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의 세계 ⑩
제2장 세존의 생애 – 깨달음에의 길, 열반에의 길
제2절 세존의 탄생(역사적 사실과 전설)
1. 탄생에 관한 전설
1) 탄생의 땅, 룸비니
![](https://t1.daumcdn.net/cfile/cafe/22086A4B5475DD9328)
인도의 겨울철, 국경을 넘어서 네팔로 이어지는 길은 노란 개자꽃이 파도치듯 일렁거리는 전원 가운데로 곧게 뻗어 있다. 세존의 탄생지는 공기가 맑은 겨울 아침이면 히말라야의 봉우리가 멀리 바라다보이는 네팔령 타라이 지방에 있는 룸비니의 자그마한 마을 변두리이다.
보통 인도의 거리나 마을에는 많은 마을신(또는 지모신)이라 불리는 그 지역 특유의 신들이 모셔져 있다. 이들 신들은 정통적인 힌두교의 신들과 그 계통을 달리하여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하여 신앙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들 신이 마을을 지키고 행복을 가져 온다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이러한 신들은 보통 볼 수 있는 바위나 돌덩어리로서 나무 아래나 우물가의 작은 구멍 – 옆으로 패인 – 같은 곳에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황토나 붉은 안료 등으로 칠해져 있다.
룸비니도 네팔의 산악 민족인 파하리족이 신앙하는 루파 디이 여신의 성지로, 룸민 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이 지방에는 치트라 여신을 모신 치트라 디이의 마을도 있으며, 어느 마을에서나 많은 사당을 볼 수 있다.
옛 기록을 조사해 봐도, 세존의 탄생지는 룸비니 동산이나 룸비니 마을이라고 적혀 있을 뿐 2,500년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도읍이라는 말이 사용된 적은 결코 없었다. 사람들은 지금도 세존 시대와 다름없이 여전히 농경에 힘쓰고, 해돋이와 해지기를 배례하며, 또 우물가나 강기슭에 모여서 한가롭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세존이 태어난 곳은 평화로운 농촌의 한 구석이었다.
2) 탄생과 점괘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세존은 샤캬족의 족장이며 카필라바스투의 왕인 슛도다나와 그의 아내 마야부인과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마야부인은 카필라바스투의 동쪽, 로히니 강을 사이에 둔 데바다하(천비성, 天臂城)의 성주인 수부티(선각, 善覺)의 딸로서 그의 어머니는 콜랴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마야부인은 흰 코끼리가 태내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한 다음, 달이 차서 출산할 때가 되자 고향인 데바다하로 가던 도중에 룸비니 동산의 사라수(일설에는 아쇼카나무) 아래서 세존을 낳았다고 한다.
세존이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했음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세존의 탄생’을 신비스런 사건으로 만들려는 생각에서 후대에 이르러 탄생에 얽힌 갖가지 전승이 생겨나게 된다. 흰 코끼리의 영몽에 의한 잉태나 세존이 탄생 즉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는 세계의 최승자”라고 외쳤다는 전설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경전에는 점성술에 능한 아시타라는 선인이 33천의 신들이 기쁨에 넘쳐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본즉 신들은 “비길 데 없는 보배인 보살이 샤캬족의 마을인 룸비니 땅에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매우 만족스럽고 기쁜 것입니다. 세상에 생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 그리고 소(牛)의 왕인 사람, 즉 불타는 이제 얼마 후에 선인들이 모이는 마을 안에서 진리의 법륜을 굴릴 것입니다. 마치 용맹스러운 사자가 모든 짐승의 왕이 되어 으르렁거리듯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5DE8475475DDE402)
또 다른 경전은 “룸비니는 사라수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세존의 탄생 시에 사라수 꽃은 그 밑둥에서 가지 끝까지 모두 한 가지 색으로 피었으며, 가지 사이나 꽃 사이에 오색 꿀벌의 무리와 갖가지 새들의 무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귀며 날아다녀 마치 이 곳 전체가 제석천의 유원 같았다.”고 세존이 탄생한 곳을 미화시키고 있다.
그 후 아시타 선인은 슛도다나왕의 궁전에서 “불꽃처럼 빛나고, 하늘을 떠다니는 별의 왕(달)과도 같이 맑으며, 또 구름에서 벗어난 가을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아기”를 보고, “이 동자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될 것이다. 최상의 청정함을 보고,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진리의 법륜을 굴리리라. 이 사람의 깨끗한 행위는 널리 세상에 퍼질 것이다.”라고 세존의 미래를 예언하였다.
세존을 찬미하는 말 중에, ‘소(牛) 중의 으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인도 사람들이 소를 신성시하는 사고방식의 한 단면을 나타내 준 것이다. 세존의 성(姓)인 가우타마(고타마)도 ‘최상의 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진리를 설법하는 것을 가리켜 ‘법륜을 굴린다.’고 하는데, 이 말은 역시 이 나라 사람들이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전륜성왕의 모습과 상통하는 것이다.
