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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에큐메니칼 스크랩 신약성경이 말하는 연합과 일치 / 최덕성 교수
상록수 추천 0 조회 32 14.11.08 23: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약성경이 말하는 연합과 일치
2005-02-22 19:10 | VIEW : 628

사진 : 장로교연합회(사진 장로교연합회)

아래의 글은 필자가 저술한 "교회연합운동의 우상"(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의 제8장을 옮긴 것이다. 에큐메니칼운동에 앞장 서는 사람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을 바로잡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분열의 원인과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논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사랑한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경공부와 말씀묵상을 좋아한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이 천명한 “오직성경”이라는 원리를 소중히 여긴다.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러한 원리와 구호가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성경의 가르침이나 진리보다 연합과 일치와 화평을 더 앞세운다. 기독교 진리에 역행하는 다양한 신학사상을 수용하면서 모든 교파의 연합, 통합을 희망하고 있다. 교회라고 하는 기구의 가시적 일치(a visible Church, visible unity)에 에너지를 쏟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모두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일치를 희망하고 있다. 영국국교회, 독일개신교회(루터파교회)도 바티칸과 하나 됨을 추구한다. 그런데 상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렇다고 할 만한 성과가 없는 것은 교황청이 “교회는 베드로 사도 이후부터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다”(Semper Eadem)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오직 하나이며 유일하고 참된 교회”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의 일치운동이 성공하면 그것은 교황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성공회가 교황좌 아래로 병합되는 것만이 완전한 일치의 유일의 길이다.

에큐메니스트들은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을 가지고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을 정당화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는 말씀을 에큐메니칼 운동의 슬로건(slogan)으로 삼는다. 이 성경구절들이 교회연합이나 일치운동을 보증하는 것으로 본다.1 모든 교회들이 연합하고 일치해야 할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들을 그렇게 적용하는 것은 그릇된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드린 중보기도(요17)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바울의 권고(엡4)는 신앙고백의 일치라는 점에서 그 내용이 동일하며, “하나 됨”의 조건이 무엇이며, 일치라고 하는 목표가 어떤 수단을 통해 달성되고, 어떤 방법으로 유지, 보존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1.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올바른 성경해석은 본문의 문맥(context)에 대한 검토에서 출발한다.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대조하여 유기적으로,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가 해석한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을 말하기 전에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라고 간구한다. 그리스도는 “저희들”이 하나 되기를 소원한다. “저희들”이란 애당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자녀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는 만인보편구원주의(Universalism)에 입각하여 구원사역을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아니라 “저희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복음을 미처 듣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조만간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세상과 구별될 것이다. “저희들”의 특징은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된 점에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 사역은 “만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하나 됨”은 다원주의적, 포용주의적 일치가 아니라 택함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치를 뜻한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연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保存)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하나가 된 것을 지속시켜 달라는 뜻으로 “보존”을 말한다. 자신은 세상을 떠날 것이므로 악한 자와 유혹하는 세력의 공격을 받게 될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미 존재하는 일치가 계속 보존되기를 기원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일치를 아버지와 아들 간의 연합에 비유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을 예로 들면서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연합을 설명한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일치의 성격은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는 말씀이 말해주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적 연합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일치를 기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位)는 셋이지만 본체(本體)는 하나이며 인격 상호간의 사고(思考)와 목적과 사랑은 한결같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지신 일치의 성격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와 같은 요소들을 이어받아 이미 존재하는 일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와 같은 일치는 “거듭난 사람” 또는 “거듭난 영혼”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거듭난 사람만이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 세상에서 분리된 자는 새 성품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1:4)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 됨이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나 상이한 기관이나 교회들이 어떤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연합활동을 하거나 교단을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친교(fellowship)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성령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치는 우리의 자발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혈연관계처럼 성령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이미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이다. 형제자매는 불화가 있어도 그 혈연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믿음, 새 생명, 새 출생, 중생, 영적인 결속으로 연합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17:9)고 말한다. 세상에서 빼내어 온 사람, 사탄의 집단에서 분리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요한복음 17장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 있는 동안에 형성해 놓은 연합, 일치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도한 내용이다. 교회들의 외형적 연합이나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뭉쳐 결사(結社)를 조직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과시적 목적이나 대사회적 신인도 향상이나 인도주의적 사회참여나 선교활동을 위해 단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아볼로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신앙고백이 다른 다양한 “기독교”와 별종 종교를 포용하는 다원주의 태도를 가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2.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말한다. 이 말씀은 진리에 대한 신앙고백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하나 됨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와 신학이 불일치하는 교단 간의 교제, 연합, 일치를 도모하라는 교훈이 아니다. 신학적 다양성을 상호 수용하고 교제하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앙이 불일치하는 자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선교하라고 하는 명령이 아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의 대전제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4:1)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장의 하나 됨에 대한 권고는 에베소서 1-3장에 말하는 것을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바울은 1-3장에서 먼저 교리를 세워놓고 4장에서 그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하나 됨을 말하고 있다.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된다”고 권면한다.

