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보성(寶城)은 전라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보성군(寶城郡) 지역의 옛 지명으로 마한 54국 중 불운국(不雲國)이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보성군(寶城郡)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고려 태조는 삼양군(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 조양현(兆陽縣)과 복성현(福城縣)을 제외한 대부분의 속현이 흥양현으로 이속되어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보성군, 1896년에 전라남도 보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권역이 다시 확대되었고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보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보성김씨(寶城金氏), 보성박씨(寶城朴氏), 보성선씨(寶城宣氏), 보성손씨(寶城孫氏), 보성안씨(寶城安氏), 보성오씨(寶城吳氏), 보성이씨(寶城李氏), 보성임씨(寶城林氏), 보성전씨(寶城全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전남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 전남 보성군 조성면 매현리, 전남 보성군 웅치면 중산리,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전남 장흥군 안양면 당암리 등이다.
특히 전남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 노산마을은 4백50여 년 동안 보성선씨의 보금자리다. 강원도에서 현감을 지낸 선국형(宣國衡)이 처음 이곳에 온 뒤 텃밭이 되었다. 효자, 효부, 열녀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며 장수마을로도 유명하다. 특히 여순반란 사건과 6.25 동란 때에도 단 한 사람의 희생자가 없었던 곳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보성선씨는 1985년에는 총 7,651가구 33,105명, 2000년에는 총 10,821가구 34,84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8,122명, 부산 2,276명, 대구 296명, 인천 802명, 경기 3,482명, 강원 1,023명, 충북 553명, 충남 902명, 전북 1,765명, 전남 11,740명, 경북 346명, 경남 1,522명, 제주 188명이다. 전남 지역에 단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8,223명, 부산 2,209명, 대구 303명, 인천 1,663명, 광주 4,494명, 대전 589명, 울산 478명, 경기 6,865명, 강원 836명, 충북 643명, 충남 627명, 전북 1,367명, 전남 4,657명, 경북 439명, 경남 1,250명, 제주 199명이다. 전남, 광주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도 많다.
울산의 선씨
삼동면 금곡리 보성 선씨
보성선씨(寶城宣氏). 주변에서 잘 찾아보기 힘든 성인 선씨가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리 금곡마을 전체 40가구 중 14가구에 이른다. 선씨들이 살고 있는 집 주소도 20 21 22번지, 53 54 55번지로 한동네 옹기종기 붙어 세를 이뤄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울산~부산 방면 국도를 타고가다가 울산예술고등학교가 보이는 대복 삼거리에서 미터기를 "0"으로 누른 뒤 오른쪽(통도사 방)으로 꺾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다가 10.9㎞가 되는 시점에서 멈추면 바로 금곡마을이 나온다.
삼동초등학교와 삼동면사무소, 치매전문요양원인 울산노인의 집, 금곡농장이 차례로 보이고 금곡교를 지나기 직전 금곡산장, 은어골, 전인계발원이라는 세로간판이 보이면 왼쪽으로 90도 꺾어서 들어가면 된다.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서너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는 손두부 판매소로 유명하다. 2002년 11월에는 "6시 내고향"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생활개선 손두부"라고 적힌 컨테이너 박스는 하금곡마을에 살고 있는 옹티댁(선종윤씨)과 문봉댁(선종대씨), 고성댁(선종찬씨)이 직접 만든 손두부와 찹쌀동동주를 판다.
하금곡, 중금곡, 상금곡으로 나눠져 있는 금곡리는 일명 쇠골로 새각단에서 유래했다. 새각단은 쇠각단의 전음. 약 1세기 전후 철기시대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금곡리는 무기나 농기구를 제작하고 이를 운반하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새각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상금곡 마을에서 400m 올라가면 신기리 새각단으로 불리는 옛 집터가 있다. 이곳이 가장 최초로 형성된 금곡마을로 전해진다.
현재 하금곡 마을에는 보성선씨가 10가구 살고 있다. 약 145년 전 통수(현재 통장)로 처음 금곡마을을 찾은 철원(1837~1891)의 고손인 선종렬(77)씨를 비롯해, 종찬, 종윤, 종만, 종대, 종홍, 찬원, 대성씨가 살고 있다. 부산 수성구에서 3선 구의원을 지낸 종한씨, 김해 대저중고등학교 이사장인 장원씨는 한달에 3~4번 금곡 집을 찾는다. 중금곡 마을에는 문주, 동종, 종수, 종렬씨가 살고 있다. 상금곡 마을에는 7가구가 살고 있지만 선씨는 없다.
문중 종손인 종렬씨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철원 할아버지가 지은 집인데 100여년 된 집입니다. 중간에 불이나서 새로 짓기는 했지만 그래도 100년이나 됐습니다"고 전했다. 수년 전에 마루에 섀시를 설치하는 등 개조를 했다. 하지만 마당에서 높이 쌓아올린 축대와 툇마루 사이가 비어있는 등 옛날 전통 한옥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20여년간 군에서 복무하다 50사단 379대대장으로 퇴임했다는 종목(72)씨는 "이 집에서 어느 방향을 가리키더라도 다 선가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집과 붙어있는 집은 모조리 선갑니다. 옛날에는 담장도 필요없이 집 사이로 난 사잇길로 마실을 다니곤 했어요"라고 회상했다.
