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 별신굿 탈놀이 공연
병산서원(우리나라 서원중 가장 공간구조가 뛰어나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남촌댁(규모가 하회 마을에서 가장 큰 고택이었으나 화재로 거의 소실되었다)
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입암고택)...류운룡의 생가
만송정 솔 숲에서 바라본 깍아지른 절벽인 부용대
북촌의 대표적인 고택인 북촌댁
에리자베쓰 2세 영국 여왕의 방문 기념수(구상나무)
징비록이 보관 되어있는 영모각
류성룡의 생가.....충효당
하회 마을 중앙에 있는 삼신당 신목(이 신령스러운 老巨樹(노거수)인 느티나무는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
계절의 여왕 5월........눈이 부시게 푸르는 날엔
걸망 하나 덜렁 걸쳐 메고 훌쩍 미지의 장소로 원정 라이딩을 떠날 일이다
*****라이딩 기록*****(총 125키로)
1.일시:2015.5.17일(일요일)
2.자택 출발:4시45분
3.동서울 터미날 도착:5시30분,15키로
4.안동행 버스 탑승:6시 정각
5.안동 터미날 도착:8시50분
6.병산 서원:10시20분,22키로/37키로
7.하회 마을:11시10분,6키로/43키로
8.봉정사:17시10분,33키로/76키로
9.월영교(안동댐):18시20분,22키로/98키로
10.안동 터미날:19시25분,12키로/110키로
11.동서울 터미날행 버스탑승:20시40분
12.동서울 터미날 도착:23시25분
13.자택 도착:24시20분,15키로/125키로
"懲毖錄(징비록)"이란 貴重(귀중)한 史料(사료)를 後世(후세)에 남긴 조선시대 名宰相(명재상) 柳成龍(류성룡)과 대학자였던 그의 형인 柳雲龍(류운룡)의 鄕里(향리)인 경북 안동의 河回(하회)마을.........
人文學(인문학)의 寶庫(보고)이며 전통 민속 문화의 香氣(향기)가 가득한 이곳에 散在(산재)하여 있는 우리 문화 遺産(유산)을 踏査(답사)할려고 여러번 "歷史(역사) 探訪(탐방) 라이딩" 計劃(계획)을 세워 었지만 매번 日程(일정)이 뒤틀어져 宿願(숙원)과 宿題(숙제)되어 버린 채 가슴을 태우며 벼르고 벼르고 있었던 차에
드디어 이번에 기어코 원정 라이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자정이 넘어 밤늦게 인문학 香氣(향기)에 흠뻑 젖은 채 무사히 歸家(귀가)하게 되어 가슴이 뿌뜻하고 感慨(감개) 無量(무량)하다
안동 하회 마을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휘감아 돌면서 이곳을 山太極(산태극),水太極(수태극) 地形(지형)의 形象(형상)을 만들어 내어 天惠(천혜)의 자연 환경이 되었는데
이러한 자연 환경은 두 형제인 류성룡,류운룡 같은 歷史的(역사적)인 傑出(걸출)한 인물을 輩出(배출)하였고(안동은 조선의 代表的(대표적)인 性理學者(성리학자)인 退溪(퇴계) 李滉(이황)의 鄕里(향리)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의 感性(감성)이 豊富(풍부)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어서 인지 鮮卑(선비)문화가 꽃을 피워 島山書院(도산서원),屛山書院(병산서원)등 수 많은 有形(유형) 文化財(문화재)가 남아 있고
"하회 별신굿 탈놀이"같은 훌륭한 無形(무형) 文化財(문화재)와 선비들의 風流(풍류)인 "船遊(선유) 줄불 놀이"도 傳承(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이러한 훌륭한 유, 무형 문화재를 우리 後孫(후손)들에게 물려준 先祖(선조)들에게 그저 머리 숙여 감사 할 뿐이다
1999년 영국의 에리자베쓰 2세 女王(여왕)이 이 하회마을을 訪問(방문)하여 "가장 한국적인 멋과 모습이 原形(원형) 그대로 保存(보존)되고 간직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라며 極讚(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2005년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이곳을 訪問(방문)하여 國際的(국제적)인 매스컴에 떠들석하게 오르 내리기도 하였는데
最近(최근)2010년도에는 慶州(경주) 양동 마을과 함께 "韓國(한국)의 歷史(역사) 마을"로 유네스코 世界(세계)文化(문화) 遺産(유산)으로 登載(등재)되기도 하였다
千年古都(천년고도)인 慶州(경주)보다 더 많은 文化財(문화재)를 保有(보유)하고 있다는 이 하회 마을은 마을 전체가 중요 民俗(민속) 文化財(문화재) 제122호 指定(지정)될 만큼 곳곳에 유, 무형 문화재가 수 없이 散在(산재)하여 있어
나는 이번 라이딩 出發(출발)전 부터 하회 마을 하면 떠 오르는 表象(표상)들을 중심으로 꼭 踏査(답사)해야 할 리스트를 작성하여 라이딩을 떠났는데
다행히 計劃(계획)대로 거의 모든 곳을 踏査(답사) 라이딩 하게 되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愛國忠情(애국충정)을 항상 마음의 갈피에 끼워 놓고 위대한 삶을 영위하신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 선생의 體臭(체취)가 남아 있고 숨결이 묻어있는 屛山書院(병산서원),遠志精舍(원지정사)와 懲毖錄(징비록)의 産室(산실)인 玉淵精舍(옥연정사)를 답사하여 선생님의 훌륭한 발자취와 삶을 더듬어 보는 일.
