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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하이힐
(창 5:1-32)
오늘 아담의 족보가 나오는 창세기 5장 말씀, ‘에녹의 하이힐’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전체적으로 이 5장의 계보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틀이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그렇지요? 첫 번째 아들을 몇 세에 낳았고 그리고 그 뒤로 몇 세를 살면서 자식을 낳았으며 그러다가 첫 번째 아들을 낳았던 그 나이와 그 이후로 자식을 낳으며 살았던 나이를 더해서 몇 년을 세상을 살다가 죽었다 다시 말해서 낳다가 죽었다, 낳다가 죽었다 계속해서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한 역사의 묘사 방식을 정해놓고 그리고 족보를 써내려 가는데, 유독 에녹에 관한 이야기에서만은 전혀 다른 표현을 사용하게 됩니다.
21절을 보세요.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여기까지는 같습니다.
22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지 않았나 보지요. 그렇죠?
24절에 보면, 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절, 그래서 삼백 육십 오 세 밖에 못 살았다...
이 당시의 나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렇게 얘기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홍수가 나기 이전의 생태학적 조건들 그러한 생태학적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천 살에 가까운 이런 오랜 세월의 삶이 가능했다. 그런데 대홍수가 나고 하늘의 궁창이 열리고 땅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그런 격변을 겪게 되면서 이 지구상의 생태계가 급격히 사람의 생명 조건에 좋지 않은 상태로 바뀌면서 성경에도 보면 노아를 기점으로 해서 그 연령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다가 아브라함 때는 120세 전후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것은 학자들의 한 연구의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에녹은 365세를 살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습니다.
이것을 에녹의 하이힐 이라고 제목을 붙여 봤어요.
우선, 하이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유래를 살펴봅니다.
하이힐은 멋쟁이 여자들이 신는 신발 아닙니까? 뾰족구두라고도 우리가 말을 합니다마는 그 굽이 높고 뾰족한 신발 이 하이힐의 유래를 살펴보면, 문명과 문화에 관해서 뒷얘기를 파헤친 책을 제가 한번 읽으니까 구라파에서 하이힐이 시작되었는데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하이힐이라는 신발이 나왔느냐? 그 당시 구라파의 집들이 이렇게 나무든지 돌이든지 지어놓고 벌써 2층으로 지어놓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2층으로 지어진 건물에 아니면 단층이래도 화장실을 지금처럼 수세식으로 만들 생각을 못했고, 우리나라처럼 우물가로부터 멀리 떨어트려서 뒷간이라고 만들어서 웅덩이를 파놓고 일을 볼 생각을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용변기에다가 일을 본 뒤에 차창 밖으로 다 그 오물을 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길거리에 오물이 늘 산재해 있었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서양 사람들아 참 무식하고 더러운 사람들이에요. 서양사람들이 제 설교를 알아 듣지 못하니까 다행이지마는 그 유래에 대한 기록도 서양사람이 쓴 책에서 읽은 것이니까 절 나무랄 게 못되지요.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 여자들이 입던 치마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길고 폭이 넓은 치마를 입고 다녔기 때문에 새 옷을 입고 돌아다녔다가는 온갖 오물이 치마 밑자락에 달라붙게 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방법을 생각하다가, 저 같으면 화장실을 만들었을 텐데, 이 사람들은 화장실 만들 생각은 안 하고 만든 방법이 하이힐이었다는 겁니다. 치마 끝이 오물에 묻지 않도록 굽을 높여서 신고 다닌 것이 하이힐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에녹의 하이힐.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별명이 붙은 에녹.
다른 사람들은 낳다 죽었다, 즉 자식을 몇 백 년 동안 낳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에녹만큼은 낳다가 중간에 하나님에 의해서 들림을 받아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경우를 경험하게 된 이유가 뭐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둘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마음을 둘 수 있을 만큼 더러워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에 사람들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두기에는 그 마음들이 아주 더러워졌습니다. 왜 더러워집니까?
