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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 묘를 찾고서
수원백씨중앙종친회 회장 백석기(白錫基) |
우리 중시조 묘가 경상북도 예천에 있다고 하나 실전 되었다는 기록이 족보에 있는 것은 일가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40만 종인들은 하나 같이 허전함과 서운함을 간직한채 살아오면서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95년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고림리에 아주 오래된 묘, 세칭 백장군 묘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어 중앙종친회와 일가 여러분께서 여러 차례 현지를 답사하였고 최근에 중앙종친회 회장단이 다시 답사한 결과 족보와 역사상 기록이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시조 묘임이 입증되므로 2009년 8월 14일 중앙종친회 이사회에서 중시조 묘역 정화사업을 추진하기로 가결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결정에 이르기 까지 몇 번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예천에 살고 있던 일가 한 분이 중앙종친회에 제보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1995년도에 제보되었을 때도 일가들이 여러 차례 현지를 방문하였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고분이 우리 중시조의 묘라는 확증을 얻으려면 우선 발굴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그대로 믿자는 의견이 맞서고 그 주변의 토지를 확보하는 방안을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부터 현 중앙종친회 집행부에서 우리 족보와 역사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문을 통하여 담암공파 34세손 백창근씨가 5대째 약 150년간 모셔온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 주변 토지 확보 문제를 해결함에 따라 중앙종친회 이사회에서 의결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천년 동안이나 모시지 못했던 중시조 묘를 이제야 찾아 모시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묘역을 아름답고 성스럽게 정화하는 것은 우리 후손의 의무이고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이러한 기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우리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살림이 넉넉지 못하더라도 우리 중시조 묘 정화 사업에 모두 동참하시어 후손으로서의 기쁨을 누리시고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2009년 10월 일
대전 유성에서 임시이사회
2009년도 8월14일에 대전 유성관광호텔 1층 다모아홀에서 제2차 임시이사회를 개최하고 그 취지와 목적을 중앙종친회 회장 석기 회장께서는 부의안건으로 1, 평장사공 종회 위토 임대차 건 백석현이 평장사공 위토 20만평을 서산 거주 지연길과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위토 임야를 마구 벌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항구적으로 근원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므로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서 법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명하고 소송을 제기하여 해결하는 안이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음 (이사 총원 이구동성으로 동의 제청하면서 결의서 채택을 동의함) 2. 중시조 묘 추심문제
묘역(墓域)정비 방안 방안비교
구분 |
1 안 |
2 안 |
내용 |
* 우선 발굴하여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추진하고 증거가 없으면 추진 포기 * 1000년 이상 된 묘이므로 증거물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 함 |
다음사항고려 그대로 추진 *백씨 대동보기록 *옛부터 세칭 백장군묘 *백상필 소유토지 내에 자리잡은 묘 *백창근씨가 5대째 (약150년간)모셔옴 |
장점 |
* 확실한 증거 찾아 의견 일치용이 |
* 우리의 염원성취확실 * 발굴관련 부담 없음 |
단점 |
* 발굴결과 증거 없으면 우리의 염원 좌절 * 발굴관련 부담 큼 |
* 확실한 증거 찾지 못한 아쉬움 | 묘역정비 방안 1안과 2안을 회장님께서 유인물에 의거 설명하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2안대로 추진하자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
문익공 제향 엄수
2009년도11월1일 수원시 태안읍 기전리에 있는 水原白氏政堂文學隨城伯文益公宗中에서는 2009년도 제향을 수원백씨 종인과 후손이 약2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 및 제향을 성대하게 봉행하였습니다.
보성 광양 장흥군 청장년 단합대회
보성군 웅치면 용추계곡에서 보성:청백회,주최 광양:백우회, 장흥:장백회등 3개군 청장년 단합대회를 지난9월6일(일요일)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보성군:청백회 주관으로 보성군 웅치면 용추계곡에서 3개시군이 만나 청.장년회 시군의 종친회 조직을 보다 활성화하여 종친 상호간의 친목과 화합 그리고 백문 번영을 기하는데 목적을 두고 자생적으로 조직운영을 잘하자는 마음으로 서로 만나 숭조애족을 다지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백송회, 장백회, 청백회는 지난 1999.7.25. 제1회대회: 보성:청백회 주관으로 추진되었으며 제2회대회: 2000.7.9. 광양:백송회, 제3회대회: 2001.9.9. 장흥:장백회 제4회대회: 2003.9.21. 보성:청백회 제5회대회: 2005.9.3. 광양:백송회 제6회대회: 2007.9.1. 장흥: 장백회가 주관하여 행사를 이어오다 이번 2009.9.6. 제7회 대회가 하늘아래 제일 높은 곳이란 선녀 샘에서 발원하는 섬진강 발원지 용추계곡의 청정수역에서 수원백씨중앙종친회 백창규 총무부회장과 광주, 전남 종친회 백형로 회장을 비롯한 많은 임원진이 참여한 가운데 제7회 대회를 무사히 마쳤다. 백석기 수원백씨중앙회장께서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직접 참여하지 못하시고 격려사를 보내어 昌圭 총무부회장이 대독하고 금일봉도 전달하였다. 참고로 용추계곡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 드리자면 1. 일림산 정상에는 100만평의 자연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매년 보성군이 주관하여 개최하는 다향제와 병행하여 일림산 철쭉제를 개최 할 때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2. 또한 암반위로만 흐르는 명경지수의 맑은 물에 용소가 있는바 전설에 의 하면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용소는 명주실꾸리 한 타래를 풀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3. 용소 바로 아래 두꺼비 형상을 한 바위 두 개가 있는바 마치 하나는 몸 집이 큰 암 두꺼비요. 다른 하나는 몸집이 작은 숫 두꺼비로서 짝짓기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두꺼비 섬자를 써서 섬진강 발원지가 되었다는 이 지방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서 금년에 섬진강 발원지의 표지판을 설치하였으며 4. 용소 아래는 용소의 유래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 옆에 용암정을 지어서 피서객으로 하여금 은은하게 풍겨나는 편백 향기를 맡아가며 피서를 즐기도록 하였다는 곳입니다.
