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 문경 허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文敬許公神道碑銘 幷序〕
허씨(許氏)는 경주(慶州) 하양현(河陽縣)에서 대대로 살았는데, 허강안(許康安)부터 비로소 족보에 보인다. 그 후 7대에 대장군 허유(許裕)가 청렴하고 엄격함으로써 대대로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공은 대장군의 현손(玄孫)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수(綏)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냈고 자헌대부 이조 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증조모 안씨(安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윤창(允昌)으로,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냈고 숭정대부 찬성의정부사(崇政大夫贊成議政府事)에 추증되었다. 조모 이씨(李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귀룡(貴龍)으로, 개성윤(開城尹)을 지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추증되었다. 비(妣) 이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도관(都官)의 외조인 문성공(文成公) 안(安) 선생 유(裕)는 공자 이하 70제자의 상을 얻어, 처음으로 국학을 세우고 노비를 두어서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지냈다. 그러므로 도관이 제사 의례에 익숙하였고 예절을 잘 알았으며 행실이 선량하고 반듯하여 외조 안 선생의 풍도가 있었다. 고려 시대부터 사대부들은 모두 불교를 받들었으나 허씨는 홀로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예의를 좋아하였으니 이는 도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공의 휘는 조(稠)이며 자는 중통(仲通)으로, 어려서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써 문장이 있었다. 태조로부터 명을 받아 좌보궐 지제교(左補闕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봉상시 승(奉常寺丞)으로 개임되어, 6년 있다가 성균관 전부(成均館典簿)로 옮겼다.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사헌부에 들어가 잡단(雜端)이 되었는데, 언사(言事)로 죄를 입어 완산부 판관(完山府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얼마 안 되어 부름을 받아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배수(拜授)되었다가 내서사인(內書舍人)으로 옮겼는데, 또 어떤 일로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직집현전 겸 세자좌문학(直集賢殿兼世子左文學)으로 옮겼다가 경승부 소윤(敬承府少尹)으로 개임되었다. 이듬해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세자를 따라 명나라에 조회갈 때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었다. 세자가 돌아와서 우보덕(右輔德)으로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가 되었다.
조 문충공(趙文忠公) 준(浚)이 순군옥(廵軍獄)에 갇혔을 때 공이 연루되어 춘주(春州 춘천(春川))에 유배되었는데, 몇 개월 있다가 교서를 내려 특사하고 경승부 윤(敬承府尹)을 제수하였다. 예조좌우참의 겸 의례상정제조(禮曹左右參議兼儀禮詳定提調)로 옮겼다가 이조로 옮겨 들어와 참의가 되었다. 병조 참의에 개수(改授)되었다가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예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봉상시제조(禮曹參判兼藝文館提學奉常寺提調)로서 외직으로 나가 개성부유후 겸 경기관찰사(開城副留後兼京畿觀察使)가 되었다.
장헌왕(莊憲王 세종(世宗))이 즉위하여 공안부 윤(恭安府尹)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승진하였다. 4년 뒤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개임되었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 6개월 후에 다시 참찬 겸 세자빈객(參贊兼世子賓客)에 임명되었다. 선덕(宣德) 원년(1426, 58세)에 다시 이조로 들어가서 판서가 되었다. 3년 뒤에 판중군 도총제부사(判中軍都總制府事)에 올랐고 찬성의정부사(贊成議政府事)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이조로 들어가 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가 다시 예조 판서를 겸하였다. 정통(正統) 3년(1437, 69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에 임명되었다가 좌의정 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로 승진하였다.
홍희(洪煕)ㆍ선덕(宣德) 이래로 천자가 명성(明聖)하여 나라 안에 일이 없었다. 장헌왕이 보위에 오른 지 30년 동안, 공경히 황조(皇朝)를 받들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지치(至治)를 널리 펼치었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에 독실하였으니 공은 일찍이 상서(庠序)의 가르침을 융성하게 하고자 하여 명분(名分)을 엄숙히 하고 상제(喪祭)를 바로잡았으며, 불교를 물리치고 옛 제도를 준수하였다. 그러므로 보궐(補闕)에서부터 정승이 되어서까지 조석으로 풍간하고 의론함에 일찍이 먼저 치국의 법도를 밝히고 권모술수를 몰아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모든 것이 선왕의 정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공이 《속육전(續六典)》을 수찬(修撰)하고, 임금은 오로지 신하에게 일을 맡길 것과 형벌을 관대하게 할 것과 아첨하는 행위를 끊을 것을 굳게 권한 것은, 국가 만세를 위한 구상으로 황조와 함께 태평세월을 누리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왕을 보필할 인재라고 하였다. 처음에 성균관이 학사(學舍)를 세우지 못하니 공이 서(書)를 올려 이르기를,
“배우는 자들이 봄에는 시를 외고 여름에는 현악기를 타는 것이 옛날의 제도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학사를 세우지 않으면 배우는 자들이 비록 현송(絃誦)을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세종이 이에 학사를 세우기를 명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옛날에 성왕(聖王)은 사학(四學)을 세워 예악(禮樂)을 가르쳤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미 태학(太學 성균관)을 세웠으니, 마땅히 하교하시어 또 사학(四學)을 세워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예악을 익히도록 하소서.”
라고 하니 장헌왕이 그 말을 따라 또 유사에게 명하여 사학을 세우게 하였다.
백성 중에 현령의 범법(犯法)을 고발하는 서(書)를 올린 자가 있었다. 공이 계(啓)를 올려 이르기를,
“예(禮)는 백성들의 무례를 방비하기 위하여 존비(尊卑)의 분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귀천에 등차가 있다.’ 하였으니 이를 이른 것입니다. 지금 아전과 백성들이 그 현령을 미워하여 하나의 하자를 잡아내면 곧장 고발하는데, 만일 그를 방비함이 없다면 임금은 그 신하를 거느릴 수 없고 부모는 그 자식을 기를 수 없을 것이니, 그 방비함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장헌왕이 하교하여 아전과 백성으로서 그 현령이나 관찰사를 고발하는 자는 모두 죄를 받게 하였다.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이 돌아가시자, 신하들은 참최(斬衰) 3년복을 입되 국장을 치르고 나서는 참최복을 벗기를 의론하니공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임금의 초상에 삼으로 만든 수질(首絰)과 요질(腰絰)을 두르고 짚신을 신는 것은 세자에서부터 경사(卿士)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이는 임금과 신하가 다 같이 참최복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시어 노끈으로 갓끈을 단 관을 쓰고 그 상제(喪制)를 마치려고 하시는데, 신하들은 최복을 5개월 입고서 곡(哭)을 마치자마자 길복(吉服)을 입어서야 되겠습니까? 청컨대 신하들로 하여금 원묘(原廟)에서 제사를 모시고 모두 최질(衰絰)을 입어서 3년상을 마치도록 하소서.”
