤 제일바라밀 또한 그 방법은 설해줬지만, 바라밀 수행을 설해줬지만, 바라밀 또한 거기에 집착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바라밀이라고 설했지만 그 바라밀이라고 한 것도 이름에 불과한 것이지 거기에 집착할 것은 없다 하는 얘기입니다. <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약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
인욕바리밀또한 이름일 뿐이라는 거죠. 그래서 옛날에 가리왕에게 몸을 베였다는 이 이야기는 부처님의 전생에 인욕선인으로 계셨을 때 고요한 숲속 나무아래에서 명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이 사냥을 나왔어요. 그런데 사냥을 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잠이 들었는데 눈을 딱 떠보니까 시녀들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한참을 시녀들을 찾아보니까. 저 멀리 떨어져서 홀로 수행하고 계시는, 고요히 앉아서 명상에 잠겨계시는 수행자,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인욕선인의 모습에 너무 감동을 하고 그 모습자체에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서 인욕선인 앞에 가서 예를 올리고 귀의하면서 절을 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이 가리왕이 이 신하들이 나한테는 저렇게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안하더니 저 한낱 수행자한테 가서 저렇게까지 하는가 해서 막~ 질투심이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어찌 너는 수행자라고 하는 게 방자하게 여색을 탐하느냐? 그러면서 왕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이지 결코 여색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래 네가 인욕을 닦는단 말이냐? 인욕은 참고 견디는 인내 이런 걸 이야기 하죠. 그래 네가 얼마나 인욕을 잘하나 두고 보자 하고 그냥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들을 베고, 다리를 베고,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놨다 그럽니다.
그러면서 이래도 나를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인욕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는 거죠. 그랬을 때 인욕선인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한다면, 몸뚱이를 헤치는 자는 나를 헤치는 자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미운 마음이 들죠. 그런데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니라면, 이것을 자르고 벨지언정, 거기에 화를 내고 미워할 마음, 이유가 있겠습니까? 공하는 것을 완전히 체득하고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 그러면 몸뚱이자체가 공하다는 걸 알고, 이 몸뚱이 자체가 그야말로 허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억지로 참을 필요도 없죠. 공하다는 것을 본래 알진데 억지로 참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실은 참음이라는 것은 억지로 참는 것이 올바른 참음이 아니죠. 공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저절로 참을 수밖에 없는 거죠. 억지로 참는 것은요, 오히려 더 큰 병통을 가져오죠. 막 남들이 나를 괴롭혔을 때 참고참고참고 억누르고억누르게 되면 마음가운데 화가 상대방을 향한 미움과 증오와 분노가 쌓이고쌓이고 또 쌓이게 됩니다. **전체가 되게 되면 어느 순간 한방에 터져서 나도 죽고, 남도 죽일 수밖에 없는 거에요. 전에 어떤 데 보니까 어떤 거사님이 유영철이 거사님의 아내를 죽였어요. 딸도 죽였어요. 그 며느리까지 죽였습니다. 3명을 다 죽였어요. 그래가지고 이 거사님은 이제 나하나 남은 거다. 유영철에게 모두 살해 됐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엄청난 분노가 쌓였겠어요? 도저히 어떻게 말로 표현할 없는 분노감에 휩싸여서 분노에 떨다가 복수하고 싶은 복수심에 쌓여있는데.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잖아요. 유영철은 감옥에 가 있으니까. 쫓아가서 죽이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고. 그냥 막 어떻게 울분을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 화에 못 이겨서 본인이 쓰러졌어요.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온갖 병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겁니다. 멀쩡하시던 분이 갑자기. 온갖 병이 한 번에 몰려와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얼마 못살게 되는 거에요. 이제 곧 죽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은 모든 육체적인 병은요, 먼저 정신에서부터 옵니다. 정신에서 병이 있지 않으면 육체에서 병이 올 수가 없어요.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몸이 그 마음을 따르게 되는 겁니다. 하다못해 길가에서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몸이 다쳤다. 그거는 몸의 문제지 마음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묻겠지만 그 또한 마음의 문제다. 마음에서 내가 인연이 내 아내의 어떤 문제가 그 교통사고가 날만한 인연이 없었다면 그 교통사고가 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화를 막 분노를 내 안으로 사기고 하게 되면 죽는 거는 나죠.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면 그 사람이 죽겠습니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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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망을 받아서 그 사람이 죽을까요? 그 원망을 받는 건 누구겠어요? 납니다. 내가 남들을 미워하고 증오하면 그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나만 죽는 거예요. 왜냐하면 미워하는 마음, 증오하는 마음이 누구 거에요? 내거란 말이죠. 내거니까 내 안에 쌓여있지 상대방에 가지를 않아. 내 안에서 있습니다. 사실은 나를 죽이는 거죠. 그래서 인욕해야 되는 이유는 내가 살기위해서, 꼭 남을 미워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거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이 우주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그야 말로 동체. 한 몸이기 때문이에요. 한생명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이치를 모르니까 상대방을 미워하고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했을 때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 복수하고 복수에 성공하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게 영화의 상당부분이에요. 복수하는 거 사실은 해피엔딩이 아니거든요. 그 생에서는 복수하면 끝날 거 같지만 항상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겠다고 한 20년 30년 칼을 갈고 도술을 연마했다가 30년 후에 아버지를 죽이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탁 끝납니다. 그런데 항상 사실은 그 다음 시리즈가 있게 되는 거에요. 그 다음 시리즈는 내가 복수를 탁 하는 순간, 그 분의 아들이 또 그 장면을 몰래 본다니까요.