격 려 사 저는 寶城하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茶의 생산지라는 생각과 아울러 茶는 선비들이 즐겨 마셨던 음료수이므로 이곳 보성은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는 것이 먼저 머리에 떠오릅니다. 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바로 표출하는 그 솔직하고 勇敢스럽고 義로움이 바로 보성인의 기백이기 때문에 民主發展사에 길이 남을 보성 닭죽사건 같은 비리를 한국 최초로 적발하여 낸 곳이 이곳 보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寶城에서 우리일가들의 靑壯年의 모임체인 보성의 靑白會가 주관이 되어 光陽의 白松會와 長興의 長白會가 이곳 웅치면 용추리 계곡에서 함께 團合大會를 갖게 되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며 축하와 격려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곳 보성은 長興으로 부터 가까운 지역으로 16세 참판공(휘;繪)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호성원종 일등공신이신 21세의 석담공(휘;翰南)의 후손들이 회천에 많이 살고 있으며 아울러 임란 때 젊은 선비로서 全勝을 하시고도 내색 한번 하지도 않으신 宣武原從功臣으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를 제수 받은 22세손인 술고당공(휘:民秀)후손들은 이곳 웅치를 중심으로 集成村을 이루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장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寶城하면 꼭 받들어야 할 분이 洗心堂(휘:弘寅)이 십니다. 韓末의 우국지사 崔勉庵의 高弟로서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침략자 日本의 만행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弟子들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신 愛國志士로서 光復後 政府로 부터 建國愛族章을 받으신 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中央宗親會 업무 진행사항을 몇 가지 말씀드리면 1. 남포문제는 그동안 심각한 문제였었는데 최근에 平章事公 位土를 15년간 6억에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산림을 훼손하는 등 位土에 큰 손실을 가져오게 되어 지난 8월14일 대전 유성관광호텔에서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여 민사소송을 제기 하여 현 임원 업무를 정지시키기로 가결하고 즉시 8월 28일에 본건 소장과 업무정지 가처분신청을 大田地方法院 洪城支院에 접수하였습니다. 2. 두번째로는 중시조(휘;昌稷)의 묘가 경북 醴泉에 있으나 失傳이라는 족보상의 과제를 해결 하고자 여러 가지로 연구하고 답사한 결과 경북 예천군 유천면 고림리에 있는 봉분이 아주 큰 고분이 옛날부터 백장군 묘라고 口傳됨을 근거를 토대로 추심정화 하기로 같은 날 이사회에서 가결되어 현재 토지매입문제 등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3. 금년 하계수련대회는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 때문에 부득이 행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4. 끝으로 오늘 이 靑白會, 長白會, 白松會 모임의 단합된 모습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든 일가들이 崇祖, 愛族, 和睦 하는데 길잡이가 될 것을 바라면서 격려사로 가름합니다. 2009년 9월 6일 수원백씨중앙종친회 회장 백 석 기
한국 불교 현대화’스님의 큰 뜻 기리며
◎ 용성스님 悟道 123주년 기념 오늘 전북 장수에서 세미나 한국 근대불교사의 큰 승승인 백용성(白龍城,1864~1940)스님의 오도(悟道)123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는 학술세미나가 16일 탄생지에 세워진 전북 장수 죽림정사에서 열립니다. 용성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왜색(倭色)불교의 만연을 막고 한국불교의 현대화에 앞장섰다. 1911년 서울 종로구 봉익동의 민가를 수리해 대각사를 창건하고 불교 중흥을 위해 애썼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만해 한용운스님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습니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1921년 출옥 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해 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운동을 벌였고. 찬불가를 직접 작사? 작곡하고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불교의식의 한글화에도 앞장 스셨습니다. 16일 세미나에서는 죽림정사 조실 도문스님이 <용성사상의 현재적의의>란 주제로 기조발제 합니다. 이어 신규탁 연세대 교수가 용성 스님의 저서《귀원정종(歸源正宗)》을 분석하고, 김광식 부천대 교수가<동헌 대종사의 생애와 백용성의 유훈 실현>을 발표합니다. 한편 이번 세미나에서 1924년 용성스님의 회갑을 맞아 3?1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민족지도자들이 축시를 쓴 시첩(詩帖)이 공개돼 주목 됩니다. 표지에《龍城大禪師(용성대선사)壽宴詩(수연시)》라고 적힌 이시첩에는 경봉(鏡峰)스님 등 불교계 인사뿐 아니라 나인협,나용환,박인호,이종일 선생 등 천도교 인사 등이 망라됐습니다. 그중 나인협선생은“서대문 감옥에서 수감되었다 헤어져 오늘에 이르렀는데/ 홀연히 초청하여 불러주시니 깊이 감격하였습니다. (西因一別到如今/忽見招呼感激深)라며 3.1운동이후 함께 옥고를 치른 감회가 적혔습니다. 김광식 부천대 교수는“당시 종교의 벽을 넘어 독립운동가와 민족지사들이 교유하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습니다. 죽림정사는 이 시첩의 원본은 사찰 경내 용성기념관에서 전시하고 영인본을 제작해 보급하고 있습니다.
한가위 “회소곡" 의 유래
신라 제3대 儒理尼師今(王)은 딸(公主)이 둘이 있었습니다. 儒理王께서는 질삼을 장려하기 위하여 나라 안의 6부에 사는 여자들을 두편으로 나누어 두 王女를 시켜 각각 자기편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하여 초가을 7월16일부터 날마다 새벽부터 큰집 뜰에 모여 열심이 길삼을 삼게 하여 밤 10시경에 파하게 하였다. 이렇게 서로 경쟁을 한달간 하다가 8월15일(秋夕)에 이르러 성적이 많고 적음을 가려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한다. 여기서 노래와 춤과 갖은 오락을 다 벌여 흥을 돋우며 즐겁게 놀았는데 이것을“가베" 또는“가베놀이" 라고 하였고 이 놀이를 지금은 추석놀이라고 하며 진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진 것을 탄식하는 소리로“회소?“회소?라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청아하여 뒷날 사람들이 이 소리에 따라 노래를 짓고 이름을“회소곡? 이라 하며 지금도 경상도 지방 시골에는 전해지고 있다고 하다.
