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코미디, 우스운데 슬픈 이유
최현주, <사진으로 詩를 읽다 - 13>, 월간 사진예술, 2013년 1월
웬만하면 빼놓지 않고 보는, 그러니까 요샛말로 ‘본방사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KBS 2의 <개그콘서트>죠. 아시다시피 지난 해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유행어란 유행어는 거의 개콘에서 나왔지요. 덕분에 그동안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개그맨들이 광고모델 1순위가 되었어요. 김연아, 이승기가 등장하던 가전 광고에도 개콘의 귀여운 카리스마 뚱뚱이 김준현이 나오죠. 광고비 많이 쓰는 걸로 따지면 무서울 것 없는 요즘 통신사들도 앞 다퉈 ‘네 가지’ 멤버들과 모델 계약을 하고, 보일러 회사에서도, 식음료 회사에서도 그들을 모셔가느라 바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궁금하면 500원!”. “우리는 용감한 녀석들”, 따위의 개그 유행어들이 폭죽처럼 터져요.
일요일 저녁 9시 20분, 나는 TV를 켭니다. 저녁도 먹고 배도 부르니 느슨해져서, 보통은 삐딱하게 누워서 보죠. 저런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나는 종종 감탄하죠. 비스듬히 누웠다 일어나 혼자 폭소를 터트리기도 하구요. 그들의 일상 관찰력은 세밀하고, 그들의 표현력은 적확하고도 새로워요. 지난 주 시청자들의 반응을 이번 주 방송에 바로바로 응용해서 ‘써먹는’ 고난도의 순발력도 발휘하죠. 드라마처럼 디테일한 배경 세트가 없어도 지들끼리 무대에서 모든 것을 다 소화해내는 상황 설정 능력과 연기력은 정말 놀랍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내가 개콘을 좋아하는 이유는 ‘개그는 개그일 뿐, 오해하지 말자’고 부르짖는 다른 예능 프로그램과 이들이 대척점에 서있다는 거지요. 개그는 개그(그러니까 단순히 웃기려고 내뱉는 농담이나 몸짓)일 뿐이 아니라, 개그는 살아있는 우리들의 일상이고, 우리한테 일어나고 있는 사회현상이며,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오늘날의 정치라는 것을 이들은 알려줍니다. 경제도 팍팍하고 세상 살기도 힘든데, 엉뚱한 흰소리나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로 킬링 타임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장 생생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드는 것이 마음에 들어요. 물론 웃음이라는 가장 신선하고 환영받을 만한 재료로 충분히 맛을 냈으니 생짜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지요. 이들의 소재에는 한계가 없어요. 얼마 전에는 새로 시작한 꼭지 ‘갑을컴퍼니’는 조직과 조직뿐만 아니라 개인과 개인조차 ‘갑’과 ‘을’이 되는 사회를 우스꽝스럽게 비틀고, ‘불편한 진실’은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여전히 왜곡된 이미지들을 눈앞에 펼쳐 보이죠. 남녀관계, 엄마와 딸의 관계조차 알고 보면 우리 사회가 설정해둔 고정된 역할 이미지라는 것은 은연중에 말해주죠. 인기 없거나 촌스럽거나 키가 작거나 뚱뚱한 네 남자들의 하소연은 우리가 소외시켰던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래, 나 키가 작은 남자야.” 라며 스스로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말문을 여는 이들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회를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스스로를 부정해서 긍정의 아이콘으로 바꾸죠. 그래요. 이들이 마지막에 던지는 “무시하지 마라, 이래봬도~”라는 말 속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긍정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한 힘이 있어요.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라고 노래하는 ‘용감한 녀석들’에 이르면, 개그는 웃음이 아니라 차라리 절절한 위로와 격려로 변하지요. 이건 개그 한 꼭지 한 꼭지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장편소설(掌篇小說))’이예요.
