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자여 봄을 맞이하여 함께 가자(2019.2020.3.22)
아2:10-14
할렐루야
오늘 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분들과 각 처소에서 라이브 방송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에게 인사합니다.--
‘나의사랑, 나의 어여쁜자여 그대에게 봄이 오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화단에도 개나리 꽃이 활짝피고, 금잔디도 꽃을 피우고 만물이 소생하는데 코로나19도 막을 수 없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노래중에도 불러보면---봄.봄.봄이 왔어요. 우리들 마음속에도 봄봄봄봄 봄이왔어요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다같이 불러보겠습니다.(생략)
즐겁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전국이 힘들어하기 때문에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면서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기도하여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코로나19가 부활절 전에 멈추어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부할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은혜가 임하시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의 길, 신앙의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까? 낙심하지 말고 올라가는 신앙 올라가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무소불능 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주님이시지만 부르짖을 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르짖는 기도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인 줄로 믿습니다. 마16:19절‘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우리 주님이 주신 천국 열쇠는 바로 기도인줄로 믿습니다. 응답의 음성이 들려올 때 즉시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코로나19를 이기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즉시 일어나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신앙은 앉은뱅이 신앙입니다. 병든 신앙입니다. 소경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왜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믿음이 없는 연고입니다. 마17:20절‘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성가에 좋은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아멘>
지금 들에는 쑥, 냉이, 개나리가 활짝 피고 땅을 밀치고 올라오는 새순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봄을 ‘스프링(Spring)’이라고 부릅니다. 스프링이란 용수철을 말합니다. 스프링이란 ‘튕겨오른다, 터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가졌는데 그것은 원래 온천물이 땅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생각한데서 온 낱말입니다. 그래서 스프링이라 할 때에 그것은 ‘청춘, 탄력, 기운, 원동력, 근원, 도약’ 등의 뜻으로도 해석을 합니다.
봄을 ‘스프링’이라 한 것은 겨울동안에 얼어붙어 있다가 봄이 되면 생명이 터져 나오는 신비로운 대 자연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경침이 있어서 겨울동안 동면하던 개구리떼가 봄을 맞아서 땅위로 올라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즘에 개구리가 봄을 맞아서 땅위로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인다고 합니다. 올라오자니 코로나19가 기다리고 있어서 걱정된다고 그렇다고 안올라 올수도 없고 두리번 거린답니다.
과연 봄은 튕겨오른 계절입니다. 그 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춘삼월 호시절은 대 자연과 함께 우리 인생애 겨울동안에 자던 잠을 깨고 다같이 일어나서 새로운 삶의 목표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하고 전진해야 할 행진의 계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협조를 잘 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새봄을 맞이해서 움추리고 있던 기지개를 활짝 펴고 함께 용수철 같이 튕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솔로몬왕이 그의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을 보고 이 봄날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시골 처녀 술람미 여인과의 지순하고도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이것은 실상 신랑 되신 주님과 신부되는 성도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랑 되신 주님이 신부인 우리를 향하여 사랑의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니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명의 봄 동산으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봄을 노래하고 사랑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의 봄을 맞이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봄이 주는 교훈을 얻으면서 함께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봄이 되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훈풍에 온갖 식물과 동물들과 곤충들이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계절입니다. 앙상하게 죽은 듯이 겨울을 지낸 나뭇가지들은 물이 올라서 한결 부드러워 졌고, 새싹이 돋기 시작하였으며, 온갖 꽃나무들은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믿음의 나무에도 새싹이 돋아나야 합니다. 소생하여야 합니다. 죽은 듯 겨울을 지낸 나뭇가지들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자 저마다 앞을 다투어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들의 믿음에도 성령의 생기의 바람이 불어서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겔37:9-10절 말씀에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할 때에 생기의 바람이 불어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봄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심령에 성령의 생기가 불어와서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죽은 나뭇가지에는 새싹이 돋아나지를 않습니다. 죽은 뿌리에서도 새싹은 돋아나지를 않습니다. 바라기는 아직도 열심 내지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로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성도들은 이 봄에 새롭게 소생하는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깨어나지 못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입니다. 과수원을 하시는 성도들은 잘 알 것입니다. 병든 가지와 죽은 가지, 그리고 꽃눈도 없고, 싱싱하지도 못하고, 다른 가지에 방해가 되는 가지는, 모두 잘라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잘라서 지옥 불에 던져 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3:10절‘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했습니다.
