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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환난에 대한 교훈, 탐욕 억제와 하늘나라 추구의 교훈, 재림에 관한 교훈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특히 12:1-19:27까지는 예수님의 행동(action)보다는 죄로부터 순결하신 유일한 인자(人子) 로서 불완전한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훈에 관한 기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분이 정언명법(定言命法) 식으로 즉, 각 부분 자체가 교훈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각 문단 구분과 그에 대한 구속사적 개관을 병행하기로 한다.
전반부 1-12절은 먼저 1-3절이 앞장 후반부에 이어 형식주의와 인본주의의 오류에 빠진 바리새인들의 외식된 교훈과 언행을 조심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을 보도한다. 이어서 4-12절이 이런 자들이 현재 복음(福音)의 참 진리를 말하는 자신을 적대하였듯이 훗날 제자들도 핍박할 것인데 그때 순간적 핍박에 두려워 말고 영생(永生)과 진리(眞理)를 기억하며 인내할 것을 예언적으로 교훈하신 주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실로 우리가 주를 따라 살고자 할 때에는 이 세상의 핍박이 필연적이다. 그 옛날 사단(the Satan)은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첫 사람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에 동참시킨 이래 현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엡 2:2).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서 오고 오는 세대 중에서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당신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진행하신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 (repentance)하여 구원 얻을 충분한 기회를 얻게 하시고자 사단과 세상에 대한 심판도 함께 유보하고 장구한 구속사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도록 하셨으므로 마침내 세상을 선과 악,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로 구분되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 택한 백성이 모두 구원(salvation) 얻어 하나님이 마침내 사단(Satan)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종말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Saint)들을 향한 사단으로 인한 환난과 핍박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의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교훈하는 바대로 순간적 핍박이 올 때 영원한 구원을 기억하여 두려워하거나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환난과 핍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성도 각자에게 매우 다양하게 닥치는 바 자신의 삶 속의 모든 상황의 겉모습이 아니라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wisdom)를 가져야 할 것이다.
다음 중반부 13-34절은 무리중의 한 사람이 예수에게 유산(遺産)으로 인한 형제 간의 갈등을 해결해 주실 것을 요청한 사건(13,14절)에 즈음하여 주께서 그 사안(事案) 자체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근원적인 원리를 제시하신 것을 보도한다. 곧 먼저 소극적 측면에서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과도한 탐심을 버릴 것(15-21절)에 대한 교훈과 나아가 적극적 측면에서 인간이 참으로 가져야 할 것 곧 하늘나라에서의 영생(永生)과 축복을 추구할 것을(22-34절) 교훈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 오염된 세상에서의 일시적이고도 온전치 못한 복락밖에 보장 못하는 이 세상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생과 상급을 추구해야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만인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도 유한자(有限者)인 인간인지라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고 영원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확신하지 못하여 늘 불안해하고 현실에 집착하려는 육신의 안목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태초부터 종말까지 보여 주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의 진리에 더욱 굳게 서서 이 땅에 속한 자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
후반부 35-59절은 반부에서 천국을 지향하는 삶을 살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에 이어서 그 천국 도래의 결정적 계기가 될 예수의 재림(再臨)과 종말에 관련된 교훈을 주고 있다. 보다 상술하자면 35-48절은 훗날 분명히 닥칠 종말에 대비하여 선한 청지기의 자세로 대비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49-53절은 이처럼 현 역사의 종말(終末)까지 교훈하는 엄정한 주의 복음으로 인하여 이 땅에는 이를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첨예한 대립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 진리에 대한 자세가 결국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될 것을, 심지어 한 가정에서조차도주의 복음으로 분열이 생길 것을 예로 들어 선언하신 내용이다. 마지막의 54-59절에서는 이처럼 현 역사에는 분명히 종말이 있을 것이며 또한 이를 계기로 천국이 도래될 것이므로 늘 영적으로 각성하여 시대를 분별하는 동시에 그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에 대비하여 늘 자신의죄를 회개하여 죄의 짐을 가볍게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지금 이 땅과 그 위에서 전개되는 역사를 다가오는 종말과 종말 뒤에 세워질 새 하늘과 새 땅(계 21:1)과의 대조하에서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그리고 현 역사가 종결되고 새 역사가 시작되는 그 종말의 날이 아주 먼 훗날의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그 언제나 바로 지금이 순간일 수 있다는 역동적 종말관(終末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 땅과 이 역사에 맹목적으로 연연해하거나 또 반대로 현 세상을 광신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회개의 때인 동시에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서 더 큰 상급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주신 삶의 장(場)으로 깨달아, 늘 이 순간에 자족하면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여 지금 이 순간을 선하게 활용하며 (마24:25) 전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눅 17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실로 기독교는 이 땅 현 역사의 무궁한 번영과 발전을 맹목적으로 낙관하는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는 죄로 오염된 인간의 힘만으로는 결코 영원한 구원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필연적인 진리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능력과 사랑과 방법을 제공하실 수 있으며 나아가 이 땅이 아닌 새 세상에서, 현 역사가 아니라 그것이 일단 종결된 뒤에 새 역사의 출발이 시작됨으로써만 인간의 영생(永生)과 영복(永福)이 시작될 것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현 세상 역사의 전개와 그 안에서의 우리 각자의 삶은 그 자체도창조자 하나님의 축복이나 인간이 범죄한 결과 인간과 우주 전체가 죄의 결과로 신음하게 된 현실에서는 보다 궁극적으로는 우리 각자의 죄를 회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널리 확장하는 기간의 의미를 더욱 크게 갖게 되었음을 믿는 신앙이다(딤후 4:2).
외울말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29,31)
바리새인의 누룩 경고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마 10:26; 막 4:22; 눅 8:17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환난과 핍박에 대한 교훈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2; 막 8:38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13 〇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뒤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시 52:7; 렘 17:11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도가 참으로 구할 하늘나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06:33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기뻐하시느니라
사 40:11; 슥 13:7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마 19:21; 딤전 7:19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마 6:21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자세
35 〇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마 25:1-13; 벧전 1:13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婚姻)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隨從)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 21:34,36; 살전 5:6; 벧후 3:12
두 청지기의 비유
41 〇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마 24:48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민 15:30; 요 9:41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복음과 분쟁
49 〇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마 10:35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시대의 분별과 조속한 회개의 촉구
54 〇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마 16:2
55 남풍이 붉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59 네게 이르노니 호리(毫釐)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 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 노트
보감-12:1, 외식자의 특징
마 23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2:13-21 성경상 사람이 주의해야 할 20가지
1.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신 6:12)
2. 말로 범죄하는 것(시 39:1)
3. 주의 공의로운 심판(시 107:33-43)
4. 주의 모든 말씀(시 119:6,15,17)
5. 부모의 훈계와 지혜(잠 4:1,20)
6. 위선적인 종교 생활(마 6:1)
7. 거짓선지자와 그리스도(마 24:4,5)
8.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막 8:15)
9. 사람의 미혹을 받는 것(막 13:5)
10. 모든 소유의 탐심(눅 12:15)
11. 형제의 범죄함(눅 17:3)
12. 형제를 시험들게 함(롬 14:13)
13. 교만하여 넘어짐(고전 10:12)
14. 미움과 분쟁(갈 5:15)
15. 지혜 없는 자같이 행함(엡 5:15)
16. 철학과 헛된 속임수(골 2:8)
17. 대적자들(딤후 4:15)
18. 허탄한 자랑(약 4:16)
19. 성경의 예언 말씀(벧후 1:19)
20. 거짓 선생(벧후 3:16,17)
주요주제-12:8-12 인자(人子)의 이해
사복음서에는 예수의 호칭으로 '인자'라는 용어가 약 90여회 나오는데, 그중에 본서에 기록된 것만 26회이다. 이는 예수의 여러 측면 가운데 '인자'(Son of man)이심을 강조하는 본서의 기록 목적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인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곧 본서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1. 정의(定義)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벤 아담'이고 다른 하나는 '벤 에노쉬'이다. 전자는 단지 피조물로서의 인간을, 후자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나 둘 다 서로 구별 없이 '사람의 아들'(Son of man)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헬라어에서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하나로만 사용되며 그 의미는 히브리어와 동일하다.
