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장 교회 내의 판단 중지 명령과 사도로서 보인 겸손의 모범 및 분쟁 중지에 대한 결론적 권면
구속사 개관
본장은 넓게는 1:10-6:20까지 계속되는 일련의 고린도 교회의 현안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권면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동시에 좁게는 1:10-4:21까지 계속되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기록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바울의 권면 기사의 전개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0-17은 분열상 자체를 지적한다. 이어서 1:18-4:13은 하나님의 절대적 지혜로 된 십자가의 도의 유일성이라는 논리를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몇몇 측면에서 교회의 분열이 부당하고 불의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끝으로 4:14-21은 결론적으로 조속히 분열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하나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5절은 고린도 교회에 분열이 야기된 원인 중의 하나가 성도끼리 상호 인격 자체에 대한 극단적 판단을 내린 사실에 있음을 직시한 바울이 타인은 물론 자신에 대한 최종적 판단은 그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주권에 위임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위임되어 있음을 직시하고 상호 인격 자체에 대한 최종 판단을 중지할 것을 명령한 사실을 보도한다. 다옴 중반부 6-13절은 서로 교만하여 분열을 일삼는 고린도 교우들에게 그들의 모습과 오직 복음에 헌신하여 실로 처절한 고난을 감내하는 바울 자신을 위시한 여타 사도들의 모습을 비교 제시함으로써 교우들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후반부 14-21절은 지금까지 1:10-4:21까지 진행되어온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권고의 결론 부분으로서 바울이 설립자요 사도로서의 권위나 논리적 당위성을 앞세우기 보다는 믿음의 아비로서의 애끓는 심정으로 분쟁을 종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전반부 1-5절의 판단 중지 명령 기사는 우리에게 유한한 인간이 각자가 자신을 절대자인 양 착각하여 타인과 자신에 대하여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너무도 흔히 발생하지만 기실은 철저히 그릇된 현실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각성을 하게 해준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된 성경이 보여 주는 구속사의 진리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무오의 최종적 판단을 내릴 만한 아무런 근거와 능력이 없는 사실을 깨 닫고 특히 상호의 인격과 관련된 평가와 판단을 유보하는 구속사적 겸손과 지혜를 가져야 하겠다.
한편 중반부의 6-13절의 사도 바울이 분열을 일삼는 고린도 교우들과 대조되는 바을 자신을 위시한 여타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자세를 밝힌 기사에서 우리는 실로 '죽이기로 작정된 자로서 미말에 처하여 온 세계와 역사의 구경거리'가 된 자로서 자신의 현재의 실상을 파악하면서도 더욱더 철저히 오직 복음에 헌신한 사도들의 모습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연히 이런 믿음의 선배들의 피어린 중언으로 값없는 구원을 얻은 우리가 우리의 평안과 부요에 오히려 눈이 멀어 교만해지고 그리고 마침내는 분열을 일삼는 행태가 그 얼마나 가중스럽고 모순된 것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바로 나의 현재의 실상은 무엇인가? 일면으로는 받은 바 평안과 지혜에 감사하며 또 일면으로는 그어떤 고통도 감내하여 믿음의 싸움을 싸우려는 자인가? 아니면 현재의 성도의 지위와 구원의 축복에 오히려 교만한 나머지 스스로를 내세워 주의 은혜를 가리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인가? 본문 앞에서 우리는 그 누구나 중대한 구속사적 자기반성(救蹟史的 自己反省)을 금할 길이 없다.
