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시의 박해받던 성도들에게는 물론 그때 이래 각 시대의 성도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기별이 되어 왔으며 더군다나 재림 직전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기별이다.
계시록에는 요한이 본 여덟 개의 계시(啓示)가 나온다.스트랜드(Kenneth A. Strand)는 서론(1:1-8)과 결론 부분(22:6-21)과 함께 그 여덟 개의 계시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1) 일곱 교회(1:10--3:22), (2) 일곱 인(4:1--8:1), (3) 일곱 나팔(8:2--11:18), (4) 대쟁투(11:19--14:20), (5) 일곱 재앙(15:1--16:17), (6) 바벨론의 멸망(16:18--18:24), (7) 두 만찬과 천년기(19:1--21:4), (8) 새 예루살렘(21:5--22:5) 이다. 맥스웰(C. Mervyn Maxwell)은 일곱 재앙 끝부분과 바벨론 멸망과 관련된 부분에 15:1--16:21를 한 단락으로 묶으므로 스트랜드와는 약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스트랜드의 견해에 의하면 여덟 개의 계시는 역사적인 부분(1-14장)과 종말론적 부분(15-22장)으로 각각 네 개씩 포함되어 서로 갈린다. 역사적 부분은 요한 당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전 기독교 역사 기간을 망라하며, 종말론적 부분은 은혜 기간이 마친 후부터 신천신지의 회복에 이르는 기간까지 포함한다.역사적 부분은 기독교 시대 동안 교회의 경험과 사건들을 강조하고 종말론적 부분은 세상의 끝과 종말사건들에 초점을 두었다.계시록의 구조를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 스트랜드의 견해에 맥스웰, 셰이(William H. Shea) 등 대부분의 재림교회 학자들이 동의 한다.스트랜드는 또 다른 관찰을 하였는데, 요한 계시록 전체를 서론 및 결론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교차대구법(Chiastic Structure)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론(1:1-10a).
1 1:10b-3:22 전투 중에 있는 교회(땅 위의 교회: 일곱 교회들).
II 4:1-8:1 하나님의 구원의 전진하는 사업(일곱 인).
III 8:2-11:18 나팔 경고들(일곱 나팔들).
IV 11:19-14:20 하나님과 그분의 성도들을 반대하는 악의 세력들.
V 15:1-16:17 재앙들(일곱 마지막 재앙들).
VI 16:18-18:24 하나님께 심판받는 악의 세력들.
VII 19:1-21:4 하나님의 심판의 종국(그리스도의 재림, 천년기, 백보좌 심판).
VIII. 21:5-22:5 교회 승리(새 하늘 새 땅,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결론(22:6-21).
A. 개관
요한계시록 1장의 전반부(1-8절)는 책 전체의 서론 부분이다. 요한은 이 부분에서 아주 간결한 문체로 책의 제목과 저자 소개 그리고 책을 기록한 목적과 기록한 방법을 일러주며 계시록의 본질과 중요한 주제를 제시했다. 요한이 요약한 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인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천명(闡明)한 것이다. 둘째, 속히 일어날 일 곧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명확하게 언명한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책 전체를 통해 흐르는 주요한 주제이다. 1장의 후반부(9-20절)는 2, 3장의 도입부(導入部)로 역할 하는 요한이 본 첫 번째 계시이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계시 상태에 들어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조우(遭遇)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펼쳐 보여주시는 계시를 기록하여 일곱 교회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 도입부 계시는 분명히 요한계시록 전체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직접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진의(眞意)를 알려주셨다. 바로 20절이 계시록 해석의 주요한 열쇠가 되었다.
요한은 황제숭배를 거절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당했다. 계시록이 기록될 무렵에는 로마제국의 전 영토에 황제숭배가 하나의 종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황제 숭배의 골자는 황제를 신(神)으로 섬기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매년 한 번 신전에 가서 황제의 신상 앞에 향을 피워 놓고 “가이사(황제)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여 황제를 신으로 인정한 후 증명서를 받아야 자기 마음대로 어떠한 신이든지 섬겨도 괜찮았다. 많은 이질적인 요소를 안고 있었던 로마가 광대한 제국에 다양한 언어와 민족 국가를 정치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고의적인 정책으로 창안된 것이 황제 숭배의 방법이었다.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가이사 숭배는 황제의 신격화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로마를 신성시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라 하였다. 로마라는 여신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고 그 여신을 숭배하는 일은 황제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 BC 195년에 그 여신을 위한 신전 하나가 서머나에 세워졌다. BC 29년에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로마 여신과 율리우스 황제를 합동으로 모실 신전을 에베소에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으며, 또한 로마 여신과 자기 자신을 위한 신전을 버가모에다 짓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이 생존하는 황제를 숭배하는 일의 첫 번째 경우가 되었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 AD 37-41)는 황제 자신을 경배하도록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자기를 경배하기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박해하였다. 황제들 중에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문제를 또 다시 제기한 황제는 도미시안(Domitian, AD 81-96)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는 일을 확립하고자 신하들을 강요하여 자신을 숭배하게 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이와 같이 로마가 황제를 숭배케 한 정책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에 로마 제국을 통일시키는 현명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로마 당국은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자를 정치적 반역자로 간주하고 황제의 위엄과 로마를 무시하는 불충한 시민으로 여겨 극형에 처했던 것이다. 로마제국에 사는 자들은 누구든지 황제를 신이라 불러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만 했다. 거기서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이사냐 그리스도냐 둘 중에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에서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주(主)라는 칭호를 붙이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황제 숭배를 거절함으로 박해를 받던 역사적 배경은 요한이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여 계시록을 기록하는 직접적인 배경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B. 주석
계시록 1장의 문체 구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전반부(1-8절)와 후반부(9-20절)이다. 전반부는 세 부분으로 갈린다. 서언(1-3절), 인사와 찬미(4-6절), 그리고 책의 주요한 주제인 재림 선포(7-8절)이다. 후반부는 2, 3장의 도입부 계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를 돌보시며 그 지도자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심을 보여준다. 혹자는 12-20절에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계시는 것으로 주장하나 폴린(Jon Paulien)이 옳게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교회들을 돌보고 계시는 모습인 것이다.계시록 4장에 가서야 비로소 하늘 성소가 나오기 때문이다. 스트랜드(Kenneth A. Strand)는 12-20절에 나오는 성소는 하늘의 것이 아니고 땅 위의 교회들인 것을 나타내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하나는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곳은 하늘이 아니라 지상의 밧모 섬이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임재(臨在)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들이 지상의 일곱 교회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데이빗슨(Richard M. Davidson)도 12-20절 장면은 하늘 성소가 아니고 지상의 교회들이라는 옳은 견해를 피력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3절은 요한계시록의 머리말로 세 부분으로 갈라진다. 첫째, 계시를 주신 목적, 계시의 근거, 계시의 내용, 계시록의 저자와 기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계시의 전달 단계를 나타낸다(1절).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요한이 본 계시의 내용을 나타낸다(2절). 셋째, 그 계시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이 받을 복의 표명이다(3절). 그리고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a] dei/ gene,sqai evn ta,cei), 알게 하신 것(evsh,manen) 등의 문구는 1-2절이 다니엘 2장에서 인유(引喩)된 것을 나타내며(단 2:28, 45),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다니엘의 예언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성취되는 것을 나타낸다. 1-2절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증거란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주신 것을 일컫고, 그리고 예언의 말씀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받아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 서두는 요한계시록의 표제(表題)이자 중심주제이다. 요한은 이 책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명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책의 직접적인 저자(著者)가 되심을 분명하게 천명하였다. 아울러 요한은 2절과 11절에서 자신은 기자(記者)임을 밝혔다. 22:16에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자증(自證)하여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고 하셨다. 또한 그분은 2, 3장에서 일곱 교회 보내는 편지의 발신자로 자신을 명시하셨다(2:1, 8, 12, 18; 3:1, 7, 14). 그러므로 이 책의 명칭은 저자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에 요한계시록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이라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요한계시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2세기의 교부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202)와 그 후 여러 교부들이 그런 명칭을 붙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요한의 계시” 라고 칭해졌으나 4세기에 이르러서는 “신학자요 전도자인 요한의 묵시록”(Apocalypse of John the Theologian and Evangelist) 또는 “신학자 성 요한의 묵시록”(Apocalypse of St. John the Theologian)으로 일컬어졌다. 사실 책의 본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이란 명칭이 훨씬 더 적합해 보인다.
