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마이산(馬耳山) –
분명히 무엇인가 들리긴 들리는데
뭇중생 궁시렁소리에 뭐라는지 알 수 없어
살점이 뜯겨나가도록 귀 끝 세워 듣는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04/1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신이 빚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마이산(馬耳山)
(1) 산행계획
2007/4/14(토),
항상 마음에만 두고 있던 너의 품에
드디어 아내와 안겼지라.
그러니까 너에게서 흘러나오는 물을 담는
용담댐이 생겨나기 前, 너에게 다가가긴 했지만
암마이와 숫마이 사이를 지나 탑사까지만 알현한 정도여서
오늘은 멀리서부터 서서히
너의 품속으로
야금야금 안겨보며 느껴보고자 했지라.
(2) 접근(接近)
시원한 대통고속국도를 내리달려
덕유의 자락을 지나 장수IC에서 진안지경으로 접어드는 동안
주위를 감싸고 도는 짙은 운무는
오늘 산행을 걱정되게 하였지라.
왜냐면 오늘은 멀리서 馬耳,
너의 그 쫑긋한 귀 끝을 바라보며
다가가고자 산행 설계를 하였기 때문인데
정작 마이산 북부 주차장에 도달하니
짙은 雲霧는 싸악 가시고
너의 그 신비한 말 귀가 살아서 쫑긋거리며 다가오더라.
이어 택시를 잡아타고
서측 연장리 덕천교에 다다랐지라.
(3) 덕천교-3단폭포
(10:00-11:40, 100분, 3km)
덕천교 初入에 서 있는 이정목이
광대봉 3.1km, 탑사 8.2km라 가리키고 있슴을 보니
너무 싱거울 것 같기도 하여
가다가 돌아가는 능선이라도 나오면
돌아가기로 하였지라.
완만한 들머리 오솔길에는 이제 마악 피어나는
새싹들이 그 여린 새순을 내밀고 있었는데
植生은 지난 번 향적 능선의 그것과 비슷하더라.
그러나 곧 둥근 조약돌이 송송 박힌
너의 特有의 뼈대를 드러낸 암릉이 나타났지.
그 암릉에 올라 봉우리 몇 개를 넘으니
지도상에 태자굴로 가는 길인 듯한
급한 내림이 나타났는데
우리는 좌측 길게 뻗은 능선길을 택하였지라.
그 능선상의 봉우리에 올라서니
그제야 멀리 외로운 섬처럼 떠있는
너의 쫑긋한 귀가 보였지.
샹그릴라처럼 떠 있는 그 섬을 향하여
우리 부부는 가기만 하면 되었지.
이 事緣많은 세상에서
우리 부부가 늘상 행하는
부모 걱정, 아이들 걱정, 서로 서로 걱정하는
모든 雜多한 것들은 저 구름 속에 흘려보내고,
天地의 법칙이 그러하듯 그런 것들일랑 대자연의 섭리에 맡겨두고
오로지 그 구름 속에 섬처럼 떠 있는
이상향인 너를 향하여
물 흐르듯 나아가고자 하였지.
그렇게 암릉과 벼랑과 능선을 오르내리니
삼단 폭포 상단에 다다랐는데
너의 깊은 품속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너의 모습을 살피며 거기서 땀을 훔치며, 한숨 돌리었지라.
(4) 3단폭포-광대봉-안부
(11:40-12:50, +70=170, +2.2=5.2)
3단 폭포 위에는
활짝 핀 진달래에 어우러진 용소가 있었는데
그 물의 맑기가 그지없어
손을 씻으니 덩달아서 마음조차 깨끗해지는 듯 하더라.
이어서 능선을 올라서니
서측에 우람한 광대봉(609m)이
넓은 어깨를 벌리고 있었지.
아내가 그 광대봉을 보더니 오를 엄두를 못 내어
아내는 안부에서 쉬고 혼자서 올랐지라.(12:30)
광대봉 발치에 도착하여 올려다 보니 그 벼랑이 예사롭지 않은데
내려오는 인파가 외줄에 주렁주렁 매어달려 줄을 잡을 수 없어서
옆길의 직벽을 기어서 올랐지라.