봄은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봄에는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계절이지 열매가 맺히는 계절이 아닙니다. 이 4월은 꽃의 달이기도 합니다. 노란 개나리꽃으로부터 진달래, 그리고 도색(桃色)이라는 매혹적인 이름이 붙은 복사꽃, 순백의 우아함을 자랑하는 목련꽃, 그리고 하얀 배꽃, 수억만 송이가 함께 피었다가 같이 지는 벚꽃, 등등 이 땅에는 수천수만 가지의 꽃들이 피고지고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길가에 이름도 없이 볼품도 없이 피고 지는 들꽃으로부터 정원에 곱게 피어서 모든 사람 등에게 사랑 받는 꽃에 이르기까지 그 꽃의 종류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꽃은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줍니다. 우리 상주 북천 냇가에도 벚꽃 구경을 위하여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꽃피면 구경 가보세요
또 꽃은 모든 곤충들에게 꿀과 꽃가루를 제공해 주어서 먹고 살 수 있게도 해 줍니다.아마도 꽃이 없다면 모든 곤충들이 살아갈 수가 없을 것이고 또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하였을 것입니다. 꽃은 용도가 다양합니다. 어느 곳이나 있습니다. 무슨 행사장마다 큰 화환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좋은 일에도 있고 또 슬픈 일에도 있습니다. 초상이 나도 화환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갓집의 우울한 분위기를 한결 환하게 만들어 줍니다. 기쁜 날에는 꽃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축하를 할 때에도 꽃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꽃은 교회 안에도 있고 무슨 행사장에도 큰 화환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이 꽃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유익을 주고 위로를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고 하셨고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만 주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만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만을 주고 불쾌감이나 나쁜 인상을 주면 안 됩니다.
봄은 사랑의 계절입니다. 10절‘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시골 여인입니다. 포도원지기입니다(1:6) 얼굴이 검고 거칩니다(1:5,6). 일반적인 안목으로는 볼만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래도 신랑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깁니다. 향기롭다고 말합니다(1:3). 검으나 아름답다고 말합니다(1:5). 계달의 장막(유목민이 쓰던 검은 염소가죽 천막) 같을 찌라도 신랑의 눈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솔로몬의 휘장같이 보입니다(1.5).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엔게디-사해 서쪽에 위치한 산악 지역, 고벨화-크고 아름답고 향기가 진한 꽃)같고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고 합니다(1:14,2:2).
주님의 눈으로 보실 때 우리 성도가 그렇습니다. 세상 적으로 볼 때 우리는 자랑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허물투성이입니다. 도무지 사랑스러운 것도 없고 왕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은 더욱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조건 없는 선택이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엡1:3-5). ‘나의 사랑’이라고 말씀 합니다. ‘나의 어여쁜 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히면서 까지 구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합니다(롬5:6-10).우리를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축복의 봄 동산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이 신부된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랑인 솔로몬왕은 감출 수 없는 사랑의 가슴으로 신부, 술람미 여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까무잡잡한 시골 여인 술람미가 남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솔로몬왕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귀여운 여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랑되신 예수님께서도 그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부르십니다. 영원히 멸망받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사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 신부된 교회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부르시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부르심의 사랑을 알 때 성도는 행복합니다.
2.왜 함께 가자고 합니까? 겨울이 지났으니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함께 가야하는 이유는 겨울이 지났고 비도 그쳤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추운 날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통과 시련의 날입니다. 비는 인생의 우울과 슬픔을 뜻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겨울과 같은 시련의 날이 있습니다. 밤과 같은 어둠의 날이 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옵니다. 어둠의 가장자리는 빛입니다. 겨울이면 봄이 멀지 않습니다.
이제 고통의 날, 시련의 날이 지났으니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좋은 날, 호시절이 왔습니다. 날씨도 포근하고 이제 땅에는 꽃이 피는 계절입니다. 기도하기 좋은 때입니다. 예배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러니 이제 일어나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자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봄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모든 천지만물 삼라만상이 변화가 되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변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봄이 되면 얼어붙었던 것들이 녹습니다. 겨울에는 물만 어는 것이 아니라 땅도 나무도 생명도 모두가 얼어붙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도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에 물러가고 얼어붙었던 모든 만물은 서서히 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두껍게 얼어붙었던 저수지의 얼음도 녹고 얼어붙어서 흐르지 않던 냇물과 도랑물도 흐릅니다. 깊숙이 얼었던 땅도 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도 녹아야 합니다. 낙심과 좌절로 얼었던 마음도 녹아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었던 마음도 녹아야 합니다. 불신과 반목으로 얼었던 마음도 녹아야 합니다. 환난과 핍박으로 얼었던 마음도 녹아야 합니다. 이웃과 불화로 얼었던 마음도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야 합니다.