끝으로 후반부 14-21절에서 우리는 신앙의 선진(先進)으로서 후진을 위하여 끝없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책망하되 언제나 권위와 논리보다는 믿음의 아비로서 믿음의 자식을 대하는 사랑으로 임했던 사도 바울의 모범을 발견한다. 무룻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그 배후에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나 이는 필히 믿음의 앞선 자가 됫선 자에게 가서 전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과정을 경유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한 섭리이다. 그러므로 먼저 선한 아비와 자식이 서로 키우고 서로 돌보며 상호 성숙과 신뢰의 기쁨을 공유하듯이 신앙을 가진 우리는 나보다 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향하여 뜨거운 구속사적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외울 말씀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판단에 대한 교훈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과 사도들의 겸손
6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믿음의 아비로서의 바울의 애끊는 권면
14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본문 & 자료노트
보감-4:1,2 그리스도의 일꾼된 자의 7대 자격
1. 의로운 자(창 39:7-23)
2. 겸손한 자(출 3:11)
3. 지혜있는 자(마 24:45,47)
4.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자(마 25:21)
5. 성령으로 충만한 자(행 6:3)
6. 사람들에게도 칭찬듣는 자(행 6:3)
7. 남을 판단치 않는 자(고전 4:1-5)
보감-4:5,6 사도 바울의 형제에 대한 7가지 모범
1.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줌(행 20:35)
2. 다른 형제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함(롬 1:9)
3.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치 않음(고전 4:5,6)
4. 아비된 심정으로 형제들을 권고함(고전 4:14-16)
5.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함(고전 11:1)
6. 모든 일에 규모 없이 행하지 않고 부지런함(살후 3:7,8)
7. 성도들에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바른 말을 전함(딤후 1:13)
보감-4:5-14 본문에서 성도가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 7가지
1.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을 자기 것인양 자랑함(7절)
2. 배부르나 굶주린 자들을 생각지 아니함(8절)
3. 부유하나 가난한 자들을 생각지 아니함(8절)
4.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왕노릇 함(8절)
5.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김(10절)
6. 스스로를 강하게 여김(10절)
7.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김(10절)
보감-4:1,15,17 참된 종의 모습
주의 종, 즉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아 그의 백성들을 위해 할 일들을 위임받은 자로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일을 한다. 그러면 이 종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자.
특 성
1. 농부: 성도의 심령을 경작함(고전 3:6)
2. 건축자: 성도와 교회를 굳게 세움(고전 3:10)
3. 청지기: 하나님의 사역을 위임받음(고전 4:1)
4. 아버지: 성도를 복음으로 낳고 권면함(고전 4:15)
5. 교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고전 4:17)
6. 종: 성도들을 검손하게 섬김(고후 4:15)
7. 유모: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함(살전 2:7)
원어 연구-4:1, 일꾼, 맡은 자
먼저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테스'( )는 '아래에'라는 뜻의 '휘포'( )와, '노젓다'라는 뜻의 '에렛소'( )에서 파생된 '에레테스'(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휘페레테스'의 본래 의미는 선박 밑창에서 일하는 '하위의 노잡이' 또는 '하급 노잡이'이다. 이에서 재판관이나 어떤 관직의 관료들을 시중드는 자, 곧 종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산헤드린 제사장들을 시중드는 '하속'(마 26:58), 회당장을 섬기는 '종'(눅 4:20), '한 나라의 신하'(요 18:36)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휘페레테스'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만 하며, 고된 일을 감당하는 종을 가리킨다.
한편 '맡은 자'에 쓰인 헬라어 '오이코노모스'( )는 신약 성경에서 10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 )와 '경영하다' 또는 '관리하다'라는 뜻의 '네모'( )의 파생어 '노모스'( )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오이코노모스'는 일차적으로 '집안 일의 관리자' 즉 '집사'를 가리킨다. '집사'란 고대 로마 사회에서 비천한 자유시민이거나 노예에서 해방된 자유민들로서, 부유한 가정에 고용되어 집안의 전반적인 업무 즉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고, 자신의 아래에서 힘든 일을 맡아서 하는 다른 종들(헬, 휘페레테스)에게 일을 맡기고 감독하며, 심지어는 주인이 죽었을 때 성년에 달하지 못한 주인의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고 관리해 주는 일도 하였다. 따라서 '오이코노모스'는 '휘페래테스' 보다는 고상한 의미에서의 '사역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기서 왜 바울은 두 종류의 종을 언급하여 자신의 직분을 설명하고 있는가? 이는 이 단어들에 상관된 전후의 문맥 속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어떤 고된 일이라도 마다않고 기꺼이 순종하는 '하급 노예'(헬, 휘페레테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르침으로써 봉사하는 하나님 교회의 '청지기'(헬. 오이코노모스)가 됨을 말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가져야 할 우리의 바른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돌아보게 된다.
주요 주제-4:5 주의 재림과 종말의 때
벧후 3장 연구 자료 참조
난제 해설-4:5 비판하지 말라
롬 14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 연구-4:6, 아볼로
행 18장 연구 자료 참조
인물 연구-4:17, 디모데
딤후 1장 연구 자료 참조
4:1-5 교회 내의 판단에 대한 교훈
고전 1:10에서부터 시작된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대한 논의가 드디어 본장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처럼 분쟁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는 바울은 본문에서는 분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 판단에 관해 언급한다. 즉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을 세상 지혜로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를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특히 복음 사역자를 인간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파당을 짓게 만들고 분열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김으로써 일체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을 배제해야 된다(1:3,4절). 비록 성도들이 세상적인 평가와 인간적인 판단을 삼가한다 할지라도, 장차 최고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이므로 오로지 그분께 맡겨야 하는 것이다(5절). 그 대신에 복음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사 안일에 젖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2절).