계시록에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명칭이 세 번(1:1, 2, 5) 있고, 예수는 여덟 번 있으며(1:9에두 번; 12:17; 14:12; 17:6; 19:10; 20:4; 22:16), 주 예수는 두 번(22:20, 21), 그리스도는 네 번(11:15; 12:10; 20:4, 6), 그리고 주(11:4, 8, 15, 18; 14:13; 15:4에 세 번; 16:9; 17:14; 19:16; 22:6)가 열 두 번이나 있다. 또한 그리스도라는 명칭에는 항상 정관사가 붙었다. 예수 그리스도의(VIhsou/ Cristou/ of Jesus Christ) 라는 문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된다. 주어적 속격(the subjective genitive)이나 혹은 목적적 속격(the objective genitive)이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를 의미하고, 후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곧 그분의 막후(幕後) 활동을 설명한 계시를 의미한다. 문맥상으로는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문구를 볼 때에 계시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임을 결코 간과할 수는 없다. 분명히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다. 번치(Taylor G. Bunch)는 계시록의 처음 세 장에서만도 그리스도를 명칭이나 동의어로 언급한 것이 137회(1장 49회, 2장 39회, 3장 49회)나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라는 문구는 문법적으로 주어적, 목적격 속격 둘 다의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록의 저자이자 계시의 대상도 되시기 때문이다. 계시(啓示)의 헬라어 아포칼룹시스(VApoka,luyij revelation)는 문자적으로 “...에서부터”를 의미하는 아포(Vapo away from)와 감춘다 혹은 덮는다는 뜻을 가진 칼룹시스(ka,luyij a veiling)의 합성어이며 열어 보임, 폭로, 감춰진 것을 드러냄, 덮개를 걷어냄 등을 의미한다(눅 12:2). 그러므로 계시의 참 뜻은 감추어진 사실을 숨기지 않고 벗기어 공공연하게 드러냄으로 시야에 들어오게 하는 현시(顯示)인 것이며, 종교적으로 미래를 들어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드러난다. 헬라어 아포칼룹시스에서 묵시(黙示)란 뜻의 영어 아포칼립스(Apocalypse)란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묵시록(Apocalyptic)이라고도 한다. 원전에 계시라는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이것은 책의 속성과 질(質)을 강조하여 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 그 자체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시가 전달된 세 단계들이 이 구절에서 간결하게 나타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전달하였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 전달 체계는 계시록이 요한에게 기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첫째 단계,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의 헬라어 원문 에도켄 아우토 호 데오스(e;dwken auvtw/| o` Qeo,j gave to him God)는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계시의 궁극적 근거와 원천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다니엘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비밀을 계시하여 알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여 하나님이 모든 계시의 근원이심을 밝혔다(단 2:28, 29, 4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통해 주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신 바로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계시록의 참된 저자는 하나님이시다”고 했다. 랑코 스테파노비치(Ranko Stefanovic)도 계시록 본문은 계시록의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기보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으로 밝힌다(1:1 22:6)고 했다. 비록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일체이시기 때문에(요 10:30) 성부 하나님을 저자라고 하든 성자 하나님을 저자라고 하든 서로 모순되지 않지만, 그러나 1:1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의 저자로 천명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 전달 단계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셨다(딤전 2:5). 그런 뜻에서 마운스(Robert H. Mounce)는 계시록은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한 계시라고 하였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과의 모든 교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와 교통할 수 없는 것이다(요 14:6).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실 때에 “내가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 12:49)라고 하셨다.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 자신의 의중(意中)에 근거한 것임을 여러 번 밝히셨다(요 3:34-35; 5:20-24; 7:16; 8:28; 14:10, 24; 16:15; 17:8). 사도 바울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고 하였다.
둘째 단계,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사를 통해 계시를 요한에게 주셨다.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종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막 3:13-19). 계시록이 구약적인 색채(色彩)가 농후한 것으로 보아 그 기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인 것이 틀림없다. 요한은 계시록의 저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자신은 기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알게 하신 것의 헬라어 에세마넨(evsh,manen he signified)은 열어 보이다, 알리다, 설명하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으로 알려주신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단 2:45; 요 12:33; 18:32; 21:19). 이 동사의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의 천사는 그리스도의 천사를, 그 종 요한은 그리스도의 종을 뜻한다. 요한은 제3인칭 대명사 남성 단수 속격 아우투(auvtou/ of him)를 3번이나 사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켰다(그 종들, 그의 천사, 그 종). 요한은 성령의 영감 아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보내어 알려주신 것을 자신의 말로 기록했다. 그래서 요한의 저작(著作)으로 알려져 요한계시록이라 일컫는다. 요한은 계시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상징의 의미를 간파(看破)하므로 알게 되었다. 계시록은 상징적인 계시이기 때문이다. 심부름한 그의 천사는 가브리엘 천사이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다니엘 8, 9장을 설명해주고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준 천사이다(단 8:16; 9:21; 눅 1:26). 가브리엘 천사는 중보자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으로 계시를 지참하여 요한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천사는 계시록에서 계시의 전달자로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직접 요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10장에 보면 힘센 천사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0:11).
셋째 단계, 요한은 교회에 전달했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그 종들에게(toi/j dou,loij auvtou/ to his slaves) 라는 문구에서 종들을 뜻하는 원어 둘로이스(dou,loij slaves)는 원래 노예들을 의미하며 주인의 시간표와 뜻에 따라 절대 복종하는 자들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여기서 종들은 그 당시 박해를 받아 용전분투(勇戰奮鬪)하던 교회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들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보이시려고의 헬라어 데익사이(dei/xai to show)는 목적격 부정사로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이는 것임을 뜻한다(22:6). 또한 이 단어는 암시하다는 뜻도 있어 계시록이 미래의 사건을 암시하는 책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1절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록한 목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 하였다. 그것의 헬라어 원문의 문구인 데이 게네스다이 엔 타케이(dei/ gene,sqai evn ta,cei it behoves to occur with speed)는 칠십인역의 다니엘 2:28, 45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느브갓네살 왕에게 한 말,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단 2:28)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장래 일”(단 2:45)을 알게 하신 것이다. 또한 이 문구는 마태복음 24:6을 암시한다(막 13:7 눅 21:9). 반드시 ...해야 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데이(dei/ it behoves)는 도덕적 의무가 아닌 논리적 필연성을 강조한다. “선지자들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의 완전한 성취를 뜻한다.” 데이(dei/)는 계시록에서 일곱 번이나 사용되었다(1:1; 4:1; 11:5; 13:10; 17:10; 20:3; 22:6). 다니엘 2:28에서 이 단어는(dei/)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여 그분의 의도에 따라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하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는”(단 2:21) 것과 관련이 있다. 일어날의 원어 게네스다이(gene,sqai to occur)는 계속 일어날 것을 가리킨다. 속히 라고 번역된 엔 타케이(evn ta,cei with speed)는 즉각적으로, 확실히, 시간이 지체되지 않고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분명히 성취될 확실성과 그 임박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로부터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계시로 받아 교회에 전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은 단지 계시의 전달자일 뿐이다. 이런 전달의 체계는 계시록이 요한에게 기원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요한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사도 요한이다. 그가 계시로 본 것을 증언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성경에는 침례요한, 마가 요한, 대제사장 안나스의 인척 요한(행 4:6),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 등 여러 요한이 나오는데 그 중에 세베대의 아들이요 야고보의 형제였던 사도 요한이 바로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때가 AD 95년경이었다. 침례요한의 제자로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가장 먼저 따른 요한은(요 1:35-40) 열 두 제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였다(요 13:23; 19:26; 20:2; 21:7). 요한의 제자였던 초대교회 폴리카르푸스(Polycarp, AD 60-150)는 서머나 교회 감독을 지냈는데 그의 제자 이레내우스(Irenaeus, AD 130-202)에 의하면 계시록은 도미시안(Domitian, AD 81-96) 황제 시대 동안 쓰였다고 했다.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을 여러 교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인정한다. 로마의 저스틴 말터(Justin Martyr, AD 100-165), 리용(Lyons)의 이레내우스(Irenaeus), 카르타고(Carthage)의 터툴리안(Tertullian, AD 160-240),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라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 220? ) 등이다. 계시록의 기자가 사도 요한임을 불신하는 것은 파피아스(Papias, AD 163? )에게서 유래됐다. 그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디오뉘시우스(Dionysius, AD 265 사망)는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동명이인(同名異人)에 의하여 기록되었다고 주장함으로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임을 의심한 첫 교부가 되었다. 그의 비평의 주안점은 요한복음의 언어와 계시록의 언어에는 명백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과 요한복음의 헬라어는 정확하고 관용어법에 맞지만 계시록은 정확한 헬라어 문법과 구문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절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복음서와 계시록 사이의 언어와 문체 및 어휘들의 차이점들이 실로 큰 것이라 할지라도 기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것을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필체가 다른 것은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전문적인 조력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대배경에서 성장한 요한에게 사실 헬라어는 제2외국어였다. 그래서 계시록이 헬라어의 문법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과 대조해보면 내용에 있어서는 히브리적 사고의 흔적들과 공통점 및 유사점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상징하고(요 1:1-14; 계 19:13), 어린양으로 상징했으며(요 1:29, 36; 계 5:6-8), 스가랴 12:10을 근거하여 그분을 찌른 자에 대해 언급하였으며(요 19:37; 계 1:7), 장막(tabernacle)을 친다는 동사를 사용했으며(요 1:14; 계 7:15), 또한 계시록은 생명수를(21:6; 22:17), 요한복음은 생수(요 4:10; 7:38)를 언급하고, 계시록은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22:17)라고 했으며, 요한복음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고 초청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합리적인 내부 증거들은 두 책이 모두 다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다.
