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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비서(銅谷秘書) - 김자현 종도의 자제인 김태진선생의 수기의 일부 |
1. 본시 태운(太雲)은 호요, 이름은 형렬(亨烈)이니, 동곡(銅谷)에서 생장하다가 환평(環坪, 現 함평마을)에 이거할 적에는 부자였는데, 당대에 가운이 기울어져 가난하게 됨에 다시 재비창(하운동)의 선산 제실로 이사하였으나 빈곤을 이기지 못하야 금구 내주평(內住坪)을 내왕하면서 농사나 경영할가 하고 있던 중, 그 마을 학당에 가본 즉, 초립동이가 있는데 학동들이 부르기를 강서방(姜書房)이라 하기로 태운(太雲)께서 훈장보고 물으니 정씨가의 취객(贅客 사위)이라 하더라. 2. 정씨는 중인(中人)이므로 그 취객을 강서방이라 부른다고 하나 학동을 가르치는 것을 보니 훈장보다 더 잘하더라. 또 마을 사람들의 사주도 봐주니 가위 신인(神人)이더라. 노소는 다르나 그때 서로 인사하여 성명을 나누니라. 그 후로부터 서로 친분으로 지내다가 태운은 사정에 의하야 내주평을 가지 못했더라. 그러나 선생(증산ㅡ甑山)의 친면을 잊지않고 있던 중 몇년이 지난 후에 도를 통하셨다는 소식을 소문으로 들은 후로는, 더욱 한번 만나기를 원하다가 하로는 원평 장날인데 태운의 집이 가난하야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돈 한양(一兩)을 주선하야 시장에 갔더니, 소원하던 선생님을 상봉하니 반갑기 한량없더라. 태운이 선생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으니 "충청도로 간다"고 하심에 태운이 생각키로 "이 돈을 노비로 드린다면 가솔들이 굶을 것이요, 만일 드리지 아니하면 서로 친한 사이에 의리가 아니다" 생각하고 드리니, 받지 않으시며 "노자가 있다"하시나 억지로 드리니 받으시고 가라사대 "돌아오는 길에 한번 찾겠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가시니라. 3. 그달 十三일에 하운동(夏雲洞)으로 왕림하시거늘 태운이 "방으로 들어가십시다"하니 선생께서 가라사대 "너의 집에 산기가 있구나" 하니, 태운이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라사대 "이곳을 들어오니 말 한필이 너의 집으로 들어감으로 알았노라" 하시고 태운을 보고 "감나무 아래로 가자" 하시고 감나무 아래에 두 사람이 마주 앉으시니라. 4. 선생께서 가라사대 "우리 두집이 망한 후에 성공하는 공부를 하여볼가" 하시기로 태운이 승락하니 세번 다짐을 받으신 후에 비로소 방안에 드시니라. 잠시 후에 안에서 생남한 소식을 알리거늘 "천리마(千里馬)"로 이름을 지어 주시니, 아해의 젖이네개더라. 이때 선생의 연세는 三十二세요, 태운의 연세는 四十一세더라. 5.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르시고 태운에게 일러 가라사대 "앞으로 말세(末世)가 당도함에 천지가 강대임어사인(降大任於斯人)하였으니 정심수도(正心修道)하여 천지공정에 참여하라. 나는 조화로서 천지운로를 개조하야 불노불사의 선경을 열어 고해에 빠진 중생을 광제하려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나는 본시 서천서역 대법국 천계탑(西天西域 大法國 千階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두루 살피다가 동양 조선국에 내려와 전북 금구 수류면 금산사 삼층전(金山寺 三層殿)에 三일을 머무르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문(古阜 客望里 姜氏門)에 탄강하였다가 주인을 심방함이라" 하시고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니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하시니라. 