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
시베리아횡단철도(TSR, Trans Siberian Railroad)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들어서면 ‘9288’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념탑이 보인다. 그 숫자가 바로 시발역인 모스크바 역에서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의 거리가 무려 9,288Km나 됨을 나타내는 이정탑이다. 이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22번 이상 오가는 거리이다. 시속 80-90Km의 열차로 이 거리를 답파하려면 꼬박 6박 7일, 156시간이 걸린다.
달리는 동안 시간대는 일곱 번이나 바뀌며,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는 11시간의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모든 역에는 현지시간과 표준시간인 모스크바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특수 제작한 ‘철도 시계’가 걸려 있다. 이 철도는 이 철도는 인구가 100만을 넘는 5개 도시(모스크바, 페름, 예카체린부르크, 옴스크, 노보시비르스크)를 비롯해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가며, 약 50개 역에 정차한다.
두 대륙을 잇는 이 철도는 우랄산맥 기슭에 자리한 페르보우랄스크(Pervouralsk)를 경계로 아시아와 유럽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아시아 쪽 길이(7,512Km, 81%)가 유럽 쪽 길이에 비해 약 4.3배나 더 길다. 그래서 아시아 쪽에 있는 시베리아 이름을 따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철도는 강폭이 2Km에 달하는 아무르 강을 비롯해서 볼가(Volga), 오비(Ob'), 예니세이, 레나(Lena) 등 16개의 강을 건너간다.
이러한 몇 가지 수치만으로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어마어마한 모습과 대역사(大役事)를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창조한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이 철도는 그 부설의 아이디어로부터 시공과 완공에 이르기까지 무려 25년(1891-1916)이 걸리는데, 그 기간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극복과 고투의 과정이다. 처음부터 예산부족을 이유로 한 재정부의 반대에 부딪힌다. 10년 넘게 공전하던 철도부설 구상은 마침내 1891년 3월 알렉산드르 3세가 건설에 관한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현실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작을 고했다는 공로가 인정되어 1908년 이르쿠츠크의 안가라 강변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철거되었다가 2003년 복원된다. 앞면에는 러시아 문장인 쌍독수리가, 뒷면에는 당시 철도건설을 적극 지지했던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의 얼굴상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철도건설 사업을 향년 23세의 젊은 황태자에게 일임한다. 후일 니콜라이 2세로 즉위한 황태자는 칙령이 공포된 두 달 후에 철도 착공식을 주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오스트리아와 그리스, 홍콩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상륙해서 1891년(明治;めいじ 24) 5월 11일 大津市(おおつし)에 행차할 때에, 도로 경계 중의 경찰 津田三蔵(つださんぞう)에게 칼에 찔러 부상당한다. 이른바 ‘오오츠 사건‘이다. 메이지 천황의 환대 속에 지내다가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1891년 5월 31일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철도 기공식 테이프를 끊는다.
석 달이나 걸려 환국한 황태자는 시베리아 철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철도건설 전반을 진두지휘한다. 그러나 철도 완공 4개월 후에 일어난 2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 유폐되었다가 끝내는 일가족과 함께 암살당하고 마는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가 되었다.
비록 착공은 했지만 갈 길은 첩첩태산이다. 당초 이 긴 철도를 1년 반 만에 완공한다는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기단축을 위해 전체 노선을 6개 공구로 나누어 동시에 착수했다. 그러나 노선의 반 이상이 측량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되다보니 홍수 다발지역에 선로가 건설되고 산사태로 노반이 파묻히며 동토가 녹아 선로가 물에 잠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공기 단축을 위해 레일의 중량을 기준의 절반으로 낮춘 결과 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침목이 부식되기 일쑤였다. 터널 건설을 피하다보니 급경사나 곡선반경이 작은 구간이 많아져서 열차가 속도를 낼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개통 첫 해에는 하루에 세 건 정도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인구가 희박한 시베리아에서 작업인부를 구하는 일도 큰 난제의 하나였다.
인부 가운데 20%만이 현지인이고, 나머지는 유배 죄수들이거나 중국인들이고 가끔 한인들도 끼어있었다. 인부들의 작업환경이나 생활환경은 극도로 열악했고, 여기에 인종차별마저 겹쳐 외국인 한 달 보수는 러시아인의 절반 밖에 안 되는 45루블에 불과했다.