“합당”은 영어로 똑같은 무게(equal weight) 또는 균형(balance)을 의미한다. “교리에 대해 이미 듣고 믿었으니 이제 행동으로 균형을 잡아라”는 뜻이다. 히브리서 6장 11절의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을 성취하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부지런을 나타낸다”는 것은 교리와 실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행일치에 대한 이 가르침은 빌립보서 1장 27절의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는 말씀과도 일치한다. “열심히 서서”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교회라는 집단의 외형적 통일성(a visible unity)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인가? 아니다. 요한복음 17장이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되어 있는 하나 됨을 보존(keep the unity)하기 위한 목적이다.

에베소서 1-3장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을 대략 설명한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한”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라고 한다. 이 가르침을 따르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 대속사역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과 유일신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과의 교제, 연합, 일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그 기쁜 뜻을 따라 우리를 예정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준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다(1:4-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고 신뢰하고 고백하며 전적으로 그 분과 그의 말씀을 신앙하는 결과로 그 연합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은 연합의 파트너에 대해 말한다. 연합에 동참하는 자는,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었으나,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지배와 제어 하에 있었고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다(2:2). 자신이 자기의 정욕과 감정의 노예라는 것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다 진노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는다. 거룩한 법의 정죄 아래에서 영적으로 죽었으므로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목을 위해 아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새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살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듣고 믿는 능력을 받아, 이제 하나님의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2:4-10)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

바울은 인류의 타락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기타 교리와 그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하나 됨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중생한 자, 하나님의 만드신 바 된 자,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된 자들이다. 선한 일, 선한 행사, 대화, 다양성 인정, 포용, 친교는 일치의 조건이 아니다. 전적으로 예수의 공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이 연합에 해당한다(엡2:13-16).

에베소서 3장은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구원 계획과 목적을 사도들에게 어떻게 나타내셨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에베소의 신자들이 이 모든 사실을 더 풍성히 알게 될 것을 기도한다. 이 놀라운 진리를 더 깊이 알도록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한다.

에베소서 4장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연합”은 1-3장이 제시하는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하나 됨을 가리킨다. 신자들의 하나 됨(1-3), 연합의 성격(4-6), 연합 안에 있는 다양성과 하나님의 보존 방법(7-12), 연합의 궁극적 완성(13-16)을 설명한다. “열심히 큰 부지런함”을 보이라고 권면하면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2-4)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에서 일곱 차례나 강조되는 “하나 됨”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유기적, 생명적 연합이다. 몸은 단순한 집합체가 아니라 원세포 혹은 하나의 생명체에서 생겨나서 확대된 것이다. 교회의 연합은 이처럼 우리가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간에 성령의 활동을 통해 진리를 믿는 자들 가운데 실재한다. 이 일치는 영적 일치(a spiritual unity)이다. 이러한 하나 됨은 성령님만이 가능케 할 수 있다. 피차 영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한 뜻을 가지고 협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교리를 떠나서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여자의 인격을 보지 않고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만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바울이 “성령이 하나이니…,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연합, 신자 간의 하나 됨,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적 통일성을 말한다. 영적인 하나 됨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만 존재할 수 있다. 유태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어 있던 자들이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유태인이라고 하여 자랑할 것은 없다. 완전한 무능과 절망 가운데서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잘 보존하고 지키라.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곧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이미 하나로 만든 그 “연합”을 힘써 유지하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일치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거짓교사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따위로 이미 믿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 됨을 깨뜨리지 말고 그것을 잘 지키라고 한다(Christians are already enjoying the unity; all you have to do is to preserve it!).

