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九章 유소림(柳蘇霖)은 약초를 캐서 약을 만들고 진자앙은 매를 맞으며 무공을 배우다.
1
예상외의 일은 언제나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진자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터져라 달려온 동굴 앞의 모습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것에 놀라 일변 숨을 고르고, 일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있어야 할 사람들, 보였어야 할 장면이 보이지 않았다.
‘쓰러진 소삼중의 시신을 밟고 선 악적, 영리충의 모습’을 기대한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슬프게, 또 어느 정도는 분노를 품고 예상했던 모습이 그와 비슷한 것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 동굴 앞에서 그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영리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피바다, 적어도 난장판은 되어 있어야 할 동굴 앞 비좁은 공터에는, 몇 개의 웅덩이만 남아 한결 가늘어진 빗방울을 받아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소 노사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소삼중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돌아가셨다면……?’
돌아가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소삼중은 금강당으로 ‘돌아갔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높은 가능성은 다른 의미에서‘돌아가는’ 것이었다. ‘돌아가다’라는 말에 포함된 두 가지 의미를 그렇게 동시에 떠올리며 진자앙은 바닥의 흔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이젠 제법 가늘어졌지만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는 비가 뭔가를 추측할 수 있을 자국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지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진흙탕에 새겨진 발자국들의 윤곽도 흐릿해진 지 오래고, 뭔가 떨어지거나 했어도 골을 이루며 흐르는 저 빗물에 같이 실려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진자앙은 모르는 일이지만 소삼중이 뱉어 내었던 핏물도 이미 빗속에 섞여 버렸다.
진자앙은 고개를 들었다. 지워져 버린 흔적들만큼이나 빗속에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흐릿하기만 했다.
“오지산이 어디지?”
어쨌든 오지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진자앙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하긴 하지만 혹시 소삼중이 돌아갔을지도 모르는 그곳, 금강당을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처음 가던 대로 강을 왼편에 두고 걸어 올라가면 그곳이 오지산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진자앙은 동굴로 들어갔다. 이젠 서두를 일이 없었다. 옷이라도 말린후에 가도 늦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밤부터 쫓겨 다니느라 눈도 붙이지 못했다. 피부에 닿는 위험은 일단 비켜 갔다고 생각하자 때늦은 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자앙은 잠을 잘 수도, 옷을 말릴 수도 없었다. 쉬려고 들어간 거기에 소삼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삼중은 눈을 반개하고 다리는 가부좌를 튼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극 히 가끔이었지만 아랫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운기조식(運氣調息)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엷은 김이 온몸에서 발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식이 한참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기를 하면 몸에서 열기가 솟구쳐 젖은 옷을 말리게 되고, 그러면 거기에서 김이 솟아오른다는 것은 진자앙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새벽녘에 할아버지가 운기하는 모습은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새벽 이슬이 할아버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김이 되어 솟구치면 할아버지의 몸을 안개처럼 휘감고, 그때 할아버지는 마치 구름 속에 잠긴 산처럼 커 보이곤 하지 않던가.
이윽고 운기가 절정에 이르러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들어가면 구름에잠긴 산에서는 푸른 번개가 치고 자줏빛 붉은 서기(瑞氣)가 휘황하게 번뜩였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 혹은 찰나지간에 꿈처럼 스치고 지나간 듯 그처럼 천변만화한 과정이 끝나면 산처럼 조용하던 할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그 입에서 환상처럼 붉은 주작 한 마리가 튀어나와 머리를 감돌고는 다시 입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것이 할아버지 진룡의 운기하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주작은 화기(火氣)가 뭉쳐 그렇게보인 것일 따름이라고 말했었다.
오행이 생기고 변함은 불〔火〕로 하여 이루어진다.
간목(肝木)은 능히 심화(心火)를 왕성케 하고, 심화는 또한 비토(脾土)를 평케 한다. 비토는 금(金)을 낳고, 금은 수(水)로 화하고, 수는 목 (木)을 낳아 영(靈)을 통하게 한다.
생생화화(生生火火)가 다 화(火)로 인하니, 화는 장공(長空)에 퍼져 만물을 성하게 하느니라.
화기의 중요성에 대한 할아버지의 해석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진가장 가전 내공 심법인 오칠비결에 따르면 그런 과정이 여섯 개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인 합( ) 자 구결로 일주천이 완성되었다.
진자룡은 손자가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구결은 반복해서 알려 주었었고, 진자앙은 한 자도 빠짐없이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의 설명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몸으로 실행하지 못해 그 참 의미를 체득할 수 없으니 그에게는 그림의 떡과도 같은 것일 뿐이었다.
몸으로 따르지 못하니 가르치기도 힘든데, 그렇게 가르쳐도 결국 익히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그 주문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했던 구결을 잔잔히 읊어 주곤 했었다.
진자앙은 그때의 할아버지 모습을 떠올리곤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진자앙은 상념에서 깨어나 눈을 번쩍 떴 다. 어느새 소삼중이 운기를 마치고 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예?”
진자앙은 제대로 말을 듣지 못해 다시 물었다.
소삼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한 말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동굴
밖으로 앞장서 나간 것이다. 그리곤 돌아보았다.
“가자!”
동굴 밖에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 사이로 이른 저녁별이 하나둘 보이고 있었다. 소삼중과 진자앙은 비에 젖은 풀잎을 밟으며 산길을 걸었다.
생각해 보면 꼬박 열두 시진(時辰)을 눈 한번 붙여 보지 못하고 뛰고 굴렀다. 발은 천근 같고, 눈꺼풀은 그보다도 무거운 것이 진자앙의 지 금 상태였다.
그러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지금의 상황이다. 다행히 체력은 아직 남아 있으니 가다가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냥 가야 했다. 자신 있는 거라고는 체력과 끈기밖에 없는 진자앙이 아닌가.
2
힘들고 지친 것은 소삼중도 마찬가지였다. 영리충에게 맞은 타격 때문이었다.
그는 십여 년 전, 보광암의 혜심에게 당한 후 이리저리 노력하여 겨우 운기법 하나를 얻게 되었다.
