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사천리 19)
덕숭총림이라고도 불리는데, 총림(叢林)이란 선원, 강원(승가대학이나 승가대학원), 율원(율학승가대학) 및 염불원을 갖추고 방장의 지도아래 대중도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뜻한다
수덕사는 오래된 절의 역사에 비해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연혁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많다
어떤 기록에서는 백제 위덕왕 때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백제 말 숭제법사가 창건했다고 말하지만 근거는 없다
601년(백제 무왕 2) 혜현스님이 수덕사에서 법화경을 강론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이미 그 이전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언급된 백제사찰 가운데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 등 12개의 사찰 이름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수덕사 경내에서 백제시대의 와당과 와편 등이 발견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시대부터 유지되어온 사찰임이 분명하다
고려시대에는 이렇다 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대웅전 수리시 나온 묵서명에서 대웅전이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고려 말까지 대찰로서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중후반에 나옹혜근 선사가 절을 중수했다고 전하고, 조선시대에는 1528년(중종 23년)과 영조와 순조 때 대웅전을 중수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의 중 혜현이 이곳에서 삼론을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수덕사 위에는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지냈던 환희대가 있다
관음바위, 미륵석불, 만공탑, 전원사 등이 있으며, 특히 담징이 그린 대웅전 벽화가 유명하다
♤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맞배집이며, 공포는 2출목으로 되어 있고 대체적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형식이나, 초방(草枋) 위에 주심(柱心)도리를 지탱하는 우미량(樑)이 무량수전의 직선적인 것과는 달리 심한 곡선으로 변했고, 또 내반(內反)된 소슬, 장식적인 대공, 쇠혀처럼 뻗은 두공(頭工)의 끝 등 전반적으로 무량수전에 비해 고려 후기의 성격을 나타낸다
1940년에 수리했을 당시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하여 그 건물의 건축년대가 1308년임이 확인되었다
국보 제49호로, 1962년 12월 20일 지정되었다
♤ 노사불탱화
응열(應悅), 옥준(玉俊), 학전(學全), 석능(釋能)의 4명의 화원(畵員)이 1673년(현종 14)에 그렸다
이들은 충청남도 신원사(新元寺) 노사나불괘불탱(1664년)도 제작했기 때문에 같은 밑그림을 사용한 듯 유사하지만 이 괘불탱에 더 많은 권속이 등장하며 채색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다
보살 형태의 주존불(主尊佛)에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의 존명이 있으며 1767년, 1780년, 1801년, 1888년 4번의 중수를 거쳤다
♤ 목조 석가여래 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에 모셔져 있는 목조삼세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연화대좌, 수미단 등이다
삼세불좌상은 수덕사의 중흥조(中興祖)인 만공(滿空)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 수덕사라고 하면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한때 유행가였던 '수덕사의 여승'이란 노래가 뜨면서 잘못 알려진 것이며, 남자스님인 비구가 먼저 자리하다 여승인 비구니들의 정진 장소로 자리잡았다
환희대, 견성암과 김일엽, 수덕여관과 나혜석 그리고 이응로
♤ 수덕여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7-1)
수덕여관에는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 한 획으로 기록될만한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다녀온 나혜석, 동양화가로서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개설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한 고암 이응로, 우리나라 여성최초로 일본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파란만장한 삶을 청산하고 비구니 승이 된 김일엽스님, 김일엽스님의 아들 일당 김태신 스님이 수덕여관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주인공들이다
♤ 김일엽
‘수덕사의 여승’ 노랫말 주인공이라고 회자되는 김일엽스님 본명은 김원주(金源珠)다
평남 용강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던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는데,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간 사람이다
일본 유학 중 일본 여성들의 인권과 자유분방한 생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가부장제도가 고착되어 있어서 여성의 인격은 거의 무시되었던 시대였다
일본 유학중에 이광수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을 김일엽(金一葉)으로 지어 준 사람도 이광수다
一葉(일엽)이란 한자의 뜻은 '하나의 나무 잎' 이란 의미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그 당시만 해도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자유연애론을 주창했고, "여성이 한 남자와 동거를 하다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다시 만나 살더라도 그 전의 남자를 잊을 수만 있다면 처녀와 같다"라는 말까지 했다
실제 그녀의 삶도 비슷한 점철을 밟는다
김일엽은 22세에 결혼을 했는데 상대자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연희전문학교에 근무하는 이노익이라는 40세 된 신사였다
그는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
남편의 신체 결함을 모르고 결혼을 했던 김일엽은 그것으로 인해 심적 고통이 심했는데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이혼 후 일본사람 오따세이조와 열애를 하게 되고 사생아 김태신을 낳는다
오따세이죠는 은행장의 아들이었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음을 안 김일엽은 아들을 맡기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자유로운 생활을 계속한다
(1922년 9월, 결국 김일엽은 오따세이죠의 친구집에서 귀여운 사내아이 오따마사오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김태신이다)
친구의 남편과 삼각관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기자와 동거생활도 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백성옥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김일엽이 생각할 때 백성옥은 모든 면에서 자기를 리드해 줄 사람으로 믿고 의지하며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성옥은 김일엽에게 ‘당신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다’라는 말을 남기고 금강산으로 스님이 되어 떠나버린다
김일엽은 그 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고 혼란을 겪다가 수덕사로 와서 스님이 되려 했다
만공스님은 김일엽을 보고 ‘당신은 중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그래도 버텨 결국 승낙을 얻어 견성암에서 비구니 승이 된다
김일엽이 수행 중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소설책을 집필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만공스님은 김일엽이 속세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절에서 내려가도록 명한다