그러나 막상 올라보니 모든 산봉우리가 그렇듯 별스럽지도 않은데
다만, 산 아래 합미산성과 보흥사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좋았지라.
그런데 광대봉에서 내려오며 보니
올라올 땐 못 보았던 네가
멀리서 오서 오라고 귀를 세우고 있었지.
그 예쁘게 다듬은 능선과 너의 자태는
바로 동화책의 책갈피 사이로 내가 끼어든 느낌이었지.
그러니까 몇 년 전 에스파냐의 톨레도에 가 보았을 때
느꼈던 느낌을 받았지.
네가 마주 보이는 마당바위에서
그 동화책의 책갈피 사이에 끼어 너를 바라보며
마음에 점을 찍었지.(점심, 12:50-13:10)
(5) 안부-고금당
(13:10-13:50, +40=230, +1.2=6.4)
그렇게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고
내려가는 길은 오름과 내림의 반복이었지만
제비꽃, 진달래, 양지꽃등 온갖 야생화가 즐비하여
전혀 고단하지 않았지.
그런데 웬 원추리 群落이 그리 많은지
아무튼 웃으며 반겨주는 해맑은 그들을 보니
덕유평전에 즐비한 그 애들이 생각났지.
야생화들과 이야기 하며 한 모롱이를 돌아드니
금빛 찬란한 祭堂이 나타났는데 바로 고금당이었지.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내려다보는
하이얀 벚꽃에 둘러싸인 탑영제의 금당사도 황급빛이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태조 이성계가
은수사에서 백일기도 중 산신령에게 하사받았다는
금척(金尺)과 연관이 있지 않나 혼자 생각하여 보았지.
(6) 고금당-비룡대
(13:50-14:20, +30=260, +1.0=7.4)
문을 꼭꼭 잠근
고금당 마루에서 바라보니
건너 봉우리에 정자가 보였지라.
능선과 철계를 지나 전망대에 올라보니
비룡대라 되어 있고 나봉암(527m)이라는 푯말이 정자 아래에 있었지.
여기선 네가 한결 가까이 보였는데
이제 말 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너의 어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내민
숫마이와 더불어 커다란 고래 부부가 지구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이었다면
말 귀라는 애칭을 가진 너에 대한 모독일까?
어쨋튼 너는 점점 크게 우리에게 다가들었지.
(7) 비룡대-봉두봉
(14:20-15:00, +40=300, +0.9=8.3)
그렇게 너에게만 눈맞춤을 하자
바로 옆에 늘어선 삿갓봉이 시기하며 흘겨 보는듯 하였지.
너로부터 삿갓봉까지의 능선도 奇巖으로 이어져
한번 오르고 싶었지만 참기로 하였지.
그래야 또 훗날 그 핑계로
다시 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
이제 다리 힘도 점점 빠져 가는데
웬 오름이 그리 거센지 헉헉거리며 비알을 오르니
봉두봉(540m)이 반겨주었는데 거기서 내려다보는
탑영제는 하이얀 벚꽃 길로 장관이었지.
(8) 봉두봉-탑사-은수사
(15:00-15:40, +40=340, +1.4=9.7)
봉두봉을 내려오니
너의 도포자락이 발 끝에 닿았는데
거기 서 있는 푯말은 2014년까지 암마이 출입금지라 되어 있더만.
그래!
부석부석한 너에게 사람들이 달라붙으면
너의 연약한 피부가 벗겨져 훼손되겠지.
그래!
아주 잘한 일이야!
그러나 언젠가 입산금지가 풀리면
부석부석한 네가 다치지 않게 살금살금 한번 올라봐야겠지?
후일을 기약하며
암마이의 우람한 발치를 돌아 탑사로 내려오니 인산인해였지.
탑영제로부터 이곳 탑사까지 이어진 벚꽃길이 만개하였기 때문인데
벚꽃을 뒤로하고 탑사에 오르는 우리를
이갑용 도사님의 자그마한 동상이 반겨주었지.
도사님 어깨 뒤로는 그가 쌓은 돌탑들이
千年이라도 버틸 것 같은 모습으로
줄줄이 마중 나와 있더라.