6. "내가 경자년(庚子年 1900)에 천문을 받고 신축년(辛丑 1901) 二월에 입산하야 七월 七일에 도(道)를 통하였는데, 그때 대원사(大元寺)에서 공부한 박금곡(朴錦谷)이 나의 수종을 들었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이니, 유불선 삼도(儒佛仙 三道)를 통합하느니라" 하시니 태운이 믿지 않음을 알으시고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시며 태운에게 신안(神眼)을 열어주사 신명들의 회산과 청령을 보게 하시니라. 7. 다음해 三월에 형렬(태운)이 동곡으로 이사하시니 선생님께서도 함께 기거하시니라. 하운동에 계실때 김자현이 우연히 다리에 습종이 돋아 몇년동안 고통을 하던차에 형렬이 자현의 집에 와서 "그동안 종기로 얼마나 고생하는가. 우리집에 강증산(姜甑山)이라는 사람이 와있는데 찾아뵙고 문병함이 어떤가"하니 자현이 반겨듣고 "다음날 찾아뵙겠읍니다" 하고 다음날 형열의 집으로 와서 선생님과 첫상면한 후에 문병하니, 선생께서 "내가 무슨 의원이며 나같은 사람의 말을 듣고 약을 쓰려하시오" 하시니, 자현이 가로대 "무슨 약이라도 가르쳐만 주시면 쓰겠읍니다" 하니 "그러면 집에 돌아가서 뒷산에 나는 창출 한되를 캐서 달이되 엿 다섯가락(白糖五分介)을 약탕관에 넣어서 함께 다려서 그 물로 상처를 씻어라" 하시기로 집에 돌아와서 씻으니 곧 나으니라. 8. 그후로 차차 연일 상종하여 사제의 의를 맺으니라. 그후로 차차 종도 수십인이 시봉하여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셨으나 대순전경(大巡典經)에 기입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천지음양조리(天地陰陽調理)에 관한 것만 기술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노라. |
성화진경(聖化眞經) |
1. 선생의 성은 강씨(姜氏)요, 이름은 일순(一淳)이요, 자는 사옥(士玉)이요, 호는 증산(甑山)이시니,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인 이조고종(李朝高宗) 신미년(辛未年) 9월 19일에 조선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全北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에서 탄강 하시니라. 2. 부친의 이름은 문회(文會)요, 자는 흥주(興周)이라. 모친의 성은 안동 권씨(安東 權氏)니, 고부군 마항면 서산리(古阜郡 馬項面 西山里)더라. 어느날 모친께서 친가에 근친(초행) 가셨다가 하루는 하늘이 남북(南北)으로 갈라지면서 큰 불덩이가 내려와서 몸을 덮침에 천하(天下)가 광명(光明)하여지는 꿈을 얻고 이로부터 임신하셔서 열석달을 경과하신 다음에 출산하실 때, 산실에는 향기가 가득하며 밝은 빛이 온 집안을 둘러 하늘에 뻗치더라. 그로부터 차차 자라심에 얼굴이 원만하시고, 솔성이 관후하시며 총명(聰明)과 혜지(慧智)가 남보다 월등하시므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경과 사랑을 받으시니라. 3. 나이 어리실 때부터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많으시사 나무심기를 좋아하시며자라나는 초목과 미물곤충(微物昆蟲)이라도 해하지 아니하시며, 또 위기에 빠진 생물을 보시면 힘써 구원하시니라. 4. 서당(書堂)에서 글을 배우실새, 한번 들으신 것은 곧 깨달으시고 학우들과 더불어 글을 지으실때 항상 장원(壯元)을 하시니라. 하루는 선생이 여러 학부형들로부터 미움을 사라하여 문장이 다음가는 아해에게 장원을 주려고 속으로 생각하고 글을 뽑았더니 또 선생에게로 장원이 돌아가니, 이는 선생이 스승의 속마음을 알으시고 문채와 글자 모양을 바꾸어 분별하지 못하게 하신 까닭이니라. 이렇듯 모든 일을 꿰뚫어 보심으로 보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더라. 