세존이 탄생 직후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말하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승리자라고 선언했다는 전설은 무척 오래 전부터 성립된 것으로서, 이것은 세존의 기적적인 위대함을 표시한 것으로 주목된다.
경전에 따라 다소 그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과거7불의 하나인 비파슈인불[위빠시불, 비바시불(毘婆尸佛)]의 탄생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 또 이러한 것들이 사실상 샤캬족 사이에서의 의례나 관습 등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설도 있다.
2. 탄생의 연대와 탄생일
세존의 탄생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경전이 그의 입적을 80세로 잡고 거기서부터 역산하여 추정해 왔다 그러나 확실한 역사적 근거의 발견을 기대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열 가지도 더 되는 학설 중 어느 것이 옳은가를 가려내기란 지극히 어려운 문제이다.
그 중에서 남방 아시아 불교국들, 즉 인도, 스리랑카, 버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은 남방불교의 전승에 따라서 세존의 입적을 기원전 544년, 탄생을 기원전 624년으로 잡고, 이를 근거로 1956년에 불멸 2,500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와 매우 유사한 학설로서 다까구수 노기준지로 박사는 중구에 전해지고 있는 「중성섬기(衆聖點記」의 설에 의거하여, 세존의 탄생을 기원전 566년으로 하고 이에 따라서 1934년에 불탄 2,500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논문집도 발간했다. 「중성점기」란 세존 입멸 후, 율장을 전한 비구들이 매년 1회씩 행하는 우안거(우기의 3개월 동안 한 곳에 정주하여 수행과 학습을 하는 것)가 끝날 때마다 점을 한 개씩 새겨서, 경과된 햇수를 표시했다는 것을 후대의 상가바드라는 승려가 중국 남부의 광주 지방에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는 점을 찍기 시작한 시기와 점의 수효가 모두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나까무라 하지메 박사는 아쇼카왕의 즉위 연대를 기준으로 북방의 여러 전승을 비교∙연구한 결과 탄생을 기원전 463년, 입멸을 기원전 38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 두 전승에는 약 1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45C3485475DF6522)
또 세존의 탄생일에 대해서도 동양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이로 해서 관불회를 개최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크게 나누어 남방불교의 전승에 의한 바이샤카월(月) (인도력으로 둘째 달)의 보름날로 정하는 것(「자타카」. 「대당서역기」)과 인도력의 춘분에 해당되는 2월 8일로 정하는 것(「붓다차리타」,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그리고 사월 초파일로 정하는 것(「수업본기경, 修業本起經」), 「불소행찬, 佛所行讚」 등 세 가지 설이 있다.
남방불교의 전승에 따르면 세존의 탄생∙출가∙성도∙입적은 모두 베사카월(바이샤카월)의 보름날, 즉 만월일로 되어 있다. 한역 경전 중에서도 4세기의 「반니원경(般泥洹經」에는 “부처님은 사월 초파일에 정각을 얻어 성도하고, 사월 초파일에 입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학자들 중에는 인도의 역법(曆法)을 근거로 바이샤카월의 보름날과 이월 초파일이 모두 인도력의 춘분과 관계가 있고, 중국의 고력(古曆)으로도 춘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 인도인이 춘분점을 가장 상서로운 것으로 생각하여 세존의 탄생을 여기에 결부시킨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이 설은 후대에 이르러 비록 역법상으로 갖가지 이설이 생겨났지만 그 생각의 근원은 모두 동일한 것, 즉 춘분점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세존의 탄생에 관해서는 이와 같이 남전과 북전에 약 1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6세기나 5세기 중엽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3. 룸비니 동산
1) 아쇼카왕의 순례
역사적 불타(세존)의 존재에 대해서 과거 유럽의 어떤 학자는 태양신화설을 제창하여, 불타가 태양의 아들이며, 따라서 세존의 탄생 후 7일 만에 그 모친이 별세한 것은 아침 안개가 일출과 더불어 사라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것은 때때로 불타가 ‘아디차 핀두’(태양씨족의 한 사람)라고 불린데서 발생한 오해로 보인다.