2.류성룡의 兄(형)으로 大學者(대학자)인 柳雲龍(류운룡)선생이 後進養成(후진양성)과 讀書(독서)를 하며 閑居(한거)의 空間(공간)이었던 賓淵精舍(빈연정사),花川書院(화천 서원),謙巖精舍(겸암정사)의 답사.
3.깍아지르는 絶壁(절벽)인 芙蓉臺(부용대)를 가장 아름답게 바라다 볼 수 있다는 萬松亭(만송정) 솔숲.
4.하회마을 전체를 眺望(조망)할 수 있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끝없이 펼쳐진 깨끗한 모래사장의 景致(경치)를 感想(감상)할 수 있는 芙蓉臺(부용대) 頂上(정상).
5.하회마을 兩班(양반) 家屋(가옥)으로 4卦(괘)라고 일컬어지는 南村(남촌)을 대표하는 "忠孝堂(충효당)""南村宅(남촌댁)"과 北村(북촌)을 대표하는 "養眞堂(양진당""北村宅(북촌댁)의 古宅(고택).
6.하회마을의 중심부에 있고 양진당,충효당,북촌댁,원지정사,빈연정사에 빙 둘러싸여 있는 三神堂(삼신당)(上堂(상당),中堂(중당),下堂(하당)을 삼신당이라고 稱(칭)하는데 이곳은 하당에 해당함)에 있는 樹齡(수령) 600년이 넘는 老巨樹(노거수)인 느티나무 神木(신목)
7.하회 별신굿 탈놀이 公演(공연) 觀覽(관람)
8.우리나라의 最古(최고)의 木造建物(목조건물)인 鳳停寺(봉정사)의 極樂殿(극락전).
9.哀絶(애절)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木柵(목책) 人道橋(인도교)인 月映橋(월영교.안동댐에 있슴)
10.이외에 對立的(대립적)인 文化(문화)들....
즉 양반과 선비들의 風流(풍류)인 "船遊(선유)줄불놀이"와 하회탈을 쓰고 자신들의 억눌린 삶을 익살과 諧謔(해학)으로 녹여내고 풀어낸 常民(상민), 賤民(천민)들의 애환이 깃든 "화회 별신굿 탈놀이.
그리고 貧村(빈촌)인 남촌과 富村(부촌)인 북촌.양반과 상민 또는 천민.
이러한 排他的(배타적)이고 對立的(대립적)인 것들이 어떻게 하회 마을이란 한 空間(공간)에서 共存(공존)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 보는 것이었다
위 중에서도 이번 라이딩의 白眉(백미)로 꼽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하회 별신굿 탈놀이" 公演(공연) 觀覽(관람)이었다
공연이 시작 되기 전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공연이 시작되자 마자 감탄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아! 우리나라도 이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탈놀이 마당이 존재 하였었구나!
나는 여태 무엇이 바빠서 이렇게 아름다운 공연을 구경 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살았단 말인가?
아! 晩時之歎(만시지탄)이로다!!!!
광대들의 익살과 해학이 공연 내내 관중들을 웃겼고 멋들어진 춤사위의 아름다움은 말로서도 形言(형언)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壓卷(압권)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진 공연이었다
"탈춤을 보아야 극락을 간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하옇튼 이번 안동 하회마을 원정 라이딩은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 인생의 길을 조용히 묻는 귀중한 시간이었으며
또한 稀土類(희토류)같은 귀중한 "길위의 인문학"의 지식을 探査(탐사),採掘(채굴)하여 많이 接(접)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所重(소중)한 시간이었던 같다
다만 당일치기 라이딩의 日程(일정) 관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大(대) 性理學者(성리학자)인 退溪(퇴계) 李滉(이황) 선생의 陶山書院(도산서원)을 들리지 못하여서 몹씨 서운 하였다
다시 한번 이런 소중한 민속 문화를 후손들에게 오롯이 물려준 先祖(선조)들에게 머리 숙여 感謝(감사) 드린다.