명문대파의 비전심법은 말 그대로 비전(秘傳), 즉 그들 내부의 사람들에게만 비밀스럽게 전하는 것이니 감히 탐낼 수도 없고, 사파의 사공(邪功), 마공(魔功)은 정파의 그것과 유(類)는 다르지만 은밀하게 전해지는 점에서는 더하면 더했지, 못할 일이 없어서 역시 손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겨우 얻어 낸 것이 오다가다 만난 동업자, 즉 떠돌이 약장수 하나가 자긴 그래도 내가기공을 익혔다고 자랑하는 것을 듣고 몇날 며칠을 졸라서 배운 단전호흡법(丹田呼吸法)이었다.
이 단전호흡법이라는 것이 약장수가 내가기공이라고 풍을 치긴 했지만 사실은 순수한 호흡법이라, 오래 익히면 건강에 보탬이 되는 정도의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내가기공이라고 하는 것들도 결국엔 호흡법으로부터 출발한 것, 이 호흡법이 기본 중의 기본이기는 하니, 적어도 엉터리는 아니었다.
몇 년을 노력하니 단전에 기도 모이고 제법 기를 움직일 수도 있게 되어 이전에는 겉모양만 익혔지만 이제는 그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소삼중은 운이 없었다. 진작에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아까워해 보지만 때는 늦었다. 갖은 발악을 해도 지금 나이에서는 더 이상 진보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그에게 주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영리충에게 맞은 매의 타격은 여태 그가 받은 어떤 타격보다도 컸다.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표시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이 일격이 그의 수명을 십 년은 줄여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시간은 더욱 줄어들어 버렸다.
소삼중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알았다.
‘안개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어 보았다. 눈앞이 밝아졌다. 안개가 걷혀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그는 갑자기 뜨거워진 눈시울의 감각으로 알았다. 그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명하지도 않고, 잘난 것도 없는 문파라 제자들이기도 힘들었던 금 강당이었다. 염원을 대신 이루어 줄 제자, 지닌 바 모든 것을 전해 줄 제자 하나 구할 수 없어 애타던 세월이었다. 하나, 오늘 진자앙을 제자로 받아들임으로 하여 염원이 이뤄졌는데 왜 눈물이 흐를까?
소삼중은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진정 평생을 염원하던 두 가지 일이 손에 잡힐 듯하다가 다시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눈물의 원인이기도 했다.
제자를 들이지만 충분히 가르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생애에 겨우 가족이 생겼나 했더니 사라져 버렸다. 미혼인 처는 죽고, 아이는 잃어버렸다.
문득 그는 번개에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그때 진가장에서도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진자앙은 누군가? 혹시 형이나 동생? 그들은 찾았나? 그게 아니면……?’
그는 비탈진 산길 아래쪽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진자앙을 돌아보았다.
“네 나이가 몇이냐?”
“열둘입니다.”
갑작스런 질문인 데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진자앙은 애써 숨을 고르며 대답하고 있었다. 피곤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듯했다.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한 애군!’
그런 인내력은 금강당의 무공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삼중은 잠시지만 아이 생각도 잊어버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금강불괴가 된다는 것, 금강당의 무공을 이어 간다는 것을 떼어 놓고는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언제부터인지 그에게는 그것이 인생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그 앞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세상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가치들이 제 빛을 잃고 만다.
소삼중은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그것으로 자신이 가족보다, 잃어버린 아이보다 금강불괴라는, 일견 허황되어 보이는 목표에 더 집착한다는 것에 쏟아질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는 물었다.
“혹시……, 혹시 너 말이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였다. 뭐라고 물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는 동안 진자앙은 혹시 자기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혹시 어렸을 때 잃어버린 적이 있지 않았느냐? 아니, 잃어버려진 적이 있지 않았느냐? 아니, 아니, 그런 얘기를 부모님께 들은 적이 있지 않느냐?”
소삼중은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이 점점 꼬이자 짜증스러운 표정까지 지어 가며 겨우 질문을 마치고는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하늘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을 듣기 전인데도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확 밀려왔다.
그런데 진자앙의 대답이 그의 그런 생각을 깨끗이 씻어 버렸다.
“그런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등가산에서……!”
소삼중의 눈이 번쩍였다. 이 아이는 의외로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그때…… 너 말고 또 하나 그 산에서 잃어버린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혹시 못 들었느냐? 혹시 네 부모님들이 그 아이는 찾지 못했다 더냐? 혹시 들은 얘기라도……!”
설마 설마 했는데 진자앙의 대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 이 경우 그 자신의 이야기지만, 아이가 처음 없어졌던 내막부터 나뭇가지 위에 걸려진 또 하나의 아이 이야기, 그리고 결국 그 아이, 아마도 여승이 낳은 아이로 짐작되는 그 아이가 도사의 품에 안겨져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진자앙의 입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중자릉의 입에서 진자룡에게로, 진자룡에게서 다시 진자앙에게로 전해진 그 이야기였다. 물론 전달 과정에 빠진 것도 있지만 대체의 내용은 알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로 소삼중은 여도사에게 안겨 간 그 여자아이가 분명 자신의 아이라고 의심 없이 믿게 되었다.
“그게 누구…… 라고?”
“이름 모를 여도사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아니!”
소삼중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도사를 본 사람은 네 말대로면 그…… 중자릉이라는 사람밖에 없지 않으냐.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단 말이다.”
중자릉을 찾아야 여도사에 대한 것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혹시, 만에 하나라도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르신네는 그 후 저희 집에 다시 들른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거처가 일정치 않고 구름처럼 강호를 떠돌아다닌다고 해서……!”
더 들을 것은 없었다. 중원이 넓다지만 이름을 알고 명호를 알면 다 찾을 수 있을 만큼 좁은 것이 또 강호다. 그를 찾아다닐 만한 시간만 있다면.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소삼중은 다시 한 번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제자를 기르든지 아니면 아이를 찾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는 할 수 없으리라.
결정은 뻔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목표를 위해 가족을 버렸다.
“가자!”
그는 묵묵히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다시 아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헤쳐 가며 다시 한나절을 더 올라 산새들이나 둥지를 틀만한 산봉우리 좁은 틈에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집 같은 것에 도착해서야 그는 돌아서서 진자앙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가……!”