하니 교시하기를,
“옳다.”
하였다.
이듬해 4월(1423, 세종5, 55세)에 천자가 내관 유경(劉景)과 예부 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자가 광효전(廣孝殿)에 들어와서 백관이 모두 최질(衰絰)을 입고 왕의 제사를 모시는 것을 보고는 하례하여 말하기를, “이는 예에 합당합니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여러 공신들이 태종을 위하여 절에 가서 재(齋)를 베풀었는데 이름을 수륙(水陸)이라 하였다. 공이 계(啓)를 올려 이르기를,
“예에 대부(大夫)는 감히 제후를 제사하지 못합니다. 지금 여러 공신들이 비록 국가에 충성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어찌 감히 불교의 예로써 선왕을 제사하겠습니까? 송나라의 복녕전(福寧殿)에서 수륙재(水陸齋)를 베풀고 한림학사가 재문(齋文)을 지은 것은 예의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하물며 공신들이 선왕의 위패를 불단(佛壇)의 하단에 시설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무례하단 말입니까? 대저 단(壇)과 묘(廟)에서 제사하는 예는 바른 제도가 있어서 넘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유술(儒術)을 따르시어 경행승(經行僧)을 파하셨거늘, 유독 공신들이 오히려 선왕을 위해 수륙재를 베푸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잘했다고 칭찬하고 수륙재(水陸齋)를 파할 것을 명하였다.
의론하는 자들이 부인복(婦人服)을 개조하기를 청하니 공이 말하기를,
“《의례》에 ‘여자는 차(次)로 머리를 꾸미고 순의(純衣)에 훈염(纁袡)를 입는다.’라고 했으니, 차(次)는 다리〔髢〕이고, 순의는 명주옷이며, 훈염은 치마 아래 가선을 두른 것입니다. 순의를 말하고 순상(純裳)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순의의 밑에 훈염으로 치마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즉 여자는 순의에 훈염을 입는 것이 옛 제도에 합당합니다. 신이 사신을 받들어 일찍이 궐리(闕里)를 지나가면서 공자님 사당의 벽에 부인의 도상(圖像)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순의와 훈염이 본조 부인의 복식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옛 제도를 오히려 증명할 수 있으니 지금 고쳐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니, 상이 그렇게 여기어 마침내 부인복을 고치지 않았다.
참찬(參贊) 김점(金漸)이 장헌왕에게 친히 죄수를 심문하기를 권하였다. 공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왕제(王制)〉에, ‘사구(司寇)가 듣고 왕에게 보고하며, 왕은 삼공(三公)에게 명하여 참여해서 듣게 하고, 세 번 용서한 후에야 형을 단행한다.’라고 했으니, 옛날의 왕은 직분을 나누고 관직을 주어서 각기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주관》에 이르기를, ‘각기 그 법을 시행하여 옥송(獄訟)을 의논한다.’라고 했으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 참찬이, 죄수를 끌어내어 전하께서 친히 결단하기를 청하는 것은 치체(治體)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니, 장차 유사를 어디에 써먹겠습니까?”
하니 장헌왕이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점이 또 말하기를,
“임금의 직무는 마땅히 스스로 총체적으로 주관해야 하며 진실로 신하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니 공이 논박하기를,
“옛날의 명철한 왕은 어진 이를 구하는데 힘쓰고 남에게 일을 맡기면 편안히 여겼습니다. 〈열명(說命)〉에 이르기를, ‘공손하고 침묵하여 도(道)를 생각하였는데, 꿈에 상제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내려주셨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고종(高宗)이 어진 이를 구하는데 힘썼기 때문입니다. 〈필명(畢命)〉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공적이 선왕의 세대보다 많으니, 나 소자는 의상을 드리우고 손을 마주 잡고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노라.’ 하였으니, 이는 강왕(康王)이 남에게 일을 맡김을 편안히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신하에 대하여 일을 맡겼으면 의심하지 말 것이며, 의심스러우면 일을 맡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마땅히 대신(大臣)을 가려 뽑아서 육경(六卿)을 거느리게 하여 그 성취를 책임 지워야 하며, 안으로 권수(權數)를 가지고 아래로 신하의 직무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니 장헌왕이,
“좋다.”
하였다. 김점이 매우 노하니, 공이 얼굴빛을 더욱 온화하게 하여 차근차근히 분별하여 말함으로써 그의 주장을 꺾었다. 장헌왕이 이 일로 그의 어짊을 알았다.
앞서 공이 구임법(久任法)을 세우기를 청하니, 집현전(集賢殿)에서 불편하다고 하였다. 공이 극력 말하기를,
“순 임금이 어진 이를 임용하여 천하를 다스린 데는, ‘세 번 고과(考課)한 다음 능력 없는 자를 내치고 현명한 자를 승진시킨 것’이 그 요체가 되었습니다. 이는 구공(九功)이 펴진 까닭이요, 구가(九歌)가 이루어진 까닭입니다. 지금 신이 구임법을 세우기를 청하니 의론하는 자들이 떠들어 댑니다. 혹자는 백성에게 해가 된다고 하고 혹자는 선왕의 법을 고칠 수 없다고 하며 다른 의견들이 벌떼같이 일어나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의 의견을 행하시어 전곡(錢穀)을 주관하는 자는 3년, 군현(郡縣)은 6년으로 그 직책을 오래 하게 한 후에 업적을 상고하시어 출척(黜陟)을 밝히소서.”
라고 하였다. 상이 공에게 명하여 정밀하게 법을 세워 굳게 지켜서 변하지 않게 하니, 중외(中外)가 편안하여 만민이 업(業)을 즐거워하였으며 관리들은 직책을 받들기를 더욱 삼갔다.
