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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희 9호 원고 (隨筆)
1. 여우 같은 아내와 팔불출 남편! (隨筆) 影園 김인희 필링콘서트에 초대되어 홍산 행정복지센터 야외무대에서 시낭송을 하기로 했다. 가을의 오후는 태양의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행사가 휴일로 잡혔기 때문에 남편과 동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은 평일에 행사가 있을 때는 무대에 선 아내의 모습을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다. 그때는 딸에게 두둑하게 용돈을 챙겨주면서 엄마와 동행하여 응원해 주고 사진을 찍어주라고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남편은 집에서 행사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교회를 다녀오고 배경음악에 맞추어 시낭송 연습에 여념이 없는 아내를 위해 무대의상을 손수 다림질해 주었다. 아내가 어깨에 흰색 머플러를 두르겠다고 하자 머플러도 다림질했다. 자동차를 드라이브하는 남편 옆에서 아내는 긴장하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남편은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주면서 ‘여보, 아마추어처럼 왜 긴장할까. 집에서 연습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해. 내가 있어서 더 긴장하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다. 아내는 심호흡해도 긴장이 누그러지지 않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남편 앞에서 더 잘해 보이고 싶은 아내의 마음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기예보를 모른 채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무대는 돔형 지붕이 있어서 다행히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객석과 출연 대기자들이 있는 곳도 천막을 설치했지만 바람을 동반한 비는 천막 안으로 거침없이 침범했다. 아내는 출연진들과 따로 떨어져 있었고 남편은 객석 천막에서 아내의 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긴장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스스로 점검하고 있었다. 배경음악 어디쯤에서 인사하고, 어디쯤에서 시낭송을 시작하고,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할 것과 감성으로 시를 낭송하여 객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詩를 통하여 문학의 바다에 풍덩 빠져들게 하고 싶은 야심을 간직했다. 행사를 주최한 필링콘서트에 노래와 어우러지는 시낭송으로 흡족한 결과를 안겨주고 싶었다. 아내는 스스로 주마가편하면서 객석에 앉아있는 남편을 바라봤다. 남편은 장대비가 들이치는 천막 안에서 꼼짝 않고 있었다. 아내의 가방을 품에 안고 보호하면서 동영상 촬영을 위해 휴대전화를 삼각대에 설치하고 있었다. 남편은 일주일 동안 한시도 쉼 없이 일하고 모처럼의 휴식시간을 아내를 위해 바치고 있는 숭고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 남편의 어깨너머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내는 스물여덟 살에 스물아홉 살의 키 큰 청년을 지인의 소개로 만나서 4개월 만에 결혼했다. 결혼 전에 만난 횟수는 열 손가락 꼽으면 손가락이 남았다. 남편과 아내를 측근에서 지켜보고 만남을 주선한 양가 어른을 믿었고 둘이 연애 한 번 못한 숙맥이라는 공통분모가 가깝게 했다. 결혼 후 아내는 지인들의 연애 사연을 돈키호테의 무용담처럼 부러워하면서 연애 시절이 없었던 것을 핵무기를 능가하는 최신 무기로 여기게 되었다. 어쩌다 일상에서 전환하고 싶을 때면 ‘아, 연애하고 싶다!’라고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아내가 독서를 할 때마다 ‘지금은 시인과 열애 중이야!’, ‘지금은 소설가와 사랑에 빠졌어!’, ‘이번 사랑은 삼각관계야. 작가와 주인공 둘 다 멋있어!’라고 선포하면 남편은 빙그레 미소 짓고 ‘알았어, 데이트비용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줄게.’하고 받아넘겼다. 요즘 아내에게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구와 열애 중이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언젠가부터 책의 저자를 직접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남편과 아내의 눈치를 살피면서 키득키득 웃고 남편은 개선장군처럼 박장대소를 하는 날들이다. 아내가 두 자녀를 수술해서 출산하고 몸이 아파서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키 작은 아내는 넓은 침대에 뉘고 몸집이 큰 남편은 보호자용 침대에서 웅크리고 쪽잠을 자면서 간호했다. 아내가 신음하면 함께 밤새고, 간호사에게 달려가고, 수술을 기다리면서 금식해야 하는 기간에는 남편도 함께 금식했다.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남편이 자리를 비울 때면 이구동성으로 ‘새댁이 복이 많아. 남편이 자상하게도 보살피네. 여기 둘러봐. 남편이 병간호하는 사람이 있나.’라고 말해주었을 때 비로소 남편의 사랑을 깨달았던 숙맥이었다. 자녀들을 출산했을 때는 빈혈이 심했던 아내가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서 신생아실로 가서 우리 아기들을 만날 수 있게 했다. 공주 같은 딸과 왕자 같은 아들을 얻을 때 우리 부부는 적금통장 하나씩 해약하고 산고(産故)도 함께 했다. 