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
학동, 들여다보기
예나 지금이나 학동은 자동차를 타고 너릿재를 통해 화순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반대로 전남 동부지역에서 국도를 통해 광주에 들어설 때면 대부분 이곳을 거쳐 온다. 이때 사람들은 대부분 남문로를 이용한다. 그리고 너릿재를 넘으면 국도 22호선과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길에 앞서 신작로가 있었고 그 보다 훨씬 전에도 길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대건 이곳에서 길은 모두 광주천을 따라 흘렀다.
오랜 길의 흔적들은 어렴풋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시내권은 벗어나면 길가 어딘가에 성황단도 있었다. 하지만 하도 오래 전이라 이름만이 전할 뿐, 지금 그 터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그래도 예로부터 오가는 길손이 많다 보니 길가엔 주막들이 즐비했다.
원머리마을은 아주 오래전 분수원(分水院)이란 원집(관영 여인숙)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좀 더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주남마을 못 미쳐 원지골 혹은 원두라 부르는 골짝이 있다. 옛날‘삿바우점’이란 주막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광주 경계를 벗어나기 직전, 선교동의 교항마을에 이르면‘다리목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나그네들은 숨을 고른 뒤에 예전에는 험한 고갯길로 악명이 높았던 판치(板峙), 곧 너릿재를 넘었다.
이제 학동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조선시대에 이곳은 부동방면(不動坊面)에 속했다. 부동방면은 꽤 넓은 동네였다. 그 가운데 일부만을 따로 떼어 학동이라 부른 건 일제 때 학강정(鶴岡町)이라 부르면서부터다. 그 이름이 일제 때 시작됐다고 해서 이름의 배경도 그런 것은 아니다. 학강정과 학동은 모두 학의 생김새를 닮은 이곳의 산등성이 때문이다. 지금은 건물에 가려 그 자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형도를 펴놓고 봐도, 그 모습을 연상하기 힘들다. 오직 사람의 상상력만이 그 모습을 그려낼 따름이다.
시내 쪽, 특히 사직공원이나 광주공원 쪽에서 봤을 때 학동의 본 모습이 잘 드러난다. 조선대 본관 뒤편 깃대봉은 광주천 쪽으로 이어지다가 남산에서 갑자기 맥이 뚝 끊긴다. 그래서 그 형상이 범상치 않다. 깃대봉은 학의 몸통과 꼬리를 구성하고, 남산은 학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학은 두 날개 죽지를 활짝 편 상태다. 바른편 날개는 조선대병원에서 전남대병원으로 내려오는 능선이고 왼편 날개 죽지는 그 너머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학동은 꽤 넓은 동네다. 1.26㎢, 평수로 따지면 38만평에 육박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소개할 원지교에서 공원다리에 이르는 총 8개의 동네(법정동 기준) 가운데 가장 넓다. 워낙 넓고 큰 동네다보니 여기서는 편의상 학동을 세 뜸으로 나눠 소개해 본다. 물론 필자들이 임의로 나눈 것이지 어떤 특별한 문화적 기준을 놓고 그런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먼저 원지교 일대. 원지교는 남문로가 시내 쪽에서 화순 방면으로 가다가 증심사천을 건넌 곳에 있다. 이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지금의 학동 삼익세라믹맨션과 평화맨션 자리는 일제 때 가네보 광주제사공장 터였던 곳이다.
가네보는 일본 동경에 본사를 둔 가네부치(鐘淵)방직회사를 말한다. 언제부턴가 이를 줄여 가네보 혹은‘종방’이라 부르곤 했다. 이 회사는 1925년 서울 동대문 일대에 제사공장을 세우면서 한반도에 첫발을 내딛었는데 광주제사공장은 1930년 8월에 문을 열었다.
광주제사공장은 주로 견사를 생산했다. 이 때문에 광주 가네보는 광주 전남지역에 엄청난 뽕밭을 보유했다. 뽕밭이 있던 마을 가운데는 아예 최근까지도‘종방’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을 정도다. 가네보는 이 제사공장 외에도 1935년 임동의 광주천변 일대에 대규모 방직공장을 세웠다. 임동공장은 해방 후에 적산으로 간주됐다가 민간에 불하되어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의 모태가 됐다.
한편, 가네보 제사공장 터는 해방 후에 김신근(金信謹) 목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인 승의학사(崇義學舍)로 운영됐다. 원래 숭의학사는 1950년대 중반 충장로1가의 옛 광주경찰서 자리이며 지금은 충장서림이 있는 곳에 있었다. 중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숭의학사는 이 터를 기반으로 학교로 성장해 숭의고등학교가 됐다. 1980년대 중반 학교 터를 건설회사에 매각했고, 현재 숭의고는 방림동 치마봉 중턱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운영 중이다.
옛 가네보 광주공장 뒤쪽으로 무송원(撫松園) 터가 있다. 학동삼거리(지하철 1호선 증심사역 위)에서 증심사로 가는 길(공식명칭은 의재로)로 접어들자마자 보이는 목화예식장 자리다. 무송원은 1930년대부터 광주시내의 이름난 부호, 무송 현준호(玄俊鎬)가 세운 저택이다. 앞서 현준호는 자신의 부친 현기봉의 묘를 향리인 영암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적이 있었다. 무송원 안에 부친의 제각을 뒀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저택은 선친을 그리워하는 뜻 외에도 현씨 종친들의 회합장소, 현준호 자신이 말년에 보낼 집, 혹은 요즘 유행하는 게스트 하우스 등 다양한 목적으로 지었다. 집주인인 현준호는 한국전쟁 때 숨을 거뒀고 집은 오랫동안 그의 아들에 의해 관리됐다. 그러나 1990년대 건설회사에 저택이 팔려 집 자체가 헐릴 위기에 처했다. 그 때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광주은행의 힘을 얻어 화순 동면으로 옮겼다.
다음은 남문로 주변. 삼익세라믹맨션에서 큰 길(남문로) 건너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학동팔거리가 있다. 이 마을은 일제 때의 아픔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처연하게 겪었던 곳이다.
1930년대 말엽에 이곳 학동 880번지에는‘갱생부락’이 들어섰다. 가로 세로 각각 180m씩, 얼추 1만여 평에 달하는 면적을 네 구획으로 나누고 이것을 다시 여덟 구획으로 쪼갠 형태였다. 그리고 그 구획선을 따라 골목길을 냈으니 전체적으로 여덟 개의 골목에 다시 작은 골목 여덟 개가 늘어나는 형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곳을‘팔거리’라 불렀다.
