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高17回의 기업인,장창현회장이 5월13일 연세대졸업50주년 재상봉행사기념책자에 기고한 글을 올립니다.자랑스러운 친구의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지속적인 정진을 기원합니다 🙏
ㅡ 나의 스승 양훈영 교수님 ㅡ
철강보국의 꿈을 키우고자 어렵게 금속과에 입학했는데 실험실은 커녕 강의실도 없어 신과대학 한경관 구석방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더구나 금속을 전공한 교수님은 한 분도 없고 엉뚱한 분야의 교수와 물리과 조교, 화학과 시간 강사가 강의를 하는데 아무도 금속이 뭔지 몰라 누가 누굴 가르치는지 황당했다. 몇번이나 자퇴를 망설였지만 그나마 독서 써클 활동과 여기저기 다른학과를 도강하면서 답답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있었다. 3학년때 경성대학 야금과를 졸업한 후 만주 일본 제철소에서 용광로 고급 기술자로 일하시다 해방 후 다른 대학 금속과에서 제철 제강학 강의를 하시던 양훈영 교수님이 우리학교로 부임하셨다. 첫날 강의시간에 큰 글씨로 칠판에 “싸게” “좋게” “많이” 라고 쓰시고 앞으로 자네들은 쇠를 이렇게 만들어야하고 내가 그렇게 가르치겠다고 하시면서 처음으로 금속이 무엇인지 철이 무엇인지를 강의하시기 시작했다. 우리동기들은 엄격하지만 무척 자상하신 교수님의 강의에 열광했고 방학 때는 교수님 추천으로 철강공장에서 실습을 하면서 레포트를 제출하고 교수님은 학점에 반영했다.
한번은 강의하시던 중 눈물을 흘리시며 일제시절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가난하고 낙후된 우리 철강산업의 현실을 얘기하시면서, 너희들은 졸업 후 무조건 제철소 현장에서 헬멧 쓰고 워커 신고서 꼭 세계최강의 일본을 능가하는 철강기술자가되어 수출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여 조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절규하셨다. 그분께서는 며칠 후 최신 일본 잡지 月刊金屬을 한권 주시면서 복사해서 나누어 읽고서 각자 일본어로 발표하면 결과에 따라 학점을 매긴다고 하셨다. 우리는 너무 당황했지만 학점 따려고 죽어라 일본어를 배워 매월 발간되는 月刊金屬 최신 기술을 일본어로 더듬더듬 발표했다. 우리 동기들은 졸업 후 포항제철 등 전국의 철강 회사에 취직했다. 최신 일본 철강기술잡지를 매월 구독하고 유창한 일본어 실력 덕분에 각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내 모두 초고속 승진을 했다. 나도 용광로에서 양교수님 말씀대로 헬멧 쓰고 워커 신고서 4년동안 쇳물을 끓이다 78년 구멍가게 철공소를 창업했다.
나는 매년 양력 설날이면 꼭 화곡동 교수님댁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는데 검소하지만 아담한 주택에는 교수님의 수많은 박사 교수 기업인 제자들로 붐볐다. 부엌에서 그 바쁜 와중에서도 인자하신 사모님은 맛있는 음식를 각별히 챙겨주시며 내 손을 꼭 움켜잡고 모두들 사업이 어렵다는데 자네만은 꼭 성공 할거야 하시곤 하였다. 93년 설날 세배객들의 눈을 피하여 이른 아침에 어느때처럼 세배를 갔는데 교수님이 “자네 얼굴이 안좋은데 사업은 괜찮은가?” 하시길레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힘없이 말하자 교수님은 나에게는 숨김없이 털어놓으라고 하자 나는 그만 울컥 훌쩍였다. 교수님은 한참동안 장롱을 뒤적이더니 통장 5개와 도장을 주시면서 “이게 그동안 저금 하여온 통장과 받은 퇴직금 전부라네 얼마 안되지만 이 돈으로 회사를 살리게” 하시면서 아무리 뿌리쳐도 억지로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댁을 나오면서 대문 우편함에 통장과 도장을 넣고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그날따라 몹시 매서운 추위 속을 펑펑 눈물을 흘리며 무작정 한없이 걸었다. 그날 오후에 등산화에 돕바를 걸치고 시외버스터미날에서 설악산 원통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걸어서 백담사에 도착하니 이미 캄캄한 밤중이었다. 손전등에 의지하며 묵묵히 대청봉을 향하여 눈길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딩굴면서 걸었다. 아니 몸부림쳤다. 창업 후 지난 15년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회사 설립하자마자 그동안 축적된 금속기술로 유럽 규격을 국산으로 승인 받아 중동 건설 현장에 납품하면서 기반을 다지고 동양 최초로 Space Prame을 독자 계발하여 50평짜리 월세 구멍가게에서 계속 공장을 확장하고 일생의 목표인 1억불 수출을 달성하고자 전념하던 중, 80년대 후반에 일본에 불어닥친 주차설비 붐에 잘나가던 제스트 재팬 사사키 회장과 술잔에 서로의 피를 섞어 마시며 의형제를 맺었다. 시화공단에 대규모 주차설비 전용공장을 은행 융자로 설립하고 동경사무소에는 우리 엔지니어를 12명이나 파견하고 매주 부산항에서 배 한척씩 실어 보냈다. 일본은 물론 미국 시장을 함께 진출하고자 현지 지사를 설립하고 계속 공장을 확장시켰다. 92년 가을 사사키 회장이 “일본정부와 주차법 재판에서 패소하여 회사가 파산한다”는 편지를 보내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너무 청천벽력의 소식에 앞이 캄캄하였다. 그동안 수십척을 일본에 외상으로 선적했고 공장에는 산더미처럼 재고가 쌓였는데 은행에서는 눈치를 채고 대출금 상환 독촉과 내 개인 재산을 모두 압류하고, 거래처 채권자들은 사무실을 점거 농성까지 하였다. 당일치기로 동경을 수없이 왕복하면서 발버둥쳐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고 자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비행기가 추락하여 죽어 버리길 바랬다. 살을애는 설악산 칼바람 속에서 눈속에 파묻혀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회사만 살릴 수 있다면············. 온 몸이 무감각 상태로 대청봉에 오르니 어느덧 멀리 동해안에서 붉은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있었다.