남편은 자녀들을 잉태했을 때 태교를 시작하고 자녀들을 출산한 후 양육할 때 전적으로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 배포 큰 남자였다. 아내가 자녀들의 백일반지와 돌반지를 팔아 방안에 가득 책으로 채울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자녀들 학교생활과 학교 행사에도 아내에게 선택권을 주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 주었다. 두 자녀를 옆에 끼고 아내가 방송통신대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남편의 외조는 빛을 발했다. 아내가 시험 보는 날에 남편은 대전 시험장에 아내를 내려놓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대청댐에서, 대전 동물원에서 종일 지내고 태양이 서산을 넘는 어스름한 저녁에 꾀죄죄한 자녀와 녹초가 된 모습으로 시험장으로 아내를 데리러 왔다. 그 시절이 가장 힘든 시기라고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는데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때 남편이 가장 젊었고 자녀들이 가장 예뻤고 아내의 꿈은 싱그러웠다! 남편은 아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후 단독주택을 사서 옥상을 공사하여 방을 지었다. 아내가 교육지원청에 과외교습소 인허가를 받아 공부방을 차리고 학생들을 불러 모아 공부방 교사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옥상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위험할 수 있어서 학생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집 안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기로 했을 때 남편과 두 자녀는 양보와 배려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 만장일치로 집을 활짝 열어 공부방을 응원했고 아내는 15년이 넘는 시간을 행복하게 일했다. 아내가 공부방을 하는 기간에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성경을 읽다가 우쭐하고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어 가는 것을 보았어요. 내가 공부방을 하는 동안 당신에게 학생들이 몇 명인지 밝히지 않을 거예요. 단 수강료를 한 푼도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남편은 아내에게 공부방을 운영하는 동안에 절대로 수입을 묻지 않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도 단 한 번도 묻지 않고 있다. 남편은 지금도 철없는 아내가 두 손을 벌리고 용돈을 달라고 하면 웃으면서 지갑을 열어서 돈을 주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아내가 예쁜 옷을 사달라고 하면 아내를 데리고 쇼핑을 가서 아내가 옷을 고르는 동안에 매장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려주는 남편이다. 아내가 이 옷 저 옷을 고르고 입어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도 웃으면서 기다려준다. 매장의 직원이 보통 사람들은 옷을 살 때 남편하고 오면 재촉해서 힘들다고 하소연하면서 잔잔하게 기다리는 우리 남편을 보고 감탄을 하곤 했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팔찌와 반지를 선물로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도둑이 들어서 선물을 잃어버렸을 때 경찰이 다녀가고 사이버수사대가 다녀갔어도 찾지 못했다. 아내는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 20주년 선물이라는 의미마저 도둑이 가져가 버린 것만 같아서 속상해서 울었다. 남편은 아내를 달래기 위해 도둑맞은 것과 똑같은 팔찌와 반지를 다시 사 주었다. 그때 성인이 된 딸은 남편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순애보라고 인정했다. 아들은 어깨를 올리면서 남편을 아내만 아는 팔불출이라고 했다. 최근에 아내가 강의 준비를 하면서 노트북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년부터 공부를 시작하려면 노트북이 필수라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 선물로 가장 좋은 최신형 노트북을 선물했다. 남편은 노트북을 사면서 전문가에게 따로 부탁해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다른 프로그램들을 설치해 주었다. 남편은 그렇게 아내를 위해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에게 아내는 여우 같은 자신을 선물하고 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날 때 가장 달콤하고 따뜻한 언어로 하루를 열어주는 현숙한 아내를 주고 있다. 주말에는 거실 가운데 큰 상을 펴고 특별한 상차림으로 이벤트를 선물한다. 시댁에 갔을 때는 고분고분한 며느리가 되어 시어머니 밥상을 차려드리고 정겹게 대화하면서 기쁨을 주고, 자녀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현모양처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안겨주고 있다. 지인들의 모임에서는 남편을 존중하는 아내의 도리로 남편의 자리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런 일인다역의 아내를 보고 성인이 된 딸은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추고 있는 여우라고 놀려댄다. 