팔거리의 집들은 그간 여러 차례 증축이나 개축은 이루어졌으나 마을의 원형, 특히 골목길의 기본형태는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이곳은 2008년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에 착수해 앞으로 8백여 세대가 살 아파트단지로 바뀌게 될 운명이다. 물론 팔거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던 골목길도 함께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학동팔거리 옆, 광주천과 잇닿아 있는 곳에는‘전재민촌’혹은‘백화마을’로 알려진 마을이 있다. 해방 직후에 세워진 마을로 마을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해방을 맞아 돌아갈 고향마저 잃어버린 사람들이 일군 이 마을은 본디 방과 부엌이 한 칸뿐인 초라한 집들로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했을 만큼 험하게 살아왔다. 마을 안길은 옆집에서 속삭이는 말소리조차 들릴 만큼 비좁았다. 역설적으로 이런 동네의 특성 탓에 광주시내 어느 곳보다 일찍 아파트가 들어섰다. 1970년 마을 안 898번지 일대에는 13평형 시영아파트가 지어졌다. 광주에서는 이 무렵만 해도 아파트라는 주거형태가 무척 낯설던 시절이었다.
학동팔거리 건너편, 남문로 길가에는 천혜경로원(654-1번지)이 있다. 설립자인 강순명 목사는 최흥종 목사의 맏사위가 되는 분이기도 하다. 맨발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이현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강순명은 1952년에 천혜경로원의 문을 열었다. 현재는 그의 아들 강은수 장로가 운영 중이다.
해방과 전쟁, 그 이후에도 계속된 가난의 흔적일까, 천혜경로원 말고도 남문로 일대에는 복지시설들의 잔영이 많다. 34번지엔 애육원, 남광교회 근처 901번지엔 농아원(전남농아학교를 거쳐 현재 광주인화학교가 된 시설), 그리고 농아원 옆에는 시각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영광원이 있었다. 영광원은 1950년대까지 광주공원의 옛 신사 터에 있다가 중간에 이곳으로 왔다. 또 그랑프리호텔 자리는 60,70년대 광주시에서 운영하던 가내수공업센터가 있었던 곳인데 이것을 두고 어떤 이는 이곳의 피폐한 삶의 흔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한편, 남문로에서 학동과 방림동을 잇는 학림다리로 가는 길가인 633번지 일대, 얼마 전까지도 청도마트가 있던 곳은 학동시장 혹은 학동제일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순환도로(대남로) 건너편, 남광주시장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져 있으나 이곳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50년대부터 시장터였다. 학동시장의 존재는 이 무렵에 학동이 꽤 큰 동네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지만 학동시장은 남광주시장과 달리 운영에 여러 어려움을 겪어 1970년대 중반 남광주시장이 부상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1994년에 공식적으로 시장이란 이름을 쓰지 않게 됐다.
학동시장 안쪽으로 남광교회를 포함해 637번지로 불리는 지역은 일제 때 목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곳에 초지 위로 소들이 풀을 뜯던 목장이 있었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이 목장은 일제 때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낸 양태승이 설립했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고, 그 시설은 일제 말엽 근처에 경찰기마대가 생기는 배경이 됐다. 목장 자체는 해방 후에 정국훈이 인수해 다시 광주목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정국훈이란 사람은 음악가 정율성의 조카이며 백운동 국제호텔을 세운 문향식 씨의 장인이다.
또 이 목장 터의 일부 혹은 경찰기마대 자리는 1960년대 김윤만이 인수해 제일고등공민학교와 제일상업전수학교를 세웠는데 재미있게도 이들 학교는‘말간학교’로 불렸다. 이곳에 있던 목장에 대한 기억이 강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정국훈의 광주목장이 훗날 호수카바레라는 이름으로 업종을 바꿨음에도 사람들이 그곳을 일러 한참을‘목장카바레’라고 불렀다.
다음은 남광주역 일대. 이곳은 지형상 학동의 지명 어원이 된 산등성이의 바른편 날개 죽지에 해당하는 능선이 내려오는 곳이다. 이 능선 자락에 들어선 조선대 장례예식장 터는 1920년대부터 수도 배수지였다. 훗날 시내 전역에 생기게 될 월산동, 각화동 등 다른 배수지와 구별하기 위해 소재지 이름을 따‘학동배수지’라고 불렀다. 학동배수지는 무등산 일대의 수원지에서 끌어온 물을 이곳에서 다시 중력의 힘을 사용해 저지대인 시내에 공급했다. 배수지 건설 뒤에 일본인들이 주변에 벚나무를 심었는데 한창 때는 장관을 이뤘다.
하지만 이 일대를 가장 대표하는 공간은 아무래도 남광주역이다. 물론 최근에 생긴 지하철 통과역인 남광주역이 아니라 지상철이 통과했을 때의 정거장을 말한다. 이 정거장은 1930년대에 처음 문을 열어 2000년대에 철길이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폐쇄됐다.
정거장 자체로도 숱한 애환을 담고 있지만 이 정거장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주변의 시장, 곧 남광주시장 때문이다. 그런데 흔히 짐작하는 것과 달리 정거장이 문을 연 직후엔 이곳에 시장이 없었다. 역부지는 대부분 총독부 철도국 소유였고, 주변엔 보선사무소와 역무원 관사 등 철도와 관련된 시설만 있을 뿐, 변변한 민가조차 없었다. 또 1950년대까지도 한국전쟁의 여파로 경전선의 열차운행 자체가 쉽지 않아 열차에 푸성귀나 어물을 싣고 이곳에 내려 장을 열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1960년대엔 작은 규모나마 서서히 장이 서기 시작했다. 시장이 커진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남문로의 확장 때문이다. 남문로는 1973년 확장되기 시작해 1976년에 완공됐다.
남광주역 건너편에는 전남대병원이 있다. 1915년께 시내에 있던 광주자혜의원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그 터는 병원과 인연을 맺어왔다. 자혜의원은 중간에 다시 도립광주의원, 줄여서 도립의원이라 부르다가 일제 패망 직전에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광주의학전문학교의 부속병원이 되면서 오늘날 전남대병원으로 이어지게 됐다.
이 병원이 순환도로(필문로)와 맞닿을 즈음엔 이른바‘남사정 언덕’혹은‘묵은 바탕’이라 했던 곳이 있었다. 대략 지금 전남대병원 응급센터가 들어선 일대다. 이곳은 광주 스포츠의 역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이곳에서 육상, 축구, 야구,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렸던 탓이다.