*하회마을(중요 민속 문화재122호)
民俗(민속)文化(문화)의 典刑(전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나라의 代表的(대표적) 전통마을인 河回(하회)마을은 太白山(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花山(화산)의 산줄기가 여러 丘陵(구릉)을 낮게 형성하며 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정확히 慶尙北道(경상북도) 安東市(안동시) 豊川面(풍천면) 河回里(하회리)에 있는 하회 마을은 낙동강 물줄기가 동쪽으로 흐르다 하회마을을 지나면서 S자 모양으로 휘 감아돌며 太極形(태극형)의 물동이 마을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물 河(하) 돌아올 回(회), 즉 하회 마을이란 地名(지명)도 이런 緣由(연유)로 생겨나게 되었다 (하회마을에서 약40키로 떨어진 醴泉(예천)에도 유명한 回龍浦(회룡포)라는 물동이 마을과 조선시대 마지막 酒幕(주막)이라는 삼강주막이 있다.여기는 지난해 국토종주 라이딩때 이미 踏査(답사) 하였다)
하회 마을의 地形(지형)을 風水地理學(풍수지리학)적으로는 蓮花浮水形(연화부수형)이라고 하는데 이는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으로 하회 마을이 낙동강변의 드넓은 깨끗한 모래사장과 어우러져 한폭의 風景畵(풍경화) 처럼 아름다운 風光(풍광)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住民(주민)의 약 70%가 豊山柳氏(풍산 류씨)의 門中(문중)으로 풍산 류씨 씨족 마을,集姓村(집성촌)인데
원래 이곳은 600년전 풍산 류씨가 이곳에 터를 잡기 전에는 許(허)씨와 安(안)씨가 살고 있었다 한다
傳統(전통) 生活(생활) 文化(문화)와 古宅(고택)이 오롯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하회 마을에 들어 서면
고즈넉한 분위가와 함께 人文學(인문학)적인 香氣(향기)와 兩班(양반), 鮮卑(선비)文化(문화),그리고 書院(서원) 文化(문화)의 情趣(정취)가 물씬 풍기는데
한국 전통 가옥의 아름다운 美(미)가 마을 전체를 뒤 덮고 있는것 같았다
하회 마을에는 國寶2점(하회탈,징비록),보물 2점(양진당,충효당),중요 민속 문화재 9점(북촌댁,남촌댁등),
無形(무형) 文化財(문화재)인 하회 별신굿 탈놀이,그리고 船遊(선유)줄불놀이가 傳承(전승)되어 내려오고 있고
수많은 精舍(정사),書院(서원)이 있어 하회 마을 전체가 중요 민속 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회 마을의 중심부를 가로 지르는 하회 종가길을 基準(기준)으로 貧村(빈촌)인 南村(남촌)과 富村(부촌)인 北村(북촌)으로 나뉘는데
남촌의 대표적인 古宅(고택)은 충효당과 남촌댁이 있고
북촌의 대표적인 고택은 양진당과 북촌댁이 있다
傳統(전통)이 물씬 배어 있는 160여채의 기와 지붕의 날렵한 곡선...
보기만 해도 편안 해지는 초가 지붕의 부드러운 능선...
단아하고 운치있게 黃土(황토)와 自然石(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아담한 흙 담장들...
흙 담장 사이로 한가하게 마을 구석 구석으로 이어지고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골목길...
수백년 歲月(세월)이 깃든 마을 어귀의 古木(고목)들...
마을의 중심부에 있는 三神堂(삼신당)의 神靈(신령)스런 분위기의 600년이 넘는 樹齡(수령)의 거대한 老巨樹(노거수)인 神木(신목)...
鬱蒼(울창)한 老松(노송)들이 도열해 있는 萬松亭(만송정) 솔숲...
깐깐한 선비문화의 단면을 엿 볼 수 있는 수많은 精舍(정사)와 書院(서원)들...
마을 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낙동강변에 드넓게 뻗어있는 새하얀 白沙場(백사장)...
강 건너편에 있는 깍아 지르는 듯이 우뚝 솟아 있는 芙蓉臺(부용대)등...
어느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아름다운 風景(풍경) 이었다
***參考***
1, 하회마을 입장료:3000천원
2,주차료:2000천원
3,나룻배 삯:3000천원(부용대 가는 길)
4,주차장에서 하회마을 입구 까지는 약 1,2키로 정도의 거리인데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음
5, 하회 마을 안에는 음식점이 없음.
6, 저전거 반입이 가능함.