공이 말하기를,
“자고로 국가가 법을 가볍게 정한 경우는 그 명운(命運)이 길었고, 법을 무겁게 정한 경우는 그 명운이 짧았다. 국가의 명이 길고 짧음은 오직 법의 경중(輕重)에 달려있는 것이다. 지금 국가가 천명(天命)을 받은 지 백년이 되어서 인의를 행하고, 형벌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을 세움에 오히려 무거움이 있는 것은 나라의 명맥을 선양하는 방법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육전(六典)》을 개정(改定)하여 무릇 죄인으로서 극악무도한 자가 아닌 경우는 처자를 잡아들이지 않고, 연좌되지 않은 경우는 형제ㆍ자손ㆍ종족ㆍ인척들 모두 금고(禁錮)하지 않으며, 간관(諫官)ㆍ시종(侍從)ㆍ사대부로서 일에 연루되어 장형(杖刑)에 해당된 경우는 모두 속죄(贖罪)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준엄하고 각박한 형정(刑政)이 깨끗이 없어졌고 형벌이 비로소 바르게 되었으며 어진 덕이 무궁히 베풀어졌으니, 여기에는 공의 힘이 컸다.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 등이, 악장(樂章)을 지어 성상의 수문(守文)의 덕을 노래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이에 맹 문정공(孟文貞公) 사성(思誠) 등과 더불어 다투어 아뢰기를,
“주송(周頌)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과 〈집경(執競)〉은 모두 강왕(康王) 이후의 시입니다. 주공이 음악을 만들고 시를 노래할 때 한번도 성왕의 덕을 찬미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한(漢) 고조(高祖)가 처음에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를 지었고 무제(武帝)가 또 〈상재유(象載瑜)〉와 〈천마시(天馬詩)〉를 지었으며 당 태종이 〈칠덕무(七德舞)〉를 지었으니, 이는 당세(當世)를 찬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王者)가 중화(中和)의 덕을 세우고 가무(歌舞)를 만들어 만세에 남기는 일에 있어서, 어찌 한당(漢唐)의 고사를 따를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주송을 의칙(儀則)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상이 그 말을 받아들여, 관각에 명하여 당시를 기리어 악장을 짓는 것을 하지 말도록 하였다.
공은 일찍이 국가의 이해를 밝혀, 눈앞에 보이는 공은 구하지 않았고 사소한 어짊에 힘쓰지 않았다. 처음에 장헌왕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에게 명하여 파저강(婆豬江)에 있는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하게 하였다. 공이 간하여 이르기를,
“만주(滿住)는 사납고 교활한 종족인지라 대대로 무리를 지어서 그 원수를 갚으니 죄는 마땅히 정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禮)에, 제후가 궁시(弓矢)를 하사한 후에 정벌하고 부월(斧鉞)을 하사한 후에 죽입니다. 지금 천자께서 그 정벌을 명하지 않으셨으니 만주가 비록 큰 죄를 지었다고 하나 어찌 정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있다가 최윤덕이 파저강에 들어가서 그 인구(人口)들을 잡아오니 이만주가 달아났다. 천자가 듣고 즉시 칙서를 내려 인구를 모두 돌려보내게 하였다. 홀라온(忽剌溫)이 몰래 만주와 결탁하여 북변을 침입하니 장헌왕이 하교하기를, 그들을 불러서 위무하라고 하였다. 공이 또 간하여 아뢰기를,
“홀라온은 각기 흩어져 있어서 기미(羈縻)할 방도가 없습니다. 또한 천자께서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여 외요(外徼)에 소속시켰으니, 지금 전하께서는 의리상 사적인 교유를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찌 사람을 시켜서 불러 위무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20년 후에 천자가 홀라온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우리나라가 동산(董山)을 초무한 흔적을 얻었다. 이에 형과급사중(刑科給事中) 진가유(陳嘉猷)에게 명하여 칙서를 내려 경계하였다.
대마도의 왜노 상인 수천 명이 바닷가의 여러 군현에 섞여 살면서 수시로 출입하니 공이 계(啓)를 올려 말하기를,
“왜노는 음험하고 교활하여 야심을 가지고서 우리나라의 틈을 엿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내쫒지 않고 자애를 베풀어 키워서 그 소굴에 안주하게 한다면, 그 세력이 더욱 커지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장헌왕이 하교하여 그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백여 년 후에 왜노가 동래관(東萊館)에 여러 해 동안 살면서 국가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사대부들이 지금까지도 공이 멀리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을 탄복하고 있다.
공이 예조 판서를 겸하고 있을 때 일찍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문안 인사를 빈번히 하였다. 재상이 되어서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병이 위독하여 도승지를 보기를 청하니, 상이 측은히 여기어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가서 보게 하였다. 공이 좌우를 물리치고 김돈과 더불어 국가의 중대사를 얘기하였는데 한 마디도 개인적인 일에는 관계되지 않았다.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린 햇수는 71세였다. 부고를 듣고 장헌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하였으며, 3일 동안 육식(肉食)을 끊고 조회를 파하였다. 조제(弔祭)를 내리시고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공이 처음에 고려 우왕 9년(1383, 1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으며, 병과에 급제하여 전의승(典儀丞)에 보임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공정왕(恭定王 태종(太宗))의 지우를 입어 비로소 이조 정랑(吏曹正郞) 벼슬을 받았다. 그때 공정왕이 문신부(文臣簿)를 열람하다가 공의 이름을 발견하고 하교하기를, “이조(吏曹)에 적합한 사람을 얻었다.” 하고 마침내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공정왕이 친히 사냥을 나가서 군현(郡縣)에 영을 내려 강무장(講武場)을 두도록 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공정왕에게 말하기를, “강무(講武)는 비록 폐할 수 없으나 전하께서 말을 타고 들판을 달리시니 맹수들이 어찌 우모(羽旄)를 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정왕이 감동하여 마침내 사냥을 그만두었다. 공정왕이 일찍이 장헌왕에게 이르기를, “허모는 진정한 재상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장헌왕이 공정왕을 이궁(離宮)에서 모시고 잔치를 열었는데, 공정왕이 손으로 공의 어깨를 짚으며 장헌왕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주석(柱石)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조정에 있으면서 보익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수군(水軍)을 구휼하고 평안도 군현의 전조(田租)를 감하고 경기도 빈민의 부역과 조세를 덜어주기를 건의하였다. 또한 성을 수축할 관원을 두어 먼저 빈강(濱江)에 7진(七鎭)의 성을 축조하기를 청하였는데 모두 시행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맑고 삼가며 단정하고 신중해서 비록 창졸지간이라도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날마다 《중용》ㆍ《대학》을 외었다. 예(禮)에 더욱 정통(精通)하여 태묘(太廟)ㆍ사직(社稷)ㆍ성황(城隍)ㆍ산천(山川)에 제사하는 일과, 조빙빈객(朝聘賓客)ㆍ수수군려(蒐狩軍旅)ㆍ시학석전(視學釋奠)ㆍ양로걸언(養老乞言)의 제도에서부터 사서인(士庶人)의 관혼상장(冠昏喪葬)ㆍ향사향음(鄕射鄕飮)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 고증하여 바로잡았으니, 흡연히 《주례(周禮)》의 예법(禮法)에 합치하였다.