이 묵은 바탕에서 시내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병무청이 있다. 병무청은 오늘날의 국세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세무감독국이 일제 중엽부터 있던 곳이다. 중도에 세무감독국이 폐지되고 건물은 일제 말엽에 창설된 광주사단 사령부로 사용됐다. 군용시설로 사용된 것은 이 때부터다. 이후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제4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부대가 이곳을 거쳐갔다. 한국전쟁 동안, 묵은 바탕 자리에 중앙포로수용소가 운영됐을 때는 그 수용소의 본부 역할도 했다.
병무청과 바로 얼굴을 맞댄 곳에는 50년대 광주피혁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1950년대 말엽 이 공장을 운영하던 조영환이 그 자리에 천일극장(天一劇場)을 세웠다. 흔히 허름한 그 모습을 두고‘하꼬방 극장’이라 했지만 학동의 젊은이들에겐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극장은 1975년에 문을 닫았다.
학동배수지 터
- 조선대병원 장례예식장 자리
사람의 몸은 대부분 물로 구성되어 있고, 그래서 절대적으로 물을 필요로 한다. 나아가 도시는 개개인이 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을, 그것도 보다 풍부하고 안전한 물을 원한다. 물은 언제나 도시 건설의 토대였고, 문제였다.
물론 작은 성곽도시였던 시절에 물은 적은 양으로도 충분했다. 그 정도는 대부분 우물로도 충분히 공급했다. 2000년대 초엽, 지하철 공사 도중에 금남로 일대에서 옛 우물터 6곳이 발견됐다. 우물 바닥에 수천년 전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가라앉아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 있다. 많은 우물은 그 뒤까지 계속 사용됐던 것 같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성내에만 100여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했다.
인구가 늘면서, 다시 말해서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우물의 시대를 접었다. 이 과정에서 학동배수지는 초기 광주의 상수도 역사를 알려주는 곳이다.
학동배수지의 수원은 용연계곡이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가뭄때 마다 고을 원님이 행차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이곳은 광주천의 발원지이기도 했다(정확한 발원지는 무등산 장불재 아래의 샘골이라 부르는 곳이다). 그래서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일반적으로 용연(龍淵)은 물의 신, 용이 살던 곳을 뜻한다. 그래서 용연은 용추(龍湫)라는 보통명사로도 바꿔 쓰곤 했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에게 이곳이 지닌 의미가 컸던 탓에 하나의 보통명사는 언제부턴가 지명 자체가 되었다. 지금도 그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개울을‘용추천’이라 부른다.
조선시대만 해도 광주 같은 고을에서는 대부분 우물물을 길러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했다. 그런데 고을원님이 용연까지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던 것은 광주천의 수량이 우물물의 많고 적음을 관장한다는 것을 당시에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물물의 원천인 지하수는 늘 광주천물을 통해 충전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광주가 본격적인 도시화를 시작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한곳에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살다보니 우물로는 식수 등을 충당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상수원의 개발을 위해 일본인들은 1917년에 시작해 1920년에 수원지를 완공했다. 뒤이어 생겨난 수원지와 구분하기 위해 제1수원지라 불렀다. 준공 당시에 하루 8백 톤을 공급할 규모였다.
처음 급수를 하던 1920년 5월 30일엔 시내에는 문을 닫는 가게들이 많아 거의 철시하다시피 했다. 오후에는 일본군 수비대 병정들이 나와 스모를 한다고 야단이었고,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하는 마라톤 경기도 했다. 제1수원지는 광주가 1971년부터 화순의 동복호에서 물을 끌어와 마시기 시작하면서 굳이 이곳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자 1970년 개인에게 매각했다.
제1수원지
1920년에 완공된 제1수원지는 증심사 버스종점 근처에 아직도 남아있다. 광주시는 1970년 동복댐 건설을 앞두고 더 이상 수원지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 수원지를 민간에 매각했다.
제1수원지와 함께 준공된 학동 배수지는 아주 튼튼하게 지었던 모양이다. 이곳에 장례예식장을 짓는라 콘크리트 구조물을 철거할 때 무던히도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배수지 터는 1971년에 조선대학교에 매각됐다.
그 뒤로도 광주는 늘 물에 목말라 하는 도시가 됐다. 1930년대 초엽 광주에서 수돗물을 먹는 사람은 1천여 세대에 5천여명 뿐이었다. 하루 공급량은 1인당 150리터, 50잔 정도의 분량이었고, 오늘날 광주 사람들의 하루 소비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양이었다. 그마저도 수돗물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소수였고 가뭄 때마다 툭하면 수량 부족으로 시간제 급수를 했다. 이 때문에 일제 때 실상 많은 시민들은 수도보다 집안의 우물이나 마을 안 공동우물을 통해 생활용수를 얻었다.
그래서 수원지 건설은 계속됐다. 첫 번째 수원지에 이른 제2수원지는 1939년에 증심사계곡에 건설됐다. 제1수원지보다는 좀더 다부지게 만들었다. 제1수원지는 그 댐이 흙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제2수원지는 석축으로 댐을 쌓았다.
원래 이곳은 수량이 풍부해 여름철이면 시내 사람들이 계곡으로 올라와 물맞이를 했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원지 위쪽에 폭포처럼 벼랑에서 물이 쏟아지는 곳이 있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상수원 오염이 심해지자 일본인들은 남포를 터트려 이 폭포를 괴기스런 바위 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일제 때 건설된 수원지나 배수지의 한 특징은 주변에 일본 수종의 나무들을 심었다는 데 있다. 제1수원지 일대에는 삼나무 숲이 울창하다. 이는 일제가 수원보호와 경관유지를 위해 식재한 것인데 한국인들에게 소나무가 갖는 의미처럼 일본인들에게 삼나무는 각별한 상징성을 지닌 수종이었다. 학동배수지를 만들고 나서는 주변에 벚나무를 심었다. 춘태여상 벚나무 숲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벚나무가 일본문화에 가지는 의미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제2수원지 주변에 벚나무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해방 뒤에도 수원지는 계속 개발됐다. 제3수원지는 극락강변, 정확히 말하자면 동림동과 보건대학 사이를 잇는 산동교 아래에 있었다. 1957년에 준공됐다. 후에 본촌동의 연초제조창에 매각됐는데 연초제조창도 쓰지 않아 폐쇄됐다. 몇 해 전까지도 그 흔적인 콘크리트 더미들만이 옛 수원지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4수원지는 석곡저수지다. 북구 청옥동 잣고개 너머에 있는 인공호수다. 박선홍 씨의『무등산』에는 석곡저수지 건설의 숨겨진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저수지는 해방 전부터 계획됐으나 해방 후 건설 기술자가 없어 당시 광주시청 수도계장이던 기사 마쓰오(松尾貴)의 일본 귀환을 만류하고 2년에 걸쳐 측량과 기초설계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국혼란과 한국전쟁으로 공사는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1962년 8월에야 착공했고, 5년간의 공사 끝에 1967년에 완공됐다. 또 이 저수지 건설로 전재민 마을이었던 화암마을이 원래의 터를 잃고 옮겨가야만 했다고도 한다.