그 아들이 칼을 갈고 있다고 나중에 20년 후에 또 나를 죽인다니까요. 거기서 끝난다고 하더라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그걸 그 자리에서 보지 않았더라도 그러고 죽고 나면, 다음 생에 또 동일한 광경으로 엮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증오를 증오로 푼다는 것은 이건 전혀 온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완전한 용서를 통해서, 완전한 인욕을 통해서 풀 수 있는 것이지.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누가 나를 칼로 자른다 할지라도 거기서 인욕을 할 수가 있다는 거죠. 거기 전혀 화라든가 증오를 품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 보살은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거죠. <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외부의 그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머물러 집착해서 마음을 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이 아닌 것에는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법에도 집착하지 않을 진데. 이게 불교의 참 놀라운 부분이에요. 법에도 집착하지 마라. 법에도 머무르는 마음을 내지 마라. 불교에도 집착하지 말고 불교라는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마라 이 소리거든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른 종교에서 이 종교를 위해서 싸워 이겨라, 이렇게 얘기하면 했지. 여기에도 집착하지 마라 그렇게 얘기 안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수 많은 사람들이 불교라는 종교를 이 세상을 화합시킬, 어떤 유일한 종교로 알고 있다는 설문을 본적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불교만이 다른 종교, 모든 종교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불교라는 종교에도 집착하지 않으니까. 비법에도 집착하지 않지만, 불교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않지만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겠지만 부처님가르침이 아닌 것을 통해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거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통해서, 흘러가는 바람을 통해서 어린 나이에 말 한마디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원수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거에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에 그 모든 데에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편만해 있다.
그래서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른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한 치도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라. 이 소리입니다. 마음을 내지 마라는게 아니라 마음을 일으켜라. 그러나 집착 없이 일으켜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 그러나 우리는 살다보면 마음에 머무르게 되죠. 어딘가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현실에 닥치면은 거기에 집착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괜찮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머무름 아님이 된다.
우리는 머물러서 집착했지만 사실은 그것도 본질에서 본다면 머물러 집착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배운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가 이 세상에 왜 왔겠습니까? 뭔가 배우고 깨달으려고 왔단 말이에요. 실수를 통해서 배우려고 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집착을 버려라.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집착을 버려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집착을 버리라는 데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아~ 집착을 버려야 되는구나. 집착을 버리는게 최상이구나. 집착을 버리면 나는 잘한 것이고, 집착을 안 버리면 나는 못한 것이구나.
이렇게 집착해요. 그런데 일상생활을 살다보면 어떻게 집착을 안 하게 됩니까? 집착 하게 되죠. 그럼 일상생활을 살다가 또 집착했어요. 여기도 집착하고 저기도 집착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또 자책하는 거에요. 아이, 못난 놈. 못난 놈. 또 집착했네. 하아~ 난 왜 이렇게 수준이 낮지? 난 왜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실천도 못하지? 난 왜 이렇게 어리석은 거지 하고 자책을 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스스로 집착도 타파하지 못하는 이런 어리석은 놈이라고 스스로를 원망한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다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집착하는 것. 그것도 사실은 근본에서 본다면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머무름이 없는 겁니다. 왜 그러겠어요? 집착하지만 언젠가는 우린 그 집착에서 놓여나거든요. 그러면 그 집착을 통해서 사실은 우리가 배울 것을 배우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벌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돈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놔 버릴 수 있겠습니까? 돈에 집착해가지고 돈을 신나게 벌어가지고, 신나게 한번 벌어봤고, 원 없이 벌어보고 원 없이 써봤다. 그런 사람에게 나중에 돈 집착을 놓아라하면 더 놓기가 쉬워 질 수 있죠.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먹는 거에 집착해서 결국에는 맛있게 한번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음식에 대한 집착을 놔 버릴 수가 있겠어요? 한번 맛있게 먹어보지도 못한 사람이. 먹어보고 나야 이제 아~ 별거 아니구나. 집착을 놓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아이들 어디 중독될까봐 이거하지마라. 저거하지마라. 계속 그러잖아요. 노이로제 걸린 사람처럼 이거하지마라 저거하지마라 이러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어떤 음식이 안 좋다. 콜라가 안 좋다. 콜라 먹지마라먹지마라. 그런단 말이에요. 차라리 그냥 계속 먹지마라고 먹지마라하면 그 에너지가 계속 쌓여서 마음속에 더 갈구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이에요. 그냥 한번 ** 먹어라. 하면 되는 거죠.
콜라를 ** 먹어라 했다고 해서 절대 안 되는 거겠습니까? 콜라가 실제 나쁜거라고 쳐도, 나쁜거지만. 나쁜거라고 쳐도, 그걸 먹는게 무조건 나쁘다 할 게 없다는 애깁니다. 그러니까 어디 집착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스스로 내가 집착한 거에 대해서 스스로를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그것을 통해 배우는 거니까. 그것을 통해 삶을 깨달아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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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님이 됩니다. 나중에 보면 뒤늦게 이렇게 되돌아보면 아~ 그때는 집착하고 있었구나. 허망하게 집착하고 있었구나 하고 깨달아 보는 거에요. 그때는 잠시 실수해서 머물러 있었지만, 흘러가서 나중에 보면 아~ 한순간 허망했던 일이 지나갔구나. 한바탕 꿈이었구나 하는 거를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보면 머문게 아닌게 되는 겁니다. <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
보살은 응당히 그 어떤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죠. 보여지는 것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고,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서 보시한다. 보살이 보시한다는 것은 보살은 항상 중생을 구제하기위한 보시행 보살행 자비행을 실천한단 말이죠. 그러나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자비행을 실천한다. 이 소리입니다. <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 일체의 상도 상이 아니죠. 상이라고 허망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꿈속에서라도 상이라고 만들어 놓은 거뿐이죠. 일체 중생도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여러분이 사실은 중생이 아닙니다.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중생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부처님들이 지금 여기 다 계시는 거죠. 우리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부처지, 아상이라는 것 때문에, 아상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아상으로 수많은 내가 허상을 만들어 놓은, 거기 아상에 허상에 빠져있는 부처 일뿐이지. 그 상만 타파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사실은 본래는 부처죠. 그러나 아상에 쌓여있는 것뿐이죠. 거울이, 낡은 거울이 본래 거울입니다. 그러나 때가 묻으면 보이지가 않죠. 때를 닦으면 아 이게 원래 거울이었구나 하고 알듯이, 때가 묻었다고 거울이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이죠. 중생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겉에 때만 닦으면 되는 거죠. 아상만 닦아내면 바로 부처가 되는 거죠. 그래서 본래 중생도 중생이 아닙니다. <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 여래가 부처님께서 설하신바 진리, 깨달음은 실다움도 없습니다. 헛됨도 없지만, 이것만이 실다운 것이구나, 이것만 참된 것이구나, 이것만이 고귀한 것이구나. 이것만이 훌륭하고 최상의 것이구나. 실다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헛된 것도 아니지만 실다운 것도 아니다. 어떤 것이 실답고 훌륭하다고 얘기하면 나머지 다른 것들은 실답지 않은게 되잖아요. 그러면 실다운 것과 실답지 못한 것이 둘로 나뉘어가지고 싸우게 된단 말이죠.