유독 공거(貢擧)만은 아직도 당나라 제도를 답습하고 있었으니, 공이 개연히 장헌왕에게 말하여 경술(經術)을 우선으로 하고 사장(辭章)을 나중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미처 공거법을 개정하지 못했는데 공이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경술을 좋아할 줄 알게 되고, 자애롭고 신실하고 순수하며, 정직하고 고명한 선비가 진작(振作)된 것은 실로 장헌왕과 공이 표창한 공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으리오.”라고 했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로다.
공은 정통(正統) 4년(1439) 겨울 12월 임인(壬寅)일에 돌아가셨다. 이듬해 봄 3월 경신(庚申)일에 유사가 의위(儀衛)를 갖추어 원평부(原平府) 북쪽에 있는 향양리(向陽里) 언덕에 장사 지냈다. 경태(景泰) 3년(1452)에 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공은 대사헌 박경(朴經)의 딸 영해(寧海) 박씨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장남 허후(許詡)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냈는데, 김종서(金宗瑞)의 일에 연루되어 죽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차남 허눌(許訥)은 양온서 영(良醞署令)을 지냈다. 장녀는 필선(弼善) 최유종(崔有悰)에게 시집갔다. 차녀는 평산 부사(平山府使) 정잠(鄭箴)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은 정언 윤미견(尹彌堅)에게 시집갔다. 정간공은 아들 세 명을 두었는데 장남은 허조(許慥)이며, 차남은 허담(許憺), 삼남은 허돈(許惇)이다. 양온(良醞)은 아들 한 명을 낳았는데 이름이 경동(敬同)이다. 증손 이하에 약간 명이 있다.
경원의 선조 익성공(翼成公)과 공은 같은 시기에 장헌왕을 도와 나라의 원로가 되었으며, 돌아가시자 장헌왕의 묘정(廟廷)에 함께 배향되었다. 그러므로 경원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감히 잊을 수가 없다.
올해 가을에 공의 12세손 모 등이 고 예문 응교(藝文應敎) 남공(南公) 수문(秀文)이 지은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가지고 와서 비에 명(銘)을 청하기에, 경원이 거듭 절하며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명을 썼다. 명은 아래와 같다.
밝고 진실하신 허공이시여 / 顯允許公
미덥고도 올바르시니 / 旣亮且直
예를 따름에 법도가 있으시며 / 率履有繩
인을 실천함에 준칙이 있으시도다 / 型仁有墨
예전 선덕 연간에 / 昔在宣德
우리 장헌대왕을 보필하셨으니 / 輔我莊憲
정색하고 산처럼 우뚝 서서 / 正色山立
하신 그 말씀 강직하셨도다 / 其言侃侃
장헌대왕 하신 말씀 “훌륭하도다 / 莊憲曰咨
나에게 《오례》를 닦아 주어 / 修予五禮
제도가 아름답고 밝으니 / 制度休明
그대가 이것을 계도하였도다” / 惟汝是啓
장헌대왕 하신 말씀 “훌륭하도다 / 莊憲曰咨
나에게 《육전》을 밝혀 주어 / 煕予六典
율령이 너그러우니 / 律令寬綽
그대가 이것을 지었도다” / 惟汝是譔
모든 군자들이 / 凡百君子
각기 관리의 직책을 전담하고 / 各專官守
아전은 그 지위를 편안히 여기며 / 吏安其位
백성은 그 논밭을 즐거워하였도다 / 民樂其畆
위아래에 질서가 있으며 / 上下有秩
예절이 매우 아름다웠으니 / 節文孔懿
왕조의 의범(儀範)은 / 王朝之儀
공으로부터 비로소 갖추어졌도다 / 自公始備
가혹한 정치가 제거되니 / 苛政旣除
사방이 길이 맑아져서 / 四方永淸
나라의 운명이 무강함은 / 國步無疆
형정(刑政)의 공평함에 말미암았도다 / 由刑之平
당시의 삼양(三楊)이 / 維時三楊
황제 위해 재상으로 보필하였으니 / 爲帝保衡
그 어짊과 능력을 살펴보건대 / 考其賢能
어느 누가 공과 경쟁하리오 / 孰與公爭
공이 정승으로 계시면서 / 公居相府
사직을 청하여 / 仍乞骸骨
치세가 이루어지자 물러가셨으니 / 治成告老
그 뜻이 현명하시도다 / 其志則哲
나의 선조께서 / 念余先祖
공과 동시대에 계셨으니 / 與公同時
공의 묘에 명을 짓는 것은 / 銘公之墓
선조를 그리워해서이다 / 先祖是思
[주-D001] 대광보국숭록대부 …… 허공 : 조선 시대 세종과 태종대의 명신 허조(許稠, 1369~1439)이다.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이며 문경(文敬)은 시호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조선 초기 제도의 정비와 유교적 윤리관의 확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우의정ㆍ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주-D002] 도관(都官) : 허조(許稠)의 조부 허윤창(許允昌)을 말한다. 도관은 노비의 문서와 호적 및 그 소송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이다.[주-D003] 문성공(文成公) …… 유(裕) : 고려 시대 명신이며 학자인 안향(安珦, 1243~1306)으로, 초명이 유(裕)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최초의 성리학자이다. 고려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상(像)을 그려 가지고 와서 정사를 짓고 모셨다.[주-D004]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 : 1352~1409. 본관은 안동,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으로, 이성계의 창업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개국 후의 제도정비에 힘써 왕권 확립에 기여하였다.[주-D005] 공정왕(恭定王)이 …… 좌천되었다 : 경진년에 태종(太宗)이 왕위를 물려받자 국시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 임금이 노하여 중형에 처하려고 친히 심하게 국문하였으나 허조가 항변하여 굴하지 않자 임금이 그 강직함을 아름답게 여겨서 완산 판관에 좌천시켰다. 일을 맡은 지 몇 달 만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2년 뒤 임오년 가을에 이조 정랑에 결원이 생기자 임금이 친히 관부를 검열하다가 공의 이름을 발견하고 일을 맡겼다. 남수문(南秀文)이 찬한 허조의 묘지명에 수록되어 있다. 《東文選 卷130》[주-D006] 조 문충공(趙文忠公) …… 때 : 조대림(趙大臨)이 순금사(巡禁司)에 갇혔을 때를 잘못 안 것으로 보인다. 허조는 41세 때인 1409년에 조대림 사건에 연루되어 춘주로 귀양 갔다. 조대림은 조준(趙浚)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이다. 《태종실록》 8년(1408) 12월 5일 기사에 의하면, 호군(犒軍) 목인해(睦仁海)가 평양군 조대림이 모반한다고 무함하여, 조대림을 순금사에 가두고 문초를 한 결과 무함임이 밝혀졌다. 