겔47:1절‘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고 하였는데 그 물은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고, 나중에는 헤엄칠 수 있도록 창일한 강물이 되어 그 물이 흐르는 곳마다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만물이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에도 봄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마음에서부터 사랑의 강물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강물이 창일하게 흘러서 이 강물은 교회를 채우고 흘러 이 지역 사회를 소생시키고 번성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봄이 되면 따뜻한 훈풍이 불어옵니다. 봄은 봄바람과 함께 옵니다. 봄바람이 불면 겨울은 사라집니다. 봄비가 내리면 잔설이 사라지고 봄이 성큼 오는 것입니다. 이 봄과 함께 여러분의 영혼이 봄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의 사업도 봄날처럼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의 직장도 봄날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훈풍은 생명이 있는 바람입니다. 겨우내 잠자던 나무들에게도 생명을 주고 땅속에 잠들어 있던 모든 생물들에게도 생명을 줍니다. 봄이 되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서 겨울잠을 자는 모든 만물을 소생시키듯이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 생명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이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인간의 모든 심령은 소생하게 되며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행2:2절‘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던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저들은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녹아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에 불었던 생기의 바람, 부활하신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던 바람,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였던 사도들에게 불었던 성령의 바람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불어 신앙의 봄을 맞는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시한번 11절‘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쳤고’라고 했습니다. 근동 지역의 겨울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한기를 느끼게 하는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입니다. 습기 차고 눅눅한 좋지 않은 계절입니다. 이런 날씨는 주민들의 생활을 힘들게 합니다. 겨울은 이렇게 춥고 고생스런 계절입니다. 움츠리는 계절이요 쉬는 계절입니다. 마치 죽음과 같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제 겨울이 지났습니다. 찬비도 그쳤습니다. 이제 그런 괴로운 시절이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생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리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임(주님)을 만날 수 없었던 괴로움의 날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사43:18).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면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방황과 갈등은 예수 안에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집인 우리 상주감리교회 안에서 끝이 났습니다.
3.왜 함께 가자고 합니까? 봄이 왔으니 일어나서 함께 가자
팔레스타인 지방은 비 오는 겨울이 지나 가자마자 꽃이 핍니다. 새의 노래할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비둘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새와 비둘기의 노래 소리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합니다. 이 모두 아름다운 봄,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산에 봄이 왔다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모든 동식물들은 동면을 끝냅니다. 만물은 소생합니다. 봄은 생명이 요동치는 약동의 계절입니다. 그 춥고 얼어붙은 흙 속을 비집고 새 생명이 싹을 트며 솟아오릅니다. 봄은 아름다운 계절이요 생명의 계절이요 소망의 계절이요 부활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몰고 오시는 봄기운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 부활 생명을 꺾을 장사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이런 봄날을 주고 계십니다. 앞으로 더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12절에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며 반구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납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앞으로 꽃이 필 것의 서곡입니다. 꽃이 피는 것은 결실을 맺을 예고입니다. 오늘 본문 2:13절‘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얼었던 대지가 녹고 따뜻한 바람이 분다는 것은 준비단계이며 그 다음에는 실제적인 유형적인 것입니다. 우리들 신앙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서 새사람이 되었다면 다음에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에도 봄을 맞이하여 새싹이 돋아야 합니다. 한겨울 앙상한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듯이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에 새싹이 돋아나는 것 같이 우리들 신앙에도 새싹이 돋아야 하겠습니다. 새싹이 돋는다는 것은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꽃이 피고 새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며 또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에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봄은 멍울진 꽃망울을 피게 합니다. 그리고 피어난 성도는 꽃 중에 꽃인 백합화와 같습니다. 주님은 믿음 있는 우리 모두를 ‘백합화’라고 했습니다. 2절‘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합화와 같은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겨울 내내 죽어서 다시는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던 화초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벌 나비가 춤추며 새들이 노래하는 참으로 좋은 시절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꽃이 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심령은 굳은 모든 것들, 곧 죄악의 모든 것들이 녹아지고 마음이 활짝 열리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봄 기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누구라도 달라지고 소생될 것을, 거듭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심니다.