그리스도인의 연합과 일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구원의 길을 준비해 놓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교리를 믿고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구해야 할 일치의 성격이며 교회연합의 기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에게 은혜를 주셨다(7-16). 각양 은사를 주신 목적은 일치성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일치성은 현대주의 에큐메니칼 활동, 대사회 활동, 인간적 교제, 공동대응, 연합 예배, 인도주의적 선교활동 따위를 시사하지 않는다. “교회연합 활동을 열심히 하라,” “판짜기를 다시 하라,” “다른 교회들과 함께 단일 교회기구, 단일 연합기구를 만들라,” “다른 교리를 가진 자(당시의 영지주의자, 거짓교사, 이단자, 율법주의자)들을 용납하고 교제하라,” “교리의 다양성을 수용하라,” “다원주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다. “다른 교리를 가진 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연합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대주의 에큐메니칼운동은 “교리는 분열시킨다”고 하는 전제를 깔고 있다. 믿고 고백하는 것이 다르지만 친교하며, 함께 일하며, 함께 전도하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교제하자고 한다. 그렇게 하면 교리를 넘어서거나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연합과 일치를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 곧 “믿는 일에 하나 된”(4:13) 사람들에 제한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신칭의,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죽음, 육체부활, 재림, 바울이 가르친 여러 가지 진리의 개요 등)과 그것에 대한 고백이 없는 곳에는 진정한 연합이나 일치가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를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집단은 연합과 일치에서 제외된다.

바울이 말하는 연합과 일치는 상이한 교리를 가진 자들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학적 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타종교와 대화(dialogue) 하는 것이나 신앙무차별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자나 그러한 사람을 포용하는 “교회”는 연합과 일치에서 제외된다. 하나 됨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일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 됨”은 외적인 연합과 일치(visible unity)가 아니다. 오늘날의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연합일치운동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 교회분열에 대한 원인분석, 평가기준, 해결책

역사는 대개 승자, 기득권자, 지배자, 식자(識者)의 편에서 기술된다. 다수의 시각, 힘의 논리로 기술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성경은 사물과 사건을 진리성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시한다. 힘의 논리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눈으로 판단할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룬 성도들의 일치를 깨뜨리는 몇 가지 요인들을 제시한다. 분열의 책임소재를 파악하고 평가한다. 이것들은 분열된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제시한다.

첫째, 인간 중심의 파당이 교회를 분열시킨다.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파당은 신앙공동체에 고통을 주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마치 바울, 아볼로, 게바와 더불어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행동했다.

바울이 말하는 파당은 오늘날의 교회 안의 정치계파에 해당한다. 교회 안의 계파주의 정치가들은 하나님보다는 계파의 힘을 신뢰한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일할 공간,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계파세력을 빌려 중요 직책을 차지하려고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런 저런 계파 모임을 갖는다. 엘리뜨 목사들과 신학생들을 자기 계파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을 강구한다. 계파 인맥강화에 심혈을 기울인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하면서 교단의 매사에 개입하고 그것들을 자파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계파의 인물을 요직에 앉히려고 하고,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생기면 자기 계파의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다른 계파에 속한 사람에 대해 등을 돌리고 적대시한다. 자기 울타리를 치고, 자신을 그 안에 고립시킨다. 폭넓은 친교를 거부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뜻보다는 힘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게 된다.