하나님만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는 그래서 자기의 피조물의 자리의 분수를 넘어서게 되면서 마음 속에 하나님만을 담아야 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좋고 나쁜 가치 기준을 따라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을 마음에 담게 되면서 마음이 똥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에요. 마음이 아주 더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더러워진다는 얘기. 제가 청결에 관한 이야기를 뱅쿠버에서 목회하면서 여러 번 반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청결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장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더러운 용변이라도 재래식 화장실이라도 있어야 될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더럽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입으로 들어가는 깨끗한 음식이라도 그것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는 우리는 지저분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책꽂이에 책이 꽂혀 있을 때는 누가 그것을 산만하게 느끼고 어수선하게 느끼고 지저분하게 느낍니까? 그런데 책들이 책꽂이가 아닌 방바닥이나 식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을 때는 우리는 지저분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청결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있으면 깨끗한 것이 됩니다.
자식은 깨끗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깨끗합니다. 단, 내 마음이 그들을 집어넣어버리고 받아들여 버릴 때 내 마음이 더러워지게 됩니다.
있어야 될 자리가 아닙니다.
내 마음에 있어야 될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상징이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할 때 하나님이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스스로 선악 판단의 기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좋은 것 나쁜 것을 내가 마음 속에 끌어들여 받아 들여서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마음을 붙이십니다.
우리 그러잖아요. 마음 둘 곳이 없다... 에녹은 하나님이 신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걸어 다니실 수 있는 하나님의 하이힐과도 같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녹의 하이힐이라고 말을 붙였어요.
~의 라고 하는 말을 소유격으로도 쓰지만 에녹이 곧 하이힐이었다 라고 하는 말로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서 걸어 다니셨어요. 왜? 에덴동산에서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이 숨었다는 말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 위를 걸어 다니실 때에 반드시 마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신고 다니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동행이라는 게 이루어지지 않아요.
동행이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을 통하여 일종의 하나님의 납치사건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히 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마음 둘 곳이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어제 저의 가족이 왔습니다. 뱅쿠버에서 눈이 많이 와서 비행기들이 눈에 덮히는 바람에 비행기 날개에 있는 눈을 치우고 그러느라고 출발시간이 무려 예정시간이 5시간이나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늦게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와서 제가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늘 4시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가족!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일반적으로 말할 때 가족이라는 것에 우리 마음을 붙이게 됩니다. 또 내가 머물 집! 마음을 붙이게 되지요.
모든 사람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어요. 마음 둘 곳이 없어요.
마음 둘 곳을 찾으려고 애인을 구하는 것 아닙니까? 결혼을 하는 것 아닙니까? 또 자식을 낳아도 거기에 마음을 둡니다. 사업을 해도 마음을 둡니다. 마음 둘 곳을 찾아내지 않는 사람은 마음 둘 곳이 없으므로 마음이 방황하게 됩니다.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시편 1편에
시 1: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말을 하면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붙여볼까 쫓아가고, 저 말하면 저 말을 듣고 마음 붙여볼까 쫓아가고, 유행한다고 하면 청바지를 다 찢어진 것을 한번 입어 보기도 하고 또 눈도 한 번 수술해보기도 하고 마음 붙일 곳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그렇게 마음 붙일 곳을 이 땅에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더러워져 버렸습니다. 온 세상이 더러워졌습니다.
이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아벨이 제사를 드리듯이, 아벨 대신에 태어난 셋의 자손으로서 아벨의 제사처럼 자기를 양인 것처럼 자기 기준을 죽여 버리고 선악과 따먹는 일을 중단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자마자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닐던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마음 속에 선악을 금지하게 되면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게 되요.
모든 일에서 내가 좋고 내가 나쁜 일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여러분!
이때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 가십니다.
가만히 읽어보면 에녹을 우리가 믿음의 조상 한 반열에 끼어놓고 부러워하기도 합니다마는 정말 부러울까? 그 당시 평균 연령이 700-900세 사이였어요. 그런데 에녹은 365살, 절반을 못 살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에녹이 부러워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오셔서 “너희가 하도 이 세상에서 나와 동행하고 나를 기쁘게 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지금 데려 갈 거야!”이러면 “아! 할렐루야. 좋습니다. 하나님! 내가 기다리던 바입니다. 내가 그걸 기다렸지요.”
이러며 올라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갔다고 우리가 훌륭하다고 얘기하지만, 정말 내가 지금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천국으로 데려 가신다,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표현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좋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내가 천국으로 지금 들림을 받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 누구??
없을 거 같아요.
여러분 지금 데려간다고 하면 좋아요?
