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이라는 단어가 여호와를 대상으로 사용하기에는 다소 불경스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혹독하게 심판하기로 작정하신 여호와의 복잡한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절하지 않겠느냐는 판단 하에 제목으로 정해 보았습니다. 당시 성민 이스라엘은 안팎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처한 상황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대단히 절박切迫했습니다. 벗어나기 위해서 이제까지 취해 오고 있었던 외교적인 노선을 변경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한 여러 가지 다른 방도들을 찾았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로부터 진실한 마음으로 벗어나고 싶다면 단순히 가담하고 있었던 각종 외교적인 조약들을 변경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가증한 것שִׁקּוּץ(쉬크츠)”를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길과 거리와 골목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여호와로부터 돌아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고 있었던 온갖 종류의 우상들을 남김없이 다 타파打破하고 당신께로 돌아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불결한 의복,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못된 습관, 입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고백하면서도 무엇인가 중요한 결정할 때는 언제나 우상 숭배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등 삶에 깊숙이 녹아있는 우상숭배의 잔재들을 버리고 오직 당신 한 분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라고 촉구하셨습니다. 누구도 거부하거나 대적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와 절대 주권으로 지으신 세계를 통치하시는 여호와와 호흡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는 헛것에 불과한 우상들은 결단코 양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양보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하나로 화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 여호와가...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인류와 언약을 맺으리니 너를 만국의 빛이 되게 하리라.”(사42:6), “여호와가 이르시되...내가...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49:6)라는 선지자의 외침에 따르면, 절대 주권을 행하시는 여호와 한 분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는 백성들은 포로로 붙잡혀 있었던 절망의 땅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온갖 질병들과 문제들과 속박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었던 크고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축복의 내용은 받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리게 되는 축복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물론, 같은 범주에 속한 축복을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만을 위한 맞춤 축복, 독특한 축복도 있습니다. 동시에 성민 이스라엘은 어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이방을 비취는 거룩한 빛이 됩니다. 여호와가 축복의 근본적이고 또 참된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말 정도가 아니라 삶으로 확실하게 증명하여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이방인 스스로 여호와께 돌아와 순종하며 복을 구하게 만드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여호와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거룩한 수단이 됩니다. 성민 이스라엘 곧 저와 여러분의 참된 회개 곧 여호와에게로의 돌이킴은 자기 스스로는 물론 인류에게까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민 이스라엘 곧 저와 여러분에게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붓기까지 집착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거룩한 희생 제물로 못 박으신 이유입니다. 여호와께서 부르실 때 절대 망설이지 말아야합니다.
주저하지 말아야합니다. 신속하게 돌아설 수 있어야합니다. 특히, 죄는 합당한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마련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무조건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도록 이끌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동시에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며 저주하시는)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습1:5b) 어리석음을 범하는 이중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면서 거친 땅을 갈고 농사를 짓는 것 같은 진지한 자세로 죄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는 곧 완전히 파묻혀 있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러워진 마음을 철저히 찢어야합니다. 가시떨기처럼 저와 여러분의 수고와 기대를 질식시키는 부패한 죄의 뿌리들을 깡그리 뜯어내야 합니다.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서 갈아 엎어버려야 합니다. 죄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절대로 용납하지 뿌리째 뽑아 버려야합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경작할 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거룩하게 구별해야합니다. 결단만 하면 여호와께서 시작하십니다. 이루어주십니다.
반면, 죄가 해결되지 않은 아니 죄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마음에는 온갖 가시덤불과 잡초들이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방심하고 한 눈 팔면 순식간에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원하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끝내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끌 수 없는 영원한 불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남 왕국 유다는 이미 여호와의 징계를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북 왕국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깊은 죄악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문은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렘4:5-6)라고 이어집니다. 드디어 심판이 주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서든지, 아니면 그대로 심판을 받든지 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핑계하지 못하도록, 가장 어리석은 자들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사실, 선지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외침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혹독하게 핍박했습니다. 이제, 예고되었던 심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심판은 성민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큰 재앙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파멸이었습니다. 북방으로부터 임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B. C. 612년,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던 앗수르를 제압했습니다. 단숨에 근동 지역의 패권을 휘어잡았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서 주변 국가들을 닥치는 대로 초토화시켰습니다.