7,안동 대표적 먹거리는 안동 소주,안동 고등어,헛제사밥이 있다
( 유명한 서원이 많이 있어 생기게 되었다는 헛 제사 밥은 공부를 하던 선비들이 맛잇는 음식을 준비하여 즐기기 위해 제사가 없음에도 제사를 위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말 그대로 헛 제사) 먹었다는 비빔밥의 일종으로 제사 음식은 마늘과 고추 가루가 들어가면 안되므로 고추장 대신 간장을 넣어 비벼 먹었다 한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중요 무형 문화재 제69호)
12세기 중엽 부터 하회 마을 常民(상민)들에 의하여 演戱(연희)되어온 탈놀이는 정월 초 이튿날 부터 보름 사이에 ,혹은 마을에 特別(특별)한 일이 있을 때
행하여 졌는데 마을의 神(신)인 서낭신에게 住民(주민)들이 病(병)을 앓지 않고 편안하게 한 해를 지내기를 祈願(기원)하고, 서낭신을 慰勞(위로)하고 즐겁게 하기 위한 部落祭(부락제) 성격의 탈 놀이였다
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우리나라의 탈춤중 가장 오래 되었으며 탈을 쓴 광대가 兩班(양반)을 향해 온갖 쓴 소리를 내 밷는 庶民(서민)들의 유일한 言路(언로)였던 셈이다
항상 억눌리고 束縛(속박) 받으며 人間(인간) 取扱(취급)을 못 받던 常民(상민)들이 主人公(주인공)이 되어 기존 양반 중심의 秩序(질서)를 뒤집어 엎고 支配層(지배층) 중심의 道德律(도덕률)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고 양반, 선비의 헛된 權威(권위)와 僞善(위선)을 暴露(폭로)하여 진정한 自由(자유)외 神命(신명)을 누리는 解放(해방)된 삶을 만끽했던 것이다
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총 여덟 마당으로 構成(구성)되어 있는데
1.무동 2.백정 3.파계승 4.주지 5.할미 6.양반과 선비 7.혼례 8.신방마당이 그것이다
*주지는 신성하고 무서운 상상의 동물로 대체적으로 死者(사자)임
잡귀와 사악한 것들을 쫒아내 탈판을 정화한다.
*별신굿은
1.신내림을 받는 강신.
2.조상신을 맞이 하는 영신.
3.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
4.신을 본디 제 자리로 들여 보내는 송신 구조로 진행 되는데 탈놀이는 오신 행위에 해당 된다
그리고 하회탈(국보 121호)은
1.부네(양반과 선비의 첩) 2.백정 3.할미 4.각시 5.중 6.양반 7.선비 8.초랭이(양반의 하인) 9.이매(선비의 하인)탈
이렇게 총 9개의 탈이 전해지고 있다
하회탈 하면 연상되는 웃음을 짓고 있는 하회탈은 양반 탈이고 이매탈은 턱이 없는 탈인데
이는 口傳(구전)으로 전해지는 하회탈의 제작자인 허도령이 탈을 완성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 바람에 오직 유일하게 이매탈만 턱이 없는 탈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船遊(선유)줄불 놀이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常民(상민)들의 놀이인데 반해 船遊(선유)줄불 놀이는 양반과 선비들의 風流(풍류)였다
하회 마을 옛 선비들이 무더운 한 여름날 밤에 芙蓉臺(부용대) 斷崖(단애)밑을 흐르는 낙동강에서 萬松亭(만송정) 솔숲 사이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으면서 또한 이때 부용대 절벽에서 솔가지에 불을 붙혀 낙동강에 떨어뜨리는
불꽃 놀이도 겸하였다 한다
일종의 船遊詩會(선유시회)겸 불꽃 놀이 였던 셈이다
높이가 67미터 이상인 부용대 斷崖(단애)밑을 흐르는 花川(화천:花山(화산),즉 하회마을 의 주산인 화산에서 유래한 낙동강의 별칭)의 上流(상류)에서는 달걀불(달걀 껍질 속에 불을 켬)이 유유히 떠 내려 오고 그 달걀불의 불빛이 낙동강 물에 아른거리는 것을 감상하며 시 한 수가 지어질 때마다 부용대 절벽에서 활활 불을 붙힌 솔가지
묶음을 절벽 아래로 폭포처럼 떨어뜨리면서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는 선비들의 風流(풍류)였던 셈이다
*三神堂 神木(삼신당 신목)
하회 마을의 골목길은 마을의 정 중앙에 위치한 三神堂 神木(삼신당 신목)을 중심으로 放射形(방사형)으로 뻗어 있는데 이 삼신당은 마을의 穴(혈)자리에 자리 잡고 있어 마을을 守護(수호)하는 神(신)이 있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리고 이 삼신당에는 이 마을을 600년 동안 묵묵히 守護(수호)하고 있는 樹齡(수령) 600년이 넘는 巨大(거대)한 神木(신목)인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老巨樹(노거수)는 높이가 무려 15미터,둘레가 5.4미터나 되는 엄청난 크기인데 이 삼신당 신목의 둘레에는 禁(금)줄이 처져있고 이 금줄에는 관람객들이 끼워 놓은 수많은 所願紙(소원지)가 꽂혀있어 한층 더 神靈(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삼신당은 하회마을의 代表的(대표적)인 古宅(고택)인 양진당,충효당,원지정사,그리고 빈연정사에 빙 둘러 싸여 있는데 이곳은 하회마을의 "그리스의 이크로 폴리스"광장 같은 곳이어서
그 옛날 마을의 중요한 會議(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하며
하회 별신굿 탈놀이도 이곳에서 맨 처음 열렸을 정도로 마을의 중심지 役割(역할)을 하였다 한다