제5수원지는 동복호다. 두 차례에 걸친 공사를 통해 저수량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동복호는 1971년에 광주시에서 건설한 높이 19m, 길이 130m 짜리의 콘크리트 댐으로 시작됐다. 1982년에 원래 있던 댐 바로 아래에 다시 높이 45m, 길이 188m짜리 거대한 댐을 건설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댐은 현재 화순군 이서면 서리와 동복면 연월리 경계선에 있다. 댐 중간지점이 두 면과 두 마을의 경계지점이다.
동복호는 아직도 광주시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원지다. 알기 쉬운 셈법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광주 시민들이 마시는 물 열 잔 가운데 여섯 잔은 동복호에서 온 것이다. 1990년대 이후에는 순천의 주암호에서 온 물도 마신다.
흥미롭게도 이들 6곳의 수원 가운데 3곳이 무등산을 낀 산간지대에 있다. 그리고 초기 수원지들은 모두 광주천 상류지역에 있었다. 물은 공평한 것이지만 관리는 꼭 그렇지 않다. 일제 때 광주의 상수도는 시내에 국한해 공급됐고 수혜계층도 주로 시내에 거주하는 일본인이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수도꼭지를 돌리기보다는 집안 혹은 마을 공동우물에 두레박을 던져 넣거나 작두질을 해서 퍼 올린 물을 마셨고 밥을 짓고 푸성귀를 씻고 세수를 했다.
이런 우물물의 원천은 광주천이었다. 천변 지표 밑을 흐르는 복류수(伏流水)는 광주천의 물이 오랜 세월 지하로 스며들거나 주변의 높은 지대에서 땅 밑을 타고 이곳으로 흘러드는 지하수가 솟아 오른 것이었다.
오늘날 광주천 주변의 우물들은 대부분 사용되지 않고 있다. 광주천 개수로 인해 드넓은 강바닥과 범람원이 사라지면서 지하수의 충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지표수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은 바람에 땅 밑으로 스며들 물 자체를 차단한 탓이다. 이후 광주천변의 우물들은 수위가 낮아지거나 아예 고갈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시내에서 옛 우물터를 찾기는 어렵게 됐다. 아직 집 마당 한구석에 덮개를 씌운 우물을 둔 집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만큼 맑고 풍부한 물을 두레박 가득 길어 올리는 집은 거의 없다. 공동우물은 더 보기 힘든 정경이 됐다. 운 좋게도 향교 근처 서동의 서당골에 아직 옛 마을우물터가 남아 있다. 서동 232-2번지의 주택 옆이다. 현재 식수로 쓰지는 않지만 간단한 허드렛물로 쓸 만큼은 깨끗하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서당골 우물’이라 부른다고 한다.
서당골 우물
이 우물에 대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19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마도 그 이전부터 서당골, 곧 지금의 사동 일대 주민들의 생활용수원 구실을 했을 것이다.
상수도와 140만명이 살고 있는 광주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니 모든 도시와 문명에 물이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장대한 수도교(水道橋)가 없는 고대 로마제국을 생각할 수 없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가 도널드 워스터(Donald Worster)가『제국의 강』에서 말할 것처럼 미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서부 개척은 카우보이 식의 열정이 아니라 광대한 수리시설 덕분이었다고도 한다. 물이 없는 문명의 발전은 얘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근대도시의 여명기에 광주천 역시 광주 번영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이 목마름을 채워주는 이면에는 설움도 컸다. 오늘날 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물의 근원을 알고 물이 댐을 통해 수확되어 긴 여로를 거쳐 집안의 작은 꼭지로 쏟아지기까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정든 집을 잃었다는 사실에 귀 기울이는 경우는 드물다.
동복호라는 새로운 인공호수는 화순군 이서면 12개 법정리에 걸쳐 있다. 이 말은 원래 그곳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 물에 잠겼다는 얘기와 같다. 그 때문에 수몰의 아픔도 컸다.1971년 2월 동복호 수몰주민 40여명이 보상 문제로 광주시청에 몰려와 항의를 했다. 또한 동복호는 오랫동안 화순의 명승지로 손꼽아왔던 적벽도 물 속에 묻었다. 이런 설움과 아픔은 당해보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긴 세월 겉으론 태평해 보이는 수면은 사실 숱한 설움이 닿아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많은 설움을 여기서 다 헤아릴 수는 없을 터이므로 그것을 대신해 1985년 이정용(李政龍) 시인이‘사라지는 적벽을 두고’란 부제를 달아 지은“신적벽부(新赤壁賦)”란 시로 대신해 본다.
마지막 불러보는 그대 이름도
실려나간 그대 울음소리도 물에 잠기고
말없이 떠나보낸 얼굴 떠보이는
광주 하늘에 마른 목을 축이는 적벽의
꿈이 심연(深淵)으로 차오는 만원의 강위에 뜨고
......
목놓아 아픔으로 찍히는 충만
굽어도는 혈맥을 따라
무너져 내리듯 열린 문
나직한 이 세상으로 강물은
헤프게 흘러 흘러서 떠나간다.
- 적벽아...
학동 팔거리
- 학동 880번지 일대
학동 880번지 일대 1만 6천여평은 머지않아 재개발사업으로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뀔 예정이다. 이곳은 큰 길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이고, 광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동네가 아닌데다, 언뜻 보기에도 세월의 때가 켜켜이 쌓여 특별히 쾌적한 주거지역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다.
또 여느 동네처럼 주변의 산이나 강 이름을 따서 동네이름을 짓는 것과 달리‘학동 팔거리’라 한다. 학동이야 이곳의 법정동명, 즉 지적도나 토지대장에 나오는 동네이름이라 치더라도,‘팔거리’란 이름은 예사롭지 않다. 말 그대로 따지면, 팔거리는 길이 여덟 갈래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다. 흔히 천안 삼거리처럼 전통적인 교통의 요충지에‘거리’라는 지명을 붙이는데 이곳은 도시이긴 하되 조금 외진 곳이라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곳을 오랫동안‘학동 팔거리’라 불러왔다.