또 부처님 법만이 최상이고 실답다고 얘기하면 부처님법 말고 다른 거는 다 헛되고 잘못된 게 되잖습니까? 그러면 두 법이 나눠져 싸운단 말이죠. 법과 비법이 나뉘어 싸우고 투쟁하고 다투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 법은 실답지도 않습니다. 물론 헛됨도 없지만. 실답다, 헛되다는 그런 두 양극단에 집착하지 말라는 소리죠. <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하게 되면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하게 되면, 보시행을 실천하고 보살행을 실천하면, 즉 여러분의 인생이 밝은 그야말로 밝은 지혜의 광명으로서 환희 밝은 지혜를 얻고자하신다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고 보시행, 보살행, 나눔의 행을 실천해야 된다는 소립니다. 법에 머물러서 어떤 존재에 머물러서 보시하고 사람들에게 나누고 이러게 되면 그 사람은 어두운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어둠밖에 없는 거죠. 그러나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고, 보시행을 실천하고, 보살행을 실천하고, 자비행을 실천한다면 그 사람은 환한, 아주 밝고 환한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모든 사물이 환히 뚜렷이 드러나는 것처럼 그렇게 기적이 일어나는 겁니다.
밝고 환한 눈, 자혜의 눈을, 지혜의 광명을 친견하고 만나게 될 수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머물지 않고 보시행, 보살행. 이웃을 돕고, 수 없는 중생을 돕는 그런 지참 없이 돕는 행.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밝은 광명의 길로 인도하는 어둠에 빠지지 않고 밝은 광명으로 인도하는 그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시 이 경을 받아지녀 읽고 외운다면, 다 압니다. 부처님은. 모르지 않는다.
우리가 금강경으로 공부하고 이 반야심경 읽고 외워서 머무름 없이 집착함이 없이 이웃을 위해서 나누고 보시하고 실천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하며 산다면 부처님이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봅니다. 부처님이 알아줄까? 보시를 했는데 부처님이 알아줄까? 나 이렇게 열심히 잘했는데, 삼천배 했는데, 자꾸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고, 금강경을 내가 천독을 했는데 부처님이 알아주실까? 알아준단 말이죠. 다 보고 다 안다. 그래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됩니다. 분명히. 결코 내 입으로 어디 가서 자꾸 알려야 될 거 같고, 이럴 필요도 없다. 이 경을 읽고 외우고 지니는 이 공덕이야 말로 부처님이 다 알고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아~ 이러니 금강경이라는 경전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금강경 경전을 그냥 읽으면 뜻도 모르겠고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 의미를 알고 의미를 깨닫게 보면 너무나도 놀라운, 정말 한편으로는요. 야~ 이 지구상에, 이런 놀라운 가르침이 오묘하게 왜 오묘합니까? 도대체 일반인들이 이걸 읽으면 뜻을 알 수가 없어요. 뭔소리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아무리 봐도 오묘한지 모른단 말이에요. 감춰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꼭 밀교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숨겨진 진리처럼 보여요. 그래서 이것은 지혜로운 눈이 안목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인류에 이 지구상에 이러한 경전이 있다는 자체, 2000년을 내려오면서 이런 엄청난 가르침의 경전이 있다라 자체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지금요 제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선지자들 현각자들, 성인들, 요즘에 그야말로 아주 훌륭하다고 이름이 나 있는 세계의 10대 성인 내지는 10대 추앙받는 존경받은 성인, 이런 분들의 책이나 가르침을 다 접해보면요, 금강경 가르침에서 벗어나지가 않습니다.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이 가르침에서 벗어나지가 않습니다. 너무 놀라워요. 그 사람들은 정말 스스로 그런 가르침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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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너무 놀라우면서 야~ 인류가 드디어 이런 엄청난 가르침을 접할 때가 됐다 하면서 호들갑을 떨면서, 그 가르침을 탁~ 공표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한 사람이 그걸 보게 되면 부처님가르침이 정말 훌륭했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사람들이 이제 깨닫고서 그것을 재탕하고 있구나. 아 물론 그것이 별로라는 얘기가 아니라 훌륭하고 지혜롭구나 알겠지만,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였구나 하는 걸, 더욱 더 증명하게 됩니다. 제15분 지경공덕분입니다. 지경, 경을 지니는 공덕에 대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경전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지녀야 되는지, 어떻게 수행하고 닦아야 하는지를 설하고 있습니다.