게다가 주먹구구식 계획 때문에 실제 건설비용은 계획치를 크게 웃돌았다. 5월까지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동토에서의 건설비용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당초 3억 2,500만 루블(약 1억 7,000만 달러)로 잡은 건설비가역 10억 루블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99년부터 3년 간 무서운 페스트와 콜레라가 번져 인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건설기간 사고와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은 무려 1만 명에 달한다. 하바롭스크의 영웅광장 한 귀퉁이에는 연도별로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더해 1900년 중국 전역을 휩쓴 의화단(義和團) 봉기에 영합한 중국인부들은 이미 건설한 선로 700Km를 마구 파괴한다. 비용은 엄청나게 치솟는 반면에 수요는 예측 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그래서 기공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공사는 겨우 절반밖에 진척되지 않아 결국 완공까지는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숱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개통된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지난 90여 년 동안 러시아의 개발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소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열차의 기적소리는 ‘잠자는 미녀’ 시베리아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러시아는 16세기 동방진출을 계기로 시베리아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교통의 불편과 주변국들의 간섭 등으로 인하여 실제적 통치권은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머나 먼 낯선 땅 시베리아를 러시아제국에 실제적으로 통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재빠르게 시베리아의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총독 등 현지 행정관들을 파견한다.
풍부한 자원개발이 가속화되고 농업과 상업이 붐을 이루며 이주민도 크게 늘어난다. 건설공사가 시작 된 1891년 무렵 500만 명이던 시베리아 인구가 20년이 조금 지난 1914년에는 2배 이상으로 급증한다. 뿐만 아니라, 영사관이나 무역대표부 등 외국 주재기관이 신설되고 외국 금융과 투자활동이 활성화됨으로써 세계를 향한 시베리아의 문은 열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며칠씩 이 철도를 질주하는 열차를 타도 별로 피곤하지 않고 쾌적함을 느끼는 것은 철도의 현대화, 특히 장대(長大)레일 화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전 구간에 걸쳐 철도의 복선화가 1937년에 끝난 데 이어 2002년까지 전철화가 이루어졌으며 광섬유 설치작업도 마무리 되었다.
길이가 25m인 레일을 8개까지 이어서 하나의 긴 레일로 만드는 이른바 ‘장대 레일화’가 전 노선의 45%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증기동력으로 숨을 헐떠이며 달리던 옛날의 열차가 아니라, 장대 레일 위로 전기 동력에 의해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현대판 열차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수송량도 끊임없이 늘어난다.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개념에서 보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초원로 상의 ‘철의 실크로드’이다. 이 길은 일찍부터 우리와 러시아, 유럽을 연결해 주는, 소통시켜 주는 가교이다. 한반도 종단철도(TKR)는 크게 경원선(京元線)과 경의선(京義線, 만주 횡단 철도를 통해)의 두 갈래로 나누어 각각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다행히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남긴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책이 있어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민영환은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윤치호 등 일행 네 명과 함께 떠난 사절단은 중국과 일본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하여 영국과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폴란듣 등 10개 나라를 지나는 먼 길을 에돌아 6개월 21일, 총 204일 만에 목적지 러시아에 도착한다.
귀국할 때에는 착공한 지 5년 밖에 안 되는 초기의 철도 부설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때로는 갓 시동한 기차를 타고 이 길의 연로(沿路)를 따른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이용자이다. 이 대장정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이 바로 그의 『해천추범(海天秋帆)』이다. ‘해천추범’이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으로서, 이런 뜻을 책의 제목으로 택한 데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부심했던 그의 사색과 고민이 배어 있다.
민영환은 8월 20일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떠나 10월 10일 기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장장 50일 간의 긴 여행의 일기체로 쓴 그의 기행문에는 총 83구간에 달하는 구간 사이의 거리와 지명이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노정은 마차를 타고 가고, 강은 배로 건너며, 단 세 구간만 배로 지난다. 그들의 여행은 한마디로 고행이다.
“길은 험하고 질척거려 차가 매우 흔들리니 사람은 피곤하고 말은 기운이 빠졌다.” 수십 일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니 그 괴로움과 번민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기차라고 잡아탔는데 바퀴가 훼손되어 “나아감이 매우 느려서” 주야에 겨우 314리(약 126km)를 달렸다. 이러한 고행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령(皇靈, 황제의 영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은전을 오매불망한다.
대행황후(大行皇后, 명성황후)의 기신일(忌辰日, 망자의 생전 생일) 새벽에는 선방(船房)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향을 피우며 공복(公服)을 입고 동녘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나서 서로 마주보며 감회의 눈물을 흘린다. 극동지역에서 만난 교포유민들에게는 고국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현지 러시아 관찰사를 찾아가서는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청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