완전히 접수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에서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숲속을 뛰쳐나온 어린 사자 같았습니다. 그때, 성민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방인으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아무리 경고하고 또 경고해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아니 빠져나오려는 마음 자체를 갖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효하는 어린사자의 소리에 완전히 질리고 기가 눌려서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 뜻 떨다가는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먹잇감이 되고 마는 짐승들 같았습니다. 성읍들은 헐려서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상복을 입었습니다. 초상을 치르듯이 울부짖었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완전히 무시하고, 때로는 혹독하게 핍박하며, 선지자가 당하는 고통을 즐기기까지 했었던 왕과 측근들 곧 정치 지도자들은 낙심했습니다. 거짓 안전을 외쳤던 타락한 제사장들은 정신을 잃었습니다. 공허한 평안과 회복을 약속하며 선지자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거짓 선지자들은 넋이 빠졌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을 예고했었던 선지자마저도 너무나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한숨을 몰아쉬면서 탄식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바벨론은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뜨거운 폭풍 같았습니다.
질주해 오는 바람이었습니다. 식물을 완전히 말려 버리는 바람이었습니다. 땅의 열매들을 완전히 결딴내 버리는 바람이었습니다. 만물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어버리는 검은 바람이었습니다.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피할 수도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피하여 어디로 도망하든지 순식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집요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민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거나, 키질하여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불어오는 부드럽고 순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진멸시키기 위해서 불어오는 거칠고 강력한 바람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으키신 파멸의 바람이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로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의 군사들은 마치 빽빽하게 운집해 있는 구름 같았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몰고 다니는 병거는 거대한 회오리바람 같았습니다. 이동하는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거기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馬들은 먹이를 잡으려고 날아가는 독수리보다도 빨랐습니다. 그들을 막으려는 수단들은 하나같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을 전복시키고 말겠다는 생각은 무익한 희망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비록 더딘 것 같이 보여도 일단 시작이 되고 나면 누구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악רָע(라아)”을 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너희의 마음을 바로잡아 나를 배반하지 않게 해주리라.”(렘3:22a)라는 말씀에 따르면, 심판이 임박했다 할지라도 회개의 부르심은 결코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찾을 수 있는 의인의 수를 오십 명에서 열 명까지 줄여가면서 여호와의 용서를 구했던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곧 횟수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마18:22b)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염통이 터집니다. 나팔 소리 나고 싸움터에서 아우성치는 소리 들려와서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렘4:19)라고 이어집니다. “슬프고מֵעֶה(메에)”를 직역하면 “창자”입니다.
정신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충격을 받았을 때,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신체 내부 기관이 보이는 반응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심장이 터졌습니다. 물과 피가 분리되었습니다. 심낭에 모였습니다. 로마 군병이 무심코 찌른 창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나라와 백성에게 닥칠 미래를 환상을 통해 눈으로 똑똑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귀로 선명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견고하다고 믿었었던 성문은 너무나 쉽게 열렸습니다.
성벽은 불탔습니다. 무수히 많은 백성들은 무기력하게 죽어 넘어졌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벽에 아무렇게나 패대기쳐진 상태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습니다. 임신부들은 배가 갈라진 채 죽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방방곡곡 어디든지 모두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남은 백성들 가운데 유력하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국가가 완전히 해체되는 수준의 끔찍한 진멸이었습니다. 미처 깨달아 알기도 전에, 숨 쉴 겨를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반성해 볼 여유를 갖지도, 도움을 구할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으로 임했습니다. 욥의 사환들처럼 비극이 계속해서 뒤따라오고 있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대대적으로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요시야의 어이없는 죽음과 함께 난공불락의 성이라 불렸던 예루살렘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채 3개월도 되지 않아서 그의 아들과 계승자 여호아하스가 이집트 왕의 손에 넘어 갔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이삼년이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온갖 종류의 패물들을 탈취했습니다. 이후, 줄곧 남 왕국 유다를 내습來襲했습니다. 여호야김, 여고냐, 시드기야가 통치하는 동안 쉬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약 19년 뒤인 B. C. 586년, 마침내 여호와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렸습니다. 선지자는 환상을 통해서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죄로부터 돌아서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어떤 방법도 강구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지도록 손을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남 왕국 유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도록 맡겨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민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는 열리지 않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의 양떼는 간데없고 목장의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나는 여호와 안에서 환호성을 올리겠습니다...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겠습니다.”(합3:17-18)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數, 하늘을 찌를 듯 높고 화려하며 주차장이 완벽하게 구비된 건물, 부족함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조건 등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만한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민 이스라엘은 쫄딱 망한 다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뒤에야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죄에 찌든 더러운 삶을 살았던 지난날들을 후회했습니다. 진심으로 통회자복하며 회개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 사모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는 합당한 자세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당장의 징계 곧 진멸이 오히려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도무지 헤어 나오기 어려운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탄식하지 않고는, 통곡하지 않고는, 몸부림치지 않고는, 절규하지 않고는 도무지 베길 수가 없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중한 병에 걸린 시한부 환자처럼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전히 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여호와의 마음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다.”(애3:33)라는 선지자의 고백대로, 여호와는 결단코 당신 백성들을 고난에 빠뜨리거나 심판하기 즐거워하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견디기 힘든 징계를 통해 진정한 회개로 유도하신 다음에는 반드시 크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히 베풀어주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는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나는 죄를 채찍으로 다스리고 잘못을 매로써 치리라. 그러나 사랑만은 거두지 않으리라. 성실만은 지키리라.”(시89:32-33)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통해서는 “내가 잠깐 너를 내버려두었었지만, 큰 자비를 기울여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이리라. 내가 분이 복받쳐서 내 얼굴을 잠깐 너에게서 숨겼었지만, 이제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자비를 베풀리라.”(사54:7-8a)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징계를 만났을 때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본문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4:22)라고 이어집니다.