그러나 가세(家勢)가 빈한(貧寒)하므로 학업을 일찍이 중단하시니라. 5. 이십사세(二十四歲) 되던 갑오년(甲午年ㅡ 1894年)에 충청도 연산(連山)에 이르사 주역(周易)을 연구하는 김일부(金一夫)에게 들리시니, 이때에 일부의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강사옥(姜士玉)과 함께 옥경(玉京)에 올라오라는 옥황상제의 명령을 전하거늘 일부 선생과 함께 천사를 따라 옥경에 올라 요운전(曜雲殿)이라 쓴 금궐(金闕)에 들어가서 옥황상제(玉皇上帝)께 배알하니 상제님이 선생님께 대하여 광제창생(廣濟蒼生) 하려는 뜻을 크게 칭찬하며 극히 대우하는지라. 일부 크게 이상히 느껴 이 꿈을 말한 후에 요운(曜雲) 이라는 도호를 지어드리고 몹시 경애하니라. 그러나 호.는 받지 않으시니라. 이로부터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각지를 전전유력(轉轉遊歷) 하시니, 선생의 혜식(慧識)은 박학(博學)과 광람(廣覽)을 따라 더욱 명철하며, 이르는 곳마다 신인(神人)이라는 칭송이 더욱 높으시니라. 6. 선생님께서 다년간 각지를 유력하며 많은 경험을 얻으신 후 신축년(辛丑 ㅡ 1901年)에 이르사 비로소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행할 권능을 얻지 아니하고는 뜻을 이루지 못할줄 깨달으시고 드디어 전주 모악산 대원사(全州 母嶽山 大願寺)에 들어가사 도를 닦으시니라. 겹겹히 쌓인 깊은 숙연을 닦으시고 드디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증득하시고, 미래 천급세상을 살피시니 차세는 오탁악세 말운, 인간들이 멸망당할 운세가 닥칠 것을 걱정하시고, 무궁한 조화의 법을 일일히 달통하야 혹 삼매(三昧)에 드사 부동정좌(不動靜坐)로 기일을 지내시기도 하시고, 정법에 나시여 풍운변화지법(風雲變化之法)을 혹은 시험도 하시니, 주지 박금곡(朴錦谷)이 차세에 천신이 강림하셨다 하고 선생님의 공부하시는 뒤를 일일히 편의를 보아주시고 곧 천신으로 대접하더라. 7. 김형열(金亨烈)이 무술년(戊戌年 ㅡ 1880年)에 주평(住平)에 왕래할 때에 서당에서 처음으로 선생을 뵈인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은 초립동이시라. 서당 학동들과 글도 지으시고 글도 가르쳐 주시고 또 서당에 있는 아해들 사주도 보아주시고 하실적에 형렬이 아무리 보아도 범상한 분이 아니시라. 많이 의심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항시 선생의 하시는 거동이 마음 가운데 은은하던 중 풍편(風便)에 들으니, 대원사에서 도를 증득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한번 뵈옵기를 고대하고 있던 가운데 하루는 원평 장날에 돈 한냥을 가지고 양식을 팔려고 장에 갔더니, 마침 고망하고 있었던 선생님을 만났는지라. 하도 반가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쌀 팔아서 권속 살릴 마음 간데없고 쌀 팔돈 한냥을 선생님께 노자하라고 드리니, 선생이 웃으면서 "나는 노자가 있으니 걱정말고 배고파 하는 권속한테 어서 쌀팔아가라" 하시기로 형렬이 더욱 죽기로써 돈을 올리면서 "만일 선생께서 이 돈을 받으시지 아니하신다면 저는 이대로 집이고 무어고 죽어서라도 선생님 뒤를 따르겠읍니다" 하고 죽기로 맹서하니, 그제야 선생께서 웃으시며 "자네가 권속앞에 죽겠으니 불가불 받겠네. 그러하나 쌀 팔아오기를 기다리는 권속 어쩌는가?" 형렬이 "예. 선생님이 돈 한냥을 받으시면 제가 마음이 좋아 생기가 나서 열냥이 당장에 생기겠읍니다" 선생이 "허허" 하시고 "그렇다면 받겠네. 그러하나 참으로 어려운 돈인데" 하시고 받으시는지라. 형렬이 돈을 올리고는 "저의 집이 누추하나마 머지않은 곳에 있아오니 하루밤 뫼시고자 하나이다". 선생께서 웃으시며 "돈주고 밥조차 줄라는가. 