자기가 본 것 곧 헬라어 호사 에이덴(o[sa ei=den things as he saw)은 동격(同格)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리키는 관계절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한꺼번에 나란히 언급한 것은 세 번이나 된다(1:2, 9; 20:4). 12:17에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함께 언급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별이다(렘 1:2; 호 1:1; 욜 1:1; 습 1:1; 슥 1:1). 요한이 본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인데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그 근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요한이 그가 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기록했을 때에 그 책은 “예언의 말씀”으로 칭해졌다(1:3; 22:7, 10, 18). 그러므로 요한이 본 것,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요한계시록, 예언의 말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등의 문구들은 모두 다 동격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만일 이 문구를 히브리인이 즐겨 사용하던 이중어구(二重語句)로 보고, 접속사 카이(kai. and)를 설명적 보조어로 보고 즉(namely) 이라고 번역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되어 두 문구가 동격이 될 수도 있다. 만일 그 번역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자기가 본 것이라는 세 문구가 모두 동격이 되어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두 문구가 주격적 속격임을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즉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나 예수에 관한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그리고 예수께서 주신 자기 증거로 이해한다. 요한이 본 계시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9절에서 같은 문구를 거의 모든 학자들이 목적격 속격으로 해석하는데 요한이 유배당한 이유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th.n marturi,an VIhsou/ Cristou/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란 무엇인가? 문맥에서 볼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인 계시로서 요한에게 보여주었는데 그 계시적 선물(visionary gifts)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인 것이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요한은 19:10에서 “예수의 증언(증거)은 예언의 영”(신)이라 했다. 요한과 같은 선지자가 본 것이 예언의 신임을 가리킨다. 예언의 영(신)은 천사와 요한과 선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란 요한이 그리스도께 받아 기록한 것처럼, 영감 받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전해야 할 것을 이상과 꿈과 구두로 전달받아 기록한 말씀들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지자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자 예언의 신이다.
다 증언하였느니라. 증언하였느니라의 헬라어 에마르투레센(evmartu,rhsen bore witness)은 소위 서간체 부정과거(Epistolary aorist)로 증거하였다 혹은 입증하였다는 뜻이다. 요한은 자기가 본 것을 기록으로 입증하였는데 사실은 계시로 보고 들은 시청각(視聽覺) 증거의 보고서가 요한계시록이다. 계시록에서 요한이 “보았다”는 말과 “들었다”는 말을 수십 번 사용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예수의 증거를 예언의 말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한 것을 증언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계시를 묘사하면서 주로 구약의 언어를 사용 하였고 또한 신약에서 예수의 증언을 근원으로 사용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구절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복 중에 첫 번째이다(1:3; 14:13; 16:15; 19:9; 20:6; 22:7, 14). 복(福)의 헬라어 마카리오스(maka,rioj blessed is)는 행복이나 깊은 내적 만족의 기쁨을 뜻하며, 여기서 단수로 된 것은 그 뒤에 “읽는 자”란 단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에 사용하신 용어와 같은 것이다(마 5:3-12). 성경에서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받는 자들이 복을 받는다고 말한 것은 최고의 행복을 표현한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예언의 말씀(tou.j lo,gouj th/j profhtei,ajthe words of the prophecy)이란 장래 사건의 예시(豫示)인 요한계시록을 가리킨다. 계시록은 보통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요, 구약의 모든 예언처럼 예언이며, 모든 시대 모든 교인들이 읽고 듣고 지키도록 보내진 기별이다.구약 39권 중 26권이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었으며, 각 장과 절이 거의 구약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밀리건(William Milligan)은 이점을 지적하여 “요한 계시록에 구약에서 끌어오지 아니한 단 하나의 상징이 있다든지, 그 동일한 출처에서 가져온 자료를 배경으로 구축되지 않은 단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라도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삼중(三重)의 축복 중에 지키는 자에 대해서는 22:7에 반복되었다. 요한은 복 받을 세 무리를 언급한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 읽는 자의 원어 호 아나기노스콘(o` avnaginw,skwn the reading)은 단수 관사를 가진 분사이다. 틀림없이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이 회중들에게 공적으로 성경을 읽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4절)에 계시록이 회중들에게 공적으로 낭독될 것을 예상하고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유대 회당에서 매 안식일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었다. 회당에서는 회중가운데 칠 명의 평신도가 성서 낭독을 하게 되어 있었다. 기독교 안에서도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풍속을 받아들여 성경낭독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출 24:7; 느 8:1-3). 성경을 회당에서 읽는 것에 관한 신약에서 최초 언급은 누가가 했다(눅 4:16; 행 13:15; 15:21). 청중들에게 성경을 봉독(奉讀)하는 교회 지도자는 점차적으로 공식적인 직분이 되었다. 예언을 읽는 자가 받을 축복은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둘째, 요한계시록을 듣는 자들(복수)에게 복이 있다. 예언서를 공적으로 읽을 때에 그것을 듣는 회중들이다. 듣는 자들의 원어 호이 아쿠온테스(oi` avkou,ontej the hearing)는 복수 관사를 가진 분사이다. 주격이 사용되어 청중들이 이해하면서 듣는 것을 뜻하며 계시록이 원래 이해되도록 쓰였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읽는 것을 이해하면서 들을 때에 비로소 지킨다는 말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을 받는다. 복수 정관사 호이(oi` the)는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 두 분사를 함께 수식하고 있다. 지키는 자의 헬라어 호이 테룬테스(oi` throu/ntej the keeping)는 분사로서 그 뜻은 계속 주목하여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2:4에는 계명을 지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언서의 내용을 전적으로 믿고 계속 순종하는 응답의 생활을 일컫는다. 지키지 아니하면 읽고 듣는 것은 무용지물이다. 읽는 자들은 회중을 이해시켜야 하며, 듣는 자들은 예언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이해하고 그 기별을 받아들여 지키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권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고 하셨다. 그분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였다.
때가 가까움이라. 이 구절은 정말로 주목할 만하다. 성경의 마지막 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움을 지적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란 헬라어 카이로스(kairo.j time)로 시기, 특별한 일을 하기로 의도된 일정 기간의 때를 의미한다. 속히 될 일이 성취되는 때이다. 때가 가깝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는 자들은 행복이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의 근원은 마가복음 13:29이며 거기에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다. 또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 13:33)고 하셨다. 그 분이 승천하신 후 초대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처럼 재림의 생생한 기대 속에서 살았으며 재림은 각 시대의 소망이 되었다.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3절의 서문이 끝나고 요한계시록은 실제로 4절부터 시작된다. 서문에서 책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던 요한은 4절부터는 책의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했다. 4-8절은 독특한 문학적 양식을 취하고 있다. 요한이 그 부분을 삼행의 삼연으로 기술한 것이다. 요한은 4, 5절에서 일곱 교회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 후, 5절 후반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6절까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찬미 형식의 기원을 했다. 그리고는 7절에서 낭독자가 낭독하자 듣는 자가 “그러하리라 아멘”하고 응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8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으로 끝맺었다.
