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요심(辽沈) · 회해(淮海) · 평진(平津) 전역(战役)이란 어떤 전투였는가?
1945년에 항일 전쟁이 끝난 얼마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관계는 서로 언제라도 내전에 돌입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오랜 전쟁에 지쳐 국내에서의 전쟁 발발을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서로 먼저 공격하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명분을 잃는 것이었으나, 인내심을 잃고 먼저 공격을 시작한 쪽은 것은 국민당의 장개석(蒋介石)이었다. 그는 1946년 7월에 공산당군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발동하여 한 때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延安)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에 대하여 공산당군도 1949년 9월에 총반격을 개시했고, 이렇게 하여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은 다시 치열한 전투 상태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공산당군이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섬멸하고 완전히 대만으로 밀어내기까지는 세 번의 커다란 전역을 치뤄야 했는데, 이 세 번의 전투가 바로 요심전역(辽沈战役)·회해전역(淮海战役)·평진전역(平津战役)의 3대전역(三大戰役)이었다.
1. 요심전역(辽沈战役)
1948년에 이르자 국민당과 공산당의 생사를 건 최후 결전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이 무렵 장개석은 공산당군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택동(毛泽东)을 위시한 중공 중앙은 우선 국민당의 동북군을 공격하여 동북 지역을 빼앗기로 결정했다. 중공 중앙 안에서는 이 계획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결국 모택동의 이 계획은 관철되었다. 모택동의 이 판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당시 국민당의 동북군 병력은 약 55만명을 헤아렸는데, 공산당군은 103만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어서 국민당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동북 지역의 상당 지역이 이미 공산당의 손에 떨어진 상태여서 국민당군은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국민당의 동북 지역 사령관 위립황(衛立煌)은 병력의 열세 때문에 병력을 집중하여 동북의 요지인 심양(沈阳), 장춘(长春), 금주(锦州)에 병력의 방어에 주력하려고 했다. 중공 중앙은 전기(战机)가 무르익자 동북 지역의 공략을 위해 대규모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공산당군은 북녕선(北宁线: 북경-심양)을 타고 남하하여 교통의 요충지 금주를 탈취하고 국민당군을 동북 지역에 고립시켜 각개 격파할 작정이었다. 공산당군의 동북 야전군 53개 사단은 임표(林彪), 나영환(罗荣桓)의 지휘 아래 병력 70여 만명을 집결하여 국민당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국민당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금주가 공산군의 손에 떨어졌고, 공산당군은 이어서 신속하게 서쪽으로 이동하여 요서회전(辽西会战)에서 국민당군의 요요상(廖耀湘)군단을 포위하여 섬멸했다. 전체 전투에서 공산당군은 약69,000명의 사상이라는 적은 희생을 치르고 국민당군 56,800명을 살상하고 306,200명의 포로를 잡아 대승을 거두었다. 1948년 9월 12일에 시작하여 11월 2일에 끝난 요심 전역에서의 승리로 공산당군은 내전의 주도권을 쥐었고, 동북 지역을 국민당군에 대한 공격의 거점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2. 회해전역(淮海战役)
요심전역(辽沈战役) 이후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에 대해 2차 대공세를 펼쳤는데, 이 전투를 회해전역(淮海战役)이라고 부른다. 동북 지역에서의 국민당군의 패배로 전선은 자연히 화중(华中)과 중원(中原) 지역으로 옮겨졌다. 요심전역에서 패배의 고배를 마신 국민당의 장개석은 공산당군의 공격에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마침내 공산당군은 1948년 11월 6일에 화중과 중원 지역에 대해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강소성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으로는 해주(海州), 서쪽으로는 상구(商丘), 북쪽으로는 임성(临城), 남쪽으로는 회하(淮下)의 광활한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공산당군은 60만 명, 국민당군은 80만의 병력이었는데, 양군 사이의 싸움은 65일 간 지속되었다. 전투에서 555,000명의 병력을 잃은 국민당군은 철저히 분쇄되었고, 또 다시 패배를 당한 장개석은 부득이 전선을 남쪽으로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다. 회해전역은 1949년 1월 10일에 공산당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는데, 이 싸움의 승리로 공산당군은 장강(長江) 이북의 화동(华东) 지역과 중원(中原) 지역을 손에 넣어 국민당군의 대본영인 남경(南京)을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3. 평진전역(平津战役)
평진전역(平津战役)은 회해전역(淮海战役)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어서,1948년 11월 29일에 시작하여 1949년 1월 31일에 끝났다. 요심전역(辽沈战役)의 패배로 국민당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반면에, 공산당군은 연달은 승리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무기와 장비도 이전보다 훨씬 개선되어 전투력도 국민당군을 크게 앞질렀다. 평진전역이 시작했을 때에 화중과 중원 지역에서는 이미 국민당군과 공산당군 사이에서 회해전역(淮海战役)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장개석은 화북 사령관 부작의(傅作义)를 불러서 북경(당시는 北平)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철저 방어를 지시했다. 부작의는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주로 철도선을 중심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이 철도선은 500km에 이르는 긴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에 대항하여 공산당은 중국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 화북 군구 제2·3 병단을 동원하여 천진(天津)·장가구(张家口)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공산당군은 각지의 국민당군을 분열 고립시켜서 각개 격파해 버렸다. 공산당군은 12월 24일에는 장가구를 점령했고, 1949년 1월 15일에는 천진을 공략하여 국민당군 13만을 섬멸했으며, 부사령관 진장첩(陈长捷)을 포로로 붙잡았다. 전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52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반해 공산당군은 39,000명의 사상이라는 가벼운 희생만 치루었다. 연전연패로 국민당 군대는 최종적 패배의 확인 도장만을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문제는 이제 중국 고도(古都) 북경(北京)의 운명이었다. 만일 북경에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수많은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모택동은 1월 14일에 국민당에게 평화회담의 제의와 함께 '8개 항목의 조건(八项条件)'을 제시했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월 20일에 국민당군의 평진전선(平津战线) 사령관 부작의는 모택동의 8항 조건을 받아들였다. 북경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공산당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1월 31일에는 북경의 해방이 선언되었다. 이 평진전역의 결과 내전에서의 공산당의 승리와 국민당의 패배는 기정 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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