계파주의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1) 고전적 계파는 자리를 탐하고 자파의 사람을 특정 자리에 앉히는 등 인맥을 형성한다. (2) 이권적 계파는 계파인맥을 이용하여 자파의 이권을 노린다. 경영하는 기관을 간섭하며 자파의 사람을 심는다. (3) 위장형 계파는 이권에 관여하고 자파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려고 할 뿐 아니라 신앙운동단체, 연합회, 동아리 등을 이용하여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변화를 꾀한다. 신학적 정박지 이동을 노린다.

교회가 인간적 요인과 파당에 눈을 돌리거나 진리에서 떠나 계파 중심으로 뭉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은 하나 됨은 깨어진다. 교회가 파당, 계파로 인해 분열되었을 경우, 그 책임은 계파의 책임자들에게 있다. 그들이 물러서든지 아니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스스로 발 벗고 나서서 상처를 치유하고 사태를 겸허히 수습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광복 후 한국장로교회 안의 친일 전력자들은 당파를 만들어 정치폭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출옥성도 그룹인 경남노회(현 부산, 울산, 경남을 포함한 유일한 합법적인 노회)를 불법으로 제거하여 장로교회 제1차 분열을 가져왔다. 교회의 신학, 신앙고백, 치리원리에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그 분열의 책임은 전적으로 친일파 인사들에게 있다. 당사자나 그 후예들이 과오를 시인하고 참회고백하며 적극적으로 재결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분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이러한 시각은 바울의 견해와 일치하는 반면에 교회사를 힘의 논리로 파악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불일치한다.

둘째, 거짓교사의 가르침을 용납하면 일치가 깨어진다. 세상의 지혜·철학이 선지자, 사도들이 전해 준 진리 위에 군림하면 교회가 분열하게 된다. 바울은 세상 철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한다”(고전1:17)고 말한다. 교회가 철학과 세상 지혜에 눈길을 돌리고 그것을 수용하면 성령께서 이루어놓은 일치가 깨어진다. 바울은 복음진리를 인간의 지혜나 철학으로 대치하지 말라고 경고한다(골2:8).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거짓교사를 학문의 영역이라는 미명하에서 용납하면 일치가 깨어진다.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다원주의를 지향하면 교회가 분열된다.

1930년대의 미국장로교회의 분열은 교회가 세상의 지혜와 철학과 자유주의를 수용한 결과로 발생했다. 교회가 오번선언서(Auburn Affirmation, 1924)에 서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인하고 기독교의 중추적인 도리를 신앙하지 않는 자들을 목사로 안수하고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한 결과이다. 힘의 논리로 역사를 파악하는 사람들은 진리 문제로 교회를 떠나 자유한 사람들을 분리주의자로 규정한다. 그러나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한 자들이 교회분열을 가져온 것이다. 이 경우, 문제해결은 세속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교회 안에 끌어들인 자들이 자신들의 책임과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스스로 반기독교적인 신학을 버리고 사도들이 가르친 정통교리를 고백할 때 가능해 진다.

셋째,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면 성도들의 하나 됨이 깨어진다. 초대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여 끝없이 족보에 연연했다(빌3장; 딤전1장). 바울은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가르친 진리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주장하여 교회분열을 조장한다고 질책한다.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을 첨가하는 것을 분열행위로 단정한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 이외의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거나 율법의 멍에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우면 일치가 깨어진다(행15).

바울의 가르침에서 보면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로마가톨릭교회, 알미니우스주의, 펠라기우스주의, 구원이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고 하는 그릇된 교리가 교회를 분열시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보는 그릇된 신학이 교회의 하나 됨을 깨뜨린다. 마리아를 중보자라고 생각하거나, 절기를 지키고 천사를 숭배하라고 하는 가르침이 분열을 가져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칼빈주의 5대 교리가 말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가르친다. 바울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하기 전에 교리를 제시한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4-5).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다(엡2:8-9). 하나님은 자신과 원수된 우리를 십자가로 화목하게 했다(엡2:16).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계시의 말씀] 위에 세움을 입었다(엡2:20). 바울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과 예정(엡3:9-11)을 말한다.