남편과 단둘이 있을 때 아내는 언제나 귀여운 여인으로 돌변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가 드라이브를 시작하면 아내는 물개 손뼉 치면서 들떠서 노래하고 쉬지 않고 떠들어 댄다. 장거리 여행 중에 휴게소에 들러 맛있는 간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조차 소중한 추억이 된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 ‘문학관’이라는 이정표가 나오면 남편은 무조건 문학관으로 행로 바꾸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글을 쓰는 아내가 문학관에서 감탄하고 진지해서 시간 가는 줄 몰라도 소리 없이 휴대전화에 아내의 모습을 담으면서 기다려준다. 아내가 문학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남편은 아내의 사진을 자녀들에게 전송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문학관에서 출발하여 목적지를 향해 가는 자동차 안에서 문학관이 어땠는지 감동을 묻는 자녀들의 카톡을 받고 답장하는 순간은 아내가 얌전해지는 시간이다. 남편과의 역사를 회상하는 동안 행사 시간이 무르익어가고 어느새 내 순서가 코앞에 있었다. 사회자의 안내를 받아 무대 중앙에 오르고 배경음악에 맞추어 시낭송을 했다. 가을로 가는 여정에서 시인의 눈앞에 다가오는 산은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객석에서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무대 위의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입꼬리가 귀에 닿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내가 무사히 낭송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를 듣고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내는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오늘 궂은 날씨에도 나를 위해서 긴 시간 동안 함께 해주어서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무대에서 떨지 않고 잘한 것 같아요.” “응, 나도 기분 좋았어. 당신, 정말 잘했어!”라고 남편이 대꾸했다. 아내는 다정하게 덧붙인다. “여보, 당신이 최고 멋있는 남자라는 거 알아요? 신형 그랜저 자동차 옆자리에 무대에서 시낭송을 마친 예쁜 아내를 태우고 가는 남자가 몇 명이나 있겠어요. 헤헤...” 여우 같은 아내의 닭살 애교에 팔불출 남편은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린다. 남편은 아내가 평생 무릎 꿇고 포복하면서 섬겨야 할 하늘 같은 사람이다. 계절이 시나브로 깊어가고 있는 시월의 멋진 날이었다! 2. 내가 사는 이유 (隨筆) 影圓 김 인 희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매일 아침에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걸어서 출근하고 종일 한자리에 앉아서 일하고 퇴근한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에 갇혀 뱅뱅 도는 것과 흡사하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바람과 하늘은 변화무쌍하다. 감나무에 매달린 열매도 시나브로 굵어지고 있다. 생각의 전환점이 없다면 지루하고 더러는 일탈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할 것만 같다.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문하는 날들이 잦다. 잠시라도 여백이 생기면 우울하게 다가오는 질문에 답을 찾느라 허둥지둥 일을 찾는다. 직장에서는 일에 묻혀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을 때는 잠시의 여백에도 흔들리는 자신이다. 그때마다 일을 만들어 자신을 일에 묶어둔다. 가정에서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화장실에 갇혀 손빨래를 한다. 일에 쫒기다 보면 활력이 생기고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자신이다. 부모님 슬하에서 마냥 순수하게 성장하던 유년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하늘 같은 아버지와 한 떨기 과꽃을 유난히 사랑했던 아름다운 어머니 곁에서 언제나 별빛 꿈을 꾸었다. 아버지께서 가난한 농부라서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스무 살 시절에는 부천에서 살면서 서울에 있는 전력회사로 출퇴근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1호선 전철은 그 당시 ‘지옥철’이라는 닉네임을 달고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하게 사람을 태웠다. 그 전철을 타고 출근할 때는 흡사 전쟁을 방불케 했다. 인천에서 전철이 도착하면 부천 역에서 빽빽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승차해야 하고 용산역을 지나 남영역에서 하차할 때는 핸드백 끝이 끊어진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은 구두 리본 장식이 떨어져서 달랑달랑한 채 출근한 적이 있었다. 아침에 새로 신은 스타킹 올이 나가는 것은 다반사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스무 살 사회 초년생은 그렇게 치열하게 삶의 노선에 뛰어들었다. 거무튀튀한 빌딩 숲에서 호흡조차 크게 할 수 없이 의기소침했던 자신이었다. 알프스를 떠났던 하이디가 도시에서 몽유병에 걸려 방황했던 것처럼 무엇인가 찾아 헤매던 시절이었다. 불현듯이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수불석권(手不釋卷)하라고 당부했던 말씀을 기억해냈다. 