성주아리랑 음반 발표회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인 山陰公派 29세손 백정기씨는 지난 8월28일 수원백씨중앙종친회를 방문하여 경북 성주는 선비의 고장이며 참외의 명산지인 데도 강원도 정선 아리랑이나 전라남도 진도 아리랑이나 경상남도의 밀양 아리랑 같이 온 민족이 함께 즐겨 부르는 아리랑이 없음을 실토하면서 오는 9월11일(금)18시30분에 성주읍 성주문화예술회관에서“성주 아리랑" 음반을 출판하여 기념공연을 갖기로 하였다고 가까운 집안의 칠기, 동옥, 숙희씨 등 친척분들과 함께 그 소식을 전하려 중앙종친회를 찾아 왔기에 중앙종친회에서는 성주아리랑 음반 발표회를 갖게 된 것을 격려와 축하를 하였으며 9월 11일에는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백석기 회장께서 축하화환을 보내고 축하를 하였다.
文益公宗中 內紛에 對하여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hompy-img1.dreamwiz.com%2FIMAGE%2Fdrogon%2Ff00007%2Ff135m%2F%4083-02.jpg) 1. 賢祖이신 文益公 先祖님의 재산관리와 제향문제와 후손들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기 위해 조직된 문익공 종회에서 최근 2006년도 말경에서 부터 일어난 일련의 운영상 견해차이가 내분으로 점차 격화되어 불미스럽게도 祖上님의 상계를 놓고 옳다 그르다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특정 先祖를 놓고 어느 분의 아들이 아니다. 또는 어느 선조님과 어느 할아버지는 형제가 아니다 하면서 시비를 벌이는가 하면 최근에는 문익공종 회 현재 임원들이 경리부정이 있다고 사직당국에 고발하는 등 문익공종회의 내분문제가 현실적으로 그 도가 지나쳐 고귀하고 존경하게 받들어야할 현조님들의 행장에까지 논제를 삼게 되였고 가장 화목해야할 일가들이 시비를 하고 있음을 심히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2. 중앙종친회에서는 해결책으로 자체적인 합의를 유도하기 위하여 2008. 1. 31.과 동년 7월10일에 족보연구위원회를 개최하고 동년 8월4일에 특별연구위원을 선출하여 8월12일에 전라북도 장수군에 모셔져 있는 정신재공 묘소를 답사 하는 등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보았으나 만나면 언쟁만 심화되어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만 가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수정파(보성공)쪽에서는 족보(특별)연구위원회를 왜 안 여느냐? 하면서 항의 하는가 하면 유지파(정신재공)쪽에서는 남의 조상님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왈가왈부 하려는 족보연구위원회는 열어서는 안 된다 하는 등 상반된 견해는 더욱 감정을 자극시켜 마침내 역대족보(파보나 대동보)를 편찬하신 고마우신 선조님들에게 환부역조를 하였느니 하면서 안하무인격인 언사로 종친회 일가간의 본의에 어긋난 글이나 언행을 쓴다는 것은 심이 유감 된 일인 줄 생각합니다. 또한 최근에는 정신재공파 일부종인들이 문익공종회의 내부문제를 가지고 사직당국에 고소를 한다는 것은 종친회의 기본뜻에 어긋난 일이니 조속한 시일 내에 취하를 하고 서로 화목하게 종전과 다름없이 합심하여 오손 도손 상의하는 문익공종회를 만들어 운영해 가기를 학수고대 합니다. 4. 2009.6.2.에 문익공 종중 회장단이 족보연구위원회를 열지 않는다고 항의 방문하여 이 문제는 문익공 종중문제 임을 강조하며 자체에 맡겨 줄 것을 건의함에 이를 받아드리니 정신재공 후손과 보성공 후손의 주장을 수렴하여 해결방안을 찾아서 중앙종친회에 제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하고 수원백씨 중앙종친회에서는 水白總 09-18호(2009.6.5.)로 문익공종회장를 비롯하여 정신재공파 종회장, 정신재공 재경종회장에게도 보낸바 있습니다. 5. 중앙종친회에서는 선조님들께서 만드신 모든 족보를 소중이 여기되 정사 대동보를 비롯한 갑자대동보와 기해대동보, 임술대동보, 정축대동보를 기준으로 종사를 집행하고 있으며 특히나 현재는 정축대동보를 기준으로함을 원칙으로 한다. 그리고 대동보에 수록된 각종 서문이나 범례나 편찬경위 등도 모두 등재되어 있는 것은 소중하게 전수하여 후손들이 보고 연구 할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6. 중앙종친회는 이에 대하여 가볍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첫째 확실한 고증에 따른 진실을 확인하고 둘째 쌍방의 합의를 유도하며 셋째 합의가 되지 않을 때에는 중앙종친회의 결정에 승복 하겠다는 각서가 있을 때 최종 처리 방침을 가지고 있으니 감정적 투쟁은 자제하기 바랍니다. 7. 중앙종친회에서는 종훈을 (崇祖 孝親 敬老 宗親 敦睦 和合 子孫 敎育 爲先) 지침으로 삼아 시행 하고 있습니다. 숭조 효친 경로 위선이 선조와 어른들을 잘 모시고 받들라는 뜻이라면. 돈목 화합 종친이 일가들이 서로 서로가 화목하고 사랑하라는 뜻이며 자손 교육이 후세를 잘보살피고 생각 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종친여러분들! 선영들께서 후손들이 불화와 싸움으로 일관 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습니까? 우리 또한 얼마나 불효한 자손이 됩니까?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드시 분열과 싸움은 선조들에게 최대의 불효이며 종친회의 최대의 적입니다. 화목하게 지내는 것만이 숭조하는 길이며 종친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임을 알기 바라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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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시조(영희공) 묘. 벌초를 하다.