1896년 퓨라 박사는 룸비니 유적을 발굴할 때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 하나를 발굴했다. 머리 부분은 손상이 되어 없어지고, 낙뢰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균열이 있지만 브라흐미 문자를 사용한 다섯 줄의 선명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해독 결과 그 비문에는 “천애희견왕(아쇼카왕)은 관정 제20년(이 지나서) 이 곳에 스스로 와서 친히 참배했다. 여기서 불타 샤캬무니가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상을 만들고 석주를 건립하도록 했다. 이곳에서 세존이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면제해 주고, 또 (생산의) 1/8만을 지불하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 땅이 바로 세존의 탄생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쇼카왕은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특히 불교 교단에는 많은 기증을 했으며, 또 수많은 불탑을 세우고 승려인 우파굽타의 권유를 받아들여 불적 순례를 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비문은 즉위 20년 후 룸비니에 참배한 아쇼카왕이 세존의 탄생지에 기념 석주를 건립했다는 내용과 룸비니 마을에 부과되 있던 조세(일반세)를 면제하고, 생산세를 1/6에서 1/8로 감해 준다는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2) 룸비니의 유적지
현재 룸비니는 불교도의 순례지로서 정비되어, 지난날 이 지역을 뒤덮고 있던 정글은 북쪽 산기슭으로 멀리 밀려났다. 유적의 중아에는 흰색으로 단장된 아담한 마야부인당이 있다. 사당 내부에는 표면의 침식으로 표정조차 확실치 않은 마야부인이 조자와 함께 나무 밑에 서 있는 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상을 손으로 만지면서 예배하고 있다. 보통 ‘마야데비 템플’로 불리는 사당의 남쪽에는 세존의 탄생시에 마야부인이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네모난 연못이 있어서, 옆에 서있는 큰 나무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남쪽으로는 승원 터가 묻혀 있다.
아쇼카 왕이 건립한 석주는 마야부인당 서쪽에 있는데 현재의 높이는 약 7.2m이다. 석주의 일부에는 현장이 “악룡(惡龍)의 뇌성벽력으로 그 기둥은 중간부분이 부러져서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한 내용과 일치하는 낙뢰의 흔적과 균열이 있지만, 표면에는 마우리야 시대의 독특한 기법으로 갈고 닦은 광택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기단으로부터 약 3.3m 정도 되는 위치에 아쇼카왕의 비문이 보인다.
마야부인당 주변에는 벽돌로 만든 크고 작은 봉헌 스투파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1976년~1978년의 발굴 조사 결과 이 사당 밑에는 초기의 유적이 매몰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 사원의 북벽 바로 밑에 있는 사각형의 마우리야 시대 것으로 보이는 스투파의 기단 부분에서는 직경이 약 3cm 정도 되는 황금제 사리 용기의 뚜껑 부분과 탄화된 유골 조각이 발굴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42AB495475DEC327)
또 아쇼카왕의 비문 속에도 나타나 있고, 현장이 목격한 석주의 머리 부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상(馬像)의 일부 – 말의 갈기 부분이라 추정되는 잘 다듬어진 추나르산(産) 사암 파편 다수 –가 아쇼카왕 석주의 북쪽 약 10m 되는 지점에 있는 마우리야 왕조 시대의 벽돌 유적 밑에 다시 돌로 쌓은 유적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마우리야 시대 이전으로 소급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 마야부인당 서남쪽, 다시 말해서 현재의 룸비니 부락에 인접한 지점에서는 1970년~71년 사이에 링그 웰의 유전, 쿠샨시대의 동전과 테라코타 인물상, 굽타 시대의 테라코타 보살상(상반신만 출토되었음, 높이 약 30cm)과 법륜 등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의 존재는 당시 이곳에 사람들의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5세기에 이 곳을 방문한 법현은 마야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에 대해서 기록하고, 이 연못의 물을 모든 승려들이 마셨다고 함으로써 이곳에 불교 승려들이 거주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지방은 대단히 황폐한 곳이어서 “흰 코끼리와 사자가 왔다 갔다 해서 매우 무서운 행로였다.”고 까지 기록했을 정도이다. 약 200년 뒤에 이곳을 찾은 현장은 이제는 다 말라죽은 아쇼카 나무, 목욕에 쓰이던 연못, 세존 탄생의 전승이 얽힌 스투파들, 위에서 말한 아쇼카왕의 석주 등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8세기에 인도를 여행한 혜초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이 근방은 숲이 무성하고 길에는 도적이 출몰하기 때문에 순례자는 방향을 잡기가 무척 어려우며, 따라서 길을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쓰고 있다. 다시 후대에 이르러 13세기에 네팔에서 인도의 불교 유적, 특히 성도지 보드가야의 금강보좌에 대한 순례와 참배를 목표로 한 티베트의 승려 다르마스바민은 그의 자전(自傳) 여행기 중에서, 이곳과 관계되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고 있다.
이들 기록이나 발굴품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이 지방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려 황폐화된 것 같다.
1896년 아쇼카왕 석주를 발견한 퓨라에 이어서 티라우라 콧타를 발굴한 고고학자 무케르지는 이곳을 거처, 이보다 북쪽 30킬로미터 되는 지점인 히말라야 산록의 사라수 밀림 속에 있는 사이나 마이나의 불교 유적을 탐사했지만, 당시 룸비니의 기록 사진으로는 잡목이 무성하고 벽돌이 흐트러져 있는 나지막한 언덕과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연못, 그리고 땅속에 묻혀서 겨우 머리 부분만 노출시키고 있을 뿐인 아쇼카왕 건립의 석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