참 고마운 일이로고. 그러나 충청도에 볼일이 있어 가니, 갔다 돌아오는 길에 들릴 참이니 안심하고 어서 쌀팔 꾀나 내시오" 하시며 연연한 마음으로 형렬이 준 돈을 받아서 길을 떠나실 새, 형렬이 반가이 전송하면서 "꼭 오시기를 기다리겠읍니다" 하니 선생이 "그리하라" 하시고 떠나시니라. 8. 형렬이 쌀팔 돈을 선생님께 드리고 장도 보지 못하고 점심도 굶고 집에 가서 할말이 없어 더욱 빚낸 돈이라 빈 지게를 질머지고 집에 돌아가니, 쌀팔아 온다고 아내가 쫓아 나오는지라. 할말이 없어 "허허" 웃으면서 "돈을 잃어버리고 쌀을 팔지 못하고 왔다" 하니, 권속이 낙담하고 아내가 탄식하며 "아침도 죽을 먹인 자식들을 점심도 못먹였는데 저녁을 굶기면 어쩔까요. 어른이야 괜찮지만은 " 하고 가난만 탄식하고 기운없이 들어가는지라. 형렬이 보니, 한편은 반갑고 한편은 안되었는지라. 벗었던 지게를 다시 짊어지고 청도원으로 가니,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일을 하고 들어가는지라. 형렬이 헛버삼아 "집에 양식이 떨어져서 외상 양식을 얻으려고 장에를 갔다가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을 하지 아니하였기로 참아 볼수 없어 나오고 보니, 해는 이미 저물어서 뉘집으로 갈 수 없고 딱한 형편에 자네를 만났으니 나를 쌀 두되만 빌려주면 돌아오는 장에 팔아줌세" 하니, 그 사람이 길을 멈추어 서면서 "좋은 일이 있네. 내 사위가 쌀을 한섬 이곡으로 놓았다가 금년에 또 놓아서 달라기로 한섬을 놓았고, 다섯말이 남았으니 갖다먹고 가을에 일곱말 닷되를 주오" 하기로 어찌 반갑던지 잘못되면 어찌할까. 그 사람 말이 "집에 양식이 떨어지면 재수도 없나니, 먹어서 벌소" 하더라. 형렬이 "그래보세!" 하고 쌀 닷말을 짊어지고 생각하니 "이것이 왠일인가, 선생님 덕이로다" 하도 반가와서 어둔 밤에 노래도 부르고 배고픈 것도 간곳없고 단숨에 집에 들어가니, 밥 못하고 앉아있던 권속들이 지고온 쌀을 보고 깜짝 놀래여 "웬일이요" "이곡 닷말 얻어왔소" 아내가 하도 좋아서 "그 쌀 내가 베 나아서 갚으리다. 참으로 닷말이요. 참으로 우리 집이 잘될난가 보오. 여보시요. 돈 잃어버린 것이 복이 되었소" 하면서 권속들이 하도 반가와 하는지라. 그러나 형렬은 "우리 선생님이 오늘 저녁에 어디서 주무시는가? 언제나 또 만날꼬 " 하고 나날이 생각더라. 9. 하루는 선생님이 오셨는지라. 하도 반가와서 "선생님,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하니 가라사대 "여기가 제비창고라지?" "그렇읍니다. 어디서 들었읍니까?" "응! 촉나라 길이 험하다 하여도 한신이가 알더라고 천하사를 하러 다니는 사람이 제비창고를 모르겠나. 들어가자. 자네 집에 산고 들었지?" "어찌 아십니까?" "산하에 오니 말 한마리가 자네 집으로 들어갔네. 아들을 낳을 것이나 젖이 넷일 것이니 이름을 천리마(千里馬)라 지어주소" 하시고 가라사대 "두집이 망하고 한집이 흥하는 공부를 하려는가?" 형렬이 대답하되 "열집이 망해도 하겠읍니다. 열집이 망하고라도 한집만 성공하면 열집이 다 성공될 것이 아닙니까?" 선생께서 "그렇지. 자네 말이 옳네. 그러나 모두 자네 같은가. 어려운 일일세" 하시고 세번 다짐을 받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시어 방에 앉으시는지라. 그때 선생의 춘추는 삼십이세이고, 형렬의 나이는 사십일세라. 노소는 다를망정 차차 모셔보니 감히 앞으로 다니기가 황공할 지경이더라. 10. 그때 형렬의 내실에서 산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젖이 넷이더라. 그러나 산고만 들면 산모가 복통증을 일으켜서 한달동안 욕을 보는 산후병이 있었는데, 먼저 아해 낳을 때 증거가 있어 걱정이 되었는데, 다시 복통이 일어나서 죽는다는 소리를 치니 선생께서 탄식하시고 "인생의 고초가 저렇도다" 하시고 "약 두첩을 지어오라" 하시기로 지어다 먹였더니 거짓말같이 낫는지라. 