그는 말을 멈추었다.
말해도 진자앙은 더 듣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열두 살 아이에게는 너무 힘이 들었으리라.
진자앙은 그의 앞에서 천천히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그 전에 감겨져 있었다.
“방에 데려가 눕혀라! 그리고 깨어나거든 내게 데려와라!”
소삼중은 통나무집의 문을 열고 나온 유소림에게 지시하곤 들어가 버렸다.
3
얼마나 걸었는지, 또 어디를 어떻게 왔는지 진자앙은 하나도 기억 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통나무를 얽어 만든, 집 비슷한 것을 보고는 정신을 놓아 버렸다는 것과 이제 정신이 들고 보니 눈앞에 그 소년, 시장에 소삼중과 같이 나왔던 그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만 알았다.
“정신이 들었냐?”
유소림은 그렇게 묻고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듯 자기 이마를 쳤다.
“정신이 들었으니 눈을 떴겠지. 눈을 떴으면 배도 고프겠군. 일어나서 밥 먹어라!”
그는 때 묻은 주발 하나를 들어 진자앙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거기 밥이 담겨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밥까지 떠먹여 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명색이 사형인데 말야. 갓 들어온 사제에게 밥까지 떠먹여 줘? 너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사실 나만 해도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말이다, 밥짓기 삼년, 물 떠 오기 삼 년, 나무하기 삼 년을 거쳤어. 그렇게 바쁜 와중에 틈틈이 약초도 캐고, 공부도 하는 지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단 말이지. 그럼 이젠 네가 해야 하지 않겠어? 나는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냐 이거지. 그런데 오자마자 하늘 같은 사형이 물 길어다 밥해서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먹여 주기까지 해야 하냔 말이다. 이게 말이 돼?”
소년에게는 화를 내거나 퉁명스럽다거나 한 빛이라곤 전혀 없었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마치 장난이라도 거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막혔던 둑이 터지듯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진자앙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써야 했다.
“어라, 인상을 써? 내 말이 고깝단 뜻이냐? 잘하면 치겠네?”
역시 빙글빙글 웃으며 이죽거리는 유소림에게 진자앙은 얼른 머리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사형께 제가 감히……!”
먼저 입문했으니 사형일 것이다. 게다가 밥짓기 삼 년, 물 떠 오기 삼 년, 나무하기 삼 년을 거쳤으면, 그것만 해도 구 년이나 먼저 사부를 모신 셈 아닌가. 대여섯 살 어린아이가 밥짓고 나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나이가 적어도 열대여섯 이하는 아닐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순진하게도 유소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계산하고있었다. 그러나 사실 유소림은 어렸을 때 소삼중이 주워다 길렀으니 연수가 오래된 것은 맞지만 나이는 진자앙보다 어린 열 하나였다. 그런 데도 말하는 것이나 행동거지가 진자앙보다 노숙해 보이는 것은 그 동안 그를 쓸고 지나간 세파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강호문파들은 일반적으로 나이가 어려도 입문한 시기가 빠르면 사형이 되는 전통이 있긴 하지만 각 문파의 내규(內規)에 따라서는 나이순으로 사형제의 선후를 가르는 곳도 있으니 먼저 입문했다고 꼭 사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유소림은 나이도 조금 많아 보이고, 덩치가 커서 힘도 셀 것 같은 진자앙이 사제로 들어오니 기선을 잡으려고 이러는 것이었다.
과연 순진하게도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가.
‘그래, 이제 넌 내 졸개다!
유소림은 내심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며 진자앙에게 밥그릇을 넘겨 주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북부 지방, 즉 강북에서는 밀이 주식이 되고, 강남 지방에서는 쌀이 주식이다. 아침에는 국수 한 그릇으로 가볍게 먹는 것은 강남이나 강북이나 같지만 중화(中火:점심)부터는 강북에서는 교자(交子:만두)를, 강남에서는 쌀밥을 주로 먹는다.
광동도 강남이니 쌀밥이 주가 되는 식사를 해왔던 진자앙이었지만 지금 받은 것은 순수한 쌀밥이 아니었다. 사람 머리만큼이나 큰 주발에 이름 모를 풀 삶은 것이 반이나 들어 있었고, 그 나머지만 밥이었다.
따로 반찬그릇 같은 것은 없는지 그릇 한쪽에는 닭다리 같은 것도 하나 놓여 있는데, 사실은 꿩다리였고 그나마 원래는 두 개였던 것을 유소림이 가져 오면서 하나는 주워 먹은 그 나머지였다.
원래 진자앙은 자신이 입이 짧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도 누나들과는 달리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왕숙수라는 출중한 요리사가 해주는 음식이었고, 또 진가장의 가풍이 검소하여 산해진미를 차려 놓고 먹지는 않는다 해도 차릴 건 다 차려 놓고 먹는 부잣집이었기에 일반 평민의 가정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기 마련이었다.
당연 진자앙은 지금 그가 받아 든 정체 모를 것을 내려다보며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젓가락도 없어 뭘로 먹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소림이 그런 진자앙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왜? 배 안 고프냐? 내가 먹으리?”
“아, 아닙니다!”
진자앙은 얼른 손으로 밥을 집어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갔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처음 보는 사형의 앞에서 밥투정을 해선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 밥맛이 또 묘했다. 삶은 채소를 한입 먹자 마치 한약을 마 신 것처럼 쓰고 떫은 것이 혀끝까지 아려 왔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왜, 떫어?”
유소림이 또 물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혀가 얼얼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진자앙은 눈을 딱 감고는 마구 밥과 채소를 꾸겨 넣었다. 맛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않고 일단 목구멍에 넘기자는 것이었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라.”
유소림이 크게 생각해 주는 것처럼 한마디 하더니 진자앙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떫지? 그지? 안 떫어?”
떫은 것이 당연했다. 진자앙이 먹은 것은 채소가 아니라 약초였다. 몸에는 좋은 것이지만 맛은 없고, 비단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인내력이 아니면 목에 넘기기도 힘든 것이 그 밥이었다. 미리 얘기해줬어야 옳은 것인데 아무 소리 않다가 이제 표정이 구겨진 것을 보고서야 좋아하는 것이다.