그렇게 탑사와 이갑용 도사님을 알현하고
은수사로 접어드니
탑사 옆으로 치솟은 암마이봉의 절벽은
혀를 내두를 만큼 높고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더라.
타포니 지형에 산재한
역암이라는 바위의 성분 때문에
중간에 푹 패어 들어간 곳이 여기저기 보였더라.
동봉(숫마이)과 서봉(암마이) 사이의 협곡 같은 안부를 지나니
은수사(銀水寺)가 숫마이의 웅장한 발치에 자리했는데
태조 이성계가 임실군의 성수산(聖壽山)에서 돌아오다가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지는데
기도 중 산신령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내렸다고 하더라.
(9) 은수사-화엄굴-하산
(15:40-16:20, +40=380, +1.6=11.3)
은수사 앞뜰은 온갖 야생화가 만발해 있는데
북부 주차장으로 넘어가는 신설된 계단길 양옆으로
현호색, 별꽃류가 누군가 일부러 뿌려 놓은 듯 온통 群落을 이루고 있더라.
언덕을 올라서니 동쪽 숫마이 쪽으로
화암굴(華岩窟)이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가보진 못했더라.
암굴 안에는 샘이 있는데 예로부터 이 물을 마시고
산신에게 빌면 得男을 한다고 전해진다더라.
그렇게 산을 내려와
진안 역사박물관에 들러 진안의 역사를 一別하고
진안 읍내에서 바라보는 마이는 역시 신비한 모습을 다시 보여주더라.
다만, 그 말귀 같은 실루엣 주위로 해가 갈수록 전신주와 신축건물이 증설되고
더구나 최근엔 장수-익산 고속국도의 높다란 교각이
방해하고 있어 안타깝더라.
(10) 후기(後記)
집에 돌아와 아무래도 아쉬워
너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았지.
너의 이름을 우선 말할 것 같으면 다들 알다시피
산 모양이 마치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지?
동봉은 667m의 수마이산,
서봉은 673m의 암마이산이라고도 부르는데,
곧 남녀 양신(兩神)으로 믿어
속금산(束金山)이라고도 부른다지?
세계 유일의 부부산이라고 감탄을 하기도하지?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초기에는 속금산이라 했고,
조선 태종 때부터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이라 불리웠다지?
또한,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고 불리는
너의 그 자그마한 품속에서
아득한 옛날 남녀 두 신선이
이곳에서 자식을 낳고 살았다는데,
등천할 때에 이르러 남신이 이르기를
"우리가 등천하는 모습을 아무도 봐서는 안 되니
밤에 떠납시다"하였으나
여신은 밤에 떠나는 것은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했다 하였다지?
그러나 새벽에 떠날 즈음
마침 새벽 일찍 물 길러 나왔던 동네 아낙이
등천하는 두 신선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것을 듣고
등천이 틀린 것을 안 남신이 화가 나서
"여편네 말을 듣다 이 꼴이 되었구나"하고
여신으로 부터 두 자식을 빼앗고서 발로 차 버리고는
그 자리에선 "바위산"을 이루고 주저앉았다지?
항상 우리의 산야에 스민 이야기는
이렇게 슬픈 애수가 있슴은
그만큼 우리의 일만 년의 역사에
고난의 시절이 많았슴이라고 해석되는 거지.
그래서 그런지 너를 진안 읍내 쪽인 북에서 보면
동편 아빠봉에 새끼봉이 둘 붙어 있고,
서편의 엄마봉은 죄스러워서인지 수치심에서인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는 거지.
덕유에서 지리로 내닫는 백두대간 선상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에 위치하여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그들의 발원지로써,
또한 풍수지리적으로 산태극·수태극의 중심지인 너!
지난 가을의 덕유종주시에도
하나의 빛나는 點으로 다가오던 너!
그렇게 높지 않으면서도
나를 魔力의 강한 視線으로 이끄는 너는
어떠한 사연이 있기에 그렇게 숭숭 뚫린 바위와
역암의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박힌 둥근 조약돌들을 갖고 있느냐?