또한 무더운 여름날이면 마을의 어르신들이 모여 더위를 피하며 閑談(한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萬松亭(만송정)솔 숲(천연 기념물 제 473호)
洛東江(낙동강)이 하회마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진 넓은 모래 堆積層(퇴적층)에 조성된 솔 숲으로 조선 선조때 서애 류성룡의 兄(형)인 大學者(대학자)인 謙巖(겸암) 류운룡이 강 건너편에 있는 깍아지르는 바위 絶壁(절벽)인 芙蓉臺(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하하고 북서쪽의 虛(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그루를 심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
이곳에는 樹齡(수령)100년 이상의 소나무 100여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每年(매년) 정기적으로 植樹(식수)하는 작은 소나무들이 보기 좋게 어울려 자라고 있으며 이 또한 낙동강 물이 氾濫(범람)하여 마을을 덮치는 것을 막기도 한다
이 만송정 솔 숲에서 강 건너편의 부용대를 바라다 보는 경치는 가히 絶景(절경)이라 할 수 있다
*北村宅(북촌댁.중요 민속자료 제84호)
양진당(입암고택.보물 제306호),이나 충효당(보물 제414호)처럼 종갓집에 해당되지 않지만 하회 마을에서 가장 큰 規模(규모)를 자랑하는 典型的(전형적)인 士大夫(사대부) 집의 古宅(고택)으로 마을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촌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和敬堂(화경당)인데 이는
和(화)로 어버이를 모시고 敬(경)으로 임금님을 섬긴다는 뜻이다.북촌댁(화경당)은 積善之家(적선지가:좋은 일을 많이 한집)으로 유명한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 거대한 솟을 대문(대문의 양옆에 붙은 행랑채 지붕이나 담장 보다 높이 솟게 지은 대문으로 옛날 종 2품 이상의 벼슬아치들이 외바퀴 수레인 초헌을 탄 채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높게 만든 대문)은 보는 이를 壓倒(압도)하였고 금방이라도 뒷짐을 지고 곰방대를 입에 문 양반이 헛기침을 하며 팔자 걸음으로 골목길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養眞堂(양진당.보물 306호)
양진당은 立巖古宅(입암고택)이라고도 하는데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인 류운룡의 아버지인 류중영의 호에서 따 온것이다
하회마을 풍산 류씨의 大宗宅(대종택)으로 대 종택답게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고,꼬장 꼬장하고,品位(품위)와 氣槪(기개)가 서려 있는 듯 하였다
이 양진당은 풍산에 살던 柳從惠(류종혜)가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와 지은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류성룡의 형으로 대학자였던 류운룡이 기거 하였던 집이다
양진당(참 마음을 기르는 집이란 뜻)은 류운용의 6대 孫(손)인 柳泳(류영)의 어릴때의 호에서 유래 하였다 한다
사랑채에는 입암고택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대 종택답게 이 사랑채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 옛날 풍산 류씨의 문중 모임도 이 사랑채에서 가졌다 한다
*忠孝堂(보물 제414호)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고택, 종갓집으로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도록 서쪽을 향해 있다
退溪(퇴계) 李滉(이황)선생의 首弟子(수제자)로 壬辰倭亂(임진왜란) 7년간 國亂(국란)을 극복 하는데 中樞的(중추적)인 役割(역할)을 하였고 領議政(영의정)을 지낸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이 기거했던 이 충효당은 대종택에서 분가하여 지은 작은 종택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를 해야 한다는 류성룡의 평소 말씀에서 충효당이라 지었다 한다
행랑채 앞 마당에는 에리자베쓰 영국 여왕의 訪問(방문) 記念樹(기념수)가 있는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樹種(수종)인 구상나무로 소나무과에 속하는 常綠樹(상록수)이다
또한 사랑채 뒷편에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遺品(유품)을 전시하는 최근 한옥으로 新築(신축)한 永慕閣(영모각)이 있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국보 132인 懲毖錄(징비록)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영모각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저서 永慕錄(영모록:오랫동안 그리워 하며 기다린다)에서 따 왔으며 懸板(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南村宅(남촌댁:중요 민속 문화재 제90호)