지난 2009.8.14. 대전 유성호텔에서 열린 수원백씨중앙종친회 이사회에서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고림리 중시조 묘를 찾아서 확정하고 난 이후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지만 중앙종친회에서는 처음으로 중시조묘 벌초를 하는데 참여하기는 이번이 처음으로 중앙종친회 錫基회장님과 雲範종무부회장과 자문위원 種植씨 父子분과 같이 2009.9.19.에 약150년 전부터 담암공 후손들이 벌초를 하였다고 하는 부산에서 온 白圭璨씨와 서울에서 온 昌根씨 등과 묘역에서 벌초를 하고 만나기로 약속하였기에 서울에서 11시가 못되어 여의도 여의나루 전철역 앞 서울아파트 앞에서 회장님과 함께 4명이 출발하여 오후4시경에 도착 하였더니 벌써 봉분 벌초는 마치고 주위 풀을 깎으면서 마무리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간단하게 준비하여 가지고간 제물을 놓고서 省墓祭를 드린 다음 묘전에서 飮福하는 자리에 둘러앉아서 백상필 명의로 된 땅212번지 묘지 255평(843M2)매입 문제도 상의하기로 합의하고 벌초한 분들에게 격려의 뜻으로 물품(타올 20매, 소주1상자)과 금일봉(20만원)을 전달하고 種植씨 큰아들인 昌烈씨가 운전하여 저녁6시경에 출발하여 오면서 그동안 150여 년 동안을 돌보아준 담암공파 후손인 33세 圭讚씨와 34세 昌根씨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9시가 좀 지나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2009년도 옥산사 제향일에 있었던 일
수원백씨 중앙종친회에서는 예년과 같이 2009년도 제향일인 10.25.에 많은 후손들이 참석하게 하기 위하여 각 시 도에 참석독려 공문을 하달하고 서울에서는 버스로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동막동 옥산사 재실에 도착한 것이 오전 11시였는데 보령시 웅천에 사는 백일기가 사람들 20여명을 동원하여 제향을 방해 하려고 재실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한다는 말을 듣고 전국에서 모인 120여명의 평장사공 후손들은 대책을 의논하고 싸우지 말고 문밖에서라도 제향을 모시되 방해를 받으면 사진을 찍어서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하자고 합의하고 옥산사 재실 대문인 대승문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폭행 수원백씨 제관들은 석기회장을 선두로 하여 재실대문 앞에 이르자 느닷없이 백일기를 필두로 백석현, 백낙순 등 5~6명이 덤벼들면서 수원놈의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린다. 하면서앞길을 막기에 이 무슨 짓이냐 하고 종무부회장이 앞을 가로막자 너 이놈 개새끼 칼로 찔러 죽인다. 하면서 종무부회장의 얼굴에 손을 대며 멱살을 잡고 연속 이 개새끼 칼로 찔러 죽여 버린다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뱄다하면서 종무부회장을 위협하였습니다. 느닷없이 당하여 분이 오른 종무부회장은 어디 찔러 바라. 하면서 고함을 치니 백일기는 또 백석기회장님에게로 달려가 팔을 잡아채며 수원백가 놈들 다 죽여 버려 하고 외치니 그곳에 있던 일당들이 합세하여 제향준비를 방해하고 사진도 못 찍게 하는 행패를 부렸다. 계속 하여 백일기는 수원백가 놈들 다 죽여 버려 하고 연호하며 광인과도 같이 서울총무에게 덤벼들어 주먹을 휘두르며 서울총무의 얼굴을 때리고 또 총무부회장에게 달려들어 수원백가 놈들 모두 죽여 버려 하면서 멱살을 잡고 옷을 잡아 채워 단추가 떨어지고 다리를 차는 등 미친놈 같은 행동으로 여러 사람에게 폭행을 하였습니다. 제향방해 2시가 되어 제향을 모시자는 회장님의 지시에 자리를 펴고 제물을 차리는데 백일기는 제사를 모시려고 깔아 놓은 비닐자리와 그 위에 진설한 果 포를 뒤집어엎어 버리니 배 사과는 굴러가고 비닐자리는 마구 꾸겨 백일기가 깔고 앉아서 어디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느냐 못 지낸다. 하고 악을 쓰면서 방해하고 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다시 맨 땅바닥에 접시를 놓고 모시려는데 접시를 발로 차서 사과와 배등이 또 굴러 가는 것을 본 석기회장님은 좀 더 뒤로 물려서 차리고 모시라고 하여 1미터 정도 뒤로 물려서 제물을 차려 놓고 제향을 가까스로 모셨습니다.