형태부터가 특이하다.‘팔거리’란 이름답게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기하학적인 공간구성이다. 한가운데는 공터가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여덟 갈래의 길이 방사선 형태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다시 작은 공터를 중심으로 다시 여덟 갈래의 길이 뚫려 있다. 집들은 이런 길과 길 사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최초의 핵분열 뒤에 다시 핵분열을 해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팔거리’란 이름은 이런 형태에서 비롯됐다.
일제시대에 경남의 진해나 함북의 나남 같이 일제가 저희네 군사적인 목적에 맞춰 도시 전체를 처음부터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만든 경우가 있고, 서울 등 몇몇 도시에서 바둑판 모양으로 소규모 택지개발을 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동 팔거리처럼 마을 단위로, 그것도 이처럼 철저하고 완벽하게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삶의 공간을 구획, 아니 절단 내는 방식으로 도시계획을 실시한 예는 없었다.
이곳은 본디 광주천 상류의 오미 땅.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은 누구나에게 사용이 허락된 공유지가 아닌, 일제의 사법적 관할권에 포함된 국유지였다.
그런데 1930년 이곳에서 약 1km 남짓 떨어진 곳에 철도, 즉 지금의 경전선 철길이 놓이고 이와 함께 남광주역이 생기게 됐다. 그런데 남광주역은 광주천과 인접한 곳에 있어 홍수가 나면 쉽게 침수되고 철교나 다른 시설물들에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1930년 8월 광주천물이 크게 불었을 때 학강철교가 무너졌고 주변 가옥 수 십여 채가 물에 잠기는 곤욕을 치렀다. 특히 학강철교의 부재들이 그 아래쪽인 부동교까지 떠내려가 자칫하면 부동교마저도 무너질 뻔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수해를 여러번 겪고 나자 일제는 역 주변에 제방을 새로 쌓고 물길을 직선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미 강변인 학동과 방림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약 500세대였다. 그들은 변변한 집도 없이 토막을 짓고 살았는데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집단 거주지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학동 팔거리가 들어선 곳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처음엔‘갱생부락(更生部落)’이었다.
당시 이 마을이 생겼을 때, 일제는‘전 조선에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유일무이한 사업’이며‘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이상촌(理想村)’이라고 선전했다. 사통팔달로 뚫린 골목, 그 안의 공동우물과 공동세탁장, 그리고 잘 완비된 하수도 시설을 그 증거라도 내세웠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속내는 전혀 딴판이었다. 우선 이곳에 이사해 온 주민들은 약 250세대였는데, 땅과 집을 무상으로 제공받은 것이 아니었다. 제방공사, 혹은 이곳 부지를 마련하는 노역에 참여해야 했고, 노임도 일부를 천인저축(天引貯蓄)이란 이름으로 빼앗겼다. 집도 9평에서 24평까지 모두 8등급으로 나뉘었고 경제적 형편에 따라 각자 들어가 살 집이 정해졌다. 집의 규모도‘갱생’보다는 빈민수용소 성격이 강해 비좁고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마을운영방식도 특이했다. 한마디로 그곳에 옮겨온 주민들은 잠재적 범죄자, 즉 우범자 취급을 받았다. 마을내 일제에 우호적인 인물을 선발해 이른바‘방면위원’이란 걸 뒀다. 이들은 마을을 드나들거나 전·출입자를 파악해 관청에 신고하는 내부 감시자 역할을 했다.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주민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역에 사람들을 끌고 가서 일을 할당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방면위원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동원된 팔거리 주민들은 광주시내의 주요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는데 1937년 이후 건설된 시내 수도시설 공사 노무자들은 상당수가 이곳 출신 주민들이었다. 이렇게 힘겹게 일한 대가를 그들이 모두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급료의 20%씩 떼어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다.
이곳 아이들까지도 우범자로 간주됐다. 그래서‘교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만을 따로 교육하는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1937년 학동 팔거리에서 500m 떨어진 곳에 2년제인 학강간이학교가 설립됐다. 대략 그 위치는 지금의 남광교회(학동 637-184번지) 자리였다고 전해진다.
다시 말해 이곳 사람들은 단지 조선인이고,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이 독특한 동네 형태가 어디서 착상했는지는 알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것이‘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거부감이 컸던 건 당연했다. 1930년대 광주에는 부회(府會)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지금의 시의회와 비슷했지만 엄밀하게는 완전한 지방자치라기보다는 시장격인 부윤을 자문하는 정도였다. 학동 팔거리가 계획될 무렵, 이 부회에 참여한 조선인 의원들은 이 마을이 조선인에 대한 인종적인 모욕이고,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라고 성토를 했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상 이런 비판이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사람들은 팔거리의 형태가 일제가 욱일승천기를 본 따서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또 광장에 서면 사통팔달 골목길이 한 눈에 들어와 감시를 좋게 하기 위해서라도 했다. 이러한 해석들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미스터리 같은 팔거리가 어디서 비롯됐는가를 곰곰 따져 생각해낸 것들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팔거리는 19세기 초엽 영국의 사상가인 제레미 벤담이 죄수들을 효율적인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처음 제안했고, 현대 프랑스 사상가인 미셸 푸코가‘감옥의 역사’란 부제를 단 『감시와 처벌』이란 책에서 그 의미를 근대사회의 전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메커니즘으로 언급했던‘파놉티콘(panopticon)’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놉티콘은 그리스어로‘한 눈에 모든 것을 다 본다’라는 뜻인데, 중앙에 감시공간을 두고 그 주변에 원형으로 수감시설을 둬 감시의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목적을 둔 감옥 형태를 말한다. 파놉티콘이 일반적으로‘원형감옥’으로 번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광주갱생지구 설계도
동아일보 1936년 4월 21일자에 실린 도면을 확대한 것이다. 원래 계획에는 팔거리 전체에 하나의 대형광장을 설치하고 그곳에 공동우물과 세탁장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 같다.
파놉티콘은 흔히들“건달을 정직하게 만들고 게으름뱅이를 근면하게 만드는 공장”이라고 표현된다. 순전히 지배자와 감시자의 입장에서 사회의 버림 받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그들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공장 겸 감옥이란 뜻이다. 감시자들에게 이처럼 환상적인 통제장치는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파놉티콘의 감금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토피아였다. 또 감금이 완벽해질수록 유토피아에 더 도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놀랍게도 학동팔거리에 깔린 억압의 그림자는 이러한 파놉티콘의 음모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삶을 옥죈다고 해서 다 거기에 순종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집들이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 임시 거주지를 찾아 떠난 상태지만 두 팔을 펴면 담벼락이 손끝에 닿을 만큼 가까운 팔거리 사람들의 넉넉함은 아직 살아있다. 가난하되 옹색하지 않고, 최정웅이「광주시 학3동 8거리」란 시에서‘밤이 와도 대문을 걸지 않는다’고 했던 동네가 바로 이곳이다. 이제 우리는 기록으로나마 팔거리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산나무집, 왕대포집, 동광정미소 그리고 여기저기 똬리를 틀며 사람들의 숨결을 호흡했던 느티나무들이 풍기는 냄새마저 기록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필자 후기 : 집필과정에서 학동 팔거리가 거주자들에 대한 억압만을 목적으로 한 통제장치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소 거친 방법이기는 하지만 사회복지제도의 초기형태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견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중앙광장
동신교회 주변인 중앙광장은‘중앙팔거리’혹은‘기본팔거리’로 불려왔다. 태평양전쟁 말엽에는 공습경보를 알리는 경종대(警鐘臺)가 설치되면서부터‘종댓거리’라고도 했다. 당시 오른쪽 느티나무에 경종을 메달아 사용했다고 한다.