<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 앞에 계속 나오는 반복된 이야기입니다. 그 어떤 몸으로 보시하고 무슨 백천만겁동안 보시할지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 세 가지입니다.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 이게 바로 경전을 대하는 경전을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가는 방법, 수행법 세 가지를 말해 주는 겁니다. 이 경을 사경한다는 것이 바로 서사. 서사한다는 게 사경한다는 거죠. 베껴 쓴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경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경전을 하나하나 쓰고 일자일배, 이래가지고 혹은 삼자일배 이래가지고 한 글자 쓰고 한번 절하고, 한 글자 쓰고 한번 절하고, 그래서 반야심경 사경도 하고, 금강경 사경도 하고, 이획일배해서 글자 한 줄을 쓰고 절을 한번 한다거나, 사경을 하는 이유가 경전 하나하나 베껴 쓰는, 하나하나 베껴 쓴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하나 베껴 쓰는 사경의 공덕이 중요한 이유가 베껴 쓴다라는 게 뭐겠어요? 베낀다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베끼는 걸 의미합니다.
내안에, 내 존재 안에 완전히 베끼는 걸 의미합니다. 베끼는 건 뭐에요? 내 식대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받아 들이는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가 베낀다는 얘기에요. 우리는 경전을 들으면 아 요거는 맞는 말이야. 아 요거는 틀린 말이야. 이건 맞는데 이건 틀린 거 같아. 내 식대로 해석하거든요. 내 식대로 해석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배껴 쓰는 게, 사경하는게 아닙니다. 서사하는게 아니에요. 여러분 경전 보면 이해 안 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 많거든요? 저 또한 옛날에 그래가지고 옛날에는 읽지 못했던 부분들이 많았어요. 화엄경이나 아함경도 마찬가지고 경전 보면요, 부처님이 법문을 설하기 전에 수도 없이 많은 천상세계 신들이 몰려들어서 부처님 법문을 들어요.
천상세계 신들이 부처님께 공양하려고 기를 쓰고, 심지어 부처님제자들에게 공양하려고 별의별짓을 다 한단 말이에요. 그 얘기들을 경전에서 보면 서사가 안 돼요. 베껴지지가 않아요. 아 이거는 거짓말이지. 이거는 뻥이야. 나머지만 베껴 쓴 거겠지. 아니 면은 후대에 만들어진 거겠지. 물론 그런 것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러나 상당부분이. 예를 들어 천상세계 신들이 부처님 법문을 들었다. 당연한 겁니다. 정말. 그 천상세계 신들이 얼마나 무궁무진하고 무량하잖아요. 화엄경에 보면 어마어마한, 그야말로 화엄성중, 화엄경에 신중님들이 어마어마한 신중이 나와요. 욕계색계무색계의 수많은 천인들이 나오고, 이 욕계색계무색계라는 혹은 이 불교에서는 욕계색계무색계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 육체를 가진 인간의 존재 말고도 수많은 차원의 존재들이 있단 말입니다.
3차원뿐만이 아니라 4차원, 5차원, 6차원, 7차원, 수많은 존재의 존재들이 있고, 이 지구상에만도 3차원의 인간과 축생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옥도 이 세상에 있을 수도 있고, 아귀도 있을 수도 있고, 천상세계의 어떤 천상이 이곳에 같이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 눈에는 우리 차원과 맞는, 파장이 맞는 것들만 보이거든요. 우린 3차원의 사람들이니까 3차원 사람들만 보여요. 하다못해 돌아가신 영가들도 우리 눈엔 안보이지 않습니까? 차원이 다르니까. 천상세계의 존재들이 여기서 우리와 다 같이 집을 짓고 살수 있단 말이죠. 이를 테면. 그러나 우리 차원의 눈에는 안보는 겁니다. 전혀 거리낄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우리 생각의 틀을 일단 좀 놓아버려야 되요. 우리의 틀은 3차원에 한정되어 있으니까. 시간과 공간이 놓아버려지는 차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시간과 공간이 없는 차원을 우리 3차원의 머리로 어떻게 얘기가 되겠습니까? 양자 물리학에서는 그런 세계를 얘기하고 있거든요.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에요. 여러분 죽고 나서 윤회를 하죠. 그런데 과거로도 윤회를 하고 미래로도 윤회한다면 이해가 됩니까? 3차원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거든요. 과거 현재 미래가 일직선으로 놓여있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가르침들이 무한한 어떤 세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무궁무진한 세계를 우리는 모르니까, 경전을 봐도 이게 도대체 어디까지가 내가 맞고 어디까지 틀리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참 그런 어떤 아름다운 경전의 이야기들을 보면 참 한편으론 놀랍고, 야~ 2500년 전에 어떻게 부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인간계를 위한 법문만 하신게 아니란 말이에요. 부처님께선. 수많은 차원을 그야말로, 예를 들어 2차원부터 7차원까지 있다 친다면, 그 수많은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는 분이에요. 모든 차원을. 그러니까 우리 3차원의 인간들에게만 법문하신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4차원 6차원. *차원. 그 수많은 천상세계 신들까지도 다 그 대상으로 법문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부처님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진리를 설하셨습니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우리의 사량 분별로서 우리 머리로서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서사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 아상의 틀을 가지고 이건 맞고 이건 틀리다. 이렇게 분별해가지고 요것만 받아들이고, 이거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또한 옛날에는 역경이 중요한 이유가, 사서가 중요한 이유가 인쇄술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수 많은 역경을 하면, 한번 역경하는 거는 그 수많은 사람에게 법을 전해줄 수 있는 귀한 전법의 효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서사는 뭘 의미하겠어요? 경전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아주 귀한 책들, 불서, 이런 것들을 사서 보시하는 경전을 많이 사가지고 나누고, 보시해서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도록 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또 다른 하나의 사서가 될 수 있습니다.