參校公.文敬公 休庵 秋季大祭 奉行
기축년 9.20.(매년 음8월 첫째 일요일) 정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가의재(嘉義齋)에서 일가 160여명이 참사한 가운데 승문원 참교공(諱 思粹)과 문경공 휴암(諱 仁傑) 선조의 추계제향을 엄숙히 봉행하였다. 成基 회장은 인사말에서 바쁜 중에도 불구하고 선조 향사(享祀)에 경향각지에서 적극 참사해 주신 일가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하였다. 이어 휴암종중의 연중 최대사업목표인「휴암 백인걸 묘역 종합기본계획수립」을 현재 진행 중에 있는데 본 계획에 전사청 건립, 신도비각 이설, 연못 ? 주차장 정비, 기타 부대시설(墓道 樹木 정비 및 공원 조성) 등을 반영하여 제 서류(종합계획서와 도면 등)를 갖추어 관계기관과 사전 협의한 사항에 따라 인허가를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차후 시 ? 도별 문화재심의위원회 심의와 조정을 거쳐 예산배정과 인허가 승인을 얻어 연차적으로 시행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이어 향사(享祀)에 참여한 후손들에게 휴암 선조님의 어린 시절을 묘사한 동화책“연못골 소년”과 사자소학(四字小學) 등 책자와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증정하였다. 추계제향 집례를 맡은 영운 국장이 제 헌관을 분정, 소개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제향례를 주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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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중시조 묘를 찾았다
백씨중시조 영희공기적비문 공의 휘는 창직이요 자는 화숙이며 시호는 영희니 백씨의 중시조이시다. 묘소가 예천에 있다하나 세대가 오래되어 실전되었다. 지난 1977년 이곳 자옥산 백씨 시조 송계공 묘하에 영월당을 재건하고 묘당을 병설하여 옥산세사라 이름하니 송계공을 수위로 하여 간이대부공 휘 정, 서주대도독공 휘 입승, 한주태수공 휘 상, 우잠태수공 휘 영과 공을 함께한 육위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송계공 아래로부터 공에 이르는 원계에 대하여는 그 년대와 소목이 미상하여 역세 백씨보는 공을 중시조로 하여 일세로 모시고 연계하고 있다. 공은 신라 경명왕때 벼슬하여 중랑장에 이르시고 고려조에 와서는 시중상장군으로 증직되셨다. 배는 상화공주 박씨니 신라 경명왕의 여로서 무육하시다. 계배는 진천임씨니 흥화부원군 희의 여로서 이자를 생하셨다. 고려 혜종왕의 비 의화왕후 임씨도 흥화부원군의 따님이시니 공의 계비 임씨와는 자매간이시다. 따라서 공은 경명왕의 부마이심과 아울러 혜종왕과는 동서간이니 그의 가벌과 인품의 탁월함을 족히 짐작할수 있다. 남의 장은 길이니 광평시랑이오 차는 탁이니 병부시랑으로 훈업이 역사에 명시되었다. 큰아들 손의 사유는 시호가 문정이오 사홍은 상당군이며 차방손장 사청은 태복경이오 차는 사렴이다. 공의 세대가 유구천백유여년으로서 예손이 수십만에 이르며 명현석학과 맨장열사가 계계승승하여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백씨가 유사이래 음덕이 원혁하여 덕후유광이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서기 1979년 기미신춘 외후손 대통령 고령인 박정희 근술 백씨화수회 근립
사십만의 후손을 둔 영희공의 묘소를 찾으려고 예천땅을 헤맨 끝에 천년이 걸려서 찾았습니다. 기쁘고 기뿐 마음 정성으로 승화하여 크고 작은 마음모아 성역화에 동참 합시다.
族譜의 發展과 貫鄕統一
族譜의 發展相을 살펴보면 거의가 漢字文化의 傳來와 自己表示의 方法의 일환인 姓氏와 같은 씨족이 모여 사는 地名을 중요시 하는 本貫制度의 발달 에다 유교사상의 傳來로 孝를 根源한 祖上崇拜 思想으로 자기 씨족을 표시하는 姓과 貫鄕을 중요시 하였다. 中國에서는 족보의 起源으로 春秋傳에 의하면 召康公이 九族(直系尊卑屬各四代)를 一籍에 登載함으로 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2000여년전에 譜의 體系가 있어 程張兩夫子의 宗法說에 의하면 姓氏가 있으면 氏族이 있고 氏族이 있으면 譜諜이 있어서 姓氏文化의 發達이 族譜文化 시대로 발전하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骨品제도나 血族중심에서 14,15世紀에서 18世紀 사이에 科擧를 통한 人材등용으로 兩班社會가 재편되기 시작하니 그에 수반하여 科擧에 應試 할 수 있는 資格 要件으로 族譜가 필수품으로 절실히 요구됨에 따라 족보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一般平民들은 姓이나 族譜를 갖기를 소원하였다. 19~20세기에 들어서면서 통신교통의 발달과 함께 階級的이고 封建的인 農耕社會에서 平等的인 商工業 社會로 전환되면서 특히 西歐의 自由主義思想은 賤民(官奴 民奴)제도의 폐지로 모두 姓과 族譜를 만들어 가지므로 각자 氏族의 團合과 和睦은 勿論이고 훌륭한 선조의 자손임을 자랑 할 수 있는 온 국민이 모두가 긍지와 자부심을 가 질 수 있는 族譜時代가 되었다. 이제 15.6세기 이전 당시의 社會環境相은 交通手段이나 通信手段은 도보로 걸어 다니며 의사전달을 하였으며 나라에서 전란이나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다급할 때에는 말을 타고 달려가 말(句讀)이나 書信으로 전하는 方法과 산마루에서 烽火로 의사를 전하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이와 같은 未開發 狀態의 農耕社會에서 오랫동안의 氏族集團生活을 하여온 우리 조상들은 비옥한 땅을 찾아서 또는 生活의 편의에 쫓아서 다른 곳으로 移徙를 하여 몇 대를 그곳에서 살다보면 自然스럽게 그곳에 온 할아버지나 또는 그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先祖님의 이름(함자)을 頂点으로 하거나 아니면 移居한 本人이 頂点이 되어 始祖나 中始祖, 또는 中祖가 되고 그 地方의 지명을 따서 ○氏의 始祖 또는 中祖라고 부르게 되였으며 이것이 姓氏와 貫鄕發生의 주된 緣由가 되었다. 또한 皇帝나 國王이 重臣이나 功臣에게 부여하는 賜姓制度와. 科擧制度의 실시로 及第者가 姓을 가질 수 있게 되고 姓이 없는 集成村人 들에게도 科擧 應試권을 주는 등 姓과 貫鄕이 있어야만 兩班으로 행세 할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린 高麗朝 이후와 음사제도와 宗孫 優待政策도 崇祖思想에 힘입어 高麗 集470여 년과 朝鮮 集중렵까지 300여년 동안 약 800년 동안 姓과 本貫은 많이 발전하여 이무렵 이후에 나온 萬姓譜(白氏 貫鄕 184)나 4000年 文獻通考(162)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후 교통 통신수단이 발달하여 각기 다르게 쓰던 貫鄕이 모두가 같은 始祖의 자손임을 알게 되자 1800년경부터 統合되기 시작하여 1857년 丁巳大同譜가 편찬되고 난 이후 甲子 大同譜가 나온 해인 1924년에 痴堂 강효석이 쓴 典故大方(書冊名)에 보면 白氏는 12본관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始祖 송계공께서 白氏 姓은 가지고 오셨으나 本貫을 안가지고 오신고로 子孫들 간에 자기들 中祖께서 살던 곳이 吾白을 대표하는 本貫이라고 상호 主張 하는가 하면 아예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는 측도 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 姓氏와 貫鄕의 발생 연원을 살펴보면 先貫鄕 後姓氏도 있고 同時에 發生한 姓氏와 貫鄕도 많으며 同族與否도 同始祖 同姓 異貫鄕(강릉김씨와 광산김씨)도 있으며 同始祖 異姓 同貫鄕(金海許氏와 金海金氏)도 있음을 볼 수도 있다. 族譜 編纂의 촉진제로는 무엇보다도 儒敎思想이다. 