백범 김구와 백화마을
광주천이 원지교를 갓 내려와 만나는 곳, 개천과 학동팔거리 사이에 알토란 같이 작지만 야무진 마을, 백화마을이 있다. 이 일대에선 꽤 이름이 알려진 마을이다. 지금도 이 일대에서 학동 몇 번지보다 백화마을이라 해야 사람들은 얼른 알아듣는다.
하지만 어디 하나 부유한 구석이 있거나, 그렇다고 시골마을 같은 목가적인 소박함이 피어나는 그런 마을은 아니다. 게다가 최근 재개발지구로 결정되어 그나마 오랫동안 다져진 옛 모습조차 곧 사라질 형편이다. 그래도 이곳엔 뭔가 있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엔 마음 넉넉한 뭔가가 깃들어 있을 것만 같은 조잘대는 말소리와 골목 냄새가 짙게 풍긴다.
따지고 보면, 이 마을은 그저 그렇게 생긴 마을이 아니다. 늦어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다른 광주천변의 마을들과 달리 역사도 짧다. 마을 역사는 해방 직후인 1946년 서민호(徐珉濠) 시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백범 김구는 전국을 순회했다. 특히 삼남지방은 그에게 특별한 인연을 가진 지역이었다. 일본인을 맨 손으로 때려 눕혀 체포된 치하포 사건으로 옥에 갇혀 있다가 요행히 탈옥해 도피생활을 할 때 그가 들른 곳은 충청·경상 그리고 전라도 등 삼남지방이었다. 당시 백범은 광주도 거쳐 갔는데, 『백범일지』를 보면, 그는 담양을 거쳐 지금의 북구 우산동을 들렀다가 그보다 남녘인 해남, 보성 등지를 떠돌았던 것 같다.
1946년 9월 백범은 다시 광주를 방문했다. 대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행사 뒤 백범은 당시 서민호 시장한테서 전재민(戰災民) 소식을 접했다. 당시 해방을 맞아 귀국했음에도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광주 같은 도시변두리에 몰려 빈민층을 이루던 사람들을 전재민이라 불렀다.
실제로 전재민 상황은 심각했다. 해방을 맞이했을 무렵 광주인구는 8만명 가량. 이듬해에 10만, 그 다음해에 11만 식으로 한국전쟁 전까지 4년간 매년 1만 5천명씩 증가했다. 아마 인구집계에 누락된 채 살았던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증가 규모는 훨씬 컸을 것이다. 그런데 행정당국에 집계된 인구증가 규모만 놓고 볼 때 그 증가율은 놀라웠다. 오늘날 인구 140만의 광주에 불과 몇 년 만에 인구 약 21만명의 남구만한 자치구가 새로 생긴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인구증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구폭탄’이라 할 판이었다. 동시에 인구학자들에겐 퍼펙트스톰(perfect storm), 즉 완벽한 재앙과 다름없었다.
물론 이렇게 광주를 찾은 사람들은 직업이나 학업 등 자발적 동기로 광주에 몰려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달리 의지할 것도 재산도 없이 도시에서 품이나 물건을 팔아 그날그날을 살아가던 전재민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백범은 자신이 받은 각종 물품을 광주시에 기증했다. 백범이 삼남지역을 순회할 때 지역민들은 백범에게 각종 선물을 건넨 바 있었다. 그의 일행이 탄 차에는 해산물, 육산물, 금품 등 다양한 물품들이 가득했다. 백범에겐 이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서민호 시장에게서 전재민의 사정을 듣게 되자 옳다 싶어 자신이 받은 물품을 광주시에 희사했던 것이다.
전재민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이 물품들을 현금화할 필요가 있었다. 서민호 시장은 이를 위해 지역유지들의 협조를 구했다. 지역유지들은 하나씩 물건을 가져가고 실제 가격에 웃돈을 얹어 광주시에 현금을 내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마련된 밑천으로 광주시가 전재민을 위한 마을을 세웠는데, 그것이 백화마을이다. 일설에는 마을 이름을 백범이 직접 지었다고도 하고, 혹자는‘백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얘기들의 진위를 명확히 구분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을이 생겨난 과정을 생각하면 딱히 그르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광주에서 일반화된 아파트가 일찍부터 시작된 곳은 백화마을이다. 유독 주거상황이 험했던 이곳의 사정을 좀더 개선하기 위한 방편이 공동주택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1970년 백화마을 일부에 13평형의 시영아파트(48세대)가 지어졌다. 이 아파트는 광주에서는 아주 초창기에 세워진 아파트형 공동주택으로 꼽힌다. 한편, 시영아파트 옆으로 17~25평형대의 백화아파트(165세대)는 1992년에 세워진 것이다.
학동시영아파트
학동시영아파트는 1970년 광천동의 시영아파트와 함께 광주에서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아파트다. 광주 최초의 아파트는 1966년 계림동에 세워진‘미도아파트’다.
광주목장 터
- 남광교회와 그 주변
남광교회와 그 주변, 학동 637번지 일대에는 오래전 얼룩박이 젖소가 길게 하품을 게워내던 목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생긴, 아마도 최초의 조선인 목장이 아니었나 싶다. 그 이름은 광주목장. 1930년대 양태승(梁泰承)이란 분이 설립했다.
양태승은 고창 출신으로 그 무렵에 광주와 많은 인연을 쌓아가고 있었다. 장성이나 영광 사람들에게 고창은 가까운 곳으로 느껴지겠지만 같은 전라도라고 해도 왠지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감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고창과 광주 전남은 퍽 가까운 이웃이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행정구역의 원형이 만들어진 1914년 이전에 고창은 엄연히 전라남도 땅이었다. 실제로도 고창은 광주 전남과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지금도 광주에서 쉽사리 고창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양태승의 시절엔 이런 정서적 농도가 훨씬 진했다.