개그 혹은 코미디라는 장르가 오랜 시간 우리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웃겨서’는 아닐 것예요. 웃기지만 ‘애처로워서’, 웃기지만 ‘슬퍼서’ ……. 개그나 코미디의 배후에는 늘 뜨거운 연민이 있죠. 때로는 어설프고 때로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TV 앞에 바싹 다가앉게 되는 건 이들의 페이소스에 나도 모르게 공감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가 조습의 신작 <달 타령>은 분명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개그나 코미디죠. 나는 잠시 혼자서 상상을 해봐요. 2013년 봄, 개콘의 새로운 꼭지에 ‘달 타령’이 추가되는 것을요. ‘타령’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생각을 말이나 소리로 나타내 자꾸 되풀이하는 일’이죠. 우리 주변에선 종종 ‘돈타령’, ‘술타령’ 등으로 쓰이지요. 그러고 보면, 매주 똑같은 유행어에 의탁해 우리 사회의 현상을 개그로 자꾸 되풀이하는 개콘도 일종의 타령이라 할 수 있겠네요. 개콘이 우리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와 사회정치 현상을 요소요소 세심하게 들여다보긴 하되,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희화화하는 대신, 불편하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양념을 함으로써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고 있다면, 달 타령은 현대사회의 권위와 개발과 소외의 문제를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연출해 한 장의 이미지로 완성하죠. 조롱과 풍자는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자들의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힘없는 서민들의 소유물이었으므로, 달 타령도 대도시의 개발에 밀리고 쫓겨나 서러운 서민들을 향하고 있어요. 조롱과 풍자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죠. 그래서 달 타령은 힘든 노동을 끝내고 기껏 여가생활이라고는 TV 앞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 거의 전부인 우리 사회 서민들에게 바치는 웰메이드 개그예요. 재미있고 우스꽝스럽지만 천천히 되짚어보면 왠지 콧등이 시큰해지는, 슬프고 애달픈 개그.
사진가는 매번 자신을 분장하죠. 이번엔 달 타령의 주인공 ‘학(鶴)’이 되었군요. 학, 두루미목 두루미과에 속하는 조류 말이예요. 예전엔 신선을 등에 태우고 다니며 구름, 소나무, 불로초 등과 함께 불로장생하는 영물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옛 그림에나 등장하고 산세 좋은 시골에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천연기념물이 되었죠. 가엾기는 도시의 서민들이나 매한가지죠. 게다가 늘 엉뚱하지만 몹시 끈기 있고 날카로운 사진가의 연출 덕분에 학은 도시에서도 자연에서도 마음 놓고 날아다니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로 분(扮)했어요. 저 삐죽삐죽한 깃털 좀 보세요. 키만 장대처럼 컸지, 먹이사냥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단장을 한지도 꽤나 오래 됐을 것 같은 불쌍한 몰골, 오래되어 마을 어귀에 버려진 자개장롱 문짝에서 겨우겨우 탈출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는 비틀비틀 누군가의 부축을 받고 있어요. 그런데 옥상에서 안전모를 쓰고 있는 저이는 누구일까요?
다음 사진을 보세요. 이번엔 학이 누군가를 업어 주고 있군요. 저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머리꼭대기 붉은 깃털 학이지만, 붉은 심장만큼은 누구보다도 뜨겁기 때문이겠죠. 저이들은 어둑어둑해진 저녁, 귀가하는 사람들이예요. 연립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언덕길의 집, 으스름한 전봇대를 지나 개발 광풍이 불어 닥친 폐허 같은 동네, 자세히 보면 등장인물은 다리 한쪽이 없거나 의수를 한 자들이예요. 무언가 결핍된 자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자들이라는 것일까요? 학은 저들을 업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또 자신이 부축을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죠. 저들과 학은 어쩌면 똑같은 존재들인 모양이예요. 그래서인지 이 사진들은 뜨끈한 밥공기를 품은 것만 같아요. 어머니가 담요 아래 묻어둔 그런 밥공기, 뒤돌아서면 괜히 슬퍼지고 서러워지는 그런 풍경요.