금곡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집은 선용규(88)옹네 집이다. 4대가 한 동네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선용규 옹은 아내 김선주(83) 할머니, 아들 종대(63)씨와 며느리 성영자(58)씨와 함께 살고 있다. 손자 태원(38)씨는 금곡농장에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인 쌍둥이 딸 홍이, 영아와 함께 산다.
김선주 할머니는 "자식이 일곱인데다 손자들과 증손자까지 있으니 얼굴을 안보고 이름만 얘기하다가는 누가 누구인지 잘 몰라요. 그래도 환갑이 다가오는 며느리 이름은 안 잊어버린다"며 허허 웃어보였다.
이 마을에서 또 눈에 띄는 것은 도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위성방송 안테나다. 마을 입구에 있는 "금곡체험 학습장"을 운영하고 있는 찬원(45)씨는 "벌써 3~4년 전에 달았어요. 동네 반수 이상은 달았을 걸요? 이 동네는 난시청 지역이라서 이것이 없으면 방송이 아예 안나와요. 한달에 9천원 가까이 나갑니다"고 전했다.
마을 입구에 금곡마을 회관 옆에는 종렬씨의 아버지인 선명규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선명규는 한학에 능통해 여성은 큰방에서, 남성은 행랑방에서 천자문과 사서오경 등을 가르쳤는데 훗날 동문수학한 제자들이 지난 94년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약 300년 전 김해에 살던 선징이 둔기리로 와 그 후손들이 금곡 일대에 130세대, 500여명의 자손을 번창시켰다. 금곡마을에 터를 잡은 철원의 후손은 모두 57세대다. 울산시 농축산과에 근무하고 있는 선광원씨와 경찰공무원 선종학씨, 문학박사 선효원씨가 금곡마을에서 자랐다. 선종석씨와 선종헌, 선우원씨가 부산에서 교직·행정 공무원을 지내고 있다. 선종출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몸담고 있다. 고 선인주, 선병윤이 삼동면장을 지냈고, 고 고병희씨는 언양면장을 지냈다.
신안 군
대율리연혁지도군 자은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대율리라 하여 무안군 자은면에 편입되었다.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형성1716년 보성선씨 선상춘이 이주해오고 이후 양천허씨 허열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지명유래1851년(철종 2)부터 1876년(고종 13)까지는 한야리(寒夜里)라 부르다가 1877년(고종 14)에 지나던 도승이 마을 앞 동산이 큰 밤 형국이니 대율리(大栗里)라 하라 하여 개칭된 지명이다.대율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대율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마을명 형성년대 입도성씨(입도조)전 거주지및 경유지마을의 지명유래대율(大栗) 1716년(숙종42) 보성선씨(선상춘) 무안1851년부터 1876년까지는 한야리(寒夜里)칭하다가 1877년 때부터 마을의 모양이 밤형국이라 하여 대율리라 칭하였다.신흥(新興) 1753년(영조29)인동장씨(장인원)밀양박씨, 김해김씨비금도(임리)마을 앞 3개의 무인도의 모양이 자라형이라 하여 자라지라 부르다가 마을이 새로생겼다 하여 신흥이라 개칭하였다.진천(眞泉) 1671년(현종12)김해김씨(김근수)밀양박씨, 나주나씨전주참새골이라 부르다가 이후 진천으로 개칭되었다
선거이의 정려는 현재 도산동에 있으나 원래는 고내장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립연대는 조선순조원년(1801) 朝廷(조정)에서 族閭(족려)를 명하여 세워졌으며 정면 측면 1칸씩의 골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선거이의 행적을 보면 본관은 寶城(보성) 字는 思愼(사신) 호는 親親齊(친친제)이다. 도사 宣祥(선상)의 아들로서 명종 3년(1550년) 8월 장흥에서 출생하고 광산에 이사하여 선조2년(1559)에 선관에 등용되고 익년에 式年武科(식년무과)에 급제하였다.선조19년(1586)에는 咸鏡道節度使(함경도절도사)에 이설의 계청 군관이 되었고 이듬해 경흥부녹둔도에서 造山萬戶(조산만호) 李舜臣(이순신)과 같이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격퇴하였다. 1588년 巨濟懸令(거제현령)에 임명되어서는 淸白史(청백사)로서 선정을 베풀어 상주특사로 승진되었고 그 후 팔년에 전라수군절도사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다.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군마절도사에 복원사를 겸하여 행주운봉싸움에서 권율와 협력 倭軍(왜군)을 격파한 후 七道兵馬使(칠도병마사)를 겸하게 되었다. 1598(선조31년) 십일월 울산 싸움에서 명군과 함께 이만여 병력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후에는 宣武原從一等功臣(선무원종일등공신)로 勳錄(훈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