그런데 '인자'의 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자적인 뜻과 함께 히브리인들이 일반적으로 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그 관용적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① 창조주와 대칭하는 피조물로서의 인류(human) 혹은 개별적인 인간(man)을 가리킨다(민 23:19; 욥 16:21; 시 8:4; 겔 2:1,3; 막 3:28; 엡 3:5). 이때는 보통 연약하고 필멸적(必滅的)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강조된다.
②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 혹자들은 단 7:13의 '인자 같은 이'가 이런 의미를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하고, 한 개인으로서의 메시야를 가리킨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B.C. 2C경에 기록된 구약 외경인 '에녹서'에는 이 용어가 '택한 자', '택함 받은 공동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③ 종말에 하늘 권세를 가지고 도래할 메시야를 가리킨다. 단 7:13이 이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으며, 구약 외경들 속에는 유대인들의 묵시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과 함께 이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또 요 12:34에서도 유대인들이 종말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인 그리스도와 인자(人子)를 동일 인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성경에서 '인자'가 언급된 경우에 대해 마 26장 자료 노트의 도표를 참조하라.
2. 예수의 자기 호칭 '인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 라고 칭하셨을 때 이 호칭은 위에서 설명한 인자(人子)의 세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면서도 특히 메시야로서의 당신의 사역과 신적(神的) 권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마 24장 자료 노트의 도표 참조). 이에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 칭하신 대표적인 경우 세 가지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신적 권위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자신이 인자(人子)로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며(마 9:6; 막 2:10; 눅 5:24), 전능자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다(막 14:62; 눅 22:69).
② 십자가 수난과 관련하여: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에 주어진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마 26:2; 막 8:31; 9 :31; 10:33,34) 속에는 어김없이 '인자'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인자의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으며, 구약에서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도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다(마 26:24; 눅 22 :22).
③ 승천 및 재림과 관련하여: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마 19:28),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막 14:62),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8) 등의 말씀들 속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단 7:13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라는 구절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들로서, 예수 자신이 다니엘서에 예언된 인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예수께서는 단지 자신이 인성(人性)을 가지신 사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도(막 2:28; 눅 6:5), 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해(눅 12:8-10)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3. 의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Son of man)라 하신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로 심오한 의의를 준다.
①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Incarmation) 하신 분임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다. 이 말은 곧 예수 자신이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사 이 땅에 오셨으며, 또 장차는 본래의 영광의 자리로 되돌아가실 것을 뜻한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결국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인자'라는 예수의 칭호가 우리에게 주는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예수의 성육신과 수난의 필연성에 관해서는 막 10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② 예수는 바울이 언급한 바 '둘째 아담'(롬 5:14-19; 고전 15:21-23)으로서 첫째 아담이 타락함으로 인해 상실해버린 창조 당시의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시는 회복자이심(롬 8:19-23)을 보여 준다. 즉 인자로서 오신 예수는 자신의 모습 그 자체로서 창조 당시의 모습을 지닌 가장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또 그분은 첫째 아담의 죄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때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육적 대표자인 첫째 아담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물려주었지만 우리의 영적 대표자인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생과 구원, 그리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되돌려주셨다. 이에서 실로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천국의 영생 복락과 회복될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대와 소망에 가슴 부풀게 되며, 더욱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도표-12:10 성령 하나님께 대해 짓는 죄
1. 이름을 망령되이 부름(출 20:7)
2. 성령을 근심케 함(사 63:10)
3. 성령의 사역을 훼방함(막 3:28-30)
4. 성령을 속임(행 5:3,9)
5. 성령의 뜻을 거스림(행 7:51,52)
6. 성령의 능력을 저버림(살전 5:19)
7. 성령을 욕되게 함(히 10:29)
보감 - 12:16-21그리스도인의 시간관
1.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임(렘 33:20; 단 2:21)
2.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종말에 끝남(히 1:10)
3. 천하의 모든 것은 정해진 기한과 그 목적이 있음(전 3:1)
4. 인생은 너무 짧고 허무함(시 89:47)
5. 인간은 내일 일을 알 수 없음(눅 12:16-23)
6.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야 함(벧전 4:2)
7. 시간과 생명을 주심은 하나님의 은총임(벧후 3:9,15)
8. 성실한 생활로 시간을 아껴 낭비하지 말아야 함(엡 5:15,16)
9. 시간 속에 살 때 두려움을 갖고 지내야함(벧전 1:17)
10. 충성되고 지혜롭게 시간을 활용해야 함(마 24:25)
11. 한 날의 시작과 끝을 주님께 드림(시 113:3)
12. 모든 시간 속에서 복음 전파에 힘써야함(딤후 4:2)
13. 주 안에서 여가를 선용해야 함(사 58:13,14)
14.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함(사 58:13,14)
15.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천국에서 영원을 누리는 것임(히 11:10,13-16)
보감 - 12:16-21어리석은 부자를 통한 교훈
예수님은 세상 물질을 탐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물론 이 세상에서 부의 축적을 위해 선하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비유는 이세상의 부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만 몰두된 상태 즉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돈한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축복을 상실해버린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 이제 본 비유에서 발견된 다음의 교훈을 우리 자신들도 자칫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지표로 삼자.
1.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대상 29:12)
2. 재물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큰 걱정을 낳음(눅 12:1-18)
3. 만물의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물질에 대한 욕심은 헛된 것임(눅 12:16 -21)
4. 물질은 결코 구원을 주지 못함(롬 1:17)
5. 주 안에서만 영육간의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음(고후 3:5)
6. 물질은 선한 일의 도구이지 목적이 아님(딤전 6:18)
7. 재물에 대한 욕심은 결국 사망의 근원이 됨(약 1:15)
8. 물질보다 영혼의 부가 더 중요함(요삼 1:2)
보감-12:19 성경에 나타난 '자기 기만'의 생각들
1.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평안하다(신 29:19)
2.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 않는다(시 10:6)
3. 우리의 가는 길이 바르다(잠 14:12)
4.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으므로 깨끗하다(잠 30:12)
5.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므로 우리는 형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렘 5:12)
6. 우리는 기존의 관습이 설사 악하다 해도 고수해야 한다(렘 44:17)
7. 특권을 가진 우리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3:9)
8. 우리는 열성적으로 신앙 행위를 지키고 8있다(마 6:5,16)
9. 신령한 은사를 받은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마 7:21,22)
10. 우리는 예수에 대한 지식이 많다(막 6:3)
11. 우리의 생명은 계속될 것이다(눅 12:19; 약 4:13,14)
12.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눅 18:11)
13. 예수가 아닌 다른 이로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14. 그리스도는 심판하러 오지 않으실 것이(벧후 3:3,4)
15. 우리는 영적으로 부요하다(계 3:17)
보감 - 12:22-31 성도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이유
1.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잠 19:21,23)
2.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구원받았기 때문에(마 6:31)
3. 우리 자신의 내일 일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기 때문에(약 4:14,15)
4. 가장 귀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 당연히 다른 모든 필요도 채워 주시기 때문에(눅 12:23)
5. 실상 인간이 염려함으로 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에(눅 12:24-26)
6. 하나님께서 성도가 필요한 것을 미리 다아시기 때문에 (눅 12:27-30)
7.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롬 8:36)
풍습-12:42, 청지기 직
눅 16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12: 46, 엄히 때리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디코토메오'로서 두 단어, 곧 '디스'와 '템노'의 합성어이다.