산모가 하도 반가와서 선생을 뵈옵고 집에 오래 계시기를 간청하니, 웃으시며 "세상 사람은 자기가 먼저 좋아야 남을 생각하는 법이라" 하시고 흔연히 허락하시더라. 11. 형렬이 하도 신기하야 구릿골 친족이 다리가 아픈지 삼년에 만가지 약이 무효하야 다리를 영영 베일 지경에 있는지라. 친족집을 찾아가서 이 신효한 내력을 말하고 제비창고(夏雲洞)로 오라하니, 그 사람이 사양하면서 하는 말이 "나의 다리는 못고친다. 이미 파이(단념)한 터라" 오지 않겠다고 고집하는지라. 형렬이 가로대 "천의(天醫)가 오셨으니 꼭 오라" 하니, 생각해서 하겠다 하기로 돌아왔더니 며칠 후에 하루는 선생께서 코로 냄새를 맡으시며 "어찌 이런 흉악한 냄새가 나는가?" 형렬이 깜짝 놀래어 방을 쓸고 닦아도 또 코로 냄새를 맡으시며 "썩는 냄새가 이리 나는가?" 형렬이 밖으로 나가서 변소를 덮고 야단을 치는 중에 구릿골 사촌이 다리 아푼 사람을 지고 왔는지라. 땅에 내려 놓으니 뜰밑에서 하는 말이 "선생님. 살려주소서" 선생님이 보시고 "응. 저 다리가 오니 그런 냄새가 났도다. 나는 못속이지" 하시고 "내가 하늘님이든가" "아이고 선생님, 살려주소서" "음, 내가 삼신님인가. 점잖은 손님이 오면 떠시루가 오는 법인데 나같은 손님이 오니 썩은 다리가 들어왔네. 뒷산에 가서 창출 한되 캐고, 원평 장에 가서 엿 다섯 가래 사다가 찌여 부치라" 하시기로 당장 가서 창출을 캐고 엿 다섯 가래 사다 놓으니, 한 가래를 여식애가 먹었는지라. 할 수 없이 네가래를 찌여 붙였더니, 삼년이나 고생하던 다리가 불과 십오일 내에 씻은 듯이 낫는지라. 하도 반가와서 공양물을 준비하야 선생님을 배알하고 그 은공을 사례하니, 선생님이 반기시며 환부를 보신 후에 다리 흉터가 엿가래만치 나있는 것을 보시고 웃으시며 "엿을 네가래만 찌여 붙였으니 엿 한 가래가 다리에 붙었다" 하심으로 더욱 탄복하고 그날로 선생님을 죽기로 맹서하고 따르게 되었는지라. 12. 하루는 형렬을 불러 일러 가라사대 "형어상천형어지(形於上天形於地)요, 기양간자인생(其兩間者人生)이라.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야(萬物之中惟人最貴也)라. 천지생인하야 용인(天地生人用人)하니 불참어천지용인지시(不參於天地用人之時)면 하가왈인생호(何可曰人生乎)아"라 하시고, "세계대운이 조선으로 몰아 들어오니 만불실시(萬不失時) 하라. 그러므로 사람이 가름 하느니라. 남아가 출세하려면 천하를 능히 흔들어야 조화가 생기는 법이라. 이 세상을 신명조화 아니고는 고쳐낼 도리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형렬이 그와같은 말씀을 조금 의심하는 차에, 하루는 형렬을 불러 가라사대 "오늘은 천하신명을 제비창고로 몰아들일 참이니, 놀래지 말라. 제비창고 아니고는 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시고, 조금 있다가 형렬을 보고 "놀래지 말고 문밖을 내다보라" 하시기로 형렬이 나서서 볼라하니 "눈을 감고 보라" 하시기로 눈을 감고 바라보니 운무(雲霧)가 자욱한데 기치검극(旗幟劒戟)이 볕 저리듯 한데, 귀귀괴괴한 신장들이 말을 달리여 동구(洞口)로 몰아 제비창고로 달려드는 통에 어찌 놀랬든지 "그만 보사이다" 하고 눈을 뜨니, 선생님이 웃으시며 "무섭느냐. 거짓말 같제야. 일후에 제비창고를 보라. 구중궁궐이 삼대같이 들어선 뒤 정신 부족한 놈은 보기가 어려우리라. ㅇㅇㅇㅇ를 잘 기억하라" 그 후부터는 형렬이 신명 소리만 하시면 더욱 열열 복종하는지라. 13. 하루는 형렬을 보고 "쇠머리 한 개를 사오고 떡을 찌라" 하시고 "제비창고 일을 해야한다" 하시고, 감나무 밑에 음식을 차리시고 "만수"를 부르시니 이러하시니라.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 솔씨받아 소평 대평 던지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서 왕장목이 되었구나. 청장목이 되었구나. 태평전 대들보가 되어 어라 만수 어라 대신이야. 