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개국과 그 파탄의 역사 요약 1. 서기 1355년 돌연히 나타난 이자춘과 그 아들 이성개 이성개의 아비 이자춘대에 이씨집안은 고려에 입조한다. 그리고 외국인 이성개는 한국인으로 신분을 속이고 고려조에 입조하여 자기세력을 키워나갔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전도한이 '하나회'라는 폐거리집단을 만들어 조폭두목처럼 행세하며 군내에 자기세력을 심어놓고 세력을 확장하듯이 말이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던 고려조에서는 이 자를 중용하여 키웠다. 고려말에는 왜구들이 극성을 부리며 내지까지 약탈하였다고 한다. 이 왜구퇴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화약무기다. 진포해전은 세계역사상 최초의 함포해전이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최첨단 가공할 무기인 화약무기는 왜구를 박멸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화통도감이라는 국가기관까지 있었다는 것은 화약무기제조 량이 얼마나 방대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성개는 고려조의 이 화약무기의 은혜를 톡톡히 본 자이다. 이성개를 마치 무武가 뛰어난 장수로 찬양하고 '용비어천가'만 보고 그대로 믿는 이조사관 중독자들이 대세인 오늘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고려제국의 화약무기로 거의 괴멸되다 시피하던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길에 있었는데 이성개가 고려의 정예군대를 이끌고 그것을 뒤쫒아가 다 죽어가는 자들을 격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손도 대지 않고 코푼 격이었다. 그런데 이성개의 공로라고 역사는 기록하여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http://cafe.daum.net/mookto
2. 이성개군벌의 위화도 반란 이렇게 권모술수에 능한 이성개와 이 자를 따르는 세력들은 꾸준히 군내에서 자기세력을 확장하고 정식명령계통보다는 오야붕'이성개'를 중심으로 사조직의 명령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던중, 지나족 명나라가 아직 제대로 체계를 갖추지 못한 틈을 이용하여 쇠퇴하는 원나라를 대신하여 대륙 고토수복의안이 고려조정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우칸Khan(소위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하고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이성개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고토수복 명령을 내린다. http://cafe.daum.net/mookto 이성개는 명나라 정벌 전쟁에 참여하면서 이해타산을 점친다. 이 정벌에서 자기에게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고 팽당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비정상적으로 군대에 파벌을 결성하고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이성개를 요주의 인물로 지켜보던 고려조정에서는 명나라 정벌도 하고 이성개도 제거하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고려중기 무신들의 반란을 경험했던 고려조정이었기에 이번에는 결코 당할 수 없었다. 전도한의 탐욕스런 반란음모를 감지하고 강원도 삼척 변방의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도한을 좌천시키려는 최규하정권이 그러했듯이 고려조정도 이렇게 해서 이성개를 견제 퇴출 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http://cafe.daum.net/mookto 이것을 눈치챈 전도한이 12.12.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듯이, 이성개도 군내 사조직을 이용하여 정식명령체계를 붕괴시키고 이미 치밀하게 구축되어있는 비선조직을 이용하여 적당한 시기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하였다. 이성개와 그 이씨왕조정권이 얼마나 술수에 능하고 교활한 종자들이었는지 소위 위화도반란의 명분, '4불가론'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첫째가 以小逆大不可이소역대불가이다. 대륙고토수복, 명나라정벌 고려군은 최정예군대만도 3만명이 넘었고, 말이2만필이 넘었다. 말이 2만필이 넘었다는 것은 고려의 기마군단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신의주와 원산만을 잇는 이남이 고려의 강역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조사관으로는 도저히 해석이 안되는 대목이다. 어떻게 그 작은 영토를 가지고 그것도 산악이 7할인 나라에서 2만이상이 넘는 순수 기마군단을 양성할 수 있었을까, 만주나 대륙일부가 아니면 해석이 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이다. 저 고구려의 찰갑개마기마군단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병이 2만이 넘었는데 그럼 보병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 고려의 화살은 세계최강을 자랑하였는데 화살의 최소 인마살상 사정거리가 3백미터였다. 고려제국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http://cafe.daum.net/mookto http://cafe.daum.net/Guricity/L5KM/256 위 자료는 고구려의 찰갑기마군단의 모습과 다양한 화살촉이다. 고구려는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이전에 이러한 무기로 무장을 하였는데 1천년 후에 고려에서는 위 자료보다 훨씬 더 발전개량된 무기체계로 무장하였을 것이 분명하고 이러한 무기로 무장한 고려의 최정예군단이 명나라정벌과 대륙고토수복에 나선것이다. http://cafe.daum.net/mirmuye/HXYT/114 이러한 고려의 최정예군단은 위화진(위화도)에서 진군을 멈춘다. 사전 작전계획에 따라 고려의 척후부대와 원제국의 군대는 요동에서 고려군과 원몽골군이 연합하여 지나족 명나라군대를 괴멸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 주력군이 중간에서 멈추고 도통 움직이지 않는다는 정보를 받은 요동의 고려 몽골군대는 왜 진군을 하지 않느냐며 계속 전령을 띄웠다. 