다시 성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어집니다. 그들은 성민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둔했습니다. 자신들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신 여호와를 몰랐습니다. 여호와를 차버렸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11:1a)라는 사도의 외침대로, 여호와는 당신을 차버린 어리석은 그들을 아주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여전히 당신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또 지각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미련했습니다. 참과 거짓은 물론 선과 악도 분별할 줄 몰랐습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섭리를 듣고 보면서도 여호와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참된 이익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악행에는 지혜로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헤치는 데에는 놀라운 지략을 발휘했습니다. 욕정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그야말로 교묘한 안을 내놓았습니다. 죄를 숨기는 데에는 재치가 넘쳤습니다. 반면, 선을 행하는 데에는 무지했습니다. 마음을 쏟아 붓지도, 궁리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너희가 선에는 지혜로우나 악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기를 원한다.”(롬16:19)는 말씀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또 심히 죄악 되면서도 개혁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온 땅에 혼돈과 공허가 가득했습니다. 남 왕국 유다 땅은 온갖 아름다움을 잃었습니다. 온갖 가치를 탈취 당했습니다. 화려했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볼 때 혼돈과 공허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원수들이 태우는 가옥과 성읍의 연기와 군대의 행진이 일으키는 먼지는 태양조차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출현 앞에서 성민 이스라엘이 온갖 가증한 우상들을 모셔 놓고 제사하던 산들은 두려움에 진동했습니다. 구원을 바라던 산들 역시 가시지 않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 들끓었던 지역은 텅 비었습니다. 죽었거나, 도망갔거나,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노래하던 새들까지도 도망쳐 버렸습니다.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얼마나 가혹했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름졌던 땅은 경작할 주민이 사라져 가시와 엉겅퀴만 자라는 황무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들이 거주했던 화려한 집들은 황폐해졌습니다. 성읍들도, 성문들도, 성벽도 무너져 내려 평지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던 침략자들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여호와께서 쏟아놓은 맹렬한 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몰락 같이 보였습니다. 완벽한 파멸 같이 보였습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예외가 전혀 없었습니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렘4:27)라고 이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완벽한 몰락 같이, 완벽한 파멸 같이 보이지만 최종적인 파괴는 아닙니다. 희망의 끝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때도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당신의 분노를 내리시는 날에도 숨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괴된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할 당신의 사람들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주어진 여호와의 언약은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여호와를 떠난 상태에서도 여전히 여호와를 경외하고 있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신 느낌은 과연 어떻습니까? 설명은 일목요연하게 들리셨습니까? 혹시 여호와께서 우왕좌왕, 이랬다저랬다, 심판을 선포하셨다 구원을 약속하셨다 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들으셨다면 잘 들으셨습니다. 당신을 떠나서 죄에 깊이 빠져 있는 당신 백성들을 바라보는 여호와의 마음이 꼭 그렇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외침 역시 하나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워본 부모들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전히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무섭게 매를 들어야할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직 이러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때가 깊이 빠져 있는 죄를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큰 죄는 물론 지극히 작은 죄 하나까지도 절대로 무시하지 말고 철저히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끔찍이 사랑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여호와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복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 누리는 복된 삶,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복된 삶, 세상 사람들을 여호와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여전히 노심초사하며 이랬다저랬다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