한편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5절)는 말은 마 7:1-5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선과 악을 가려내며 의와 불의를 판별해야 되는 성도의 의무를 포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이것은 세속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본성적으로 부패한 인간들의 판단은 아무리 공정성을 기할지라도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성도들은 절대 공의로우시며 각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의뢰해야만 되는 것이다(삿 11:27; 삼상 16:7).
4:1 사람이 마땅히‥‥여길지어다. - 바울은 전장 후반에서 사도나 세계나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3:21,22). 그런데 본장에서는 전도자들인 자신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대접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이처럼 대조되는 두 개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3장에서 사도들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한 말을 오해하여 혹시 고린도 교인들이 우쭐하여 사도들을 업신여기는 우를 범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의 교인들은 아직 성숙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고전 3:1,2) 바울이 염려한 그러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더욱이 사람을 우두머리로 놓고 시기와 분쟁을 일삼던(고전 1 :12; 3:3) 사람들이 그 우두머리를 상실당하고 나면 오히려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못된 습성이 사람들에게 있는 법이다. 따라서 어린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사도를 사도답게, 전도자를 전도자답게 대접하도록 권면하는 바울의 태도는 시의(時宜) 적절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일꾼. - 바울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사역자를 가리키는 말로 '섬기는 자'라는 의미의 '디아코노스'( )를 사용하였다(고전 3:5). 그러나 본절에서는 '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뜻의 '휘페레테스'( )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의 '일꾼'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노를 젓는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은 아마도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보다 겸손하게 표현하려 한 듯하다. 사실 바울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그의 신분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 여기서 '맡은 자'(오이코노모스)란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 또는 '청지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인류의 구원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골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일을 맡아 하는 청지기'를 지칭한다. 본장 자료노트 참조.
4:2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맡은 자'에 관해서는 1절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충성'(피스토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믿을 수 있는 것'(trustworthy, RSV)으로도 번역된다. 엡 1:1에서는 이것이 '신실'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청지기들에게 일을 맡기시되 좋은 언변이나 세상적 지혜 따위를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가장 먼저 '충성'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충성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감과 사랑과 순종에서 분출된다.
사실 헬라어 원어에서 '신앙'을 나타내는 '피스티스'( )와 충성을 나타내는 '피스토스'( )는 다같이 한 어근을 갖는다.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작은 일이라. - '다른 사람에게나'(휘포 안드로피네스 헤메라스)는 '사람의 날에 의하여'라는 말이다(Robertson). 여기서 '사람의 날'이란 고전 3:13의 '그 날', 즉 주님의 영원한 불 심판의 날과 대조되는 것으로, 바울은 사람의 판단은 인간을 어찌할 수도 없고, 심판한다고 하여도 두렵지 않다는 의미에서 '사람의 날'이라고 풍자적으로 말하고 있다. 실로 인간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인간에게 상벌을 실제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나 다른 세상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신은 그러한
세상 사람들의 편견을 아주 작은 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 하노니. - 바울은 또한 더 나아가서 자기도 자기 자신이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라거나 형편없는 일꾼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다음 절인 4절의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와 연관되는 말이다. 즉 세상에서 바울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고린도 교인들도 아니요 세상 사람들도 아니며, 또한 자기 자신도 아닌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이다. 한편 바울의 이 말은 서로 파당을 만들어 상대방과 상대방의 우두머리로 세워진 자를 비방하기를 일삼던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은 작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바울의 신앙에 있어 자책할 것이 없다는 것인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책할 것이 없다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부름을 받기 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인 자들의 증인을 선 것(행 7:58; 9:1,2) 외에는 이렇다 할 과오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완전했다고는 볼 수 없으므로(롬 3:11,23; 7:24,25)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책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행 23:1).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아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책망 받을 일이 없도록 충성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을 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모든 일을 행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행위가 완벽하다 하더라도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롬 3:23; 5:18)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으며, 하나님만이 인간을 판단하실 수 있지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판단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주시니라. - 인간과 역사와 관습을 판단할 능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그가 인류 중 가장 큰 자이든, 지고한 충성을 바친 하나님의 사역자이든지 간에 그 역시 피조물인 이상에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판단할 권한이 없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심판의 주이신 것이다.