대활연으로 이땅으로 설설이 내립소사. 시도 여기서 일어나고 종도 여기서 마치리라" 하시고, 금산사를 넘어다 보시고 "여기를 큰집으로 할까. 여기를 적은 집으로 할까. 제비새끼 치는 날에 제비창고 가득찰거라" 하시고 쇠머리를 땅에 묻으시니라. 14. 하루는 형렬이 선생님 출세 기일을 물으니 "응" 하시고 "나의 말을 듣기가 어렵다" 하시고 "잦히고 눕히고 엎치고 뒤치고 되려치고 내치고 이리돌리고 저리돌리고 알겄느냐. 똑똑히 들어 두어라. 내가 서천서역 대법국 천개탑으로 나렸다가 경주용담 구경하고,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에 삼일유련(三日留連)하고, 고부 객망리(古阜 客望里) 강씨문에 탄생하야 경자년(庚子年)에 득천문하고 신축년(辛丑年)에 대원사에서 도통하고, 임인년에 너와 상봉하고 계묘년(癸卯年)에 동곡에 들었노라. 나의 말은 쌀에서 뉘 가리기와 같으니라. 알기 쉽고 알기 어렵고 두가지다. 알아 듣겠느냐". 15. 하루는 형렬을 불러 가라사대 "자네는 천하명의 말을 듣겠는가, 조선명의 말을 듣겠는가? 천하명의 말을 들을테지" 하시고, "지인지감 김형렬(知人知鑑 金亨烈)"이라 하시고, 또 김준상을 불러 가라사대 "자네는 나보다 나은 사람일세. 자네를 찾아야 나를 알게될 참이니, 나보다 낫단 말일세" 하시니라. |
정영규(丁永奎)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 |
제1장 천강인세(天降人世) 一 구천(九天) 태을내원궁(太乙內院宮)에 상제(上帝)계시드니 이마두(利瑪竇)가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들로 더부러 인류(人類)와 신명계(神明界)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상제께서 서천서력대법국(西天西域大法國)천계탑(天啓塔)에 강림(降臨)하사 삼계(三界)를 둘러보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母岳山)금산사(金山寺)미륵금상(彌勒金像)에 임어(臨御)하여 삼십년(三十年)을 지내실세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최수운(崔水雲)에게 내려 대도(大道)를 세우게 하였드니 능히 유교(儒敎)의 테(圈)밖에 벗어나 진법(眞法)을 들쳐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표대(表對)를 지으며 대도(大道)의 참빛(眞光)을 열지 못함으로 드디어 갑자년(甲子年)에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거두시고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 하시니 인신하강(人身下降)하신곳은 조선국(朝鮮國)전라도(全羅道)구부군(古阜郡)우덕면(優德面)객망리(客望里)강씨문(姜氏門)에 단군기원(檀君紀元)사천이백사년(四千二百四年)이요 이조(李朝)고종팔년(高宗八年;辛未)구월(九月;戊戌)십구일(十九日;丙午)영시(零時;戊子)에 이신화인(以身化人)으로 진주강씨(晋州姜氏) 성(姓)을 갖으시고 명함(名啣)을 일자(一字)순자(淳字)로 쓰시며 아호(雅號)를 증자(甑字)산자(山字)라 쓰시니라 재세(在世) 삼십구년(三十九年)에 유시(幼時)로부터 신이(神異)하심과 성철(聖哲)하심은 고금(古今)에 초유(初有)하시고 만방(萬方)에 극존(極尊)하사 신축년(辛丑年/檀君紀元 四千二百三十四年)으로부터 기유년(己酉年) (檀君紀元四千二百四十二年)까지 구년간(九年間)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시여 다한(盡)선천(先天)의 운수(運數)를 닫으시고 무궁(無窮)한 후천(後天)의 운도(運度)를 열어 천지(天地)를 개벽(開闢)하시니라. 