진자앙은 혀끝의 깔깔한 맛을 되씹으며 입맛을 다시고는 웃었다.
“떫긴 떫군요. 그래도 각별한 맛이 있습니다.”
맛있어? 더 주랴?”
진자앙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으면 더 주십시오.”
설마 정말 더 달랠 줄 누가 알았으랴. 놀리는 말로 했던 유소림이 무색하게 되었다.
“없어. 그만 먹어!
“그러지요.”
선선히 대답하고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진자앙이 신기한 모양, 유소림은 한참을 바라보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가져 왔으면 내놔!”
“무얼 말입니까?”
“그거 있잖아, 사례비!”
진자앙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했다.
“저, 그게……!”
“안 가져 왔다는 거야?”
“저, 그게……!”
진자앙은 할 말이 없었다.
원래 가져 왔었는데 중간에 만난 여자애에게 줬다는 얘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안 가져 왔습니다, 하면 그런 성의도 없냐고 욕 먹을 것 아닌가. 욕을 먹는 것이야 괜찮지만 괘씸하다고 돌아가라고 하면 또 어쩔 것인가.
그는 얼른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다.
“어찌어찌 사정이 꼬여서 준비를 못했습니다. 용서하시고 사부님께 잘 말씀드려서 내려가라는 말씀만 나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유소림은 눈에 보이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사례비라는 것은 그가 지어 낸 말이었다. 소삼중은 단 한번도, 사실 그런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사례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진자앙이 부잣집 아들로 보이니까 유소림이 지어 낸 얘기였다.
가져 왔으면 중간에서 가로채고, 만약 안 가져 왔으면 그것으로 됐다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순진한 진자앙이 심각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그는 조금 더 속여 먹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사례비가 없으며 안 되는데……!”
그는 진자앙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일부러 말을 끌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성의가 문제라……,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인 데……!”
예상했던 대로 진자앙이 급하게 빌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제는 돌아가라 해도 갈 곳이 없습니다. 사형이 잘 말씀드려 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유소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속여먹기 쉬운 놈은 보다 보
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군.”
잠시 고민하는 빛을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다행히 내가 푼푼이 모은 돈이 얼마 있네. 그걸로 우선 해결을 하지. 그러나……!”
진자앙은 유소림이 사례비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말에 반색을 했다. 그러나 뒷말이 길었다.
“나도 그만한 돈을 융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알다시피 가난뱅이는 평생을 가도 그만한 돈을 만지기 어렵단 말이야.”
진자앙이 얼른 말했다.
“나중에 꼭 갚아 드리겠습니다.”
바로 그 말을 기다렸던 유소림이었다.
“이자는 월 삼 부일세!”
“삼 부……?”
“한 달에 동전 육백 닢이란 말이야.”
은자 한 냥은 동전으로 이천 닢이 된다. 은자 열 냥이니까 명목상으로 지금 진자앙은 동전 이만 닢을 빚지는 셈이었다. 그 이자가 한 달에 동전 육백 닢이라는 것이었다.
진자앙이 비록 물정을 모르기는 하지만 그 이자가 상당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얼른 계산해도 서른세 개월마다 은자 열 냥씩을 더 빚지는 셈이 된다.
‘빨리 갚아야겠구나!’
진자앙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곧 갚겠습니다.”
유소림은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실룩거렸다. 뭔가 한 마디 그럴듯한 말을 해주고 싶은데 마침 그 말이 생각났다.
“밥 먹고 나면 사부님이 오라고 하셨다. 가봐!”
4
“금강당을 처음 여신 분은 이백여 년 전의 일대기인이셨던 왕(王) 자, 철(鐵) 자, 우(牛) 자 쓰시고 별호는 대력패왕(大力覇王)이라고 하셨던 분이다. 세간에는 그냥 철우(鐵牛)라고만 알려지신 분이지.”
소삼중은 금강당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으로부터 진자앙과의 첫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금강당의 내력은 진자앙은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력패왕 철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세간에는 그가 삼백 년 전의 인물이니 아니니 설이 분분하지만 대력패왕 철우가 양주(揚州) 땅에 금강당을 연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육 년 전이었고, 외공에 있어서는 그 당시 최강의 고수로 행세를 할 때였다. 소삼중은 사 대째의 당주이니 철우는 그에게 태사조(太師祖), 즉 사부의 사조였고 이제 소삼중의 제자가 된 진자앙에게는 사대조(四代祖), 즉 사조의 사조가 되는 셈이다.
“그때만 해도 금강당은 천하를 떨어 울리는 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사부님께 전해들은 말로는 당시 사대거당(四大巨堂)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사대거당.
진자앙은 삼대거당(三大巨堂), 즉 무슨 무슨 당(堂)을 이름으로 하는 강호문파 중 최고의 세 개를 가리키는 말은 들어 봤어도 사대거당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그러나 사실 철우가 금강당주일 때만 해도 천하에는 네 개의 거당이 있었다.
소림(少林), 무당(武當), 아미(峨嵋), 화산(華山), 곤륜(崑崙), 점창(點 蒼), 종남(終南), 공동, 형산(衡山)의 구대문파(九大門派).
하남(河南)의 남궁(南宮)씨, 하북(河北)의 팽(彭)씨, 진주(晉州)의 언(彦)씨, 사천(四川)의 당(唐)씨, 호주(湖州)의 혁련(赫連)씨, 양양(襄陽) 의 제갈(諸葛)씨, 하토(夏土)의 서문(西門)씨, 그리고 광동의 진(陳)씨로 구성된 팔대세가(八大世家).
그리고 산서(山西) 벽력당(霹靂堂), 하북(河北) 강시당( 屍堂), 복건(福建)의 철검당(鐵劍堂)으로 구성된 천하삼당(天下三堂) 개봉(開封)을 총타로 하고 거리를 주름잡는 전통의 강자, 거지집단 개방과 만들어진 지 삼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오르는 대력귀왕 급여화의 화륜맹(火輪盟)을 지칭하는 일방일맹(一幇一盟).