또 두 번째는 수지독송입니다. 내가 항상 수지하고 독송하므로써 잊지 않고 기억하는, 끊임없이 경전의 말씀을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제가 금강경 이 책을 쓰고 나서 얼마나 매년 한번 이상은 항상 경전 강의를 했는데, 놀랍게도 제가 5년 전에 금강경 경전 강의를 할 때와 4년 전에 할 때와 3년 전에 2년 전에, 또 지금 할 때가 제 안에서 금강경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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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는 깊이가 전혀 달라지거든요. 한번 읽었다고 한번 공부했다고 야~ 나 금강경 한번 땠어.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거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우러나와야 되고, 그러기위해서는 끊임없이 수지독송을 하는 겁니다. 수지하고 독송하므로써 끊임없이 가르침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와 닿기 위해서. 그 다음 세 번째로 바로 위인해설입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이 금강경 가르침을 혼자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전달해주고, 나눠주고, 부처님의 법을 법보시하면서 법을 전달해 주는 겁니다. 전해주는 것. 이렇게 경전을 이 가르침, 경전을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첫 번째가 서사, 베껴 쓰고 사경하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수지독송이고, 세 번째가 위인해설입니다.
<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 이 경에는 뭐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경전은 아무나를 위해서 설한 경전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눈치 채셨겠지만. 아무 나를 위해서 설하셨다면 부처님이 이렇게 어려운 용어로 설했겠어요? 아함경같이 편안한 용어로 설했겠죠. 이 가르침은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서 설했습니다. 또한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서 설했습니다. 대승을 발한 이는 뭐냐 하면, 사사로운 아상에 갇혀서, 나라는 틀 속에 갇혀서, 내가 한번 깨달아 봐야 되겠다.
소승불교의 수행자들, 내가 한번 깨달아 보고, 내가 어떻게 해 봐야 되겠다고 하는 이런 나 혼자 깨닫겠다는 이런 소승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대승의 생각. 야~ 일체중생을 모두 내가 저 깨달음의 언덕으로 이끌고 가야 되겠다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고, 반야바라밀의 보리심을 일으키는 그런 대승을 발한자, 대승의 서원을 발한다. 나 혼자 가지 않겠다. 일체 중생과 함께 깨달음으로 가겠다고 하는 대승을 설한자에게 설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 서두에서 구류중생, 일체 모든 중생을 완전한 열반인 완전한 행복인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라하고 끊임없이 설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또한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했다. 소소하게 나는 복이나 지으면 되지. 이번 생에 복이나 짓고 다음 생에 수행하지. 이번 생에 복이나 짓고 뭐 어디 절에 보시나하고, 스님들 수행 잘하라고 보시나하고, 다음 생에 내가 수행자가 되어서 그때 내가 깨달음을 얻겠습니다. 대부분 그러시죠. 이번 생에 깨달아 마치겠다. 최상승의 마음을 발하신 분이 계시겠습니까? 잘 없습니다. 저 대학교 1학년 때, 대학교 2학년 때, 제 도반, 지금 어느 절에 스님이 된 도반이 저한테 그랬어요. 그 마음이 지금까지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교 2학년 그 나이 어린애가 저한테 하는 얘기가 그거에요. 정말 자신은 최상승의 서원을 발해서 이번 생을 넘기지 않겠다.
그게 자신의 서원이에요. 이번 생 안에 반드시 내가 깨닫겠다고. 그것도 젊다보니까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서 한번 두고 봐라. 두고 봐라. 내 이번 생을 넘기지 않고, 그러겠다고. 그 마음이 제가 정말 얼마나 찡했던지. 부디 그렇게 하면 나도 같이 구제해주라.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런 최상승의 마음을 발한 이를 위해서 설한 가르침이 바로 이 금강경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대승을 발한이, 또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설한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소소한 우리들에게는 어찌보면 이것이 그렇게 큰 가르침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가르침을 공부해 놓으면 이것이 바로 그야말로 선근을 심어 놓는게 되어서, 이번 생 언젠가, 다음생의 언젠가가 됐든, 아주 큰 귀한 공부의 인연이 맺게 될 겁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고 널리 설한다면 부처님은 이 사람은 다 알고 다 봐요. 그래서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가이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 경전을 보면은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얘기하다가 너무 과장해서 아~ ~ 이게 정말 너무 아름답다고 너무 감동스럽다고 과장해서 과장해서 말을 하면 우스개로 도반들이 아이~ 저~ **. 꼭 저렇게 과장한다고.
뭐 그렇게 과장을 하면서 시챗말로 구라를 쳐가면서 그렇게 하냐고? 평범하게 해도 다 알텐데 하면서. 왜 그렇게 과정을 하냐고 하는데. 이 경전을 보니까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경전이 더 과장 돼 있습니다. 그죠? 경전의 과장에 비하면 제 과장은 과장도 아니죠. 오죽 과장했으면 저 항하사 모래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가 있고, 그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아침에도 몸으로 보시하고, 점심에도 보시하고, 어마어마한 과장이 나오고. 여기도 보세요. 큰 공덕을 **하면 될 텐데. 헤아릴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면 가이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게 이 공덕을 안다면 정말 이렇게 과장안하게 과장을 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그게 실제에 비한다면 전혀 과장이 이날 수 있을 겁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바로 부처님의 최상승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을 짊어진 것과 같다. 최상의 깨달음을 짊어진 사람과 같습니다. <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대승이 아니고,> 최상승이 아닌,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 즉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라는 것에 자기 견해를 세우는 거죠. 내 견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견해. 그 견해, 이것을 아견이라 그럽니다. 그런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 이 경전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고 위인해설하는 공덕. 잘 기억하십시오. 서사하고 수지독송하고 위인해설하는 공덕이 그렇습니다. 다음 16분 능정업장분입니다. 능히 업장을 깨끗이 맑힌다는 그런 분입니다. <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만약에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는데 여러분이 이 금강경 공부를 하신단 말이에요. 아~ 이 금강경 공부가 최고의 공부라고 들었어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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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 무슨 마음이 들었냐하면 아~ 금강경 공부를 했고 내가 불교대학도 나왔고 금강경 서사도 하고, 수지독송도 하고, 위인해설도 해서. 불교공부를 하고 불교수행을 하고, 기도하고, 매일 저녁예불 새벽예불 사시불공 나오면서 내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바라는 마음이 생기겠죠. 마음속에. 야~ 그러면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기겠지? 내가 금강경 공부를 했는데, 내가 이렇게 수행을 열심히 하고 기도를 했는데, 나한테 좋은 일이 생길거야. 했다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좋은 일이 생기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바라는 마음이 생겨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렇게 기도하고 수행하고 경전독송하고 서사하고 수지독송하고 위인해설하고 금강경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를 업신여긴단 말이에요. 나를 욕하고 시비 걸고 아주 업신여긴단 말이에요.