너의 뼈대를 이루는
암석의 生成을 지질학적으로 살펴보자면,
중생대 후기(약 1억년전)까지는 담수호였으며
이후로 4번의 빙하기와
그 사이 3번의 간빙기에 엄청난 홍수가 밀어닥쳤는데,
너의 그 이상한 뼉다구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기후조건 즉 신생대 제 4기의 빙하기와
뒤에 온 한냉기에 형성되었다지 아마.
그 때 예고 없이 닥친 대홍수시에
모래 자갈 등이 밀려 호수를 메우고 물의 압력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이며
약 7천만년전 지각 변동에 의하여 융기되어
비로소 너의 그 잘 생긴 윤곽을 드러내었고
그리하여 그 돌 틈에서 지금도 민물고기류의 화석이 간혹 발견된다지?
7천만년 전이라면 공룡이 멸종하고
인류의 진화 단계상 쥐 크기의 영장류의 조상이
겨우 등장한 시기일텐데
그 눌려진 돌 틈에서 지금 이 순간 갑자기
그들이 튀어 나올 것만 같다.
그 숭숭 뚫린 구멍을 가진 암석을 일러 타포니 현상이라 하는데
보통 풍화작용은 바위 표면에서 시작되나
마이산 타포니 지형은 풍화작용이 바위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가 팽창되면서 밖에 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냄으로써
만들어 진 것으로 세계적으로 타포니 지형이
가장 방대한 영역에 걸쳐 나타난다는 너!
너의 그러한
드라마틱한 사연이 최근 규명되고 있으니
신이 만든 최대의 걸작이라고 밖에는 다른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거지.
시멘트로 배합한 듯한 돌과 모래로 구성된 이상야릇한
속살을 가진 너의 그 역암은 풍상과 사람들의 발길에 부대끼면서
분해된 자갈들을 모아고 축지법을 써서 전국의 명산의 돌들을 날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갑용(李甲用) 도사님은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폭풍과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천지탑을 10년이란 세월 동안
120여기나 되는 돌탑을 세우는 공사를 행하셨다지?
도사님은 노구를 이끌고
왜, 무엇 때문에 이러한 돌탑을 쌓으셨단 말인가?
돌탑은 말이 없지만,
숫마이와 암마이의 그늘에 그의 氣만 살아서
나의 눈빛에 얼핏 스쳐가는 듯 하더라.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04/1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마이산(馬耳山)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높이 687.4m의 산.
1979년에 전라북도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03년에는 명승 제12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름처럼 말[馬]의 귀[耳] 같은 모양으로 두 암봉이 나란히 솟아 있다.
재미있게도 봉우리 이름에 암수를 붙여 동쪽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한다.
암마이봉이 좀 더 높다(687.4m, 숫마이봉은 681.1m). 암마이봉이 2014년 재개방되었는데,
시간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뿐히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시간제가 폐지되었다.
다만 안전을 위해서는 야간 및 새벽에 산행하는 행위는 자제하도록 하자.
암마이봉 정상 인근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용담댐을 볼 수 있다. 다만 용담댐에서는 못 본다.
마이산 표지판에 나와 있는 등산로 중 일부는 없는 등산로로 보자. 예를 들어
태자굴-광대봉 구간. 합미산성-광대봉 구간에 묻히는 바람에 양쪽 입구에서도 길을 찾기 힘들다.
등산 난이도는 암마이봉이 높고 중간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나뉘어있는데
중간에 맨바위인 등반로가 있으니 참고하자. 발 한 번 삐끗하다가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좌, 우에 설치된 난간을 잘 잡고 올라가자. 참고로 이들 경사도는 무려 6~70%에 달하니
건강한 체력에 맞지 않으면 중간에 헥헥거리거나 도중에 포기하고 하산하는 경우가 있으니
관리를 제대로 하자. 저 일부 구간이 맨바위로 이루어진 등반로 때문인지
동절기인 11월 중순 부터 이듬해 3월 중순까지는 안전을 위해 입산이 전면 통제된다.
반대로 대부분의 마이산 표지판에는 없는 길이 어떤 표지판에는 유성펜으로 그어져 있다.