당시 요동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화도 반란이 있기 전에 니성에서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이성개와 좌도 도통사 조민수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에 접한 요동 주둔군은 먼저 이미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섰으니 만일 원정군이 도착하여 도강을 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환성 원수 홍인규, 강계 원수 이의 등이 먼저 요동에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요동민들은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성개놈의 사조직에 장악된 고려주력군은 이성개의 선동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기수를 고려황성으로 돌리기 시작하였다. 명나라정벌군 총사령관 최영과 우칸은 고토수복을 독려하기 위하여 평양까지 가 있었는데 이성개의 반란소식을 접하고 불야 불야 개성으로 돌아간다. 최영장군은 정식명령체계를 이용하여 반란군 수괴 이성개를 척살하라고 하였지만 이미 명령이 먹히지 않은 상태였다. 믿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까지 이성개에게 포섭되어 합세하였다는 소식은 최영으로 하여금 개성황성방어로 전술을 변경케 만들었다. 고려중앙군을 포함 고려의 정예부대를 모두 명나라원정군에 편성시켰기에 황성에는 최소한의 황성 수비군만이 남아 있었고 이를 이끌고 황성방어에 들어갔다. 최영장군의 지휘하에 황성방어는 계속 성공하였다. 그러나 내부에 다시 이성개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고 이들의 반역으로 최영과 우칸은 이성개에게 잡히고만다. 이후 우칸은 신돈의 자식이라고 누명을 씌워 귀양보냈다가 살해하고 최영장군은 바로 죽이기에는 고려민중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러 자칫하면 역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있어 일단 귀양을 보내고 고려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 있지도 않은 죄목을 만들어 결국 처형한다. 최영장군은 정말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은 영웅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고려사를 쓰면서 간신열전에서 조차 최영장군은 제외되었고 나중에 복권시킨다. 함께 반란을 주도했던 동지,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간신열전에서 편재되어 악인으로 기록되었다. http://cafe.daum.net/mookto 이조후기에 그려진 최영장군영정-무속에서는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며 해마다 위령제를 지낸다. 최영장군위령제 모습-http://cafe.daum.net/jungck22/10ou/4799 - 위화도반란 사전계획의 증거: '위화도'가 현재의 신의주와 만주 단동사이의 압록강에 위치한 조그만한 섬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현재의 평양에서 명나라 정벌군이 위화도까지 진군하는 데는 19일이 걸렸다. 그리고 위화도에서 정벌군을 14일간 머물게 하고 다시 평양으로 군대를 돌려 도착한 시일은 겨우 9일이었다. 이성개의 주장대로 장마철에 비에 다 젖어 피로해 질대로 피로해진 고려군의 회군속도가 정벌하러 같은 거리를 갈때의 시일보다 두배이상 빨랐다. 이성개가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운 4불가론 중에 두번째와 세번째가 모두 장마철과 관련된 것이다. 장마철에는 군대를 일으킬 수 없으며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군사들에게 역병이 돌것이라고 하였는데 장마철을 일부러 기다려 맞이하기 라도 하듯이 위화도까지 가는 시일이 19일이나 걸렸다. 평양과 위화도까지의 거리는 체 2백키로미터도 안되는데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9일 이나 걸렸다는 것은 현재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더구나 뚱구적 거리며 위화도까지 간 기간 19일과 위화도에서 자리깔고 뭉기적 거리며 머문기간 14일을 합치면 33일며 이는 1달 이상을 지연시킨것이다. 이는 명백히 장마철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증거이고 이를 핑계로 회군반란의 구실을 사전에 계획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 이른바 4불가론의 허구성 이성개가 위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명나라 정벌 고려군을 고려황궁으로 되돌리며 명나라 정벌이 불가하다는 4가지 이유를 들었다고 한다. 그 사유와 부당성을 지적해 본다. 1. 以小逆大 一不可(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용비어천가를 토대로 이성개의 활약상을 보면 신출귀몰하는 하늘이 내린 역전의 백전불패의 장군이다. 특히 그 아비는 원나라에서 천호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그 밑에서 만주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소위 왜구 토벌과 홍건적 토벌전 그리고 원나라와의 합동군사작전에 참여한 무수한 전투경험을 갖춘 맹장이었다. 그리고 그 휘하에는 현재 2만이 넘는 기마군단과 최정예 고려군 약 10만명이 주어져 있다. 이제 갖 일어나서 국가체제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던 신흥명나라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괴멸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이소역대불가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인터넷상의 모 누리꾼의 이 항목 비판 기: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 병신아 넌(이성개) 로마역사도 모르냐 로마도 초기엔 작았는데 자기보다 좀 더 작건 크건 부족 또는 국가를 정벌케 해서 강성해진거다.