二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함은 선천(先天)수만년(數萬年) 동안 쌓여 온 인신(人神)의 원한(寃恨)을 풀어 해원(解寃)시키고 그릇된 모든 류기(謬氣)를 뜯어고쳐 인신만행(人神萬行)의 상극(相剋)을 상생(相生)으로 조화(造化)하며 천지(天地) 은현만리(隱現萬里)와 인간(人間)만사(萬事)를 도리(道理)에 맞게 도수(度數)를 제정(制定)하심으로 새 도수(度數) 돌아 닿는대로 신기개척(新機開拓)의 조화대운(造化大運)이 열리니 이로써 무위이화(無爲而化)하시고 무언이교(無言以敎)하실세 이를 일러 오만년(五萬年)선경(仙境)건설(建設)의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하시니라 三 상제께서 아홉살 되시던 해 후원(後園)별당(別堂)에 거처(居處)하시다가 문득 어디로 나가시였더니 돌아오신후 외접(外接:남의 동내에서 운영하는 書堂)에 다니시더라. 어느날 훈장(訓長)이 학동(學童)들에게 글(詩)을 지으라 하며 운자(韻字)를 부르니 놀랠경자(驚字)였더라 훈장(訓長)의 운자(韻字)가 떨어지자 곧 붓을 들어 종이에 글(詩)을 써 들고 크게 한번 읽으시니 그 글(詩)에 이르기를 遠步恐地拆(원보공지탁)이요 大呼恐天驚(대호공천경)이라 하시더라 譯 遠步恐地拆(원보공지탁):걸음을 멀리 뛰려하니 땅이 찢어질까 염려되고 大呼恐天驚(대호공천경):큰 소리로 부르짖자니 하늘이 놀랠까 염려스럽다 하심이더라 四 어느날 서당에서 공부하시다가 글을 써서 벽에다 붙이시니 그 글에 이르기를 明朝有客是何人(명조유객시하인)고 必是西來柳瑞九(필시서래유서구)라 하시였더라 이 글을 본 훈장이 누가 여기에 글을 써 붙였더냐하고 학동들에게 물으니 학동들이 대답하되 강(姜) 아무개가 썼읍니다 하는지라.훈장이 괴이하게 여기더니 그 이튿날 아침(朝)에 과연 유서구(柳瑞九)가 이르거늘 훈장이 깜짝 놀래 비록 자기가 가르치는 학동이나 상제님앞에서는 극히 조심했다하니라 譯 明朝有客是何人(명조유객시하인):내일 아침에 손님이 있으리니 이는 어떠한 사람인고 必是西來柳瑞九(필시서래유서구):반드시 이는 서쪽으로부터 오는 유서구(柳瑞九)리라 하심이더라 五 갑오년(甲午年) 가을 어느날 꿈을 꾸시니 하얀 백발노인이 찾아와 드릴 말씀이 있다하며 문밖에서 고하거늘 문을여시고 맞이하여 대좌하니 노인이 인사를 청하여 가로대 나도 후천의 진인(眞人)이라 그러므로 후천의 무위기추(無爲機樞)를 알고자 찾아 왔음이라 하며 여러가지를 문의(問議)한 후 상제께 인사하고 표연(飄然)히 가니라 六 고부 본댁에서 진주강씨 종문에 전하여 내려오던 진천군(晋川君; 君은 임금의 친족이나 공훈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奉爵이라)의 교지(敎旨)에 박혀있는 어보(御寶:옥새玉璽)의 인(印)자리만 오려서 옥식기(玉食器)에 담고 또 엽전(葉錢)을 담은 후에 복직개(蓋)를 덮고 붉은 보자기에 싸서 어경(御頸/목)에다 거르시고 두 어수(御手/손)로 식기(食器)를 싸쥐고 위 아래로 뒤집어 가며 흔드시니 엽전(葉錢)소리가 딸그락 딸그락하여 흡사 요령(鐃鈴)흔드는 소리와 같더라 이와같이 소리를 내시며 천음(天音)을 크게 하여 가라사대 도통줄(道通乷)나온다 도통줄((道通乷)나온다 하시면서 진법주(眞法呪)를 외우시며 손바래기(客望里)로부터 도득골(道得谷)을 거쳐 샘이넘어로 돌아 시루봉을 주야로 오르내리시더라 이와같이 수년(數年)을 계속하시니 이때에 부근(附近) 십여리(十餘里) 산천(山川)이 울리여 그 근동(近洞)사람들이 공포증이 들어 밤에는 대문을 일찍닫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여 인적이 없었다고 전하니라 七 경자년(庚子年)으로부터 신축년(辛丑年)유월(六月)초생(初生)까지 고부 객망리 시루봉에 앉아 계실때 샘이넘어에서 머리를 풀어 흐트리시고, 시루봉에 오르시어 때로는 크게 우시니(痛哭)그 우시는 항성(吭聲)은 산천을 울리어 산이 우는지 상제께서 우시는지 분간(分看)할수 없으며 근동(近洞)사람들은 늘 두려움증(恐懼)이 자연히 들더라 하니라 때로는 산을 내려오시어 유덕안(兪德安)의 집에서 서목태(鼠目太)한줌을 얻어 냉수로 잡수시고 올라가 앉아 계시더라. 