이상의 세력들이 무림십대고수와 더불어 당금 강호를 움직이는 주요세력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소삼중은 금강당이 왕년에는 천하삼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대 조사께서 신공을 연마하기 위해 떠나신 후 사문의 성세는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하여 급기야 사 대째인 내게 와서는 이 꼴이 되었다.”
초대 조사 철우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장생불로비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금강불괴신공을 익히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장생불로비법을 익히기 위해 은거했다고 하는 전설에도 나름대로 근거는 있었다. 그가 당년에 최고로 일컬어지던 분야는 외공 말고도 또 있었다. 바로 약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금강당의 사람들이 약장수를 본업으로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개파시조인 철우도 원래는 떠돌이 약장수로 중원을 돌아다니다가 기연을 만나 막강한 외공을 익히게 된 경우로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그 일 인을 제외한 누구도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형산파 뇌공의 경우와도 같이 철우 본인은 외공의 최고 경지에 올라 무수한 내가의 고수들과 어깨를 겨룰 수 있었지만 그와 같은 종류의 기연을 얻지 못한 후인들로서는 강호 삼류무사의 멍에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는 그 점을 애석하게 여기고, 내가의 고수들에 비해 천대받는 외가의 현실을 분히 생각하여 외가무공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금강불괴신공을 연성코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애써 만든 금강당을 몰락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이대 당주인 역발산(力拔山) 하구연(何九淵), 삼 대 당주 병거령(病巨靈) 소고정(蘇古鼎)을 거치면서 금강당은 형편없이 몰락하다가 급기야 소삼중이 제자로 들어올 즈음에는 그 외에는 제자가 단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고정은 별호대로 병을 앓는 몸, 소삼중을 맞아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소삼중은 제대로 배운 것도 하나 없이 문파의 유지와 부흥이라는 무거운 짐을 져야 했다.
“이 사부가 어찌해야 옳았겠느냐?”
소삼중이 물었지만 진자앙과 유소림은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들
은 철우경지(鐵牛耕地)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었다.
철우경지의 자세가 무엇인가?
양손으로 땅을 받치고 몸은 어깨에서 발끝까지 일직선으로 만들어 비스듬히 땅을 향한다. 물론 발끝은 땅을 받쳐야 한다. 양손과 양발 끝만 땅에 대고 몸을 받치는 자세가 기본자세, 거기에 허리를 율동적으로 움직이며 팔을 굽혔다 폈다 해야 했다.
이른바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철우경지,‘땅을 파는 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자세였다.
팔과 다리의 힘을 길러 주는 면도 있지만 주목적은 허리 힘의 강화였다.
힘없는 사람은 열 번도 못 하고, 조금 체력이 있으면 백 번은 겨우 하며, 무공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천 번은 해야 기본인데, 많이 할 수 있다고 해서 힘이 덜 드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열 번을 하면 팔이 떨리고, 다시 일백 번을 하면 땀방울이 비 오듯 떨어진다. 나중에는 온몸이 풍 맞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는데 소삼중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몇 천 번이고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 놓고서야 소삼중은 이야기를 하고, 또 질문을 하고 있으니 이야기에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특히 유소림은 아까 전부터 사부가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니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다치고 돌아와서는 표정도 영 이상하더니 역시……!’
진자앙은 못 견딜 정도로 힘들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도 무가의 자손으로서 이름을 이어나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 지는 않았다. 또 그것이 가차없는 일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삼중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금강당을 지키기로 했다. 갈 곳 없는 나를 길러 주신 사부님의 은혜를 못 잊어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솔직히 말해서 달리 갈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소림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옛날의 소삼중과 비슷한 신세라 공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은 다른 방향으로 공감을 했다. 그는 소삼중이 금강당을 지키기로 한 첫 번째 이유, 즉 사부의 은혜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가 배워 왔고, 여태까지 옳다고 믿어 왔던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처음에 소삼중은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남은 금강당의 당주 노릇을 했다. 윗사람이 없으니 의무가 없고, 아랫사람이 없으니 책임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밥 먹고 살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변한 것은……!”
소삼중의 말이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래서 내가 이름뿐인 금강당이 아니라 진정한 금강당을 재건하고자 했던 것은……!”
한동안 말이 끊어졌다. 진자앙은 무슨 일인가 해서 동작을 멈추고 소삼중을 쳐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소삼중의 얼굴이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실룩이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 혹은 슬픔의 표징(標徵)이었다.
“날 봐라!”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든 진자앙에게 소삼중은 이는 악물고 입술만 벌려 보였다.
누렇고 성긴 이빨들 사이로 부러진 자국이 확연히 드러났다. 자연히 빠진 것이 아니라 부러진 자국.
“그때의 상처 중에 남은 건 이것뿐이다만……, 이게 날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
원래 금강당의 재산이 적진 않았지만 소삼중의 대에까지 남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사문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그가 배고플 때마다 이것저것 밥과 바꾸었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서는 조사당(祖師堂)과 그 부속건물로 쓰던 작은 집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탐내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두들겨 맞고 개처럼 내쫓겼다. 내 눈앞에서 조사님들의 위패와 사문의 현판이 조각나는 것을 보면서…… 그러나 진정 날 분노하게 한 것은 내 앞에 던져진 동전 한 닢이었다.”
동전 한 닢. 만두 한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동전 한 닢이 금강당의 조
사당과 바꾸어진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온몸의 상처와 부러진 팔, 그리고 부러져 나간 두 개의 이빨과 바꾸어진 전부였다.
“그들은 그 동전 한 닢으로 날 개만도 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제대로 집값을 못 받았으니 집 주인도 아니고, 구걸하지 않았는데도 줬으니 거지도 아니고, 비무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 무사도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게 가슴을 찔렀다.”
소삼중은 거기에서 진정 분노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이 무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발을 디딘 이상 죽어도 무사로 죽는다는 것을,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그는 무사로 행세할 수 없다는 것을 함께 선고받았던 것이다.