2. 夏月發兵 二不可(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 왜구토벌을 할때는 수년이 걸렸으며 당연히 여름철에도 수없이 출병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명나라 정벌할때만 여름에 출병하면 안되는가, 더우기 출병이 오월에 있었다. 그런데 이성개는 일부러 시간을 지연시키며 1달 이상 뭉기적대며 장마철 여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더구나 고려는 계절에 상관없이 상시 상비군을 운영하고 있었고 당연히 여름 장마철에도 운용될 수 있는 전투기술과 전략과 전술교범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도 설들력이 없다. 인터넷상의 모 누리꾼의 이 항목 비판 기: "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 야, 이 십탱아, 그럼 요동성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진을 쳐놓고 기다렸다가 장마철이 끝나면 쳐들어가면 되잖아.
3.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 이 비판은 아래 주소 글로 대신한다.
" 이성계가 내세운 왜구 침입에 대한 우려는 당시 이미 고려 수군이 창설된 뒤이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지방군 전체가 이 원정군에 동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왜구에 대처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오랜 전쟁 경험을 갖고 있는 최영 등이 이러한 상황을 소홀히 여겼을 리는 만무하다. 만일 요동 정벌을 빠른 시일 안에 마친다면 다시 원정군을 개편하여 왜구 토벌에 나서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이 점은 당시 다른 부대의 진격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http://www.cyberoro.com/board/info_view.htm?bd_num=11831&div_no=12 인터넷 상의 모 누리꾼의 이 항목 비판기:"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 그럼 너(이성개)라도 왜구에게 외교정책으로 달래거나 뇌물을 먹이거나, 남부 지방에 소수의 정예 예비병을 모아놓으면 될거아니냐. 역시 스타크래프트 안 해본놈이니 띨띨하군.
위화도 회군이 있기 전에 니성에서 중앙정부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이성계와 좌도 도통사 조민수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에 접한 요동 주둔군은 이미 명나라 군대 정벌에 나섰으니 만일 원정군이 도착하여 도강을 한다면 분명히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환성 원수 홍인규, 강계 원수 이의 등이 먼저 요동에 진격하여 일전을 벌이고 있었고 요동민들은 고려군 환영 준비까지 마쳤다고 하였다. 이렇게 봤을 때 요동 정벌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막강한 홍건적 등을 물리친 이성계가 만일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쳤다면 그의 전적으로 보아 명나라는 퇴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봤을 때 세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변명에 지나지 않다."
4. 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이 비판은 아래 주소 글로 대신한다.