먼저 '디스'는 부사로서 '두 번'(막14:30; 살전 2:18)) 내지는 '또'(again, 유 1:12)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동사인 '템노'는 '자르다'(to cut)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를 합친 본래의 의미는 '두 갈래로 나누다' 이다.
이처럼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한 예들을 공동번역과 영역본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동강내고'라고 옮겼으며, 영역본인 KJV는 '분리시켜 자르고'(cut him in sunder)로, NIV는 '조각내어 자르고'(cut him to pieces)로 각각 번역하였다.
한편 위의 영역 성경들의 번역에서 보듯이 많은 학자들은 '디코토메오'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고대 근동 국가들에서 중죄인이나 포로들을 둘로 자르는 매우 잔인한 형벌을 시행했던 사실을 반영한다고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문자적인 의미대로 사람을 둘로 자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매우 엄한 형벌, 혹은 심한 채찍질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두 갈래로 나누다'나 '두 조각으로 자르다'라는 '디코토메오'의 문자적인 의미는 최후 심판으로 인한 형벌의 무시무시함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 신자들에게 불충한 종이 받을 형벌이 이처럼 강렬하고도 끔찍하게 표현된 것을 경고로 알아 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늘 성실하게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감-12:35-40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비치 않는 자들의 특징
1.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하지 않음(시 41:4)
2. 자신이 맡은 일에 게으르고 소홀히 함(마 25:14-30)
3. 사람들 앞에서 주를 그리스도로 증거 하지 않음(눅 12:8,9)
4. 물질과 명예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함(눅 12:16-21)
5. 죽음과 심판과 영생에 대해 항상 생각지 않음(눅 12:16-21)
6.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기도하지 않음(눅 21:36)
7. 그리스도보다 이 세상을 더욱 사랑함(딤후 4:10)
8. 세속적인 것에 물들어 타락함(벧전 4:3)
주요주제-12:51-53 불화를 주러 오신 예수
마 10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12:56, 외식하는 자
마 6장 자료 노트 참조
12:1-12 환난을 이기는 신앙
앞장(눅 11장)에서는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가운데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한 저주로 인해 더욱더 첨예하게 대립됨을 보았다. 따라서 그들의 반발적 핍박이 예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들의 핍박에 대비할 것을 가르치신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주의시킨다(1절).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사회 속에 누룩과 같이 침투해 들어가 그 위선과 외식으로 온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자들과 같이 진리에 속한 자를 박해한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아서 앞으로 있을 저들의 핍박을 담대한 신앙으로 극복하고 이겨야 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핍박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① 궁극적으로 참된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2,3절).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외식은 결국 드러나고 예수님의 복음은 진리로서 선포되므로 제자들은 희망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② 악인들은 사람의 육체만을 해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육을 주장하시기 때문이다(4,5절). 즉,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악한 자들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며, 진리를 위해 핍박받으며 진리를 좇은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 ③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좇는 자에게 절대적인 관심을 갖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6,7절).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와 관심은 악인의 손에서 진리를 좇는 자를 구원하신다. ④ 이 세상에서 진리를 좇는 신앙이 종말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8,9절). ⑤ 진리를 좇는 자는 성령이 언제나 동행해 주시기 때문이다(10-12절). 진리를 대적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악인은 죄 사함도 없지만 진리를 좇는 자는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까지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고 미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진리를 좇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한다(행 5:41; 롬 8:12,13).
12:1 그 동안에. - 여기서 '그 동안'(엔 호이스)이라는 말은 하나의 문장이나 단락을 시작하는 고전적 관용어로, 여기서는 예수께 책망을 들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반발이 계속되는 동안(눅 11:53,54)을 가리킨다.
수만 명. - 과장법적 표현으로 '대단히 많은 군중'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무리가 모여든 것은 아마도 ① 청중을 매혹시키는 설교자이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께 흥미를 느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② 예수와 그의 대적자인 바리새인 및 율법사들과의 논쟁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눅 11:37-54).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 예수께서는 수많은 무리가 그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몰려왔으나 그들에게 교훈하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교훈하심으로써 제자들과 무리들을 구분하고 계신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자들과 일반 군중들을 구별하신 까닭은 본절 이하 12절까지의 말씀이 일반 무리들이 수납하기에는 그들이 영적으로 준비가 안된 까닭이다. 즉 1-12절의 내용은 환난 때에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킬 것을 교훈한 것으로, 이러한 교훈을 영적 진리에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단지 질병 문제, 양식 문제, 신앙의 외적 행위를 통한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를 좇아다녔던 일반 청중들에게 하시기에는 부적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만 따로 불러 이 교훈을 주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제자들'은 일반적으로 12제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다른 많은 제자들까지 포함된 말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누룩'(leaoen)에 비유하셨다. 이는 '파급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은유적 표현이다. 누룩은 가루 반죽이나 액체를 발효시키고 부패시킬 수 있는 것으로 점진적인 내적 작용에 의해 전체를 변화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누룩 비유는 마 13:33의 '천국 비유'에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의미하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여튼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신 것은 그들이 마음 속에는 종교적, 도덕적 교만과 불경건을 가득 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교훈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가장 경건한 체 하면서 마침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눅 11:52 주석 참조)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마 16:11; 막 8:15). 한편 '외식'(휘포크리시스)이라는 말은 본래 배우가 관객들에게 연극을 보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외식'이라는 말은 실제가 아닌 것을 가장하는 행위로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적인 위선을 의미한다.
12:2 감추인 것이…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 이는 당시 통용되던 격언으로, 성경에는 본절 외에 몇 번 더 언급되는데 그 의미는 조금씩 다르게 적용되었다. 즉 마 10:26에서는 예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어 정당한 평가를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셨고, 눅 8:17에서는 복음의 진리의 빛이 언젠가는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반면 본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그것을 감추려는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무튼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행위는 예수께서 심판의 주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나누실 때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마 16:27; 25:31-33).
12:3 너희가 어두운데서 … 전파되리라. - 본절 역시 2절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감추일 비밀은 없으며 모든 것이 확연히 드러나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 '골방'(타미에이오이스)은 '보물을 보관하거나 극비의 회의를 개최하는 은밀한 곳'을 가리키며,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는 뜻은 오늘날 방송의 역할과 유사하게 공개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Hendriksen). 그와 같이 모든 음모와 권모 술수 등 외식자들의 죄악들도 하나도 숨김없이 다 공개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음모와 권모술수를 일삼는 데 정력을 쏟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도록 힘써야 한다(딤전 4:15).