4:5 때‥‥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 여기서 '주께서 오시는 때'란 '심판을 하시기 위해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이다. 이에 대해서는 벧후 3장 연구 자료, '주의 재림과 종말의 때'를 참조하라. 이 재림의 때에 주님은 모든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계 20:12,13). 바울은 이렇게 창조주되시며 심판주되시는 주님이 확실한 심판을 하시기까지 판단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와 동일한 권면을 하였었다(롬 14:10,13). 사실 인간이 상대방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판단력이 온전치 못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서로를 판단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판단은 일을 좋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부끄러워질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롬 14장 자료노트, '비판하지 말라'를 참조하라.
어두움에‥‥드러내고. -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일들을 지칭한다.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는 남을 속이고 약탈하고 심지어는 죽이고도 밝혀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있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은 그 모든 사실들을 심판 날에 밝히 드러내실 것이다(마 10:26; 고후 5:10).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 우리 속담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마음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은 행동으로는 대단히 훌륭한 삶을 살아도 그 마음 속으로는 세상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속을 모르는 인간은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 오직 세계와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숨겨져 있는 인간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실 수 있는 것이다(대상 28:9; 29:17; 욥 7:20; 28:24; 시 33:15; 잠 16:21; 롬 8:27; 살전 2:4; 히 4:12).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마음의 뜻까지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마 5:22,28).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본까지도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 때에 ‥‥칭찬이 있으리라. - '그 때'는 앞부분에서 언급된 '주께서 오시는 날', 즉 '주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 심판의 날에 모든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드러난 그것들의 잘잘못이 가려져 상벌이 내려지는 것이다. 특히 주님의 일꾼으로 충성을 다한 자에게는 주님의 칭찬과 상이 클 것이다.
4:6-13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과 사도들의 겸손
바울은 극심한 교회의 분열을 빚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인간적인 판단의 그릇됨과 모든 것의 최종적인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앞에서 교훈하였다. 이어 본문은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분열의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교만(6-8절)과 사도들이 복음 전파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겸손을 잃지 않았던 태도를 대조시켜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간접적으로 책망의고 있다(9-13절).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먼저 자신과 아볼로가 주의 말씀을 말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모범을 보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항상 말씀에 충실하여 교만하지 말 것과 말씀을 넘어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 것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6절). 실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이다(요 3:27; 약 1:17). 그런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을 망각하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자기도취에 빠지는 영적 교만을 초래하고 있었던 것이다(7절).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라고 그들의 영적 교만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며, 진정 자신이 바라는 것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여 하나님 안에서 참된 풍요를 누리며 그 영광에 자신도 동참하는 것이라 언급한다(8절).
한편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 과정 속에서 겪은 고난과 이 세상의 구경거리로 살아온 비천한 처지를 고린도 교인들의 형편과 대조시키며 말하고 있다(9-13절). 즉 모든 것을 부요하게 누렸던 고린도 교인들과는 달리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세상 지혜에 대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었으며,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11절) 정신적인 고난도 극심했음을(12절) 고백한다. 그러나 숱한 후욕과 핍박과 비방 속에서도 바울은 끝까지 인내하며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그들을 권면하고 축복하는 사도로서의 참된 자세를 지속하였음을 말한다(12,13절).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사도들의 비천한 삶과 고린도 교인들의 부요한 삶을 대조시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사도들을 본받아 겸손히 행함으로 분쟁을 그치고 서로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 지식이 우월하다 생각하여 사도들 없이도 모든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에 빠져있었다. 이처럼 성도된 우리도 혹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나 하나님에 관한 사설을 완전하다 생각하여 스스로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부분적인 지식으로 영적인 일을 쉽게 판단하고 타인을 무시하는 그룻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깨닫는 데 충실하며 또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행 17:11; 벧전 1:22).