"네번쩨 불가론인 습기에 활을 사용할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많다는 주장 역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용병술을 지닌 이성계에게 이런 문제는 사실 큰 장애 요소가 아니었다. 오랜 전투 경험을 가진 그로서 우기가 아니라 혹독한 추위가 내습하는 한겨울에도 그는 군사를 지휘한 사람이다. 물론 원정 도중에 도망치는 군사가 생기고 실제로 병에 걸리기도 하였지만 당시로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었다.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탈영을 방지하고 위생에 주의를 주어 환자 발생률을 줄여 나가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다면 원정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볼 때, 이 네번째 불가론 역시 회군의 구실인 셈이다. 더욱이 이성계는 이런 내용을 상소함으로써 자기 군사들로부터 더욱 굳은 신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로 나가기 꺼려하는 것이 모든 군인들의 생리라고 봤을 때 그는 이것을 일종의 회군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한 세력 규합으로 이용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http://www.cyberoro.com/board/info_view.htm?bd_num=11831&div_no=12
3. 이성개와 그 일당의 천리를 거스르는 이조개국
결국 이성개는 지나족 공자교 사대주의에 물든 이른바,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 멀쩡한 황제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는 '소중화' 이씨조선을 세운다. 이씨조선은 명나라로 부터 국호 '조선'을 하사받고 단군조선이 아닌, 중국 기자를 계승한다는 기자조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을 기조로 유교를 국교로 하는 새끼중국인 정권을 탄생시킨다.
명분과 실리없는 개국은 이조오백년의 역사를 비정상적인 변태, 학정의 처절한 비극의 역사로 점철시킨다. 먼저 이조개국의 중심인, 왕들의 왕권 계승과정을 보면 이조개국이 얼마나 무모하고 역천하는 만행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권모술수에 능할 뿐 한나라의 왕이 될 깜도 안되는 이성개는 정치권력에 중독되어 결국 고려제국을 생으로 무너뜨리고 자신이 왕이라고 추종세력에게 대우를 받았지만, 황제국고려를 하루아침에 제후국 거수국으로 까지 낮추면서 명나라에 살살 기었지만, 명나라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끝내 '고려권지국사'라는 공식명칭만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http://cafe.daum.net/mookto
4. 천리를 거스른 이조개국의 댓가
이후 그 자식들은 아비의피를 이어받어 역시 왕권쟁탈전에 돌입하였고 형제간의 골륙상쟁을 벌이고 탐욕의 화신 이방원이 정권을 잡고 이조3대왕이 된다. 역시 명나라로부터 왕을 인정받아야 하였으므로 민중의 피와 강토 그리고 이권을 명에게 넘겨주고 왕을 인정받는다.
정권이 안정되었나 싶었는데 이방원의 손자대에 가서 수양대군이라는 자는 자신의 형의 아들인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귀양보냈다가 죽여버린다. 그리고 자신이 왕노릇을 한다. 성종 중종 연산군대를 거치면서 제정신이 아닌 지나족 공자교를 신봉하던 집권세력은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울안에 안주하며 할 것이 없자, 상대방 정적을 제거놀음에 미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같은 공자교 세력안에서 사림파니 훈구파니 나누어 서로 정적을 죽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았다. 무오사화,갑자사화, 을사사화, 기묘사화 등으로 저주받은 이조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이후 정적죽이기는 더욱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어 동인서인, 남인북인, 노론소론, 시파벽파 등으로 계속 핵분열을 거듭하며 외적에게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싸워댔다. 마치 중세기독교 암흑시대, 할짓이 없어 멀정한 처녀를 마녀로 몰아 죽이고, 바늘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냐를 두고 서로 싸워대는 모양과 같았다.
이조왕들은 추종세력에 힘입어 왕조를 열었기에 늘 신하들에게 끌려 다녔다. 그래서 왕이 되었다가 중도에 폐위되어 '~군' 들이 나왔다. 연산군, 광해군등이다. 이조왕들 중에서 그래도 실리를 추구하고 민중들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해보려고 하면 변태유교 성리학에 미쳐있는 사색당파 집권세력에게 팽당하고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다.