12:4 내 친구. - 여기서 '친구'(필로이스)라는 말은 신뢰를 표시하는 표현으로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한 말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한편 공관복음서 중 오직 이곳에서만 '내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Grundmann). 하여튼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명하는 대로 행하는 오늘날 성도들도 곧 예수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요 15:14).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 성도들이 세상의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즉 세상의 박해자들은 우리 몸의 현세의 생명은 빼앗아가나 그 이상은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 10:28에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기 때문에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보다 명확히 표현되어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몸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영혼을 멸하는 자이시다. 왜냐하면 육의 죽음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니며 우리가 육신 안에 거하며 사는 이 세상의 삶은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비하면 지극히 초라하고 짧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영혼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과 고통을 수반한다. 마 10:28 주석 참조.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두려워하라. - 여기서 '두려워할 자'가 사단이라는 견해도 있으나(Olshausen), 하나님이신 것이(Godet, Farrar, Plummer) 분명하다. 즉 성도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 세상의 권력과 사단의 세력까지 당신의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몸이 물질적이요 현세적이라면, 영혼은 비물질적이요,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육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의 멸망을 의미하지만 영혼의 파멸은 존재론적 멸망을 뜻한다. 하나님은 바로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시요, 세상의 두려움은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극복된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에 떤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을 경외한다는 것이다(Hendriksen).
지옥에. - '지옥'(게엔난)은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게힌놈)의 헬라어 음역이다. '게힌놈'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몰록 신에게 인신 제사를 드리던 신상이 있던 곳이다(왕상 23:10; 렘 7:32). 그런데 이 곳은 유대 제 16대 왕인 요시아(B.C. 640-609)에 의해 파괴되어 더러운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태우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후로 이곳은 종말론적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히 고통당할 장소로 상징되었다. 한편 '지옥'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종말론'을 참조하라.
12:6 참새 다섯이… 그러나… 하나라도. - 4,5절에서 성도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교훈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절과 다음 절에서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한 보호를 강조하심으로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도록 교훈하고 계신다. 여기서 '참새'(스트루디아)는 일반적으로 작은 새를 가리키며, '앗사리온'( )은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이다. 즉 로마 화폐 드라크마의 1/10에 해당되며,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되는 동전이다(제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결국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린다는 것은 참새들의 생명이 매우 값싼 것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처럼 작고 보잘 것 없는 가치에 해당되는 미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여도 보살피시며 기르시는 분이시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지 않을 리 만무하다. 결국 본절은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2:7 머리털까지도… 참새보다 귀하니라. - 아주 세밀하고도 완전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계속 말씀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는 말은 완전한 보호를 나타내는 히브리적 용법으로(삼상 14:45; 눅 21:18),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간섭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표현한 말이다. 마 10:30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참새보다 귀하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결코 미물인 참새에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귀하므로 참새의 생명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성도들을 보호하시지 않을 리 없다는 의미와,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환난을 이기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12:8 본절과 다음 절은 믿음의 승리 여부에 따라 최후 심판 때에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될 것을 교훈하신 말씀이다. 즉 세상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 최후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저버리면 최후 심판 때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 여기서 '나를 시인하면'의 문자적 의미는 '내 안에서 고백하면'이란 뜻으로, 본절은 성도 각 개인이 예수와 생명적 연합을 이룬 존재로서(갈 2:20) 예수가 주되심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백할 것을 요구하신 말씀이다.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 마태복음에는 본절의 '하나님의 사자들 앞'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으로 표현되었다(마 10:32). 그러나 두 표현은 다같이 최후의 심판대를 가리킨다. 다만 마태는 심판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강조한 반면, 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위임받아 직접 심판을 수행하는 사자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시인한다'는 말은 최후 심판의 결과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장차 양과 염소를 나누실 바로 그 심판주이심을 확증해 준다(마 25:31-33).
12:9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부인하다'(아르네세타이)는 '시인하다'와 대립되는 용어로,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세상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주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는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는 심판의 선언을 듣게 될 것이다.
12:10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 마태와 마가는 바알세불 논쟁과 관련하여서 본문의 말씀을 다루고 있는데(마 12:31,32; 막 3:28,29), 이에 대해서는 ① 같은 말씀의 반복으로 보는 견해(Ellicott)와 ② 한 번 하신 말씀으로, 마태의 편이 역사적 배경이 더 분명하다고 보는 견해 (Plummer)가 있다. 전자의 견해가 유력하다. 하여튼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마 12:31). 심지어 주를 부인했던 베드로와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기에 바빴던 바울도 용서를 받았다(마 26:74,75; 행 9:1).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유독 성령 모독죄만은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성령의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사실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은 죄인이 진실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토록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을 거스려 근심시키며, 훼방하고, 모독하게 되면 성령은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안에서 성령은 소멸되고 만다(행 7:51; 엡 4:30; 살전 5:19).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회개할 수 없게 되며 궁극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령 모독죄는 사함 받지 못할 죄인 것이다(Godet, Zahn, Vincent). 그러나 본절은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죄 용서와 구원이 보장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자'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12:11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 본문에서 '회당'은 유대인들이 종교 행사와 교육을 실시하던 장소인 동시에 율법이나 규례를 범한 자를 재판하는 법정을 말한다. '회당'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또한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란 세상의 통치자를 말한다. 이들로 인하여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에 제자들은 염려와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아야 될 것은 성령께서 유효적절하게 역사하시며, 마음을 조명하시고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베드로의 설교(행 4:8-12,19-20)와 바울의 설교(행 21:39-22:21; 24:10-21; 26:1-23)에서 증명되었다. 대답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게세스데'( )는 전문적 법률 용어로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법정에 서게 될 경우를 염두에 두고 본절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세상 법정에 섰을 때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계신다. 제자들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친히 제자들이 할 말을 준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2:12 성령이… 가르치시리라. -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는 초대교회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던 점(행 4:8-12; 5:29-32), 핍박 속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는 스데반(행 7장)에게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인간의 의지나 결단을 완전히 무시하고 성령께서 제자들을 기계적으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본절은 다만 제자들이 자기 변증을 위하여 사전에 어떤 생각이나 계획을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요 14:16-18,26,27).
12:13-21 탐욕에 대한 권고
앞 단락(1-1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있을 환난, 핍박에 대해서 담대할 것과 그처럼 담대해야 할 그 이유를 알려 주셨다. 이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재산 분배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13절)을 통하여 사람이 참된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재산 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탐욕을 지적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점을 제시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인간이 이 세상에 가치를 두고 유한한 물질을 의존할 때 맞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지적하심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영원한 것에 두도록 하신 것이다(16-21절).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인생의 참된 가치는 재물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人生)은 안개와 같이 유한하고 허무하며(약 4:14) 인간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모두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존재들이다. 풍부한 재물이 우리의 생명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을 삶의 가치와 목적으로 삼고 탐욕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15절). 둘째, 모든 부와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부요와 풍요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의한 것이며 우리의 생명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20절). 셋째,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적 축복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사용함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자가 하나님께 부요한 자라는 것이다(21절).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는 어리석은 청지기가 되지 않도록 주어진 우리의 모습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할 것이다(약 4:17-17).
12:13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 모세의 율법(신 21:15-21)에 의하면 재산의 상속은 형에게 우선권이 있어 2/3를 차지하고 동생은 1/3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규에 따른 불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랍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예수를 찾은 이 사람도 예수의 명성과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몫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다(Farrar). 그런데 그가 예수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과 예수께 단순히 재산 분배의 윤리적 문제 해결만을 요구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가 아닌 단순한 랍비로 오인했음을 의미한다(Hendriksen).