다음날 시무식 후 먼저 살던 집을 변두리 월셋집으로 이사하고 운전기사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고 했다. 집사람은 의사 변호사 남편을 둔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회사 융통어음을 높은 이자로 할인하여 직원들 월급을 마련하고 약국에 취직하여 생활비를 벌기 시작하였다. 시화 1공장만 남겨두고 비싸게 마련한 시화2공장 반월1,2 공장을 헐값에 매각하고 익숙지 못한 이코노미석에 움츠리며 호텔 대신 공항 대합실에서 잠을 청하면서 대공간 철구조물의 현장을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동남아로 미국으로 전세계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니며 바이어들을 만났다. 천신만고 끝에 대규모 스페이스 프레임을 잇따라 수주하고 아시아 최초로 PEB 개발에 성공하여 은행투자까지 받아 가까스로 부도를 면하고 꼭 성공하여 교수님을 찾아 뵈겠다고 한, 나와의 약속을 지켜 3년만에 교수님 댁을 찾아갔었다.
그런데 그때 교수님은 위암 말기였고 너무 늦게 발견하여 수술도 못하실 처지로 무척 수척하신걸 보고 너무 충격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간곡히 수술을 권했지만 잔잔한 미소를 띄우시면서 “자네는 이렇게 재기 할 줄 알았네, 내 걱정은 하지 말게 자네를 다시 보니 너무나 기쁘네,” 하시며 수술을 사양하셨다. 왜 그동안 전화 한번도 못 드렸는지 회사 살리는 것이 뭐라고 그동안 못 찾아 뵙는지, 나는 머리를 치며 한탄했다. 병환이 점점 깊어가 밥을 못 드셔서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계속 생전복을 사가지고 전복 죽을 끓여드리면 맛있게 드셨다. 그 당시만해도 요즘처럼 양식 전복이 흔치 않아 꾀 비싼 편이라 부담이되어 몇달 후에는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말린 전복으로 전복 죽을 끓여드렸는데 나중에는 결국 식음을 전폐하시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나는 퇴근 후 매일 매일을 병원에 찾아 뵙고 교수님 옆을 지켰다. 97년 5월 급한 일로 며칠 상해에 출장 중에 교수님의 운명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빈소로 달려 같다. 수많은 제자들과 학계와 철강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줄을 이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교수님의 유해는 일산 기독 공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나는 기일이나 명절때는 물론 한달에 몇번씩도 자주 일산 묘지를 찾아 즐겨 드시던 약주를 올리고, “이제 겨우 회사가 숨쉬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3,000만불 수출탑 받았습니다” “올해는 7,000만불 수출탑을 받았는데 교수님께 약속한 1억불 곧 달성할 것 같습니다” 홀로 교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일산 아드님댁에 사시는 사모님한테는 매년 설날과 추석 때 찾아 뵙고 교수님의 옛날 얘기를 들었는데 몇 년 후 노환으로 별세하셔 가족분들과 함께 두분의 유해를 수목장 행사를 한 후부터 교수님 묘소 앞에서 술잔을 올리면서 하소연을 할수없게 되었다. 교수님의 가르침 덕택에 이제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탄탄한 기업으로 자리잡은 저희 회사는 작고하신지 몇 년 후 1억불 수출탑을 받았고, 2012년 무역의 날에는 대통령 수상 2억불 수출탑을 받고서 곧장 교수님께 달려가 자랑하고 싶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저희 공장과 세계 곳곳에 제가 세운 대공간 구조물을 보여주고 싶고, 교수님이 학위취득하신 호주 멜번 대학에 모시고 가서 최고급 그랜지 와인을 함께 마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생활이 여의치 못하여 말린 뉴질랜드 전복으로 죽을 끓여드린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고 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인데 해외에서 임종을 못 지켜봐 아쉽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교수님이 그토록 염원 하시던 선진국에 진입하여 경제규모에 별 의미가 없겠지만 제 생전에 꼭 10억불 수출탑을 받아 언제가 저도 교수님 곁에 가면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겠습니다. 로버트 포로스트의 時 “두갈레의 길에서 먼 훗날 나는 그때 양교수님을 못 만났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졸업50주년을 맞이하여~ 교수님! 너무나도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