연산군은 그래도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을 가장 잘 이해하였고 이 전통문화유산을 되살리려다, 이를 시기하던 새끼중국인 이조선비들에게 폐위당하였다. http://cafe.daum.net/mookto
이조최악의 왕은 인조(실제 왕명은 '장목왕'이다.)다. 장목왕(청나라가 하사한 이름-이조는 이것을 철저히숨겼다)이 왕이 되는 계기를 보면 이조가 왜 그때까지 망하지 않았는지 기적에 가깝다. 실사구시 실리정책으로 그래도 민중 편에서 정치를 펴려던 '광해군'에게 썩은 변태유교 교리를 들이대어 폐위시킨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당시 이조궁궐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인조반정 반란군을 수를 보면 1천여명 남짓이었고, 그것도 오합지졸의 군대였다. 이런 반란군 하나 진압할 군대가 궁궐내 또는 주변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후 장목왕 이종(소위 인조대왕)은 망해가는 명나라에 충성맹세를 하며 명나라 정벌을 완료해가는 형제국 청나라를 명나라와 연합하여 배후를 치려고 한다. 청나라조정은 사신을 보내 끝까지 설득하고 달래보려고 했으나, 새끼중국인 정권은 죽어도 명나라를 위해서 죽자고 하며 끝까지 버틴다. 결국 청태종의 팔기군에게 남한산성에서 포위되고, 한계상황에 이르자 임금도 상관도 몰라보는 령이 서지 않은 군기빠진군대로 버티다가 결국 자포자기하여 청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청나라 홍타이지 칸은 그래도 조선이 형제국인것을 역사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직접 참전하여 장목왕 이종을 대면하고 만주산 고급 짐승가죽과 기타 풍성한 선물을 주며, 명나라 정벌에 함께하자고 다독인다. 이것이 소위 '삼전도의 치욕'의 진상이다. 이조왕들과 새끼중국인 지배세력은 사실이 이러함에도 장목왕이 아주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다고 악선전을 하여 애꿎은 민중들에게 대청 원한과 적개심을 선동하며 여론을 그렇게 이끌어갔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의 후예요, 발해의 후예인 청나라 제국 형제를 오랑캐로 여기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오늘날 국사책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http://cafe.daum.net/mookto
이 후 장목왕은 청나라로 가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자신의 장남 소현세자를 청나라 오랑캐 문물에 문들어왔다고 하여 독을 먹여 죽여버린다. 앞서 동생이 형을 죽이고 왕이되고, 삼촌이 조카를 죽여 왕자리를 뺏는 이조왕들의 잔인함을 보아왔지만, 아비가 아들을 단순히 치욕감때문에 죽이는 예는 없었다. 그런데 이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장목왕은 저지르고 말았다.
장목왕이 이렇게 자식살해의 물길을 터 놓아서 그러했는지 몇대를 흘러 영조라는 자도 역시 자기자식을 쌀통에 넣어 죽여버린다. 그 이유가 어떻했든지 간에 자기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이들이 하늘처럼 떠 받들어 국교로 삼은 유교의 성리학적 교리에 비추어 보다도 이는 사람으로 할 짓이 아니다. 한마디로 짐승보다 못한 놈들이었다.
5. 세계역사상 가장 드럽게 망한 이조정권
그리고 이조는 종국에 가서는 갑오동학농민혁명 으로 대변되는 민중들의 자주국가 건설 봉기를 깃점으로 완전히 폐망의 길로 접어든다. 이조개국의 근본적인 이유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이조왕족과 이를 떠 받들며 공생을 유지하던 지배세력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민중들의 끝없는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조왕조의 내부 부패와 모순으로 스스로 지킬 힘 마져 붕괴되자, 이제는 외국군대를 끌어 들여 잔인하게 학살한다. 이것은 이씨조선정권이 민중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는 대표사례다. 오직 왕족과 이에 빌붙은 귀족들의 안위만이 지상과제였던 것이다. 이조정권은 정권을 위협하는 동학농민혁명군을 척살하기 위하여 일본군을 끌어들였고 일본군은 기회는 이때라고 하며 명치유신이후 신식무기를 현장 실습할 절호의 기회를 거져 얻은 샘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대 1개소대가 수만명에 달하는 농민군을 학살하였는데 나중에는 실탄이 없어 못 죽였다고 한다. 우금치전투에서는 농민군의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의 나라 군대(일본군과 청나라군대)가 우리강토를 전쟁터로 만들고 전쟁놀음을 하는데도 두손 놓고 쳐다보는 등신같은 모습을 보였다. http://cafe.daum.net/mookto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동학농민전쟁을 주도한 전봉준
전봉준의 사형을 집행한 집행총순의 말에 따르면
전봉준은 그가 듣던 것보다 탁월한 인물로 보였으며
외모에서도 그런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또 그는 전봉준이 엄격하고 곧은 기상에 굳센 의지를 가진
대위인,대영걸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가족에게 마지막 남길 말이 없느냐는 법관의 질문에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이려면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 이전의 전봉준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병고 끝에 먼저 떠난 아내의 무덤을 자주찾는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래의 시는 전봉준이 13세때 지은 시 백구(白鷗)라고 한다.