12:14 누가 나를‥‥세웠느냐. - 예수께서는 가정이나 사회의 문제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이는 그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예수께서 그러한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신 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가장 숭고한 사명(눅 19:10)을 수행하시기에도 그의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Hendriksen, Bruce).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최우선의 관심은 영혼의 문제이며 원리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윤리적인 문제나 세상사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문제는 국가의 권세(롬 13:1)를 이용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우선 순위적인 사명에 합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간청자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속적인 문제에 이용당하시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보다 근원적이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을 둘 것을 교훈하신 것이다.
12:15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 여기서 '탐심'(플레오넥시아스)은 '자기의 소유나 감정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기는 욕심'을 말한다. 이러한 탐심에 빠진 자는 영적 소경이 되어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물질이나 명예, 육체적 쾌락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을 어리석은 행위(시 39:6). 항상 불만족(합 2:9), 모든 악의 근원(딤전 6:9-11), 땅에 속한 것과 우상 숭배(골 3:5)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여튼 탐심은 온갖 형태로 발동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탐심을 물리칠 것을 권하시고 있다.
생명이‥‥있지 아니하니라. - 사람의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따라서 소유가 넉넉하다고 하여 생명을 어찌할 수는 없다. 죽음 앞에 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무력한 것이다. 물질의 소유만을 추구하는 탐심은 인생의 목표를 영이 아닌 육에 두게 함으로써 인생의 멸망으로 인도할 뿐이다. 이러한 본절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이 구하고 예배하여야 하는 대상 즉 하나님의 자리를 재물이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2:16 한 부자가‥‥소출이 풍성하매. - 본절에서부터 21절까지는 일명 '어리서은 부자의 비유'로 불리는 부분으로, 물질에 대한 탐심을 경계하기 위해 주신 비유이다. '비유의 이해'에 대해서는 마 13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본절에 나타나는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정당한 소출을 얻었다. 문제는 그가 재산의 노예로 보일 정도로 물질에 집착했다는 점이다. 즉 그는 수입에만 열중이었지 지출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12:17 심중에‥‥어찌할꼬. - 17-19절에는 '내'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어 나오면서 부자가 자기 소유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부자는 그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소유인 것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기적인 생각이 그를 어리석게 만들었다. 아무튼 부자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그가 상당한 부자였다는 것과 아울러 세상의 재물로는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증 상태를 잘 보여 준다.
12:18 내 곡간을‥‥쌓아두리라. - 소출을 풍성하게 거둠으로 그것을 쌓을 곳이 없어 고민에 빠진 부자는 생각 끝에 드디어 곡간을 더 크게 확장하기로 작정했다. 특별히 여기서 '곡간'(아포데카스)은 곡식뿐만 아니라 물건도 쌓아두는 창고를 의미하는 말로 매우 큰 창고를 가리킨다. 즉 부자는 그의 많은 재산의 관리를 위해 만전을 기한 것이다.
12:19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부자는 물질의 풍성함이 그의 영혼을 위해서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제 그의 관심은 물질을 통해 쾌락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는 진리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부자의 어리석음이 역력히 드러난다. 즉 그의 영혼의 양식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영혼의 집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신 8:3; 욥 23:12; 시 119:103; 벧전 2:2). 실로 그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였다.
12:20 어리석은 자여. - 영혼의 중요성을 물질의 부요함으로 대치해 버린 부자에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아프론)이란 말은 '무분별함'을 뜻한다. 즉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요소로 대치하려는 무분별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실로 부자는 ① 물질에 대해 지나친 집착, ② 물질을 맡은 자로서의 청지기 의식 결여, ③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태도가 없음, ④ 물질로 영혼의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는 오판을 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부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적 가치를 추구해야 하며, 유물론, 황금만능주의 등 세속주의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 체계를 바르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19절의 '여러 해'에 대해 '오늘 밤'이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부자는 여러 해를 편안히 즐길 것을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생명을 취하기로 하신 것이다. 실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재물의 유무로 생명의 문제를 해 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헛된 재물은 사람의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시 39:6; 약 4:13-15). 한편 여기서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란 말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언젠가는 되돌려져야 함을 보여 줌과 동시에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12:21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가. - '자기를 위하여'(하우토)와 '하나님께 대하여'(에이스 데온)가 대조적으로 사용되었고, '부요한'(플루톤)이라는 분사가 문장 마지막에 사용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한 재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의미하며(눅 16:9). 그것은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과 같다(마 6:20).
12:22-34 염려에 대한 권고
앞 단락(13-21절)의 내용이 세상과 물질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자에 대한 교훈이라면 본문은 세상의 염려와 불안 속에 사는 자에 대한 권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훈의 대상도 무리들(13절)에서 제자들(22절)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앞 단락과 연계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므로(15절)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일보다 먹고 입는 것과 같은 문제로 걱정하거나 염려해서는 안 될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먹고 입는 것과 같은 세상적인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첫째, 하잘 것 없는 새들조차 먹이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굶어 죽도록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4절). 둘째, 백합화와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27, 28절), 셋째, 근심하는 것은 세상 백성들의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하나님을 의뢰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질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삶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해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31절) 하늘 지향적인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계신 것이다(32-34절).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이 세상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② 장래의 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눈앞의 일에만 정신을 빼앗겨 장래의 일을 대비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③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물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고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12:22 제자들에게‥‥몸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 - 예수께서는 무리(13절)에서 다시 제자에게로 그의 교훈의 대상을 옮기셨다(Bruce).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하며(18절), 재산에 의지하면서 안전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되지 아니할 때에 염려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물질적 조건을 확보함으로 안전을 누리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육신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재물을 탐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한편 여기서 '염려하지 말라'(메 메림나테)는 말은 마음을 분열시켜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먹고 입는 것은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염려하면 마음에 분열이 생기며 어지럽게 되는 것이다.
12:23 목숨이‥‥중하니라. - 사람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즉 목숨이나 몸이 음식이나 의복보다 중요한 까닭에 그러한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숨이나 음식, 몸이나 의복이 모두 하나님께서 준 것일진대, 음식이나 의복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한 목숨과 몸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거기에 따르는 음식과 의복을 주시지 않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는 깨닫지도 못한 채 부수적인 문제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로지 영혼이 잘되기 위해 염려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12:24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구체적인 예증을 통해 설명하고 계시다.
까마귀를‥‥얼마나 더 귀하냐. - 마태는 '공중의 새'(마 6:26)로 막연한 표현을 사용한 반면 누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하여튼 까마귀는 독수리처럼 시체를 먹는 새로 부정한 새이다(레11:15; 신 14: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까마귀를 돌보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창 2:7)과는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까마귀도 먹여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을리 만무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까마귀가 일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사실이 사람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의무이다(창 1:26-28). 다만 본문의 강조점은 미물인 까마귀조차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당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12:25 염려함으로‥‥더할 수 있느냐. - '키'(헬리키아)는 '연령' 또는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 (요 9:21,23), '신장'을 뜻하기도 한다(눅 19:3). 또 '자'(페퀴스)는 구약의 '규뎃'(창 6:15)과 '길이'를 뜻하기도 하고 '시간'을 뜻하기도 한다(시 39:5). 때문에 본절은 ①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크게 할 수 있느냐'(Bengel, Godet, Farrar, AV)로 해석 할 수도 있고 ② '생명을 일각이나 연장할 수 있느냐'(Plummer, Bruce, Vincent, RSV)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느 견해를 취해도 무방하다. 즉 사람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일각도 연장할 수 없는 것이다(시 39:4,5).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12:26 지극히‥‥염려하느냐. - 마태의 기록에는 없는 것으로 이 말씀은 25절과 계속 연결된 말씀이다. 키든 생명이든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극히 작은 것일지라도 어떻게 못하는데 왜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를 위해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염려치 않는 자일 것이다.