진짜 길이니 안심하자. 혹은 어떤 표지판에도 없는 길이 있다.
대표적으로 전망대-고금당 구간. 남부마이산으로 가는 길을 놓쳤다고 되돌아가지 말고
계속 가다 보면 가는 도중에 남부 마이산으로 가는 길이 2개나 있다.
왜 표지판에 없는지 의아할 정도로 잘 뚫려 있다.
약 1억여 년 전 호수였던 진안 분지에 큰 홍수가 일어나면서
근방에서 자갈과 모래 진흙이 밀려와 퇴적되어 지금의 역암(수성암, 퇴적암)이 되었으며,
약 6~7만년 전 지각변동기에 서서히 융기하여 현재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퇴적암의 두께는 약 2,000m정도로 알려져 있다.
암마이봉 정상에서 발견된 민물고기 쏘가리와 다슬기 등의 화석이
이곳이 호수였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의외로 화강암이 아니다.
아득한 옛날 중생대에는 이 지역을 포함하여 경상도, 전라도 지역 전체가 담수호였다.
그러던 것이 7천만년 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호수 밑바닥 퇴적층이 굳어져 생성되어 있던
암괴가 이 습곡작용으로 솟아올라서 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 증거로 민물고기의 화석이 발굴된다고.
또한 퇴적층의 특성으로 인해 지형학에서 말하는 타포니(Tafoni) 지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마이산의 암석체는 모래와 진흙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에 자갈이 곳곳에 박혀있는 역암인데,
오랜 시간 풍화작용, 침식을 겪으며 자갈이 빠져서 떨어져 자갈이 있던 곳만 움푹 패여있다.
봉우리 밑에 돌탑이 세워진 것도 마이산의 풍화로 자갈들이 많이 떨어져 있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따라서, 돌산이지만 화강암이 아니다.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렸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어 왔다.
이 산에 있는 탑사가 유명하다. 마이산의 남쪽 사면에 있는 사찰로서,
이갑룡 처사가 쌓은 80여 개의 돌탑이 있어서 탑사라 불린다. 돌탑들은 형태는
일자형과 원뿔형이 대부분이며 크기는 다양하다. 또한 이 돌탑들은 처음 쌓인 이후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무너지거나 새로 쌓은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 연구자의 견해에 따르면
막돌허튼층쌓기라는 기법으로 쌓은 것으로, 사이사이에 최대한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작은 돌 여러 개를 끼워 틈새를 메워 견고하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틈새를 완전히 메우지 않고 어느 정도 공간을 두어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있다고. 숫마이봉과 암마이봉 사이의 마루턱에서
은수사 쪽으로 내려가면 도착한다. 탑사 근처에는 약 1983년에 심은 능소화가 있으며,
이 능소화는 국내 최대 크기이다.
벚꽃으로 유명한 산이다. 4월 중순에 마이산 남부의
이산묘와 탑사간의 1.5km의 길에 벚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덤으로 주변 도로에도 벚꽃이 피어 아름답다. 전주∼군산간의 도로 47㎞ 구간에 벚꽃이 피는 것이다.
전주-군산간 국도 일대는 전국에서 가장 긴 벚꽃길로 유명하다.
그밖에 가을의 억새, 여름/가을의 코스모스가 아름답다. 또한 여름 장마철,
그러니까 폭우가 떨어지면 마이산 절벽으로 폭포가 나타나는 비경을 자랑한다.
특이한 풍경과 수 많은 돌탑과 기도암, 절 등으로 인해 한국 무속의 중심지 중 하나이다.
종교를 떠나 무언가 신성한 느낌이 많이 들어 관련된 전설도 많다.
