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evaluating Nietzsche's philosophy a distinction has to be made between the challenge it presents and Nietzsche's own answer to that challenge. Most people have found the challenge legitimate and exceedingly powerful while rejecting Nietzsche's own response to it. The challenge is that if we no longer hold traditional religious beliefs it is illegitimate for us to go on embracing a morality and values that derive their justification from those beliefs. Our whole position, if we do that, is phony, false. We are under obligation to, as Nietzsche puts it, reevalueate our values. In other words we need from the bottom up, to carry out a radical reappraisal of our morals and our values on the basis of beliefs that we do really genuinely hold. This is a hair-raising challenge, and one of fundamental urgency in an increasingly irreligious world. Ever since Nietzsche put it before us, it has remained the supreme ethical challenge confronting not only the West but people everywhere who no longer have faith in a religion. It set the moral agenda for the existentialist philosophies of the 20th century. And it remains unanswered in the minds of most people who have given it their serious consideration. Indeed, in the opinion of many it is the most important philosophical question that confronts us today. For this alone, Nietzsche stands at or near the head of those philosophers whom we ourselves have to come to with.
Nietzsche의 철학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철학이 제시하는 도전과 그 도전에 대한 Nietzsche 자신의 응답 사이에 구별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도전에 대한 Nietzsche 자신의 응답을 거부할 때에 그 도전이 합법적이 되고 극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도전은 만약 우리가 전통적 종교의 신앙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신앙으로부터 정당성을 이끌어오는 도덕과 가치를 계속 품고 있는 것은 불법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면 우리 전체 입지는 가짜가 되고 거짓이 된다. Nietzsche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순수하게 믿고 있는 신앙의 토대 위에서 우리의 도덕과 가치에 대한 급진적인 재평가를 밑바닥에서부터 실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끔찍한(hair-raising: 소름 끼치는) 도전이고, 점점 더 反신앙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긴급한 도전이다. Nietzsche가 우리 앞에 그 도전(it)을 제시한 이후 줄곧 그 도전은 서양뿐 아니라 종교에 있어서 더 이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는 세계 모든 곳의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최고의 윤리적 도전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을 위한 도덕적 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그것에 심각한 고려를 주어온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신 속에 해답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진실로 많은 사람들의 의견으로는 그것은 오늘 날 우리를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의문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Nietzsche는 우리 자신들이 만나게 되는 철학자들 중에서 선두에 또는 선두 가까이에 서 있다.
*해설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 많은 초인이었다. 집권 초기 어느 해에 가뭄이 극심하였다. 봄부터 여름까지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 전국의 논밭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 국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가뭄과 싸우고 있는 관련 부처 공무원들과 농민들을 독려하며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중에 一滴千金(일적천금)의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대통령은 밖에 나가서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수출 1억 달러 달성한 날에도 눈물을 흘렸다. 독일 가서도 고생하고 있는 한국 간호원들과 광부들을 보고 울었다. 민생고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고난에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다. 낡고 허름한 시계와 혁대를 차고 있었다. 논두렁에 앉아서 보릿짚 모자를 쓰고 농민들과 막걸리도 마셨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벽돌을 변기물통에 넣었었다. 무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전기를 아끼기 위해 집무실 에어컨도 켜지 않았다. 그는 병적일 만큼 근검절약하고 청렴결백하였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소비가 미덕이 되는 부자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신명을 바쳤다.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을 지극히 아꼈다.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성공적인 산업화 과정에서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은 수천만 명을 죽였다. 그들은 산업화에 성공하지도 못하였다. 민주주의의 원조국가인 영국에서도 시위 노동자나 군중에게 발포하여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박 대통령은 악랄한 좌익 악령들과 민주주의 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그를 매도하고 대규모 시위를 수도 없이 벌여도, 그래서 계엄령까지 수 차례 선포할 수밖에 없었지만, 단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초인이면서도 눈물 많은 거룩한 초인이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聖君(성군)같은 통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