어떻든 일제 강점기에 양태승은 광주에서 계유구락부(癸酉俱樂部)의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이 단체는 광주 지역의 각종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찾던 모임이었다. 또 오늘날‘MDC’란 상표를 달고 나오는 양말, 즉 무등 양말 공장이 1935년에 설립되고 운영됐을 때도 참여했다.
그런데 이에 앞서 양태승은 사립고창고보의 교장을 지냈다. 사실 그 때문에 양태승은 광주지역에서도 꽤 이름이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본래 고창고보는 일본인이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마스토미 야스자에몽(桝富安左衛門)이 1919년 고창 부안면에 설립한‘사립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시작됐다.
마스토미가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06년 초여름. 그 무렵 다른 일본인들처럼 그도 군산항을 중심으로 토지매입에 나서 상당한 지주로 성장했다.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를 중심으로 설립된 마스토미농장도 이 무렵 그가 사들인 막대한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1910년 부인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뒤부터 마스토미는 동시대의 일본인 지주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1912년 부안면 오산리에 흥덕학당을, 1918년에는 같은 동네에 오산고등학당을 세웠는데, 몇 년 뒤 흥덕학당은 오산보통학교로, 오산고등학당은 오산고등보통학교(고창고보)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
학교 운영은 여전히 마스토미가 자력으로 담당했다. 운영자금은 주로 부안면 오산리에 있던 마스토미 소유의 과수원에서 나왔다. 수확한 과일을 일본에 내다 팔아 그 대금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1차 대전 직후 불경기의 한파가 몰아닥치면서 과일 판매량이 급감했다. 자연히 학교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1921년 가을부터 고창군 일대에는 마스토미의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 오산고보는 고창에서 유일한 중등학교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창군민들은 합심하여 고창고보를 인수하기로 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군민들은 30여만원의 성금을 모아 학교를 인수했고, 1922년 5월 학교를 부안면에서 고창읍내로 옮겨 다시 개교했다.
한편 마스토미는 이후 새롭게 문을 연 사립고창고보에서도 재단이사로 줄곧 참여했고, 상당한 액수의 기부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4년에 도쿄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을 때 고창고보에서는 추도식을 거행했다. 또 지난 1996년 12월 우리 정부는 그가 한국 체류 중에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려 국민훈장모란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마스토미와 함께 고창고보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양태승이었다. 그는 고창고보가 군민들의 도움으로 재설립되던 1922년부터 이후 6년간 고창고보 교장을 지냈다. 한마디로 그는 이 학교의 재출범부터 그 기반을 닦았던 초창기의 산증인과 다름없었다. 이런 공헌 때문에 1928년 초 고창고보를 떠날 때, 학교동문들과 재학생들이 그의 유임을 강력히 요청했고, 학교 이사회가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만류에도 양태승은 고창고보를 떠났고, 대구 계성학교에서 얼마간 교육자의 길을 더 걸었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얼마 뒤 광주로 왔고, 1933년 학동에 목장을 설립했는데 그것이 광주목장이었다.
광주에는 일찍이 1910년대에 이미 낙농업자들이 출현했다. 기록에 의하면, 나카무라 젠타로(中村善太郞)란 사람이 서방면에서 목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착유시설을 가진 그는 생산한 우유를 동문통에 있던 공동 판매점에 공급했고, 요구르트는 시내 일반가정집에 배달했다.
비슷한 시기에 타니가와(谷川捨次郞)도 원촌리(현 동명동)에 목장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타니가와는 해방 직전까지 광주에 살며 금동에 있었던 광주공예품, 수기동에 있었던 조선식품화학공업 등 여러 회사의 운영에도 간여했다. 이밖에 원촌리에는 사쿠마(佐久間)목장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양태승 이전에 조선인이 우유 생산을 목적으로 경영했던 목장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양태승은 조선인의 우유소비를 진작할 목적으로 목장 설립을 착수했고, 호남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땅과 시설을 매입했다.
당시 우유는 도립병원의 입원환자나 젖먹이 아이를 가진 일반인들이 소비했다. 지금처럼 우유 마시기가 보편화되지 않던 때라 소비량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양태승의 목장운영에는 늘 재정적 어려움이 뒤따랐고, 결국 1940년 목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해방 후에 광주목장은 정국훈이 인수했다. 정국훈은 일제 말엽에 근처 마장을 출입했던 것으로 보아 광주목장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인연으로 목장을 인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여기에는 적잖은 돈이 필요했는데, 일설에는 그의 동생 정상훈이 광주목장을 사서 그에게 넘겼다는 말도 있다.
대략 1950년대까지 운영됐던 정국훈의 광주목장은 중도에 카바레로 업종을 전환했다. 당시 카바레에 들어서면 한쪽에서는 경양식을 팔았고 가운데에는 춤을 출 수 있는 홀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 카바레의 상호가‘호수카바레’였음에도 사람들은 곧잘‘목장카바레’라 부르곤 했다는 점이다.
남광교회
남광교회와 그 주변은 1930년대 말엽부터 학강간이학교와 양태승의 광주목장 그리고 경찰기마대가 거쳐 간 곳이다.
학동은 광주·전남 승마의 발상지
- 학동 637번지 일대
2006년 12월 텔레비전을 통해 도하 아시안게임을 보던 우리 국민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여덟 번째 장애물을 넘던 우리 선수가 말과 함께 순식간에 곤두박질쳤고 선수는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선수의 이름은 김형칠. 마흔을 훌쩍 넘겨 노장 축에 들었지만 승마에 대한 열정이 나이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나라를 대표해 이역만리 도하의 마장을 달렸던 그는 어쩌면 영원한 승마인답게 마장에서 자신의 운명을 맞이했는지 모른다.
이 사고 뒤에 사람들은 김형칠 선수의 부친 역시 1965년 도쿄올림픽에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출전했던 김철규 씨였고, 김형칠 선수가 그의 부친을 통해 승마를 배웠음을 알게 됐다. 여기에 사족을 더 붙이자면, 그 김철규 씨가 승마의 기술을 연마하던 곳이 광주 학동의 마장(馬場)이었다.