12:27 백합화를‥‥못하였느니라. - 먹을 것에 관해 염려하지 말 것을 위해 까마귀를 예증으로 드신 예수께서는 이제 입는 것에 관해 염려하지 말 것을 위해서는 백합화를 애증으로 들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의 훌륭한 교수법을 보게 된다. 특별히 그의 뛰어난 관찰력이 돋보인다. 여기서 '백합화'(크리논)는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꽃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예수께서 어떤 특별한 꽃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의 풍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모든 꽃을 생각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Hendriksen). 하여튼 예수께서는 가장 훌륭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백합화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지 못했음을 강조하심으로써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세밀한 보살핌을 대조시키고 계시다.
12:28 오늘 있다가‥‥믿음이 적은 자들아. - 본절에서는 꽃들의 짧은 삶과 제자들 앞에 놓여 있는 영원한 삶을 대조시키고 있다. 팔레스틴의 꽃은 가뭄과 흔히 부는 열풍으로 쉽게 말라 버리고, 마른 꽃은 화목(火木)으로 아궁이에 던져진다. 이는 들풀들의 수명의 짧음과 무가치함을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다. 결국 본절의 요지는 이러한 비천한 꽃들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어찌 사람을 입히시지 아니 하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믿음이 적은 자들'(올리고피스토이)은 믿음은 있으나 세상의 염려와 욕심으로 인하여 신앙의 이중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여튼 신앙은 미지근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뜨거워야 한다(계 3:15,16). 이런 미지근한 상태에서 오히려 시험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근심과 염려는 세인들과 불신자들의 것임을 교훈하심과 아울러 신자들인 제자들에게는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소유하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12:29 너희는‥‥근심하지도 말라. - 22절에서의 '염려'에 대한 금기 명령이 본절에서는 '근심'이라는 말로 반복되면서 뜻이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여기서 '근심하다'(메테오리제스데)는 말은 '성이 나다' 또는 '불안해지다'라는 뜻으로 '근심하지도 말라'는 말씀은 결국 허망한 욕망이나 물질의 공급 문제로 지나치게 근심하게 되면 불안해지거나 화가난 상태의 위험이 따르게 되므로 오히려 내적 열망 즉 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하라는 말씀이다.
12:30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은 신자들과 대조되는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본절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인하여 염려하고 구하는 것은 불신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구할 줄도 모르고 오로지 현세의 물질적 번영만을 추구하며 물질을 그들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긴다.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창조주를 무시하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악된 행위요,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어리석음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같이 물질적 조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친히 준비하시며 채워주신다.
12: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 마태의 병행 구절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표현되어 있다(마 6:33). 현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세의 물질,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그 중 먼저 구하여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①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구하라. ② 물질
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적인 것을 위해 구하라. ③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복음을 증거하라는 등의 다양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더하시리라. -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것들을 부속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신자들처럼 물질을 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 나라 실현을 생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은 많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적은 무리였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적다는 것은 장차 구원받게 될 사람의 수가 적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일꾼이 적음을 나타낸 말이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핍박과 고난, 먹고 입을 것 등으로 인해 불안해 질 수 있는 상황을 암시하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선한 목자처럼(요 10:14) 먹이시며 보호해 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 나라를‥‥기뻐하시느니라. -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핍박과 고난, 굶주리고 헐벗은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제자들에게 단순히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음을 보장해 주신 말씀이다.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 부르신 것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양자된 제자들의 친밀한 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주머니를 만들라. - 어리석은 부자(16-21절)와 같이 물질에 집착하여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을 거부하고 하늘 지향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천하기도 했다(행 2:44,45). 이러한 예수의 말씀이 꼭 초대 교회와 같은 삶을 살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정신만은 변함없이 수호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는 영생과 영원한 축복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다.
12:34 너희 보물‥‥마음도 있으리라. - '마음'은 생명의 근원으로(잠 4:23)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 된다. '보물'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다. 마음이 이 땅의 보물 즉 재물에 관심을 두느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사람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즉 신앙의 회색 지대란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니면 재물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준다. 즉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 또한 받게 된다. 그러나 재물에만 관심을 둔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과 재물도 잃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12:35-48 재림에 대한 준비
지난 단락(22-34절)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염려를 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셨다. 이어 본문에서는 주님의 종말론적 재림을 준비할 것에 대해 교훈하고 계신다. 이러한 본문은 앞 단락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바 앞 단락이 성도들에게 오직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본문은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도래했으며 그 최종 완성은 종말의 때에 임할 것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본문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의 종말론적 재림을 준비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비유는 다같이 주의 재림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을 주지만 부각시키는 주제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세 가지 비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비유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의 비유'(35-38절)인데 이는 누가만이 기록하는 독특한 비유로 마태가 기록한 '열 처녀 비유'(마 25:1-13)와 그 내용이 흡사하고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를 강조한다. 두 번째 비유는 '도적의 비유'(39, 40절)로 마태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는데(마 24:43,44). 이것은 주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때에 불시에 임할 것을 강조한다. 세 번째 비유는 '선한 종과 악한 종의 비유'(42-48절)로 역시 마태도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는데(마 24:45-51) 재림 때의 상급과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비유는 적극적인 봉사와 충성으로 재림을 예비해야 됨을 말해 준다. 이 청지기 직에는 충성했을 때의 큰 상급뿐 아니라 불성실했을 때의 큰 심판이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처럼 제자들에게 재림의 준비를 당부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을 떠날 때가 가까왔고 다시 오실 날이 확실하지 않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인자의 재림을 항상 성실하게 준비하고 예비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이 성도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과 영광의 기쁨을 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긴장 속에서 성실하게 살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2:35 지금까지(22-34절) 제자들에게 세상적인 염려를 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구할 것을 요구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절 이하 48절까지에서는 세 비유를 통해 돌연히 주의 재림과 관련된 교훈을 하고 계신다. 따라서 앞의 문맥과 다소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앞 문맥과 본절 이하의 내용은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즉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는데, 그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그 최종 완성은 종말의 때에 임할 것이다. 따라서 그 나라를 얻기 소망하는 성도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존재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허리에‥‥서 있으라. - 중동 지방에서 입는 옷은 길고 통이 넓어 노동을 할 때나 여행을 할 때는 옷을 허리까지 걷어 올리고 허리에 띠를 띠어야만 했다(출 12:11; 왕상 18:46; 눅 17:8; 요 13:4; 벧전 1:13).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라'는 말은 영적 수면이나 게으름에 빠지지 말고 항시 깨어 일하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은 열 처녀 의 비유(마 25:1-13)를 연상케 한다. 이는 어두운 동안에도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라는 의미로, 역시 깨어 있을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말이다. 결국 이러한 본절은 다음절과 관련하여 언제 주께서 재림하신다 할지라도 영접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와 경계 태세를 갖출 것을 요구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12:36 주인이‥‥기다리는 사람. - 마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마 25:11) 했으나, 누가는 여기서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으로 묘사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기다리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 하여튼 당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거행되었다. 따라서 종들은 주인이 오기까지 허리에 띠를 떤 채로 등을 켜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이 다시 오시기 까지 영적으로 깨어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혼인 집에서 돌아와. - 여기서 '돌아오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날뤼오'( )는 본래 야영을 해산하거나 정박했던 배를 푸는 것을 나타내던 단어로 '떠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본절 역시 주인이 집으로 오기 위해 혼인집을 떠난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는 장차 이 땅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 때와 시는 아무도 모른다(행 1:7). 따라서 주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한시라도 게을러 영적인 잠에 빠져서는 안 되며 항시 깨어 주를 맞이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해야 한다.
