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은 작가의 책가방
낯선 세상을 당당하게 보여라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외 번역, 은행나무 펴냄, 2005년)
책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다시 읽고 싶은 책과 그러지 않아도 되는 책.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독자들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을 쓰고자 한다. 재미있고 신 나고 감동도 주는 책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다른 사람 작품을 읽고 감탄함과 동시에 좌절하고 컴퓨터 빈 화면을 노려보며 우울증에 빠진다. 그럴 때 가장 좋은 처방전은 지우더라도 무조건 쓰는 것이다. 세상에 내놓은 책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작가다.
이 책은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은 그걸로 부족하다. 홀딱 반했다. 내가 왜 이 책에 반했을까, 심지어 〈어린이와 문학〉에 이 방대한 책을 소개할 객기까지 부리고 있을까.
이 책은 ‘얼음과 불의 노래’라 는 전체 제목으로 5부까지 번역되 었다. 『왕좌의 게임 1・2』, 『왕들 의 전쟁 1・2』, 『성검의 폭풍 1・2』, 『까마귀의 향연 1・2』, 『드래곤과 의 춤1・2・3』 이것이 각 부에 해 당하는 제목이며, 5부까지 번역본으로 8,500 페이지가 넘는다. ‘왕좌의 게 임’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었으며 시즌 3까지 방영되었 다. 작가인 조지 R. R. 마틴은 이 책이 7부에서 끝을 맺을 것이라고 했다. 6 부는 앞으로 3년 이상 지난 다음에 나올 예정이며 7부는 6부가 나온 다음에야 기약할 수 있다. 사실 완간되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말이 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고 미완으로 남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쓰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묘한 매력이 넘친다.
이 책은 판타지 장편소설이다.
대륙을 통틀어 세븐 킹덤을 세우고 다스리던 타르가르옌 가문이 몰락한다. 타르가르옌 가문은 용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왕조가 몰락할 때 왕자와 공주 두 사람이 동쪽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타르가르옌 가문을 몰락시킨 바라테온 가문에 속한 로버트 바라테온이 세븐 킹덤즈를 다스리는 왕좌에 오른다.
로버트 바라테온은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북부 윈터펠에 있는 스타크 가문을 찾아와 성주인 네드에게 왕의 핸드를 맡긴다. 우리 식으로 바꾸자면 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네드 스타크에게는 자식이 여럿 있다. 아들 셋과 딸 둘, 그리고 서자인 존 스노우가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8천 년 전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던 커다란 늑대 변종, 다이어울프가 한 마리씩 있다. 네드가 딸 둘을 데리고 핸드 직책을 맡으러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둘째 아들 브랜든(혹은 브랜)이 탑에서 떨어져 불구가 된다.
브랜이 탑에서 떨어진 건 우연이 아니었다. 로버트 바라테온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는 왕비 세르세이 라니스터가 자기 쌍둥이 오빠인 자이메 라니스터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라니스터 가문에는 티리온이라는 막내가 있는데, 난쟁이에 곱추이지만 비상한 두뇌를 갖고 있다.
로버트 바라테온은 왕비가 낳은 자식들에 대해 의심을 품다 죽는데, 그때부터 세븐 킹덤은 혼란에 빠진다.
타르가르옌 가문에서 살아남은 비세리스 왕자와 대너리스 공주는 세븐 킹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특히 비세리스 왕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찾기 위해 여동생을 도트락 족에서 대장을 맡은 드로고에게 혼인시킨다. 그리고 드로고가 가진 힘으로 세븐 킹덤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지만 드로고는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사사건건 부딪히던 비세리스는 드로고의 명령으로 끓는 금을 뒤집어쓴 채 죽는다. 그리고 대너리스는 혼인 선물로 받은 드래곤 알 셋을 부화시킨다. 대너리스는 죽은 남편 대신 용 셋과 함께 자기 세력을 확장시킨다.
네드가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다음, 그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산사는 머리 색깔을 물들인 채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며, 브랜은 숲의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고, 아리아는 죽음으로 복수하기 위해 다면신을 섬기는 성전으로 들어선다. 큰 아들 롭은 전쟁 통에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서자인 존 스노우는 차가운 얼음 벽, ‘월’에서 나이트워치가 된다. ‘월’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막는 경계이며 세븐 킹덤에 속하길 원치 않는 자유민들도 월 너머에 산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질문한다.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냐고. 그럴 만하다. 이 책은 작은 장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마다 사람 이름으로 소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그 장에서는 소제목에 속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한 장에서는 그 사람이 지닌 모든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장점과 단점, 선과 악, 고민과 선택, 사소한 버릇부터 이루고자 하는 소망까지 잘 드러난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산만하게 보일 수 있으나 읽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사람이 전적으로 선하기만 하진 않고,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갈등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놈과 나쁜 놈을 대결시킬 것이 아니라 좋은 놈과 좋은 놈을 맞부딪치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말하자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읽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좋은 글이란다. 내가 쓰는 주인공 입장뿐만 아니라 반대쪽에 선 사람 입장도 다 알고 공감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이 그렇다. 각 장을 읽을 때는 그 장에 해당하는 인물에 빠져든다. 바로 다음 장에서 앞장에 나온 인물과 반대되는 행동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도대체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 헷갈린다.