‘홍수’라는 제목을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작품에 이르면 사진가의 달 타령은 절정에 이르죠. 뒤죽박죽 떼로 나와 시끌벅적 소란을 피우며 웃음 한 뭉치를 던져주고 이내 무대 뒤로 사라지는 개그처럼, 저 기묘한 인간 군상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져요. 배를 움켜잡은 임산부도 보이고,
애인을 만난 군인도 보이고, 상복을 입은 상주도 보이고, 아, 저 오른쪽 꼭대기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자는, 저승사자? 왼쪽 아래 땅바닥에 깔려 혼절한 듯 누워있는 자는, 예의 그 학이군요! 저마다 아귀다툼에 아수라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 저승사자도 있고 임산부도 있고 군인도 있고 상주도 있고 노동자도 있어요. 홍수처럼 떠밀리며, 또 서로를 홍수처럼 떠밀어가며, 나는 이 사진 속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을 향해 겨누었던 풍자의 시선이 어느새 우리들의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느껴져요. 그 안에 사진가 자신도 있죠. 자신의 밖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롱이면서 반성이고, 날카로우면서 따뜻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처롭죠. 이것이 개콘처럼 내가 이 사진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이 사진의 끝에 나는 시 한 편을 읽어요. 학처럼 우리 함께, 달 타령처럼 타령 타령하며, 당신도 같이 읽길 바라요.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다가오지 마라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수분과 기름기가 엉겨붙어
숨을 쉬는 사람이다
순하디 순한 녹말덩어리가
파랗게 살아나서
독을 품고 살아나서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모름지기 운칠기삼이다
나는 개돼지를 막대기로
두들겨 패는 사람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오르고
또 오르는 사람이다
까마귀는 겉이 검다고
백조는 속이 검다고 비웃는 사람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고
쩝쩝 입맛을 다시는
사람이다
감자가 햇볕을 보고는
파랗게 독이 올라서
싹이 나서 잎이 나서
어차피 운칠기삼이다
나는 하루에 세 번
반성하는 사람이다
감자전을 부쳐 먹고
감자탕을 끓여 먹는 사람이다
순하디 순한 감자만 골라서
갈아서 으깨서 먹는 사람이다
돼지 뼈다귀를 고아 먹고
미꾸라지를 갈아서
체에 받쳐 먹는 사람이다
차가운 소주를 마시고
달콤하게 쓰러지는 사람이다
삶은 감자처럼 숟가락으로도
으깨지는 사람이다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어른 주먹이 우는 것처럼
- 박순원, <주먹이 운다> 全文
순하디 순한 녹말덩어리로 살다가, 파랗게 살아나서, 독을 품고 살아나서, 그래도 어차피 운칠기삼이라고 몇 번이나 읊조리며, 그래도 힘을 내려고 돼지 뼈다귀를 고아 먹고, 미꾸라지를 갈아서 체에 받쳐 먹기도 하고, 하루 세 번 반성도 하면서, 그래도 속절없는 이 삶 때문에 소주를 마시며 타령을 하고 있는 이 시인의 모습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요? 세상을 향해 주먹을 내보이다가, 아차, 주먹만 한 감자 하나를 먹이는, 아니, 감자만한 주먹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는 시인이라니, 순수하고 고결하게 세속에 대한 초월을 노래하며 꽃이 하늘을 음풍농월하는 딴 세상의 시인이 아니라, 그렇게 지지고 볶고 쓰러지고 물고 또 독을 품고 으깨지면서도 끝끝내 살아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군상들 속 한 사람, 저 사진 속의 학, 아니, 거울 속의 나, 바로 당신 말이예요.
첫댓글
출첵!!!
조습 사진작가(1975~ , 충남 온양)
- 경원대 대학원 회화과, 경원대 미술대 회화과
- 한국사회의 부조리함과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의 부정적 시대상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 1999년 사이버 미술종교 조직인 '명랑교'를 내세우며 심각한 사회문제, 사회적 사건들을 '유머'와 '명랑'이라는 가벼움의 미학으로 표현한다.
박순원 시인(1965~ , 충북 청주시)
- 고대 국문학과 박사, 광주대 교수
- 2005년 계간지 '서정 시학' 등단(신인상 수상)
- 시집 <그런데 그런데>(2013), <주먹이 운다>(2008)
출첵합니다.
출첵합니다~
가장 연약한 여인 삶은 감자처럼
숟가락으로도 으깨지는 사람
차가운 소주를 마시고
달콤하게 쓰러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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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연약한 여인
공감백#+++입니다.