그 후 사헌집의 탁신(卓愼) 등이 상소하여 조대림의 죄를 청하였는데 탁신의 상소에 허조가 관련되었다고 하여 탁신과 허조가 문초를 받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태종 9년 1월 2일 기사에 탁신은 장 60대를 때려 나주에 부처하고, 허조는 장 60대를 때려 춘주에 부처하였다고 하였다.[주-D007] 경승부 윤(敬承府尹) : 경승부의 책임자이다. 경승부는 태종(太宗) 2년에 세자전(世子殿)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관청이다. 태종 18년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가 폐세자(廢世子) 되자, 순승부(順承府)로 바뀌었다.[주-D008] 공안부 윤(恭安府尹) : 공안부(恭安府)의 책임자이다. 공안부는 조선 태종이 정종 2년(1400) 11월에 양위를 받은 후 설치한 관아로서, 선위한 상왕 정종에 대한 공봉(供奉) 및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공안부는 세종 2년(1420) 3월에 폐지되어 인녕부(仁寧府)에 통합되었다.[주-D009] 선덕(宣德) :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宣宗)의 연호로 기간은 1425~1435년이다.[주-D010] 정통(正統) : 명나라 제6대 황제 영종(英宗)의 연호로 기간은 1435~1449년이다.[주-D011] 홍희(洪煕) : 명나라 제4대 황제 인종(仁宗)의 연호로 기간은 1424~1425년이다.[주-D012] 상서(庠序)의 가르침 : 인륜(人倫)을 밝히는 것을 말한다. 상서는 고대 지방에 세웠던 향교(鄕校)의 이름으로서 주(周)나라에서는 상(庠), 은(殷)나라에서는 서(序)라고 불렀다. 《맹자》 〈양혜왕〉에서, “상서의 가르침을 삼가 효제의 의를 베풀면, 반백의 늙은이는 길에서 짐을 지거나 머리에 이지 않으며, 노인은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백성들은 굶주리거나 얼어 죽지 않을 것이니, 그러고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할 자는 없습니다.〔謹庠序之教, 申之以孝悌之義, 頒白者不負戴於道路矣, 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而不王者, 未之有也,〕”라고 하였다.[주-D013] 속육전(續六典)을 수찬(修撰)하고 : 《속육전》은 조선 시대 최초의 통일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보완한 것이다. 《세종실록》 8년(1426, 선덕1) 2월 8일 기사에, “영의정 이직(李稷)ㆍ찬성 황희(黃喜)ㆍ이조 판서 허조(許稠) 등이 수찬한 《속육전(續六典)》을 올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현재 전해오지 않으며, 조문의 일부만이 《조선왕조실록》에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주-D014] 봄에는 …… 것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봄에는 시를 외고 여름에는 현악기를 탄다.〔春誦夏絃.〕”라는 구절이 있다.[주-D015] 현송(絃誦) : 현가(絃歌)와 송(誦)을 말한다. 고대 학교에서 시를 가르칠 때 금슬의 음악에 맞춰 읊조리는 것을 현가(絃歌)라 하고, 음악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 했다.[주-D016] 사학(四學) : 주(周)나라 때 사방의 교외에 세운 학교를 말한다. 《예기》 〈제의(祭義)〉에 “천자는 사학을 설치한다.〔天子設四學.〕”라고 하였다. 허조가 주청하여 성립된 사학은 사부학당(四部學堂)으로서 중학(中學)ㆍ동학(東學)ㆍ남학(南學)ㆍ서학(西學)을 말한다.[주-D017] 참최(斬衰) : 옛 상례(喪禮)에서 외간상(外艱喪)에 입는 상복이다. 참최는 정상적인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또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아들이 할아버지상을 당했을 때 3년 동안 입는 상복이다. 외간상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상을 이른다.[주-D018] 공정왕(恭定王)이 …… 의론하니 : 《세종실록》 4년 5월 13일 기사에, “예조에서 상제를 정하여 아뢰었다. ‘임금과 왕자들은 참최복을 입는데 그 제도는 《문공가례(文公家禮)》를 쓴다. 곡을 마친 후에는 권도로 상복을 벗고 흰옷에 검정 사모와 검정 각대로 정사를 보고, 삭망과 별제 기타 상사(喪事)에 관계되는 일에는 모두 최복을 입는다. …… 여러 문무 관원들도 참최복을 입는데 곡을 마친 뒤에는 상사와 관계된 이외에는 흰옷과 검정 사모, 검정 각대로 3년을 난다.’” 등의 내용이 있다.[주-D019] 공이 논박하여 이르기를 : 《세종실록》 4년(1422) 7월 14일 기사에, 의정부 참찬 허조가 예제(禮制)에 대해 올린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임금의 복을 아버지와 같이 참최삼년으로 해야 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곡을 마친 뒤 임시로 최복을 벗고 백의(白衣) 등으로 정사를 보고 상사(喪事)에 관계될 때는 최복을 사용하며, 1년 후 소상(小祥)에 대상복(大祥服)을 입고 2년 뒤 대상(大祥)에 담복(禫服)을 입고 27개월 뒤에 담복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실은 삼년상을 행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무백관에 있어서는 곡을 마친 뒤에 백의ㆍ오사모ㆍ흑각대로 3년을 치르는 것은 아비를 위하는 복(服)과 임금을 위하는 복이 서로 달라 말류(末流)의 폐가 되어 아비에 대한 도가 무겁고 임금에 대한 도는 가볍게 될 것이요, 또 신하로서 임금의 복을 입는 데 연(練)과 담(禫)의 절차가 없으니 후세의 교훈으로 남길 수 없다고 하였다.[주-D020] 수질(首絰) :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띠로서 새끼줄에 삼껍질을 감아 만든 것이다. 남자는 두건(頭巾), 굴건(屈巾)과 함께 쓰고, 여자는 수질만 쓴다. 소공(小功) 이하에는 수질을 쓰지 않으며, 참최의 수질은 씨 있는 삼으로 만든다.[주-D021] 요질(腰絰) : 상복을 입을 때 허리에 띠는 것으로, 짚과 삼으로 동아줄처럼 굵게 만든 띠이다.[주-D022] 최질(衰絰) : 참최복(斬衰服)과 수질(首絰)ㆍ요질(腰絰)을 말한다.[주-D023] 광효전(廣孝殿) :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원묘(原廟)로서 창덕궁의 서북쪽에 있었다. 세종조에 문소전(文昭殿)을 세워 위패를 옮겨 봉안하고 광효전은 폐지하였다.[주-D024] 수륙(水陸) : 불교의 의식으로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수륙재의 수륙은 여러 신선이 흐르는 물에서 음식을 취하고 귀신이 깨끗한 땅에서 음식을 취한다는 뜻에서 따온 말로 청정한 사찰이나 높은 산봉우리에서 행해진다.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 때 성대하게 행해졌는데, 조선 시대에 들어 폐지 논의가 일어났지만 계속되다가, 중종 때 유송들의 상소로 인해 국가 행사로 거행되는 것이 폐지되었다.