12:37 주인이 와서‥‥수종하리라.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다(요 13:1-15). 즉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 주인은 밤 깊도록 자지 않고 자신을 기다린 종들이 너무 기특하여 도리어 그들의 종과 같이 되어 그들을 위해 봉사해 준다. 그러나 사실 주인이 밤늦게 돌아왔을 때 종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하여 이처럼 극진히 대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주는 것은 종의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종은 마땅히 자기의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파악해야 할 것이다(눅 17:10). 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깨어 영접하는 자는 본절의 비유와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성도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로서가 아니라 은혜로서의 대접이다. 하여튼 본절은 깨어 주를 맞는 성도가 누리게 될 은혜와 영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12:38 이경이나 혹 삼경에. - 로마에서는 밤을 4경으로 나누었던 반면 유대에서는 3경으로 나누었다. 본문의 경우는 로마식에 의한 서술로 보이는데 그것은 복음서 다른 곳의 표현이 모두 로마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마 14:25; 막 13:35). 그러나 유대인의 분류법에 따랐다고 보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돌아올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인내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처럼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수록 영적 수면에 취하기 쉬우나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예비하는 마음으로 항상 졸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12:39 너희도 아는 바니. - 문장 초두에 나타나 매우 강조적이다. 이는 제자들이 잘 아는 사건으로 깊은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이‥‥알았더면. - 앞의 비유가 집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종의 신실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본 비유는 집 주인과 도적의 관계를 말하면서 주를 맞이할 성도들의 준비성을 강조하고 있다. '도적'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로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돌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도둑이 물건을 훔치기 위해 집 안에 들어오듯이 예기치 못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마 24:36,42-44; 살전 5:2-4; 벧후 3:10; 계 3 :3).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 옛날 이스라엘의 가옥은 대부분 흙벽돌로 지어졌다. 따라서 도둑은 문이 잘 잠겼다 할지라도 벽을 뚫고 침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은 주인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를 전제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의 재림이 급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시기에 임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함과 아울러 성도들은 영적으로 항시 깨어 있을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다.
12:40 너희도‥‥인자가 오리라. - 35절부터 하신 두 가지 비유의 결론이다. 주의 재림의 일시는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행 1:7). 그러므로 주의 재림의 때는 아무도 예기치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이 요구된다.
12:41 베드로가 여짜오되. - 마태의 병행구절에는 본장의 40절과 42절의 내용이 단절 없이 계속하여 나타난다(마 24:44,45). 그러나 누가는 이 사이에 베드로의 질문을 첨가시키고 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께서 13-21절에서 무리에게도 말씀하셨기 때문에 22-45절의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지, 일반 무리에게도 해당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여튼 누가는 이미 22절에서 이하의 교훈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밝힌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베드로의 질문을 첨가한 것은 22절 이하 교혼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해당됨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12:42 지혜있고 진실한 청지기‥‥누구냐. -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예수께서는 이제 다른 비유 즉 선한 청지기와 악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청지기'(오이코노모스)는 일반적으로 여러 종들 가운데 주인의 신임을 받아 선택되어 주인을 대신하여 집의 가사를 책임지고 주인의 재산과 다른 종들을 관리하는 종을 가리킨다. 이러한 청지기는 상당한 행동의 자유가 있었다. 반면 청지기와 구분되는 '종들'(데라페이아)은 '돌봄' 또는 '섬김'을 뜻하는 말로, 주인의 식탁을 돌보거나 섬기는 일을 하는 종들로서 청지기의 통제를 받았다. 하여튼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고전 4:2)과 '지혜'(눅 16:8), 그리고 '진실'이다. 따라서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따라 맡은 바를 진실과 지혜로 감당하며 충성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충성된 청지기로는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창 15:2)과 보디발의 청지기 요셉(창 39:4-6)을 들 수 있다. 한편 청지기에게 요구되었던 신실한 의무는 12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목회자, 장로, 집사, 교사, 나아가 믿는 모든 자에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시간, 재물, 생애, 재능 따위를 관리하는 영적인 청지기인 것이다.
12:43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한 자에 대한 축복의 선언이다. 사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기가 맡긴 일을 지혜와 진실로 충성스럽게 감당한 종이 여간 미덥고 기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더 큰 일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주께서 오시기까지 그가 맡기신 사명을 잘 수행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충성된 종은 복된 것이다.
12:44 내가 참으로‥‥맡기리라. - 주인이 출타 중에도 재물을 늘리고(마 25:14-17) 종들을 잘 관리하며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청지기에게 임할 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러한 일이 당시 실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충성된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하실 것이며 하늘 보좌에 앉혀 예수와 함께 영원한 왕 노릇을 하게 하실 것이다(마 19:28; 딤후 2:12).
12:45 만일 그 종이‥‥더디 오리라. - 본절 이하 48절까지에서는 42-44절의 신실한 청지기와 반대되는 악한 청지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악한 종'이 불충성한 마음의 동기는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다. 특별히 여기서 '더디' (크로니제이)라는 말은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에서 파생한 말로 '지체하다', '오래 걸리다'라는 뜻이다. 즉 악한 종은 주의 재림의 때가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시간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잘못 사용한 것이다. 이는 청지기적 사명을 망각한 처사로서 그가 신실치 못한 자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노비를 때리며‥‥취하게 되면. - 종이 청지기직을 오해하여 주인의 권한을 그릇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마시고 즐겨 마침내 취해 있게 됨으로 매우 불성실할 뿐만 아니라 폭력, 무절제, 방탕스러움 등으로 그의 삶이 얼룩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악한 종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최후의 심판이 자신의 세대에 오지 않으리라고 여기면서 세상 쾌락에 몰두하여 맡겨진 재능과 시간. 물질 등을 낭비하는 자는 악한 청지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12: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 주인의 돌아올 날에 비유되는 예수님의 재림 때는 전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급작스럽게 임하게 된다. 종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종은 자신이 주인의 귀환 날을 스스로 예상하여 상정하고 자신의 종된 신분을 망각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악한 종의 생각은 마치 재림의 날짜를 추측하는 각종 이단들의 경향과 일맥상통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개인의 죽음으로 임하게 될 심판의 때는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이 개인적 죽음 또한 또 다른 형태의 종말이다. 이렇게 볼 때 소위 재림과 더불어 임하는 종말의 때는 전혀 예기치 않는 시간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더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경고의 말씀이 되고 있다.