충효당과 함께 화회 마을 남촌을 대표하는 남촌댁은 1953년 火災(화재)로 인하여 안채와 사랑채가 燒失(소실)되고 문간채,별당,사당만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민속문화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念行堂(염행당)이라고도 한다
*玉淵精舍(옥연정사:중요 민속 문화재제88호)
하회마을의 서쪽편 낙동강의 빼어난 12絶景(절경)중의 하나인 깍아지르는 絶壁(절벽)인 芙蓉臺(부용대) 아래에는 서애 류성룡이 조용히 거처하며 學問硏究(학문연구)와 後進(후진 )養成(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사당 건물이 옥연 정사인데 류성룡은 7년간의 壬辰倭亂(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手記(수기)한 懲毖錄(징비록)을 이곳에서 집필 하였다
이른바 징비록의 産室(산실)이다
옥연정사란 이름은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 물이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깊어 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강물이 玉(옥)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마을에 작은 정자인 원지정사를 지은 이후 이 원지정사에서 지냈는데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편안하게 독서를 하면서 즐길 여유를 찾지 못하여 낙동강 건너편 부용대 아래 외진 이 옥연정사로 옮겨 왔다 한다
*花川書院(화천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168호)
부용대 동쪽 기슭, 즉 옥연정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애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을 背向(배향)하는 서원으로 지어졌다
옥연정사와 화천서원 사이에는 忠(충)길이란 조그마한 오솔길이 있는데 류성룡과 류운룡 두 형제는 나란히 이 길을 왕래하며 友愛(우애)를 다졌으리라!
*遠志精舍(원지정사.중요 민속문화제제85호)
서애 류성룡이 잠시 朝廷(조정)에서 물러 나 있을 때 萬松亭(만송정) 솔 숲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芙蓉臺(부용대)를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北村宅(북촌댁) 뒷편에 지은 精舍(정사).
원지산을 바라보고 있다 하여, 혹은 心氣(심기)를 다스려 정신적 混濁(혼탁)과 煩悶(번민)을 풀어 주는 小草(소초) 이름인 遠志(원지)에서 따와 遠志精舍(원지정사)라 하였다 함.
*賓淵精舍(빈연정사.중요 민속 문화재제86호)
깍아 지르는 絶壁(절벽)인 芙蓉臺(부용대) 아래의 깊고 맑게 흐르고 있는 못 이름에서 따온 賓淵精舍(빈연정사)는 민속 놀이 마당 뒷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애 류성룡의 兄(형)인 大學者(대학자) 謙巖(겸암) 柳雲龍(류운룡)의 書齋(서재)로 사용 되었던 精舍(정사)이다
*謙巖精舍(겸암정사.중요 민속 문화재제89호)
마을의 煩雜(번잡)함을 피하고 조용한 곳에서 讀書(독서)와 後進(후진) 養成(양성)을 위해 나룻배를 타고 건너 가야만 하는 芙蓉臺(부용대) 아래에 謙巖(겸암) 柳雲龍(류운용)이 세운 精舍(정사)로 退溪(퇴계) 李滉(이황)선생의 扁額(편액:건물의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거는 木板(목판)이 걸려 있다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과 懲毖錄(징비록.국보제132호)
징비록은 慘酷(참혹)한 國亂(국란)인 壬辰倭亂(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 삼아 後世(후세)를 警戒(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西厓(서애) 柳成龍(류성룡)의 著述(저술)로 壬辰倭亂(임진왜란)의 全貌(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手記(수기)한 壬辰倭亂(임진왜란)의 기록으로 아주 貴重(귀중)한 史料(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중국 詩經(시경)에서 나오는 豫其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그것을 징계하여 훗날 患亂(환란)을 경계 한다)
에서 따 온 말인데
이 징비록에는 7년간(1592~1598)에 걸친 임진왜란의 戰爭(전쟁)을 기록 하여서 무자비한 일본의 蠻行(만행)을 聲討(성토)하는 한편 이런 비극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조선의 문제점을 파 헤치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原因(원인)과 經過(경과),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朝廷(조정)의 失策(실책), 임금과 조정에 대한 百姓(백성)들의 怨望(원망)을 담았다
이렇게 훗날을 경계하여 懲毖錄(징비록)을 남겼건만 또 다시 조선은 40년후에 닦쳐온 丙子胡亂(병자호란.1636~1637)에서 淸(청)에 屈辱的(굴욕적)인 侮辱(모욕)을 당하고 말았으니..........아! 조선!!! 아! 조선!!!