골로새서는 먹고 마심, 절기, 안식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지만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다. 꾸며낸 겸손, 천사숭배, 성직제도를 책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러한 중보의 수단들이 필요치 않는데도, 일련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저해하고 성도들의 하나 됨을 방해하고 있다고 책망한다(골2:16-19). 이처럼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을 방해하는 것은 사도적 복음에 상충되는 거짓교사의 가르침, 이단, 그릇된 신학, 유태 율법주의이다.

넷째,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면 교회분열이 초래된다. 신약교회에 나타나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은사를 자랑했다. 은사에 대한 독점적 이해를 가진 자들이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자기 자랑은 시기와 적대감과 불행을 초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다. 인본주의, 자기과시, 공로사상, 명예심, 교권주의는 하나 됨을 깨뜨린다. 이것은 대개 교권주의 행태로 교회의 치리회의 원칙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가 우상숭배자를 치리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당사자가 교권을 가진 사람일 경우 그것을 자신들에게는 시행하지 않는다. 교회의 법에 어긋나는 결정을 내린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한국장로교 안에서 일어난 헤아리기 어려운 분열들은 주로 인간적인 동기와 교권주의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 이렇게 발생한 분열은 관련자들과 그 후예들이 비신앙적 처사와 잘못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와 교회의 규정으로 돌아가야 해결될 수 있다.

교회분열에 대한 바울의 역사평가의 기준은 진리성이다. 분열 문제를 해결하자면 먼저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1) 파당주의, 계파주의, (2) 거짓교사, 세상 철학과 지혜, (3) 율법과 행위를 의지하는 일, (4) 교권주의, 정치적 동기, 인간적인 작태를 청산해야 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루신 하나 됨을 유지하려면 이상의 네 가지를 경계하고, 복음진리를 충실하게 믿고 고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한다.

4. 진리파수의 사명, 진리 안에서 일치

그리스도는 감독자를 세워 하나님의 양떼를 지키게 했다. 자기 피로 산 교회를 치게 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난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고 한다. 성경은 거짓교사를 흉악한 이리로 간주한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마귀와 동일시한다(고후11:13-15).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고 말한다. 요한은 거짓 선생을 집안으로 영접하지 말고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10)고 한다.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요이11)가 되지 말라고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3:10,11)고 말한다.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2:15)고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은 유형제도의 연합보다 진리 안에서 연합을 중요하게 여겼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장구한 역사, 거대한 제도, 무수한 신자, 엄청난 재물을 가진 것을 자랑할 때, 루터와 칼빈은 그것들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진리―교리는 교회의 기초인 동시에 신앙고백공동체가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루는 연합과 일치는 시간낭비이다.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진리를 희생시키거나 무시하는 하나 됨과 화평은 회칠한 무덤이다. 계시된 진리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복, 인류의 타락, 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 그리스도의 인격과 대속 사역, 그리스도의 유일성 등 중추적 교리를 도외시하는 연합일치운동이나 그것을 부정하는 자를 포용하는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 단지 “하나”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화평주의 연합, 일치는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숫자, 제도, 기구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시는 생명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유지된다. 연합과 일치를 수적(數的)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치의 기초인 교리와 신앙고백은 교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여호와의 구원은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삼상14:6). 기드온을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 300명 용사가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삿7).

성경은 다원주의, 포용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배격한다. “진리 안에서 일치”를 조건으로 하는 연합, 일치 활동만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고 하는 말씀은 신학적 다양성을 수용하는 현대 포용주의 에큐메니칼운동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외형적으로 거대한 것보다 진리를 따르는 소수 사람들(dissenters)을 통해 역사를 이루셨다. 기독교의 힘은 장대한 조직, 거창한 행사, 과시적인 운동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에 있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진리,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다. 하나 됨을 진리보다 앞세우고 일치를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에 상반된다. 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일치와 화평을 깨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는가? 루터와 칼빈은 교회의 일치와 성도의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진리보다 앞설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구원과 생명이 진리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덕성(고려신학대학원) dschoiword@hanmail.net

출처: 최덕성 교수 홈페이지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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