4, 5절에 분리의 개념을 가진 전치사 아포(avpo. from)로 시작되는 세 개의 구절은 요한이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구분하는데 사용했다. 그래서 아포는 성삼위(聖三位) 한 명칭마다 따른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원전에는 편지하노니 라는 동사가 없다. 이와 같은 요한의 어투(語套)는 사도 바울이 그의 편지서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다(고전 1:1-2; 고후 1:1; 갈 1:1-2; 빌 1:1; 살전 1:1; 살후 1:1). 아시아는 오늘날 넓은 아시아 대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이 행정구역으로 관할했던 아시아 지방을 가리킨다.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 곧 현재 터키 공화국 안에 위치한 실제적으로 있었던 교회들이다. 요한이 원문에 정관사를 붙여 “그 일곱 교회”(tai/j e`pta. evkklhsi,aij the seven churches)라고 한 것은 11절에서 예수님이 지정해 주신 교회를 예기(proleptically)하였기 때문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에 책이 일곱 교회에 회람되도록 의도한 회람 편지인 것이 분명하다. 그가 일곱 개의 서신을 각각 하나씩 보낸 것이 아니라 계시록 전체를 한 편지로 묶어 보낸 것이다. 그 당시 아시아 지방에는 일곱 교회 외에도 성경에 골로새 교회(골 1:2; 2:1), 히에라볼리 교회(골 4:13), 드로아 교회(행 20:5), 밀레도 교회(행 20:17)가 더 있은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그나시우스(Ignatius)의 편지에 언급된 마그네시아(Magnesia) 교회, 트랄레스(Tralles) 교회 등도 있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왜 그 일곱 교회만을 선택하셨을까? 이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 중 두 가지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 선택된 당대의 일곱 교회들은 각 시대를 통해 존재할 교회의 형편과 상태를 전형적으로 상징하기에 아주 적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밀리건은 “이 일곱 교회들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있을 세상 모든 나라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였다. 둘째, 요한계시록이 각 교회에 회람될 것임으로 그 당시 에베소로부터 북상하면서 이어지던 대순환 도로를 고려하여 일곱 교회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일곱 교회는 로마 정부가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한 우편 로를 한 바퀴 도는 과정에 있는 도시들인 것은 분명하다. 히에라볼리와 골로새는 라오디게아 가까이 위치해 있었고 마그네시아와 밀레도는 에베소에 인접하여 있었다. 일곱 교회가 있는 도시들이 약 30-40마일정도 간격을 두고 위치해 있었으며 그 당시 인구가 가장 많고 부유하며 영향력 있는 지역을 한데 묶는 대순환 도로상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하여 일곱 교회에 전달된 편지가 쉽게 그 주변에도 회람이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 나오는 일곱 교회는 요한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택하셨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과 전체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주님께서 요한이 잘 알고 있는 일곱 교회를 선정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전 역사를 통해 이어갈 교회의 정황을 상징하여 편지를 쓰게 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1세기에 살았던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기별은 당대의 성도들이나 교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틀림없다. 그 기별은 교회 전체를 위한 것이요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기별인 것이다. 그것은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2:7, 11, 17, 29; 3:6, 13, 22)라는 말을 보아서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마치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의 모든 사도 바울의 서신들이 그 당대의 개인이나 교회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이 구절이 비록 원어의 정동사와 분사가 문법적으로 부자연스럽게 결합되었다 할지라도 요한이 전달하고자하는 의도는 명확하다. 그는 1:8과 4:8에서도 이 구절을 사용했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도 계시고의 원어 호 온(o` w'n the one who is)은 영원히 자존(自存)하신다는 뜻으로 출애굽기 3:14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로 밝히신 것에서 따온 문구이다. 요한은 아포(avpo from) 뒤에 관사 있는 주격 분사(o` w'n)를 사용했다. 전에도 계셨고 라는 문구의 헬라어 호 엔(o` h=n the one who was)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임을 뜻한다(시 90:2). 엔(h=n)은 분사가 아니다. 장차 올 자 라는 문구의 원어 호 에르코메노스(o` evrco,menoj the coming)는 현재분사의 미래적 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이 동행하실 것을 가리킨다. 6:16에 나오는 재림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할 “보좌에 앉으신 이”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7:15; 21:5). 예수님은 가야바에게 “권능의 우편에 앉아”(마 26:64)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 문구는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 편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전에도 구원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현재에도 구원의 일을 행하시며 미래에도 확실한 보증을 주시는 분이시요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삼위 하나님을 보통 성령이라 일컫는데 4절에서 요한이 그분을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나타낸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이란 숫자가 54회나 나타난다. 일곱 교회(4절), 일곱 금 촛대(12, 20절), 일곱 별(16, 20절), 일곱 인(5:1), 일곱 나팔(8:2), 일곱 재앙(15:1) 등등이다. 일곱의 숫자는 완성과 완전을 뜻한다. 일곱 영은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성령의 위치는 보좌 앞이다(4:5). 성령은 일곱 영으로뿐 아니라 일곱 등불(4:5), 어린양의 일곱 눈(5:6)으로 묘사되었다. 어떤 이들은 일곱 영을 천사적인 존재로 보고 있지만 문맥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이전 문구가 아버지 하나님을, 이후 문구가 아들 하나님에 대해 나오므로 요한은 성령을 언급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루려고 의도하였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곱 영(tw/n e`pta. pneuma,twn the seven spirits)이라고 복수로 표시된 것은 3: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곱은 그분의 완전하시고 충만한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다. 교회를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일곱 가지 활동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사 11:2). 이 일곱 가지 은사는 다양한 성령의 역할을 함축(含蓄)하며(고전 12:4-11), 요한이 일곱 영의 개념을 끌어온 출처이기도 하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일곱 영이란 숫자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영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1:5-6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밝히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는 모두 구약에 예언된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주요한 주제는 미래적 사건이라기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를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세 가지 위대한 칭호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첫째,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시다. 둘째,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신 자이다. 셋째,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시다. 1:5b-6은 요한계시록에서 처음 나오는 찬미이다. 요한은 관점을 너희에서 우리로 옮겨 예수 그리스도께 송영(誦詠)을 드렸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충성된 증인(o` ma,rtuj o` pisto,j the witness faithful)이란 문구는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분이란 뜻이다. 증인(證人)의 헬라어 호 마르투스(o` ma,rtuj the witness)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증인과 순교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신실한 증인의 생애를 사셨다(요 3:11, 32-33; 8:13-14). 그분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요 18:37)라고 하셨다.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중에 제일 먼저 부활하신 분이란 뜻이 아니라 생사의 통치권을 가지신 그분은 모든 죽은 의인들이 부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 먼저 나시고의 호 프로토토코스(o` prwto,tokoj the firstborn)는 맏아들이라는 뜻이며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즉 그분께서 장자권(長子權), 제사장권(祭司長權), 왕권(王權) 등의 권세를 가지신 것을 가리킨다. 이 문구는 다윗을 여호와의 장자로 표현한 시편 89:27에서 따온 표현이다. 거기에서 시편 기자는 “내가 또 그를 장자로 삼고 세상 왕들에게 지존자가 되게 하며”라고 예언했다. 이 시편 구절은 유대인 학자들이 메시야가 오실 것에 적용하고 해석하여 온 구절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 31:9)고 하셨고,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고 하셨을 때에 그분의 통치권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골 1:15), 또는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에서 먼저 나신이시니”(골 1:18) 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우주의 통치권을 가진 권세 있는 자란 의미에서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권세와 통치권을 의미한다. 죽은 자로부터 먼저 났다는 말은 시간적 의미가 아니요 부활의 근거에서 그러하다. 시간적으로 그분의 부활은 분명히 첫째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보다 먼저 부활한 자들이 있었다. 모세는 예수님 부활하기 1,400여 년 전에 부활하였고 예수님 당시 하늘에서 내려와 잠시 변화산에 나타난 일이 있다(마 17:1-8).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오랫 동안 함께 하늘에 있었다. 모세에게 부활이 허락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고전 15:17-18).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부활한 것(눅 7:11-17), 야이로의 딸이 부활한 것(막 5:21-43), 그리고 나사로가 부활한 것(요 11장) 등은 모두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재림 때에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만 부활할 것이다(고전 15:22 살전 4:16). 의인들의 모든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덕분으로 얻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다. 바울도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였다(고전 15:20-23).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활시킨 유일한 분이시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수장(首長)이 된다는 것은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승리로 인류의 합법적인 통치자가 되셨다(골 1:20; 2:15). 그리고 그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다(17:14; 19:1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 인사는 초대 교회에 보통 쓰이던 어투(語套)로서 편지의 서두에 사용됐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벧전 1:2 벧후 1:2). 은혜(恩惠)의 헬라어 카리스(ca,rij grace)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다(엡 2:4-5). 평강(平康)의 헬라어 에이레네(eivrh,nh peace)는 평화라는 뜻이며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결실이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살전 5:23; 히 13:20; 고후 13:11). 요한은 은혜와 평강이 아버지와 성령(4절, 일곱 영)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독자들에게 있기를 축원하였다. 사실 원문에는 있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는 동사는 없다. 주목할 것은 성경에 은혜와 평강은 그 순서를 지켜 결코 평강과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1:3).
우리를 사랑하사(tw/| avgaph,santi h`ma/j). 요한은 갑자기 관점을 바꾸어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우리를 의미하는 헬라어헤마스(h`ma/j)는에고(Vegw,)의 제1인칭 대명사의 복수 대격이고토(tw/|)는 여격 단수 관사이다. 사랑하사의 헬라어아가페산티(avgaph,santithe loving)의 동사시제가 관사(tw/|the) 있는 현재 분사의 여격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우리를 사랑할 뿐 아니라 영원히 계속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우리를 구속해주신 사랑을 가리킨다(벧전 1:18-19; 요일 1:7, 9). 그의 피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흘린 희생의 피 곧 그분의 생명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하셨다.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의 형벌을 면해주시며 죄의 세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신 것을 의미한다. 흠정역에는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신 분에게”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자유롭게 했다 혹은 해방했다는 말이 맞다. 해방하시고의 헬라어 루산티(lou,santi having loosed)는 루오(λύω)의 제1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과거에 있어서 완성된 행위를 나타낸다. 그분은 과거 특별한 시점에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단번에 벗어나게 하셨지만 항상 우리를 사랑하는 해방자가 되신다는 뜻이다(롬 6:16-18, 21-22).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tw/| Qew/| kai. patri. auvtou/ to the God and Father of him)에서 토(tw/|)는 여격 단수 관사이고 아우투(auvtou)는 속격 대명사이다. 요한은 데오(Qew/|)에 정관사를 붙여 성부(聖父) 하나님을 성자(聖子)와 성령(聖靈)과 구별했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아우투(auvtou/ of him)는 데오(Qew/| God)와 파트리(patri Father)에 모두 적용되어 “그의 하나님 즉 그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라 불렀다(마 27:46; 요 20:17).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삼으신의 헬라어 에포이에센(evpoi,hsen made)의 과거시제는 분사의 구조가 변화한 것으로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파격적인 구문임에 틀림없다. 문맥의 흐름을 볼 때에 요한은 동사의 시제를 현재분사 아가페산티(avgaph,santi 사랑하사)와 부정과거 분사 루산티(lou,santi 해방하시고)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에포이에센(evpoi,hsen)의 과거시제 대신에 포이에산티(ποιήσαντι)의 부정과거 분사를 사용했어야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였다(출 19:5-6).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했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다(벧전 2:9).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해방된 자들이 모이는 교회를 나라로 삼으시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래드(George Eldon Ladd)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라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백성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통치에 참여해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왕국은 제사장들로 구성된다.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사 61:6)라고 하였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자이다. 각 그리스도인들은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사장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히 4:15-16).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현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모두 제사장들로서 그들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니며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빌 3:20).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밖에 있는 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로 언급되었다.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에게의 원어 아우토(auvtw/| to hi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을 이해할 때에 찬양의 노래를 발하게 된다. 다함이 없는 영광과 구원의 능력이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를 찬양할 것이다. 요한의 찬미는 영광과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면서 마쳐졌다. 성경에 그리스도께 드리는 이와 같은 찬송은 매우 다양한 표현으로 나온다(5:13; 7:10 딤후 4:18 벧전 4:11 벧후 3:18 히 13:21). 사실 원문에는 있기를 원하노라고 기원하는 동사는 없다.