야~ 저놈 보잘것없다고 하고 욕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혼란에 빠집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수행을 열심히 했는데도 옛날하고 달라진 것이 없다. 옛날에도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더니 내가 불교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수행을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경전을 이렇게 수지독송했으면 남들이 나를 좋게 봐줘야 될 거 아니냐. 그런데 불교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똑같이 업신여긴다. 에이 이거 별 소용없구나. 불교 공부해 봐야 별 소용없구나. 이렇게 느끼기 쉽단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공부하기 전에 내가 마음공부도 하기 전에 남들이 나를 업신여긴다. 그러면 그건 ***. 그런데 내가 수행을 하고 있는 중에 금강경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마음공부하고 수행하고 기도정진하고 있는 가운데 남들이 나한테 시비 걸고 욕하고 화내고 일이 안 풀리고 남들이 자꾸 나를 업신여긴다.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곧 <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 질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 이게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금강경 공부를 할 때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자구 하는 것도 안 풀리고, 자식 수능시험도 못 봤다 그러고,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겨요.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기도 수행할 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죄업이 녹느라 그런단 말입니다. 전생의 죄업이 왕창 녹기 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행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내가 불교수행하고 마음공부를 했는데, 왜 내 인생이 달라지는게 없고 똑같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달라지고 있는 중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가 경전 공부하고 마음공부 하고 수행을 하는데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그거는 업장이 빨리 녹기 위해서 그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 생에 왕창 업장을 그냥 확 받겠다. 받아서 녹여버리겠다 하는 그런 의지로서 그 밝은, 수행하는 그 밝은 마음에 업장이, 어둡고 탁한 업장이 빨리 그냥 털어 없애지려고 솟구쳐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고,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도가 높을수록 마장도 많다 하듯이, 수행이 깊을수록 수행력이 깊어갈수록 남들이 나를 업신여길 수도 있단 말이에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남들이 나를 업신여긴다는 경전 공부하고 있고, 열심히 기도 수행하는데 남들이 나를 업신여기고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더덩실 춤을 추시면 됩니다. 아~ 이게 바로, 이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에 죄업이 소멸됐구나. 그러기 때문에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가 점점점점 가까워지고 있구나.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경전에서 이렇게 딱 말씀해주셨잖아요. 능장업장이구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나쁜 일이 생겼다. 아~ 능장업장. 능장업장하는 거구나. 마장이 끼었다고 하는데 마장이라는 자체도 뭡니까? 마장을 나쁜 방향으로만 이해를 해요. 나쁘게 해석하는 겁니다. 아상으로. 내 생각으로 마장이 끼면 마장이 나쁜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해야. 마장은 나쁜 게 아닙니다.
마장은 우리의 친구고 우리의 동반자입니다. 마장을 버리려고 없애버리려 애쓰거나, 털어버리려고 싸워 애쓰면 안 됩니다. 마장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봐야 되요. 보듬어주고 허용하고 내버려두고 가만히 관찰하고 지켜보는 거에요. 마장은 마장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마장일 뿐입니다. 마장이 딱 생겼을 때 내가 괴로워하면서 두려워하면서 이 마장이 나를 괴롭히면 어떻게 하지? 내 수행을 방해하면 어떻게 하지? 두려운 마음이 생기지만 거기서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면 마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겁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거 에요. 아~ 왔느냐? 왔구나 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거에요. 아~ 왔구나 하고 지켜봐 주는 거에요. 그냥.
왜? 내가 마장에 힘을 주지 않으면 결코 마장은 나를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중요한 얘기입니다. 어떤 마장도 어떤 귀신도 어떤 뭐가 됐든 어떤 역경도 나를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내가 집어삼켜 지겠다고 스스로 그 마장에 굴복하기 전에는 즉, 마장에 두려움을 느끼기 전에는 결코 그 어떤 마장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마장에 굴복되는 건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마장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힐 수가 없는 게 진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주 작은, 잠자고 있는데 가위눌림을 당했다. 갑자기 두렵고, 아니면 수행하고 있는데, 기도하고 있는데 뭔가 무서운 어떤 걸 느꼈다. 상관할 필요 없습니다.
거기 뭐 버둥버둥 발버둥치면서 싸워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싸움 할 필요 없다. 그냥 내버려두고 지켜보면 됩니다. 야~ 네가 나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막 발버둥 치면서 벗어나려고 하면 그 마장이 더 힘을 써서 내려누른단 말이에요. 그런데 막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발버둥 치다가 아~ 내가 지금 얘한테 힘을 실어주고 있구나. 내가 두려워하고 있구나. 두려워하는 마음을 탁 놔버리는 겁니다. 탁 놔버리고 네 맘대로 해 봐라. 네가 뭔 짓을 하는지 한번 지켜보자. 하고 가만히 관찰하면 관찰하는 순간, 한번 해 보세요. 가위눌렸을 때 힘을 쫙 빼고 관찰하는 순간 확! 사라져버립니다. 놀랍게도 빨리 사라져요. 싸워 이기려고 발버둥 치면 질질 끕니다.