4:6 형제들아. - 고전 1:10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 일. -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가리킨다.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를 실례로 하여 분쟁에 대해 교훈한 고전 3:5-4:5의 사실을 가리킨다(Meyer, De Wette, Robertson).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 여기서 '기록한 말씀'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견해가 있다. ① 구약의 말씀을 지칭한다(Bengel, Meyer, Alford). ②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 기록으로 남은 것을 지칭한다(Ch딘sostom, Theophylact). ③ 본서의 앞선 교훈들을 지칭한다(Luther, Calvin, Findlay). '기록한 말씀'이라는 말 자체만을 놓고 보면 ①의 견해가 그럴듯해 보이나 일반적으로 ③의 견해가 취해지고 있으며, 특히 그 중 인용된 글(고전 1:19,31; 3:19,20)이 지목되고 있다(Lightfoot, Harris). 왜냐하면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에 관해 가르치고 있으므로 분쟁하괴 있는 고린도 교회에 적절한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은 '말씀을 떠나 세상 지혜로 너회들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명령의 말이다.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서로 대적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투 헤노스 카타 투 헤테루'( )를 직역하면 '하나는 위로 올리고 다른 하나는 아래로 낮추어'라는 말이다. 분쟁하는 심리는 이처럼 자기들은 지나치게 올리고 상대방은 지나치게 깎아 내린다. 그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당파를 만들어 자기 당은 올리고 상대 당은 낮추어 서로를 비방하며 대적하였던 것이다(고전 3:3). 그런데 이렇게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행위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특별히 여기서 '교만하다'(퓌시오오)라는 말은 본래 '자기를 스스로 높이다'라는 의 미를 가지고 있다. '교만'은 자기를 높임으로써 상대를 낮추어 분쟁을 일으키고, 결국은 상대와 함께 자신도 망하게 한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경고했던 것이다.
4:7 누가 너희를 구별하였느뇨. - 이 구절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너회를 구별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로 보아 '너희를 나누어 분쟁하게 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 분쟁하며 싸우고 있느냐'라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별하셨지 않느냐'는 의미로 보아 '너희는 선별된 자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별하여 구원의 은혜를 주신 분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왜
그 한 하나님 밑에서 분쟁하며 다투고 있느냐'라는 해석이다. 어느 쪽의 해석을 취해도 무방하며, 어느 쪽을 취해도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하나, 곧 분쟁에 대한 책망이다.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바울의 두 번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네가 받은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않느냐? 그런데 왜 서로 교만하여 자랑하느냐'라는 의미이다. 실로 인간이 가진 모든 것, 즉 그의 생명, 호흡, 재산, 친구 등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요 3:27; 행 17:24-29).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이야 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자랑하느뇨. 바울의 세번째 질문이며, 두번째 질문과 성격이 유사하다. 즉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지 않았느냐(고전 3:11,12). 그런데 왜 받은 것이
아니라 너회가 스스로 만들어 취한 것처럼 행색하며 자랑하느냐'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슬프고도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이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창조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치미 딱 떼고 '창조주가 어디 있느뇨? 내가 주인이며 내가 왕이다'라고 하는 이 태도가 인간이 범죄하게 된 원인이요(창 3:4,5), 하나님의 지혜요 자신에게 구원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련하게 보고 거부하게 된 까닭이요(고전 1:18,23), 고린도 교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가 분쟁하게 된 이유이다(고전 1:12; 3:3).
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 본절은 풍자적인 말이다. 즉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졌다고 했으면서도(고전 3:1,2) 본절에서는 부요한 자들이라고 비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바울은 잠시 후에 자신이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만물의 찌끼 같은 자라고 하면서 바울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정반대로 표현하여 극한 풍자를 나타내고 있다(9-13절). 따라서 본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로 영적으로 배부르고 부요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라는 말이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은 고린도의 경제적 번영이 가져다 준 풍요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죄악된 요소들과 싸워 나가기 보다는 그들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상태에 빠져 있었고,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는 심한 빈곤에 처해 있었다.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 '왕 노릇하였다'는 것은 '지배했다'는 말인데,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의 이름을 각각 내 세우고는 있었지만(고전 1:12) 실제적으로는 내세운 그들을 모두 제치고 자신들이 서로를 지배하고자 싸웠던 것이다.