* 이갑룡(李甲龍, 1860∼1957) 도사의 행적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경의, 호는 이갑룡이라 한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 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혔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닥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 적에 갓 돐을 넘기시고 제삿날에 조상 제사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 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경의를 이길 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 하실 때
이 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 달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 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짖고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시다
인생의 삶과 죽음의 인생 허무무상을 탄식 하시다가
19세 때 시묘 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 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 의 산과의 대화요,
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 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 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 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 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 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 층씩 30여 년 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 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 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해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침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 할 때 산항에 기도하고
돌아올 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 군을 축조 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쿳 숀 역할을 하고
자연 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인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 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 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탑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 하는 듯 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성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고 체감율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 중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 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 양의 이치를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와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 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 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이 작품으로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 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 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 속에 고달픔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 이라고 까지 말했으며
고려를 거쳐 이조 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러졌으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 지지 안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 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 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마이산 탑과 같은 년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을 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 프랑의 거액을 들여
300m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 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석정은 축조를 완성한 후에도 수도와 기도생활로 일관해 왔으며
영의 경지에 더욱 도달하여 60대에 불가사의의 신명 글을 남겨 놓았다.
30여권에 이르는 이 대부서는 밤에 기도 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아 쓴 것으로
책자 조주 예한자등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로
보통 사람이 도저히 판독 불능의 문자로서 생전에 이 글을 밝히지 안했으며
이 신명글은 영의 계시에 의한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 글을 알게 될 것이란 유언이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석정은 세속의 문자와 접한 것이 적었고 그리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한다.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30여권의 신서를 남기었는지?
신서의 내용뿐 아니라 석정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시간을 축내지 않으려고 무답무어로 대답을 멀리 했다.
또한 소문을 듣고 제자 되기를 자원하여 찾아온 사람이 있어도 허락한 적이 없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자리를 같이한 경우에도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다.
또 전주 관성묘에 가서 관성장군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마이산에서 힘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플 땐
항상 관성 장군사에 묻고 대화를 했다 한다.
어느 은천리 누군가가 갑룡을 비판하고 다니고 탑사에서 그릇을 훔쳐 가면
그 괴로움을 관성 장군상에 물으니 그놈을 내가 죽여주랴? 하고 물으니
갑룡은 그러지 말고 그냥 혼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달라고 하자
그 다음 날부터는 그가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갑룡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나니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
(전주 관성장군 성전 대표 대담)
갑룡은 유,불,선 선 주장으로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의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의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수 물을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 후 자식 3형제를 두고 얼마 안되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 중 생계가 어렵고하니 아들이 없는 남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고
차남 이 도생씨가 갑룡의 후에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서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 말로는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 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 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층 씩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 같은 타원형탑은 둥근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인 조금씩 튀어 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높이로 차근히 올려서 그 위에 널판 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부위에 잔돌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볍게 만들고 돌을 오렸다 한다.
맨꼭대기 부처님 머리 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 돌을 올렸다고 한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 우물 정자모양의 나무대를 철거하고
돌망치로 툭 튀쳐 나온 계단형 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천지탑은 음,양으로 나누워지는데 보는 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다.
돌덩이 자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 칸은 양이고 음양, 음양 순으로 이루어져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판의 널판 돌은 음은 14기 양은 15기 음은 짝수이고 양은 홀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천지탑 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 있다.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수,화,풍,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탑 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군장들로 32기의 장수의 탑이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군위 침입을 막기 위함이니 어느 마군이 침입을 할수 있겠는가.
천지탑 아래 갑룡의 처소를 잡고 기도실과 방사를 만들어 생활의 거처로 삼았다.
대웅전 아래 용궁이 있고 앞에 중앙탑이 있는데 (일명:흔들탑)이렬의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거려도 넘어지지 않고 굳굳이 잘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이다.
일렬 중앙탑에고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듯한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다.
갑룡 좌상 옆에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 앞은 약사탑이 있고 암바위 옆으로 월광탑이 있다.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 준다.
그중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 정서의병 등의 병고를 쾌유케 하기 함이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셨다고 한다.
묘법연화경 15품에 나오는 연화의 세계임이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다.
항상 백두루마기를 거치고 백의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95세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르는데 36시간 만에(일일반)다시 일어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 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년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속의 이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에 똥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 하고 싶고 내 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에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묻을까
걱정 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봐주고 행인을 돌봐 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
멀리서 보고프면 암 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짖는 죄를 대신 속죄 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 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남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 하면서 계시는 듯 하다.
Message of love - Don Benne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