주님이 임하시는 곳에는 사막에도 꽃이 핍니다.(사35:1)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니까 마음에 은혜의 꽃이 활짝 피어 기쁨이 넘치므로 노래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한 삶을 위해 지상에서 신앙의 꽃을, 은혜의 꽃을 많이 피우도록 합시다. 이 때에 바로 새가 노래하며 반구의 소리가 들리는 은혜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구는 산 비둘기로서 성령의 상징입니다. 성령이 오실때 신앙의 꽃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피우며, 또한 꿀송이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갈5:22-23)
신앙의 봄을 알리는 반구의 소리, 성령의 역사가 이제 우리 땅에도, 교회에 여기 저기, 이 부서 저 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도 들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고 반갑습니까?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주님의 덕을 기리고 어떤 환경속에서라도 송축하는 은혜로 화합니다.
찬송 438장 4절--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인생의 겨울도 예수님 안에서만 사라집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만 봄날 같은 은총을 사모할 수가 있습니다. 겨울은 주님이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봄은 주님이 오게 하십니다. 봄같은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가시덩쿨 속에서라도 꽃을 피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심령은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씨입니까? 나의 환경이 아직도 가시덩쿨입니까? 이제는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십시요. 대자연이 우리 모두를 향해서 일어나라 합니다.
봄은 노래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12절‘지면에는 꽃이피고--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 time is singing has come’노래하는 계절이 왔다는 뜻입니다. 봄이 되면 새들이 노래하고, 곤충들도 노래하고, 만물이 노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생들이 노래를 합니다. 그중에도 성도들은 더욱 낭랑한 음성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쉬운 말로 번역하면 나와 함께 데이트하자 그러한 내용의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은 데이트 코스까지도 제시했습니다. 13절‘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포도나무는 신앙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고 하셨습니다.(요15:5) 이 포도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일어났음을 뜻합니다. 이 포도나무 꽃은 보기보다 향기가 좋습니다. 동시에 그 열매는 과실중에 왕입니다. 포도의 맛도 향기도 너무 좋습니다. 신앙의 꽃은 향기롭고 그 열매는 인간의 생명을 살림니다.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포도동산입니다. 여기 포도동산이 어디인가요? 성경은 교회를 포도동산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포도동산입니다. 이 동산은 은혜의 동산이요, 축복의 동산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사랑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옆사람과-인사합시다.---‘교회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기 때문입니다.(13절) 무화과 나무의 푸른 열매가 익었다는 말은 향기를 발한다는 뜻으로 무화과가 익어서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과실은 무르 익으면 익은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심령 깊은 곳에서 향기를 토하는 것같이 새로운 영적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무화과는 종교의 표상으로서 꽃이 밖으로 피는 일이 없이 과실을 맺어 그 단 맛이 다른 과실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특유한 맛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이러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맛볼 수 없는 그 맛이 있습니다. 그 맛이 성도들에게서 느껴지기 시작함을 볼 때 얼마나 기쁨니까?
찬송 작시, 작곡한 심슨은 이렇게 찬송합니다.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
그런데 지금 성도들이 처해 있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들 앞에 거대하고 견고한 성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바로 여리고라는 성입니다. 그 성벽은 두껍고 성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 성문은 견고한 강철로 되어 있어서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이 견고한 성 앞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여리고를 돌아라. 하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견고한 성 여리고가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깨어기도는 시간에 여러분 앞에 있는 견고한 여리고가 무너질 것입니다. 일어나라 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하십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행3장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 앉은뱅이였습니다. 한번도 걸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났고 ‘금과 은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습니다. 말씀,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몸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관절이 요동을 하고 근육이 살아났습니다. 잠자던 유전자 세포가 깨어났습니다. 발목이 힘을 얻고 무릎이 회복되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4.사랑을 나누며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는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과 행복을 노래한 책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랑과 행복의 관계, 예수님과 우리들과의 사랑과 행복의 관계를 노래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14절에 ‘나의 비둘기’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향하여 비둘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비둘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노아의 방주 시대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한탄하시면서 노아를 통하여 구원계획을 수립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명하셨고, 노아와 아내 그리고 세 아들과 자부들 여덟 식구가 배 안에 들어가서 하늘이 터져 40일간 쏟아지는 폭우를 피해 150일간을 살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말세의 교회와도 같습니다. 150일이 지나 땅에 물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를 내 보냈으나 돌아오지 않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실패한 후에 비둘기를 내 보냈으나 비둘기는 지저분한 세상에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나뭇잎을 물어와 세상이 깨끗해 졌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까마귀와는 달리 비둘기는 순결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성령의 감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비둘기가 다시 방주로 돌아 왔듯이, 비둘기는 세상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주의 장막인 교회로 날아드는 순결한 성도와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비둘기와 같습니다. 그 비둘기가 성경본문에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요?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살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험악하고 삭막한 곳,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 사는 비둘기를 부르고 있습니다.