우리가‥‥참으로‥‥원하노라. - 여기서 '참으로‥‥원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펠론'( )은 소원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불변사로 '그렇게 되었으면', 또는 '그렇게 되었으면 좋으련만'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는 너회가 진정한 왕 노릇 하기를 소망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너희와 함께 그 영광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된다(Robertalon). 즉 바울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진정한 왕 노릇하기를 소망했다. 그렇게 될 때 그도 역시 그들과 더불어 왕 노룻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전도자들은 여전히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처지였다. 이는 아직 고린도 교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왕 노릇할 수 있는 종말이 임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하여 남을 판단하고 지배하려 하고 있음을 바울은 본절을 통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4:9 죽이기로 작정한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다나티우스'( )로 신약 성경에서는 본절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용어이다.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뒷부분의 '구경거리'라는 용어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죽도록 작정된 죄수를 지칭하는 말 같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왕이 된 것과 같이 자만해 있는 것에 반해 자신을 비롯한 전도자들을 관객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 나오는 사형수에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지도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미말에 두셨으매. - 하나님이 사도들을 '미말'(에스카토스)에 두셨다는 것은 인간들 중에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위치에 두셨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어 나오는 '만물의 찌끼'와도 같은 말이다. 사도들은 실로 매맞고, 갇히고, 재판석에서 갖은 부당함과 모욕을 받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행 5:18; 7:58-60; 9:23-25, 29; 16:23,24).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천사'(앙겔로스)에 아무 수식어가 없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선한 천사'로 해석된다(Meyer). 그러나 본절에서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Bengel, Godet).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세계', 곧 '전 우주'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종들은 영계(靈界)와 지상계(地上界)를 막론한 전 우주적 장소에서, 마치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죄수처럼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4:10 우리는… 미련하되 너희는…지혜롭고. - 본절에서 다시 풍자적 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본절의 풍자는 삼중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도들은 미련하되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롭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미련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는 그리스도를 전하기 때문이다(고전 1:18,21).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고로'라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고린도교인들이 지혜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인(고전 2:7)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진정 지혜로웠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육의 일을 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도를 전한 사도들이 더 지혜롭고 (1절) 고린도 교인들이 미련한 것이다(고전 3:1-3).
약하되…강하고. - 두 번째 풍자로 행동이 대조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온유하게 복음을 전하고 저항없이 박해를 받는 사도들은 약하게 보였다. 반면 남을 판단하는 고린도교인들은 강하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정말 약했다면 그 험난한 전도자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강했다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실제로는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강했고 고린도 교인들은 약했다.
존귀하되…비천하여. - 세 번째 풍자로 신분이 대조되고 있다. 사도들없이 왕 노릇한 고린도 교인들은 존귀했다(8절).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고 다니는 사도들은 천했다. 하지만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비천하게 된 것이며,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교만하게 자기를 높이고 존귀한 것처럼 행세한 것 뿐이었다. 한편 사도들이 이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미련하며 약하고 비천하게 된 것은 인간의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방편이 되며, 그들이 누릴 영광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4:11 바울이 전도자로서 얼마나 많은 고난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러한 본절은 배부르고 부요하며 왕 노릇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실로 사도들은 복음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며 힘벗고 매맛을 뿐만 아니라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했고,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 때문에 배부르고 부요하며 왕 노릇까지 한 것이다. 경남 모순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비정상적인 것이요. 자신들의 실제 형편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작태라 할 것이다.
바로 이 시간까지. - '고린도 교인들에게 먼지를 쓰고 있는 그 시간까지' 곧 고린도교인들이 이미 배부르고 부요하며 마치 팔이나 된 것처럼 행세하는 이 순간까지를 가리킨다.
주리고 목마르며. - 인간 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 할 수 있는 의·식·주 가운데 '식'(食)을 충족하지 못함으로써 오는 고난이다. 인간의 설움 중에 가장 큰 설음의 배고픔이다. 그런데 바울은 전도자로서 배고픔의 고난에 수없이 직면했던 것이다.
헐벗고. - 의·식·주 중 '의'(依)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은 입을 것도 풍족하지 않아 고생했던 것 같다.
정처가 없고. - 의·식·주· 중 '주'(住)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형제들에게 잠자리의 신세를 졌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안정된 처소에서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낙을 누리지 못했다. 여기에 바울은 매를 맞는 육체적 고통까지 겪어야만 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실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으며, 강도와 동족과 이방인들로부터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다고 한다(고후 11:23-26). 실로 바울이 당한 고난은 고난의 극치라 하겠다.
4:12,13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 바울이 의·식·주에 궁핍했던 것은(11절) 그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성도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친히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그의 생계를 유지했다(행 18:3;살전 2:9; 살후 3:9). 그만큼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복음 전파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니 배고프기도 하고 헐벗기도 했던 것이다.
