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3년 11월 10일(금)
장소 : 서울시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선정릉은 선릉과 정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선릉宣陵 :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 (동원이강릉)
정릉靖陵 : 조선 11대 중종의 능 (단릉)
찾아가는길 : 선릉역(2호선,수인분당선)9번출구 에서 400m 직진 후 좌회전 50m
성종(成宗) 이야기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후 1494년(성종 25)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이야기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재세 : 1462년 음력 6월 25일 ~ 1530년 음력 8월 22일)는 본관이 파평인 영원부원군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세조 8)에 신창 관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창년(尹昌年)이다. 1473년(성종 4)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종2품)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이듬해인 1480년(성종 11)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당시 정계에 떠오르던 아버지 윤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다. 이에 성종은 ”다행히 어진 왕비를 찾아 마음이 평안하다.”고 흡족해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中宗) 이야기
중종(재세 : 1488년 음력 3월 5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 재위 : 1506년 음력 9월 2일 ~ 1544년 음력 11월 15일)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1488년(성종 19)에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에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고,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1506년 박원종이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연산군이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반정 세력들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유순,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정현왕후 윤씨)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창덕궁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창덕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기울었음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를 받들어 왕위에 올랐다.
중종은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새로운 개혁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내세워,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을 등용하였으나, 소격서 폐지, 위훈삭제 등 급진적인 정책이 큰 반발을 불러와 기묘사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 39)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릉宣陵(성종과 정현왕후)
정자각에서 왼쪽이 성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성종의 능
성종의 능 쪽에서 정현왕후의 능으로 가는 신로가 있는데 못가게 막아 놓았다.
장명등(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뜻의 석등)
무석인(갑옷을 입고 왕을 호위하는 무인 모습의 석물)
문석인(관복을 입고 왕을 보좌하는 문인 모습의 석물)
정현왕후의 능
정릉(중종)의 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