14절‘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많은 주경신학자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습니다. 바위틈은 십자가를 뜻한다고 합니다. 고전10:4절‘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바위는 예수님, 틈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그래서 창에 허리 상하신 상처를 뜻한다고 합니다. 마16:24절‘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물론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위틈으로 우리를 숨기시고 도우하시고 죽음의 재앙이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성도는 주님의 참제자랄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심령은 평안이 아니고 도리어 괴로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내 등에 십자가가 있나 없나 살피실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합니다.
또 여기 낭떠러지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믿음생활의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질병의 낭떠러지요, 환란의 낭떠러지입니다. 실패의 낭떠러지입니다. 믿음 생활 속에도 낭떠러지는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경우에 따라서 우리를 낭떠러지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함입니다. 독수리가 그 새끼를 어떻게 훈련시킵니까? 일부러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재빨리 가서 다칠세라 떨어지는 새끼를 받아 보호하지 않습니까? 그리곤 또 올라가 낭떠러지에서 밀어뜨립니다. 그러나 재빨리 가서 떨어지는 새끼를 안아 보호합니다. 그래서 새 중의 왕자, 날쌘 젊은 독수리가 되게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지라도 낙망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진 성도 있습니까? 고난의 낭떠러지에 떨어져 어려움 겪고 있는 성도 있습니까? 그러나 두 주먹 불끈 쥐고 용기 백배 하셔야 할 것입니다. 낙망할 것 없습니다. 두려울 것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번씩이나 ‘일어나서 함께 가자’ 했습니다. 여기 일어나서란 말은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에 하신 말씀, 달리다굼했던 말과도 흡사합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입니다. 봄이 되면 죽은 풀포기가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신 부활절이 봄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일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가십시다. 엄동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이라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믿음 생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여름에도 예수님과 함께 가십시다. 성공해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실패해도 예수님과 함께 가는 성도이기를 염원합니다. 건강해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병들어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잘 살아도 예수님과 함께 가고, 못 살아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합니다.
14절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함부러 드러내 보이지 않고 처녀다운 정결함을 굳게 지킨 것을 말함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충성된 삶을 살며 영적 정절을 지킨 성도에게 주실 칭찬과 그에 합당한 풍성한 상급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로 구속하여 신부로 삼으신 교회와 성도가 영적 순결을 지키는 삶을 살 때 크게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은 지금 바위틈에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 몸을 숨기고 드러내어놓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위틈에 숨은 나의 비둘기야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네 모습을 보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세마포 옷을 입은 신부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모습과 그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또는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두렵고 힘겨운 현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현실 가운데에서 다르게 말하면 새끼 독수리나 힘약한 비둘기에게 있어 바위틈 낭떠러지는 세상에서 최고의 평안의 손길로 이끌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품이고 최고의 안식처일 수도 있습니다.
신랑되신 주님의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얼굴을 보이며 사는 것입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여기 얼굴은 직역하면 얼굴만 뜻하지 아니하고 ‘모양’, ‘모습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화평과 순결을 상징하는 비둘기 같은 눈,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그의 머리카락, 말씀을 먹는 고루 박혀있는 아름다운 이, 소망의 상징인 비둘기 같은 목, 믿음과 사랑의 상징인 두 가슴, 이러한 여인의 모습 전부를 보게 하라는 뜻입니다. 얼굴은 사람의 인격과 생활을 대변합니다. 얼굴은 곧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쳐다 볼 때 얼굴을 쳐다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서 ‘나의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비둘기는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결백과 평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비둘기는 은혜와 사랑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비둘기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예수님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 얼굴을 나타내야 합니다. 찡그린 얼굴이 아니고, 분을 내는 얼굴이 아닙니다. 웃는 얼굴이요, 은혜와 사랑이 있는 얼굴입니다. 이 얼굴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얼굴 보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만큼이나 원하십니까? 병이 날 정도로 말입니다. 5절‘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정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에 너무도 사랑하다 보면 병 날만큼 되지 않습니까? 14절‘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어찌 아름다운 연인의 얼굴을 보기 원치 아니하겠습니까? 아4:1절‘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우리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도들을 이처럼이나 어여쁘게 보신다는 말입니다.