엄히 때리고. - 직역하면 '두 조각을 낸다'는 뜻으로, 이는 톱과 같은 것으로 몸을 두 조각내듯이 심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성경에는 톱으로 몸을 자르는 것과 같은 형태의 형벌이 행해진 경우가 더러 있었다(삼상 15:33; 단 3:29), 본절은 결국 게으르고 악한 청지기에게 임할 형벌이 상상 외로 큰 것임을 알려 주는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 - 마 24:51에는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로 나오는데 이는 지옥 형벌을 가리킨다.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많이 맞을 것이요. - 비유가 끝나고 42절부터 시작된 비유의 결론이다. 이러한 본절과 다음절은 형벌에 등급이 있음을 보여 준다. 특권은 항상 의무를 동반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 의무를 등한히 할 때 특권은 오히려 더 큰 화를 가져다준다. 같은 맥락에서, 알고 지은 죄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중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본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을 잘 드러내 준다.
12:48 알지 못하고‥‥적게 맞으리라. - 심오한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령의 계시가 없이는 누구나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선악과 같은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든지 절대적 무지란 없다(롬 1:20,21; 2:14-16),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 죄를 범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12:49-53 복음과 분쟁
앞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성도가 당할 환난 등(1-48절)을 예고한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분쟁과 충돌을 말씀하신다. 이 분쟁과 다툼은 진리와 비진리의 투쟁인데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따르는 자와 비진리를 따르는 자가 분명히 구별될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분쟁과 다툼은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과 핍박으로 다가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던지신 불은 진리를 따르는 성도에 대한 불신자의 적대감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49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이 분쟁의 심각성은 혈연관계마저 깨뜨린다는 사실(52,53절)인데 주님의 진리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며(마 10:37) 그래서 더욱 견디기 어려운 고난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심에 분명하다(사 9:6; 마 21:5; 눅 2:14). 그러나 이 평화는 궁극적인 것이며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는 심판 후에 오는 영원한 평화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필연적으로 진리와 비진리, 신자와 불신자, 선과 악의 분쟁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체험한 성도들은 비진리와의 투쟁을 통해 진리를 확산시킬 사명을 수행해야만 한다. 또한 종말에 직면하게 될 온갖 환난과 시련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세상의 비진리에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마 10:34).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 여기서 '불'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① 성경(Alford). ② 영적 활동(Bengel, Vincent), ③ 심판(Ellicott, Schlatter), ④ 로마의 침략(Clark), ⑤ 신자의 열심으로 인해 신자와 불신자 간에 조성될 적대감(Bruce, Plummer, Gilmour)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 가운데 마 10:34에 비추어 볼 때 ⑤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앞 문구와 마찬가지로 견해가 다양하다. 즉 ①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②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 We He), ③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 Meyer, Stier), ④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등의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 중에 앞 문구와 됫 구절을 연결하여 볼 때 ①의 견해가 적절하다. 즉 예수께서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여 종래에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아직은 그 불이 붙지 않았다는 말이다.
12:50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키는 말이다(막 10:38; 롬 6:4).
이루기까지. - '이루다'(텔레오)는 말은 '하다'라는 뜻으로 목적의식이 분명히 내포된 말이다. 곧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이 우연한 죽음의 결과가 아니라 반드시 성취해야 할 사명에 의한 것임을 보여 준다(Kline).
답답함. - '답답함'(쉬네코마이)은 '같이'(쉰)와 '가지다'(에코)의 합성어로 '억눌린 상태'를 뜻한다. 비록 예수께서는 대속의 죽으심을 위해 십자가를 능동적 지셨으나, 그 길을 걸어가기까지는 참혹한 고난을 이겨내셔야만 했던 것이다(사 53장).
12:51 세상에 화평을‥‥분쟁케 하려함. - 유대인의 메시야 개념은 평화의 왕(사 9:6)이었다. 그와 같이 예수께서도 궁극적으로는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그 평화는 선악을 분리하는 심판 이후에 성취될 궁극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필연적으로 선과 악, 신자와 불신자, 진리와 비진리의 분쟁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분쟁케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12:52 한 집에‥‥분쟁하되. - 51절의 분쟁의 그 성격을 말하고 있는 구절로, 분쟁의 심각성을 잘 보여 준다. 이는 미 7:6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여튼 믿음의 길은 혈연을 우선한다(마 10: 37). 따라서 믿음을 지키다보면 때론 혈연관계마저 깨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0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2:53 아비가‥‥분쟁하리라. - 이 가정은 양친, 혼인한 아들 내외, 미혼의 딸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정에서 불화가 생긴 이유는 한 가정 내에 구성원들의 신앙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세상에서의 핍박뿐만 아니라 심지어 가족 구성원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시련에 직면할 자세를 가져야 한다(롬 8:35; 고후 11:23-27).
12:54-59 시대의 분별과 조속한 회개의 촉구
앞 단락(47-53절)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는 신자와 불신자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신자에 대한 불신자들의 환난과 핍박이 더 심해질 것을 말씀하셨다. 이어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종말의 때를 분별하고(54-57절),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속히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것을 촉구하고 계시다(58,59절).
사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천지의 징조를 연구하여 기상의 변화를 분별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구약의 예언과 말씀을 통해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음에도 불신과 외식에 치우쳐 시대를 분별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에게 약속된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에 빠져 있었다. 물론 종교 지도자들이 이 지경에 빠져 있을진대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암흑과 같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영적 무지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지적하여 기회가 아직 있을 때 속히 회개하도록 촉구하신 것이다. 실로 지금 기회를 놓치고 회개하지 못한다면 오직 준엄한 공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 곧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임박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선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2:54 또 무리에게. - 예수께서는 제자에게 하실 말씀(22-53절)을 마치시고 다시 일반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장소와 시간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 천지의 기후 조건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다. 팔레스틴은 지중해와 접하고 있어서 서쪽인 지중해에서 습도 높은 바람으로 구름이 서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올 것임을 알 수 있었다(Coder).
12:55 남풍이‥‥심히 더우리라. - 여기서 남풍은 '시록코'가는 남쪽 아라비아 광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으로, 사막의 더위를 함께 몰고 오기 때문에 이 바람이 불면 팔레스틴 지방은 매우 덥게 된다.
12:56 천지의 기상은‥‥분변치 못하느냐. - '시대'(카이로스)는 메시야의 초림이나 재림의 때 같이 중요한 사건의 때를 가리킨다. 여기서의 '시대'는 눅 19:44과 연결하여 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심판으로서의 종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자연 현상을 통해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은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야이신 예수 자신을 보고도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었던 당시 바리새인과 같은 무리들을 책망하고 계신 것이다.
12:57 옳은 것을‥‥아니하느냐. - 시대의 징후를 분별치 못함을 책망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옳은 것을 옳게 판단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특별히 헬라어 원문의 본절에서는 '스스로'라는 말이 매우 강조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외식하는 자들의 거짓된 판단에 의존하는 것을 책망하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져야할 책임은 개개인 각자에게 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12:58 길에서‥‥힘쓰라. -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 철저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회개함으로 영원한 심판을 면하라는 의미의 비유이다. 특별히 여기서 '길에서'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곧 살아 있는 동안에, 또는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지금 곧 회개하라는 의미이다.
12:59 호리. - '호리'(렢톤)는 유대에서 통용되는 화폐로서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나오지 못하리라. - 감옥에 있는 채무자가 가장 작은 동전 한 닢까지도 모두 지불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감옥에 있다는 것은 빚을 청산할 능력을 상실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됨을 교훈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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