孝의 사상을 승화시킨 祖上崇拜熱은 交通問題와 通信問題가 해결되지 않은 未開發 狀態에서도 어려운 漢文을 배워서 조상의 이름을 記錄하고 돌아가신 忌日을 기록하였고 가난에 찌들려 초근목피 하면서도 아껴놓았던 쌀밥으로 기일이면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시던 그 정신을 정리한 것이 바로 族譜에 깃들어 있는 祖上崇拜 思想이요 孝의 정신인 것이다. 1800년경부터 實學派의 대두와 특히 천주교가 南人에게로 전파되자 西人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던 처지라 자연스럽게 自由 平等主義 思想의 導入과 連繫가 되었으며 또한 성경의 한글 전용과 祭祀制度의 인정으로 祖上崇拜와 孝思想과 直系되어 平民층의 文盲退治와 啓蒙化를 촉진시키면서 姓 없이 오랫동안 살아온 천민들의 원한을 풀어주고 族譜없이 살아온 평민들의 숙원을 해결하여준 계기가 되였으니. 姓을 가진人口가 늘어나게 되고 族譜의 發展도 急速度로 進展된 것이다. 우리 白氏도 時代의 변화에 따라 始祖 송계공(휘:우경)께서 780년 신라에 오신 이후 1000년 가까이 先系의 공통된 同祖내력을 모르고 각 지방에서 살아온 그 地方名과 그곳에서 살던 제일 윗대 분을 始祖로 모시고 살아 온 당시의 族譜를 보면 1676년(肅宗2)에 편찬한 丙辰譜를 비롯하여. 1739년 英祖15 己未草譜와 휴암파보. 1776년 영조52 丙申 6권보. 1807년 丁卯 主簿公파보. 1810년 庚午譜. 1811년 순조11 辛未년의 舒州白氏譜등으로 가까운 一家끼리 族譜(派譜)를 만들었던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우리 白氏전체가 한 혈통이란 內容과 모든 선조들의 행장을 찾아서 별좌공의 10세손인 능수공(자는 致文)과 휴암공의 9세손 斗鎭公(자 星老)이 주동이 되어 1851년(철종2)에 편찬에 착수하여 7년여의 각고 끝에 集大成하여 19권의 족보를 발간하니 이것이 우리 白氏의 最初의 大同譜인 1857년의 丁巳白氏世譜이다. 이때까지 全體 白氏가 한 血族(一家)이란 것을 정확하게 모르는 시대부터 한 핏줄임을 알게 된 이후에는 本貫은 쓰는 것이 아니고 대를 기준하거나 有名하신 선조님을 기준하여 ○○派라고 쓴다고 정립하고 1857년의 丁巳白氏世譜를 편찬함으로 同始祖 同姓 同族이란 사실과 1894년 甲午更爭으로 國民 모두가 姓을 가질 수 있게 된 平等社會로 변천하니 족보에 등재하지 못하였던 평민들도 서로 서로 앞 다투어 顯祖님의 후손으로 族譜에 등재 할 수 있는 기쁨을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族譜는 씨족의 단합과 결속을 가져왔고 崇祖, 愛族, 思想으로 이어지는 所重한 보물로 장롱 속에 깊이 保管되어 왔을 뿐더러 밖으로는 兩班證書로서 자랑거리로 되어왔다. 그리고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韓.日.同化政策(本의 분열과 姓씨 개조 등)에 항거하여 1924년 甲子 大同譜를 발간하여 우리 백씨는 모두 松溪公을 單一 始祖로 모시는 같은 혈족임을 재확인하면서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백씨 관향을 통일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甲子 己亥 壬戌譜의 貫鄕란에 보면 대부분의 종친들이 水原으로 통일하자는데 의견접근을 보았으나 文簡公(藍浦白氏)派 일부만이 이의를 제기함으로 1997년 丁丑大同譜를 편찬할 때 편찬위원회에서 가결하였는데 문간공파 (남포백씨)일부가 현재 까지도 반발하고 있다고 하나 同姓 同祖 同族은 百代之親이다. 우리는 같은 일가로서 문간공 후손 중에 서도 저명한 인사들은 이미 수원백씨로 통합하였다는 사실도 생각하여 보면서 同始祖와 同一한 姓氏로 수백년을 사이좋게 살아온 兄弟間 집안인데 水原白氏로 貫鄕을 統一함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水原白氏 外孫인’安重根 義士.
하늘에서 내린 홍의장군’1894년 동학 농민군은 안중근을 이렇게 불렀다. 당시 15세의 安重根이 붉은 옷을 입고 동학 토벌군 선봉장으로 활약하며 동학군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무반의 후예인 아버지 安태훈과 어머니 백천조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안인수가 미곡상을 하여 집안을 일으킨 뒤 황해도에서 손꼽히는 대부호 집안이었다. 안 의사의 자서전‘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부친 안태훈은 박영효에 의해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던 개명 지식인이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안태훈은 신천군 청계동에서 동학군 토벌 의병을 조직했다. 동학군 대장은 김게 金九?당시 19세)였는데 안태훈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밀사를 보내 “군이 어리지만 대담한 인품을 지닌 것을 사랑하여 토벌하지 않을 것”이라며,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밀약을 성사시켰다. 김게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는 자신의 집에 피신시켰다. 안태훈에 대해 김게는‘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안진사는 눈빛이 찌를 듯 빛나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안진사를 악평하던 자들도 얼굴만 마주하면 부지불식간에 경외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의 관찰로도 그는 퍽 소탈하여 교만한 빛 하나 없이 위아래 모두 더불어 함께 하길 좋아하였다. 79세기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김게와 안중근도 이때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맏아들 중근은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총열이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영특한 기운이 넘치고 군사들 중에서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혔다. 늘 넷째 삼촌 태건과 동행했는데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는 군사들을 먹였다. 아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안태훈은 1905년 병사한다. 젊은 시절 음주가무를 즐겼던 안중근은 이때 “독립의 날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끝까지 이를 지켰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조선의 위기를 절감한 안중근은 1906년 재산을 털어 삼흥학걐와 돈의 학걐의 재정을 도우며 교장을 맡는다. ‘교육으로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목격하고 그의 생각은 바뀐다. 애국 계몽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다. 연해주에서 안 의사는 무장투쟁에 나섰다. 이범유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이 되어 300여명의 의병과 함께 함 통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것을로에 대해서는 국제법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풀어주고 무기까지 돌려주었다. 이 조치에 많은 의병들이 이탈하여 다음 전투에서는 참패하고 만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안중근은 11명의 동지와 단지(斷指)를 결행하고 다음 투쟁을 준비한다. 그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여러 운동을 두루 경험한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다.