4-6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요한이 삼인조(trinity) 형식을 취하여 기술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묘사하고,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신원에 대해서도 세 가지 곧 충성된 증인, 먼저 나신 자, 임금들의 수장으로 표현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도 세 가지 곧 우리를 사랑하사 죄에서 해방하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다.
1:7-8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행하신 일을 언급한 후 그분이 앞으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언명하여 계시록의 중심주제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재림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위엄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서론 부분의 결론으로 삼았다. 재림은 이 세상 역사의 종결이요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책의 서론과 결론에서 잘 제시되고 있다(1:3, 7-8; 22:12-13). 스트랜드는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두 가지로 제시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고(1:7-8), 다른 하나는 항상 계심(ever present)이다(1:17-18). 7절의 인용 근원은 다니엘 7:13과 스가랴 12:10-14로서 내용이 잘 결합되어 표현되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볼지어다(ivdou.behold)는 매우 감동적인 사실을 언급하기 전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쓴 단어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하신 약속의 반복이다(마 24:30). 그때 감람산에서 그 약속을 들었던 요한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천사가 나타나 “너희가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 했을 때에도 그 음성을 들었다(행 1:11).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60여 년간 이와 같은 약속을 마음에 간직한 채 주님 만날 재림을 학수고대했었다. 그는 재림의 확실성을 가지고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장중하게 선포하였다. 나중에 22:20에서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구름을 타고의 원문 메타 톤 네펠론(meta. tw/n nefelw/n름with the clouds)은 “구름과 함께” 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구름은 구약에서 신적(神的)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시 104:3 사 19:1).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셨다. 감람산에서 설교하실 때에,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하셨으며, 가야바 법정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라고 하셨다. 그분은 승천하실 때에 구름을 타고 가신 것처럼(행 1:9) 재림하실 때에도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에서 동사 에르케타이(e;rcetaihe comes)가 미래시제가 아닌 현재시제인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요한은 현재시제의 미래적 용법을 사용한 것이다. 요한은 미래의 행위가 벌써 실현되어진 것처럼 현재시제로 재림의 확실성과 임박성을 강조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은 실로 가시적(可視的)이 될 것이다(마 24:30 막 13:26).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찌른의 원어엑세켄테산(evxeke,nthsan.pierced)은 본문과 요한복음 19:37에서만 나온다. 두 군데가 모두 스가랴 12:10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구약을 잘 아는 같은 기자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나타내는 내부적인 증거이다. 찌른 자들은 누구인가? 로마 병정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은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됐다(요 19:31-37). 특별히 그분을 찌른 자들이 부활하여 예수님 오실 때에 재림의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찌른 자에는 예수님을 죽일 때에 관여한 상당한 책임이 있던 가야바, 헤롯, 로마병정 등이 포함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 26:64)라고 하셨다. 다니엘 12:1-2에 마지막 때에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며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다. 첫째 부활은 의인들의 부활이므로(20:6) 여기서의 언급은 특별 부활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일이다.그들 중 악인들은 잠시 부활하여 예수 재림의 광경을 목격한 후 둘째 부활 때까지 또 잠을 잘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고 죽은 자들은 영화롭게 되어서 무덤에서 나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평화의 언약을 듣는다. 또한 그를 찌른 자(1:7),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민을 조롱한 자,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 백성에 대하여 심한 반대를 일으켰던 자들이 일어나 그리스도를 그의 영광 가운데 보게 될 것이요 그 충성되고 순종한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래드(George Eldon Ladd)는 그를 찌른 자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냉담과 적대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을 가리키는 것이란 견해를 제시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모든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준비되지 못한 모든 족속이 재림으로 인해 가해지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애통할 것이다. 애곡하리니 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악인들은 그 날이 가장 슬프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스가랴 12:12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 감탄사, 그러하리라 아멘에서 그러하리라의 나이(nai, yes)는 헬라어이고 아멘(avmh,n amen)은 히브리어이다. 아멘은 진실, 충성, 또는 그렇게 되기를 동의한다는 뜻이다. 긍정의 헬라어와 히브리어가 연합된 말이다. 요한은 그러하리라(nai, yes)를 계시록에서 이곳 외에 세 번 더 사용했다(14:13; 16:7; 22:20). 22:20에 한국어 번역에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요한이 어떤 경우에 아멘을 사용했는가? 첫째, 찬양을 마칠 때 아멘 했다(1:6; 7:12). 둘째, 앞서 말한 자의 것을 동의할 때 아멘 했다(5:14; 7:12; 19:4). 셋째, 자기가 한 말에 엄숙한 긍정을 하며 동의를 유도(誘導)할 때 아멘이라 했다(1:7 22:20). 넷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켜 아멘이라 하였다(3:14).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신 것이다. 주 하나님의 원어 쿠리오스 호 데오스(Ku,rioj( o` θεός Lord God)는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아들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의견이 갈린다. 주(主)의 헬라어 쿠리오스(Ku,rioj Lord)란 용어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되지만(11:8; 22:20)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도 주 하나님이 사용되었다(눅 1:32 계 21:22).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란 구절이 이미 4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 표현한 것으로 정확하게 이곳과 평행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들 하나님이라고 보는 자들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VEgw, eivmi to. A kai. to. W I am the A and the W)란 구절로 확실하게 판명된다고 한다. “알파와 오메가”란 문구의 출처는 이사야 44:6에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고 한 표현이다. 아들 하나님께서 1:17과 2:8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셨고, 21:6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셨으며, 22:13에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이 점을 근거로 하여 렌스키(R. C. Lenski)는 여기에 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알파(A)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째 글자이고 오메가(Ω)는 그 끝 글자를 일컬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적으로 영원무궁하고 동시에 시종여일하여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에고 에미(VEgw, eivmi I am)는 그분의 자존하심을 의미한다.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전능한 자란 만물을 장악하시고 지배 통솔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그분의 권세를 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 전능(全能)한 자란 단어의 헬라어 호 판토크라토르(o` pantokra,twr the Almighty)는 신약에 모두 열 번 사용되었는데 고후 6:18 외에 아홉 번은 모두 계시록에 나온다(1:8; 4:8; 11:17; 15:3; 16:7, 14; 19:6, 15; 21:22). 아들 하나님을 19:6에서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로 호칭하였고, 21:22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호칭했다. 요한은 서론 부분(1-7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들어낸 후에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알파와 오메가이신 전능한 하나님을 언급하여 서론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요한계시록 서론(1-8절)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계시록의 저자로 나타내시고, 2절에서 증거로 나타내시며, 3절에서 재림의 때와 연관하여 나타내시며, 5절에는 충성된 증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나신 자로서 임금들의 수장(首長)이시고 우리를 그의 피로 죄에서 해방시키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6절에서 아버지를 위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그리고 7절에서는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는 장엄하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확실히 서론의 중심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틀림없다.