그때부터 자신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기독교서점을 단골로 이용하면서 기독서적을 구입해서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다. - 부천을 떠나 천안으로 이사 올 때 기독교 서점에서 헤어지는 것이 섭섭하다고 선물을 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 천안에서 2년 정도 지내다가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딸과 아들을 낳고 전업주부로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정했던 것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살림살이했다. 가정 중심으로 지내면서 두 자녀를 잉태했을 때는 태교(胎敎)에 신중했다. 태교에 관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으면서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을 주의했다. 태중에 있는 아기가 딸이라면 공주처럼 아들이라면 왕자처럼 키우겠다고 다짐했었다. 남매를 양육하면서 생활계획표를 짜서 벽에 걸어두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마다 커다란 대접을 엎어서 스케치북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피자 조각처럼 시간을 나누어서 계획을 세우듯이 자녀들을 양육했다. 가장 밝고 따뜻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동화를 들려주었다. 오전과 오후 정해진 시간을 산책하면서 만나는 풀을 만져보게 하고 꽃 이름을 알려주고 따라 부르게 했다. 가게 앞을 지나갈 때 가게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어주었다. 동화책을 읽어줄 때도 책 제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글자를 짚어 읽어주었다. 자녀들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동화책을 줄줄 읽었다. 지인들은 신동이라고 영재라고 야단이었지만 누군들 그렇게 정성을 들였다면 못했을까. 자연히 실소를 머금는다.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꿈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할 후 직장생활을 하느라 대학 공부를 하지 못했던 한이 가슴에 갇혀있었던 것이다. 큰 딸아이가 다섯 살 되고 둘째 아들아이가 세 살 되었을 때 두 자녀를 안고 공주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습관을 찾아가서 원서를 접수했다. 대학 졸업장뿐 아니라 공부를 제대로 하겠다고 벼르고 기세 좋게 영어영문학과에 지원했다. 내 삶의 여정에서 그때만큼 치열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두 자녀를 품에 끼고 방송으로 공부를 했다. 지금은 컴퓨터를 통해 온라인으로 학습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지만 그때는 TV로 방송되는 시간에 맞추어 수업을 들었다. 자녀들과 실랑이하면서 제대로 방송을 듣지 못할 것을 우려해서 매 방송마다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두고 반복해서 수업을 들었다. 중간고사 두 번 학기말 시험 두 번 매년 네 번의 시험을 치르고 점수에 따라 통과하고 점수가 미치지 못하면 과락으로 다음 학기를 재수강해야 했다. 고전분투(孤戰奮鬪)가 따로 없었다. 4학년 되던 해 갑상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학교 측에 수술해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해야 하는지 문의했더니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무조건 과락이라고 했다. 어찌나 미련하였는지 목에 거즈를 두른 상태로 시험 보러 가다가 버스 안에서 잠시 혼절했었다. 과락으로 한 학기를 더 연장해서 공부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매달렸건만 전공과목 과락이 있어서 영어 영문학사가 되기까지 5년이 걸렸다. 대학을 졸업한 후 2층 집을 구했다. 1층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2층은 공부방을 차려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방과 후에 공부했다. 방 벽면을 동화책으로 꽉 채우고 면학분위기를 조성했다. 상담 차 방문한 부모들은 망설이지 않고 자녀를 등록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신실하게 뛰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많은 아이들이 ‘사임당 공부방’을 거쳐 갔다. 주말에는 독서논술 지도를 했고 저녁에는 중학생 영어 과외를 지도했다. 더러는 거리가 먼 아파트로 출장 수업도 나갔다.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논산에 있는 건양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방을 마치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대학원에 가서 교수님과 동료 선생님들과 공부할 때 너무 행복해서 탄성을 질렀다. 교수님과 대면하고 수업을 하는 것이 꿈만 같았다. 자신의 열정적인 수업태도에 지도교수님께서는 ‘K선생님이 학부생이라면 키워주고 싶다.’고 했었다.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답사여행으로 다녀온 나병환자들이 있는 소록도 방문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큰 딸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현모양처 우렁이 각시도 밖으로 나왔다. 