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살아가는 배움
3조 한승희
혼자 산책을 하다보면 문득 내 안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너, 뭐하고 살고 있냐?’ 자동차와 아파트에 묶여 있는 오이디푸스 가족 삼각형의 울타리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두고 삶을 결핍과 상처로 보는 관점 역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2009년 용산과 춘천 수유너머를 기웃거렸고, 교직에서도 대안학교를 강하게 열망하다 현재 공립 대안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껍데기만 바꾸려했던 노력이었다는 걸 최근 사주명리학 세미나를 하며 알게 되었다. 정작 삶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나는 여전히 다른 ‘대안’적 공간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도, 수업도, 관계도 모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이었다. 이런 사람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서 탈주하는 자유로운 대안적 삶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아는 것이 없어 가르칠 수 없다는 뼈저린 부끄러움과 괴로움! 특히 작년에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이런저런 요구에 많이 휘둘리다가 나 자신도 피폐해지고 동료 선생님들과 관계에서도 불편함이 많았다. 그러다 여름에는 드디어 수동적 삶의 결과로 우울증이라는 병명을 얻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병이라고 인정하고 나자 하루를 온전히 내 힘으로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시도 중 하나이다. 내 삶을 돌아보고, 막힌 지점을 찾고, 능동적으로 바꾸려는! 그래서 묻는다. 너, 뭐하고 살고 있냐?
대안학교에 근무하게 된 2년간의 삶을 돌아보자. 과거의 삶이 이 시간 동안 충분히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일상과 관계를 무시하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문제 습관은 ‘지각’이다. 친구들, 선후배들과 술 마시다 지각과 결석을 일삼던 대학 때는 정말 욕을 많이 먹고, 무시를 당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교수님들께 심하게 무시 발언을 듣고 고치려 노력했지만 거기에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앎과 노력이 빠져 있었다. 사람들에게 욕먹거나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자기계발적 능력을 조금 키운 것뿐이었다.
교사가 된 뒤에도 업무 기한을 어기거나, 서류 정리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근래 2년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뿐더러, 뻔뻔함까지 생겼다. 고사계 선생님이 시험 원안지 제출 일자를 정해주면, 예전에는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할까봐 불안해하는 마음이라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그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제출 일자 다음 날 내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혹시나 빨리 내달라고 재촉을 하면 도리어 빡빡하게 군다고 핀잔을 주었다. 학기말 학교생활기록부 작성도 2월이 되도록 하지 않아 교감선생님을 매우 불안하게 했다.
왜 이러고 사는 걸까? 교직 사회는 다른 곳에 비해 독립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일을 한다는 장점이 있는데,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그동안 더 큰 배려를 받았다. 문제 행동이나 정신질환 학생이 많은 학교 특성 상 담임교사에게는 어떤 행정 업무도 맡기지 않고, 학생 상담과 돌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려던 내 태도는 이곳에서 ‘학생상담을 하느라 고되니 다른 건 배울 필요 없다’는 합리화로 쉽게 사라졌고, 나는 감정소모로 고생한다는 이유로 관계 안에서의 약속과 일상을 점점 더 무시했다.
이렇게 살다보니, 가르칠 수 없다는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기술이었다.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고, 인사를 하고, 시간 약속을 잘 지키고,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하고⋯⋯. 그러나 학생들과 감정을 소모하며 잔소리만 할 뿐, 나 스스로 일상의 기술이 삶에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으므로 삶으로 보여주는 것도 어색하기만 했고, 앎으로 설득할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학교 폭력 사안은 수시로 터졌고, 해결 과정에서 학생들의 감정이 역전이 되거나, 교사들 간 수많은 갈등 속에서 감정에 참 많이 휘둘렸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업무까지 제 시간에 맞춰 잘 할 수는 없다고. 출근시간까지 어기게 되는 것도 고생하기 때문이니 이해해 줄거라고⋯⋯.
시공간의 흐름을 모르는 철부지
좋은 성적 받아서 대학 졸업하고 교원 자격증을 땄을 뿐이지, 삶의 차원에서는 우리 학생들이나 나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평범한 일상을 지루해하거나 무시하고, 관계에서는 수동적으로 휘둘리고, 그러면서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바리스타나 요리 자격증만 따면 된다며, 그 이외의 일상을 날려버리는 걸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 그러다 보게 됐다. 그 모습이 곧 나 자신이라는 걸.