인간들이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왕좌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세븐 킹덤을 보호하는 월 너머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바야흐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5부까지 몇몇 중심 인물들이 죽었다가 다시 ‘아더’라는 존재로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에서는 ‘아더’가 중심축이 될 것이다.
용이 등장하는 여러 판타지 소설에서는 인간이 용을 무찌르거나 다룬다. 용은 파괴해야 할 두려운 대상이었던 서양 민담을 계승하거나, 인간과 어울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타르가르옌 가문에서 살아남은 대너리스는 용 세 마리를 부화시켰다. 처음에 이 용들은 어깨에 앉을 정도로 작았지만 점점 커지며 사람도 불에 태워 잡아먹는다. 쉽게 길들여지지 않고 인간이 내세우는 도덕적 규범과 거리가 멀어, 내가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용을 그리고 있다.
자연이 지닌 폭발적인 두려움과 야생성을 용으로 잡아냈다면 다이어 울프나 늑대와 까마귀 같은 동물들 몸으로 들어가 동물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스킨체인저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등장한 판타지는 여기까지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빛나는 검 혹은 불타는 검이라고 불리는 전설 속 검을 사칭하는 검이 등장했으나 아직 진검은 나타나지 않았다. 잠든 자이언트들을 깨우고 얼음벽인 월을 무너뜨린다는 전설 속 조라문의 뿔나팔도 소문만 무성하다. 어쩌면 앞으로 그려질 이야기들은 무성한 소문을 정리하여 또 다른 세계를 펼쳐 놓을 것 같다. 가장 큰 의문은 전체 제목인 ‘얼음과 불의 노래’가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잘 모르는 사실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이해해!” 하고 강요할 수 없다. 학교 앞마당이든 한밤중 톰의 정원이든 작가는 모든 사실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낯선 세상을 독자에게 선포하듯 드러내는 힘, 이 힘만큼은 미치도록 닮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이 특별했다. 인물들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 인물들이 지닌 동기는 무엇인지, 용이나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 세상에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작가는 환히 알고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배신과 음모가 빈번해도 인물을 미워할 수 없는 힘, 이 이야기에서 가장 괴상한 인물로 그려지는 티리온 라니스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이 여러 인물 가운데 아리아를 응원한다. 스타크 가문에서 자란 아리아가 이 진흙탕 속에서 어떻게 씩씩하게 살아가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저앉지 않고 용감히 맞서며 자기가 할 일을 위해 차근차근 다가가는 아리아는 시력을 잃었다 되찾았으며 얼굴을 바꾸는 과정도 거쳐 다면신을 배우는 도제가 된다. 아리아가 어떤 모습으로 삶을 꾸려 갈지 궁금하다.
한 가지 흠으로 번역을 들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이 책에 잘못된 번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번역 오류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 책을 집어 들면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판타지 세계든 인물에 대한 관찰이든 묘사이든 당신을 사로잡고 흔들 테니까.
앞으로 남은 이야기가 완결되기를, 그래서 ‘얼음과 불의 노래’가 진정으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지를 알려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떤 작가가 만수무강하기를 이처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을까 싶다. 프로필 사진으로 보아하니 햄버거 다섯 개쯤은 한꺼번에 드실 것 같던데 건강 관리 잘해서 마무리하시길 바란다. 제발 끝까지 읽게 도와주시라, 조지!
김하은
더나은세상을꿈꾸는어린이책작가모임(더작가) 회원이며 추위를 많이 타는 동화작가이다. 올 겨 울 무지 춥다는데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아버지들 어머니들이 하루빨리 따뜻한 집으로 돌아 와 아이들과 살 맞대고 잠들기를 바란다. 그동안 쓴 책으로 『꼬리 달린 두꺼비, 껌벅이』, 『네 소원 은 뭐야?』, 『얼쑤 좋다, 우리 놀이』, 『한식, 우주를 담은 밥상』, 『마더 테레사네 동물병원』, 『소크라 테스 아저씨네 축구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