원주 종친회 2009년도 야유회
원주종친회에서는 2009년8월8일(토요일)11시에 원주종친회 하계 야유회를 치악산 쌍학정(원주시 금대리 계곡 백종구 종친)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英鎭總務의 사회로 承來會長의 인사말과 공지사항을 말한 다음에는 삼계탕을 들면서 종친회 회원전원친목을 다지면서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치악산 맑은 물과 신선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우거진 녹음속 계곡에서 일가전원화합과 단결을 위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種植 一家의 孝心
며칠 전부터 종식일가께서 다음 日曜日인 10월11일이 盛民公 할아버지 이하 26위분의 祭享日이라고 笏記와 祝을 부탁한다고 하여 나는 성의를 다하여 水原白氏中央宗親會에서 만든 典禮儀要를 비롯하여 家庭儀禮敎書와 休庵할아버지 笏記와 기타 墓祭笏記등을 參考하면서 10월7일~8일 2일 동안의 아침과 10일 토요일 하루 동안의 품을 팔아서 訓正公의 長子이신 惟忠公의 三男이신 盛民公의 15世 宗孫인 種植씨의 祖考以上 26位의 塔祭笏記를 써서 준비를 하였으나 사정에 의하여 淳基 명예회장이 執禮를 하고 필자는 終獻官을 하였습니다. 홀기와 축을 쓰다 보니 평소 種植氏가 訓正公派를 찾으며 그리워하는 그 심정을 홀기와 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잘 알 수가 있었다. 18세에 盛民祖에서 24세 東明祖까지 6代 獨子에다 26世 蘭洙祖 獨子에다 28世 南成祖와 30세이신 할아버지 遜鉉公과 31世인 아버지 承龍公과 32世 本人도 독자이고 보니 고독하게 내려온 집안으로 벌족한 집안이 그리워지는 것도 事實이나 그는 그 心情을 남달리 孝心으로 승화시켜 祖上의 祭享을 잘 모시면 福을 받는다는 東方禮義之國의 祖上崇拜 思想의 法度에 어긋남이 없이 앞장서서 實踐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본받을 일이라고 生覺 합니다. 더욱이 種植씨는 약 5,6년 전에 깨끗하고 品位있게 탑을 축조하여 그곳에 26위를 奉安하였으니 이는 從時俗하라는 聖賢의 말씀과도 일치되는 일이고 政府施策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5,6년 동안 時祭때마다 서울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모든 一家들에게 崇祖思想을 기르는 산 敎育場과 화목을 다지는 모임의 기회를 만들면서 盛民公이하 26위의 제향을 모시는 孝心이야 말로 모든 종친들의 귀감이 되어 內外분이 孝子 孝婦賞도 받은바 있습니다. 2009년도에도 예년과 같이 버스를 대절하여 新龍山 국제빌딩 앞에서 8시가 좀 넘어서 錫基회장을 비롯하여 淳基명예회장 등 30여명의 종친들이 출발하여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사기소리에 도착하여 서둘러 제향을 아래와 같이 18世 盛民公에서 19世 弘山 20世 以良 21世 時安 22世 尙龍 23世 師男 24世 東明祖까지의 獻官은 種植씨를 중심으로 제관을 1차 분정하고 25世 京鎭할아버지 이하 28世 南成 할아버지 까지는 長子인 昌烈씨를 중심으로 헌관을 분정하여 2차로 제향을 올리니 敎育的인 면에서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백낙환 이사장 한일국제환경상 수상
인제학원(인제대학.인제학원)이사장이신 白樂煥(수원백씨 32세. 인주공파)씨는 남이 모르게 시작한 환경운동이 인정을 받아 한일국제환경상이란 큰 상까지 받게 됐다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하며 또한 수상소식에 인제학원 학생들과 교직원은 물론 병원의 임직원등 3만 가족들이 모두 환호 하였습니다. 이어 백낙환 이사장께서는 이번 수상은 앞으로 더욱 열심히 환경살리기에 나서 달라는 의미로 받아 드립니다. 막중한 책임도 느낍니다. 환경 운동은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낙동강 살리기 환경정화운동은 쓰레기를 줍는 작은 환경운동이지만 이 실천운동이 씨앗이 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을 살리는데 나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 17일 인제학원은 낙동강 변에서 101번째 환경 정화운동을 실시했습니다. 앞으로 우리학원이 존재하는 한 200번째 300번째 계속해서 낙동강 살리기 환경정화운동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백승준 병장의 장한 일
(불우한 이웃에 희망을) 공군본부 기무부대에 근무하는 백승준 병장은 전역을 앞두고 군 복무기간 중 받은 봉급 200만원 전액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함으로 전 병영에 귀감이 되고 있다. 자신도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낸 백병장은 어린이들이 어려운 생활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도록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며 사회에 돌아가서도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계훈 공군참모총장은 지난 9월2일 백승준 병장을 집무실로 직접 불러 다른 사람을 돕는 다는 것이 쉽지 않고 간부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인데 훌륭한 일을 했다고 칭찬의 격려를 하였다.