아담은 하와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따먹고 죄를 짓고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큰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얼굴을 안 보이기 위해서 말입니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내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나이다’죄지은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불안에 떠는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얼굴을 하나님에게서 피하고 세상으로 돌리면 세상의 근심이 그 얼굴에 새겨집니다.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써도 근심 걱정의 얼굴은 숨길 수 없습니다. 사회에서도 나이 40을 넘어 50, 6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얼굴에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도 오래 쳐다보면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부부는 놀랍게도 서로를 닮아갑니다. 안 닮는 것은 사랑하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고 서로 쳐다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켜 아론이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민6:24-26절‘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비둘기 같은 나의 사람아!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면 여러분의 얼굴이 변합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것은 성경 말씀 앞에 겸손히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는 것은 예수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면 여러분 얼굴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품성과 말씀으로 차츰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옮아갑니다. 믿음 생활 오래 한 사람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스데반의 얼굴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셔서 그 얼굴이 천사와 같고 은혜를 끼치는 얼굴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말하며 사는 것입니다. 14절‘나의 비둘기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아버지는 자녀의 음성을 듣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외국에 나가 있는 자녀의 음성을 수시로 듣고 싶어합니다. 군에 가 있는 자녀의 음성을 부모는 수시로 듣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음성만 들으면 배가 고픈지? 감기가 걸렸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이 걱정인지 잘 압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를 부르는 여러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사람의 말은 세상살이하는데 사회생활에서도,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중요합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말로 천량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원수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말은 더욱 중요합니다. ‘나로 네 말을 듣게 하라’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어떤 말을 듣기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기도의 입을 열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얼마든지 이야기해도 다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다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말 듣기를 원하시는가요? 하나님은 불평, 불만, 비난, 상처 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의 언어, 긍정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나로 네 소리를 듣게 하라’하나님이 들으시고 복 주실 줄 믿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음을 선택하고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선택하고 좋은 일을 선택하십시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행복하고 부요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5월의 봄에 꽃이 피듯이 여러분의 영혼에 아름다운 행복의 꽃이 피게 하실 줄 믿으시고 하나님께 얼굴을 보여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14절에서‘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라고 했습니다. 얼굴은 직역하면‘모양’이나‘자태’를 의미합니다. 신랑은 늘 신부가 보고 싶습니다. ‘네가 곁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보고보고 또 보아도 마냥 보고 싶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주일 마다 예배 시간마다 그렇게 우리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또‘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했는데 여기 ‘소리’는 ‘달다’혹은 ‘기쁨을 주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에게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소리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도소리, 성경 읽는 소리, 전도하는 소리, 감사와 찬송소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친 모습도 아름답다하고 우리의 거친 목소리도 부드럽다고 하십니다. 그 주님께 우리의 모습을 자주 보여드립시다. 우리의 목소리를 더 자주 들려드립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봄을 맞은 동산은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겨울을 끝내고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꽃이 피고 생명이 움이 트고 있습니다. 겨울의 고통과 눈물은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봄 동산에서 아름답고 깊고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사랑에 취해 그 사랑을 노래하며 그 사랑을 자랑할 일만 남았습니다.
목사 때문에 우리교회가 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신랑 때문입니다. 목사가 상주감리교회 주인도 아니고 신랑도 아닙니다. 목사는 중매쟁이입니다. 주인 되신 신랑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잘 소개하고 증거 해야 할 소명을 받은 자입니다. 목사가 봄 동산의 태양이 아닙니다. 유일한 의의 태양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의의 태양이신 예수, 부활 생명이신 예수로 가득한 동산이 봄 동산, 축복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목사의 사명은 우리교회를 예수로 충만하고 예수를 제일로 삼고 사는 동산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손에 손을 잡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목사와 동역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성도 끼리 이해와 사랑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한 목적을 향하여 다같이 손을 잡고 나아갑시다. 다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주님과 함께 ‘영광스런 교회 운동’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상주감리교회가 교회중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아름답고 복된 교회가 될 것임을 믿으시고 기지개를 켜시고 예수를 제일로 삼고 봄 같은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