“현판을 뺏기고 조사의 위패를 더럽힌 치욕을 갚지 않고는 나는 무사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자앙은 소삼중의 그때 심경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싸움을 잘하는 무사가 있으니, 못 하는 무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사인데도 무사 대접을 받지 못하면 그는 인간이 되지도 못하는 것이다.
진자앙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개가 개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사람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또 어찌해야 할까?
무사가 무사다운 대우를 받으려면……?
소삼중은 거기에 나름의 해답을 찾은 모양이었다.
“무사답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뜻에도 맞았다. 가장 무사다운 무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 그보다 나은 복수는 없었다. 가장 무사다운 무사는 어떤 것일까? 나는 금강당의 당주답게 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금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난 조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때부터 소삼중의 기나긴 방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철우라는 이름이 들리는 곳이면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결국 철우의 유진(遺眞)을 발견할 때까지.
“그것이 이것이다.”
소삼중은 품속에서 붉은 보자기 하나를 내놓았다. 보자기는 무엇을 싼 것이었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낡은 책 한 권, 아니 삼분의 일 권이었다.
“조사님은 금강불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던 것 같다. 그래서 반선과 비불이라는 두 사람과 힘을 합치셨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반선(返仙), 선(仙)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니 신선이 다시 되겠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신선이 다시 된다. 그럼 원래는 신선이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나는원래 신선이었다’라는 뜻의 이름을 달고 다녔다는 것이 그 이름으로 드러난 셈이었다.
비불(比佛) 역시 반선에 비해 조금도 덜 광오(狂傲)한 이름이 아니었다. 아니, 비불이란 부처에 비견된다는 뜻이니 반선보다 오히려 더 건방지면 건방졌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과 철우가 함께 금강불괴가 되는 법을 연구했다고 책 앞머리에 쓰여 있다고 했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연형(練形), 몸을 단련한다.
연기(練氣), 기를 익힌다.
연혼(練魂), 혼을 단련한다.
그래서 연형편은 철우가, 나머지 둘은 반선과 비불이 각각 맡아 저술한 것이 이 책, <삼선유서(三仙遺書) 금강불괴론요(金剛不壞論要)>였다. 쉽게 말해 금강불괴가 되는 법이었다.
“아쉽게도 내가 발견했을 때는 책의 뒷부분은 뜯겨져 나갔는지 없고 앞부분만 있었다.”
그러나 그 앞부분이 철우가 남긴 부분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 하나의 다행은 금강불괴가 되는 첫 번째 단계의 수련법이라는 점이었다. 기초를 거치지 않고 뒤를 수련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이 책을 연구했다. 그리고 몇 가지를 깨달았지. 내가 이제 전수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부님!”
유소림은 일백 번을 넘기는 때부터 눈치를 봐가며 어깨만 들었다 내렸다 시늉만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괴로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 흥미도 없는 얘기를 듣느라고 짜증을 참다가 뭔가 돈이 될 만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허락도 없이 일어나 앉으며 볼멘소리를 토해 내었다.
“저한테는 십 년을 같이 사시면서도 단 한 가지도 안 가르쳐 주시고, 이제 사제가 들어오니까 그걸 가르쳐 주시겠다는 건 도대체 뭡니까! 차별하시는 겁니까?”
사실 유소림이 소삼중과 같이 산 것은 삼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 점은 진자앙이 듣는 곳에서 밝힐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유소림이었다.
“네겐 이미 가르쳐 줬다.”
소삼중이 딱 잘라 대답했다. 유소림이 입을 딱 벌렸다.
“언제 가르쳐 주셨다고……!”
말은 안 했지만 사람 잡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소삼중은 태연했다.
“네가 안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제가 언제……!”
점입가경이었다. 유소림은 정말 금강불괴가 되는 그런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그가 소삼중의 제자가 된 이후 가르쳐 준 것이라곤, 아니, 하라고 한 것이라곤 이렇게 수련이라기보단 벌에 가까운 행위와 들입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것밖에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그가 요령이 없지 않아 이리저리 빠져 다녔기에 아직 살아 있지 소삼중이 시킨 대로 다했으면 몸이 열 개가 있어도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유소림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어서 눈을 하얗게 까뒤집었다.
“이……, 이 고달픈 짓거리들이 그거라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건 약을 팔기 위한 재주를 익히는 방법이지, 금강불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경복시키기에 충분한 어마어마, 고금무쌍(古今無雙)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소삼중은 그렇다고 하고 있었다.
“왜 아니겠느냐?”
그는 아직 엎드려 있는 진자앙을 가리켰다.
“이 자세는 얼핏 보기에는 팔 힘이나 기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소림이 끼여들었다. 그는 여전히 불퉁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아닙니까?”
“단련하는 부위라는 것은 부담을 받는 부위와 일치한다. 즉, 힘들고 아픈 부위가 단련이 된다는 것이지. 이 자세를 취하면 어디에 힘을 받고, 어디가 아픈가, 그곳이 바로 이 자세로 단련하려고 하는 부위다.”
제대로 된 철우경지의 자세를 취하면 팔보다는 허리가 아프다. 그렇게 보면 허리를 단련시키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움직이는 모든 동작은 허리가 주재한다. 쌀가마처럼 무거운 물건을 들 때 쩔쩔매게 되면 팔 힘이 없어서라고 변명하지만 사실은 허리 힘이 없어서 들지 못한다는 것이 정답이다. 손에 매달린 쌀자루의 무게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면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다.
무공을 배울 때 사람들은 재빠른 동작, 강한 주먹, 혹은 날카로운 눈과 동물적인 감각을 수련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허리의 힘을 강조하고 단련하는 문파는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실정이었다. 철우경지는 흔치 않은 허리단련법 중 하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세를 취하고, 동작을 할 때 다리를 꼿꼿이 유지하고 구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다리를 단련하기 위한 것이고, 자세의 특성상 팔로 반 이상의 무게를 지탱하기 때문에 어깨와 팔의 단련도 동시에 목표하게 된다.”