그런데 힘을 탁! 빼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관찰하면 바로 사라지고요, 수행의 과정 중에서도 혹은 잠자다가 똑같은 꿈을 꿀 때도 있단 말이에요. 혹은 자*몽이라고해서 꿈인 줄 알지만 이 입장에 압도되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버려두는 거에요. 네가 마음대로 해 봐라하고 그냥 관찰하는 거에요. 그러면 더 이상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허용하고 받아들이는 거에요. 그냥. 받아들이고 나는 그냥 지켜봐 주는 겁니다. 그러면 결코 그 마장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의 업장이 소멸하는 과정이고 내가 공부해나가는 과정이 되는 거에요. 그것이. 그래서 마장을 통해서 깨닫는 거에요.
보왕삼매론에도 나오잖아요. 마장을 통해 깨닫는 것이지 마장 없이 깨닫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마장이 나온다는 것은 나쁜 게 아니고 싫은 게 아니고 어찌 보면 필수적인 겁니다. 여러분 인생이 행복하게만 풀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어쩔 땐 행복하고, 어쩔 땐 괴로운 일도 생기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것이 필수적인 겁니다. 그게 필요한 거기 때문에 그렇게 오는 거에요. 부도가 났다. 자식이 대학교 떨어졌다. 아니면 더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것도 필요한 겁니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거기 때문에 나한테도 온단 말이에요. 그것을 아~ 이것으로써 업장을 녹이고 깨달음에 점점 다가가고 있구나 하고 허용하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 업장은 빨라 풀어져가는 겁니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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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이 그야말로 부처님께 더 큰 차원의 진리, 부처님의 다르마에 완전히 내맡기고, 완전히 믿고 내맡기는 거예요. 이것 자체가 하나의 실상이구나. 내가 머릿속으로 판단해서 아상으로 만들지만 않으면 이것 자체가 실상이라는, 제법실상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완전히 내 맡기면 자유로워지죠. 그러면 그때부터는 마장이 생겨도 마장이 아니라 능정업장을 하는 과정일 뿐이다. 업장을 소멸시켜주는 것일 뿐인 거죠. 그래서 마장을 밀쳐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장이 왔을 때 눈부시게 지켜봄으로써 마장을 통해서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사실은 수행만 수행이 아니고 삶과 수행이 똑같습니다. 삶 속에 일어나는 마장과 수행중에 일어나는 마장, 꿈속에서 일어나는 마장, 모든 게 다 똑같습니다. 원칙은 다 똑같아요. 집착하지 않고 바라보면 업장은 빨리 끝납니다. 그리고 지혜가 빨리 생겨나는 거에요. 다음 하겠습니다.
<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 아승지라는 것은 산수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는 수를 얘기합니다. 겁이라는 것도 전에 한 번 말씀드렸는데 무량한 어떤 시간개념을 이야기하죠. 또 나유타라는 것도 헤아릴 수 있는 숫자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승지 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합니다.
이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지를 또 다른 비유로 들고 있는 겁니다. 과거 부처님이 무량아승지겁 전에 연등부처님을 뵙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헤아릴 수 없는 나유타수에 여러 부처님을 만나서 공양하고 받들어 섬겼단 말이죠. 한번 헛되지 않게 섬겼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수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보다도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산술적 비유에도 능히 미치지 못할 정도로 더 공덕이 크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에 ** 얼마나 많은 부처님을 만나서 무량한 공덕을 베풀고 했겠습니까? 그러한 공덕보다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 공덕이 더욱 더 크다. 하는 얘기에요.
<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 아~ 그야말로, 이 공덕을 지금 부처님이 온갖 비유를 말하고 있잖아요. 그랬더니 후 말세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믿지 않는단 말이에요. 금강경 처음 보는 사람은 무슨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하는 것보다 이 경전 하나를 하는 게 더 낫다. 더 큰 공덕이 된다. 이래 놓으니까 금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뻥 만치고 앉아 있느냐? 뭐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느냐?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실제 있단 말이죠.
그래서 마음이 혼란해서 의심하고 믿지 않는단 말이에요. 이 과장된 표현을 믿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헤아릴 수 없으면 그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는 겁니다. 제17분 구경무아분입니다. 구경에 내가 사라진다 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경전 강의가 끝나더라도 제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들은 될 수 있으면 중복 안 되게 해서 이 핵심부분만 **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시간을 가지고 하나하나 읽어보시고 공부하신다면 공부가 많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그건 여기 계신 분들에게 과제로 남겨 드리고 이거 가겠습니다. <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앞에 나왔던 17분은 앞에 나왔던 많은 가르침들에 어떤 총정리 내지는 어떤 종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앞에 나왔던 그대로 똑같은 질문이죠. <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 이게 핵심이라 했습니다.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 이 앞에서는 일체중생을 우선 알로 낳는 것이거나, 태로 낳는 것이거나, 하면서 구류중생을 **했죠. 그런데 핵심은 이겁니다. < 내가 마땅히 일체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 이런 마음을 지키라는 거죠. < 그러나 이렇게 일체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고 > 마음을 내라는 겁니다.
<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정리죠. 일체중생을 완전한 행복인 멸도에, 고통이 다 사라진 멸도에 들게 하리라고 마음을 내고 보시행, 보살행을 실천하고 살라는 소리죠. 그러나 내가 그 많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나누고, 베풀고 법을 가르쳐주고 위타인설하면서 살지만, 한 중생도 내가 제도한 바가 없다. 내가 제도했다는 상도 내지 말라는 거죠. 왜냐하면, 아인중생수자상이 있으면 진정한 보살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일으킬만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다. 최상의 깨달음, 최상의 어떤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다. 최상의 깨달음이라는 어떤 정해진 한 법이 있겠습니까? 이것만 이 한 법만이 최상의 깨달음이다. 이것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최상의 **다. 이런 정해진 최상의 법이 있겠습니까? 정해져 있지 않죠. 천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 가지 깨달음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만 명이 있으면 만 가지 깨달음의 길이 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깨달음의 길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만이 딱 한 가지의 것만이 최상의 완벽한 깨달음이라고 어떤 실상의 이름을 지어놓고 상에 빠진다면 그 또한 잘못된 거죠.