음양오행은 우주의 다섯 가지 스텝이다. 봄(木)-여름(火)-가을(金)-겨울(水), 그리고 환절 기(土)가 그것이다. 이 리듬은 편재한다. 하루, 한 달, 24절기, 72절후, 사계절, 10년, 60갑자, 원회운세의 흐름에서 오장육부와 칠정(七情), 통치와 제도, 지리와 운기에 이르기까지, 우주상의 어떤 존재와 활동도 이 리듬을 벗어날 수 없다.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p.67
자본은 자연과 맞선다. 그것은 자연을 착취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시공간의 흐름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략) 쉽게 말해 ‘철부지’다.
같은 책, p.196
이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일의 차서를 생각하지 않고, 노동 시간과 휴식 시간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모르고, 사건이 닥치면 관계와 감정에 휘둘리거나 수습하느라 바쁜 나의 삶. 하루라는 일상의 시공간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의 시공간에 관심이 있었나? 나와 다른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흐름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삶을 장악하지 못하고, 그래서 늘 쫓기듯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지각하지 않으려 뛰고, 업무 기한을 맞추지 못할까봐 쫓기듯 일하고, 때로는 밤을 새우고, 휴식 또한 술로 불태웠던 불안과 초조의 나날들!
그러면서 일상을 넘어서는 대단한 ‘자유로운 대안적 삶’을 꿈꿨다. 이 인식으로는 어떤 공간에 가도 내 존재가 곧 감옥이었다. 내가 탈주해야 하는 것은 시대와 현장만이 아니고, 그것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모르는 내 무지(無知)였다. 일상과 관계를 무시하며 지각하는 철부지가 능동적 삶을 살 수는 없다. 내가 원한 삶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나를 옥죄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지금까지 간절히 바란 자유는 일상의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법에 있었다.
그 지혜는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가?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말하는 음양오행, 우주의 다섯 가지 스텝에서 말이다. 모든 존재가 이 흐름 안에서 발산하고 수렴하며 변화한다. 그렇다면 하루라는 시공간 안에도, 내가 맡고 있는 모든 업무에도 사계절의 흐름이 있다.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시공간도 보편적인 이 흐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물론 각자의 고유함이 있으니 서로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시공간이 잘 맞물리도록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배움은 이제 내가 살고 있는 모든 곳으로 확장된다. 나 자신이 자연이듯, 내가 살고 있는 모든 현장과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곧 자연이다. 이 보편성은 대안적 공간의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든, 무엇을 하든 사계절의 순환을 따르며 일상의 시간을 지혜롭게 살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일상을 잘 보고, 함께 흐름을 타며 나 또한 보편적인 지혜를 넓혀가는 것. 사람들에게 배우고, 또 내 활동으로 도움을 주는 삶. 약속은 이를 위한 삶의 기본 규칙이다.
순환하는 일상으로 떠나는 탈주
존재는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이상은 다 덤이고 잉여다. 당연히 순환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생과 사의 경계를 관통할 수가 없다.
고미숙,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p.244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은 다 덤이고 잉여인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자연의 흐름 속에서 ‘무상원조’를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와 타인, 세계 모두 생로병사 하는 자연의 흐름일 뿐이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계의 흐름 안에서 얻은 배움으로 살아왔다는 말이 된다.
성적, 합격, 안정된 직장 등 혼자만의 성과만 중시하고, 그것을 위한 배움만 빼먹으려는 꼼수로 살아온 나의 인생. 관계 안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배움은 점점 생명력이 줄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중단되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무지의 독단에 빠지고, 그것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삶을 원하고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르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배우는 삶을 살 것이다. 그것으로 내 삶의 주도권을 운용할 것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내 몸을 배려하며 하루를 잘 사는 법이다. 학교에서 내가 맡은 일을 시간과 취지에 맞게 정확히 마무리하기, 수업 준비와 세미나 공부하는 시간을 정하고 매일 꾸준히 하기, 그리고 일상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는 충전인 ‘휴식’ 또한 나에게는 꼭 배워야 하는 일이다. 배우며 사는 것, 그것만이 더 이상 헛된 자유를 꿈꾸지 않으며 생명에 충실한 삶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