후욕을 당한즉…권면하니. -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행한 사랑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훈(마 5:38-44; 눅 6:27)에 대한 직접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 여기서 '더러운 것'(페리카탈마)이란 청소하면서 모은 쓰레기를 지칭한다. 특히 이 말은 쓰레기 중 '먼지'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또한 '찌끼'(페립소마)는 그대로 직역하면 '사람의 때'를 지칭하는 말이다(Godet). 즉 바울은 자신을 쓰레기의 먼지요 사람의 때와 같이 비천한 데 처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울이 험난한 삶 속에 있음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이로 볼 때 지금 바울이 얼마나 힘든 상태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4:14-21 분쟁 해결을 위한 바울의 부성애적 권면
지금까지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거리였던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그 원인이 된 문제들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교회 분열의 부당성을 논하였다(고전1: 10-4:13). 이제 본문에서는 본서의 첫 주제인 교회의 분열과 관련된 모든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해서 결론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조속히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된 것을 권면한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바울은 풍자적 표현을 통해 고린도교인들의 교만과 분쟁을 엄하게 책망한 바 있는 앞단락(6-13)절)과는 달리, 그와 같은 질책을 멈추고 그 대신에 사랑 넘치는 권면을 통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겸손히 바울 자신의 신앙적 모본을 따르도록 이끌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랑의 권면을 바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믿음의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의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양육했던 바울로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의 자녀로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14,15절). 바울은 바로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의 아비로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16절). 물론 바울의 이 권면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파에 속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당한 자신의 고난과 겸손 및 사랑의 실천을 본받으라는 권면이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인 것이다.
한편 본문의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파송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17-21절). 즉 바울은 본서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고 권면함과 아울러, 디모데로 하여금 그들을 올바르고 성숙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해 얼마나 큰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디모데의 파송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자칫 바울 자신이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고 자신은 편지로만 큰 소리치는 자라고 오해하게 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일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을 강조하여 혹 있을지 모르는 고린도 교인들의 그같은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고 있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시기와 분쟁을 일삼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하기 위해 바울은 서신을 보내고 사람을 파송하며 방문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인도하는 지도자의 올바른 자세를 제시하는 바 교회의 지도자는 교회의 어려움을 극복케 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케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엡 4:11, 12 ; 살전 2:11). ② 복음을 위해 극심한 고난을 당했으나 끝까지 인내하면서 겸손함을 보인 바울은(4:11-13)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16절). 이와 같이 당당하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외쳤던 바울처럼 우리도 항상 우리 생활을 말씀으로 다듬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빌 1:27-30).
4:14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이제까지 심한 풍자까지 사용하며 격하게 책망하던 바울은 본절에서 갑자기 어조를 부드럽게 하여 사랑의 말로 왜 자신이 그토록 책망했는지 설명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위로한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그토록 책망한 것은 단순히 바울이 분노하여 책망만함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책망을 듣고 뉘우치며 더욱 온전한 데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함 같이 그러한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역동적인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바로 그러한 사랑을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품고 있었던 것이다(고후 6:13; 살전 2:11).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이유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더욱 책망했던 것이다. 사람은 사랑이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권면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권면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부모의 사랑은 그 강도가 더욱 심한 것이다.
4:15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여기서 '스승'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 )는 '아이를 돌보는 자'라는 뜻으로 이 말은 동양식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와 같은 맥락에서의 스승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가정교사' 정도의 의미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갈 3:24에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다. 즉 본문의 '스승'은 자기 제자의 인격과 장래를 책임지고 '양육하는 자'가 아니라 그저 뒤를 돌봐주고 간단한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에 불과한 존재이다. 그리고 '일만'은 '많다'라는 의미의 과장법적 표현이다. 따라서 '일만 스승이 있다'는 말은 '제자의 인격과 장래는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가르치려는 자는 많다'는 의미이다. 반면 '아비'는 언제나 한 사람이다. 한 아이에게 여러 아비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신자를(고전 3:1-3) 사랑하여 그의 인격과 장래를 염려하며 '양육하는' 아비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양육하는 작업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의 영적 아버지이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고린도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11-13절).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양육하는 것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갈 4:19). 물론 궁극적으로 신자를 만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양자를 탄생시키는데 있어(롬 8:15,23) 해산의 고통을 당하는 것같이 수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도와 수고로 낳은 영적 아들이었다(행 18:1-18).
4:16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여기서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모범으로 삼아 그의 행실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자칫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파에 들어 오라'는 오해의 말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동일한 권면을 여러 다른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하였는데(갈 4:12; 빌 3:17; 살전 1:6; 2:14; 살후 3:7,9), 이 말의 뜻은 결코 바울파에 소속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수많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11-13절)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았다(고전 2:2; 빌 3:12). 그리고 그러한 바울은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4절). 이렇게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을 본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을 본받으라고 담대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고전 11:1).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니 아볼로니 하며 그 이름을 내세우고 분쟁하였으나(고전 1:12) 사실상은 자신들이 내세운 사도들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8절주석 참조. 따라서 바울파의 사람들이 바울을 따른 것이 아니므로 본문의 내용이 바울파에 가입하라는 권유는 분명 아니다. 바울은 오직 아비의 마음으로, 고린도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본 받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모본으로 내세운 것이다.