요컨대 전신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게 하는 단련법이라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데 있어서 발만, 혹은 주먹만 단련하여 무적이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무공을 익히는 것, 신체를 단련한다는 것은 온전함을 요구한다. 팔, 다리, 허리를 비롯해서 온몸이 균형을 이루어야 내지르는 주먹 하나에도 힘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주먹을 단련 한답시고 팔운동, 주먹운동만 한다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주먹이 나가는데 발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먹에 체중이 실리지 않는다면 무슨 위력이 있을까. 혹시 발과 주먹에는 힘이 있다고 해도 허리가 그 힘을 연결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움직이고, 또 어떻게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그래서……”
소삼중은 낡은 책의 첫 장을 폈다. 유소림은 어차피 까막눈이라 못 알아보지만 진자앙은 거기 적힌 것을 알아보았다. 왼쪽에는‘총요’라는 제목 아래 글이 씌어져 있고 그 아래에 방금 들은 철우, 반선, 비불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기일, 연형편’이란 대제목 아래 다시‘금강삼십육로(金剛三十六路)’라는 중간 크기의 제목, 그리고 다시‘금강제일로(金剛第一路) 철우경지’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 철우경지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소삼중이 설명했다.
“조사님은 금강불괴에 이르는 길을 서른여섯 단계로 체계를 잡으시고 금강삼십육로라고 명명(名命)하셨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이 철우경지다.”
유소림은 입을 딱 벌렸다. 감탄해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그는 천성이 편한 것을 좋아하고 게으른 편이라, 무공이라고 하면 힘들고 귀찮으면서 크게 돈은 안 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금강불괴가 얼마나 대단한 이름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벌렸던 입을 겨우 다물고는 진자앙을 가리켰다.
“그……, 그 금강불괴가 되는 첫 번째 방법이 겨우…… 이겁니까?”
“그게 아니면?”
소삼중은 간단히 되물어 유소림의 입을 막고는 계속 설명했다.
“금강불괴라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크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연형(練形), 형태를 만든다는 말이니 곧 신체를 단련하는 단계다. 둘째 연기(練氣), 기(氣)를 단련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혼(練魂), 심혼(心魂)을 단련해야 된다는 뜻인 모양인데……, 솔직히 이 사부도 그게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책의 마지막 장을 펼쳐 보였다.
‘금강삼십육로 금강지식(金剛止息)’이라는 제목 아래 묘한 자세로서 있는 사람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금강지식’의 장으로 금강삼십육로는 끝나고, 동시에 연형의 단계도 끝이 난다. 그 다음에는 연기와 연혼의 단계가 있겠지. 아마도 인연이 닿는다면……, 나머지 부분을 찾아 진정한 금강불괴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으리라.
말을 하면서도 소삼중은 그리 기대를 갖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나머지 부분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그러한 것은 인연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조사님의 진전 만 이어받기에도 내 재주는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오랫동안 읽고 연구해 본 바로는 금강삼십육로에는 그가 들었던 조사, 철우의 진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강불괴가 되기 위해 떠난 뒤에 얼만큼의 진전이 더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 부분은 이후의 단계들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더도 말고 과거 철우가 알고 있던 부분만큼만 익혀도 외가에 있어서는 무림제일고수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소삼중은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이것 다음엔 뭡니까?”
유소림이 갑자기 물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추 한 시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철우경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진자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을 쏟으면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있는 진자앙이었다.
“하루 종일 이것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물론 아니다.”
소삼중의 이 말에 유소림은 조금 얼굴을 폈다. 만약 이 철우경지만 있다면 힘든 것은 둘째 치고 지루해서라도 어떻게 하루 종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역시 다른 것도 있는 모양이었다.
“철우경지의 자세를 오래 하고 있으면 분명 힘은 생긴다. 그러나 그 힘이 그대로 굳어지면 차라리 힘을 기르지 않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 뭉쳐진 근육을 풀어 주지 않으면 막상 힘을 사용해야 할 때 움직여지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일정 시간의 수련이 끝나면 근육을 풀어 주는 동작을 해야 한다. 그것을 연운십팔박(燕雲十八搏)이라 한다.”
그러면서 소삼중은 소위 연운십팔박이라는 동작들을 시전해 보였다.
허리를 앞으로 구부렸다 뒤로 펴고, 옆으로 휘돌렸다가 다시 뒤튼다.
이것이 연운십팔박의 첫 초식인 번요(飜腰), 한마디로 말해서 허리 돌리기였다.
팔을 위로 곧게 펴고 몸을 뒤로 한껏 젖힌 후 그 상태에서 탄력을 받아 허리를 상하로 움직이니 이것이 두 번째 초식인 탄요(彈腰).
탄요를 한 자세 그대로 몸을 앞뒤로 움직이는데, 이때는 채찍질하듯 힘 있게 한다. 이것이 세 번째 초식인 솔요( 腰)였다. 이후 조천등, 사괘(斜掛), 외파(外擺) 등 팔을 흔들고 뛰고 뒹구는 데 이것들이 모두 연운십팔박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초식이었다.
사실 진자앙도 이 초식들은 잘 알고 있었다. 연운십팔박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지만 하나같이 무공수련 전후에 몸을 풀기 위해 하는 동작들로 널리 알려진 것들이었다.
유소림은 그건 몰랐지만 아무리 봐도 신통치 않은 것임은 알아볼 수 있었다. 시장거리에서 가끔 보는 약장수들이 시범 전후에 하곤 하는 동작을 왜 모를 것인가. 그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간신히 조절하며 잇 사이로 질문했다. 입을 크게 벌렸다간 사부 앞이지만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다음은요?”
“다시 금강삼십육로다. 제이로(第二路), 바로 마당보(馬撞步)다.”
“마당보!”
유소림이 조금만 더 크게 입을 벌렸다면 뒤집어졌을지도 모른다.
마당보라는 것은 소위 기마세(騎馬勢)를 다르게 부른 것이다. 문파에 따라서는 기마보(騎馬步), 혹은 그냥 마보(馬步)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같은 자세였다.
양발을 어깨 두 개 너비로 벌리고 서서 엉덩이를 무릎 높이로 내리면 그게 마당보였다. 어떤 무공을 배우든지 가장 처음에 배우는 기본자세라고나 할 자세.
철우경지보다 쉬워 보이지만 오래 하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소림은 그것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기가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마당보 따위가 금강불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는 물었다.
