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1864-1920)는 누구인가
1. 막스 베버는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1918년까지 진행된 ‘독일제국’과 그 삶이 일치한다. 독일 제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하에서 급속도로 봉건적 잔재를 떨쳐내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성취하려 시도하였다. 그 과정은 전통적인 토지 귀족인 ‘융커’ 계급의 독점적 지위와 관료들의 행정적 힘을 활용한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적인 개혁정책이었다. 베버 또한 독일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다. 그는 새로운 근대성을 시민계급의 성장에서 발견한다. ‘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닌 시민들의 전문적 영역으로의 확산과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전문성’ 강화가 새로운 근대 세계의 이상적 모습을 실현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2.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강연과 글을 통해서 ‘전문성’을 강조한다. 학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추상적인 세계관을 남발해서는 안 된다. 학자들은 미래를 재단하거나 충분한 근거도 없이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상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인과관계를 살피며 이러한 과정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을 불사할 뿐 아니라 자신의 스승을 넘어서는 일명 ‘아버지 살해’를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학문’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척도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접근을 거부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버는 ‘예언자적’ 교수들은 강단에서 떠나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3. 베버의 ‘전문성’에 대한 중시는 이론과 실천, 학문과 정치에서도 독특한 접근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베버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실천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과 비교했을 때, 베버는 지나치게 이론적 측면에 집중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베버는 결코 실천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우선은 이론과 실천을 분리해서 접근해야 하며, 충분한 이론적 성취를 이룬 후에 실천과 접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베버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학문적 활동에서 보여주었다. 베버는 <독일사회학회>를 설립하여 ‘가치중립’적인 사회학 연구를 시도하고,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의 공동작업을 이끌었다. 일종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집중이다. 반면 <독일사회정책학회> 활동을 통해서는 이론을 구체적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정책의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던 것이다. 베버가 강조한 것은 충분한 이론적 근거도 없이 떠버려지는 ‘실천’의 허구성에 대한 경계였다.
4. 베버의 학문적 활동은 ‘시민계급’적 사고에 제한되지 않았다. 부르주아적 시민계급의 위상과 역할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개혁의 관심을 가졌지만 단일한 사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자’나 유대인의 교수 채용을 거부하는 정부와 대학 당국을 거칠게 비난했으며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이런 사람들의 채용을 응원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이 운영하는 학회지에는 사회주의 학자들을 편집진으로 초빙하여 학문의 편협성을 극복하려 시도하였다. 비록 사고의 변신을 갖지는 않았을지라도 다른 생각을 포용하는 ‘다신주의적’ 신념을 공유했으며 사상적으로 비난했을지라도 인간적으로는 후원하는 인간적 관계와 학문적 엄격성을 철저하게 분리하였던 것이다.
5. 베버는 어쩌면 다양한 학문이 통합적으로 운영되는 ‘학제적 통합’에서 특정의 전문적 영역을 강조하는 현대적 학문으로의 전이 과정에 서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버는 법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지만, 경제학적 연구를 접목시켜 학문의 세계를 확산시켰으며 결국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을 수립하고 완성하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베버는 ‘문화과학’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 가능했으며 이러한 베버의 학문적 활동은 당시에는 특별한 성격이 아니었다. 베버 뿐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이 이렇듯 인접한 학문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의 학문은 철저하게 전문화되고 인접 영역의 접근을 막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학문의 깊이가 달라지고 정보의 양이 방대해진 영향도 있겠지만 베버가 강조한 ‘전문성’이 더욱 중시된 결과는 아닐까 추측해본다. 베버는 ‘통합적’ 학문을 통해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지만 이런 활동을 종지부시킨 최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6. 베버의 말년의 관심은 사회적 현상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췄다. 근대성을 대표하는 자본주의, 국가, 관료제, 시민 등에 대한 이해를 중시했다. ‘이해’는 다양한 요소들의 인과관계 뿐 아니라 연구 대상에 대한 윤리적, 정치적 태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것이다. 베버의 대표적인 저작인 <프로텐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원리와 다양한 역학적 힘의 관계를 파악하려 했다면 베버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세력이 갖고 있는 내면적, 윤리적 태도의 힘에 초점을 맞췄다. 자본주의는 단지 물리적 요소들이 작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7. 베버의 인간적인 면을 살펴본다면 권위적인 것에 대한 저항, 여성에 대한 열린 태도, 인간과 사고에 대한 개방성 등을 들 수 있다. 아버지의 권위적인 성격에 고통받던 어머니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던 가운데 촉발된 아버지와의 극심한 갈등과 싸움은, 결국 화해를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것은 베버의 남은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베버가 베를린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나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도 권위적인 행정가들이 지배하는 베를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베버의 성향은 여성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아내 또한 저명한 여성운동가가 되게 만들었다. 베버는 자신의 아내를 사상의 동반자라고 불렀으며 이런 태도는 평생 유지되었다. 베버가 말년에 집에서 개최한 일종의 사교모임인 ‘베버서클’은 어떤 이념이나 직위, 나이에 따른 배제가 없는 자유롭고 개방된 모임이었다. 이런 모임을 통하여 다양한 사상가들은 대화와 논쟁을 통한 사상의 자유를 만끽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여성들도 독립된 자격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었다.
8. 베버는 새롭게 성장하며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 즉 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 인물일까? 아니면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근대적 세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끌어내고 제시한 인물일까? 베버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적 사상과 함께 현대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시민계급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중요한 개념일 것이다. 오늘의 독서는 ‘베버’에 대한 개략적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합리성과 근대성 그리고 관료제에 관한 피상적인 개념으로만 파악된 베버의 종합적인 측면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이제 그의 사상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이 시작되어야 한다. 비록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읽었지만 그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독서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베버’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첫댓글 학문의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