<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 앞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앞에 나왔던 부분입니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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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한 법을 얻어서 수기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실체적인 관념으로서 우리가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어떤 수기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일체중생 모두가 결*에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본래 깨달음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여래라고 한다는 것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즉 그야말로 여여하다라는 것은 불교에서 많이 쓰는데 한결같고 한결같다. 같고 같다. 그 소리죠. 그래서 모든 법에 모든 존재, 모든 진리에 그야말로 한결같은 것이지, 어떤 한가지만을 특정이 이것이 더 좋고, 이게 나쁘고, 이건 훌륭하고 저건 훌륭하지 않고, 이건 온전한 법이고 저건 온전한 법이 아니고, 하면서 취사선택하고, 하나를 내세우고 이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예를 들어 법을 받았다. 수기 받았다. 내가 법을 받았다. 이런 데 휘청거려서 내가 법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여여함에서 깨지고 이러지 않는 거죠. 수기를 받았지만, 법에 여여하기 때문에 거기에도 휘둘리거나 집착하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에 여여하기 때문에 법을 준 거죠. 수기를 준 거죠. 법에 여여하지 않았다면 수기를 주지 않았을 것이죠. 수기를 주면 야~ 내가 수기를 받았구나. 남들보다 내가 우월하구나. 이런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여러분이 만약에 공부를 하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월감에 빠진단 말이에요. 그래서 수많은 스님이 스스럼없이 깨달았다라는 그런 더 큰 마장을 **다.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왜냐하면, 한 소식하게 되면 너무나도 환희심을 느끼니까, 그 환희심에 스스로 집착해서, 야~ 내가 할 수 있구나. 법에 의하지 않은 사람은 그 내가 법을 깨달았구나 하는데 집착해서 퇴* 할 수밖에 없다. 집착하면 벌써 물러나는 거기 때문에. <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 누군가가 부처님은 아뇩다라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사실이 아닌 거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완전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실체화시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도 다르지 않다 이 소리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깨달음을, 한 소식 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한 소식했다 하면서 상을 낸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이 아니죠. 그렇게 상을 낸다는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죠. 그건 거짓말에 불과한 겁니다. 그거는 비방하는 것과 같다. 법을 비방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 깨달았다가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는데 여래가 법을 깨달았다. 이렇게 하면 그게 법을 비방하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 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 실다움이 따로 있고 헛된 것이 따라있다면 90%는 실답고 10% 헛된 게 있다면 그중에 90%의 실다움을 쫓아야 하겠죠.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 법이 다 불법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다 불법인데 거기 어떤 것만 불법이고 어떤 건 불법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것만이 진리고 어떤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오류에 많이 빠져요. 불교만이 최상이다. 여기에 집착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이. 불교 이외에 다른 것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거는 아니다. 이렇게 끝까지 고집한단 말이에요.
혹은 불교 내에서도 위빠사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 간화선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길이야. 이렇게 어느 한 가지 집착한단 말이에요. 경전에 이렇게 ****하게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에 집착한단 말이죠. 일체 법이 다 불법인데 어떻게 한 가지만 정해서 불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염불도, 참선도, 간화선도, 위빠사나도, 모든 것이 다 불법입니다. <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 법이라 함은 곧 일체 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 일체 법이 불법이라고 하니까 일체 법이라는데 집착하지 마라. 이 소리죠.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 하기 때문이다. > 당연하겠죠. 스스로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스스로 상을 낸다면 그는 보살이라고 할 수 없죠.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보살인데,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는 거에 집착한다면 그걸 어떻게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 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
그야말로 일체 어떤 법, 일체 다르마에는 아인중생수자도 없죠. 또 내 스스로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보살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불국토를 장엄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장엄한다는 생각이 없었을 때 진정한 장엄이 시작되는 거죠. <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 무아 법에 통달했다는 게 뭐겠습니까?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다는 소리죠. 나라는 상을 타파하고 그 자리가 바로 무아입니다. 나라는 게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아상타파가 바로 무아입니다. 무아를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근본불교의 핵심이 뭐냐? 무아 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죠. 무아 법에 통달했다는 것이 바로 구경무아분, 여기에 핵심입니다. 구경에는 무아에 드는 것, 이게 바로 아상을 타파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가르침인 겁니다. 제18분 일체동관분 부터는 다음 주에 하면서 오늘 아마 보신 것처럼 앞에 나왔던 것에 대한 중복 반복이 계속된다는 걸 아마 느끼셨을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다음 한 시간 남아 있지만 남은 분들은 대개 짧습니다. 짤막짤막하게 분들이 이어져요. 결국, 앞부분과 중복되는 이런 부분이 많습니다. 이래서 남은 한 시간 다음 강의 동안 남은 강의를 다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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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법우님 너무노고가 많으십니다, 감사 합니다._()_
많이 배웁니다. 벽송님...
감사합니다.^^
인본님 고맙습니다.
반갑습니다. 송정님...
읽기만 해도 긴 시간이거늘.... 법우님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보시 기억합니다.
대신에 건강하십시오. 그래야 제가 이런 훌륭하신 가르침도 읽을 수 있잖겠습니까?
건강...^^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많이 배웁니다. 감
텍스티콘 참 이쁩니다. ^^
'나라는 상을 타파하고 그 자리가 바로 무아입니다.
나라는 게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래서 아상타파가 바로 무아입니다. 무아를 깨닫는 거예요...'
늘 인본 법우님의 녹취를 볼때마다 경이로움과 찬탄을 함께 느낍니다.
법우님의 정성과 보시행에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_()_
경이로움과 찬탄..
감사와 사랑...
감사합니다. 법신님....
짧은 말로 감사를 표현하기엔 법우님의
수고로움이 정말 대단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히려 제가 많이 배웁니다.돼지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누기님...~♡~♡~♡
감사합니다 _()_
법상스님 고맙습니다. 녹취해주신 인본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