[주-D025] 복녕전(福寧殿) : 북송 때 황궁의 정전(正殿)이며, 남송이 임안(臨按)으로 천도하여서도 복녕전을 지었다.[주-D026] 경행승(經行僧)을 파하셨거늘 : 《세종실록》 4년 2월 19일 기사에, “도성 안에서의 경행을 폐지하였다. 전조(前朝) 때부터 매년 봄가을의 중월(仲月)에 각 종파의 중들을 모아서 《대반야경》을 외게 하고, 나발을 울리고, 번(幡)과 개(蓋)를 늘어세우고 향불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여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질병과 재액을 물리친다고 하는데, 2품 이상의 관원이 명령을 받아 향불을 피우고, 감찰이 이를 살피고 모두 걸어서 따라다니게 되니, 이를 경행이라 불렀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특명으로 이를 폐지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경행은 불교 행사인 가구경행(街衢經行)으로 고려 시대 정종 12년(1046)에 시작되어 연중행사가 되었다.[주-D027] 여자는 …… 입는다 : 《의례》 〈사혼례(士昏禮)〉에서 신부의 혼례복을 말한 것이다. 그 주에서, 순의(純衣)는 사의(絲衣)이며, 훈염(纁袡)은 분홍색 천으로 옷에 가선〔緣〕을 두른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 소(疏)에서, “부인의 옷은 치마를 다르게 하지 않고 저고리와 치마를 겸하여 연결해서 그 색깔이 다르지 않게 한다. 혼례에 이 옷을 입는데, 왕후 이하가 시집갈 때 모두 가선이 있다.“라고 하였다. 사의는 누이지 않은 명주실로 만든 옷이다.[주-D028] 다리〔髢〕 : 머리꾸미개로서, 머리숱이 많게 보이도록 덧붙이는 딴머리를 말한다.[주-D029] 신이 …… 지나가면서 : 허조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있다가, 세종이 당시 세자로서 명나라에 조회 갈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한 것을 말한다. 돌아오는 길에 궐리(闕里)에 들렀다. 궐리는 공자가 살았던 노(魯)나라의 마을 이름이다.[주-D030] 사구(司寇) : 형옥(刑獄)을 맡은 장관이다.[주-D031] 사구(司寇)가 …… 단행한다 : 《예기》 〈왕제〉에, “옥사(獄辭)가 이루어지면 문서를 맡은 관리가 옥정(獄正)에게 보고하고, 옥정이 듣고 옥사(獄事)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대사구(大司寇)에게 보고한다. 대사구는 그것을 극목(棘木) 아래에서 살펴보고, 대사구는 옥사가 성립된 것을 왕에게 보고한다. 왕은 삼공(三公)에게 명령하여 참여해 듣게 하고, 삼공은 옥사가 성립된 것을 다시 왕에게 고한다. 왕은 세 번 용서하라고 한다. 그런 뒤에 형벌을 단행한다.〔成獄辭, 史以獄成, 告于正, 正聽之, 正以獄成, 告于大司寇. 大司寇聽之棘木之下, 大司寇以獄之成, 告於王. 王命三公參聽之, 三公以獄之成, 告於王. 王三宥, 然後制刑.〕”라고 하였다. 옥사는 형사 사건의 기록을 말한다.[주-D032] 각기 …… 의논한다 : 《주례》 〈추관사구(秋官司寇) 5〉에 있다.[주-D033] 공손하고 …… 내려주셨다 : 《서경》 〈열명〉 제2장에서, 고종(高宗)이 글을 지어 군신들에게 말하지 않은 뜻을 고유한 것이다. “나로써 사방을 바로잡게 하시기에, 나는 덕이 선인과 같지 못할까 두려워, 이때문에 말하지 않고, 공손하고 침묵하여 도를 생각하였는데, 꿈에 상제께서 나에게 어진 보필을 내려 주셨으니, 그가 나의 말을 대신할 것이다.〔以台正于四方, 台恐德弗類, 玆故弗言, 恭默思道, 夢帝賚予良弼, 其代予言.〕”라고 하였다.[주-D034] 아름다운 …… 바라노라 : 《서경》 〈필명〉 제5장에서 강왕(康王)이 태사(太師) 필공(畢公)의 덕을 찬탄한 말이다. “공이 성대한 덕으로 능히 작은 행실을 부지런히 힘써 4대를 보필하고 밝혀서,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자, 태사의 말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 아름다운 공적이 선왕의 세대보다 많으니, 나 소자는 의상을 드리우고 손을 마주잡고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노라.〔惟公懋德, 克勤小物, 弼亮四世, 正色率下, 罔不祗師言, 嘉績多于先王, 予小子垂拱仰成.〕”라고 하였다.[주-D035] 구임법(久任法) : 조선조 때의 관리 유임(留任) 제도로서, 특정한 경험ㆍ기술ㆍ자격을 필요로 하는 관직은 임기에 구애받지 않고 유임시키던 것을 말한다. 이는 세종 7년(1425)에 처음 실시되었는데, 《경국대전》에는 25개 부서 49인으로 확정되었다. 그 주요 대상은 제사ㆍ의례ㆍ외교ㆍ소송ㆍ군수ㆍ회계ㆍ창고 및 궁중 사무를 관장하던 부서였다.[주-D036] 세 …… 것 : 《서경》 〈순전(舜典)〉 제27장에서, “3년에 한 번씩 공적을 상고하고 3번 상고한 다음 능력 없는 자를 내치고 현명한 자를 승진시키시니 여러 공적이 다 넓혀졌는데 삼묘(三苗)를 나누어 등져가게 하시다.〔三載考績, 三考, 黜陟幽明, 庶績咸熙, 分北三苗.〕”라고 하였다.[주-D037] 구공(九功)이 …… 까닭입니다. : 《서경》 〈대우모(大禹謨)〉 제7장에서, 우(禹)가 황제에게 한 말씀 가운데,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와 곡식이 잘 닦여지며, 정덕(正德)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이 화하여, 구공(九功)이 펴져서 아홉 가지 펴진 것을 노래로 읊거든 경계하고 깨우쳐서 아름답게 여기며 독책하여 두렵게 하며 권면하되 구가(九歌)로 하시어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구공은 육부(六府)와 삼사(三事)를 합한 것이다. 구공(九功)이 펴진 것을 가지고 노래로 읊은 것이 구가(九歌)이다. 아홉 가지가 이미 닦여지고 화하여 각각 그 이치를 따르면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누려서 노래로 읊어 그 삶을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육부는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ㆍ곡(穀)을, 삼사는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을 이른다.[주-D038] 속죄(贖罪) : 속전(贖錢)이나 속포(贖布) 등의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는 것을 말한다.[주-D039] 수문(守文) : 선왕의 법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 문공(文公) 9년 조에, “문왕의 체제를 계승하고 문왕의 법도를 지키다.〔繼文王之體 守文王之法度〕”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본래는 문왕의 법도를 따르는 것을 말했으나 후에 일반적으로 선왕의 법도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주-D040] 호천유성명(昊天有成命) : 《시경》 〈주송〉의 편명으로, 채침의 《시경집전》에는 ‘성왕(成王)의 덕을 말한 것이 많으니 아마도 성왕을 제사한 시인 듯하다.’