이제 책의 서론이 끝나고 9절부터 본론이 시작된다. 파도소리로 둘러싸인 황량한 밧모 섬에서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 중에 승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분은 요한에게 확실한 미래를 열어 보여주셨고 요한은 시청각으로 체험하여 그것을 전달했다. 계시록에는 요한이 본 총 여덟 개의 계시가 나오는데 그 중에 첫 번째 계시가 9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재앙 등에 관한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각각 도입부 계시가 먼저 주어졌다. 스트랜드는 요한계시록에 모두 성전을 배경으로 한 여덟 개의 도입부 계시가 있는 것으로 나열(羅列)하였다. 리처드 M. 데이빗슨과 존 폴린은 일곱 개의 도입부 계시를 열거했다(1:9-20; 4--5; 8:2-5; 11:19; 15:5-8; 19:1-10; 21:2-8). 스트랜드와 이들이 서로 의견이 갈린 부분은 16:18-17:3a 부분이다. 스트랜드는 17, 18장을 계시로 구별하면서 16:18--17:3a 부분을 성전을 배경으로 한 도입부 계시로 분류했으나, 폴린은 17, 18장을 15, 16장의 일곱 재앙을 한층 더 상세하게 기술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스트랜드가 주장한 여덟 개의 도입부 계시 중에 첫 번째 것(1:10b-20)은 지상의 교회들을 소개하는 것이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4:1--5:14; 8:2-6; 11:19; 15:1--16:1; 16:18--17:3a; 19:1-10)는 하늘 성소의 장면을 소개하며, 여덟 번째(21:5-11a)는 다시 지상의 것 곧 새 예루살렘과 새 땅에 관한 것의 소개이다. 첫 번째 도입부 계시는 2,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기별 직전에 준 계시이다. 그 내용은 지상의 하나님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돌보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도입부 계시는 요한의 상황(9절), 계시받기 시작한 날(10절), 계시 받은 상태(10-12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12-20절)으로 구성되었다.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9-11절의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네가 본 것을 기록하여 교회들에 전하라고 위임해준 것과 또한 요한이 계시 받을 때의 환경을 묘사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요한은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나 요한(VEgw. VIwa,nnhj I John)이라 하여 가명을 사용하지 않고 본명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 당시 요한은 교회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가 본 계시들의 기록을 신뢰할 만하였다. 그는 1절에서 “그 종”, 2, 3절에서 단순히 “요한”이라고 한 것을 9절에서 “나 요한”이라고 칭하므로 앞 뒤 부분을 모순 없이 서로 연결시켰다. 이는 마치 다니엘이 “나 다니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것과 같다(단 8:15, 27; 9:2). 다니엘서 후반부(10--12장)와 요한의 첫 계시(1:12-20)를 비교해 볼 때에 계시록은 다니엘서 결론 부분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은 다니엘서를 바탕으로 구축(構築)된 것이 틀림없다. 그는 더욱 너희 형제(.o` avdelfo.j u`mw/n the brother of you)요 라고 말하므로 그 동질성을 강조하여 자신이 아시아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속했음을 강조했다. 형제라는 말에는 자신이 그들의 형편과 처지와 그들의 언어를 잘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임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우애를 나누는 아름다운 용어이다. 그가 당하는 환난과 참음과 그가 속한 나라가 예수의(evn VIhsou/ in Jesus)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며 거기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냈다. 환난의 헬라어 들립프세이(qli,yei affliction)는 본래 압력이라는 뜻으로서 박해로 인한 중압감(重壓感)을 가리킨다(막 4:17; 13:19; 요 16:33 행 14:22). 나라(國)의 헬라어 바실레이아(basilei,a kingdom)는 은혜의 나라를 가리킨다(눅 12:32; 22:29; 약 2:5 살전 2:12 살후 1:5). 참음의 휘포모네(u`pomonh/| endurance)는 문자적으로는 “...아래 머문다”라는 뜻으로 어려운 상황 아래서도 용기를 갖고 계속 견디면서 환난을 극복해 나가는 기개(氣槪) 있는 적극적 인내를 가리킨다(14:12 롬 2:7).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마 24:13)고 하였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하였다. 또한 그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딤후 2:12) 하였다. 동참의 원어 슁코이노노스(sugkoinwno.j co-sharer) 라는 단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9:23에 이미 사용한 용어로서 “함께 받는 자” 라는 뜻이다. 요한은 이 용어를 사용하여 혼자서만 박해로 고통당하고 있지 않음을 시사했다. 원전에는 “형제”와 “동참자”가 하나의 관사 호(o` the)를 가지고 있다. 또한 “환난”과 “나라”에도 하나의 관사 테(th/| the)가 사용되었다. 요한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장로였으며 자신을 “장로인 나는”(요이 1:1 요삼 1:1) 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동참자였다. 동참하는 자란 문구는 복음 때문에 로마의 죄수로 유형(流刑)된 요한 자신의 입장이 그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성도들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어려운 사정과 경험을 아는 자만이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이 경험한 환난은 역사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할 환난을 예표한다. 요한이 동참한 예수의 환난은 무엇인가? 그가 황제숭배를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 때문에 심문받기 위해 로마로 소환됐을 때의 일을 사도행적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졌으나 주님께서는 마치 풀무불 속의 세 히브리인들을 구해 주셨듯이 그의 신실한 종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다.” 그 결과 요한은 추방형을 당해 그 당시 유배지의 하나이었던 밧모 섬으로 정배(定配)된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 16:33)라는 주님의 말씀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는 바울의 말로 보아 환난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야 할 몫인 것이 틀림없다. 환난은 사단의 공격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님께서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디아(διὰon account of)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to.n lo,gonthe word)과 예수의 증언이라는 대격 구를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자신이 계시를 받아 기록할 때에 밧모 섬에 정배되어 있던 이유를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했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밧모섬으로 추방당했다.요한은 같은 문구로 2절에서는 그가 받은 계시의 내용을 묘사하지만 9절에서는 추방당한 원인을 말한다. 비록 개역 개정판이 예수의 증언(th.n marturi,an VIhsou/ Cristouthe witness of Jesus Christ)을 예수를 증언하였다고 목적격 속격으로 번역하고 여러 주석가들이 같은 노선에 있지만,판들(Gerhard Pfandl)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두 문구를 주격적 속격 곧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증거로 번역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그는 그 구절이 요한이 추방당한 원인이었던 설교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증거는 넓은 의미의 복음 곧 예수님의 생애와 사업의 계시를 가리킨다.
도미시안(Domitian, AD 81-96) 황제의 가혹한 박해 시대에 요한을 비롯한 초기 성도들은 황제를 “주와 신”(dominus and deus)으로 숭배하기를 거절하므로 환난을 당하고 있었다. 도미시안은 베스파시안 황제의 둘째 아들로 타이터스 황제의 동생이었다. 그는 탐하던 형의 왕위를 양위 받아 전제 군주가 된 자신을 주와 신으로 섬기기를 거절했던 그의 조카 클레멘스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할 정도로 폭군이었다.말년에는 주변의 사람들을 의심하여 마구 죽였고 심지어 왕후까지 살해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후가 그의 종을 시켜 AD 96년 9월 18일 황제를 침실에서 사살(射殺)해 버렸다.
요한은 AD 10년경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 때 태어나 여러 황제들의 전횡을 목격하고 체험했다. 요한은 하나님께 부동의 충성심으로 그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증거하다가 도미시안 황제 제 14년에 유배형을 선고 받아 밧모 섬으로 귀양 가서 거기 갇혔다. 로마 당국은 그가 그의 신앙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도록 밧모 섬에 유배시킨 것이다. 밧모 섬은 1세기경 로마제국이 감옥소로 사용하였던 초승달 모양의 작은 바위섬이다. 이 울퉁불퉁한 바위섬은 길이 16km, 폭 9.6km로 아시아 해변의 남서쪽, 에베소 동남에 위치한, 사모스(Samos) 섬을 향하는 에게 해(Aegean Sea) 가운데 위치해 있다. 천연적으로 좋은 항구로서 로마에서 에베소로 가는 마지막 기항지였다. 그 당시 밧모 섬에 유형당한 정치범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착고에 채워져 감시병의 채찍에 맞으며 중노동을 했고 음식은 보잘 것 없었으며 캄캄한 감방에서 지냈다. 엘렌 G. 화잇은 “그의 원수들 생각에는 그가 거기에서 힘들고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거기에 있을 때에도 친구를 사귀고 회심자들을 얻었다”고 하였다. 요한이 돌아갈 기약도 없이 불모의 땅 밧모 섬의 채석장(採石場)에서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며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어느 한 안식일에 나타나 그에게 계시를 주셨으며 그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전달하라고 명하셨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시안이 죽고 네르바(Nerve, AD 96-97)가 즉위하여 정치범을 사면할 때에 요한도 석방되어 그의 본 고향인 에베소로 돌아왔다 한다. 이에 대해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가 도미시안 황제 때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는 데 대하여는 초대교회의 전승이 일치하고 있다. 터툴리안은 ‘사도 요한은 섬에 유배되었다’(데. 푸레스크리프티오네 36 역주 - 이단에 관한 규정)고 말하였고, 오리게네스는 ‘전승에 의하면 로마 황제는 요한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였기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 보냈다’(마태의 설교)고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라멘트는 말한다. ‘압정자가 죽은 후에 요한은 밧모 섬에서 에베소로 돌아왔다’(부자의 구원 42). 제롬은 말하기를 요한은 네로 황제가 죽은 지 14년경에 유형을 당했고 도미시안 황제가 죽자 석방되었다(저명한 인물에 관하여 9). 그러니까 요한은 주후 94년에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가 96년에 석방된 것이 된다.”