자녀들에게 집에 있는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공부방을 할 때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었다. 막연한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나이 50대에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강의를 하겠다고 했었다. 어느 날 노트에 적어 두었던 미래 플랜을 펼쳐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꿈의 노선에 들어선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시작 노트를 들고 다니던 계집아이는 불혹의 나이에 등단하여 詩人과 隨筆家가 되었다. 등단할 수 있었던 것은 스무 살 시절 앓았던 불치병 활자중독증에 걸렸던 것이 자산이 되었다는 것을 역설한다. 참으로 고단하지만 대견하게 걸어왔다. 독서의 원동력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로 이끌었다. 글을 쓰면서 희열을 느끼는 중년이다. 가정에서는 안주인으로 권세를 누리고 밖에서는 직장인으로 일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문학회의 사무국장으로 편집국장으로 맡겨진 일들이 감사하다. 늘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문학회 답사 시 인솔하고 사회 진행하는 일, 편집을 하기 위해 컴퓨터와 마주하고 일하는 시간, 써야 할 글이 숙제처럼 기다리고 있을 때... 자신이 사는 이유를 찾는 소중한 시간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내일은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근두근 설렌다. 3. 百濟精神의 再發見 學術 大討論會 (칼럼) - 제67회 백제문화제 기념 제1회 학술 대 토론회 - 影園 김 인 희 부여는 백제(百濟)의 도읍지였다. 부여에서는 격정의 여름을 지내고 하늘이 쪽빛으로 빛나는 계절이 되면 백제문화제를 개최했다. 불청객 코로나-19는 떠날 기미가 없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한없이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학술대회 대토론회장에 도착하여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텅 빈 객석에 앉았다. 추진위원장님이 내외빈을 소개하고 토론자를 무대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학술대회는 백제고도교육문화예술재단 주최, 백제부여학술대회조직위원회 주관, 충청남도와 부여군의 후원으로 부여문화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홍문표 박사께서 왜곡된 백제 역사에 대해 역설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본기]는 거짓증거라고 거침없이 발표했다. 같은 시대에 대한 [신라본기]의 기록과 대조했다. 신라의 태종무열왕 6년인 660년은 백제 의자왕 즉위 19년이 되는 해였다. [신라본기]의 기록에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공하여 당에 사신을 보내 군병을 걸사(구걸)할 정도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나라의 답이 없어 왕이 걱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당시 의자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충신의 말을 듣지 않고 귀양 보냈으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침략 직전에 의자왕은 장수를 보내 신라의 두 성을 침공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신라인이라는 것을 인지할 때 [신라본기]의 기록은 가장 사실적이지 않겠는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사는 반드시 재검토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낸 김진환 변호사께서는 해양대국 백제가 한류 열풍의 원조였다는 것에 대해 발표했다. 일례로 한류 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시청률 80%를 차지했다고 했다. 문화 경쟁력을 통해 국가 위상 높였다는 것을 역설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백제는 문화적 영토가 삼국 중 가장 넓었다.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되고 문화 예술성이 동시대 가장 앞섰다는 것을 상기하자고 했다. 백제는 주변국에 문물을 전파했다. 백제는 높은 항해기술을 보유하고 해양으로 진출했던 문화국이었다. 백제 역사를 재발견하여 전쟁과 패권이 아닌 문화강국으로 세계를 제패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현 부여군수께서 부여사람들 중심으로 백제정신의 재발견 학술 대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시작했으니 거듭 발전할 것이라고 치하했다. 승자의 왜곡으로 아픔을 간직했던 부여인으로서 터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백제를 재조명하는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했다. 군수께서는 성왕 이후 의자왕과 부흥 운동까지 약 128년의 백제 역사를 집대성하고 있다고 야심 차게 발표했다. [삼국사기] 나온 이래 800년의 시간이 흘렀다. 덧씌워진 패망의 역사라는 멍에를 벗어버리기 위해 백제 역사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나라가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백제만 패망이라는 오욕으로 덧씌워졌다는 것을 강조했다. 