서애 류성룡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領議政(영의정)이면서도 戰爭(전쟁)의 총 責任者(책임자)인 都體察使(도체찰사: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軍務(군무)를 맡아보는 최고의 軍職(군직)
를 겸하고 있었는데 류성룡은 이순신의 人物(인물)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정읍 縣監(현감)이란 微官末職(미관말직)에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원균을 경상도의 防禦(방어) 책임자로 선조에게 薦擧(천거)하여 임명토록 하였다
그리고 류성룡은 당시 劣勢(열세)였던 임진왜란의 戰勢(전세)를 逆轉(역전) 시키는데 막대한 功(공)을 세웠으며 죽을 때 까지 淸廉(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百姓(백성)들이 그를 하늘과 같이 우러러 보아 朝鮮(조선)의 5대 名宰相(명재상)으로 評價(평가) 되고 있다
李舜臣(이순신)과는 어려서 부터 한동네에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 평생 이순신의 後見人(후견인) 役割(역할)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초기에 人便(인편)을 통해 이순신에게 "增損戰守方略(증손전수방략)"이란 兵書(병서)를 건네 주어 전쟁을 하는데 參考(참고)하라 하였다 한다
懲毖錄(징비록)은 류성룡이 朝廷(조정)에서 물러나 閑居(한거)할 적에 안동 하회마을의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깍아지르는 絶壁(절벽)인 芙蓉臺(부용대) 아래에 있는 玉淵精舍(옥연정사)에서 著述(저술) 하였으며
현재는 하회마을의 忠孝堂(충효당) 뒷편에 있는 永慕閣(영모각)에 傳示(전시)되어 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은 退溪(퇴계) 李滉(이황)선생의 首弟子(수제자)로 朱子學(주자학),陽明學(양명학),佛敎(불교),道敎(도교),風水地理(풍수지리),兵學(병학),醫學(의학),등 多方面(다방면)으로 博學多識(박학다식)하였다 한다
西厓(서애)라는 호는 류성룡이 자란 안동 하회마을의 서쪽 끝, 물가에 있는 절벽 이름에서 따왔다 한다
한편 전 국회의원 柳時敏(유시민)은 류성룡의 직계 13대 孫(손)이며
탈렌트 柳時元(류시원)은 류성원의 형인 柳雲龍(류운룡)의 直系(직계)인 셈이다
***참고***
*조선시대의 5대 名宰相*
1,柳成龍(류성룡.선조)
2,孟思誠(맹사성.세종)
黃喜(황희) 政丞(정승)과 함께 세종대왕 시대에 雙璧(쌍벽)을 이루며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淸白吏(청백리)의 象徵(상징)으로 통하며 긴 官職(관직) 생활 동안 공평 무사하게 일을 처리하여 德望(덕망)이 높았다.
역대 左議政(좌의정)중 최장기 재임자 이기도 했지만 당시 황희 정승 때문에 浮刻(부각)되지 못 하였다 한다
맹사성은 황희에 비해 관리들이나 정국을 主導的(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박력이 떨어졌고 황희는 강직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開進(개진)하고 추진 하였으나 맹사성은 우회적으로 신중하게 의견을 내는 편이었다
3,黃喜(황희.세종)
오랜 관직 생활중 많은 治績(치적)과 逸話(일화)를 남겼고 세종대왕 治世(치세) 期間(기간) 중 18년간 領議政(영의정)으로 在任(재임)하여 조선시대의 最長壽(최장수) 領議政(영의정)으로 기록된다
여러가지 非理(비리)와 請託(청탁)의 疑惑(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의 未來(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判斷力(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그의 賢明(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최장수 영의정으로 기록 되었다
4,白沙 李恒福(백사 이항복.선조)
李德馨(이덕형)과 友情(우정) 이야기로 (오성과 한음) 잘 알려진 이항복은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隨行(수행)하여 의주까지 避亂(피난) 하였다
평생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栗谷(율곡) 李珥(이이)의 제자인데
당시 어지러운 붕당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 항상 몸 조심 하였으며 才致(재치)와 익살이 뛰어났다
柳成龍(류성룡),李德馨(이덕형),李恒福(이항복)은 壬辰倭亂(임진왜란)을 勝利(승리)로 이끈 主役(주역)으로 손 꼽힌다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 하였다
5,楸灘 吳允謙(추탄 오윤겸.선조)
吳允謙(오윤겸)은 다른 인재에 비하여 특출하지 않았지만 그는 待人(대인) 接物(접물)에 있어서 언제나 모가 나지 않았고 항상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謙虛(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만 70세의 나이에 領議政(영의정)에 올라 大器晩成(대기만성)한 人物(인물)로 임진왜란 때 捕虜(포로)잡혀간 백성들을 구했는데 이때부터 斷絶(단절)되었던 일본과의 修交(수교)가 正常化(정상화)가 되었다
