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르
위치: 서태평양
인구: 10,930명 (2022년 추계)
수도: 야렌
면적: 21.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나우루 공화국 (Republic Of Nauru)
기후: 온난습윤성기후
민족 구성: 나우루인(58%), 태평양섬주민(26%), 중국인
언어: 나우루어, 영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종교: 개신교, 로마가톨릭
화폐: 호주 달러 (AUD) 환율계산기
대륙: 오세아니아
국가번호: 674
GDP: USD 114,000,000
인구밀도: 512명/㎢
전압: 220V, 240V / 50Hz
도메인: .nr
나우루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3,900km 떨어져 있는 남서태평양상의 공화국. 타원형의 섬으로 둘레가 19km이며, 수도는 야렌이다. 다량의 인광석이 매립되어있으며 나우루의 주요 수출품목으로 수입총액을 뛰어넘는 수출액을 보이고 있다. 채광을 위해 계약이민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인광석의 대체 사업으로 장기현금투자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면적 21.0㎢, 인구 10,998(2023 추계).
자연환경
산호초가 융기해 이루어진 섬으로, 평균고도 60m의 중앙고원이 있고 최고봉의 높이는 65m이다. 풍부하게 퇴적한 구아노를 주체로 하여 형성된 인회암층으로 덮여 있으며, 누수에 의해 주기적으로 물이 채워지는 함몰지인 부아다 초호가 있다.
고원 아래에는 폭 150∼300m의 비옥한 평지가 섬을 둘러싸고 있어 정착과 제한된 농업이 이루어지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모래해변 건너편에는 거초가 하나 있다. 해안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부두로 사용할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대체로 고온다습한 기후로 낮 평균기온이 30℃에 달하지만 바닷바람 때문에 견딜 만하다. 가끔 극심한 가뭄이 들기도 하지만 연평균강우량은 2,000㎜이다. 서쪽에서 계절풍이 불어오는 시기인 11∼2월이 가장 습기가 많은 때이다.
토양이 극히 다공질이기 때문에 식생은 주로 코코스야자, 판다누스, 각종 덤불과 관목 활엽수에 국한되어 있다. 부아다 초호 주위의 작은 옥토와 관목이 자라는 광산 매립지를 제외하고는 식물은 대부분 좁은 해안지역에서만 자란다. 1970년대말 3,900만t의 인광석이 고원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현재의 생산량 기준으로 2000년경까지 채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
나우루 주민의 약 3/5은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계의 나우루 원주민이다. 또한 주민 중 1/4은 키리바시·투발루·필리핀 및 다른 여러 섬에서 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중국 화교와 유럽인들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광부로서 광산을 따라 이동한다.
2023년 기준 인구는 1만 998명이며 인구밀도는 541명/㎢인데 거의 해안지대에 밀집해 산다. 1,000명당 24명인 출생률과 5.9명인 사망률, 그리고 연평균 자연증가율 0.53%는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2017). 남부해안의 메넹 지구와 야렌 지구에 인구가 가장 많으나 이 섬에 도시는 하나도 없다.
언어
국어인 나우루어는 폴리네시아어· 미크로네시아어· 멜라네시아어가 섞인 특이한 방언인데, 영어가 널리 쓰이며 학교에서도 영어로 가르친다.
문화
나우루는 독일에 합병되었을 때 독일에 의해 전통 춤이 금지당한 적이 있지만 씨족 사회적 특징은 유지하고 있다. 현대문명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가 짙은 편이다.
역사
독특한 합성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우루에는 여러 시대에 태평양의 여러 섬의 주민들이 표류하다가 정착했던 것 같다. 1900년까지는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두 민족이 구분되었으며 12개의 씨족들이 각기 다른 방언을 갖고 있었다.
'헌터호'를 탄 영국의 항해가 존 펀이 179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발을 디뎌 원주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섬의 이름을 '유쾌하다'는 뜻의 '플레전트'라 했다. 1830년대부터는 고래잡이 어부들이 이곳에 가끔 들렀으며, 해변가에 백인 부랑자들이 많이 살았다. 유럽인들이 들여온 무기가 도화선이 되어 1878∼88년에는 씨족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고, 이에 견디다 못한 독일인 정착민들이 독일령 마셜 제도에 이 섬을 편입시켜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88년에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독일은 무장함 '에베르호'에 판무관을 실어 보내 섬 주민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고 독일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여 주요행정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1899년에 들어왔으며 로마 가톨릭은 1903년에 소개되었다. 1899년 인광석을 발견한 후 1906년 영국의 한 회사가 인광석을 마구 채굴하여 얄루이트게젤샤프트라는 독일회사와 이익금을 나누어가졌다. 1907년 인광석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온 중국 노동자들이 이질과 소아마비, 결핵을 퍼뜨려 나우루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1914년 오스트레일리아가 나우루를 점령했다.
1919년에는 국제연맹이 나우루를 영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의 공동 위임통치국으로 인정했다. 초대 오스트레일리아인 행정관이 처음으로 인광석의 수익금 일부를 나우루인들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정했다. 1940년 독일 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여 인광석 수송선박 5척을 침몰시켰다. 1942∼45년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한 뒤 당시 나우루 주민의 2/3에 해당하는 1,200명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1946년 1월 31일 737명만이 돌아왔으며, 그후 이 날을 '해방일'로 기념해오고 있다.
194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관리하는 유엔 신탁통치지역이 되었으며 1951년 지방행정참사회가 구성되었다. 주민들은 1967년 협정에 따라 인광석 채굴권과 판매권을 갖게 되었다. 1965년에 나우루 국회가 설립되었으며 1966년에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8년 완전히 독립했으며 초대 대통령에 해머 드로버트가 선출되었다. 1969년 영국연방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종교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며, 나우루 조합교회와 나우루 독립교회 및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많다. 나우루인이 58%, 기타 태평양 섬나라의 출신이 26%, 화교가 8%, 백인이 8%이다. 모든 백인들은 독립 때 남겨진 영국인이다. 나우루 국민의 33% 정도가 개신교(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인데, 로마 가톨릭의 비중(30%)도 크다. 이외에 소수인 불교, 토착 종교가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하기도 한다.
나우루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대한민국과는 197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2년에 수교하였다. 중화민국과 수교중인 나라이기도 하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현재: 문화교류·교민 현황/없음
경제·통상·주요 협정
현재: 문화교류·교민 현황/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