그러자 김일엽은 며칠 동안 용서를 빌고 절필을 선언한다
그런 후에 만공스님은 다시 그녀에게 구도의 길을 걷게 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김일엽은 평생동안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
♤ 나혜석
김일엽과 유학생활 중 절친했던 나혜석이라는 미술학도가 있었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시대 군수의 딸로 태어나 도교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 오빠의 친구인 유부남 최성구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데 최성구는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만다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중 3∙1 운동에 참가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이듬해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을 했는데 김우영이 일본 관리가 되어 만주로 발령이 나서 그곳으로 이동을 했다
이미 나혜석은 화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전시회를 하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결혼 후 7년 뒤 부부는 유럽으로 떠났다
3년 동안 유럽에 체류하며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김우영은 독일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프랑스는 나혜석에게 서구 여성의 삶을 경험할 기회가 됐고,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했지만 파리의 연인 최린(당시 파리 주재 외교관)을 만나게 되는 장소가 됐다
한때 사랑에 빠진 최린과의 편지가 남편에게 알려지게 되고, 남편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한다
최린도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죄’로 고소하기도 한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화랑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냉대했으며, 모든 학교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 때 나혜석은 2남 1녀의 어머니였다
나혜석은 보통 여성이 아니었다
김우영과 결혼하기 전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 걸었는가 하면, 신혼여행 중에 옛 애인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워 주기도 한 사람이다
이혼 후에도 그의 말은 사회 이슈가 되었다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최린을 상대로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소송 등 모든 것이 파격적이었다
그것이 그 당시 사회로 부터 냉대를 받게 된 요인이기도 했다
삶에 지쳐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던 그녀도 결국 중이 되리라는 마음을 먹는다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여장을 푼다
그리고 김일엽을 만나 자기도 중이 되겠다는 의향을 보인다
김일엽이 적극 만류한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만공스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애원을 한다
김일엽의 소개로 만공스님을 만났지만 만공스님은 ‘당신은 중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을 아예 구입을 하고 5년을 머물면서 중을 시켜달라고 1인 시위를 한다
그러면서 틈틈이 그림도 그렸다
만공스님은 끝까지 그녀를 불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에 일본에서 김태신이 수덕사 견성암으로 어머니 김일엽을 찾아온다
그 때 김태신의 나이는 14세였다
김일엽을 찾아온 김태신이 ‘어머니’라고 부르니 ‘스님이라 부르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대한다
그것을 본 나혜석은 이혼하며 두고 온 자기 자녀 생각을 하면서 김태신을 자신의 아들인양 밤마다 데리고 잤다
그러면서 그림을 가르쳤다
후에 김은호 화백에게 수학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실력을 쌓게 되는데 일본의 유명한 공모전들을 휩쓸게 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의 초상화도 김태신이 그렸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채색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공헌했다
60살이 넘어 불교에 귀의 했는데 김천 직지사에서 정진을 했다
2014년에 92세의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서울시립 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 한 여성 행려병자가 있었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은 65~66세(사망 당시 실제 나이는 52세)
이 행려병자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권운동의 선구자, 독립운동가, 문필가였던 나혜석이었다
막내아들이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김건이고, 연기자 나문희(본명 나경자)의 고모할머니(아버지의 고모)이다
베이징에서 태어난 나문희가 5살 때 가족들과 함께 수원시 본가로 갔을 적 본 나혜석은 심한 파킨슨병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 이응로
이응로는 충남 홍성 사람이다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서예와 묵화를 배우고 있었는데 소문을 듣고 나혜석이 살고 있는 수덕여관으로 찾아온다
나혜석과 같이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그녀로 부터 서양화의 기법을 배우게 된다
이응로는 나혜석의 영향으로 미술에 대한 열정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다
한편, 나혜석은 스님이 되기위해 수덕여관에서 5년을 버텨도 반응이 없자 수덕사에서 스님이 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을 한다
그래서 수덕여관을 이응로에게 넘기고 공주 마곡사로 가서 스님이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적응이 되지 않아 얼마 후 환속한다
양로원과 걸인 생활을 하다가 무연고 병동에서 불행한 삶을 마감한다
이응로는 나혜석으로 부터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부인 박귀희(朴貴嬉)여사와 함께 이곳에서 기거를 하다가 후에 운영을 박귀옥 여사에게 맡기고, 자기보다 21살이나 연하인 이화여전 출신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버린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던 이응로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류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한다
이때 이혼한 부인 박귀희 여사가 뒷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에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몸을 정양한다
그 때 수덕여관 곁에 있는 바위에 암호 문자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박귀옥 여사가 무슨 내용인지 물었을 때 ‘천지조화가 이 속에 내포되어 있다’는 말을 한다
얼마 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고 박귀희 여사만 수덕여관을 지켰다
수덕여관을 지키던 이응노 화백의 전처인 박귀희 여사는 2001년 2월 24일 밤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장조카 집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이응노는 1989년 1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수덕여관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