라고 했고, 《모서》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는 시’라고 하였다.[주-D041] 집경(執競) : 《시경》 〈주송〉의 편명으로, 채침의 《시경집전》에는 ‘무왕ㆍ성왕ㆍ강왕을 제사하는 시’라고 했고, 《모서》에는 ‘무왕(武王)을 제사하는 시’라고 하였다.[주-D042]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 : 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후궁 당산부인(唐山夫人)이 지은 악부이다. 17장으로 되어 있으며 종묘에 제사 지낼 때 부르는 교묘가사(郊廟歌辭)이다.[주-D043] 상재유(象載瑜) : 적안가(赤雁歌)라고도 한다. 한 무제(漢武帝) 태시(太始) 3년에 동해(東海)에 행차하여 붉은 기러기 6마리를 얻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상재유’는 코끼리 수레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漢書 卷22 禮樂志》[주-D044] 천마시(天馬詩) : 한나라 때 포리장(暴利長)이란 자가 악와(渥洼)에서 둔전(屯田)을 하고 있다가 신마(神馬)가 이 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잡아 무제에게 바치자 무제가 지었다고 한다. 악와는 감숙성(甘肅省) 안서현(安西縣)에 있는 물이름이다. 《漢書 卷6 武帝紀》[주-D045] 칠덕무(七德舞) : 당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유무주(劉武周)를 쳐부순 공을 기리기 위하여 군중에서 만든 악곡이다. 처음에는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라 하였는데 즉위하자 연회 때 반드시 이를 주악하도록 하였고, 위징 등에게 명하여 가사를 개작하게 하여 〈칠덕무〉라고 불렀다. 당나라 삼대무(三大舞)의 하나이다.[주-D046] 최윤덕(崔潤德) : 1376~1445. 조선 전기의 명장(名將)으로서 무과 출신으로 재상이 되었다.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백수(伯修) 또는 여화(汝和)이며,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세종 1년(1419)에 이종무(李從茂) 등과 대마도를 정벌했다. 세종 15년(1433) 파저강의 이만주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이만주를 대파했고 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종묘에 배향되었다.[주-D047] 파저강(婆豬江) : 압록강 북편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을 말한다. 이 유역이 건주 여진의 근거지였다.[주-D048] 이만주(李滿住) : 조선 시대 서북 변방을 자주 약탈하던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이다. 파저강 근처의 여진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장악하여 이름을 떨쳤다. 세조(世祖) 13년에 명나라는 건주위의 야인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협격(挾擊)을 요청하여 왔다. 이때 세조는 강순(康純)ㆍ어유소(魚有沼)ㆍ남이(南怡) 등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강순 등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건주위의 여러 성을 쳐부수었다. 이때 이만주 부자(父子)는 남이에게 참살당하였다.[주-D049] 홀라온(忽剌溫) : 북방의 영고탑(寧古塔) 근처에 살았던 여진족 부족의 이름이다. 영고탑은 흑룡강성에 있는 지명이다.[주-D050] 기미(羈縻) : 적국과 적당한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여 복속시킴으로써 외환을 막는 방책이다.[주-D051] 건주위(建州衛) : 중국 명(明)나라 영락(永樂) 원년(1403)에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남만주 일대의 여진(女眞)을 초무(招撫)하기 위해 설치한 위소(衛所)로서 지방 군사행정기구이다. 삼위(三衛)인 건주본위(建州本衛)ㆍ건주좌위(建州左衛)ㆍ건주우위(建州右衛)로 되어 있으며, 그 지휘사(指揮使)는 여진족으로 세습하여 수령이 된다.[주-D052] 외요(外徼) : 변방의 나라를 말한다.[주-D053] 동산(董山) : 여진족 추장으로서 청 태조 누르하치의 5대조이다. 부족을 이끌고 파저강으로 와서 이만주와 합류하였다. 1467년 조명(朝明)의 합동 공격 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주-D054] 김돈(金墩) : 1385~1440. 조선 전기의 문신ㆍ과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조에 집현전 직제학으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고 천문 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주-D055] 정침(正寢) : 평소에 거처하던 곳을 말한다.[주-D056] 조제(弔祭)를 내리시고 : 임금이 신하에게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조문하여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문무(文武)와 음관(蔭官)으로서 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역임한 신하가 사망한 경우에 임금이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주-D057] 공이 …… 보임되었다. : 남수문(南秀文)이 찬한 허조의 묘지명에 의하면, 허조는 우왕 9년(1383)인 계해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2년 후인 을축년(1385)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3년 후인 무진년(1388)에 음직으로 중랑장에 보직되었고, 공양왕 2년(1390)에 병과에 급제하여 전의시승(典儀寺丞)에 임용되었다고 하였다. 《東文選 卷130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世子傅 贈諡文敬許公墓誌銘》[주-D058] 강무장(講武場) : 강무는 무술을 익힌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에 해마다 단오와 추석 때 두 번 하던 행사로, 일정한 장소에 장수와 병졸, 백성을 모아놓고 임금이 주장이 되어 사냥을 하면서 무예를 닦던 행사를 말한다. 강무장은 강무를 하는 곳으로 조선 초기에는 일정한 장소가 없었지만 세종 2년(1420) 2월에 강무장으로 경기의 광주(廣州)ㆍ양근(楊根) 등지, 철원(鐵原)ㆍ안협(安峽) 등지, 강원도의 평강(平康)ㆍ이천(伊川) 등지, 횡성(橫城)ㆍ진보(珍寶) 등지로 결정했다.[주-D059] 우모(羽旄) : 새의 깃으로 장식한 기(旗)로서 임금의 기이다. 