*봉정사(국보제15호)
義湘大師(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천등산에 創建(창건)한 寺刹(사찰)로 鳳停寺(봉정사)에 있는 極樂殿(극락전)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木造建物(목조건물)이다
천등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고 급경사라 거의 끌바를 하였다
*芙蓉臺(부용대)
하회마을 북쪽편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해발 67미터의 깍아지르는 絶壁(절벽)으로 하회마을 전체를 眺望(조망)할 수 있는데 낙동강 12 絶景(절경)중의 하나이다
하회마을 낙동강변 萬松亭(만송정) 솔숲에서 바라다 보는 부용대는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보다 부용대 정상에서 하회마을과 낙동강변의 경치를 내려다 보는 것은 더 큰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芙蓉臺(부용대)라 함은 "부용을 내려다 보는 언덕"에서 생긴 이름인데 여기서 芙蓉(부용)은 "연꽃"의 다른 이름으로 마을 형상이 물위에 떠 있는 연꽃 처럼 보인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깍아지르는 奇巖絶壁(기암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경치는 한폭의 山水畵(산수화)와 같다
부용대에 오르는 방법은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옥연정사 뒷편으로 오르는 길(지름길이나 너무나 가파르다)과 자동차로 화천서원에 駐車(주차)한 후 화천서원 옆길로 오르는 길이 있다
*屛山書院(사적제260호)
太白山(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支脈(지맥)이 안동에서 하회마을의 主山(주산)인 花山(화산)을 만들어 냈는데 이 화산의 기슭에 西厓(서애) 류성룡 선생이 31세때 後進養成(후진양성)을 위해 세웠던 書院(서원)이 屛山書院(병산서원)이다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인 柳袗(류진)을 背向(배향:잘 두어 모시다)하는 이 서원은 大院君(대원군)의 祠院(사원) 撤廢(철폐) 때도 健在(건재)했는데
이렇한 人文學(인문학)적인 歷史(역사) 意味(의미) 말고도 美術史(미술사)적 으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건축의 百媚(백미)로 꼽히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마지막 약 3키로 정도가 비포장 도로로 접근 하는데 애를 먹었다
****5대 書院(서원)*****
1,屛山書院(병산서원.안동)
2,紹修書院(소수선원.영주)
3,陶山書院(도산서원.안동)
4,玉山書院(옥산서원.경주)
5,道東書院(도동서원.대구)
*月影橋(월영교.안동댐)
안동댐에는 국내에서 가장 긴 木柵(목책) 人道橋(인도교)인 길이 400미터에 달하는 아름답고 韻致(운치)있는 월영교가 보조호수를 가로 지르며 놓여 있는데
이 월영교에는 애틋하고 哀絶(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나의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안동댐을 建設(건설)할 당시 墓(묘)를 移葬(이장)하던중 發見(발견)된 31살에 죽은 젊은 남자의 묘지 안에서 그의 아내(원이엄마)가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한 컬레 미투리(짚신 보다 고급스런 신발로 주로 짚 대신 삼으로 만듬)와 함께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둘이서 머리카락 희어 지도록 같이 살다 함께 죽자 하셨지요!"로 시작되는 먼저 숨진 남편을 애타게 그리워 하는 편지가 發見(발견)되었는데
안동시에서는 이 두사람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을 영원히 이어 주고 기리기 위해 墓地(묘지)안에서 발견된 미투리 모양을 形象化(형상화)하여 이 월영교의 모습에 담았다 한다
이 월영교는 낙동강을 감싸는 듯한 山勢(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地形(지형)으로 너무나도 아름답고 운치가 있으며 1일 3회의 분수쇼(각20분간)와 하회 탈춤 공연이 이루어 지고 있으며
日沒(일몰)후 照明(조명)이 點燈(점등)되면은 화려하고 황홀한 夜景(야경)을 演出(연출)하여 모든 사람들이 灘聲(탄성)을 자아 낼 정도로 아름답다 한다
이 다리 中央(중앙)에는 월영각이 세워져 있다
********긴 글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졸필 읽어 주시어 고맙습니다!
대단하세요
성원의 말씀 고맙습니다
정말 인생을 즐기시는 분인것같네요..존경스럽습니다..홧팅! ^^
성원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계속 치열하게 라이딩 하겠습니다!
연세가 높으신듯 함에도 정신과 육체를 아우르는 여행을 꾸준하게 하심에 항상 즐거운삶을 누리시는것 같습니다. 응원합니다.
응원하여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