요한은 석방된 후에 에베소에서 지내며 인접해 있는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고 돌보았는데 그가 노경에 이르러 너무나 허약하여 걷기조차 불가능했을 때에 사람들이 그를 교회에 옮겨놓으면 “형제들아 피차 사랑하라”고 훈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트라얀(Trajan, AD 98-117) 황제 시대 때 노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다.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에.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주님을 뵈었다고 하였다. 주의 날에(evn th/| Kuriakh/| h`me,ra|on the Lord's day)란 표현은 성경에서 이곳에 오직 단 한 번 나온다. 주의(Kuriakh/| Lord's)는 여격의 형용사로 “주님께 속한”이란 뜻이다. 어느 날이 주님께 속한 날 곧 주의 날인가? 스테파노비치는 주의 날이 의미하는 다섯 가지의 가능한 제안을 요약 제시했다. (1) 주일의 첫째 날 일요일을 의미한다. (2) 주일(the weekly Sunday)이라기보다 오히려 부활 주일(Easter Sunday)을 말한다. (3) 황제의 날을 가리킨다. (4) 주일의 일곱째 날 안식일을 의미한다. (5) 주의 종말론적 날을 가리킨다. 이 다섯 가지 주장 중에 주의 날이 일주일의 첫 날 일요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는 것과 일곱째 날 토요일을 가리키고 있다는 주장을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일주일의 첫 날을 “안식 후 첫날”,“그 주간의 첫날”, “매주 첫날”이라 했지 어디에도 주의 날이라 하지 않았다(마 28:1 요 20:1, 19 행 20:7 고전 16:2). 그러므로 주의 날에 관한 규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제 칠일 안식일이 주(主)의 날이기 때문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이라는 말과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니라”(마 12:8 막 2:28 눅 6:5)고 하신 말씀에서 주의 날이 분명히 안식일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요한은 고도(孤島)에서 “여호와의 성일”(사 58:13)에 계시를 본 것이다. 요한이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은 그 당시 로마제국에서 황제를 주라고 부르며 숭배하기를 강요하던 황제숭배를 의식하여 대항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엘렌 G. 화잇은 “영광의 주님께서 유배당한 사도에게 나타나신 것은 안식일이었다. 요한은 그가 유대의 촌읍들과 도시들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던 때처럼 밧모 섬에서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하였다.
주의 날을 일요일로 보는 데는 모순이 따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사도 요한이 죽은 지 거의 1세기 후부터이기 때문이다. 그 최초의 언급은 2세기 말경에 나온 신약 외경서인 베드로 복음(Gospel According to Peter) 9:35에 나타나 있다.또한 일요일을 주의 날로 언급한 첫 교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ca. AD 190)이었다.그리고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시우스(Ignatius)도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9:1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미 안식일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주의 날을 위하여 산다고 했다.그러므로 안식일을 주님과 함께 규례대로 직접 지키던(눅 4:16) 사도 요한이 그 당시에 통용되지도 않았고 사용해도 이해하지도 못했을 주일이라는 일요일의 용어를 그의 회람 편지에 썼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므로 1:10의 주의 날은 일곱째 날 안식일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이 문구는 요한이 계시에 들어갈 때 사용한 관용구이다(4:2; 17:3; 21:10). 헬라어 원문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evgeno,mhn evn Pneu,mati I came to be in spirit)는 시제가 부정과거이며 사실 “내가 성령 안에서 있게 되었으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은 것이다. 요한이 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하는 무아의 지경에 들어가 마치 바울이 황홀한 중에 말씀을 받은 것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을 의미한다(행 11:5; 22:17-18).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은 파도소리와는 너무나 다른 나팔 같은 음성을 들은 것이다. 들으니의 원어 에쿠사(h;kousa I heard)는 시제가 부정과거로 단순하게 들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반포할 때 나타난 현상과 같은 것으로 그분의 임재를 나타낸 것이다(출 19:16). 예수님께서 장래 재림하실 때에도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것이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요한은 계시를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계시에서 본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아홉 번이나 받았다(1:11, 19; 2:1, 8, 12, 18; 3:1, 7, 14). 요한은 그 명령을 따라 파노라마와 같은 상징적 광경들을 아주 생생하게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다. 두루마리의 원어 비블리온(bibli,on scroll)은 주로 파피루스로 된 두루마리를 일컫는다(5:1; 6:14). 양 끝에 나무로 된 권봉을 달아 둘둘 말 수 있었으며, 왼 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펴면서 읽었다. 파피루스란 강가에서 자란 갈대의 얇은 껍질을 원료로 해서 만든 것이다. 성경시대의 일부 두루마리들은 양피지였으나 대부분 파피루스로 만든 것이었으며 주후 2세기까지 모든 문학작품들이 책에 쓰인 것이 아니라 파피루스로 된 두루마리에 쓰였다. 네가 보는 것의 헬라어 호 블레페이스(o`; ble,peij what you see)는 단수로서 요한이 이전에 본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로 보아 이 책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기자는 사도 요한인 것이 틀림없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원문에는 일곱 교회를 정확하게 한정해서 나오고 “등” 이라는 용어는 없다. 일곱 교회는 그 당시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소아시아에 위치한 교회들이었다. 여기에서 일곱 교회는 2, 3장에 나오는 편지의 순서에 따라 언급되었다.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2-20절까지는 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첫 번째 계시로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앞에 주어진 도입부 계시 장면이다. 그는 성령을 통해 지상의 교회들을 돌보시고 계시는 예수님과 조우(遭遇)했다. 그리스도께서 밧모 섬에 정배당한 노년에 처한 요한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 방문 오신 것이다.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나팔 같은 음성은 뒤에서 났다. 요한은 그 음성이 누구로부터 오는 것인지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켜 뒤로 돌아 보았다.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제일 먼저 일곱 금 촛대가 요한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곱 가지가 있는 촛대(출 25:31-37) 하나를 본 것이 아니고 등불 같은 일곱 개의 금 촛대(e`pta. lucni,aj seven lampstands)를 보았다(ei=don I saw). 촛대의 헬라어 루크니아(λυχνία)는 등불이나 등잔을 의미하는 것이지 성소에 있었던 일곱 가지 달린 등대를 가리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요한은 일곱 개의 촛대가 개별적으로 하나하나씩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이를 거니시고 계셨다(2:1). 그러므로 요한은 하늘 성소의 촛대를 본 것이 아니라 지상의 일곱 교회를 본 것이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20절). 촛대들이 금(크루사스 crusa/j golden)으로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아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시사(示唆)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것이 비록 아무리 연약하고 결함이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의 최고의 관심을 베푸시는 유일한 대상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촛대로 상징한 것은 교회의 주요한 기능이 흑암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임을 가리킨다(마 5:14-16 빌 2:15). 만일 교회가 세상에 빛을 전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1:13-16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은 13-16절에 구약에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몇 가지 표현을 빌려와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표현된 구절들은 2,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서신 서두마다 발신자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인자(人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1에서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고 했다. 요한은 촛대 사이 즉 지상의 교회를 두루 돌아다니시며 돌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복음서에서 자주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인자라는 칭호는 그분의 인간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자로 여러 번 지칭하셨다(마 8:20; 9:6; 10:23; 11:19 등). 인자 같은 이(o[moion u`iw/| avnqrw,pou like a son of man)란 문구는 14:14에 한 번 더 나오는데 다니엘 7:13에서 따온 표현이다. 두 경우 다 “인자” 라는 문구 앞에 “같은 이”란 용어가 있다. 키슬러(Herbert Kiesler)는 쿨만이 이 문구는 다니엘서에 인자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비밀스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뜻한다고 한 것과 찰스가 이것은 묵시록에 나오는 기술적 용어라고 한 것을 지적했다. 1:12-18은 인자와 관련하여 다니엘 7:9-13이나 혹은 10:5-12에서 직접 인유(引喩) 되었음이 틀림없다. 두 부분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묘사이며, 구조적 평행(Structural parallel)을 이루고 있다. 원전에는 인자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가 없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계시 중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교회를 위해 특별한 기별을 가지고 기별자로 오신 것이다. 14:14에 보면 예수님은 앉아 계시지만, 2:1에 의하면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고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비록 흠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니시는 곳이다. 그분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마 28:20)고 약속하셨다. AD 31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거의 64년 만에 그토록 뵙고 싶던 주님을 요한은 계시 중에 만난 것이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대제사장직과 왕권을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발에 끌리는 위엄스런 옷은 구약에서 대제사장이나 왕들이 입던 옷이다(출 28:4, 31; 29:5 레 16:4 삼상 24:4-5 겔 26:16). 가슴에 금띠는 대제사장이나 왕의 차림 중의 하나이다(출 28:6-8; 29:5). 이사야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배경삼아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고 하였다. 지금도 성실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이자 왕으로서 공의(公義)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다니엘 7:9에 나오는 성부 하나님의 표현과 같다. 흰 머리는 지혜와 위엄과 오랜 경험을 상징한다(욥 15:10 잠 16:31; 20: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무죄성(無罪性)보다 그분의 영원한 신성을 의미한다. 원전에는 14절 맨 앞에 데(de.́ and)가 있는데 그것은 14절 이후의 것이 13절에 뒤이어 첨가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요한은 14-16절까지 그의를 의미하는 헬라어 제3인칭 대명사 속격 아우투(auvtou/ of him)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그의 눈은 불꽃같고.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전지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그 눈은 횃불 같았다”(단 10:6)라는 다니엘서가 그 표현의 근원이다. 세상만사를 꿰뚫어보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눈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에 노여움의 눈초리(막 3:5)와 사랑의 눈초리(눅 22:61) 둘 다 가지셨지만 실로 그분의 눈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시는 불꽃같은 전지한 눈이었다. 