백무산 시인 임화문학상 수상
수상작 시집;“거대한 일상" 시인 백무산(본명 백봉석 54)씨가 제1회 임화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10월16일 오후 서울 조계사내 불교역사 문화관 에서 행한다. 1984년 민중시 1집에 연작시“지옥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싣고(1990) 인간의 시간(1996) “만국의 노동자여.(1998) 길은 광야의 것이다.(1999) 초심.(2003) 길 밖의 길. 등을 발표했으며 1997년 제12회 만해 문학상도 수상한바 있다.
백우현 LG전자 사장, ‘美 올해의 방송계 거장’
미국방송 도서관 선정 LG전자는 자사 CTO(최고기술책임자)인 백우현사장이 미국방송 도서관이 발표하는‘올해의 방송계 거장’에 선정됐다고 4일 밝혔다. 미국방송도서관은 미국 방송역사를 연구하는 기관으로 매년 방송 발전에 기여한 방송인,언론인,기업가를 거장으로 선정한다. 방송도서관은 백사장이 미국디지털방송이 사용하는 비디오 압축 기술 ‘디지 사이퍼’를 개발하고, 미국 케이블방송 전송 표준 확립에도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백병동 예술원상 수상
대한민국예술원(회장 김수용)은 소설가 이문열씨(61), 작곡가 백병동 씨(73),지난달 작고한 서양화가 정점식 씨를 각각 제54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 음악, 미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메달, 상금3,000만원이 수여되며 시상식은 9월7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원에서 열린다. 예술원은 이날 정기총회를 열고 문학분과에 소설가 한말숙(78) 서정인(73), 시인 김후란(75), 음악분과에 피아니스트 신수정(67) 이경숙(65), 연극, 영화, 무용분과에 한국무용가 김숙자(65),발레리나 김학자 씨(70)를 신입회원으로 선출했다. 예술원 회원은 총88명이 됐다.
訂正합니다
종보 82호 17P의 “理想村을 만들려고 東途하신 松溪公? 의 제목중 松溪公의 諱는 宇經이시고 字는 擎天이시며 諡號는 忠肅으로 되여 있음은 오기이며 諡號는 文景임을 바로잡으며 또한 종보 76호 5P의 끝에서 6P의 3째줄 까지의 시조 송계공(松溪公=諱宇經)을 비롯하여 익열공(翼烈公=諱仲鶴) 평장사공 중시조 영희공(中始祖 英禧公=諱昌稷) 청헌공(淸獻公)諱.簡美는 오기이며 諱.揮로 바로잡으며 5世 정민공(貞敏公=諱簡美)이 빠졌음으로 추가하여 올립니다.
일가동정(一家動靜)
白錫基 출판문화협회 회장 국제출판협회 부회장에 선출
백석기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은 15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열린 국제출판협회(IPA)전체회의에서 부회장에 선출됐다. 아시아에서 IPA부회장이 나온 것은 일본과 인도에 이어 세번째로 임기는 내년인 2010도 1년간이다.
女性部長官에 白喜英 博士
정부발령으로 여성부장관으로 발령받은 백희영(白喜英)박사는 2009년 9월 30일 취임하였다. 학력 : 하버드대학교 공중보건대학원 이학박사 경력 : 숙명여대조교수 부교수.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식품영양학과 교수 독일 베르링 자유 대학 방문 교수 미국 샌디에고주립대학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 사회활동 : 대한가정학회 회장. 대한 의학 한림원 회원 한국영양학회 회장. 세계영양학회 이사.
문경공 휴암종중 부회장에 永基將軍
당산공종중 회장 영기(永基) 일가가 공석중인 문경공 휴암종중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산공종중의 추천과 휴암종중 임원회의의 추인을 거쳐 휴암종중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임기는 종중규약에 따라 전임 부회장의 잔여임기로 합니다. 2009년 10월 15일
인사동정
동아국악 콩쿠르 정가 일반부 은상 백수영 (국민전통 예고3년) 스포츠조선 멜티컨텐츠 실장 겸 편집 파트장 백문기 동아일보 광고국 광고영업1팀 산업파트장 차장 백남진 건국대병원 병원장 백남선 목사겸 할레루야 그린골프단장 백성기 제1회 제주 세계자연유산 국제사진 공모전 입선 백승훈 신한생명 분당지점장 백종수 1600년대 유명한 화가 향당 백윤문 조달청 기획재정 담당관 백명기 한국광해관리공단 경인지사장 백승권 도산아카데미원장(고려대교수)우주개발의 현황과 전망 강연 7월14일 백두권 국무총리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직무대리부 이사관 백종한 세계일보 논설위원실장 백영철 명지대 총무인사팀장 백승귀 방위산업청 계약관리본부 절충계약 절충팀장 백광석 제2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 수상작은 시집 거대한 일상 백무상 피아니스트 프랑스 디나르페스티벌 20주년 15년간 음악감독 맏으며 개성넘치는 축제로 개막연주 백건우 법무부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차장 백기봉 통계청 기획 재정 담당관 백만기 법무부 서울서부지검 형사3부 차장 백종수 법무부 서울동부 지검 형사부부장 백재명 언론중재위원 창원대 겸인 교수 백경석(전 창원지검 교수) 한국석유공사 비축사업본부장 백문현 건국대학병원 유방암 센터소장 백남선 임화 문학상 수상, 신인 백무산 한국전기공사협회 서울중부회 사무국장 백기일 경암 학술상 예술부문수상 백건우 통영시 민원지적과 백성회 재경 경상남도 향우회 바둑대회에서 프로9단 특별지도 백성호 연세대 치과 대학 병원장 백형선 단국대 음악 대학교수 백영은 미래에셋증권 평촌지점장 백영기 여성부장관 백화영 관세청 정보기획과장 백현주 한국 건설 기술 연구원 첨단 교통 영구실장 백남철 한국전기공사 협회 총무과 팀장 백동구 금호생명 새한발 팀장 백승국 비추미 여성대상 삼성생명 공익 재단 이제정한 제9회 달리상에 국립극단 원로배우 3,000만원 수상 백성회(84) 제5회 한국최고브랜드 대상 한복디자인 부문 백설헌한복대표 백설헌 현대자동차 중국사업본부 총무과 팀장 백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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