자재사향득의유(自在沙鄕得意遊)
설상유각독청추(雪翔?脚獨淸秋)
소소한우래시몽(蕭蕭寒雨來時夢)
왕왕어인거후구(往往漁人去後邱)
허다수석비생면(許多水石非生面)
열기풍상기백두(閱幾風霜기白頭)
음탁수번무과분(飮啄雖煩無過分)
강호어족막심수(江湖漁族莫深愁)
스스로 모래밭에 마음껏 노닐적에
흰 날개 가는 다리로 맑은 가을 날 홀로 섰네.
부슬부슬 찬비는 꿈결같이 오는데
때때로 고기잡이 돌아가면 언덕에 오르네
수많은 수석은 낯설지 아니하고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었는지 머리 희었도다.
마시고 쪼는 것이 비록 번거러우나 분수를 아노니
강호의 고기떼들아 너무 근심치 말아라.
아래 시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절명시라고 한다.
時來天地皆同力 시래천지개동력
運去英雄不自謀 운거영웅불자모
愛民正義我無失 애민정의아무실
愛國丹心誰有知 애국단심수유지
때를 만나니 천하가 뜻을 함께 하더니
시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의 일이 어찌 허물이랴.
나라 위한 참된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
위 전봉준 자료 출처: http://forseason.tistory.com/339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대1904년 사진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을 학살한 군대의 모습
마지막에 이조의 멸망하는 꼴은 아마 세계왕조멸망사상 가장 드럽고 추잡한 역사로 남을 것이다. 시아비(흥선대원군)과 며느리(명성황후)가 꼴 성 싸납게 싸우다가 개혁을 통한 강국건설의 기회를 모두 말아먹었다. 결국 이조왕족이 주축이 되어 일본에 돈받고 나라를 팔아 먹는 것으로 이조5백년을 마감한다.
이러한 이조오백년의 역사는 민중들을 철저히 우민화 시키고 착취하는 시대로 이어졌고, 개국의 정당성과 명분, 실리가 없는 천리를 거스르는 이조개국이었기에 이러한 비극의 역사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조의 망령은 아직도 우리사회 곳곳에서 진뜩이 처럼 달라 붙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이조왕족들과 지배세력은 일제시대에는 친일파로 배를 갈아탓고 광복후에는 남한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영역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자기들에게 반대되면 '빨갱이,좌파'로 몰아부쳐 제거하고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리고 이조시대 하던 버릇을 그대로 재현하며 민중 착취구조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에는 미국과 일본에 붙어 있으며 사상적으로는 기독교 특히 목사개신교세력으로 둔갑해 있다. http://cafe.daum.net/mookto
6. 천리를 거스른 이조개국의 교훈
오직 사사로운 권력욕에 눈이 멀어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생각하여 잡은 권력과 그 왕조는 철저히 하늘의 심판을 받는 역사로 점철되었다.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일들이 권력의정점, 왕들과 왕족 그리고 귀족지배세력층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자기것을 버리고 남의것을 가져다가 억지로 끼워맞추려 했던 댓가이다. 유교 그것도 성리학이라는 사상을 가져다가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게 고루한 공자와 맹자왈 타령만 하다가 가장 드럽게 허물어 졌다. 자기 조상까지 팔아먹으며 연명하고자 했던 이조5백년, 스스로 주인으로서 제국을 이끌었던 고려의 정신을 버리고 스스로 노예를 자청하며 새끼중국인이 되어 비루한 노예의 역사를 이어갔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스스로 서기보다는 남에게 의지하고 남을 떠받들며 그 부스러기로 살기를 원하고 빌붙어 살 때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역사와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처절하게 보여주는 역사가 이조5백년이다. 지금도 이러한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이 폐습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의 혼을 좀 먹고 있다. 이 사회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기독교세력은 자기조상을 우상, 마귀라고 하며 목을 치고 사막유대잡신을 자기 조상으로 떠 받들어 모시고 있다.
첫댓글 현재 역사와 정반대의 시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