“다음은요?”
소삼중은 짜증도 내지 않고 선선히 가르쳐 주었다.
“연운십팔박을 하고 제삼로(第三路)인 단각굴신(單脚屈伸)으로 넘어간다.”
단각굴신, 쉽게 말해 한 발로 서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유소림은 이젠 포기 상태에서 물었다.
“다음은 당연히 연운십팔박이겠고, 그 다음은요?”
“제사로(第四路), 격헐보(擊歇步)!”
오리걸음으로 걷는 것이다.
“다음은요?”
“연운십팔박 다음에 제오로(第五路), 이어타정(鯉魚打挺)!”
“아예 허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시는군요!”
이어타정이라는 것이 땅바닥에 누웠다가 허리의 힘만으로 튀어서 일어난다는 것 아닌가.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한다면 허리가 부러지지 않고 어쩔 것이냐.
소삼중이 덤덤히 대답했다.
“누가 무식하게 허리가 부러질 정도까지 한다더냐? 어쨌든 다시 연운 십팔박을 하고, 제육로(第六路)는……!”
“아무튼 전 안 합니다!”
유소림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죽어도 못 한다. 난 장가도 가보기 전에 허리부터 부러지고 싶지 않아!’
“……오공도(蜈蚣跳)인데……!”
말을 하다 말고 소삼중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그 오공도라는 이름은 유소림의 머리에 회전 속도를 더해 주었다. 그는 허리가 부러 지기 전에 먼저 목부터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오공도’라는, 얼핏 멋있게도 들릴 만큼 애매한 이름이 뜻하는 것은 사실‘지랄발광’이었던 것이다. 철우경지의 자세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뛰어오르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니 그걸 ‘지랄발광’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이렇게 수련이라고 알려 주는 것이 모두 수련이라기보단 고문에 가까운 일이라면 도저히 할 일이 아니었다.
유소림은 문득 일어나 소삼중에게 읍을 했다.
“제자 오랫동안 사부님을 모셨사오나 이제 하산하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리려……!”
“너는 하지 않아도 좋다.”
허리든 목이든 부러지기 전에 떠나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유소림이 입을 닫았다. 소삼중이 그런 그를 애처롭다는 듯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들어서 알게 되었겠지만 우리 금강당의 무공은 전적으로 인내력과 노력에 의존한다. 어려운 동작도 없고, 까다로운 비결도 없다. 그저 참는 것이 최고의 소질이지. 미안하지만 네겐 그런 것이 없다.”
유소림은 사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중노동에는 소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소질이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것 자체가 고생인데 왜 저런 생고생을 사서 해야 한단 말인가.
소삼중의 말은 계속되었다.
“너는 오래 전부터 이 사부를 따라다니며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 그러니 우리 일문의 무공이 네게 맞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내보낸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지. 그래서……!”
유소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삼중의 말이 너무나 옳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소삼중이 그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사실 소삼중을 따라다녔다기보다 소삼중에게서 길러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이나 그가 소삼중을 위해 준 것보다는 소삼중이 그를 위해 준 것이 더 많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네게 몇 가지 약(藥)의 비방(秘方)을 전해 주려 한다.”
유소림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직접 보지 못한 것은 믿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어려서 거지로 돌아다니며 굶주렸던 것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금강불괴라는 것은 구름 잡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금강불괴를 본 적도 없고, 소삼중 스스로가 금강불괴도 아니면서 제자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데다가, 그 수련 방법이란 것을 본 뒤로는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약의 비방은 달랐다. 그가 여태 경험한 바로는 금강당에서 파는 약들은 꽤 효과가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바르는 즉시 효과를 볼 수 있는 즉효약이었다.
타박상, 자상, 화상, 부스럼 등 피부와 관계된 거의 모든 질환에 유효한 화타고(華陀膏) 외에도 일종의 피로회복제인 제갈행군산(諸葛行軍酸), 급체(急滯)와 복통에 특효약인 청심포룡단(淸心包龍丹) 등……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것들이었다.
여태까지는 약초를 캐고, 약로에 불을 때고, 완성된 약을 가져다가 팔기만 했지 가장 중요한 배합공식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그는 얼른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님의 은덕은……!”
“조건이 있다.”
유소림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잔뜩 일그러져 있는 얼굴이었다.
‘이렇게 째째할 수가……!’
소삼중도 그렇게 생각하고 미안해 하는지 어두운 빛이었다. 그러나 조건은 내놓고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나와 네 사제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다른 일은 접어 두고 매일 무공수련에만 시간을 쏟아야 할 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유소림은 말을 하기 전에 눈부터 까뒤집었다.
“설마 저보고 혼자서 밥을 벌어 오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만약 그렇다면 비방이고 뭐고 당장 도망쳐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그는 생각했다.
소삼중이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네게 우리 두 사람을 먹여 살리라고야 하겠느냐? 약 팔러 갈 때는 당연히 나도 가야겠지. 단지……”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전처럼 시범은 보이기 어렵겠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시범 보러 오는 것은 아니고, 우리 약도 꽤 소문이 나 있으니 괜찮겠지. 그보다 네게 한 가지 맡기고자 하는 것은 약초 캐는 일이다. 여태 우리 둘이 캐 오던 약초를 네가 혼자서 캐 와야 한단 말이다. 다행히 네가 약초들을 대충은 다 알고 있고, 몸도 날렵하고 하니……! 넉넉잡고 십 년만 해다오.”
그는 그 이상 말을 않았다. 아무래도 미안한 일을 시키는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유소림은 한참 동안이나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그 계산을 끝내게 한 것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아직 철우경지를 하고 있는 진자앙의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미련한 놈이 아니면 저 짓도 못할 거야. 저걸 하느니 이쪽이 낫긴 하지. 비방을 못 얻어 가면 다시 거지질이나 또 할 수밖에 없을 테고…… 에이, 대충 알아내면 도망가 버리면 되지. 설마 십 년이나 걸리겠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러 주신 은혜도 있고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겠지요.”
그날 이후 진자앙은 금강불괴가 되는 법을 수련하고, 유소림은 약초를 캐러 산으로 들로 다니게 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