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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베드로의 신앙고백
1-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앙 사상이 서로 달랐다. 바리새인들은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으나 형식적이며 위선적이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적인 신앙을 가졌고 세속적인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질적인 사상을 가진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들의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히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분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낼 것이다.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天氣)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께서 오셨다는 증거들은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나병, 중풍병, 소경, 벙어리, 앉은뱅이 등 많은 불치(不治)의 병자들을 치료하심, 죽은 자들을 살리심 등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께서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유대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치 못하였다.
[4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자들, 내면적 성결과 변화보다 기적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던 이런 자들은 참 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은 없으셨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이라고 표현되는 한 가지 표적은 남아 있었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일 간 무덤에 있으실 것이다. 물론 이 삼일은 대략적 표현이라고 보인다. 요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sign)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들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실상 다른 표적은 필요하지 않았다.
[5-10절]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재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님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떡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4천 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떡 기적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임을 주께서 다시 확증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들은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겠지만, 믿으려 하는 자들은 믿을 만한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지 못할 어떤 것,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11-12절]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로 알지 못하였고 자기 의(義)를 의지하고 자랑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지식도 많았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외적 규례들만 중시했고 더 중요한 그 내면성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겉모습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고, 또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했다. 당시에 사회적 신분이 있고 물질적으로 부유했다고 보이는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주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교훈은 누룩같이 퍼져나가는 힘이 있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잘못된 교훈은 나쁜 영향을 끼친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교훈들을 분별하고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당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그의 많은 기적 행하심의 일들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표이다. 이 표적 앞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았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교훈들을 분별하며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해를 당할 것이다. 그것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다(딤후 2:17). 그것은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바른 교훈을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멀리해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절,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전통본문)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이며 요단강의 발원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는 다시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구약에 예언된 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을 완성할 자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길을 전하시는 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며, 교회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왕이시다.
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는 외아들이 계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옷만 바꿔 입으신 것이 아니고, 두 구별된 인격이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啓示)된 만큼이 이러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친근히 부르시면서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한 고백이 복되며 그의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여심으로써만 가능하다(행 16:14).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원어에서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여성명사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3:11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 또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는 성경의 바른 진리와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온 세계에 세우셨고 오늘도 계속하여 세우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음부’(陰府, 하데스 a{/dh")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며, 지옥은 죄인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집이다. 그러나 주께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케 되었다. 죄가 제거됨으로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극복되었다. 무덤과 지옥의 권세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19-20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천국 열쇠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막 16:1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를 주시며 물질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복을 주시는 자로 이해했던 것 같다. 예수께서 죄인들의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위해 오신 사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에 죽음과 삼일 만의 부활이 있을 때까지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본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우리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세워져 있음을 감사하고 더욱 힘써야 한다. 목사들은 그 복음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 복음 진리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즉 무덤과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의 복을 항상 감사하며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전도라는 천국 열쇠를 힘써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전도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도자들은 그 도구이다.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며 믿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28절, 자기 부정을 가르치심
[21-23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책망하여](KJV, NASB, NIV)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예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책망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으나 그가 죽으실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고 그를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주께서는 돌이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들었지만, 지금 심한 책망을 듣는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말은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께서 죽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며 독생자께서 택자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 가치관, 명예, 자존심,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라는 뜻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다. 사형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서 거기에 달려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그의 제자된 자들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25절]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리라[찾을 것임이니라].
이 말씀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주께서는 두 가지 목숨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숨이다. ‘목숨’이라는 원어(프쉬케 yuchv)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뜻도 되지만, ‘영혼’이라는 뜻도 된다.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 육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자기 영혼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자기 영혼을 찾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때 영생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때 영생할 수 없고 도리어 둘째 사망(계 21:8)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목숨이다.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자기 영혼](KJV, NASB, NIV)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본절은 육신의 목숨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영혼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적용된다. 사람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만, 그는 비록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므로 수십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불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영생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세상에서 그것보다 귀한 것은 없다.
[27-28절] [이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갚을 것임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은 그의 재림 때이다(마 24:30; 살전 4:16). 그때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날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다(롬 2:6-7).
예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다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 베드로처럼 잠시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뜻과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고 영혼의 목숨 즉 영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사람의 육신의 목숨도 귀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하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위해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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