八 하루는 근동 나뭇군들이 나무를 하려고 시루봉을 넘어 가려다 보니 시루봉 위에 큰 대호(大虎) 한마리가 앉아 있거늘 나무군들이 대경실색하여 마을로 도망쳐 내려와 사실을 동내 사람들에게 전하니 사람들이 놀래며 말하기를 그 곳에는 증산(甑山)이 앉아 있는 곳이거늘 필시 그 범으로부터 해를 당했으리라 그러니 이 괴변을 속히 증산의 부친에게 알려야 하겠다 하며 그 부친께 전하니 부친께서 이를 갈며 산으로 올라가시더라 성부(聖父)께서는 기골(氣骨)이 장대하시고 양팔이 무릎밑에까지 내려가며 입은 쭉 찢어진 범(虎)의 상으로써 씨름판에 가면 두루마기 앞자락을 허리 뒤에다 꽂고 씨름판으로 들어가 집어 던지는 장사로써 호환(虎患)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분기충천(忿氣衝天)하여 홀로 산에 올라가시더라 마을 사람들은 장정을 동원하여 몽둥이를 가지고 시루봉에 올라가니 범은 없고 상제께서 홀로 앉아 계시더라 하니라 후일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내가 시루봉에서 호둔(虎遁)을 하고 바라보니 세상 사람들이 돼야지나 개 짐승들과 같이 허약해보이니 범을 그대로 풀어 두었다가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있으리라. 그러므로 종자만 남기고 없이 하노라 하시니 이는 이때의 호둔(虎遁)을 말씀하심이니라 九 오래동안 시루봉에 계시니 고부 원근에 소문이 퍼져 나가기를 증산(甑山)이 공부를 하는데 차력(借力)이 솟아나고, 둔갑(遁甲)도 한다하니 이 소문이 점점 커져 관부(官府)에 까지 전해져서 관부로부터 순검(巡檢)들을 내보내니라 이때는 갑오년(甲午年)동학(東學)의 거사(擧事)가 있은후라. 관부(官府)에서 단속이 심히 엄중한 터에 그런 소문(所聞)이 나도니 순검(巡檢)들은 혈안이 되여 증산을 잡으려하나 그럴 때면 먼저 알으시고 순검이 오는 길가에서 삿갓을 쓰고 앉아 계시되 순검들은 범연(凡然)히 지나가 버리니라 또 어느때는 안개를 심히 지어서 지척(咫尺)을 분간치 못하게 해놓고 옆으로 지나시나 순검들은 모르고 지나쳐 버리였다 하더라 十 신축년(辛丑年) 유월(六月)초사흩날(初三日) 고부 시루봉에 오르사 이칠일간(二七日間)을 계실세 하루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거늘 정부인(鄭夫人)이 점심(點心)을 올려야 하겠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할 수 없어 밥함지(函支)를 이고 첨하(檐下)끝을 나오려 하였을 뿐인데 문득 시루봉 공부막(工夫幕)앞이거늘 점심 갖어 왔음을 고하고 공부막(工夫幕)에 들어서는 순간 앞에서 함지(函支)를 받아 내리기에 바라보니 상제님이시더라. 그제야 정신을 차려보니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더라 하니라 이때 시루봉에 계시다가 유월(六月) 열엿샛날(十六日) 시루봉을 떠나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願寺)로 들어가실세, 좌우에 동서양 각국의 제왕신(帝王神)과 이십사장(二十四將)들이 호위(護衛)하여 따르고 상공(上空)에서 외쳐 가로대 만국천자(萬國天子)강천자(姜天子)가시노라 하고 이치며 따르나 듣지 못한듯 대응치 않고 대원사로 가시었다 하시더라 |
법상종(法相宗)에 구전(口傳) |
증산대성(甑山大聖)께서 성도(成道)하신 후, 서기(瑞氣)를 따라온 것이 안동김씨 재실(齋室) 제비창고였으며, 증산대성께서는 태운(太雲)에게 ‘다른 사람은 제자가 스승을 찾아오지만, 나는 스승이 제자를 찾아왔네’ 하며, 형렬에게 ‘박금곡(朴錦谷)과 서울 단군교의 곽법경(郭法鏡)을 데려 오라’ 하셨다. 이렇게 삼인(三人)이 증산대성을 모시고 시작하였다. 이때 증산대성께서 읽어주신 문명(文明)은 다음과 같다. 삼인동행칠십리(三人同行七十里) 오로봉전이십일(五老峰前二十一) 칠월칠석삼오야(七月七夕三五夜)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 - (미륵불교사 彌勒佛敎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