여기서는 임금의 대칭(代稱)으로 쓰였다.[주-D060] 주석(柱石) : 기둥과 주춧돌로, 국가의 중임을 맡은 대신인 주석지신(柱石之臣)을 말한다.[주-D061] 빈강(濱江) : 수빈강(愁濱江)을 가리킨다. 두만강 북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함경도 경원도호부(慶源都護府)에 속해 있는 강으로,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와서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한쪽은 속평강(速平江)이 되어 공험진(公嶮鎭)과 선춘령(善春嶺)을 경유하여 거양(巨陽)에 이르러 동쪽으로 120리를 흘러 아민(阿敏)에 가서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주-D062] 조빙빈객(朝聘賓客) : 조빙(朝聘)과 빈객(賓客)을 말한다. 조빙의 조(朝)는 제후가 천자를 찾아뵙는 것이고, 빙(聘)은 제후가 대부(大夫)를 시켜 천자에게 공물(貢物)을 바치며 문안하는 것이다. 빈객(賓客)은 빈객을 접대하는 일을 말한다.[주-D063] 수수군려(蒐狩軍旅) : 사냥을 통해서 군사훈련을 하는 것을 말한다.[주-D064] 시학석전(視學釋奠) : 시학(視學)은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유생들의 공부 상황을 돌아보는 일을 말한다. 이때 석전(釋奠)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인재를 뽑았는데 이를 알성시라 했다.[주-D065] 양로걸언(養老乞言) : 어진 노인을 봉양하여 그로부터 정치에 도움이 될 말을 구하는 것을 말한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그렇게 하였다 한다. 《禮記 內則》 《文王世子》[주-D066] 향사향음(鄕射鄕飮) : 향촌의례(鄕村儀禮)의 하나인 향사(鄕射)와 향음(鄕飮)을 말한다. 향사는 향촌에서 활쏘기 시합을 하며 예를 익히고 친목을 도모하는 의식으로 보통 주향(酒饗)을 겸하였다. 향음은 향음주(鄕飮酒)로서, 향촌의 선비와 유생들이 학교나 서원 등에 모여서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主賓)으로 모시고 예를 갖추어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것을 말한다.[주-D067] 화락한 …… 않으리오 : 《시경》 〈대아 한록(旱麓)〉 제3장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뛰놀도다. 화락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으리오?〔鳶飛戾天, 魚躍于淵. 豈弟君子, 遐不作人?〕“ 하였다. 여기서 군자는 문왕을 가리키며, 반드시 사람을 진작시킴을 말한 것이다. 〈모서〉에서, 〈한록〉은 선조의 공업을 받았음을 읊은 시라고 하였다.[주-D068] 정통(正統) : 명나라 제6대 황제 영종(英宗)의 연호(年號)로, 기간은 1436~1449년이다.[주-D069] 원평부(原平府) : 지금의 경기도 파주 부근이다.[주-D070] 경태(景泰) : 명나라 제7대 황제 대종(代宗)의 연호로, 1450~1457년이다.[주-D071] 장남 …… 죽었다 : 허후(許詡)는 세종 8년(1426)에 식년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고 2년 후 병조 좌랑이 되었다. 1436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문종 1년(1451) 우참찬에 임명되어 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고려사》의 산삭(刪削)과 윤색(潤色)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종의 환후(患候)를 보살폈으며, 문종이 죽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좌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집권하여 정난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는 근심에 잠겨 음식을 들지 않았다. 뒤에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마침내 거제도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교살되었다.[주-D072] 양온(良醞) : 양온서 영(良醞署令)을 지낸 차남 허눌(許訥)을 가리킨다.[주-D073] 익성공(翼成公) : 1363~1452. 방촌(尨村) 황희(黃喜)의 시호이다. 세종조의 명재상이요 청백리로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이 글을 지은 황경원의 선조이다.[주-D074] 남공(南公) 수문(秀文) : 남수문(南秀文, 1408~1443)으로 자는 경질(景質)ㆍ경소(景素), 호는 경재(敬齋),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1426년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1436년 중시에 장원급제했다.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았다.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를 썼다. 문집으로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허조의 묘지와 묘표는 문집의 권1에 수록되어 있다.[주-D075] 선덕(宣德) : 명나라 제5대 황제 선종(宣宗)의 연호로 기간은 1426~1435년이다.[주-D076] 나에게 …… 주어 : 오례(五禮)는 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를 말하는데, 이는 《세종실록》에 수록된 국가의례이다. 건국 초기에 국가의 의전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종이 허조에게 명하여 길례(吉禮)와 의식을 정비하도록 하였다. 조선 세종 26년(1444) 10월에 첨지중추원사 변효문(卞孝文), 정척(鄭陟)등에게 명하기를, 태종 때 허조(許稠)가 이미 정해놓은 길례와 이미 완성된 사례(四禮)를 아울러 국가의례를 정리하도록 하여 문종 1년(1451)에 완성했고 《세종실록》의 끝부분에 부록으로 했다. 조선왕조에서 이미 시행하던 전례(典禮)와 고사(故事)를 취하고, 아울러 당(唐)ㆍ송(宋)의 옛날 제도와 명(明)의 제도를 취하였는데 이 모든 과정에 세종이 참여하여 결정하였다.[주-D077] 나에게 …… 주어 : 허조가 《속육전》을 편수한 것을 말한다.[주-D078] 삼양(三楊) : 명나라 때의 어진 재상들인 양사기(楊士奇, 1365~1444), 양영(楊榮, 1371~1440), 양부(楊溥, 1372~1446)를 말한다. 이들은 명나라 제3대부터 제6대 황제인 성조(成祖)ㆍ인종(仁宗)ㆍ선종(宣宗)ㆍ영종(英宗) 4대에 걸쳐 대각(臺閣)의 중신으로서 내각 대학사를 지낸 현신(賢臣)들이다. 이 시기는 명나라의 태평성대로서 삼양은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중책을 완수하였으므로 국가 원로로서 대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