학동의 마장은 그 역사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말엽, 평소 승마광이던 일본인 경찰부장이 광주에 부임하면서 경찰기마대를 조직했다. 아마 이 때부터 학동에 경찰기마대의 마장이 생겨났던 것 같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그 무렵에도 승마는 지역 부유층이나 유력인사들의 스포츠였다. 일제시대 이곳 마장에서 승마를 즐겼던 면면들을 봐도 그런 분위기를 전해준다. 호남은행의 현준호, 금남로5가를 비롯해 광주 전역에 막대한 토지를 보유했던 지응현의 아들 지창선, 양파농장 정낙교의 자제 정상호, 해방 후 광주시 보건후생과장을 지낸 의사 민병기, 고창의 자산가 정세환, 일제 때 창평상회를 운영했고 훗날 지금의 대창운수란 버스회사와 대창석유를 세운 고광표, 해방 후 광주시장을 역임한 노인환 등이 이곳에서 승마를 즐겼다고 한다.
일제가 물러간 뒤에도 학동 마장의 역사는 계속됐다. 해방 후에 전남경찰기마대는 학동 901번지 일대에서 재출범했다. 더불어 승마 애호가들의 클럽인 전남승마구락부가 결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승마구락부는 광주·전남의 승마계를 이어갈 많은 선수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 교관 역할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정국훈이 있었다. 도하에서 숨진 김형칠 선수의 부친인 김철규 씨도 바로 이 정국훈으로부터 승마를 배웠다. 또 동강학원의 설립자인 이장우 씨도 이 무렵 경찰기마대 선수로 활동하며 후진을 양성했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이후 광주농고, 광주일고, 광주고, 숭일고, 전남공고 등 시내 학교에서 우수한 승마 선수들이 배출됐고, 경찰기마대에서도 김윤만 등이 선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1960년 우리 지역의 승마 보급에 적잖은 기여를 했던 전남경찰기마대가 해체됐다. 오토바이가 말을 대신하면서 기마대의 역사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학동의 마장도 큰 변화를 맞았다. 마장의 반은 승마협회가 관리했지만 나머지 반은 김윤만에게 매각되어 학교(제일고등공민학교와 제일상업전수학교)가 됐다. 더욱이 그나마 절반뿐인 승마협회의 마장도 다시 농아학교(전남농아원) 등에 팔려 사라질 형편이었다. 다행히 김윤만이 자신의 학교 운동장을 마장으로 사용하도록 도움으로써 학동 마장의 역사는 단절될 위기를 모면했다.
학동 마장은 그 뒤 한동안 지역의 승마 애호가들에게는 특별한 장소였다. 1960년대 이곳을 찾은 승마 애호가 중에는 5척 단신의 화가도 있었다. 평소 위장병을 앓았던 그는 승마로 병을 치유한 경험이 있어 말 타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즐겨 타는 말이 있었다. 그 말에게는 평생 그가 마음속에 안고 살았던 산 이름을 따‘무등’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보릿고개가 일상처럼 되풀이 되던 시절이었지만 화가는 어디선가 구해온 수수를‘무등’에게 먹이곤 했다. 사람을 대하듯‘무등’과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마장에서‘무등’을 데리고 나와 시내를 활주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지산동 화실 앞 사철나무에 매어놨다가 다시 마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그들의 관계는 1982년까지 지속됐다. 그리고 화가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무등’은 1년 남짓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눈을 감았다. 그 화가는 바로 한국미술의 거목, 오지호였다.
승마선수들에게 학동 마장은 또 다른 삶의 도전무대였다. 스포츠로서 승마가 여전히 맹아기나 다름없던 시절에 이곳 출신의 선수들은 우리 지역 승마계에 새로운 이정표들을 만들어갔다. 김철규와 박종빈이 1960년 대전에서 열린 전국체전의 마장마술과 중장애물 비월경기에서 각각 1위를 했고, 1963년 전국마술대회에서 다시 김철규와 유춘택이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새로운 마장도 생겨났다.
1965년 제46회 전국체전이 광주에서 열렸다. 한국전 당시 광주가 처음 대회를 유치한 뒤 10여년 만에 광주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이었다. 이 때 조선대 교내에 승마장이 마련됐다. 승마인들은 이 마장을 학동 마장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조대 마장’이라 부르곤 했다. 하지만 조대 마장 자리에 1968년 조선대 부속중학교가 세워지면서 마장은 방림동의 광주천변으로 옮겨가게 됐다. 그 뒤 이곳마저 시유지라 폐쇄됐고, 마장은 북구 양산동을 거쳐 염주동 체육공원에 이르기까지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한편, 한때 경찰기마대 승마선수이었고 마지막 기마대장을 지낸 김윤만은 학동 마장의 일부인 901-301번지를 사들여 1960년대 초엽에 제일고등공민학교를, 1970년대 초엽에는 다시 제일상업전수학교를 세웠다. 광주 사람들은 이 학교들을 곧잘‘말간학교’라 부르곤 했다. 학교 터나 초기 학교 건물이 학동 마장의 마구간 자리인데다 학교 설립자가 기마대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제일고등공민학교와 제일상업전수학교는 광주목장의 마지막 흔적이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두 학교는 1982년께에 문을 닫았다. 사라진 두 학교의 학적부는 오늘날 봉선동에 소재한 문성고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묵은바탕과 그곳에서 생긴 일
- 전남대병원 응급센터 일대
지금 조선대병원으로부터 장례식장으로 내려오는 산등성이가 일제 때의 학강정(鶴岡町), 오늘날의 학동(鶴洞)이란 지명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 된 것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산등성이는 언제부턴가 그 끝자락이 잘려 나간 상태다. 여기에 본디 산등성이였던 곳은 그 끝으로 내려올수록 육중한 전남대병원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눌려 산등성이라고 부르기에 좀 머쓱해질 정도로 볼품없게 변해버렸다. 이뿐 아니라 이 산등성이를 부르던 이름조차 우리 시대에는 되레 생소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본래 조선대병원 쪽에서 옛 학동배수지 터를 넘어설 즈음 옛 사람들은 이 산등성이를‘남사정 언덕’이라고 불렀다. 예전에 남사정(南射亭)이란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위치나 건립된 시기는 망각의 장막에 가려 전해지는 얘기가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짐작이 가는 정황이 있다. 우선 남사정이란 이름은 남문 밖에 있는 활터였던 까닭에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당시 읍성 안, 즉 지금의 충장로1가와 금남로1가 어디쯤에 있었던 활터인 관덕정(觀德亭)과 구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 이 언덕에는 성안의 관덕정처럼 어엿한 정자도 있었을 것이다. 1925년에 간행된『광주읍지』의 첫 들머리에 실린 지도에도 이곳에는 남사정이란 글자와 함께 그럴듯한 정자 한 채가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남사정의 존재를 확연히 알려주는 기록도 있다. 1933년 부호 최석휴(崔錫休, 崔元澤의 아들)가 짓고 이를 다시『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에 실은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