좋다고 그러면 믿음이 된 거에요.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게 우리가 몸으로 들려 올림을 받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오늘 주어진 일상의 일들 속에서 자꾸 선악과 열매를 따먹게 될 겁니다.
자, 우선 어떤 일이 주어지자마자 나는 그 일이 분명히 나쁘다 좋다를 판단하고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나쁘다 좋다를 판단한 이후의 단계에서 하나님을 찾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동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 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부인해버리고 그 일 앞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창세기 4:26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선악의 기준을 갖고 일에 개입하시를 바랄 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매사에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않으면 동행합니다.
그런데 안 될 거예요.
안 돼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기준이 없어져 버리고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을 잡아다가 하늘로 끌고 가버리신다는 거예요.
에녹은 몸채로 끌고 갔지만, 우리가 그렇게 몸채로 끌림을 받지 않더라도 이 세상일에 대해서 선악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하여 내 마음대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내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못 박아 죽였는데 그 일 밖에 한 것이 없는데 하는 순간 하나님이 내 마음을 에녹을 데려 가듯이 데려가서 하늘을 느끼게 하고 하늘을 감지하게 하고 하늘의 기운을 수용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내 안에 하늘이 들어오자마자 에녹이 들림을 받았을 때 슬퍼했겠습니까? 기뻐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처지는 지금 하늘로 데려간다고 그러면 뭔가 아쉬워요.
그런데 이 아쉽지 않은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맛 본 사람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모르고서야 지금 데려간다고 하면 다 아쉽지요. 뭔가 켕기지요.
“이 일을 아직 정리하지 않았으므로 조그만 더요. 하나님! 천국이 어디 가겠습니까? 조그만 더 있다가 가지요.”다 이런 마음 아니겠어요?
“내 자식놈이 아직 어리니까 이 아이를 어떻게 그래도 자기가 웬만큼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길러놓은 다음에 가야지, 지금 가면 되겠습니까? 에녹같이 동행은 하겠습니다마는 저를 하늘로 데려가는 일은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마음이잖아요. 그렇죠?
왜 그래요?
진정으로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하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납치하듯이 하늘로 내 마음을 끌고 가서 실제의 하늘을 맛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납치 사건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하루를 살아갈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마음을 붙이기에 편한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려운 상태일 것입니다.
왜요?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될 세상의 무엇들을 다 마음에 두는 바람에 마음이 청결하지가 않고 마음이 더러워져 버렸어요.
마음에 담는 그것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에는 하나님만 들어와 있어야 할 자리인데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게 되면서 마음이 더러워져서 하나님이 마음을 붙이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래도 저 사람만은 괜찮아! 라고 해서 하나님이 신으시고 이 땅에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걸어 다니실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하이힐이 되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내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에 이것은 좋은 거야, 저것은 나쁜 거야 라는 이런 모든 생각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립니다.
좋다고 생각하는 내가 죽었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내가 죽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을 두면 안 돼요. 그러면 사람이 이상해지잖아요. 빈 마음을 두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오시옵소서. 저를 신으시옵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을 위해 이 땅을 걸어 다니시옵소서.”
이렇게 땅의 일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선악과의 따먹는 일을 중단할 때, 하나님이 내 마음을 에녹을 데려 가시듯이 지금있는 그 천국으로 마음을 데려가시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4절,「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게요.
‘내 마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내 마음을 데려 가시므로 내 마음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그래서 바울은 내가 지금이라도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고후 5: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하나님이 내 마음을 천국으로 데려가셔서 천국을 내 마음에 갖고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동행해야 되는데, 동행하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어서 실낙원에서 쫓겨났던 그 과정을 되풀이하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에 선악을 알고 있는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부름으로 동행하면서 에녹과 같은 마음이 천국으로 데려 올라감을 당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이 마음 붙이실 곳이 없으시지요.
우리가 오늘 하루 우리 마음을 영이신 하나님의 하이힐이 되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신으시고 당신의 뜻을 위하여 걸어 가신는 곳마다 우리가 당신의 신발이 되어 당신과 동행할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십자가에 내 선악 판단을 하는 이 죄악된 습성의 마음을 죽이는 놀라운 기도의 시간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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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루의 마무리도.... indeedpapa 님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아침홈채플이 계속 이어지고있는 것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