4:17 이를 인하여. - 16절의 내용, 즉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이다(Meyer, Alford, Hodge, Findlay). 혹자는 15절의 내용과 연결시켜 이것을 '아비가 되고자 하여'로 보나(Chrysostom) 문맥상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 -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영접하고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된 사람으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에는 동행하였다(행 16:1; 딤전 1:2; 딤후 1:2). 디모데에 대해서는 딤후 1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고린도 교인들과 동일하게 디모데도 바울의 영적 아들이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들과는 다르게 그는 신실한 신앙인이 되어 이미 신령한 자와 같이(고전 2:15)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다(고전 16:10). 아마도 이렇게 대조되는 면이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도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때 디모데는 바울의 명에 의해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를 향하고 있었다(행 19:22; 고전 16:10). 물론 본서는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에 도착하도록 먼저 보내어졌다.
저가 너희로 하여금…생각나게 하리라. - 바울이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목적이 나타나고 있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바울 자신이 각처 각 교회에서 행한 것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생활을 했는가를 가르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본받도록 하려는(16절)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디모데는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설사 고린도를 방문했다 할지라도 그의 방문과 가르침은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 고후 1:1 주석 참조.
4:18 어떤 이들은…교만하여졌으나. - 여기서 '어떤 이들'은 아마도 바울을 반대하는 파당의 사람들 중에서보다 분파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며(고전 9:1-3), 바울이 철학에 미숙하여 뛰어난 헬라 문명을 보고 주눅이 들어 다시는 자신들에게 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교만을 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후 10:10). 또한 이들은 지나치게 헬라의 문화를 숭상하여 교회 내에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즉 세상의 지혜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고전 2:1-5),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고전 3:1-3에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심히 책망했었다.
4:19 주께서 허락하시면. - 이 말은 신약의 전도자들이 자주 애용하던 말로(행 18:21;롬 15:32; 고전 16:7; 히 6:3; 약 4:15), 주님에 대한 깊은 순종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은 모든 인간의 행위와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행 17:25,26),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들은 모든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순종하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겸손한 자세이다.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언제든지 고린도 교회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바울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는 자들(18절)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교만한 자의…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 바울을 깎아 내리며 그가 다시는 고린도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던 교만한 자들은 말에 매우 능숙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말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만들 뿐이다(고전 1:17). 왜냐하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미련한 세상의 것이요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27-29; 2:14 주석 참조. 세상 지혜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 능력도 되지 못한다(고전 1:25).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신령한 자만이(고전 2:13,15) 믿음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능력'(뒤나미스)이란 '말'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각양의 기적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Calvin, Morris).
4:20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아아 투 데우)는 미래적인 것과 현재적인 것의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된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도래할 완성된 하나님의 왕국을 말하며,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중생한 성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령이 지배하는 평강의 상태인 동시에 그러한 성도들의 집합체인 신앙 공동체, 즉 현재의 우주적 교회 공동체를 지칭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눅 서론 특별자료 본절에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서 서는 후자의 현재적 의미에서의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라는 현재적 교회를 놓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인간을 구원케 하고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셔 그를 지배하게 하며, 또한 신령한 자가 되게 하고 그러한 신령한 자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확장시키며 평강케하는 것은 '인간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말로써 왕 노릇 하였다(8절).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의 왕 노릇은 거짓된 왕 노릇이 분명하다.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회에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즉 그는 매와 사랑, 두 가지를 제시하며 어떤 방법으로 고침 받기를 원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는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을의 이제까지의 권면을 무시하고 계속 시기 와 분쟁을 일삼는다면 매를 들고 갈 것이요, 뉘우치고 화합한다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겠다는 바울의 최후 통첩이다. 그러나 바울의 깊은 마음에는 가능하면 사랑으로
갈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14절).
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브도스'( )는 여행자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가리키는 용어로(마 10:10; 막 6:8), 히브리서에서는 '왕의 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히 11:21)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채찍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온유한 마음. - 직역하면 '온유한 영'(the spirit of meekness)이다. 그래서 이것이 '성령'을 지칭하는지(Chrysostom, Meyer, Hodge) 아니면 '바울의 마음'을 지칭하는지(Findlay, De Wette, Robertson)는 확실하지 않다. 대개 '영'(프뉴마) 앞에 형용사가 있으면 '성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데, 본문에는 형용사가 없으므로 '바을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