이 상징은 재판장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눈이 불꽃같다는 문구는 2:18에 다시 언급되었다.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편재성(遍在性)을 상징하는 말이다. 요한은 다니엘 10:6에 나오는 “발은 빛난 놋과 같다”라는 표현에서 빌려왔다.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일에 아주 발 빠르게 움직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주석(朱錫)의 헬라어 칼코리바노(calkoliba,nw| brass)는 그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물질이다. 문맥으로 보아 광택 나는 금속임에 틀림없다. 성경시대의 주석은 사실상 청동(靑銅)이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은 이 표현을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겔 43:2) 라는 구절과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시 29:3)에서 따와 그리스도의 음성을 묘사했다. 요한은 외로운 밧모 섬에서 날마다 포효(咆哮)하는 장엄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그가 천변만화 하는 파도소리를 연상하며 주님의 장엄한 음성을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사 17:12). 이 표현은 14:2과 19:6에서 반복된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오른손은 아무도 빼앗을 수없는 그분께서 돌보시는 강한 힘을 상징하고(요 10:28), 일곱 별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상징한다(20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장중(掌中)에 두시고 친히 돌보고 계심을 의미한다. 아무리 교회나 지도자의 상황이 어렵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 지도자들과 교회를 장악(掌握)하시어 통치하고 계시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검은 군사력을 상징하는 공격무기이다. 검(劍)의 헬라어롬파이아(r`omfai,asword)는 마치 혀처럼 생긴 크고 긴 칼이다. 좌우에 날선 그와 같은 검이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심판장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모습을 상징한다(사 11:4; 49:2). 좌우에 날선 것은 그분의 결정이 날카로우며 예리한 것을 상징하고, 구약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악인을 심판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시 149:6).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악인들의 심판을 집행하신다(19:15, 21). 검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심판의 집행이 말씀으로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신다”(살후 2:8). 여기에서 언급한 검(劍)은 히브리서 4:12에서 말하는 검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은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는 것을 목격하였다(마 17:2). 요한은 또 다시 영광과 위엄 있는 그분의 얼굴을 뵌 것이다. 그분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시는 태양이시며(말 4:2)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이 영광의 빛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눈을 소경으로 만들었던 그와 같은 빛이다. 요한은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삿 5:31)라는 말을 기억했을 것이다.
1:17-18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주님을 뵙고 요한은 옛날 변화산에서 겪었던 것처럼(마 17:7) 예수님의 장엄한 모습에 너무나 크게 압도당해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력함을 깨닫고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성경에 하나님의 임재(臨在) 앞에 나아가는 보통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수 5:14 겔 1:28; 3:23; 43:3 단 8:17; 10:9-11). 부활의 주님을 만난 여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마 28:9).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을 때에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혔다. 베드로는 그만 능력의 주님께 완전히 압도당하여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절규하였다. 존경의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격려하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께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절하다시피 한 그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오른손은 그분께서 돌보시는 강한 힘을 상징하므로 오른손을 얹었다는 말은 요한에게 힘을 부여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음성은 요한이 과거에 여러 번 들었던 격려의 소리였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폭풍을 만나 사경에서 무서워 떨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마 14:27 막 6:50 요 6:20).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17-18절에서 요한에게 자기 자신의 신원을 네 가지로 밝히셨다. 그 첫 번째의 구절인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evgw, eivmi o` prw/toj kai. o` e;scatoj I am the first and the last)라는 표현은 계시록에 네 번 나오는데(1:17; 2:8; 21:6; 22:13), 이것은 이사야에서 인용된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의 호칭인 이 문구를 이사야 44:6과 48:12로부터 인용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이 구약의 여호와임을 자증(自證)하셨다. 이 문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이 바로 만물이 존재하는 원천과 기원이시며 만물의 완성과 종국이 되신다는 천명이다. 바울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힌 두 번째 구절로서 자신이 분명히 죽었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이심을 자증하는 말이다. 죽었었노라에 사용된 동사 에게노맨(evgeno,mhn I became)은 시제가 부정과거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킨다.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힌 세 번째 구절로서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제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 오지 않고, 다른 곳에 파생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특색 중의 하나이다(수 3:10 시 42:2 호 1:10).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힌 네 번째 구절로서 그분의 직무와 권위를 사망과 음부(tou/ qana,tou kai tou/ a[|dou the death and the hades)의 통치권을 가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망과 음부(陰府)라는 단어는 각각 정관사 투(tou/ the)를 가지고 있다. 사망이란 음부와 연관하여 이해해야 한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단을 이기시고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의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생명에 대한 주권을 갖고 계신다. 성경은 사망의 문을 언급하는데(시 9:13; 107:18),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문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20:14에 의하면 둘째 사망은 사망과 음부의 종말이다. 바울도 사망을 의인화(擬人化) 하여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고 하였다. 음부의 헬라어 하데스(a[dhς hades)는 보이지 않는 곳이란 뜻이며 죽은 사람이 있는 곳, 무덤, 악마의 거처를 상징하고 구약의 스올(Sheol)과 동일한 헬라어이지만 지옥을 의미하는 게헨나(γεέννα)와는 다른 표현이다. 게헨나는 계시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계시록에서 음부는 불 못에 던져질 악령의 세력을 상징한다(6:8; 20:13, 14). 열쇠는 관할의 권세 곧 통치권을 의미한다(마 16:19).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죽음과 음부로 보내는 권세와 거기서부터 도리어 사람을 구해내는 대권(大權)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심을 선포했을 때에 그 당시의 요한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살아서 영원히 함께 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지 않았겠는가!
1:19-20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9절은 지금까지의 결론이자 앞으로 펼칠 계시들의 출발점이다. 요한이 세 문구로 요한 계시록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또한 20절은 1-3장을 여는 열쇠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그러므로의 헬라어 운(ou=n therefore)은 앞에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하여 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부활하여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기 때문에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는 뜻이다. 기록의 목적은 “그의 종들” 곧 교회의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다(1절).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기록해야 할 내용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다. 첫째, 요한이 본 것이다. 본 것의 원어는 하 에이데스(a] ei=dej the things which you have seen)로 이미 1장에 포함되어 있는 계시를 가리킨다. 문맥적으로는 10-18절에 나오는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에 관한 것이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분의 사랑, 죄에서 해방시켜 주심, 재림, 교회와 지도자 및 신자들을 돌보고 계시는 그분의 사역에 관한 것이다. 둘째, 지금 있는 일이다. 헬라어 하 에이신(a] eivsi.ν the things which are)으로 그 당시 일곱 교회에 보내질 서신에 포함된 상황과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 하(a])는 중성 복수이고 에이신(eivsi.ν)은 복수동사인데 일곱 교회에 보내진 것을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다. 셋째, 장차 될 일이다. 원어 하 멜레이(a] me,llei the things which are about to)로 요한이 앞으로 더 보게 될 4-22장에 나오는 선악간의 대쟁투에 관한 계시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4:1에서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로 언급된 것이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 구절은 지금까지 나타난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되어 2, 3장의 해석에 길을 터놓았다. 요한이 본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는 일곱 별과 그분이 거니시고 있는 일곱 금 촛대에 관한 것이다. 오른손은 그분께서 돌보시는 강한 힘을 상징한다. 비밀이라는 헬라어 무쓰테리온(μυστήριον mystery)은 신비, 은밀한 일 혹은 인간 스스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를 의미하지만 두 가지 뜻에서 사용된다. 첫째, 알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전에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드러난 것을 의미한다. 문맥에서는 첫째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도 그런 관점에서 부활을 비밀이라 하였고(고전 15:51) 구원의 경륜을 비밀이라 했다(롬 16:25-26).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오른손의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밝히셨다. 사자(使者)의 앙겔로이(a;ggeloi messengers)는 교회의 지도자들 곧 요한 당시에 각 교회 감독들이고 장로들을 가리킨다.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을 일컬어 사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말 2:7)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성경에서 사자는 기별을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허다하다(마 11:10 막 1:2 눅 7:24, 27; 9:52 고후 12:7). 주님께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밝히셨다. 일곱 교회를 일곱 등불로 상징하고 그 사이를 거니시는 것은(2:1) 주님께서는 지상의 교회를 금처럼 귀중하게 여기시며 그분이 교회들을 장중에 두시고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돌보고 계시는 것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