집필하고 있는 역사서는 대학 교재로 사용 가능한 전문서적으로 만들라고 했다. 박정현이라는 이름과 부여군이라는 이름을 넣으면 널리 읽혀지지 않으니 그 이름을 넣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했다. 공신력 확보할 수 있는 역사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대중서로 다시 집필해서 대중들이 두루 읽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초중고 과정에서 거치는 교과과정에서 역사를 교육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최규학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 지부장께서는 계백 장군의 패기에 대해서 발표했다. 계백 장군의 패기에 대해 그릿(grit)이라고 했다. 무왕의 위트(wit), 백제금동대향로의 엑셀런트(excellent), 백제 불상의 미소에 대해 어필했다. 삼국 중 백제에 대해 [여유당전서]의 기록을 소개하고 계백 장군은 역사에서 가장 짧게 등장하나 가장 긴 여운을 주고 있다고 했다. 계백 장군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적군에게 유린당할 가족을 스스로 벤 대의멸친 사례는 큰 위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필생즉사, 사필즉생! 황산벌 전투는 1박 2일의 짧은 전투였고 백제의 전망과 신라의 명운이 달린 전투였다. 계백 장군이 최후의 승리자라고 했다. 미국의 제임스 미치머 작가는 한국인에게 영원한 종교는 나라에 대한 뜨거운 정이라고 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계백 장군의 패기는 우리의 DNA에 박혀있는 한국의 종교와도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충청효교육원 최기복 원장께서는 다른 지자체에 가보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재현하고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고 했다. 홍길동전을 실제 살았던 인물로 재현하고 있는 곳, 춘향이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것처럼 현실로 불러내고 광한루에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 하동에 가면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土地)에 나오는 공간적 배경을 실제의 장소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을 실례로 들었다. 부여는 백제 역사를 간직한 도읍지였다. 궁남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팩트(fact)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부소산성 낙화암에 가보면 30명이 설 수 있을까 말까 한 장소인데 3천 궁녀가 빠졌다는 기록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 반드시 재조명해야 한다고 했다. 만리장성을 쌓은 공덕보다 돌 하나를 쌓다가 죽은 노무자를 기억하고 볼 수 있는 역사의 시각을 바로 잡으라고 했다. 신라의 화랑도 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은 전쟁터에서 물러나지 말고 죽으라는 계율이라고 했다. 계백 장군은 세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효장(孝將)이었다는 것을 역설했다. 계백 장군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에게 ‘제군들이여, 죽지 말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처자식을 돌보라.’고 외쳤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부여에 살고 있는 부여군민 모두가 역사의 산증인이 되고 해설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필자는 학술대회 소감문을 쓰기 위해 주최하신 교수님과 통화를 했다. 지금까지 백제문화제는 추모제에 치우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학술적인 접근에 주목한다고 했다. 백제 침공의 역사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역사에 대해 순수하게 학자들의 주제발표와 논문집을 발간하는 학술대회로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매년 거듭하면서 백제정신을 재발견하여 함양, 백제인의 자긍심을 고취, 왜곡된 백제 역사를 바로 진단할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거친 심장박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호흡이 뜨거웠다. 백제의 왜곡된 역사에 대한 한(恨)을 가슴에 담고 지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타래 풀 듯 백제의 역사와 의자왕의 억울함을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학술대회를 참관한 후에 또 하나의 빗장을 열었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명분을 사명감으로 받아 안았다. 수년 후 그 무대에 서서 백제 역사에 대해 발표하는 필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을 하늘이 푸르게 빛나고 있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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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출판 대표님!
김인희 원고 최종 편집 원고입니다.
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